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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성령의 실재성 연구: 몰트만의 쉐키나(שכינה)와 인격을 중심으로/심영수. 평택大

 

I. 서론

 

삼위일체의 성부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과 우주의 경험으로부터 그 놀 라운 창조와 질서로부터 존재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동 일하게 성자 하나님은 성육신으로서 지상적 삶의 증언들을 통하여 그 존재를 인식하기에 어려움이 없다.1)

반면, 제3위인 성령2) 하나님은 강한 바 람, 태풍, 폭풍, 힘, 생명의 숨 등 인간의 언어로 기술하는 여러 모습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실재하는 인격(Person)을 인식하는 것 이 늘 직관적이지 않다.3)

그렌츠(Stanley J. Grenz, 1950-2005)는 복음주의 교회론을 두고 너무 많은 영역에서 불일치가 지배적이며 그만큼 교회론 도 많다고 정당하게 적시한다.4)

이러한 불일치는 곧 구원, 즉 예수의 신성 에 관한 것과 성령의 인격과 활동5)에 관한 것의 차이이기도 하다.

예를 들 어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은, 네덜란드의 개혁파 조직신학 자 베르크호프(H. Berkhof, 1914-1995)가 성령은 단지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에 해당하며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적 표현이 라고 한 형식적인 삼위일체론을 정당하게 비판한다.

몰트만은 이것은 간 단히 이위일체로 환원되고 궁극적으로는 단일한 군주론적 관념6)에 이를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1)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그리스도 논쟁을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존재론적 증명의 다툼, 경험에 의지한 우 주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증명, 래쉬달(Hastings Rashdall, 1858-1924)의 도덕적 증명, 심지어 지적 무신론 등장과 같은 유한한 이성의 논쟁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2) the holy spirit(거룩한 영, 성령)은 구약의 시편 51:11부터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특별한 경우 외는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지 않고 성령이라 칭할 것이다.

    3) 성령의 존재나 형태에 대한 규범은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관계에 있어 심리학적 순행 간섭 (Proactive Interference)이나 역행 간섭(Retroactive Interference) 현상에 해당하지는 않는지 의 문을 제기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정당하다. 베르크호프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몰트만은 성령의 인격성은 단지 주장될 뿐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4)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a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전대경 역, 『복음주의 재조명』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41-42.

    5) 헨드리는 성령에 관하여 글을 쓸 때 현대 교회의 사고와 삶 속에 이 교리를 경시하고 있는 현실 을 한탄하였다. Goerge S. Hendry, The Holy Spirit in Christian Theology (Philadelphia: Westminster, 1965), 11. 그렌츠는, 이후 성령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급증하였다고 말한다. Stanley S.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신옥수 역, 『조직신학』 (파주: CH북스, 2021), 525.

    6) 사벨리우스는 로마에 와서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님의 순차적 경륜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며 성부 시대, 성자 시대, 성령 시대(교회 시대)와 같이 역사를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이해할 뿐 성령의 구분 과 인격성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성부와 성자, 성령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함께 역사함을 보지 못 했다. 

 

이 글의 과제는 성령의 인격적 실체에 대한 인식적 어려움 속에 관념 이 아닌 실재로서의 성령의 인식 가능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부 신학의 이위일체론 관념 나아가 군주론적 관념의 가능성을 배척할 수 있으며, 전통적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선언과 같이 구분되나 분리되지 아니한 ‘동일한 하나님 본질’(ὁμοοὐσία)을 가진 한 인격적 실 재가 증명되는지 논할 것이다.

이를 위해 베르크호프를 비판한 몰트만 자 신의 성령론에서 그 목적이 어떻게 달성되고 있는지 규명함으로써 성령 의 실재성 또는 그 실체7)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려고 한다.

몰트만의 성령론 흐름은, 󰡔희망의 신학󰡕에서는 성령을 종말론적 미래의 보증이며 능력 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는 세계 고난의 현실에 참여하고 해 방하는 역할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는 성령의 독자성과 인격의 역할에 대한 균형적 강조를, 󰡔생명의 영󰡕에서는 통전적·조직적 이 해를 시도하여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 성령론을 전개하였다고 이해되기도 한다.8)

이 글은 󰡔생명의 영󰡕에 나타난 몰트만의 총체적 성령론의 주장을 주 대상으로 한다. 관련되는 사항이 있을 경우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 라󰡕, 󰡔창조 안에 계시는 하나님󰡕 등 이전의 저작들에 나타난 성령론도 살 핀다.

이 작업은 성령이 교회 전반에 강조되고 있는 현실9)에(세계의 기독교도 같다), 믿음 대상의 본질을 재확인하는 의미도 있다.

 

    7) 실재라는 용어는 가상, 부재,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개념들과 대립된다. 가상적이지 않고 실재한다면 존재는 본질, 속성, 활동과 같은 실체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실체가 있다면 존재는 가상 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실재한다. 이 글의 목적에서 성령의 실재와 실체는 존재론적으로 같은 결과이 지만 가상과 대립해서는 실재로, 본질과 속성, 활동과 관련해서는 실체라고 주로 언급할 것이다. 베 르크호프는 성령에 대해 형식적 삼위일체라거나 성부와 성자의 활동이라고 진술한 것이고, 이에 대 해 몰트만은 베르크호프가 성령의 실재성과 그 실체 개념을 모두 부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베르크호 프가 성령에 대해 진술한 성부와 성자의 활동은 각각 성부와 성자의 실체에 관한 것이지 성령의 실 체는 아니다. 몰트만은 이것을 비판한 것이다. 몰트만은 성령의 실재성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선 포된 것이라 했으며, 성령의 실체를 수사학적 은유와 비유, 삼위일체의 관념에 근거하여 사유한다.

     8) 신옥수, 『몰트만 신학 새롭게 읽기』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 161-63.

     9) 성령의 실재가 사회에서 더욱 현실적 경험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급진적 종교개혁을 시도한 열광 주의자들, 1900년대 초 오순절파나 이후 은사주의 운동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성령의 물결은 개신교의 거의 모든 교회, 가톨릭에 속한 교인들에게도 미쳐 신자들이 치유를 증언하고 방언을 하며 자신들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들을 본다. 

 

즉, 성경과 이천년 간의 모든 신학이 왜 교회 안팎의 신비적인 성령관, 성령에 관한 많은 다 른 복음들, 기적을 조작하는 성령 모독, 관조(Kontemplation) 없는 주술적 이거나 행위적인 명상(Meditation), 성령에 대한 기복의 간구, 그 밖의 광 신주의를 정당한 복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함께 밝히는 실천적 의 미를 뜻한다.

 

1. 성경의 삼위일체

 

성경은 창세부터 종말까지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증언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이 창조 사역에서부터 성부와 함께했음을 명확히 말했다(창 1:2).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범죄를 꾸짖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 라” (사 48:16)10)

라고 성령을 증언했다.

 

     10) 개역개정. KJV는 주 여호와와 그의 영이 나를 보냈다(“...... and now the Lord GOD, and his Spirit, hath sent me.”)고 영역한다. 

 

요한은 하나님은 영이라고 더 직 접적이고 단순하게 진술하였다(요 4:24).

바울은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라고 성령의 사역을 전했다.

또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재림에 자신이 본 그리스도의 계시대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 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 더라”(계 22:17)라고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증언한다.

성경에 명확한 언어로 증언되지 않았으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를 하나의 본질로 이해하려는 삼위일체 교리의 선포 과정은 초대 교회의 가장 논쟁적인 신학적 과업이었다.

긴 논쟁 끝에 니케아 공회(325)는 예수 의 그리스도 됨과 본성에서의 완전한 신성을 만장일치로 선언하였다.

이후 60년간 성령의 위격과 신성에 관한 또 다른 논쟁이 이어진 끝에,11) 콘 스탄티노플 공회는 아리우스(Arius, 250-336)의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의 주장을 인정하여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선언하였다(381).

이처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회의 공식적인 선언 이후에는 삼위일 체 정식에 대해 본질적 논쟁은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삼위일체 정식은 이후 사도신조를 비롯하여, 초대 교회로부터 복음주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본질적인 신앙고백으로 내려오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 칼빈(Jean Calvin, 1509-1564)도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사벨리 우스(Sabellius, fl. ca. 215)의 양태론과 아리우스의 종속론과 같이 삼위일 체를 부인하는 군주론(monarchianism)적 신론을 비판하며, 성령은 교회 의 전통 교리와 같이 능력과 은혜의 존재라고 삼위일체 신앙을 재확인하 였다.12)

개혁신학은 성령의 존재론보다 구원의 주체요 하나님 은혜의 시 여자로서 성령을 선포하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13)

 

     11) 오리겐을 수용한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삼위일체의 관념은 하나님에게는 외적인 것이며 하나님 은 그 자신의 영원한 본질 속에서 셋이 아니라 하나라고 그릇 믿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성자도, 성령도 피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알렉산더의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이 성경 등 문헌 속에서 대등한 신성이요, 구원론에서 필수적임을 보여 이들과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 의 신성한 영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참된 공동체, 연합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아리우스 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한다.

     12) Institu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원광연 역, 『1559년 최종판 기독교강요. 상』 (파주: CH북 스, 2024), 145-191. 이 최종판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레나이우스와 어거스틴의 주장을 근거로 더욱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13) 예를 들어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벌코프 조직신학』, 699 이하. 

