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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창군고난사(5)/받은 글

 

https://blog.naver.com/pjjyym/224157153194

 

《創軍의 苦難史 제41회 》

☆人民革命軍 事件☆

 

1948년 5.10총선을 앞두고 북로당의 지령을 받는 김일광(金一光 : 중국 보정군관학교졸업, 국민당군에 근무)과 이혁기(학병출신, 경성제국대 출신)를 중심으로 하는 좌익분자들이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원들을 포섭하여 남한을 전복하고 김일성 집단에 합세하여 남한에 공산정권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비밀군사단체를 조직 암약하다 1948년 2월 22일 군경합동 수사팀에 의해 적발되어 일망타진된 인민혁명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김일광과 이혁기가 주동세력이었고 그 배후에는 김일성의 직계 남파간첩 성시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남로당과는 별개의 북로당 계열이었으며 1946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수립하고 암약을 하며 결정적 시기를 노렸습니다.

 

이들 조직은 김일광을 총책임비서로 세우고 재정담당, 교육담당, 조직담당, 조사담당 부장을 두었는데 이혁기는 교육담당 부장이었습니다.

 

또 세력 확장을 위해 별도의 부서를 편성하였는데 내선(內線)책임자를 김영갑으로 세우고 국방경비대 포섭 임무를 수행토록 했고 이혁기를 외선(外線)책임자로 세워 사회 각계각층의 좌익조직을 뭉치도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道 단위 책임자도 임명하고 그 밑에 단(團), 분단(分團), 반(班)을 조직하여 인민혁명군을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전 2연대장 김종석 중령이 군수품(C-레이션, 담배 등)을 부정처분하여 마련한 돈 120만원을 날치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김종석은 이 돈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에게 주려고 보관하고 있다가 북로당 이혁기에게 날치기 당한 것입니다.

 

북로당으로부터는 공작금 12만원을 받았고, 남북교역으로 15만원을 마련하여 해안경비대원을 포섭하고 배를 구입, 남북을 오가는 공작선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경기도 연천, 포천, 인천, 마산 등지에 무기를 은닉해두고 봉기를 일으킬 때 사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얼마전부터 국회도서관 등에 북한 로동신문을 비치했다고 하는데, 그당시에 김일광 등은 북한에서 발행되는 선전 삐라를 비롯하여 적색 선전물을 대량으로 들여와 학교, 관공서 등에 뿌려 공산주의를 선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남한 내 군사활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낱낱이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통위부의 일반동향, 국방경비대 동향, 군 장교명단, 각 부대 조직표, 38선 경계 실태 등이었으며,

 

또 남한 내에 있는 형무소의 위치, 경비상황, 형무소 간부 명단, 형무소 배치도 등도 낱낱이 수집하여 북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자들에게 남한의 중요 정보가 탈탈 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군경 수사팀에 의해 이 조직이 일망타진 되지않고 제주 4.3폭동과 함께 5.10총선 때 인민혁명군 사건이 폭발했더라면, 그리고 그해 10월에 발생한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과 함께 3대사건이 동시에 터졌더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2회》

☆남북교역과 두 장군의 퇴진☆

 

38선의 장벽으로 남북이 단절되자 미ㆍ소 양쪽 군정에서는 남북간에 교류를 터주기 위해 물물교환 형식의 교역(交易)을 하도록 합의를 하고 이를 성립시켰습니다.

그런데 남북교역에 군 수뇌부가 관련된 듯한 사건으로 비화 되어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과 1사단장 김석원 장군의 다툼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퇴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남북교역이란 1945년 11월에 미ㆍ소 양측 군정 당국자들이 합의를 하여 군정청 상무부의 승인을 받은 품목을 양측의 요구에 의해 민간 상인을 통해 상호 필요한 물자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38선에서 이루진 것입니다.

