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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창군고난사(3)/받은 글

 

https://blog.naver.com/pjjyym/224157153194

《創軍의 苦難史 제21회》

☆기갑연대 ~ 제25연대 창설☆

 

미군정청과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에서는 46년 11월에 창설한 제주도 9연대를 끝으로 부대 창설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947년 9월에 북한에 강동정치학원이 설치되어 유격대 양성하여 남한으로 침투시켜 남한의 후방지역을 교란시키려 한다는 정보와 북괴군이 사단급 부대를 창설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48년 1월 1일부로 경기도 수색에 기갑연대, 동년 5월 1일부로 강릉에 10연대, 수원에 11연대, 군산에 12연대, 대전에 13연대, 여수에 14연대, 마산에 15연대를 창설하고,

 

동년 10월 28일에는 마산에 16연대, 11월 20일 경기 시흥에 17연대, 포항에 18연대, 전남 광주에 19연대, 동일부로 광주의 4연대를 20연대로 개편, 49년 2월 1일부로 21연대를 광주에서 창설, 49년 4월 15일 부로 대구 6연대를 22연대로 개편, 49년 6월 20일에는 마산에 23연대 창설, 동일부로 대전에 25연대를 창설하여 38선 일대의 경계를 보강하고 적의 후방교란작전에 대비하였습니다.

 

북괴군은 48년, 49년에 옹진반도와 개성지구의 아군에게 정규군으로 공격해 왔으며 오대산과 태백산 줄기를 타고 강동정치학원에서 양성한 인민유격대를 대량으로 침투시켰습니다.

 

옹진반도에서는 17연대가 응전을 하고 개성에서는 11연대가 응전하였습니다.

 

오대산과 태백산 줄기로 침투해오는 인민유격대에 대해서는 10연대와 16연대가 효율적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참고로 사단 창설은

47년 12월 1일부로 1여단부터 7여단까지 창설하였는데 49년 5월에 국군조직법이 제정ㆍ발효됨에 따라 각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다만, 수도사단과 8사단은 여단과 관계 없이 사단 창설)

 

사단 창설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소개하겠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2회》

☆기갑연대 창설☆

기갑연대는 1948년 1월 1일부로 경기도 고양군 수색에서 제1여단 수색대 이용문 소령(일본육사 50기)이 창설하였습니다.

 

장갑중대(장갑차 27대)와 기병중대(말 300필) 2개중대를 편성하고 7월 초에 서빙고로 이동하여 경비대 총사령부 직할대로 예속되었습니다.

 

1948년 10월 말에는 장갑중대가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부대로 출동하였습니다.

 

동년 11월에 장갑중대가 복귀하고 수색대를 수색단으로 승격시키고

48년 12월 10일에는 기갑단으로 명명하고 초대 단장에 이용문 소령이 유임되었으며 중령으로 진급되고

49년 4월에는 기병대대를 창설편성 하였으며

49년 7월 30일에는 이용문 중령이 대령이 되어 육본 정보국장으로 영전하고 2대 연대장은 부연대장 유흥수 중령(학병/일본 전수대)이 취임하여 보병대대와 군견중대를 추가 편성하여 연대를 완편하였습니다.

 

이후 독립기갑연대로 육본직할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다 6.25를 맞았습니다.

 

육본에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기갑연대를 중대단위로 분산하여 보병사단에 배속시켜습니다.

 

다시 낙동강 전선에서 부대를 수습하여 수도사단에 예속되어 안강ㆍ기계전투와 북진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북진작전 때는 수도사단 작전참모 이 용 중령(봉천군관학교 특별반 출신/강원도지사 역임)이 제3대 연대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제10연대 창설☆

10연대는 1948년 5월 1일 강릉의 제 8연대 3대대를기간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초대 연대장에 백남권 소령(학병/일본 상업전문)이 취임하여 7월부터 태백산과 오대산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49년 5월 25일에는 2대 연대장으로 송요찬 중령(일군하사관/군번96번)이 취임하여 공비토벌작전에 임했으며 동년 7월 25일에는 3대 연대장으로 오덕준 중령(학병/관서대/군번59번)-50년 3월 15일에는 4대 연대장에 고근홍 중령(경비사관 1기)이 이어받아 6. 25를 맞았습니다.

