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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36)/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3회

 

 

세종 9년 1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이 임명하면서 드디어 세종 시대로 출발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고려에서 태어난 사람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조선에서 태어나거나 교육받은 사람들이 왕과 신하로 자리를 잡는 진정한 조선이 되어 간 것이다.

 

그러면 4년 전 사건인 뇌물 스캔들이 다시 정점화된 것은 우연일까?

그동안 아버지의 신하들과 기싸움을 하며 움츠러들었던 세종이 이 권력형 비리 사건을 처리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중요한 기점이 됐다.

 

이는 바로 발톱을 숨기고 있던 세종의 기획작품으로 보인다.

지난 사건을 끄집어내 처리하면서 정세를 유리하게 주도하는 아버지 태종의 이른바 묵은지 전술!

아들 세종이 배운 것이다.

 

한편, 조말생과의 정치 생명은 유배지에서 끝이 났을까?

 

그건 세종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는 청렴 보다는 능력위주 였다.

 

흠이 있더라도 그냥 버리지 않고 그의 재능을 사용했다.

그것이 세종의 인사 원칙이었다. 어찌 보면 지은 죄를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갚으라는 뜻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헌부의 강력한 처벌 주장을 누르고 충청도 회인(보령 부근)으로 유배를 보낸 세종은 2년 만에 조말생의 유배를 풀어준다.

 

이에 대간들은 조말생이 한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며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이를 묵살했다.

 

2년 후 세종이 조말생에게 직첩을 다시 주었을 때 대간들은 단체로 사직하겠다며 조말생의 정계 복귀를 막었다.

 

그렇지만 세종에게는 이미 인제 운영 계획이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세종은 조말생에게 함경도 관찰사를 맡겨 북방을 평정하고 안정시켜 조선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조말생은 중추원에서 군사 행정 업무를 관할하면서 전라 경상 충청 등 각 도의 성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군사관련 업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조말생을 처벌로 잃는 것이 아닌 용서를 통해 충성도가 높아진 인재를 국가를 위해 활용한 것이다.

 

중한 죄를 지었기 위해 육조의 주요 관직은 맡기지 않았지만 조말생은 죽을 때까지 나라를 위해 일했다.

 

조말생은 64세 부터 매년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이를 받아주지 않았고 77세까지 일을 한 후 결국 78세에 숨을 거두었다.

 

세종은 백성에게 봉사함을 빌미(?)로

능력있는 자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죽을 때 까지 부려(?) 먹는 것 또한 세종의 인사원칙이었다. 요즘 같으면 근로기준법 등 위반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4회

 

 

조선의 명재상 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황희정승이다.

 

그도 수차례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이를 반려하고 죽을 때 까지 73년간이나 공직자로서 일했다. 태조와 태종을 거쳐 세종 때까지 꾸준히 등용됐다. 육조판서와 도승지, 영의정 등 모두를 역임한 보기 드문 관료였다.

 

세종이 황희를 적용한 이유는 학문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학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버지 태종 때 황희 업무 능력을 확인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또한 적장자 양녕대군이 폐쇄자로 된 후 바로 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세종은 자신의 사람이 없었고 입지가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들에게 뭔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황희 같은 실력이 있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세종이 오랜 파트너로 영의정만 18년을 지낸 황희는 정치인의 모습이 아닌 관료 스타일 이었다.

 

어느 세력에 속해 있는 정치가라면 세 명이 왕에게 발탁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왕에게 충성말을 다짐하는 예스맨도 아니었다.

왕에게 용기 있게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았던 신하였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비리가 있었다.

1427년, 신창현(현재 충청도 아산)에서 표운평이라는 아전이 종들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종들에게 구타를 지시한 서달이라는 자였다.

 

 

이 사건은 은폐되어 묻힐 뻔했지만, 사건을 살펴보면 세종이 피해자의 석연찮은 죽음에 재조사를 명하면서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사건의 중심에 고위 관료들이 엮여 있었다.

구타를 지시해 아전을 죽음에 이르기 위한 서달은 좌의정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이었다.

 

황희는 살인자가 된 사위를 돕기 위해 신창현 출신의 우의정 맹사성에게 사건이 잘 처리될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맹사성은 죽은 표운평의 형을 불러 우리 고을의 풍속을 불미스럽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협박과 회유를 하게 된다.