 

이 교역은 46년 3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규정을 위반하는 사례가 적발되어 1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남한에서 북으로 넘어가는 물자에 전략물자(자동차 타이어, 페니실린 등 의약품 등)에 통제를 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속을 철저히 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시정이 되지않고 육군참모총장이 자기의 친인척들에게 상거래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김석원 1사단장이 전략물자를 싣고 넘어가는 상인들의 출입증을 회수하고 물자를 압수하였으며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상인들이 육본에 진정서를 내어 김석원 사단장을 모함하였습니다.

 

채병덕 총장은 1사단에 과도한 통제를 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이에 화가 난 1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북에서 넘어오는 명태 20트럭분을 압수하여 사단 장병들에게 부식으로 처분해버렸습니다.

 

이런저런 38선 교역문제로 채병덕 총장과 김석원 1사단장 간에 불화가 생겼습니다.

 

이런 다툼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된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총장 ㆍ김석원 1사단장을 불렀습니다.

 

경무대에 들어가니, 대통령은 "오늘 여러분을 부른 것은 국군의 중책을 맡은 두사람이 싸움을 하고 있다해서 걱정이 되어 부른 것이야 그러면 안되지, 그렇게 되면 그만두게 하는 수 밖에 없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채총장은 "저는 김 사단장을 선배로서 대접해 왔습니다.(김석원은 일 육사 27기, 채병덕은 일 육사 49기)

그런데 38선에서 교역물자를 마음대로 처분하고 지시를 듣지않아서 문제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외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라고 사죄를 하는데,

 

뒤이어 김석원 1사단장 은 "국토방위에 중책을 걸머진 총장이 돈을 벌고 정치를 한다면 나라도 망하고 국군도 망할 것입니다. 과연 누가 잘못했는지 흑백을 가려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성모 장관이 얼른 두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자신의 공관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화해를 시켜 내일 다시 경무대로 가서 대통령께 사과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경무대로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채총장은 "앞으로 각하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일하겠습니다."라고 사과를 하였는데, 그때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김석원 사단장은 "저에게는 허물이 없사오니 채총장을 단호히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몹시 화가 났고 손을 떨며 관자노리가 실룩거렸습니다.

 

이를 본 신성모 장관이 얼른 두사람을 밀치다시피 하여 밖으로 나왔는데 대통령은 그날(49년 10월 1일)부로 두사람을 예비역으로 퇴진시켰습니다.

 

1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전략물자가 북으로 넘어 가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교역물자로 넘어온 명태를 압수하여 장병들의 부식으로 사용한 것은 잘못이며 또 老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잘못은 시인하지않고 새카만 후배인 채총장을 처벌하라고 소리를 지른 것도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채총장도 전략물자가 넘어가는 것을 단호히 통제를 했어야 하는데 느슨하게 대처를 했고 친인척들에게 교역할 수 있는 편리를 봐준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여하간 군의 창설 초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3회》

☆일제 헌병 출신 김창룡을 파면하라☆

 

1947년 8월경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이 갑자기 법무처장 김완룡 대위에게 1연대 정보과 보좌관 김창룡 소위를 파면하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김완룡은 이유를 알아본 즉, 외부 민간인들로부터 일제하에서 독립군들을 괴롭힌 헌병 출신을 창군에 가담시킬 수 있느냐, 군에서 퇴진시켜야 한다는 진정서가 접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완룡 대위는 1연대로 가서 연대장 이성가 소령과 정보과장 이정석 대위를 만나 김창룡 소위를 조사하겠다는 방문 목적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성가 연대장은 "지금 우리 연대에는 좌익분자들이 우글우글 합니다. 이들을 적발하기 위해 고심을 하던중에 경비사관 3기 졸업자 중에서 과거 헌병에서 수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김창룡 소위를 내가 전입요청을 해서 데려온 것이요. 이사람이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조사는 하되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부탁을 하였고 이정석 정보과장도 김창룡 소위는 그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선처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김완룡 대위는 위 두사람의 면담을 마치고 김창룡 소위를 불러 조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완룡 : 귀관이 경비대에 들어온 동기가 무엇인가?

*김창룡 : 일제에서 배운 장점을 따가지고 조국의 군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자 들어왔습니다.