 

☆제11연대 창설☆

11연대는 48년 5월 1일 수원에서 박진경 중령(학병/오사카 외국어대/군번91번)이 창설하고 5월 5일 제주도 파견명령을 받고 제주도로 이동하여 9연대를 흡수하여 한라산 인민유격대 토벌에 참가하였습니다.

 

토벌작전 중 6월 18일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피살 당하고 2대 연대장에 최경록 중령(일본군 준위/군번 11번)이 취임하여 임무를 수행하다 7월 24일 부연대장 송요찬 소령(일본군 하사관/군번 96번)에게 일부 병력과 장비를 인계하고 수원으로 복귀하고 병력을 증원하여 연대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송요찬은 9연대를 재창설하여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을 계속함)

 

49년 1월에는 수원에서 경기도 서북부 지역 문산으로 이동하여 5월 부터 개성 송악산 전투를 치루었는데 이때 육탄 10용사가 탄생하였습니다.

 

10연대에도 예외없이 내부에 남로당 좌익분자들이 암약하고 있었으며 6중대에서 12명이 집단으로 월북하는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 23회》

☆제 12연대 창설☆

12연대는 군산에 주둔하고 있는 3연대 2대대를 기간으로 48년 5월 1일부로 창설되었는데 초대 연대장은 현직 대대장인 백인기 중령(학병/군번 88번)이 임명되었습니다.

 

12연대는 동년 10월 1일부로 3개대대가 완편되었으며 동월 20일에는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학병/명치대/군번23번)이 2,3대대를 이끌고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작전을 위해 제1진으로 순천으로 출동하고, 연대장 백인기 중령은 제 2진으로 동월 25일에 연대본부와 1대대를 이끌고 14연대 반란군을 토벌하러 구례로 출동하였습니다.

 

이때는 남원에 2여단 사령부(원용덕 대령)가 설치된 이틀 뒤였습니다.

 

반란군(이하 빨치산) 토벌작전을 진행하던중

동월 11월 4일 구례읍에 지휘소를 두고 있는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은 남원에 있는 전투사령부 작전회의에 참석하려고 산동고개를 넘어가다 빨치산 매복조의 기습을 받아 수행하던 헌병과 운전병은 사망하거나 탈출하고 연대장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피했으나 추격하는 빨치산 소대를 따돌리지 못하여 권총으로 자결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제2대 연대장은 송석하 중령(봉천군관학교 5기/경비사관2기)이 이어받았습니다.

 

49년 1월 29일에는 토벌작전을 마치고 인천으로 이동하였으며 5월 14일부로 강영훈 대령(학병/만주 건국대/군번101번)이 부임하여 17연대와 함께 옹진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49년 6월 5일에는 인천에서 파주군 문산으로 이동하고 7월 16일에는 4대 연대장에 전성호 중령(경비사관 1기)이 취임하고 50년 4월에 개성으로 이동하여 1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38선 경계를 담당하다 6.25를 맞았습니다.

 

☆제13연대 창설☆

13연대는 48년 5월 4일 천안의 제2연대 2대대에서 1개중대를 차출하여 대전에서 창설하였으며 초대 연대장에 이치업 중령(학병/일본 동화고보/군번 34번)이 취임하였습니다.

 

1개월 조금 지난 동년 6월 11일부로 이성가 중령(중국군 소령출신/군번37번)이 부임하였는데 대전에서 온양으로 이동하였으며 8월 14일에 이성가 중령이 제4연대장으로 가고 3대 연대장으로 김익렬 중령(제주 9연대장에서 해임된 사람)이 보직되었습니다.

