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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軍의 苦難史 제31회》
☆한국인들이 수학한 중국의 군관학교 ☆
이번 회에서는 창군에 기여했던 한국인들이 나온 중국의 군관학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에는 청나라 말기에 이홍장이 설립한 육군군관학교가 하나 있기는 하였으나 흐지부지 없어졌고 1909년에 위안스카이(원세개)가 화북에 설립한 보정군관학교가 정식으로 발족하여 많은 지휘관을 배출하였습니다.
보정군관학교는 황포군관 학교와 운남강무학당과 함께 중국의 3대 군관학교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중국 국민당 총통 장제스(장개석)가 있고 한국인으로는 송호성 (前 2대 국방경비대 사령관), 오광선(前광복군 국내지대장), 최용덕(前2대 공군총장), 조개옥(前화북 의용군 여단장), 김무정(前북괴군 2군단장)이 있습니다.
이 학교 출신들 대부분이 국민당군에서 고급지휘관을 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가 1924년에 개교할 때 교관으로 보직되었습니다.
*운남강무학당(일명 운남강무학교)은 1909년에 운남성 쿤밍에 설립된 군관학교입니다.
중국인들 중 유명인은 중국인민해방군 원수 주더(朱德), 국민혁명군 상장 주페이더(朱培德)가 있고 한국인으로는 이범석(초대 국무총리겸 국방장관), 이준식(前육사교장), 북한 민족보위상을 지내 최용건도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가 광저우 황포 섬에 설립한 간부 양성소입니다.
초대 교장으로 장제스가 부임하였으며 나중에 공산주의자가 된 주은래가 이 학교 정치주임 교관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 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국민당군에 몸담았으며 일부는 모택동의 공산군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아이러니 하게도 러시아의 레닌과 스탈린이 지원한 돈과 무기로 학교를 세우고 교육훈련을 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교관으로 한국인이 20여명 봉직을 하였는데 그중에 이 준 열사의 장남 이용,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응근 등이 있습니다.
졸업생 중에는 임정교통부 차관을 지낸 김철남, 권준(수도사단장 역임), 김원봉(의열단장), 유해준(1군 참모장 역임) 등 1기부터 22기까지 200여명입니다.
*기타 귀주강무학교가 있었는데 五星將軍으로 유명했던 김홍일 장군이 이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사단장까지 하고 해방을 맞았습니다.
1932년 ~ 45년 만주에 존재했던 2개의 군관학교(봉천, 신경)는 일본 관동군이 설립한 것이고 위에 언급한 군관학교는 중국인들이 설립한 군관학교이므로 혼동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2회》
☆제 3사단 창설☆
3사단은 1947년 12월 1일 부산의 5연대와 대구의 6연대(48년 22연대로 재편성), 제주의 9연대로 이응준 대령이 부산에서 제 3여단으로 창설했다가 48년 5월 12일부로 3사단으로 승격된 부대입니다. 이때 초대 사단장은 최덕신 대령(중국 황포군관학교 출신)이 임명되었습니다.
2대 사단장으로는 채원개 대령(낙양강무당 출신), 3대는 이응준 준장(일 육사 26기), 4대는 김백일 대령(봉천군관학교 5기), 5대는 유승렬 준장(일 육사 26기) 등이 사단장을 이어 봗았는데 이 때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개전 초기에 6대 사단장으로 이준식 준장(운남 강무당 출신)이 부임하였습니다. 6.25 초전의 혼전 상황에서 5연대와 9연대는 타부대로 흩어지고 22연대만 남았는데, 마산에서 창설된 23연대를 받고 안강에서 전쟁중 창설된 26연대를 받아 22, 23, 26연대로 건제를 유지하게 되어 7월 7일 이후에 영덕지구에 출전하였습니다.