*김완룡 : 그렇다면 조국에 대한 희생정신은 언제부터 가졌는가?

*김창룡 : 일제시대에는 배운것이 없어 어떻게든 잘살아보려고 헌병대에 들어갔지만 조국이 해방되고 비로서 나라를 알게 되고 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과거를 속죄하고 이 한몸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김완룡 대위는 김창룡 소위가 솔직담백하고 비굴하지않으며 애국심과 충성심을 강하게 어필하는 것을 아주 좋게 받아 들였습니다. 또 연대장과 정보과장으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는 점을 참작하여 김창룡을 살리는 방향으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송호성 사령관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김완룡 대위가 송호성 사령관에게 보고서를 내밀면서 "김창룡을 파면시킬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과도기에는 불순분자들을 색출해본 경험을 가진 인물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김창룡은 중ㆍ소 국경지대인 <하이라루>에서 중국인 간첩 잡는 일을 했을뿐이지 우리 조선인을 상대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이 때 경비사령관은 "귀관은 술잔이나 얻어 먹고 이러는거 아니야?"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완룡 대위는 "법무처장의 명예를 걸고 그런일은 전혀 없으니, 결재해 주십시오."라고 버티니, 경비사령관은 결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통위부장과 군정청 군사국장 <프라이스>대령의 결재를 받아 김창룡 소위는 1연대 정보과에 계속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당시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도 좌익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군내의 좌익분자들을 적발하려는 김창룡에 대해 안좋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외부에서 진정서가 들어오니, 때는 이때다 하고 앞뒤 생각없이 무조건 파면하라고 지시하는 경솔한 처신을 한 것입니다.

 

김창룡 소위는 1947년 4월 19일 부로 임관하여 1연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연대장 이성가 소령은 군 내부에서 암약하는 좌익분자들이 있다고 심증은 가는데, 확증이 없어 고민하고 있던 차에 김창룡 소위에게 임무를 주었더니, 좌익분자들을 적나라 하게 들추어 내어 보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인민혁명군 사건과 제주 4 3사건 및 여수14연대 반란사건에 직 ㆍ간접으로 관여했던 이병주, 김종석, 최남근, 김지회, 홍순석, 문상길, 오일균 등이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4회》

☆14연대 반란 주모자들의 최후☆

1948년 10월 19일에 반란을 일으킨 여수 14연대 반란은 10월 27일까지 1차 진압을 하였으나, 여수에서 순천으로 북상한 반란군들의 대부분은 김지회 중위가 이끌고 광양 백운산을 경유하여 구례에서 천은사, 화엄사, 연곡사가 있는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장기전에 돌입하였으며 일부는 벌교-보성-고흥-장흥-함평-영광으로 도주하여 전남의 서부지역을 교란하였습니다.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 주력은 구례, 곡성, 광양, 남원, 무주, 장수, 거창, 하동, 진주, 함양, 산청 등지에 출몰하여 관공서를 습격하고 양민을 학살, 납치, 방화, 약탈을 일삼아 지역주민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신음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49년 3월 1일부로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원용덕 준장)와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정일권 준장)를 설치하여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는 벌교, 보성, 고흥, 함평, 영광 쪽 즉 전남의 서쪽지역을 담당하고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면 김지회와 홍순석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입산한지 5개월이 지난 49년 4월 4일 토벌대의 3연대 3대대 김갑순 상사가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 주막집에 반란군이 자주 와서 식사와 술을 먹고 간다는 첩보를 수집하고 주막집 주인여자에게 화장품을 주면서 반란군이 오면 술값은 우리가 쳐줄테니, 술을 잔뜩 먹이고 문밖에다 호롱불을 켜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4월 9일 새벽 2시에 주막집에 호롱불이 켜졌다는 반선리 청년단장의 신고를 받고 3대대(대대장 한웅진 대위)가 출동하여 기미를 알아채고 도주하는 반란군 1개 소대규모를 사살하였습니다.