 

김익렬 중령은 49년 1월 25일 연대를 경기도 고양군 수색으로 이동하였다가 6.25를 맞았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4회》

☆제14연대 창설과 반란☆

 

14연대는 1948년 5월 4일부로 광주의 제 4연대에서 차출된 50명의 기간요원이 여수읍 신월리(여수시 신월동) 구 일본해군 항공기지에서 이영순 소령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이영순 소령은 일본 해군중위 출신이었습니다.

 

5월 14일부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4연대 3대대(안영길 대위/경비사관 1기)가 14연대로 편입되었으며 1개월 반만인 6월 18일 이영순 소령이 나가고 김익렬 중령이 부임하고 7월 15일에는 3대 연대장에 오동기 소령(중국 오패부 부대 소령출신/경비사관 3기)이 부임하였습니다. 이 오동기 소령은 인민해방군 사건으로 9월 29일 체포되고 10월 7일에 박승훈 중령(일육사 26기)이 4대 연대장에 취임했다가 10월 19일 반란사건을 맞게 된 것입니다.

 

10월 28일 14연대는 해체되고

박승훈 연대장은 파면되었습니다.

 

◇14연대 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은 현역군 1개연대 전부가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반역사건으로 제주 4.3폭동사건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사건으로 자칫 국가가 전복될 수 있었던 위험천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지 2개월밖에 되지않은 1948년 10월 19일 20:00시에 여수읍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가 제주도 폭동진압을 위해 출발(22:00시)하기 2시간 전(20:00시)에 연대 인사계(현 주임원사) 지창수 특무상사와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 순천역 철도 경비중대장 홍순석 중위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습니다.

 

병력들은 19:00시에 저녁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지창수가 골수 좌익분자 40명을 소집하여 탄약고에서 실탄을 분배하고 20:00시에 비상나팔을 불어 연대병력을 집합시켰습니다.

 

제주도로 출발하게 되어 있는 1대대는 배를 타러 가는줄 알고 완전군장으로 집합했고 2,3대대는 환송하기 위해 집합하는줄 알고 연병장에 모였습니다.

 

그때까지 간부식당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대대장들과 중대장 몇명이 비상나팔 소리에 병사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연병장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이때 실탄을 장전하고 있던 좌익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 때 경비사관 2기인 대대장 3명과 연대 작전과장, 3기인 중대장 및 참모 장교 5명, 소대장급 장교 15명이 피살되고 하사관 40여명도 함께 피살되었습니다.

 

지창수는 연단에 올라 " 지금 경찰과 해군이 우리를 죽이려고 부대를 외곽에서 포위하고 있다. 우리는 제주도에 가서 동족상잔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인 인민해방군이 38선을 넘어오고 있다. 시내로 출동하여 우선 경찰부터 모조리 죽이자!"라고 선동을 하니, 멋모른 사병들은 옳소!를 외치며 미리 지급받은 실탄을 휴대하고 시내로 쏱아져 나갔습니다.

 

이 시각에 연대장 박승훈은 여수항에 나가 곧 출발하게될 LST(해군함정)에 적재된 화물을 점검하고 있어 주둔지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반란군이 된 14연대 병력 2천여명이 위병소로 쏱아져나가니, 벌써 정문에는 여수 인민위원회 소속 간부 23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인민해방군 만세"를 외치며 반겼습니다.

 

이럴게 시작된 반란이 삽시간에 여수시내를 피바다로 만들고 이튿날 아침에는 순천으로 북상하여 기다리고 있던 철도중대장 홍순석 중위와 합세하여 순천시내를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양민 2,533명이 학살되고 3,200동의 가옥이 파손되었으며, 반란군 및 민간 용공분자 755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진압군도 61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광주 4연대, 군산 12연대, 전주 3연대, 마산의 15연대, 대구 6연대에서 1개대대씩을 차출하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진압작전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되자 반란군은 견디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0월 말부터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된 것입니다.

 

#14연대는 근원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초대 연대장 이영순 중령이 1개월, 2대연대장 김익열 중령도 1개월 정도에서 연대장직에서 쫓겨났고 3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2개월여를 햇는데 그는 남로당 푸락치였습니다.