 

2. 성령의 인격 논쟁

 

삼위일체의 확립된 정식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존재론적 인식에 관한 신학의 질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공회의 결의 전이나 후에도, 그리 고 지금도 계속된다.

이는 근대에 자유주의나 청년 헤겔파가 예수의 신성이나 역사성을 부정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인했던 논쟁 과 유사하다.14)

공회 후 4-5세기에 히포의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유명한 사랑 유비를 통해, 성령이란 사랑하는 자 성부와 사랑받는 자 성자를 잇는 연대, 끈과 같은 것으로 인식 하였다.

이 유비는 성령이 인격이기보다 기능이나 활동인 것처럼 들리기 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거스틴이 동방 교부들이 취한 위격들의 구별성과 통일성의 확증 접근방법보다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삼위의 인격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성령의 본질을 이해한 것에 따른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 자체를 동일 본질로서의 신성 안에서 논증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위일체적 주장과는 성격이 다르다.

삼위일체론과 성령론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19세기에 다시 등 장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하나님이 오 직 세 번째 양태 즉 성령(Geister) 안에서만 온전히 계시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성부, 성자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만이 온전하신 하나 님이 된다.

근대에 신학의 방법론을 실증적으로 재서술한 슐라이어마허 (F. D.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전통적인 정식과 달리 성령을 공간성 개념으로 인식하고 성령론을 그의 조직신학 체계에서 가장 뒤에 두기도 하였다.

삼위일체가 본격적으로 재론된 것은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자신의 신학적 토대가 되는 계시를 삼위일체적 사건으로 이해하면서부터 다.15)

 

    14) 자유주의자는 예수를 구원의 그리스도로서가 아니라 도덕적 모범으로 이해했다. 청년 헤겔파, 예 컨대 슈트라우스(David Strauß, 1808-1874)는 『예수의 생애』(1835)에서 예수는 인간이며 그리 스도, 즉 메시아는 유대민족의 의식이 만들어 낸 신화라고 주장했다. 바우어(Bruno Bauer, 1809 1882)는 예수의 역사적 존재마저 부정했다. 급기야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 는 하나님은 인간 의식의 투영이고 인간이 만든 관념이라고까지 하나님을 부정했다.

    15)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I/1, 박순경 역, 『교회 교의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383-94. 그러나 몰트만은 바르트를 비롯하여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 불트만 (Rudolf Karl Bultmann, 1884-1976),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 1887-1967)과 같은 변증 법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양자택일적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인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인가에 대해 요구하였으며, 이것은 오늘날(1991) 무용한 것으로 증명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A Universal Affirmation, trans.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5.   

 

그는 계시를 계시자-계시-계시됨의 관계로 이해하는데, 성부-성자 -성령에 대응한다.

바르트를 이어 현대의 신학자들도 성령의 정체성에 대 해 계속 설명을 시도한다.

틸리히(Paul Tilich, 1886-1965)는 헤겔이 하나 님을 절대 영, 절대정신(Absoluter Geister)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성령이 중요함을 말했다.

틸리히의 과제를 받아 판넨베 르크(Wolfhart Panengerg, 1928-2014)도 성령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새로 운 방법들을 시도하였다.

그는 물리학의 장이론(場理論, field theory)을 신학과 통합적으로 사고하여 성령을 하나님의 현존의 힘의 장(Kraftfeld) 으로 보는 독창적 이해로 설명했다.16)

성령론에 중요하게 기여한 베르크 호프는 바르트의 초기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이지만, 그의 󰡔성령의 교의󰡕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1964)에서 하나님의 영은 간단히 말하 여 “활동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베르크호프가 아버 지의 영은 활동하는 아버지를 가리키고 아들의 영은 활동하는 그리스도 를 가리킨다고 말함으로써, 바르트와 달리 하나님의 독립된 셋째 존재 양 식을 포기하였다고 말한다.17)

몰트만은, 베르크호프의 주장에 따르게 되 면 삼위일체가 이위일체가 되며 이위일체는 결국 일원론으로 되어 마지 막에 남는 것은 신적인 세계 왕과 해체된 삼위일체라고 반박한다.

몰트만 은 수많은 문헌이 성령론의 개별적 문제들만 다루었으며 성령론의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을 세우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구약과 신약, 조직신학 전반에서 총체적으로 성령의 본질과 활동을 논하고 송영 한다.18)

 

    16) Wolfhar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신준호 외 역,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I』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9), 619-20. 장이론과 판넨베르크 신학의 관계는 제 IV 장의 5를 참고.

   17)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12-13. 바르트의 Seinsweise는 존재 양태라고도 번역된다, 양태론과 구분된다는 바르트의 주장은 수용되기도, 거부되기도 한다.

    18)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1-2.

 

최근에는 콕스(Harvey Cox, 1929-)가 기독교 시대를 초기 짧은 기 간의 신앙 시대, 중세까지의 교조 시대를 거쳐 현대는 성령 신앙의 성장, 영성 운동을 근거로 성령의 시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단순히 교조 의 수용(belief)보다는 신앙(faith)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하였다.19)

이하 이 글은 II. 장에서 성령의 활동과 성격에 대해 몰트만의 쉐키나 론을 검토한다.20)

 

    19) Harvey Cox, The Future of Faith, 김창락 역, 『종교의 미래』 (서울: 문예출판사, 2018), 30-36.

    20) 실재성에 대한 신학적 토의가 물리적인 존재, 이성으로 인지하거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존재 를 입증하는 작업은 아니다. 

 

계속하여 III. 장에서는 성령의 실재성과 인격에 대한 그의 주장을 삼위일체의 지평에서 ① 동일 본질로서의 하나님의 인격성 (personhood)과 ② 삼위일체에 나타난 성령의 구분됨으로 나누어 논한 다.

IV. 장에서는 이러한 몰트만의 주장들이 성령의 인격적 실재를 인식 하는데 어떤 이해를 제공하는 것인지 논하고, 성령 인식의 대안을 제기한 후, V. 장에서 맺는다.

 

II. 하나님 영의 경험, 쉐키나(שכינה)

 

몰트만이 성령에 대한 실재성을 논의하는 성경적 모티프(motif)는 쉐 키나이다. 쉐키나는 성막과 성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와 거 하심이다.

몰트만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에서 말한 것 같이 초월적 하나님은 인간의 순수한 이성이 경험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여기 서 멈추지 않는다.

즉, 근대 철학이 제기하듯 하나님을 대상적으로 경험 할 수 없다면, 비대상적으로 즉 인간이 자기 경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을 말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21)

 

    21) 그러나 틸리히나 판넨베르크는 이성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 계시의 인식 가능성을 주장한다. 이 들은 이를 각각 보편적 이성(universal logos)과 직관적 이성(intuitive reason), 역사적 이성 (Geschichteliche Vernunft)으로 분류한다.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71-105; Paul Tillich, Perspectives on 19th and 20th Century Protestant Theology, 송기득 역,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2021), 50-55; Wolfhart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0), 244-47. 

 

몰트만은 이 전제로 구약과 신약, 그리고 이들이 증언하는 삼위일체의 전반에 걸쳐 성령의 실재 성, 성령의 경험에 대해 진술한다.

곧 모든 사물 안에 계신 하나님, 내재 적 초월성이다.

1960년대의 절망 속에서 몰트만은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의 무신론에 근거한 희망의 철학22)에 반응하여 유신론의 � �희망의 신학󰡕(1964)을 발표한다.

그는 동일한 지평에서 우리의 삶이 긍 정되며 사랑받고 생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의 영이라고 이해했다.23)

 

    22) Roger E. Olson, The Journey of Modern Theology: from Reconstruction to Deconstruction, 김의식 역,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23), 608-09. 블로흐는 희망이 근본적 인간 본능이며 그것이 역사를 혁명적 변화를 거쳐 이상향으로 이 끈다는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자다. 몰트만은 2차대전 후 세계의 절망 속에 블로흐가 무 신론에 근거한 인간 희망의 철학을 제기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하고 초월적 내재성에 근거한 희망 의 신학을 전개한다. 그러나 삶과 사회와 생태에 대한 그의 희망과 달리 세계는 인간의 이기성으로 인한 파괴적 에너지가 절망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23) Jürgen Moltmann, Theologie der Hoffung, 김균진 역, 『희망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서문.

 

1. 이스라엘의 경험과 쉐키나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다신교 문화와 달리 하나님의 경험을 역사적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에 결합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출 3:6)이었다.

몰트만은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경험한 영으로서의 하나님을 쉐키나로 전개한 다.24) 

 

    24)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17-57. 몰트만은 경험의 본질은 오성과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과거의 경험은 나에게는 언제나 현재적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지금 나의 의식 속에 현재하는 것이다. 경험은 상태나 주체 등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분류된다. 그는 경험이란 인간 주 체, 너, 공동체, 자연 등 모든 일상적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을 창조의 능 력과 삶의 원천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렌츠는 [Stanley J. Grenz, 20th Century Theology, 신재구 역, 『20세기 신학 』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23), 295]에서 “몰트만은 초월성을 강조하며 신론을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역사에 내재하는 하나 님에 대한 과다한 강조로 꾸준히 옮겨 갔다”고 평가한다. 