 

시체를 확인하던중 홍순석은 주머니에 자신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원을 쉽게 확인하였으나, 김지회는 확인이 안되었습니다.

 

김갑순 상사는 수색조를 지휘하여 시체를 찾기 위해 수색을 하는데 마을 주민들로부터 반선리와 인접한 연정 마을 골짜기에 가마귀떼가 몰려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골짜기로 가 보니, 과연 시체 1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벌써 시체가 훼손되어 누군지 구분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달궁 마을에서 김지회의 처 조경순을 생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경순에게 시체를 보여주니, 바로 울음을 터뜨리며 이 사람이 김지회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김지회와 홍순석을 한꺼번에 사살하게 되었습니다.

 

그 둘은 반란 5개월 20여일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입니다.

 

한편 반란 주동자 지창수 상사는 48년 10월 27일 여수가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던 마지막에 김지회와는 별도로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가 이현상 부대와 합류했는데, 다리에 총상을 입어 49년 1월 중순 하동군 화개면 칠불암 뒷산에서 토벌대에 생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중 6.25 전쟁 초기에 감옥에서 처형되었 습니다.(안재성 著 이현상 평전)

 

지창수는 전남 보성군 벌교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군대생활을 했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전남지역 세포조직 김백동(벌교 출신)의 하수인으로 활동하다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46년 2월에 광주 제 4연대에 입대하였으며 48년 5월에 여수 14연대 창설요원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여기서 반란군 주동자가 된 것입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5회》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정부 전복과 창군을 방해하다 죽음을 당한 자들의 말로☆

 

1. 김일성에게 죽음을 당한 박헌영

박헌영은 머리가 비상하여 충남 예산의 신양면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를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1920넌 중국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이 이끄는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김단야와 임원근,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등을 만나 공산주의 운동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2년에는 여운형을 따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한 후 조선공산당 창당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때 조선공산당 예하 조직인 고려 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다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나 모스크바로 탈출했다가 1933년에 상해로 갔는데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9년까지 옥살이를 하다 풀려나 지하로 몸을 숨겼습니다.

 

해방되자 전라도 광주에서 45년 8월 17일 서울로 올라와 김삼룡, 이관술 등 옛동료들을 모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46년 5월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남한 경제를 교란하고 공산당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다 미군정청의 수배령이 떨어지자 46년 9월 관(棺) 속에 숨어 월북하였습니다.

 

남한에는 박헌영을 대신하여 김삼룡이 남로당 괴수가 되었습니다. 박헌영은 북한 해주에 거쳐하면서 서울의 김삼룡에게 모든 공작지령을 내렸고 김삼룡은 그 지령대로 움직였습니다.

 

군사영어 학교와 국방경비사관학교에 좌익성향을 가진 청년들을 입교시키라는 것, 46년 10월 대구 폭동사건, 48년 제주 4.3사건, 동년 10월 14연대 반란 사건, 49년 4월 국회푸락치 사건 등이 모두 박헌영의 지령에 의해 저지른 폭력이었습니다.

 

박헌영은 1949년 3월과 1950년 4월 두차례에 걸쳐 남침전쟁 승인을 받기 위해 김일성과 함께 쏘련의 스탈린을 방문하였는데 그때 박헌영은 인민군대가 남침만 하면 20만 빨치산이 봉기를 일으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남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 동안 남진을 하지않고 남쪽에서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1950년 3월까지 지리산 공비토벌과 남로당 서울시당 위원장 홍민표에 의해 남로당원 33만명이 자수하여 남로당의 씨가 말렸기 때문이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으로 북으로 패주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11월 7일 만포진에서 쏘련 대사관의 10월 혁명 기념 파티에 초대되어 술에 취한 김일성이가 박헌영을 향해 "여보 박헌영이! 당신이 말한 그 빨치산이 다 어디갔는가?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는가?"라고 책임 추궁을 하자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 동지! 어째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그러니 후방이 텅 비어 독안에 든 쥐가 되지않았는가?"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에 열을 받은 김일성이 "야! 이 자식아 전쟁에 지면 나 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다. 스탈린 동지에게 왜 보고를 그 따위로 했는가?"라며 잉크병을 벽에 던져 박살이 났습니다.