 

이 者는 연대장을 하면서 거물간첩 성시백과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과 통하면서 반란의 씨앗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것이 발각되지 않았더라면 9월 말에 구속되지 않았을 것이고 반란이 어떤 형태로 발생했을지 알수가 없습니다. 오동기가 연대장을 2개월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경비대 사령관 송호성이 성시백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부대를 파악할 시간도 없이 보직된지 12일만에 반란을 당했는데 이 사람은 일본육사 26기로 이미 나이가 50대 중반이 지나 부대를 장악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창수 같은 골수 좌익들은 평소에 여수 인민위원회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시기를 점치고 있었는데 그걸 까마득이 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14연대는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5회》

☆제15연대 창설과 최남근 연대장 총살☆

 

15연대는 1948년 5월 4일 진해에 주둔하고 있던 5연대 1개대대를 근간으로 조 암 중령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조 암 중령은 학병 출신으로 47년 5월 4연대장에서 보직해임된 사람인데 15연대 창설연대장으로 보직을 받은 것입니다.

 

조 암 중령은 보직받은지 1개월만에 물러나고 6월 18일부로 최남근 중령(봉천군관학교 7기)이 부임하였습니다.

 

최남근 중령은 10월 22일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개대대를 이끌고 차량으로 여수로 이동하던 중 전남 광양에서 14연대 반란군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최남근이 납치된 상황은 아래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최남근이 반란군에게 잡혀가자 신상철 중령(일육사 58기)이 연대장 대리로 보직되었다가 11월 25일 김현수 중령(학병/군번 68번)이 3대 연대장으로 보직되어 여수로 이동하여 진압작전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듬해(49년) 3월 15일부로 제 4대 연대장에 윤춘근 중령(만주군 대위/경비사관 2기)이 보직되었으며 동년 8월에는 순천으로 이동하고 9월 28일부로 제 5대 연대장으로 송요찬 중령이 보직되었다가 50년 4월18일부로 대령으로 진급하여 헌병 총사령관으로 영전하고 제6대 연대장으로 최영희 중령(학병/군번51번)이 보직되었으며 5월 3일에는 전주로 이동하여 교육훈련 중 6.25를 맞았습니다.

 

◇최남근 연대장은 왜 총살되었는가?◇

15연대는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부대로 지정되어 10월 22일 최남근 연대장이 1대대(대대장 한진영 대위/경비사관 2기)를 이끌고 마산을 출발하여 하동을 거쳐 광양군 옥곡면 S자 커브를 돌아가는데 첨병중대인 3중대가 갑자기 반란군의 기습사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중대장 손소위(경비사관 5기)가 총을 맞고 쓰러지고 대대장 안진영 대위가 차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다 반란군이 쏜 총에 맞아 즉사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최남근 연대장은 자신이 직접 첨병중대쪽으로 나가 상황을 수습하는척 하다 반란군과 함께 산속으로 잠적해버렸습니다.

 

그때 뒤따라 가던 1중대장 조시형 소위((경비사관 4기)도 함께 없어졌습니다.

 

최남근은 그때까지 장병들에게 실탄도 분배하지 않았으며 왜 여수로 출동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반란군에 대해 추격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최남근 연대장이 사라지고 대대장도 없는 상황에서 최정호 대위(경비사관 2기)가 1대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는 반군과 싸우러 하지않고 방관하였습니다. (그는 남로당 푸락치였는데 나중에 월북하였음)

 

최남근 중령은 5일 후10월 27일 조시형 소위와 함께 하동군 화개장터에 말쑥한 군복차림으로 나타났다는 신고가 육본 정보국에 접수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부산 5여단에 최남근이 찾아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최남근은 5여단에 가서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염탐하러 간 것입니다.