영덕에서 포항 일대로 전장이 확대될 때인 8월 9일에 김석원 준장(일 육사 27기)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포항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북진 때는 이종찬 준장(일 육사 49기)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23연대가 50년 10월 1일 국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의 선봉에 섰고 원산을 지나 한만국경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였습니다.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할 때 26연대는 수도사단 배에 타고, 수도사단 18연대가 3사단 배에 타는 바람에 양개 연대는 소속을 달리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8연대를 통상 "진백골" 이라고 하는데 18연대가 3사단으로 예속됨으로써 3사단이 백골부대가 되었습니다.
3사단이
백골이라는 구호를 쓰게 된 것은 1973년에 박정인 장군이 제25대 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1972년 까지의 구호는 "돌격"이었음)
#18연대가 백골이라는 구호를 처음 쓰게된 경위는 18연대가 창설될 때 북한의 공산치하에 염증을 느끼고 남으로 탈출해 내려온 서북청년단 요원들이 대량으로 입대하면서 이 사람들이 김일성에 이를 갈면서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신념으로 "우리는 살아서도 백골, 죽어서도 백골이 되어 북한의 공산당을 쳐부수겠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사용하던 것인데 마침 부연대장 한 신 중령(경비사관 2기)도 고향이 함경도 함흥이라 이에 동조하여 백골정신으로 무장하자고 한데서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한 신 장군은 북진 때 18연대장을 역임하였음
《創軍의 苦難史 제33회》
☆제5사단 창설☆
5사단은 1948년 4월 29일 전남 광주에서 광주 주둔 4연대, 전주의 3연대, 군산의 12연대를 5여단으로 편성하고 초대 여단장에 러시아군 출신인 김상겸 대령이 임명되었습니다.
2대 여단장에 원용덕 대령이 취임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동원되었으며
49년 5월 12일 5사단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때 4연대는 20연대로 개칭하게 되고 초대 사단장에 송호성 준장이 잠시 부임했다가 백선엽 대령이 취임하여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6.25 직전인 50년 5월 중순에 백선엽 대령은 1사단장으로 전임되고 이응준 준장이 3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6. 25를 맞았습니다.
갑자기 북괴의 남침을 당한 육본은 호떡집에 불난격으로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하였습니다.
전날 육군회관 개관식 파티에서 술에 취해 늦잠에 떨어졌다 비상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모인 군 수뇌부는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의정부 7사단으로 달려가 상황을 살펴보고 대전의 2사단과 광주의 5사단 등 닥치는대로 의정부 축선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다보니, 2사단도 마찬가지였지만 5사단은 연대 또는 대대 단위로 준비가 되는대로 투입시키다보니, 사단장도 자기부대가 어디에 투입되었는지를 모르고 허둥댔고 그런 와중에 3개 연대가 모두 창동과 한강 방어선에서 전멸하여 결국은 7월 17일에는 사단까지 해체되었습니다.
육본은 해체된 5사단을 50년 10월 8일 대구에서 27연대, 35연대, 36연대를 묶어 다시 재창설하였습니다.
이때가 7대 사단장 민기식 준장이었습니다.
이후 5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 가칠봉 전투를 치루었으며 53년 3월에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가 7월에 다시 전선으로 이동하여 백암산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4회》
☆국군 2개대대 월북사건☆
국군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38선을 경비하는 8연대에서 2개 대대가 1949년 5월 4일과 5일 동시에 월북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8연대는 연대장 김형일 중령(학병/서울법전)의 지휘하에 1대대(대대장 표무원/경비사관 2기)는 춘천, 2대대(강태무/경비사관 2기)는 홍천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춘천 주둔 1대대 월북 사건
1대대는 49년 5월 4일 야간행군을 위해 13:00시에 춘천 주둔지를 떠나 20km거리의 38선으로 출발하여 18:00시에 서원리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19:00시에 38도선에 걸쳐 있는 모진교(母津橋)를 지나 북괴군의 진지가 있는 말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중대장들은 의심하였습니다. 왜 38선을 넘지?
말고개 일대에는 북괴군이 매복해 있는 것이 보였고 위협사격을 해왔습니다.