(이 때 박헌영은 50세, 김일성은 38세)

 

이때부터 김일성과 박헌영은 틀어졌고 1953년 3월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 스파이로 몰아 평북 철산의 산골에 감금하고 고문을 하였으며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라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감옥 안에 세파트 개를 집어넣었는데 전신을 물어뜯겨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박헌영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김일성이 써준 각본대로 자신이 미제국주의 간첩이라고 진술하였으며 "나를 빨리 총살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박갑동 著 박헌영)

 

그리하여 박헌영은 1955년 12월 14일 비밀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1956년 7월 19일 총살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박헌영은 56세를 일기로 비참하게 최후를 마감하고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던져졌습니다.

 

이 박헌영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남한을 공산화 시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여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였으며 앞날이 창창한 청년 학생들을 공산주의에 물들게 하여 인생을 망쳐놓고 끝내는 남북 어느쪽에서도 인정 받지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6회》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정부 전복과 창군을 방해하다 죽음을 당한 자들의 말로☆

 

2.애인 김수임을 이용한 이강국

이강국(李康國)은 1906년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서울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재학중 일본인 교수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3학년 때 중퇴하고 1930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 유학 중 공산당에 입당한 엘리트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이者는 1935년 귀국하여 원산 부두에서 이주하 등과 노동운동을 하다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처음에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박헌영 남로당의 전위대인 민주주의민족전선 비서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군 철수를 부르짖으며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기라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등 반미운동을 선동하였습니다.

 

반미선동으로 미군정에 미운털이 박혀 1946년 9월초 박헌영과 함께 체포령이 내려지자 미군 헌병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는 애인 김수임의 도움으로 <베어드> 대령의 승용차를 타고 개성을 거쳐 월북하였습니다.

 

(김수임은 자신이 직접 운전하여 개성 검문소를 통과하여 북으로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당시 검문소는 미군 헌병들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헌병사령관의 차는 검문을 받지 않았다고 함)

 

이강국은 남한에 체류중에는 미군정 헌병사령부의 통역사로 근무하며 <베어드> 사령관과 동거하는 김수임으로부터 미 군정이 돌아가는 비밀정보를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간첩행위를 했고 북으로 넘어간 뒤에도 계속하여 김수임으로부터 비밀정보를 빼내 갔습니다.

 

그 중간 역할은 김수임의 의붓동생 최용달이 맡아 하였습니다.

 

김수임은 사실 불쌍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911년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따라 개성의 다리밑에서 빈민생활을 하다 11살 때 14살 먹은 신랑에게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갔지만 폭행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나와 어떤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서울 연희동의 미 선교사 집에 빨래하고 심부름 하는 아이로 들어갔는데 그 선교사가 눈치도 빠르고 영리한 김수임을 공부시켜 이화여전에 입학시켰습니다.

 

거기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영어에 능통하여 졸업 후에 세브란스병원에 취직하여 의사의 통역관이 되었습니다. 그무렵에 동기생 모윤숙(문필가) 등과 어떤 모임에서 처자식이 있는 이강국을 만나 그의 애인이 되었습니다.(김수임은 어리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친인척도 없는 외로운 처지에서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베를린 유학까지 다녀온 이강국에게 홀딱 반해버렸다는 것이 재판 때 친구들의 증언이었음)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들어서자 김수임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나와 미군정청에 통역사로 취직을 했는데 거기서 헌병사령관 사무실로 배정을 받았습니다.

 

그 인연으로 <베어드> 사령관과 동거를 하게 되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강국이 요구하는 정보를 빼내 이강국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강국이라는 者는 악당이며,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김일성을 위해 애인을 나락으로 몰아넣은 양아치였습니다.

 

그렇게 충성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미제국주의 간첩이라는 굴레였습니다.

 

그는 미국 방첩대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955년 이승엽, 임화 등과 함께 김일성의 총뿌리에 🐕 죽음을 당하였 습니다.