 

5여단장 김백일 대령은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정보국에서 당신을 찾고 있으니, 오늘 밤 열차를 타고 상경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최남근은 밤열차를 탔고 5여단에서는 최남근이 상경했다고 보고를 해서 김창룡 정보팀이 서울역에서 대기를 했는데 최남근은 대전역에서 내려 잠적해버렸습니다.

 

최남근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서울로 잠입하여 남로당 책임자 김삼룡을 만나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했는데 김삼룡은 최남근에게 지리산으로 내려가서 반란군을 지휘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김창룡 정보팀은 인사동 설렁탕집에 잘생긴 신사가 자주 찾아든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며칠을 잠복하다 붙잡았는데 그가 바로 최남근이었습니다.

 

최남근은 김창룡 방첩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49년 5월 26일 수색에서 총살되었습니다.

 

조사결과에 의하면 최남근은 북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남한에 내려가 군에 입대하여 간첩행위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였으며 6연대에서 좌익 사병을 양성했고 반란군 진압작전에 출동하면서는 고의적으로 실탄을 분배하지 않았고 출동하는 목적을 부하들에게 알려주지 않은점, 반란군 수괴 김지회에게 일부러 투항해 들어가서 반란군에 합세 하겠다고 모의한 점 등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상이 명백하였으므로 총살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그때는 국가보안법이 공포된 이후였음)

 

 

 

《創軍의 苦難史 제26회》

☆제16연대 창설☆

 

16연대는 마산 15연대 3대대를 기간으로 하여 48년 10월 28일부로 박시창 중령(중국군 대령출신)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당시 15연대 1,2대대는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작전에 투입되어 있었음)

 

49년 5월 25일에는 이형석 대령(일육사 30기/일본군 중령출신)이 보직되고 6월 20일에는 충북 청주로 이동하였으며 8월 12일부로 이성가 대령이 보직되었다가 9월 1일부로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을 겸직하면서 태백산으로 침투한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50년 4월에는 강원도 정선에서 인민유격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제주도 인민유격대장을 했던 김달삼을 사살하였습니다.

 

김달삼은 48년 8월에 제주도를 탈출하여 북한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 회의"에 참석했다가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300여명의 인민유격대를 이끌고 태백산 줄기로 침투하였습니다.

 

50년 6월 10일에는 이성가 대령이 8사단장으로 영전하고 4대 연대장에 문용채 대령(봉천군관학교 5기/군번 52번)이 부임하였다가 6.25를 맞았습니다.

 

☆제17연대 창설☆

17연대는 48년 11월 20일부로 12연대 1개대대를 기간으로 경기도 시흥에서 백인엽 중령(학병/명치대/군번 23번)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49년 6월에 수도경비를 위해 서울 용산으로 이동했다가 동년 11월에 옹진반도로 이동하여 2연대와 함께 옹진지구 전투사령부(김백일 대령)에 소속되어 전투를 벌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7회》

☆제18연대 창설☆

18연대는 제5연대와 6연대에서 차출된 일부병력을 기간으로 48년 11월 20일 최 석 중령(학병/일본 조도전대/군번 75번)에 의해 포항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동년 12월 10일 대구로 이동하였으며 49년 1월26일에는 대구에서 충남 온양으로 동년 6월 6일에는 옹진지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8월 12일부로 최석 대령이 보병학교로 전출되고 2대 연대장으로 김종갑 대령이 부임하였습니다.

 

동년 11월 13일부로 김종갑 대령이 7사단 참모장으로 전출되고 3대 연대장에 임충식 중령(경비사관 1기/국방장관 역임)이 부임하여 50년 서울 용산으로 이동하여 수도경비사령부에 예속되었다가 6.25를 맞았습니다.

 

☆제 19연대 창설☆

19연대는 48년 11월 20일 20연대(前4연대)에서 500명의 병력을 차출한 병력과 갓 임관해온 경비사관 7기 30명으로 민병권 소령(학병/일본 중앙대/군번 86번)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49년 1월에 대전으로 이동하고 6월에는 서울 서빙고로 이동하였으며 50년 1월에는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동년 4월에는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여 6사단에 예속되어 6.25를 맞았습니다.