이 때 대대장 표무원이 "우리는 지금 인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괜히 희생될 필요가 없다!"고 소리치며 투항을 재촉하였습니다.
그제서야 대대장이 고의적으로 월북을 시도했다는 낌새를 알아챈 2중대장 최동섭 중위(경비사관 5기)가 대대장에게 여기서 탈출하여 돌아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대장 표소령은 오히려 적진지에 대고 위협사격을 해달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이때 2중대장 최동섭 중위는 중대원들에게 나를 따르라며 오던길로 뒤돌아 뛰었고 부하들도 중대장을 따라 뛰기 시작하여 모진교를 넘어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3중대와 4중대도 탈출했는데 1중대장 김관식 중위(경비사관 6기)와 그 중대원만 대대장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행군 참가병력 452명 중 213명 월북, 293명은 복귀하였음)
연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동섭 중위가 부대에 도착하여 신고를 한 아침 6시 이후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표무원 대대장과 월북자들은 38선 너머 화천에 도달한 시간이었습니다.
◇홍천의 2대대 월북사건
49년 5월 당시 2대대 5,6,8중대는 인제 남쪽 상남지역에서 진지공사를 하고 있었고 7중대는 주둔지에서 신병교육 중에 있었습니다.
대대장 강태무 소령은 5월 3일 저녁 무렵에 민간인 한사람을 진지공사장으로 안내해 와서 "이분은 국방부에서 나온 정보요원이라고 소개를 하고 내일 우리가 현리로 이동할 때 혹시 북괴군과 충돌할지 몰라 길을 안내해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그러나 그는 강태무 대대의 월북을 안내하기 위해 파견된 인제 내무서장이었음)
5월 4일 점심 후 2대대는 교육중인 7중대만 남겨놓고 현리로 이동하여 내일의 진지공사를 위해 잠을 자려고 숙영준비를 하는데 대대장이 갑자기 연대 작전명령이라며 중ㆍ소대장들을 모아놓고 38선상의 복지계봉(402고지)을 공격하여 북괴군 보안대를 쳐부술 것이다. 이를 위해 5일 03:00시에 현리를 출발하여 05:00시에 복지계봉 근처에서 휴식을 하고 18:00시에 야간공격을 한다."는 명령을 하달하고 각 개인에게 실탄을 분배하였습니다.
18:00시가 되어 일제히 복지계봉을 향해 공격을 했는데 적으로부터 먼저 박격포 사격을 받아 5,6중대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강태무 대대장은 남아 있는 부하들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병사들은 투항을 하고 장교 2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적 후방에서 공격하던 8중대장 김인식 중위(경비사관 7기)는 적에게 속은줄 알고 50미리 기관총을 난사하여 적진지를 박살나고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며 철수로를 찾아 중대원들을 후방으로 탈출시켰습니다.
5중대와 6중대도 60여명이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293명 중 150명이 월북하고 143명이 복귀하였음)
◇표무원과 강태무의 사상적 문제
표무원은 1924년 대구시 대봉동에서 출생하여 일본 동경 대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군에 지원입대하여 부사관(중사)으로 해방을 맞았으며 귀국 후에는 대구 6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이때 중대장 김종석(남로당 푸락치)을 만나 포섭되었으며 김종석의 추천으로 경비사관 2기로 입교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강태무는 1923년 경남 고성군에서 출생하여 일본 동경 입교대학에 유학하였으며 해방후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경비사관 2기로 입교하였습니다.
표무원과 강태무는 46년 12월 14일 소위로 임관하여 동시에 8연대 소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는데 그당시 연대장이 6연대에서 좌익세포를 양성하던 최남근 중령이었습니다. 그 때 최남근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월북하게 된 배경은 49년 들어 육본 정보국 제3과(방첩과)에서 대대적인 숙군(肅軍) 작업을 단행함에 따라 자신들이 방첩대의 숙군대상에 올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불안한 마음에 월북을 선택한 것으로 군 상층부에서는 판단하였습니다.