 

1930년대에 베를린으로 유학을 갈 정도의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지가 때어난 고향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에 헌신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머리 좋은 것 하고 정신세계는 빗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의 고향 사람 들 중에도 경성제대와 와세대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노부모와 처자식을 외면하고 월북하여 협동농장에서 고생을 하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7회》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정부 전복과 창군을 방해하다 죽음을 당한 자들의 말로 ☆

3.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

 

이재복은 46년 10월 대구폭동 사건과 제주 4.3사건,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을 배후조종한 주범입니다.

 

이재복은 1903년 경북 안동군 임동면 출신이며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하다 일본 교토 신학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와 경북 영천에서 목회활동을 한 목사입니다.

 

신분이 목사이면서 박헌영의 남로당에 입당하여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박헌영의 신임을 받아 이중업이 월북한 뒤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 되었습니다.

 

이재복은 여수14연대 반란사건 직후인 48년 12월 18일 새벽에 서울 성동구 신당동 세째 첩의 집에서 육본 정보국 방첩과 김창룡 팀장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남로당 간부들은 몸을 자주 피해야 했기때문에 여러곳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여러명의 애첩을 두고 있었다고 함)

 

또한 이재복은 이근민, 박영근, 이일서, 이일도 등 네개의 가명(假名)을 가지고 활동했기 때문에 체포하기가 매우 여려웠습니다.

 

이재복의 집을 수색하던중 천정에서 군 내부의 남로당 가입자 500명의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대구폭동사건과 제주 4 3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을 주도한 배후인물이라고 자백하였습니다.

 

김창룡 대위는 조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이재복에게 전향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재복은 "내가 대한민국 국민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소. 전향을 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전향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런걸 보면 이재복은 다른 빨갱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일말의 양심을 있었습니다.

 

이재복은 그길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49년 5월 26일 최남근과 함께 수색에서 총살되었습니다.(49년 5월 28일자 경향신문)

 

이재복은 원래 목사였지만 남로당 박헌영의 하수인이 되어 좌익군대를 만들어 정부를 뒤엎으려 했으며, 수많은 동족과 그 유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자였습니다.

 

 

<軍의 苦難史 제48회》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정부 전복과 창군을 방해하다 죽음을 당한 자들의 말로 ☆

 

4.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이현상은 1905년 전라북도 금산군 군북면(현, 충남 금산군 북일면)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 중앙고보 재학중이던 1925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1927년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이 군북면장을 하고 자기 형들 두명도 모두 면장을 하였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면서도 생활에는 불편이 없었습니다.

 

해방이 된 조국에서 또다시 박헌영의 남로당에 입당하여 박헌영의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박헌영이 월북하자 따라서 월북을 하여 강동정치학원에서 남파 무장간첩 교육을 받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태백산 줄기를 타고 남파하여 지리산까지 내려왔습니다.

 

48년 10월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입산했을 때 북으로부터 반란군을 지휘하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49년 4월에 반란군 주모자 김지회와 홍순석이 사살된 후부터 이현상이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일대의 빨치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남하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철도와 교량 등 국군의 병참선을 파괴하고 국군의 보급차량을 급습하는 등 게릴라 활동으로 국군의 후방을 교란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철수하자 이현상도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북으로 철수를 하는데 박헌영 부수상의 직계인 이승엽(서울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북으로 가지말고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라는 명칭으로 남한전체의 빨치산을 지휘하라"는 남부군 사령관 직위를 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현상이 "남부군 사령관"이 된 것이고 이후 북으로 가지 못하고 지리산에서 왕초 노릇을 하며 북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실체도 없는 공산주의 지상낙원을 꿈꾸며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 망나니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쓸모가 없어지자 김일성은 박헌영의 남로당파를 제거할 때 이현상도 남로당파이므로 제거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북로당파인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와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에 의해 무장해제 되고 남부군사령관 직위도 해임되어 평당원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렇게 평당원으로 얼마동안 종군하다 53년 9월 17일 하동 쌍계사 뒤 의신리 빗점골 너덜바위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현상은 경찰과 군인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군의관의 검시결과 아주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목에 총을 겨누고 쏜 것으로 보아 방준표와 박영발의 지령을 받은 북로당파 저격수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이현상은 5년여 동안을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지리산과 덕유산을 오가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돌아온 것은 배신과 죽음 뿐이었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49회》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정부 전복과 창군을 방해하다 죽음을 당한 자들의 말로 ☆