 

1) 하나님 영의 경험

 

하나님 영을 말하는 구약 본문의 루아흐( רוּחַ ) 란 Geist(독일어), πνεύ μα(헬라어), Spirit(영어), 영·성령(개역개정)과 같이 번역되는데 본래 히 브리어로는 강한 바람, 태풍, 폭풍, 힘, 생명의 숨과 같은 뜻이다.25)

그 용 례를 보면, 인간의 루아흐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눅 23:46), 인간의 루 아흐는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짐승의 루아흐는 땅으로 내려간다(전 3:21, KJV).26)

선한 루아흐도 있고 악한 루아흐의 힘도 있는데, 사울은 주의 악 한 루아흐로 번뇌한 적이 있고,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 아합왕에게 거짓 된 루아흐를 통해 조언하게도 하였다.

루아흐가 하나님과 결합하면, 곧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말씀(רבד)이 된다.

하나님의 영은 구체적으로 옷니엘, 기드온, 삼손 같은 사사에게, 북이 스라엘과 남유다의 정치적, 사회적, 신앙적 혼탁 속에서 예언자들에게 예 언의 영으로, 사울 이후 왕정 시대에는 왕들에게, 포로기와 그 후에는 다 시 에스겔, 다니엘, 제2이사야27)와 같은 예언자들에게 임하였다.

하나님 의 영은 또 상호 교체되어 쓸 수 있을 만큼 공유적 속성이며 동류의 개념 인 지혜로도 임하였다.

예를 들어, “지혜 속에 있는 영은 영리하며 거룩하 고 ......” 와 같이 지혜에 대한 말은 루아흐에 대하여도 적용 가능하다.

그 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솔로몬 같은 왕에게도 경건한 부자들에게도 가난 한 백성에게도 임하여 잠언 8장, 욥기 28장, 시편과 같이 인간의 마음 깊 은 곳에 성령과 지혜의 현존을 보였다.

이로써 하나님의 지혜는 세계 안에 내재하는 질서의 힘이며, 하나님은 성령 즉 지혜를 통하여 창조하였고, 인 간에게 말하고자 하며, 인간을 창조자의 뜻과 하나 되게 하여 지혜롭게 하 고자 하신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28)

 

    25) Francis, Brown, et al., The Enhanced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06).

    26) 개역개정 성경은 이 루아흐를 혼으로 번역하였다.

    27) 학자에 따라 이 구분을 부인하기도 한다.

    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로고스의 전 형태가 아니라, 성령의 전 형태로 생각한 교부도 있다. 반 면 구약학자 알베르츠(Rainer Albertz)는 구약의 지혜서는 경건한 부자들과 하층민 집단의 의식이 라고 말한다. Rainer Albertz, Religionsgeschichte Israels in Alttestamentlicher Zeit, 강성열 역, 『이스라엘 종교사 II』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286-309.

 

루아흐는 이와 같이 창조와 역사에 서 지혜의 형태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낸다.

그러나 몰트만은 랍비들의 문헌이 루아흐를 매우 빈번하게 인격적 범주로 말하지만, 따로 분리된 독 립적 존재로 보는 일은 특이한 일이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야웨의 루아흐의 현존(Gegenwart)에 대해서 더욱 깊이 사유 한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하늘로 가든 지옥으로 가 든 바다 끝으로 가든 이렇게 하나님의 루아흐를 내가 의식한다면, 하나님 은 활동하시는 현재의 사건이며 따라서 우리는 역으로 이 현존의 사건을 하나님의 루아흐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은 하나 님은 영(요 4:24)이라는 요한의 진술을 경험의 지평에서 해석하는 것이기 도 하다.

 

2) 하나님의 영과 그의 쉐키나

 

몰트만은 신적 현존(Gegenwart)이라는 신학적 표현으로 시공(時空) 에서 역사의 특수한 자리와 특수한 시간 속에서 임하는 하나님 영의 의미 를 나타낼 수 있으며, 이를 하나님의 쉐키나로 말할 때 현존의 의미를 더 욱 명확히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쉐키나는 “자리를 치는 것”, “거하는 것”, “임재”의 의미이고 하나님의 지상적, 시간적, 공간적 현존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성전 파괴 전에는 법궤 안에서 이동하거나 임재하였으 나, 성전 파괴(기원전 587) 후에는 자신들에게 임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가졌다.

그가 볼 때 쉐키나의 표상이 신학에 기여하는 것은 쉐키나와 루아흐 의 관념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의 현존이며 인격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에 귀 속하는 속성 이상이고 피조물에 대한 공유적 속성으로서의 은사 이상으 로서, 하나님의 연민(Empathie)이다.

쉐키나는 곧 성령 하나님의 다감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내주하며 함께 고통당하며 근심하며 힘을 잃어버리 며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또 성령의 케노시스(κένωσις)를 가리키는데, 성령은 아가페의 의지가 있으므로 상처받을 수 없는 자신의 특성을 비우고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의 이 같은 신적 정열은 단순한 의인주의(anthropomorphism)가 아니라 피조물 안에서의 내주 하심(쉐키나)을 통하여 가능한 것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몰트만의 진술이 하나님의 속성을 진술하는 것 이상으로 성령의 실재성에 무엇을 의미하 는지는 반드시 명확하지는 않다.

즉, 쉐키나라는 관념이 성부와 성자의 인격적 활동이라고 이해한 베르크호프의 주장에 더해 인격적 독립성에 대 한 존재론적 표상이 무엇인지 명료하지 않다.

 

2. 신약의 영의 경험

 

몰트만은 쉐키나를 중심으로 구약에서 성령을 논한 후 신약의 성령을 삼위일체적 경험으로 이해한다.29)

 

    29)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58-82. 성령의 실재성 연구: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개입에 관한 보도 는 다양하고 빈번하다. 먼저 예수의 탄생에 성령이 개입한다(눅 1:35). 사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세례에 성령이 개입됨을 보도한다(마 3:15; 막 1:5; 눅 3:16; 요 1:27).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이끌어 시험을 받게 하였다(마 4:1).

성령은 예수에게 마귀를 쫓는 힘을 주기도 하였다(마 12:28). 그리고 예수는 부활 후 다른 위로자 곧 진리의 영이 장차 오실 것을 약속한다(요 14:16-17). 그리고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 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들(cloven tongues)처럼 갈라진 것들이 제자들에게 임하여 방언, 곧 다른 언어(other tongues) 말하는 능력을 부 여하였다. 신약의 이런 보도는 영의 그리스도를 인식하게 한다. 마가복음은 예 수가 침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흰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전한다 (1:10).

예수는 영 안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영 안에서 사랑받는 아들로서 인식하며 영을 하나님의 쉐키나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수는 광야의 시험을 통해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여하는 메시아적 기능을 이해하게 된다.

성령은 자신의 쉐키나를 통하 여 예수의 고난적 운명에 자기를 묶어 놓고 동참한다.

그럼에도 성령은 예 수와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영은 확실하게 그리스도 의 영이 된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그리고 성령을 통한 세례와 함께 시작 한 것은 성령을 통한 수난에서 끝난다.

즉, 그는 세례를 받으며 성령이 임 하여 메시아가 되며, 성령의 권능으로 치유와 기적을 행하고, 골고다에서 죽는다.

그러나 성령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예 수가 죽은 후 죽음으로부터 그를 일으켜 데리고 나온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살며 신적인 생명의 영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활동한다 (Perichoresis).

그러므로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논의와 종말에 관 한 논의가 성령과 결합된다.

몰트만은 이러한 진술들은 오순절에 불의 혀처럼 갈라진 형상으로 제 자들에 임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오심보다 선행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말한다.

즉,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을 규정하며 아들 위에 머물며 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여,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며, 이 명제는 필리오케(Filióque)가 서방에서 제거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성령을 내어 쉬는 가운데 영원한 말씀을 하신 것과 같이, 아들이 곧 로고스로 파악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아들의 표상은 성령-말 씀 곧 그리스도의 표상들과 혼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그리스도 일원론이나 열광주의적 성령론은 회피되는 것이며, 성령론은 아버지는 물론 아들을 포괄하는 하나님 중심주의, 즉 그리스도 중심주의도 아니고 성령 중심주의도 아닌 삼위일체 구조의 틀 안에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 한다. 

 

III. 삼위일체와 성령의 인격적 본질

 

1. 근대 철학의 인격

 

성령에 대해 그 실재와 정체에 대한 어떠한 인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인간과 같거나 같지 아니한 생명적 존재일 수도 있고 또는 자연적, 우주적 힘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성령은 유한한 인간의 오감과 이성으 로 인지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실체’로서 인간의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언어 표현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실재가 인식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실체적 증거와 표상들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이에 대해 다양한 활동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을 안다.

인격적으로 의인화하여 서술하는 것 은 대상의 존재성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법이기도 하다.30)

 

    30) 어떤 실체를 수사법에 의해 인격적으로 묘사하는 것, 예를 들어 꽃이 나에게 말을 하고 있다거나, 나비가 춤을 춘다거나와 같이 우리는 인간과 같지 아니한 생명체를 인격적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동차, 친구 같은 낡은 신발과 같이 사물에 대하여도 인격적으로 서술한다. 또 죽 음의 슬픔이 나를 감싸고(시편 116:3)와 같이 감정, 능력의 현상을 의인화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 이 인간이 식물이나 동물 혹은 사물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의식을 투영하는 것인지, 혹은 성령이 이 들에게 작용하여 이들이 우리의 의식(인간의 영)을 일깨우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피히테 (J. G. Fichite)는 인격이란 언제나 비교의 개념이며 어떤 상대와 대면하여 주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을 전제하므로 제한됨이나 유한성을 의미하 지만, 하나님은 정의상 한계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인격이 될 수 없다고 거 부하였다. 이에 대해 헤겔(G. W. F. Hegel)은 인격이란 제한이 아니라 관 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의 무한성은 인격의 개념과 모순 되지 않는다고 주체성으로서의 인격 개념을 잘 지적하였다.