 

또한 신창 현감에게 같은 이유로 사건을 잘 마무리 짓도록 했다.

 

좌의정, 우의정, 형조판서가 관련된 사건에 주변 고을의 현감들도 발벗고 사건의 해결을 위해 나서게 되고 표운평의 형과 합의를 통해 서달의 종이 살인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5회

 

조선에서는 사형에 준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살펴보도록 되어 있었고, 조서를 살펴본 세종의 재조사의 명에 의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결국 서달은 장영 100대를 맞고 유배를 갔으며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와 대사헌, 그리고 신창현 주변 다섯 고을의 현감들은 모두 파직됐다.

 

조선을 떠들썩했던 조선초 대형 스캔들이었다.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형 권력형 비리였다. 이렇듯 흠집이 많은 황희와 맹사성이었지만 세종은 그들을 다시 기용했다.

 

세종은 사람의 흠을 작게 보고 능력을 크게 보는 군주였다.

그는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인재가 많이 필요했다.

 

세종 부정이나 부패와 연결돼 파직된 공직자라도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같이 등용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게 그의 인사 스타일 이었다.

 

황희나 조말생의 경우 중범죄를 지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재등용 시 신하들의 엄청난 반발과 반대가 있었다.

 

세종은 그런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그들을 재등용했다.

 

또한 세종은 황희가 세종 자신이 아닌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사람이었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직 실력 있는 인재를 발탁해 좋은 정치로 백성을 이롭게 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고 쓰는 임금을 보며 황희는 세종의 신임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세종은 긍정적인 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점주 마인드가 있는 리더였다.

세종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리더이며 학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이 시대의 리더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늘날 우리의 국민정서는 부패와 비리 유무가 능력보다 우선시 될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6회

 

“임금은 정사에 부지런히 하고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며 날마다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나면 경연을 열되 상왕의 외유나 연회를 받드는 이외에는 잠깐 패한 일이 없었다”

< 세종실록.세종 1년 3월 27일>

 

지식이 힘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 세종은 지식인재 양성에 힘을 모으고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뒷받침했다.

 

지식경영 프로젝트 시작은 집현전이다.

집현전은 고려 인종 때 설치됐지만 모두가 겸직을 하는 유명무실한 명복상의 부서였다.

 

세종 2년, 1420년.

지덕을 겸비한 젊은이들을 뽑아 경쟁과 역사를 강론하고 임금의 자문 역할을 하는 집현전을 출발시켰다.

 

집현전은 현명한 사람들을 모은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박평년. 정인지 .신석주. 성삼문 등 우리가 잘 아는 학자들이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다.

 

이름뿐인 집현전을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 전업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학문의 보고인 집현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싱크탱크 덕분에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모든 분야에서 조선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조선의 과거시험인 식년시式年試는 3년마다 치러지며 전국에서 33명의 합격자를 뽑는다.

 

조선의 인구가 지금과 차이가 많았겠지만, 그래도 3년마다 33명을 뽑는 것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탁월한 성적을 거둔 자만이 집현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집현전의 대표적인 학사들 중 정인지는 수석 합격생이며

신숙주는 3등 합격생이다.

 

이 당시 집현전을 거쳐간 90여 명의 절반 이상이 5등 이내의 합격자로 그야말로 조선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집현전이었다.

 

세종은 훌륭한 인재들을 모아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고 왕의 정치적 보조 역할을 하며 참언 역할을 하는 집현전을 기대했다.

 

그렇기에 집현전과 그 구성원들에 대해 특별한 비리를 아끼지 않았다.

한 번은 집현전에서 술과 음식을 먹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헌부가 집현전을 감찰하려 할 때 세종의 감찰을 막았다.

 

자유롭게 학문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학사들에게 집현전 내에서는 비효율적인 기회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책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 세종은 집현전을 자주 들러 학사들을 격려했다.

 

하루는 늦은 시간에 책상에 엎어져 자고있는 신숙주에게 외관을 보내 조용히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깨어난 신숙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7회

 

 

세종은 천민일지라도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해서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조선의 천재 과학자로 알려진 장영실은 관노 출신이다.

 

출신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유연한 인재 등용 등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장영실은 역사에서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의 평생 파트너인 황희도 역시 서얼 출신이었다.