 

5. 남로당 총책 김삼룡

김삼룡은 박헌영이 월북한 46년 9월 이후부터 50년 3월 체포될 때까지 남로당 총책이었습니다.

 

이 김삼룡은 1908년 충북 충주군 엄정면(현, 충주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점원으로 일을 하며 야학에서 공부를 하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게 되었으며 26세 되던 1934년에 조선공산당 간부였던 이재유와 이관술, 이현상, 이순금 등을 만나 경성트로이카(항일 독립 노동운동단체)에 가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다가 1937년에 이재유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숨었으며, 1939년에 이관술과 이순금 남매와 함께 경성 콤그룹(공산주의자들의 단체)을 창설하여 대창직물, 용산철도공작소, 경성방직 등에 위장취업을 하여 노동운동을 하였습니다.

 

1940년에 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해방을 맞아 출소 후 박헌영과 함께 남로당을 창당하여 남로당 조직부장과 민주주의 민족전선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박헌영이 월북하자 그 후임으로 남로당 총책으로 북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수령하여 남한을 전복시키려는 온갖 술책을 다 부렸던 악당의 괴수였습니다.

 

군경 합동수사본부는 김삼룡을 체포하기 위해 3년동안을 노력한 끝에 50년 3월 27일 체포하였습니다.

 

김삼룡은 변신의 귀재였으며 7가지 안경을 쓰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변장을 잘해서 그의 비서들도 잘 모를정도였다고 합니다.

 

50년 3월 26일 밤과 27일 새벽에 종로 6가에 있는 김삼룡이 거처하는 집을 덮쳤으나, 실패했는데 27일 오전 9시 30분 쯤 북아현동 파출소 경찰이 출근길에 길가의 쓰레기 통 뚜껑이 들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이상하여 뚜껑을 열고 잡아서 중부 경찰서에 데려와 신문을 해도 자신의 신분을 말하지않고 있었는데 우연히 전향하여 경찰정보원으로 일하는 前 서울시당 위원장 홍민표가 경찰서에 들어가다가 의자에 묶여 있는 김삼룡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가 바로 김삼룡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변장술의 귀재였고 46년 9월 철도노조 파업과 10월 대구폭동, 48년 제주4.3사건, 14연대 반란사건 등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악질적인 공산주의자 김삼룡을 체포하게 되었습니다.

 

김삼룡은 50년 6월 4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월 28일 새벽에 일말의 양심도 없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다 "네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살려달라고 하느냐?"는 핀잔을 들으며 생을 총살로 마감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50회》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정부 전복과 창군을 방해하다 죽음을 당한 자들의 말로 ☆

 

6. 지리산에 평화가 오고ᆢ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죽음을 당하고 난 뒤 경남도당을 지휘하던 부사령관 이영회가 진주, 산청, 함양, 의령 일대에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다 53년 11월 27일 전투경찰 제2연대 수색조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이영회가 죽은 뒤부터 지리산의 빨치산들은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토벌대의 소탕작전으로 54년 1월 이영회의 후임 빨치산 대장 노영호(서울대 출신), 경남북부지구당 위원장 박찬봉,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가 토벌대에 사살되고, 동년 11월에 경남도당위원장 조병하와 영남의 알프스라고 하는 신불산(울주군)을 근거지로 경남북 동해지역을 분탕질하던 조선 인민유격대장 남도부(본명 하준수)가 김창룡의 육군 특무부대에 체포되어 총살됨으로서 제주도를 제외한 육지에서 빨치산의 맥은 완전히 끊어지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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