헤겔이 하나님의 관계성 즉 인격을 확언하는 근거는

   첫째, 근대 과학 시대 이전의 사람들은, 인간은 각자 타인이 전적으로 알 수 없는 실존의 깊이와 불가사의함이 있는 바 이를 인격으로 인식하였는데, 자연의 신비 하고 불가사의한 측면에까지 이같이 ‘인격’으로 인식하고 확대했다는 것 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나 그 존재와 불가사의함 은 우리의 인식 능력을 초월하며 우리의 능력 너머에 계신다.

하나님은 인 격이라는 언명은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에게 인격은 주체의 의지 행사를 뜻한다.

인간은 각자 자기 결정적이고 목적과 목표, 계획이 있고 사건들을 결정하려 하면서 세계 속에서 활동한다.

고대인들 은 자연을 그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자연의 힘과 같은 몇몇 측면을 의지 측 면의 인격으로 확대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그와 같은 ‘의지’를 말한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의 목적대로 세계를 마지막 때 즉 종말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결정적으로 우리의 통제 너머에 계 시면서 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세계 안에서 활동한다.

즉 그 러므로 하나님은 인격이라는 것이다.

   셋째, 인간은 예를 들어 헤겔이 󰡔정 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언급한 노예31)와 같 이 타자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그 통제를 넘어서서 행동하기 때문에 인격 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31) 헤겔은 의식이 자기의식이 되고 이성과 보편이성이 되어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유비를 제시한다. 헤겔은 노예가 자기의식을 획득하는 비 유를 제시했다. G. W. F. Hegel, Phenomenology of Spirit, trans. A.V. Miller (Delp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 1998), 523-24.

 

하나님은 인간 자유의 근원되는 존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격이다.

이 인격 개념들은, 그 숭배 대상들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삶의 목표도 비인격적인 절대자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 상태를 추구하는 종교들과 매우 다른, 기독교의 특성이다.

기독교 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대해 절대적 존재와 피조물의 구조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의 관계, 교제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심을 주장한다.

 

2. 경험의 은유와 인격

 

몰트만은 성령의 인격성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성령론의 가장 난해 한 문제라고 인정하며 은유로서 성령의 인격성을 설명하려 한다.32)

 

   32)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268-89.

 

이에 따라 그는 성령의 인격성을 헤겔과 같이 철학적 관념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격적, 구성적, 활동적, 신비적 성격이라는 네 가지 은유를 제시한다. 인격적 은유는 성령을 주(主)로, 어머니로, 심판자 등으로 인격화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주, 어머니, 심판자의 세 가지 명칭은 성령에 함께 속하 며 서로를 보완하며 다른 하나를 제외하거나 위축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 다.

그런데 몰트만은 이 세 은유적 명칭은 성령의 활동 또는 사역에 대한 기능적 은유이지 인격적 이름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구성적(Formative) 은유는 성령을 에너지, 공간, 형태로 표현하여 자연을 형성하거나 구성하 는 힘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활동적 은유는 성령을 세찬 바람(예, 행 2:2), 불, 사랑 등 활동적으로 비유하는 것이다.33)

 

     33)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이 바람의 신, 태풍의 신인 것에 비추어 경쟁적 대립을 연상하게도 한다. 

 

그 외에도 구약은 바람을 시 켜 명령을 전달하거나, 성령이 산과 바위를 치는 강한 바람 같은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불은 불길같이 갈라진 혀와 방언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 이 예기치 않은 새로운 일을 일으키는 활동을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신비적 은유는 빛, 물, 생육 등의 개념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신적 존재와 빛의 은유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신플라톤주의적 사고 에 근거한 성령 유출의 개념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물과 관련해서는 성령이 샘과 우물의 표상과 자주 연결된다.

몰트만은 이처럼 빛이 위로부 터의 성령 활동이라면 물은 아래로부터의 성령의 은유라고 말한다.

또 그는 빛과 물의 은유 외에 이들이 결합된 또 다른 은유가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싱싱한 전나무, 생명의 나무, 포도나무와 가지 등으로 비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은유들을 성령의 실체와 관련해 어떻게 이해할지 IV. 장 에서 논의할 것이다.

 

3. 삼위일체론에 의한 인격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근거와 성령의 존재는 예수의 세례(마 3:16)와 요한일서에서 보인다(요일 5:6-7).34)

   

 (요일5:6-7,이는 물과 피로 臨(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臨(임)하셨고 證言(증언)하는 이는 聖靈(성령)이시니 聖靈(성령)은 眞理(진리)니라  證言(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그러나 앞서와 같이 몰트만은 성 령의 인격론이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의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고백한다.35)

더 나아가 하나의 실체, 세 인격이라는 삼위일체에 의한 성령의 인격성은 증명이라기보다 주장이며, 근대 철학에서 얻은 개인적 인격 개념을 현대 에 이같이 성령에 전이하면 그 인격이 파악되기보다 오히려 은폐될 가능 성이 있다고 솔직하게 진술한다. 이 말은 초대 교회의 인격은 관계에 기반 한 관념이었으나 근대 철학의 인격은 개인적 자유에 치중하므로 관계에 따른 성령의 인격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그는 어거스틴의 신성의 근원 없는 근원과 군주론에 서 출발한 아버지로부터의 아들과 성령 개념도, 관계적이며 상호침투 (perichoresis) 하는 인격 개념도, 성령의 독특한 인격성을 파악하지 못한 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격 자체보다는, 선포되었지만 증명되지 아니한 인격들을 전제로 그 관계성과 사귐을 강조한 것뿐이라고 올바르게 진술 한다.

또 그는 성령의 본질을 인식할 때 경험에서 원천으로 소급하는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Αριστοτέλης. 주전 384-322)나 아퀴나스(Tommaso d’Aquino, 1224-1274)처럼 언제나 간접적이며 그 출발된 경험들에 묶여 있게 된다고 말한다.

성령의 본질은 그의 본질과 동일한 삼위일체의 인격 들에 대한 관계들 속에 인지 가능한 것이고 이것은 경험적, 활동의 역소급 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36)

 

    34) 그러나 삼위일체를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본문으로 인용되는 요한일서 5:7은 후대 삽입 논쟁이라는 역사비평의 주장이 있다.

   35)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289-309. 이 삼위일체의 더욱 구체적인 논의에 대해서 는 그의 다음의 저작을 참고. Trinität und Reich Gottes (München: Kaiser, 1980), 144-206. 또 는, Trinität und Reich Gottes, 김균진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207-97. 36) Stanley J. Grenz, 『조직신학』, 526-27. 그렌츠는 성령이 누구(또는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서술 함에 있어 복음주의자들은 단순한 접근, 즉 성령에 대하여 두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서술한다고 한 다. 즉, 성령의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성, 즉 성부보다 못한 존재인지 여부 그리고 성령은 인격인가, 비인격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은 동일한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격을 지 니고 있다고 답하며, 그 증거로 성경의 증언을 제시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증거들을 합치면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라는 신학적 결론을 제시한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렌츠는 이와 같은 접근과 달리 성령의 기능들을 먼저 연구하려고 한다. 그는 이 거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맥 락 속에 성령의 이해를 시도함으로써 몰트만의 연구방법론과 달리한다.

 

따라서 몰트만은 본질과 계시, 존재와 행위,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등 전통적 사고는 철학의 보편적 형이상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지 기독교 신학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것은 성령의 인격성을 인식하는데 짐이 될 것이라고 말 한다.37)

 

      37) Diogenes Allen, Philosophy for Understanding Theology, 정재현 역,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1), 23. 그러나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알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그리스 철학을 추방하기를 요구한다면 그는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신학이 라는 학문 자체의 종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된다”라고 주장한다. 다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관념 이나 개념들에 대해서는 다소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접근에서 성령의 실재와 정체를 어떻게 인식할 지에 대해 몰트만은 인격에 대한 은유에서처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즉, 군주론적 삼위일체, 군주론적 삼위일체의 역사적 구상으로서 경륜적 삼위 일체, 군주론적 삼위일체의 논리적 귀결로서 성만찬적 삼위일체,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 가지의 삼위일체 구상을 포괄하는 삼위일체적 찬미라는 관념에서 찬미적(doxology) 삼위일체를 말한다.

 

1)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성령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의 역사를 그의 관점에서 군주론, 경륜, 성만찬, 찬미의 관점에서 재진술한다.38)

 

    38)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289-305. 군주론적, 경륜적, 성만찬적 삼위일체과 같이 삼위일체 자체에 대한 논의는 Jürgen Moltmann,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07-80을 참고. 

 

이 삼위일체 주장은 이 글의 주제인 성령 의 존재와 인격을 논의하는 데 관련되므로 일부의 설명이 필요하다.

 

(1) 단일 원천적 삼위일체(monoarche, 군주론적 삼위일체)

 

군주론적 삼위일체는 서방에서 형성되었는데, 구원에 대해 경륜적 시 각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통일성이 그의 삼위성을 선행하는 일체-삼위적 성격을 갖는다.