 

세종은 재능을 알아보는 용인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신숙주가 음운과 외국어에 능함을 알고 집현전에 배치돼 훈민정음의 해설서를 만들 때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박연은 과거에 합격한 문신이지만 음악의 능함을 알고 아악을 정리하도록 장학원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 전문성을 가지고 깊이 있게 연구하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긴 시간을 믿고 기다려주는 군주였다.

세종이 만든 사가독서제는 인재 양성을 위해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게 전념하게 한 제도이다.

 

당시 학자인 신숙주 .성삼문 등은 이 제도를 통해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재충전의 기회를 주는 데 무급이 아닌 유급 휴가를 준 것이다.

이는 독서를 여가 선용으로 본 것이 아니라 업무의 연장으로 인정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을 재소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그를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 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세종실록 . 세종 8년 12월>

 

휴가를 즐기며 책을 읽는 ‘셰익스피어 휴가’라는 말이 있다.

영국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빅토리아 여왕 때의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은 고위 관료들에게 3년에 한 번씩 한 달에 유급 휴가를 주어 셰익스피어 작품 5편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400년이나 앞선 조선의 사가독서제를 어찌 ㅜ알고 사용했을까?

 

이는 좀 더 멀리 내다보는 통치기술로 책을 통해 얻은 지혜를 국가 경영을 위해 사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세종은 지식 경영을 위한 인재 양성에 애정을 갖고 갖고 실질적으로 투자했다.

그리고 성과를 얻어냈다.

 

세종은 학습하는 군주답게 경연을 통해 국정 운영에 중요한 일를 결정했다.

 

아버지 태종이 18년간 약 60회, 1년에 3.3회 경연을 연 것을 기준으로 할 때

세종은 32년간 약 2천 회 1년에 60회 . 한 달에 5회 경연을 열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토론하며 국정을 부지런히 살폈던 학습군주였다.

또한 세종은 인재경영. 지식경영으로 성과를 일궈낸 최초의 군주라고 해도 무방하다.

 

오늘날 모든 리더들이 세종대왕의 찬란한 성과가 학습에서 시작됐음을 깨달았으면 할 것이다. 리더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다양한 분야의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민족의 영웅에 대한 침튀기며 감탄만 하지 말고 그분이 보여주고 가르쳐준 학습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행해야 될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8회

 

 

어릴 적부터 많은 역사서를 접하며 군사력만으로 강국이 될 수 없음을 안 세종은 문화강국을 꿈꾸며 조선을 위한 조선의 것들을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과학과 문화 분야에서 명나라의 것을 표방하거나 따르는 것이 많았으며 언어 기후 향토 계절 등 서로 다름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해결해 보고 싶었다.

 

그 프로젝트의 중심에 바로 민족의 언어 즉 한글 창제가 있었다.

 

한글이 창제된 해는 세종 25년인 1443년이다.

 

“이달의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아어鯉魚에 관한 것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해례본은 1책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예의例義 편으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사용법에 대해 서술했고 2권은 해례解例편으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적용에 대한 설명으로 지도서나 해설서 역할을 했다.

 

한글 창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세종의 집행전 학사들을 통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한글 창제는 세종의 단독 작품으로 봐야 된다.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면, 세종이 주도했고 맏아들 문종과 정의공주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

 

흔히 훈민정음 창제에 집필전 학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는 오해의 시작은 이조선 전기 성현이 쓴 ‘용재총화’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고 그런데 이 기록은 한글 창제 후 61년이 지나 편집됐으며, 한글 창제 당시 성현의 나이는 4살에 불과했다.

 

한글 창제가 아닌 해설 지도서인 해례본과 편찬 작업에 참여한 것을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내용은 ‘동갑잡기’에도 나오는데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그 후 신숙주와 성삼문 등에게 운서를 편찬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 한글 창제를 시작부터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작업했다면, 집현전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최만리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세종 26년 2월 훈민정음 창제 두 달 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 7명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훈민정음을 창제는 세종의 단독 작품으로 봐야 되며 당시 명나라와 갈등을 고려하고 신료들의 반대가 분명할 것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9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직접적인 이유는

백성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문자를 몰라 불이익을 당하고 옥살이 하는 백성들의 억울함에 대해 집현전 학사들과 언쟁하는 기록이 있다.