실제로 방첩과에서는 그 둘을 소환하여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육군총장 이응준 장군이 두사람을 동시에 소환 조사를 하면 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클테니,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미루었는데 그 사이에 월북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동일 연대에서 2개대대가 월북을 했는데도 월북 도중에 탈출한 중대장들로부터 보고를 받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된 연대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그런사실을 즉각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통신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간부들의 사상을 검증할 수 있는 조직이 연대나 여단급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軍은 이 사건으로 국민으로부터 크게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고,
연대장 김형일 중령과 여단장 김백일 대령 그리고 육군총장 이응준 장군이 보직해임 되는 선에서 사건이 종결되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 35회》
☆제6사단 창설☆
6사단은 6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된 부대입니다.
1948년 4월 29일 채병덕 대령이 7,8,10연대로 4여단을 수색에서 창설했는데, 2대 유재흥 대령을 거쳐 3대 김백일 대령이 여단장으로 부임하고 나서 49년 2월 22일 원주로 여단본부를 이동하였습니다. 이때 군에서는 4라는 숫자는 재수가 없다고 하여 6여단으로 개칭하였습니다.
6여단이 원주로 이동한지 3개월도 안된 5월 4일과 5일에 8연대에서 2개대대가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홍역을 치루었습니다.
6여단에서 월북사건이 발생했지만 5월 12일에는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7연대를 8연대와 임무를 교대시켜 춘천으로 배치하고 8연대는 원주로 뽑아서 재편성을 한 뒤에 수도경비사령부로 보내고 10연대는 동해안에 창설하는 8사단으로 보냈습니다. 대신 수도경비사령부로 부터 2연대를 받고 지리산 공비토벌 임무가 끝난 5사단에서 19연대를 받았습니다. 그 일은 50년 5월까지 이루어진 일이며 그때 구성된 2, 7, 19연대가 6.25 전쟁을 치루고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는 푸른별의 청성부대 6사단입니다.
6사단은 6.25 직전에 부임한 김종오 사단장이 6.25 전쟁 초기에 적 2군단의 침공을 3일간 저지함으로써 서부축선의 1사단과 7사단의 퇴로가 차단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김일성은 2군단이 속도전을 발휘하지 못해 국방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 군단장 김광협과 2사단장 이청송, 7사단장 전 우를 해임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6사단은 춘천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여 아군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육본 명령에 의해 충청도로 후퇴하던중 동락리에서 북괴군 15사단 48연대를 궤멸시키고 낙동강 전선에서는 영천과 신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북진 시에는 서부축선으로 진격하여 평남 개천에서 적 T-34전차를 노획하고 청천강가에서 김일성이 도망가며 버리고간 김일성의 승용차를 노획하기도 하였습니다. 50년 10월 26일에는 한만국경선 초산까지 진격하여 압록강물을 마시며 통일의 함성을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한 이후 51년 5월 양평 용문산에서 중공군 63군의 3개 사단을 막아내고 유엔군의 썬더볼트 작전(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그것이 청사에 빛나는 용문산 전투입니다.
戰史家들들은6.25 전쟁에서 가장 잘싸운 부대를 6사단으로 꼽고 있을정도로 6사단은 잘 싸우고 잘 지켜주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6회》
☆제 7사단 창설☆
7사단은 1949년 6월 20일 7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된 부대이며 예하부대로는 1연대, 3연대, 9연대였습니다.
이준식 준장이 초대 사단장을 하다 50년 6월 9일 유재흥 준장이 2대 사단장으로 부임하고 14일 만에 6.25를 맞게 되었습니다.
6.25 초전에 적으로부터 제일 심하게 얻어 맞은 부대가 의정부 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이었습니다.
이유는 북괴군 주공 축선이 의정부 축선이었기 때문에 동두천과 포천 양개 축선에서 적 전차부대(150대 집중)가 선봉에서 공격을 쇄도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육본은 서울을 사수하기위해 의정부 축선에 2사단과 5사단 예하부대들을 축차적으로 투입하였으나 투입하는 부대마다 불꽃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동두천 방향의 1연대와 포천방향의 9연대는 전멸하다시피 지리멸렬 되어 각개플레이로 한강 이남으로 쫓겨내려왔습니다.