 

☆제 20연대 창설☆

20연대는 48년 11월 20일 4연대를 20연대로 개칭한 연대이며 4연대장 이성가 중령이 그 자리에서 20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초대 연대장이 되었습니다.

 

11월 25일부로 위대선 중령(학병/군번66번)이 부임하였는데 그는 49년 3월 19일 나주에서 공비토벌 작전중 전사하였습니다.

 

3월 31일에 3대 연대장으로 박기병 중령(일본군 하사관/군번 21번)이 부임하여 6.25가 발발할 때까지 공비토벌 작전을 계속하였습니다.

 

☆제 21연대 창설☆

21연대는 49년 2월 1일부로 광주에서 박기병 중령(일군 하사관/군번 21번)이 창설하였습니다.

 

동년 3월 15일에는 2대 연단에 김관오 중령(중국 운남강무당 출신)이 부임하였으며 6월 10일에 강원도 삼척으로 이동하여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50년 6월 17일에 김용배 중령(학병/서울법전/군번 77번)이 3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6.25를 맞았습니다.

 

☆제 22연대 창설☆

22연대는 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문제가 많아 49년 4월 15일부로 부대명칭을 22연대로 개칭한 부대이며 당시 6연대의 7대 연대장이던 오덕준 중령이 그 자리에서 초대 연대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동년 5월 25일에는 오덕준 연대장이 호국군 참모장으로 전출되고 2대 연대장으로 장두권 중령(중국군 출신)이 부임하였으며, 동년 12월 19일에는 이상철 중령(학병/교토 입명관 대학/군번81번)이 부임하였습니다.

 

50년 2월 15일부로 강태민 중령(일육사 58기)이 부임하였다가 6.25를 맞았습니다.

 

☆제23연대 창설☆

23연대는 49년 6월 20일 마산에서 16연대 1개대대를 기간으로 김종면 중령(학병/일본 중앙대/군번 62번)이 창설하였습니다.

 

동년 7월 15일에는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며 9월 20일에는 제2대 연대장으로 장석륜 대령(만주군 중령/군번 4번)이 부임하였으며 11월 18일부로 부연대장 김종원 중령(경비사관 1기)이 대령 진급과 동시에 3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경북 안동으로 이동하여 태백산 지구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6.25를 맞았습니다.

 

☆제25연대 창설☆

25연대는 49년 6월 20일 대전에서 19연대 1개대대를 기간으로 유해준 중령(황포군관학교 15기/군번 36번)이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50년1 월 20일에는 장두권 중령이 2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동년 4월에는 충남 온양으로 이동하였으며 6월 10일부로 제 3대 연대장으로 김병휘 중령(학병/서울법전/군번74번)이 부임하였다가 6.25를 맞았습니다.

 

이상으로 6.25전쟁 이전까지의 연대 창설 과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부대창설 과업만도 힘겨운 일인데, 내부에는 좌익분자들이 말썽을 부리고 -심지어는 반란까지 일으키고-

 

상관을 구타하여 쫓아내는 불상사가 발생했는가 하면 미군들과는 "네가 지휘관이냐? 내가 지휘관이다."로 싸우고 38선에서의 국지전, 태백산과 지리산에서의 공비 토벌작전, 한달이 멀다하고 자주 교체되는 연대장, 불비한 병영여건 등 2重 3重苦를 견뎌내며

오늘의 현대화된 국군의 기초를 닦아놓으신 선각자들의 우국충정에 깊은 감사를 전해 올립니다.

 

다음 회부터는 사단 창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창설과정에서 있었던 숨은 이야기들을 소개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8회》

☆수도사단 창설☆

사단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49년 5월에 국군조직법이 제정되고나서 창설되었습니다.

 

수도사단은 49년 6월 20일에 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가 모체입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권 준 대령(광복군 출신)이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창설하였는데, 6.25 전쟁으로 서울이 3일만에 점령 되자 수도방위의 목적이 상실됨으로써 7월 5일 한강 이남에서 수도사단으로 부대명칭을 변경하고 뿔뿔이 흩어져 내려오는 7사단의 1연대를 넘겨받고 7월 8일에는 8연대와 18연대를 받아 정식사단으로 재편하였습니다.