 

당시 법률문서는 한자와 이두가 섞여 이 또한 어려웠다 .

 

이에 세종은

“ 백성이 글을 읽을 줄 안다면 지금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이 줄어들 것이다.”

라고 하며 말과 글이 다른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소리글자를 만드니 배움이 짧은 백성들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고 눈 감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무지한 백성을 깨우쳐 그들의 삶이 좀 더 윤택해 지길 바랬다 ,

 

군주로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으며 무엇보다 주체성이 강한 자주적인 군주였다. 언어는 명나라처럼 대국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조선의 언어를 만들겠다는 상상 자체가 쉽지 않은 발상이었다. 한글 창조 후 3년간의 준비 즉 훈민정음 글자를 다듬고 쉽게 배우고 정복할 수 있도록 자세한 풀이를 담아 1446년 음력을 9월 훈민정음이라는 책으로 책으로 편행 펴내며 한글을 반포한다. 이날을 유추하니 양력으로 10월 9일인 것이다.

 

즉 한글 발포일을 현재 《한글날》로 삼은 것이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국제질서 속에서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게 정치 외교적으로 사대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세종 역시 철저하게 명나라를 존중하며 사대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사대하는 실리 외교를 위한 일종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4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사대주의에 갇히지 않고 자주적인 활동으로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할 수 있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세종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친미, 반미. 친중. 반중을 외치기보다는 쓸 용用 자를 써 용미 용중을 생각할 때가 아닐까!

 

우리보다 강한 나라를 이길 수 없다면 그들을 이용해 실리를 얻는 세종의 지혜로움은 오늘날에도 팔요한 덕목이 아닐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0회

 

칠정산七政算

 

칠정산은 1442년에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달력이다.

 

이때까지 조선은 중국의 역법을 빌려 사용했다. 하지만 위도와 경도가 다른 중국의 위치에서 계산된 역법이 조선에 맞을 리 없었다.

 

세종은 농사가 전부였던 백성들에게 절기와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려면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천문 계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한양을 중심으로 만든 역법서인 칠정산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중국과 아라비아 그리고 조선이 역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가짐으로써 조선은 시간의 주권을 가지게 됐다.

 

[농지천하지대본]

농사는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 되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던 조선에서 농업 관련 서적은 모두 중국 것이었다.

 

기후와 토양이 다른 중국의 농사법을 조선에 적용하기 위한 문제점이 많았다.

세종은 정초와 변효문 등으로 하여금 전국의 농민들의 경험담을 놓아 각 지역에 맞는 농사법을 상세히 담은 농업책을 편찬하게 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농협 서적인 《농사직설》이다.

세종은 농민들이 경험을 담은 농사를 만들어 보급하면서 백성들이 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우리 땅과 우리 기후에 맞는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토지 한 결당 한 결당 쌀의 생산량이 무려 4배까지 증가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기승전 백성으로 종결되는 세종의 정치 철학과 사랑이 만든 엄청난 성과였다.

세종 20년 이후 백성이 굶주렸다는 기록은 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세종 15년에 간행된 향약에 관한 의학서이다.

유효통 .노중래 박윤덕 등이 우리 주변에서 나는 약재에 관한 처방전과 치료법을 담은 종합의학서이다.

모든 질병들을 54문門, 959개의 병증으로 나누고 병증마다 원인과 증상 그리고 치료 처방과 민간요법을 설명하는데 그 수가 약 1만 700여 개에 달했다.

 

세종은 명나라가 선진국이었지만 맹목적으로 모든 것을 따르는 것에서 부작용이 있음을 알고 우리에게 맞는 것을 찾고자 만드는 지혜로운 군주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1회

 

 

세종의 업적으로 안보 정책을 빼놓을 수가 없다.

 

조선이 물려준 땅을 헛되이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해 조선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해 영토를 확장했다.

 

두만강 지역에는 문신인 김경수를 보내 과거 우리 땅이 어디까지인지 조사해보고 결정하도록 했다.

 

고려 때 윤관이 만든 동북 9성의 위치를 찾아보고 공험진에 비석을 세웠다고 하니 확인해서 조선의 영토를 어디까지 할지를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온성 종성 회령 부령 경원 경흥 6진을 설치한다.