한강방어선으로 쫓겨 내려온 병력은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장군이 거두어서 얼굴도 모르는 지휘관과 병사들을 오는대로 묶어서 중대, 대대를 만들어 배치를 하였습니다.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자기의 예하부대가 뿔뿔이 흩어져 없어져 버리자 7월 5일부로 사단을 해체하고 어느정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1연대만 수도사단(현 수기사)으로 넘겨 주었습니다.
7사단은 8월 20일 대구에서 3,5,8연대를 재편하여 다시 창설을 하였습니다.
반격작전 대열에 참가해서는 1군단 예비사단으로 서울까지 진격했고 38선을 넘어서는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김일성 종합대학에 태극기를 꼽기도 하였습니다.
1951년에는 현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으나, 피의능선 전투와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습니다.
휴전이 막바지에 이른 53년 7월 20일부터 27일까지는 425 고지와 426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밀어내고 백암산 - 적근산 - 삼천봉을 끼고 군사분계선을 38km나 끌어올려 김화군 일부와 화천댐을 대한민국 영토로 포함시키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7회》
☆제 8사단 창설☆
8사단은 1949년 6월 20일 강릉의 제 10연대를 기간으로 이형근 준장이 창설한 부대입니다. 뒤이어 7월 5일 삼척에서 공비토벌작전 중이던 21연대와 정선에서 공비토벌작전 중이던 16연대가 예속되어 사단의 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1950년 6월 9일 이성가 대령이 2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태백산 지구 공비토벌 작전과 38선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중 6.25를 맞았습니다.
개전 초기에 8사단은 동해안으로 상륙하는 북괴군 766부대와 7번 도로를 따라 남침하는 북괴군 5사단 그리고 내륙으로 침투하는 인민유격대(공비)를 상대로 혈전을 벌여 어느정도 잘 싸웠으나 강릉 후방 임원진으로 상륙한 766부대가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강릉에서 대관령을 넘어 내륙으로 철수작전을 단행하였습니다.
충주와 청주로 내려가면서 효과적으로 지연전을 펼쳐 북괴군의 전진을 둔화시켰으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어서는 영천-신녕전투에서 북괴군 27,500여명을 사살하고 7,943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8사단은 이를 "영천대첩"이라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으며 전군 최초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상 8사단 까지가 6.25전쟁 이전에 창설된 부대이며 9사단, 11사단, 12사단, 15사단은 6.25전쟁 중에 창설되었으며 17사단 부터 그 이후 사단들은 휴전 이후에 창설되었습니다.
휴전 이후에 창설된 사단들은 전쟁 당시 밴플리트 8군사령관이 휴전이 되면 미군도 철수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한국군 단독으로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부담이 되기 때문에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장비도 현대화 해 주어야 한다는 계획을 워싱턴에 건의하여 관철시킨 결과 사단수는 20개 사단 병력은 65만명으로 결정이 되어 순차적으로 증강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8회》
☆채병덕 前 參謨總長도 소령 시절 파면될뻔 했다.☆
국방부는 요즘 장성(將星)들과 영관장교들에 대해 파면과 직무를 배제시키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 분위가 살벌한 모양입니다.
1946년 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얼마 안된 시기에 일본군 출신 국방경비대 장교들은 미군들과 생활방식 차이로 다툼이 잦았고 남로당이 퍼뜨린 좌익세포들 때문에 곤욕을 치룬 웃지도 못하고 웃지않을 수도 없는 희한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몇회에 걸쳐 그런 에피소드를 몇가지 소개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946년 여름, 어느날 1연대 1대대장 채병덕 소령 사무실로 국방경비대 사령관 <배로스> 중령이 예고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채병덕 대대장이 웃통을 벗고 훈도시(일본인들의 팬티)만 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프리며 나가버렸습니다.