이 군주론적 삼위일체에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또는 자 기전달 개념에 의해 언제나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의 역사적 구상과 다르게 삼위의 통시적 시대의 경륜은 말하지 않으며, 삼위 각각은 활동성-중재자 중재, 계시자-계시-계시될 수 있음과 같은 관계로 진술된다.

성령은 직접 적으로 아들의 영으로 나타나며, 아버지의 영으로서 아들을 통해 중재한 다.

성령은 은사이지 은사의 시여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성령 을 통해 발생된다고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활동하는 현존이며, 아버지나 아들 같은 독자적 인격성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삼위일체론이 구원사의 초월적 근원을 묘사할 뿐이라 면, 구원의 역사에 상응하는 것 외에는 근원 속에서 존재론적으로 아무것 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결국,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게 된다.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든, 혹은 아들에게서 나오든, 성령의 실재가 없는 것이다.

역소급적 인식으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für sich)을 파악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 자체(an sich)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알 지 못하게 된다.

몰트만은 군주론적 동일성의 모델, 기능적 삼위일체론의 모델에서는 구원사에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파송(missio)되는 실체가 있어 야 할 것이므로 필리오케의 삽입은 당연한 귀결이다.

몰트만은 아들을 통하여 성령을 고정시킨 일은 비신학적 교권주의 때문이라고 바르게 말한다.

 

(2) 경륜적 삼위일체

 

이는 단일 원천적, 군주론적 구상을 수용하되, 구원사에 대하여 통시 적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시대(창조의 사역) → 아들 의 시대(화해의 사역) → 성령의 시대(성화의 사역)라는 시간의 흐름이라 는 틀을 구상한다.

이것은 흔히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말하며 13세기 요하임(Joachim von Fiore, c. 1135)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서구의 진보사상, 계몽주의, 서구적 역사관 형성의 단초가 되었다.

18세기 레싱(G. E. Lessing)은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 다음에 신약의 구원사적 복음이 따르 고, 이 복음은 성령의 시대에 성취된다고 주장하였다.

구약의 약속이 신약에서는 성취되지도 폐기되지도 않고 오히려 증명되며 확대된다는 것이 다.

아퀴나스가 두 단계적 전이 즉 구약 - 신약을 말했다면, 레싱은 성령으로의 추가적 전이를 주장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 나라에서는 결혼의 질서, 수고와 노동이 다스리며 아들의 나라에서는 제사장의 질서, 학식과 훈육 의 질서가, 성령의 나라에서는 영적인 자들의 질서, 명상과 찬양의 질서로 전이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요아힘의 이 고전적인 삼위 각 점유론의 부당성을 비판한다.

화해와 성화와 깨우침과 계몽에서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단독 점유하 지 아니하며 각자 배제되지도 아니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내에서의 교 체이지만, 삼위는 상호침투하는 것이며, 역사로 폐기되지 않으며, 차례로 ‘주 사역’을 담당하며 구원사의 종말론적 역동성을 결정하는 것이기는 하 나, 시간의 진행에 따라 평행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사역의 진행 시간에 삼위는 공존하므로 통시와 공시의 병존 적 이해를 올바르게 언급한다.

레싱의 도식화는 몰트만이 말한 것 외에도 시대의 구별성이나 시대 간의 상호 배척적인 특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즉 삼위 각자의 질서는 구약에서도 다 찾을 수 있고 신약에 서도 모두 찾을 수 있으며, 현대 산업사회에서도 모두 찾을 수 있다.

레싱의 도식은 임의적이며 임의적인 사변으로 이해되며, 몰트만의 주장은 타 당하다.

 

(3) 성만찬적 삼위일체

 

성만찬적 삼위일체는 그에 따르면 군주론적 삼위일체의 논리적 귀결 이다.

은혜가 경험될 때 감사가 시작되며 하나님이 인식될 때 창조의 찬 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상에 따르면 하나님 창조의 완성과 끝 은 하나님의 휴식이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사적 사역의 모든 끝은 영광의 나라 안의 영원한 안식일 즉 ‘끝이 없는 잔치’라는 관념이 된다.

군주론적 파송 즉 아들과 성령을 파송하는 가운데의 삼위일체에서 은혜 없는 성만찬은 없으므로 군주론적 삼위일체는 성만찬적 삼위일체에 선행하며, 성만찬에서 그 끝을 달성한다.

이러한 구상에서 아타나시우스는 고대 교회의 2대 규범적 명제를 요약했는데, 하나님의 내려오심과 인간의 올라 감이 그것이다.

이는 각각 군주론적 파송의 삼위일체와 성만찬적 영화의 삼위일체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몰트만은 성만찬적 구상은 아버지-아 들-성령의 또 다른 모습인 성령-아들-아버지라는 관계에 불과하며 군주론 적 구상을 역으로 전개한 것으로 본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관념은 피조물 의 고난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사랑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상 처를 낸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수의 수난 속에 스스로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4) 찬미적(doxology) 삼위일체

 

몰트만은 세 가지의 삼위일체 구상을 포괄하는 삼위일체적 찬미라는 관념을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이 구원사를 넘어 관찰되는 것이며 경륜적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운 삼위일체의 자리, 내재적 삼위일 체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따르면, 은사와 그 근원의 사랑의 손을 보며, 손에서 사랑하는 자의 얼굴을 보며, 뛰는 가슴을 느낀 다. 자기 자신과 관련시키지 않고 그것들의 근원과 관련시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직관 속에 완전히 흡입되며, 이 순간에 성만찬적 삼위일체는 찬 미적 삼위일체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찬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그의 이름으로 끝나는 예배를 중단시키며, 더 이상 과 거가 회상되지 않으며 어떠한 다른 미래도 기다려지지 않는 ‘영원한 현재’ 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또 교회의 예배 의식은 삶의 체험 자체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며, 삶의 잔치에 대해 말할 때는 축제적 사건들 외에도 한탄 과 슬픔, 웃음과 춤 속에서 표현되는 삶을 뜻하게 된다.

가장 강렬한 순간 은 명상(Mediatation)과 관조(Kontemplation), 엑스터시일 것이며 감각적 으로 인지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성령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동시에, 경배되고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있는 바대로 숭배되는 상호내주의 경배가 된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인격으로서의 성령의 위치는 지양(aufheben)되며, 삼위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자기 전달의 성만찬적 활동 속에 있지 않으며, 시간적으로나 자연적으로 허무하게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처럼 역 사적으로 실존하지 않고 영원한 시대(αιών)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삼위일 체적 찬미는 군주론적, 역사적, 성만찬적 삼위일체를 폐기하지 않으며 오히 려 이들을 완성한다.

삼위일체적 찬미는 이 세 가지 삼위일체의 전제로 파 악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표상 속에 는 군주론적, 역사적, 성만찬적 삼위일체의 표상들이 보존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몰트만의 이 견해는 삼위는 내재적 동일 본질 속에 시간 을 통하여, 공간에서 더불어, 상호 침투하는 속에서, 사역한다는 것으로 종 합적으로 이해되며, 이는 역사적 교의와 실천적 함의에 충실한 것으로 이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의 구성과 전개가 곧 성령의 실재에 관한 어떤 이 해와 논증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2) 필리오케와 성령의 정체성

 

성령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으면 그다음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발 출인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는 것인지 그 본질에 대해 논리적으로 당연 한 순서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존재론적 정체를 말하는 것은 매 우 복잡한 논쟁을 일으킨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성령도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 이단들(성령의 실재성과 정체성의 문제와 다르다)의 공격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성령은 아버지 발출 명제를 정립하였 다.

그러나 서방의 어거스틴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선포와 달리 성령이 성부에게서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왔다고 가르쳤다.

이후 스페인의 한 노회가 라틴어 번역본 속에 필리오케(ex Patre Filióque)라는 단 어를 추가(589, 제3차 톨레도 회의)함으로써 논쟁이 발단되고, 11세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가 삭제된 문구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필리오케 논 쟁이 시작되었다. 동방과 서방은 이로써 교리적으로 항구적으로 분열하 였고, 개신교 내에서도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적 관점에 따라 필리오케의 수용 태도는 동일하지 않다.39)

몰트만은 II. 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성령 의 생성에 있어서는 필리오케를 부정한다.40)

 

    39) 동방, 개신교회 일부, 세계성공회공동체 등은 필리오케를 부인하며, 서방, 개신교회 전반, 성공 회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 전통을 부인하지 않는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예를 들어 바르트(K. Barth)와 몰트만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몰트만은 필리오케의 첨가는 아버지 로부터의 성령 나옴에 대한 진술에 아무 새로운 것도 기여하지 못하며, 피상적이며 불필요하고, 그 러므로 삭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Jürgen Moltmann, The Spirit of Life, 306.

    40) 몰트만은 성령의 관계적, 순환적인 형태를 표현함에 있어서 필리오케는 타당성을 가지나, 성령의 생성에 있어서 그것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Jürgen Moltmann,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 라』, 292.

 

IV. 성령 실체의 증명

 

이 장은 성령의 인격적 실재와 관련한 몰트만의 주장들을 검토한다. 이로써 베르크호프의 형식적 삼위일체, 성령의 신적 활동 진술이 삼위일 체를 이위일체로 환원하고 궁극적으로는 군주론적 관념에 이르게 할 수 도 있다는 그의 우려가, 그의 성령 선포와 은유로써 효과적으로 제거되는 것인지 논증한다.

 

1. 영의 쉐키나 증언

 

우리는 성령에 대해 이성이나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시적, 물리 적, 과학적, 논리적 증거를 객관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성령의 활동 을 증언한 성경, 특히 기적 본문들을 통하여 인식을 추구한다.