이때 만든 행정구역이 지금은 한반도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압록강 지역은 무장 최윤덕을 보내 여진족을 토벌하고 어연 우예. 무창 자성에 4군의 행정구을 설치했다.

4군은 명나라와 맞닿은 지역이기에 조심스러운 군사 작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켜 국보를 창출하고 싶었기에 기름진 그 땅을 취하고 조선의 백성을 괴롭히는 여진족을 몰아내 북진 정책을 마무리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세종의 국방력 강화를 위한 체계적으로 군사지도를 정비했다.

 

몽골과 여진족 등 북방 세력을 막기 위해 육군 중심의 군대를 양성해 4군 6진을 방비하고 세력이 커진 남쪽의 왜구를 막기위해 수군의 규모를 확대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세종은 꾸준히 무기 개발에 힘썼다.

특히 조선의 자랑인 화약을 이용해 무기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신기전神機箭은 한자 그대로 귀신 같은 기계식 화살이라는 의미를 지지고 있는데,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여진족과 같이 기병을 주 공격으로 하는 적을 상대할 때는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됐다.

 

대신기전은 길이가 무려 5m 60cm로 화약에 의해 1~ 2km를 날아가는 조선의 첨단 무기로 현 시대의 로켓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세종은 외세에 휘둘리는 조선이고 싶지 않았다. 국력이란 경제 문화와 군사력이 함께 성장할 때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런 강력한 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2회

 

조선 최초의 국민투표~

노비의 출산휴가 실시~

세종대의 애민정책 ~

 

세종 12년(1430년)

조선 최초의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새로운 세법인 공법 제정을 두고 국민들에게 찬반을 물은 것이다.

 

수확량의 10분의 1을 징수하던 기존의 정률 세제 방식을 대신하여 토지 1결당 쌀 10두를 걷는 정액세제 방식인 공법貢法을 마련하고자 본 국민의 의견을 수렴한 것이다.

 

“정부. 6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 각 품관과,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세종 12년 3월 5일>

 

국민투표는 1430년 3월 5일에 시작해 그해 8월 10일까지 총 5개월이 소요됐다.

 

전근대 사회에서 특히나 왕권 국가에서 이렇게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정책을 결정한 사례는 없었다.

 

세종 12년 8월 10일,

담당 부서인 호조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투표 인구 172,806.명 노비와 여자 어린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호주戶主들이 참여한 의견 수렴으로 국민의 4분의 1에 투표에 참여한 것이다.

 

찬성 57.1%(98,657명) ).반대 42.9%(74,149명)로 평지가 많은 경기 전라 경상 지역은 찬성 비율이 99%였다. 하지만 산지가 많은 평안 함경 강원 지역은 반대율이 90% 이상이 압도적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반대가 많고 지역적 편차가 큰 정책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실핼할 수 없다. 각 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그 공법貢法의 편의 여부와 답사에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백관으로 하여금 숙의熟議하여 아뢰도록 하라

< 세종실록 세종 12년 7월 5일>

 

국민투표 직후 세종은 문제점 파악을 위해 현장에 관리를 파견했다. 또한 대신들과 공법의 보완점 및 개선점에 관해 논의를 진지하게 해나갔다

 

찬성이 많이 나왔지만 반대도 적지 않아 바로 시행하지 않고 계속해서 개선책을 연구했다.

그리고 마침 세종 26년 법률을 확정 짓고 전국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무려 14년이나 걸린 것이다.

개선된 공법은 「전분6등법」과 「연분 9등법」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전분6등법은 토지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연분9등법은 한 해의 풍흉 정도를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의 9등급으로 나누어 그 해의 등급에 따라 토지 1결당 걷는 세금 액수를 정하는 방법이다

 

1결로 1결당 10두를 일률적으로 징수하려던 원안에서 백성들의 형편을 섬세하게 살피어 정교하게 다듬어낸 정책이었다.

 

한 명의 백성이라도 부당하게 많은 세금을 내며 고통받는 자가 없도록 하고 싶었던 세종은 신중했다.

 

백성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느리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게 된 것이다.

 

세종이 정말 백성을 사랑하는 예민군주라는 것이 한글 창제와 국민투표를 통해 세제의 계획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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