 

충청도 진천으로 이동해서는 김석원 준장(일육사 27기)이 2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북괴군 2사단을 7일간 발을 묶어놓고 남진을 막아냈습니다.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한 사단은 안강ㆍ기계에서 전투 중에 7사단이 재창설 함에 따라 8연대를 넘겨주고 대신 기갑연대를 받아 북진대열에 참여하였습니다.

 

북진 때는 한국군 최초의 1군단이 창설됨에 따라 3사단과 함께 1군단에 배속되었습니다.

 

동해안 축선을 따라 3사단과 바톤을 주고받으며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세가 불리하여 1군단이 해상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혼잡한 상황이다 보니, 18연대는 3사단 배에 타고 3사단 26연대는 수도사단 배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선하는 도착지가 각각 달라 육본에서 연대를 원소속 사단으로 보내지말고 그대로 소속을 바꾸라는 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18연대는 3사단에 26연대는 수도사단(수기사) 예하부대로 남아있습니다.

 

*49년에 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와 1961년 6월 1일부로 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는 별개의 부대입니다.

 

지금의 수방사 전신은 61년 5.16 혁명정부에 의해 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이고, 현재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전신은 49년에 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입니다.

*1973년 월남에서 철수한 수도사단이 3월 21일부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도사단의 부대마크 "맹호"는 8대 사단장 송요찬 장군이 창안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9회》

☆제1사단 창설☆

1사단은 1947년 12월 1일 서울에서 창설된 1여단(여단장 송호성 준장)이 49년 5월 12일 사단으로 승격된 부대(사단장 김석원 준장)입니다.

(예하부대로는 11, 12, 13연대와 포병 1개 대대로 편성되었음)

 

동년 5월 말 개성 송악산에서 11연대가 북괴군과 전투 중 육탄 10용사가 탄생하였습니다.

 

동년 10월 1일부로 유승렬 대령(일 육사 26기)이 2대 사단장으로 취임하였으며, 50년 4월 22일에는 백선엽 대령(봉천군관학교 9기)이 3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6.25를 맞았습니다.

 

백선엽 사단장은 6월 14일부터 시흥 보병학교에서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6.25 당일 아침에 사단 작전참모로 부터 북괴의 남침소식을 듣고 사단사령부가 있는 수색으로 달려가 전투를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전선이 문산과 봉일천으로 밀릴 때 15연대(최영희 중령)가 증원되어 4개연대로 싸웠습니다.

 

7월 말에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한 1사단은 다부동 전투의 신화를 남겼으며 북진 시에는 10월 19일 제일 먼저 평양을 탈취하는 전과를 세웠습니다.

 

☆제 2사단 창설☆

제 2사단은 1947년 12월 1일부로 대전에서 창설되었던 2여단(여단장 원용덕 대령, 만주 군의학교 출신)이 49년 5월 12일 2사단으로 승격된 부대이며 초대 사단장으로 5월 19일 유승렬 대령(일 육사 26기)이 부임하였습니다.

(예하부대로는 2,3,4연대로 편성되었음)

 

6.25전쟁 시에는 이형근 준장이 사단장으로 지휘봉을 잡고 5, 16, 25연대로 구성하여 의정부에 투입되었으나, 대대별 로 또는 연대별로 축차적으로 투입함으로써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궤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7월 24일 2사단은 해체되었다가 50년 11월 17일 서울 성동공고 자리에서 17, 31, 32연대로 재창설하여 51년 5월 파로호 전투, 9월 김화전투, 52년 10월 저격능선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6월 25일 오후 대전의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채병덕 총장에게 부대를 집중 투입해야지 작은 부대를 축차적으로 투입하면 전멸할 것이므로 전선을 한강선으로 조정하여 집중적으로 방어를 하자고 건의하며 2사단을 육본에서 지시하는대로 축차투입할 수 없다고 하자, 채병덕 총장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바람에 2사단은 할 수없이 축차적으로 분산투입하다 사단 하나를 궤멸시키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0회》