성경에서 기적의 현상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예언의 영이 임한 예언자들, 비의 료적 질병 회복, 죽음으로부터 깨어남(왕상 17:8-24; 왕하 4:8-37; 행 9:40 41; 눅 7:11-17; 마 9:18-26; 요 11:38-44), 다른 지역의 언어(방언. 행 2:4) 를 말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보이는 기적의 능력들은 보이지 않는 실 체(성령)를 입증한 것인가.

우리 인식의 수용은 양자의 인과관계가 논증 될 때 가능하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거나 다르게 성취되었다.

다 니엘의 예언과 같이, 성취되었다고 주해하는 일부 역사적 예언은 고고학 적 발굴이나 주변 국가의 발굴 문서를 통하여 분석한 결과 예언이 아니라 성령의 영이 임한 형식을 취한 사후적 진술, 묵시론적이라는 구약 연구자 들의 의견들이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예언의 영이 임했다는 예언자들의 선포는 본문의 기록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유효하게 증명하는 내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엘리야, 엘리사의 과부 아이와 수 넴 여인 아이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기적은 그 전승으로서만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의 일하심에 의한 죽음 회복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과학적 관 점에서 이것이 사실이었다고 이해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 한 120명이, 갈릴리 등 이스라엘 북부 어촌 근처에서 아람어를 말하며 자란 사람들이, 일시에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카파도키 아, 폰투스, 아시아, 프루기아, 팜필리아, 이집트, 키레네 근처 리비아 여 러 지역, 또 로마, 크레타, 아라비아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속한 언어 로 하나님의 경이로운 일하심에 대해 들었다는 의사 누가의 증언(행 2:9 11)은 현대까지의 과학적 인식으로는 보편적이지 않다.

이에 대해 개연성 있게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죽음에서의 부활보다 더욱 난해함이 있다41).

 

     41) 죽음에서의 부활은 빈사 상태,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다수의 사례가 있어 현대의 이성주의자나 과 학자들도 의학적으로 가능한 범주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역사적으로 빈번하게 야웨 신앙에 대해 열정 을 잃거나 냉담하였고 누구 못지않게 농사, 건강, 재산, 후손 등에 대하여 야웨가 아닌 토착신, 외래신, 여신에 대한 기복적인 숭배가 강했던 민족이 다.

그러므로 누가의 오순절 사건 보도는 실제의 역사, 성령의 실재에 대 한 가시적 경험과 진술의 것으로 확신하는데 자연적 어려움이 있다.

현대에 와서 성령 운동은 1900년대 초의 오순절 운동과 1960년대의 은 사주의, 그리고 지금도 복음주의 내에 존재하는 성령충만(엡 5:18)42)과 초 자연적 성령의 은사(예언, 방언, 치유, 축귀, 죽은 자를 일으킴)를 받았거 나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입증되지 않거나 일부 집단에서는 신앙 모독적 조작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 신앙 모독은 믿음 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현세 기복적 미신 단체, 기적을 작정하는 이교 단 체 외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다.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현대 의 방언은 인간 언어가 가지는 논리적 구조가 결여된 항상 영문 모를 말이 라는 결론뿐이며, 신약성경이 말하는 의미있는 뜻을 가진 글로사(γλῶσ σα)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즉 신약성경의 특정 지방 언어 곧 방언이 아니 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실재성은 원천부터 근거를 다시 찾을 필 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존재, 그리고 성령의 권능과 기적은 서 로 구분되지 않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나 순환론 (Circular Reasoning)의 논의가 되어 논증이 성립하지 않는다.43)

 

     42) 개혁주의 관점에서 성령충만의 성령론적 의미와 실천적 영성을 강조한 연구는 안인규, “개혁주 의 성화론에 있어서 ‘영적 성숙’과 ‘성령충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조직신학연구」37 (2021), 170-82를 참고.

    43) 성령이 존재하므로 기적이 있고 기적이 있으므로 성령이 존재한다는 형태의 논증을 말한다. 

 

판넨베르 크가 잘 말한 것처럼 한 신학적 의견이 그 자체의 논리성을 갖지 못하면 신앙 표현을 넘어 신학적 명제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멀다.

이상의 설명은 성령이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활동으로 존재하는 실재인지 여부에 대해, 이성과 경험은 그러한 인식 단계에 이르지 않음을 말한다.

칸트가 주장한 것과 동일하게, 인간은 이성에 의한 사유, 연역, 추 리, 귀납 등에 의해 논리로 수용하거나 오감에 의해 보고 듣고 만지거나 접촉하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경험으로 존재성을 결정할 수 있다.

성경 본문의 성령에 대한 활동 묘사, 즉 쉐키나는 이성적 인지와 경험적 오감 모두 에서 이러한 면의 실재성은 충분히 논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된 다.44)

 

    44) 그러나 이성이 성령의 존재를 논증하고 인지할 가능성이 여전히 있음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유효하며, 기각되지 않는다. 이성의 이러한 도전은 특히 틸리히와 판넨베르크의 이 성 언급을 참고, 

 

2. 은유에 의한 실체

 

몰트만은 성령의 인격에 대한 인식의 어려움을 말하며 인격적 은유, 구성적(Formative) 은유, 활동적 은유, 그리고 신비적 은유를 제기했다. 이러한 은유는 어떻게 긍정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가.

II. 장의 각주에서 “어떤 실체를 인격적으로 묘사하는 것, 예를 들어 꽃 이 나에게 말하고 있다거나, 나비가 춤을 춘다거나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인간과 같지 아니한 생명체를 수사법에 의해 인격적으로 서술하기도 한 다.

또 나의 사랑하는 자동차, 내 친구 같은 낡은 신발과 같이 사물에 대하 여도 인격적인 서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 또 죽음의 슬픔이 나를 감싸고 “(시편 116:3)와 같이 감정, 능력의 현상을 의인화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 이 인간이 식물이나 동물 혹은 사물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의식을 투영하 는 것인지, 혹은 이들이 인간의 의식(영)을 일깨우고 있는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45)

 

    45) 각주 30.

 

이 진술을 성령의 실재와 관련한 인격적 은 유에 대해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첫째, 몰트만은 성령을 인간적으로 은유하여 주로, 어머니로, 심판자 로 인격화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인격적 묘사 자체가 성령의 실재 성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성령이 우리에게 부활과 자유를 주어 우리 를 해방시키거나, 위로자나 살리는 영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품성을 하거 나, 종말에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으로서 세상을 꾸짖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존재를 증거한 것이기보다 선포에 대한 신앙적 의지가 더 강 하게 표현된 것이다.

   둘째, 몰트만은 구성적 은유를 통해 성령이 에너지, 공간, 형태로 자연을 형성하거나 구성하는 힘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 진 술은 성령의 실체를 에너지나 파장, 공간과 같은 인간의 언어로 시도하는 비유나 유비일 수 있어도 실재성을 입증하는 논리는 아니다. 또 성령을 세 찬 바람, 불, 사랑 등 현상이나 감정 등에 비유하여 활동을 묘사하는데 어 떠한 실재를 가정하고 이를 사물이나 현상에 비유하면서 그것이 곧바로 그 실재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마찬가지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문제다.

마지막으로 몰트만은 성령을 빛, 물, 생육 등 개념으로 신비적 은 유로 부르고 싶어 한다.

몰트만의 주장과 같이 신적 존재와 빛의 은유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이들의 은유는 선포된 실재에 대한 비유자의 의지나 결단, 묘사에 가까운 것이며 실재성을 규명하는 진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이나 생육도 그러한 목적의 묘사에 적합하여 선택된 것이며 실재의 증 거를 위한 규명이라고 볼 논리적 근거가 불충분하다.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실재하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모든 비유나 은 유로써 그 실체를 규명할 정당성이 있다.

그러한 실재의 아주 일부라도 드 러내기 위한 인간의 수사적, 상상적 시도는 근거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비유나 은유 그 자체가 곧 실재를 논증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나 은유는 성령 실체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것은 실재에 대한 타당성 구조46)가 완 전하지 않거나 상실된 것이다.

 

     46) Peter L. Berger & Thomas Luckmann, The Social Constriction of Reality, 하홍규 역, 『실재 의 사회적 구성』 (서울: 문학과지성사, 2022), 234.

 

따라서 몰트만의 비유나 은유도 성령의 인 격적 존재를 논증한 것이라고 이해되지 않는다.

 

3. 삼위일체에 의한 인격성

 

군주론적 삼위일체, 내재적 삼위일체,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의 신학 은 모두 성령의 구분성을 인정하고 있다.

성령의 실재와 관련하여 삼위일 체의 성립 과정을 재서술하면,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의 논쟁을 거쳐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고 만장일치로 선언한다.

이후 60년간은 성령 논쟁의 시기 로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노플의 마케도니우스(Macedonius)-아 리우스 논쟁을 거쳐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통해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선언한다.

이 교의는 카파도키아 신학자들, 즉 바실(Basil, 330-379), 닛사의 그 레고리우스(Gregory of Nysa, 330-395),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Gregory of Nazianzus, 320-391) 등 3인에 의해 고전적인 정식으로 수립 된 것이다.