얼마 있다가 <배로스> 사령관은 법무장교 김완룡 중위(학병/일본 중앙대)를 불러 채병덕 소령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파면시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유인즉, 백주 대낮에 대대장이라는 者가 신성한 사무실에서 훈도시만 차고 있으니 비신사적인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완룡 중위는 전후 사정을 알아본 뒤 "채병덕 대대장은 체구가 100kg이 넘는 거구로 여름철에는 땀을 많이 흘리므로 장기간 일본군에서 복무하면서 훈도시를 차는 습관이 있기때문이며 고의적인 일은 아니니, 양해 해주시라"고 설득을 하여 무마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들은 한국사람들을 미국의 인디언 정도로 취급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런 감정은 한국인들이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도 일본군의 일원으로 자신들과 대적(對敵)했다는 적대의식 때문 인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수모를 주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래서 韓美軍 장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얼마나 근무환경이 열악했는지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도 1연대 장교들은 출퇴근시에 호로(트럭 덮개)도 없는 트럭을 타고 떨어야 했습니다.
미군들은 대위만 되어도 찦차를 타고 출퇴근 하는데 한국군 대대장은 일본군이 버리고간 트럭의 선탑석에 타기는 했지만 의자도 다 낡아서 장작개비를 받치고 쌀가마니를 위에 깔고 타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이와같이 창군초기의 군인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9회》
☆근무지 이탈했다고 군법회의에 회부될뻔 했던 김완룡 법무처장☆
김완룡 법무처장은 <배로스> 경비대 사령관으로부터 누구 누구를 군법회의에 회부시키라는 지시를 수도 없이 듣고 기분 상한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공교롭게도 한번은 자신이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당시 친구인 통위부 군수국 보좌관 이창일 중위(학병/일본 척식대학)가 부평에서 보급품을 싣고 귀대하다가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어 위급한 상태여서 일과시간인데도 급히 적십자 병원으로 위문을 갔습니다.
가서 보니 "페니실린"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그것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하다 구하지도 못하고 퇴근시간이 임박해서 귀대했는데 그 사이에 찾았는지, 사령관이 낮에 찾았다며 직원들이 빨리 사령관실로 가보라고 하여 사무실로 들어가니, "당신은 무단외출을 했으니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보고하면서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테니, "페니실린"을 좀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당장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상관에게 적반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로스> 사령관은 즉석에서 미군 병원에 전화하여 "페니실린"을 2병이나 구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친구 이창일 중위를 살려냈습니다.
그당시 "폐니실린"은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배로스> 경비대 사령관은 군법회의에 회부시킨다는 말을 남발하였으나 항상 불발로 끝나는 엄포수준이었습니다.
☆허리에 일본도(日本刀) 패용했다고 파면 운운하는 미군 대대장☆
대전 2연대에서 미군 대대장 <카폰>중위는 예하 중대장 신상철 소위(일 육사 58기)가 연병장에서 병사들에게 제식훈련을 시키고 있는데 일본도를 차고 교육훈련을 한다며 "그 칼 허리에서 떼지않으면 당장 파면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신상철 소위는 네가 뭔데 칼을 떼라마라 하느냐며 막무기내로 훈련을 계속하였습니다.
훈련을 끝내고 신상철 소위는 이형근 대대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이형근 대대장은 미군 대대장 <카폰> 중위에게 "우리는 이제 막 부대를 창설하는 중이라 복제도 준비되지 않았고 무기도 없어 일본군이 남기고간 복장과 총기를 가지고 훈련을 하고 또 우리는 어쩔수 없이 일본군에서 몸에 배인 생활 습관 때문에 칼도 차고 말도 타고 내무사열도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보기싫으면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경비대에 제대로 보급품을 공급해 주고 총기도 주어야 할 것아니냐?
그런것은 안하고 무조건 [파면] 운운하는데 할테면 해봐라."며 강한 어조로 항변을 함으로써 <카폰> 중위가 사과를 하여 일단락 되었습니다.