☆국방경비대 사령관 송호성 장군은 좌익이었다.☆

創軍史를 보면 송호성(宋虎聲) 장군이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이나 심지어는 軍출신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1사단의 전신인 초대 1여단장과 국방경비대 2대사령관을 역임한 창군멤버였으며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의 진압부대 사령관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실체를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송호성은 1897년 함경도 함주에서 출생하여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설립한 화북성의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기병대대장과 연대장을 지냈고 나중에 광복군에서 2지대장을 역임한 경력을 가지고 해방 후에 귀국하여 1946년 9월에 경비사관 2기로 입교하여 아들이나 손자뻘 되는 동기생들과 연병장에서 뒹굴었습니다.

그러기를 약 3주정도 하고 있는데 류동렬 통위부장이 불러서 중령으로 바로 임관시켜 전주 3연대장 경력을 2개월 정도 쌓도록 배려를 해주고 12월에 이형근 후임으로 국방경비대 사령관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능력으로 보면 당시 일본군 출신으로 연대장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이응준 대령과 김석원 대령이 있었지만, 하부 조직은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이 점령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군 출신인 류동렬 통위부장이 김구 주석과 협의를 하고 미군정청의 양해를 구하여 광복군 출신인 송호성을 급히 경비대 사령관에 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군 내부의 좌익세력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자신이 남로당과 북로당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군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경비대 사령부 군감 사령관 이병주 소령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청주 7연대로 피신시키고 군내 남로당 푸락치 김종석 중령,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과 횡으로 연계를 맺고 있었고 종으로는 김일성의 직계 성시백, 박헌영의 직계 김삼룡과도 연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좌익이라고 의심을 받은 것은 48년 10월 말에 여수-순천에서 반란군 토벌작전을 하면서 강력한 지휘력을 발동하지않고 온건한 행동을 보여줌으로서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지못하고 김지회가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도록 방치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작전에 참가했던 미고문단과 부하들로부터 사상적 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정보기관에서는 이런 사실을 탐지하고 있었지만, 직위가 경비대 사령관이라 어쩌지를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한 김창룡 정보팀이 내사를 하다 남로당 군사부 연락책 이재복(이중업 직속부하)을 체포하여 그로부터 공작금 70만원을 받은 영수증을 찾아냈으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을 체포했을 때는 그의 소지품에서 송호성이 이중업에게 공작금 2백만원을 더 내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습니다.

 

김창룡은 송호성 사령관에 대한 동향보고서를 작성하여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백선엽 국장은 염려말고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백선엽도 송호성이 여수 반란사건 진압하는 것을 보고 의심을 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창룡 대위는 내 사전에 공산주의는 존재하지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송호성이 비록 직속상관이지만 직접조사서를 들고 방문조사를 벌였습니다.

 

김창룡이 송사령관을 방문하고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어느놈이 그 따위 소리를 하더냐?"며 벌컥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이골이 난 김창룡이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김창룡이 이재복으로터 압수한 공작금 영수증과 이중업에게 보낸 공작금 200만원을 부탁한 편지를 보여주자,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조사를 마친뒤 송호성을 군사재판에 회부시켰는데, 경비대 총사령관이라는 체면을 고려하여 처벌은 면해주고 보직을 해임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하였습니다.

 

송호성은 6.25전쟁 발발 시 남으로 피난하지않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인민군에게 협조하여 후방사단장 직함을 받고 얼마전까지 자신이 지휘했던 부하들에게 총뿌리를 돌렸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할 때 따라서 북으로 넘어갔다가 195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부인 양천내(화교)는 부산으로 피난해 살다 1961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송무성은 대만 사람에게 양자로 가서 대만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바 있습니다.

불온한 사상은 한 가정에도 불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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