이들은 교회가 삼신론이나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에 빠져들 오 류를 경계하며 세 위격과 한 본질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삼위를 성부의 낳 음(generate), 성자의 발생(generated), 성령의 발출(proceed)로 말하고, 그들 간에는 종속적 관계가 없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하게 신적 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완성하였다.47)

 

    47) Alister E. McGrath, Historical Theology, 조계광 역, 『역사신학』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2), 48-80.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이후 19세기의 헤겔, 20세기에 바르트,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이 계속 논의한다.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하면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proceed)한 다.

그러나 발출 자체는 성령의 존재에 대한 진술로서 언제나 명확한 것이 아니므로 이들의 주장은 개념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즉, 성부로부터의 발 출이라는 정식에 이중적 난제가 있다.

  첫째, 성부 하나님의 존재는 역사상 존재론적, 목적론적, 도덕론적으로 증명이 시도되거나 혹은 그 증명이 부 인되기도 하였고, 계몽주의 시대에는 데카르트부터 발원된 이성의 회의 적 원리, 자연의 질서에 대한 과학적 인식 등에 의해 특별 계시보다 자연적 일반계시를 앞세우고, 삼위일체의 신 대신에 이성으로 나타난 신의 개 념이 등장하면서 진화론과 무신론, 혹은 실존주의 철학이나 과정철학에 기반한 신론에까지 이르고 있다.

  둘째, 그러므로 성부로부터의 발출 개념 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비신앙 측의 논쟁에 더해 그로부터의 성령 발출 이라는 더 어려운 논쟁이 중첩하여 제기된다.

즉 유사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가 반복될 우려가 있다.

성부 하나님에게서 발출한다는 것이 성부의 독립된 제2 분신인지, 천사의 현현과 같은 것인지 존재론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성령의 발출이라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정식은 신학적 으로 결정적인 대안적 설명이나 도전이 없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헤 겔은 그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결정하기 위하여 스스로 분화해 나가는 절대정신, 변증법적인 과정이라 말한다.

헤겔의 이 언명도 성령이 변증법적 으로 새롭게 성취된 하나님의 한 형태인지 신학적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몰트만의 삼위의 상호침투와 상호거주48)에 의한 사회적 삼위일체도 인격적 실재를 전제하는 정식이므로 이러한 범주에 있다.49)

 

     48) Jürgen Moltmann,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42. 몰트만은 하나님의 단일성은 신적 인격들 의 순환(perichoresis) 속에서 인지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리안주의와 사벨 리우스주의는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존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49) 한편, 그렌츠는 만약 사회적 삼위일체 교리가 실제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근거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 정치적 고려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개념은 이상적인 인간의 본질을 천 상적인 것에 투사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 포이어바흐(Feuerbach)의 주장을 강화시키게 된다고 평 가한다. Stanley J. Grenz, 『20세기 신학』, 297-98. 

 

4. 총체적 성령론의 대립적 이해

 

이상의 논의에 근거할 때 이 성령론은 실재론의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몇 가지 다른 이해를 제기하게 한다.

  첫째, 이성과 자연적인 사고에 근거 할 때 성경 본문의 성령 활동 증언, 즉 루아흐와 그 쉐키나는 이성의 논리 와 오감의 경험에 의해서는 인격적 실재성이 여전히 충분히 드러나지 않 고 있다고 결론된다.

  둘째, 이 글의 주제인 몰트만이 진술하는 성령의 인 격성에 대한 비유나 은유는 성령의 실재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며, 그의 네 가지 은유는 몰트만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선포된 성령의 존재성 논증 이 아닌 기능의 서술이라고 스스로 한정하였으므로, 성령 실재의 논증에 해당하지 않는다.

  셋째, 철학 개념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성령의 존재와 인격을 찾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정당하나, 학문적인 엄밀함의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그가 제시한 성령의 은유는 성령의 실체보 다는 선포된 존재의 실체적 속성과 활동에 대한 신앙적 진술에 가깝다.

찬 미적(doxology) 삼위일체 역시 성령의 존재보다 신앙의 실천에 가까운 함 의를 더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넷째, 전통적 삼위일체의 교리에 의한 인격적 실재로서의 성령 입증은 하나님의 존재 및 그로부터의 발출이라 는 이중적 어려움이 드러나는 것도 인식되었다.

그의 성령론에 대해서는 상대적 의견들도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 그렌 츠는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에서 초월성에 대한 강한 강조를 하며 신론 을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저술 전반을 통하여 역사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 님의 내재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 쪽으로 서서히 옮겨갔다고 말한다.50)

판 넨베르크는 신격의 상호침투와 상호거주라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의 사회적 삼위일체에 삼신론의 경향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또, 󰡔오시 는 하나님󰡕의 만유구원론은 바르트의 논쟁적인 만인화해론 혹은 만인구 원론의 피조계 전체 확산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것은 개혁파 신학자 인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가 바르트를 비판한 것과도 바로 연결된다.

즉, 성경은 심판과 구원의 이중적 결과의 종말을 증언하지, 만유의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미 성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자연에까지 시야를 넓혀 정의와 구원 의 신앙과 실천 윤리를 주장했다.

벌코프는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부여하 며(창 1:2; 2:7) 창조 사역을 완성시킨다고 말한다.51)

 

     50) Stanley J. Grenz, 『20세기 신학』, 295.

     51)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이상원 외 역, 『벌코프 조직신학』 (서울: CH북스, 2023), 697.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의 섭리와 구원론은 몰트만의 성령론과 차이를 보인다.

나아가, 몰트만의 내재성과 초월성은 악순환의 변증법적 틀에 갇힌 것이며, 몰트만 자신의 자율적 이성에서 나온 사고의 틀에 불과한 신념이라는 주장도 제기 된다.52)

 

      52) 정승원,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적 종말론 비판과 성경신학적 의의(意義),” 「신학정론」 19-1 (2001), 22-26; 238. 나아가 그는 몰트만의 삼위일체적 종말론에 대해 교리적으로 비판적이다.

 

5. 적극적 이해: 우주적 힘으로서의 성령

 

이 연구는 4.의 논점에 근거하여 성령 실체의 다른 설명으로 몰트만이 제기한 우주적 성령(Cosmic Spirit)의 총체성과 판넨베르크의 우주의 힘의 근원으로서 장이론적 성령(Spirit as a Field of Force)을 변증법적 합일로 제기한다.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삼위일체적 창조로서 우주적 성령53)을 주장한다.

즉, 모든 창조는 영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창조자의 영은 자연 속에서 인지된다고 주장하고 신학적 계시와 교회의 성령 경험 으로부터 창조 안에 있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 방식을 추출하려고 시도한 다. 그가 인지하는 활동 방식은 창조성의 원리, 전체론적 원리, 개체화와 분화의 원리, 목적성의 원리다. 몰트만은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며 만물의 변화 관념을 수용한다. 다만 그는 범신론과 구별하여 만유재신론을 언급 하고54) 나아가 창조 속에 거하는 영을 설명한다. 반면 판넨베르크는 그의 신학 방법론에 따라 구체적 경험에 근거하여 성령의 실재성을 규명하되, 역사적 이성과 과학적 관념을 거부하지 않고 성령 실체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물리학자 페러데이(M. Faraday, 1791-1867)의 장이론55)을 수용하되, 장이론이 물리학 이론이기 전에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53) Jürgen Moltmann, Gott in der Schöpfung: Ökologische Schöpfungslehre, 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156-165.

  54) 신옥수, “몰트만의 ‘우주적 성령’ 이해,”, 「長神論壇」 26 (2006), 233. 그는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은 삼위일체론적이고, 자발적이며, 종말론적인 구조와 성격을 지니고 있어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과 다르다고 말한다.

   55) 쿠퍼(J. W. Cooper)는 장이론을 판넨베르크의 전체 신학을 통합시켜 주는 개념이라고 이해한다. 특별히 이 이론은 그의 성령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다.판넨베르크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임재 또는 현존의 힘의 장으로 설명한다. J. W. Cooper, 김재영, 『철학자들의 신 과 성서의 하나님』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436. 

 

장이론을 형이상학적으 로 보는 근거는 스토아학파의 신적인 프뉴마(pneuma) 이론이다.

신적인 프뉴마는 모든 사물을 관통하는 힘으로서, 강한 장력을 가지고 세계의 서 로 다른 부분들을 엮어 전체 우주로 만들어 주는 가장 미세한 물질로 인식 되었다.

스토아학파의 프뉴마론은 교부들의 성령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 다.

그러나 당시에는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 신적인 프뉴마를 미세한 물질 로 인식했으므로 더 이상 성령론에 수용되지 못했다. 반면, 현대 물리학의 장이론에서는 개념상 미세한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판넨베 르크는 현대 장이론이 모든 창조에 대하여 역동적으로 현존하는 성령론 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6)

 

    56) Wolfhart Pannenberg,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I』, 619-20. 

 

연구자는 성 령에 관한 진술을 새롭게 하는 시도에 물리학적 관념을 부가할 수 있으며, 성령을 실재적이고 능동적으로(via positiva) 인식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이해한다.

이 접근은 신학과 이성 모두에 성령에 대해 능동적으로 풍부한 함의 와 새 이해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갱신된 인식은, 전통적인 신앙주의 신학에서 확장 또는 변화된 이들의 성령 인식은 세계와 우주의 전 영역에 서 신적 섭리와 그 존재 및 활동을 드러내는 새로운 인식적 지평을 제공 할 개연성으로 이해된다.