# 창군 초기에는 창설 부대장을 韓ㆍ美軍 각 1명씩, 2명을 보직하였습니다.
이유는 미군 지휘관이 하는 것을 옆에서 배우면서 함께 부대를 창설하고 교육훈련을 시키라는 뜻에서 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는 순기능(純機能)보다 역기능(逆機能)이 더 많았습니다. 즉 부작용이 더 많이 나타났던 것이죠.
그래서 잠깐 시행하다 한국군 장교가 지휘관을 맡고 미군 장교는 한국군 지휘관을 보좌하는 고문관 역할로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6.25 전쟁기간 중에도 연대급 이상 부대에 미군 고문관이 상주하였던 것입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0회》
☆계급없는 대원들의 횡포☆
해방 후 대부분의 청년들은 직장이 없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처지였습니다.
모든 생산공장이 폐쇄됨으로써 실업자가 속출하기도 했지만 해방이 되니, 일본ㆍ중국 등지에서 귀국하는 동포들 그리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폭압에 견디지 못하고 월남하는 북녘동포들이 밀려내려 오므로서 노상(路上)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에서는 경비대를 창설한다는 의미에서 1946년 1월 15일 경비대 창설을 위해 창설 요원 모집요강을 도하 신문에 내었는데 많은 인원이 응모하였습니다.
신문 모집광고에는 "중앙훈련소 간부요원 모집"이라 해놓고 응모자격은 외국군 하사관 경력자와 일반인은 중졸(5년제)자로 하였습니다.
1천여명의 지원자 중에서 250명을 선발하여 1946년 1월 15일 태릉의 舊 일본군 병사(兵舍)에서 국방경비대 제 1연대의 입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A중대장에 채병덕 대위(일 육사 49기), B중대장에 장석륜 대위(일 육사 27기), C중대장에 정일권 대위(봉천군관 5기/일 육사 56기)가 보직되어 중대-대대-연대를 점진적으로 창설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사병들은 막상 입대를 하고 보니, 막사는 허름하고 주변은 삭막한 황무지나 다름없었습니다.
대원들은 자기들이 먹을 식량을 직접 실어와야 하고 장작을 사오고 취사까지 해야 했으며 전기마저 끊겨 밤에는 촛불을 켜야 했습니다.
매트리스 대신에 짚단을 깔고 옷을 입은채로 기나긴 겨울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만주의 관동군이나 버마, 뉴기니아 등 남양군도에 있을 때에도 이러지는 않았고 왜정시대에 중학교를 다닐정도였으면 집안형편도 아주 가난하지는 않은 상황에서 자랐을텐데 참기 어려운 여건에 대원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복장도 없어서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군복과 군화, 모자를 그대로 착용하는 우수꽝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부대원들은 도대체 해방이 된건지 안된건지 구분을 하기 어렵다며 불평불만을 터뜨리며 탈영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나 해외에서 귀국하여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입대하여 대대와 연대로 증편하는데는 애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군대생활을 좀 했던 하사관 출신들은 우리는 "간부 양성소"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대우가 이게 뭐냐며 툭하면 중대장들에게 엉겨 붙었습니다. 그래서 정일권 중대장 같은 경우에는 일본군 출신 하사관들에게 얻어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가 광주 4연대로 전출 가는 경우도 발생하였습니다.
함준호 소위는 자진하여 식사관을 했는데, 부식차만 오면 사병들이 약탈하는 식으로 빵과 과자, 술, 담배 등을 훔쳐 가기 때문에 하사관을 후려갈긴 일이 있었는데 고참 하사관들이 야밤에 테러를 하여 다친 일도 있었습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 중에는 주먹이 센 깡패 출신들이 내무반장을 하면서 졸병들에게 울타리 너머에서 술을 사오라는 심부름도 시키고 툭하면 쥐어박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것은 일본군 내무생활에서 습관된 나쁜 버릇이었습니다.
그 버릇이 70년대 한국군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하간 창군과정은 어렵고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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