이 가운데 종교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 한 증언을 기반으로 계속하여 성령 인식의 신앙적 중심을 구성할 것이다. 근대의 해석학이 잘 말한 것처럼 전통과 새 인식은 언제나 전체와 부분으 로, 해석의 나선적 회귀(hermeneutical spiral)를 반복하는 과정에 의해 인 식의 지평과 한계를 넓히는 과정이다.

이 시도는 몰트만이 제기한 우주적 성령의 관념이 판넨베르크의 힘의 장이론과 더불어 변증법적으로 지양 (aufheben)되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성령의 쉐키나와 유비들이 신앙적 으로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 진술로 인식될 가능성을 제고시킬 것이 다.

또 신격의 상호침투와 상호거주 관념에 근거한 그의 사회적 삼위일체 론도 현실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낼 개연성이 예기된다. 슐라이어마 허 역시 󰡔종교론󰡕에서 모든 직관은 직관되는 존재가 직관하는 존재에 끼 치는 영향으로부터 출발하며 그것은 모든 우주의 계시를 지칭한다고 말 한다.

이 우주적 계시의 주체는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영 외에 다른 존 재가 있을 수 없다.57)

 

     57) 최홍덕, “칼 바르트의 슐라이어마허 해석-종교의식(宗敎意識)의신학을중심으로,” 「서울장신논단」 14 (1998), 85. 그는 바르트가 경건한 자기의식, 직관, 감정을 잘못 이해하여 슐라이어마허가 신학 을 인간의 능력을 말하는 인간학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 통합과 해석은 글의 분량상 후속으로 미룬다.

 

V. 결론

 

이 글은 20세기 초부터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에서 성령 중심으로 이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목적으로 그 실재성을 연구한 것이다.

성령의 실체, 본질이 명확할수록 그 개념은 동방과 서방, 개신교와 가톨릭 등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들의 동질성을 표상하는 강 한 계기가 되지만, 그 신학적, 신앙적인 이해(理解)가 분산될수록 다른 복 음이 교회에 뿌려질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갈 1:8-9).

그러므로 이 연구는 이위일체 혹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다른 복음의 문제에 대비하여 성령의 본질을 질문하였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성령의 존재와 인격성에 대한 몰트 만의 성령론에 대해 자연적인 이해, 은유적 진술과 삼위일체에 대한 언명, 그리고 성령의 발출에 대한 선결문제 해결의 요구와 같은 대립적 쟁점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

   첫째, 성령에 관한 몰트만의 많은 논증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 명에서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활동에 대한 서술로 보며 독립적인 인격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위일체적 주장을 명료하고 유효하게 기각할 실질적 논거를 내재적으로 충분히 발견하지는 못하였다.58)

 

     58) 성령론을 비롯하여 정치나 해방, 생태 등 영역들에 관한 몰트만의 다양한 문헌들이 성령의 실재성 을 논증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몰트만 스스로 성령은 주장될 뿐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 작업 자 체는 성령이 어떤 존재가 아닌지(via negativa)를 드러낸 소극적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존재와 본질을 능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성부로부터의 발출 정식에 대해서도 선결적인 논증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도 성령론 연구에 제출한 의의일 수 있다. 이러한 결론들은 그 자체로 교회가 성령의 실재성과 실체에 대한 근거를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할 당위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글의 한 의의라면 성령의 실재성에 대한 능동적 설명의 대 안으로서, 몰트만의 우주적 성령론과 판넨베르크의 우주의 힘의 근원으 로서 장이론적 성령론의 변증법적 합일을 제시한 점에 있다. 이들은 모두 힘, 생명, 우주와 같은 공통의 관념을 갖는다.

또, 몰트만은 사회적, 찬미적 삼위일체를, 판넨베르크는 통일장이라는 거대 인식의 관점을 각각 유 지하고 있어, 이 연합으로부터 성령의 실재와 본질, 계시가 더욱 인식될 개연성이 있다.

이것은 초월적 존재나 계시에 대한 칸트의 불가지론에 반동하고, 헤겔의 방식대로 인식 대상의 본질을 변증법적으로 찾는 과정이다.

해석학을 신학의 한 측면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추구는 슐라이어마허 와 딜타이(Wilhelm Dilthey),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말한 것과 같이, 부분과 전체, 그리고 궁극적 의미에 대한 오스본(Grant R. Osborne) 의 해석학적 나선의 과정을 이룰 것이다. 

이 글의 모든 인식적 분투에도, 하나님이 세계에 펼치시는 능력과 우 리와 맺는 관계성은, 이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부터 구분된 영으로 인식하거나, 성부와 성자의 연대 혹은 성부, 성자의 본질적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적 표현이나 형식적 삼위일체로 인식하거나 관계없이, 인격 적으로 실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을 삼위의 독립된 셋째 존재로 인 식하며, 하나님의 신비와 불가해성과 능력이 의와 사랑의 인격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의 의식과 자연적 이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의 진리는 이 성령의 지혜를 통해 인간의 증언으로 특별히 계시한 것 과 일치함을 확신하며,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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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식에 성부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과 우주의 경험 으로부터 그 놀라운 창조와 질서로부터 인격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데 어 려움이 없다. 동일하게 성자 하나님은 성육신으로서 지상적 삶의 증언들 을 통하여 그 인격을 인식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반면, 제3위인 성령 하나 님에 대해서는 강한 바람, 태풍, 폭풍, 힘, 생명의 숨 등 유한한 언어로 기 술하는 여러 모습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의 독립된 한 위격, 즉 실재하는 인격을 의식하는 것이 늘 간단하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인식적 어려움 속에 일부 신학의 이위일체적 관념에 대응하여 삼위일체로서의 성령, 인격으로서의 총체적 성령론을 제기한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의 주장을 실체론의 관점에 서 규명해 보려는 것이다. 즉, 성령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회의 고백과 같이 동일 본질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즉 구분되나 분리되지 아니한 ‘동 일 본질의 한 인격적 실재’인지, 또는 베르크호프(H. Berkhof, 1914-1995) 가 그의 󰡔성령의 교의󰡕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1964)에 제기한 것과 같이 성령이 이위일체적으로 단지 아버지나 아들의 ‘활동’에 해당 하는 것인지, 존재론적 인식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 작업은 또 성령이 현 대에 교회 전반에 더욱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본질을 부정의 길(via negativa)로 재확인하는 의미도 있다. 이 연구는 결론으로 성령에 대해 관념적이거나 수사학적인 비유 이상 의 적극적 규명(via positiva) 방편을 제기한다. 즉, 몰트만의 우주적 성령 과 판넨베르크의 우주적 힘의 장(field theory)에서 역동적으로 현존하는 성령의 변증법적 합일(aufheben)을 성령 실체의 새로운 이해 가능성으로 제기한다. 모든 인식적 분투에도, 하나님이 세계에 펼치시는 능력과 우리 와 맺는 관계성은, 이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부터 구분된 성 령으로 인식하거나, 성부와 성자의 연대 혹은 성부, 성자의 본질적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적 표현과 같은 형식적 삼위일체로 인식하거나 관계없이, 인격적으로 실재한다.

[주제어: 성령, 쉐키나, 총체적 성령, 우주적 성령, 장이론, 삼위일체, 몰트만, 판넨베 르크]

 

Abstract

On the Holy Spirit as a Person: Focusing on Moltmann’s Understanding of Shekinah of the Spirit and its Personhood Yeongsoo Shim (Pierson Graduate School of Theology, Pyeongtaek University)

Systematic Theology, PhD Cand.) In recognizing the Triune God, the Father God faces no difficulty in perceiving and contemplating His existence through the experience of humanity, nature, and the universe-through His marvelous creation and order. Similarly, the Son God does no difficulty in recognizing His existence through the testimonies of His earthly life as the Incarnate One. In contrast, recognizing the Holy Spirit, 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 as an independent Person within the Trinity is not always straightforward, despite our descriptions in a language such as strong wind, typhoon, storm, power, and breath of life.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clarify the Holy Spirit as a reality, not an idea, amidst this difficulty of recognition; to clarify the Holy Spirit as a part of the Trinity, not as a dualistic concept; and to do so through Moltmann’s understanding of the Holy Spirit. Specifically, it seeks to expand our ontological understanding: Is the Holy Spirit, as confessed by the Council of Nicaea-Constantinople, a personal reality of the same essence as the Triune God-distinct yet inseparable? Or, as argued by Berckhof, is the Holy Spirit merely a divine ‘activity’ of the  Father or the Son? This work also holds significance in reconfirming the proper essence of the object of faith, given the Holy Spirit’s heightened emphasis across the modern Korean church (and likely worldwide Christianity). Consequently, this study proposes a dialectical unity between Moltmann’s cosmic Spirit and Pannenberg’s field theory as power of the Spirit as a new possibility for explanation, via positiva, of existence of the Holy Spirit. Despite all these cognitive struggles, the power of God unfolds in the world and the relationality established with us exists regardless of how it is historically perceived by us-whether interpreted as a distinct person from God the Father and God the Son, or simply understood as a bond or activity with the Father and Son.

[Key words: Holy Spirit, Shekinah, Universal Affirmation, Cosmic Spirit, Field Theory, Trinity, Moltmann, Pannenberg]

 

 

 

논문 투고일: 2025.10.04. 수정 투고일: 2025.11.15. 게재 확정일: 2025.11.18

조직신학연구 51 (2025): 44-84

조직신학연구 51권-전자책용.pdf
4.64MB

 

 

 http://doi.org/10.31777/sst.51..20251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