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조선잡사(39)/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3회

영. 정조 시대~

백성의 생활을 잘 파고 들고 싶었던

인자한 국왕 영조임금

영조가 직접 쓴 현판을 보면 영조의 국정 철학이 엿보인다.

「均貢愛民」 「節用 畜力」

세금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비츅한다

조선의 남성은 16세부터 60세까지 균역均役(병역)의 의무를 졌다.

생계를 위해 군대에 가지 않을 경우에 내는 세금을 군포軍布라 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 군포가 너무 무거워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게 하고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화전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포는 1년에 2필를 내야 했는데 1필의 폭은 37.4cm 길이 16m로 1필를 짜는 데 10일가량 걸렸다 .

아들이 둘인 집은 남자가 셋(아버지)이므로 총 6필의 군포를 내야 하는데 여기에 죽은 아버지 대신 대립자를 세우지 못하면 아버지 몫의 군포도 계속 내야 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16세 미만의 어린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군포 부담자가 도망가면 친척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족징族徵 .옆집이 도망가 세금을 못 내면 향촌 사회에서 부담해야 하는 인징隣徵 등 실제로 내야 하는 군포는 너무나 많아 삶이 고통스러웠다 반면, 당시 양반들은 군포를 내지 않는 것이 양반의 특권이요.신분이라 생각했다.

양반의 균역 제외는 자연스럽게 국가 재정의 악화로 이어졌다. 이때 어사 방문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조판서 박문수가 양반들도 똑같이 군포를 내자며 호포론戶布論, 신분과 관계없이 호 단위로 군포를 징수함을 주장했다.

영조임금도 이에 찬성했다.

영조는 세금을 고르게 한다는 균공을 펼치기 위해 호포(가구당 세금 납부)와 결포( 토지 소유의 양에 따라 세금납부)로 세금납부 방식을 손보려 했다.

신하들에게 호포와 결포에 대해 의견을 물어보니 반대를 했다. 그동안 군포를 내지 않던 양반들은 새로운 세금 정책으로 안 내던 세금을 내야 하니 물어보나 마나였다.

영조는 조세 정의를 펼치고 싶었으나 시작부터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양반들이 반대하는 건 당연할 터 일반 백성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영조는 홍화문 앞에서 사람들에게 찬성하는 쪽은 남쪽에서 서게 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북쪽에 서게 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물었다.

여론조사를 통해 정책을 정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백성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묻는 것을 임문臨文이라 했는데 영조는 재위 20년부터 임문을 시작해 총 30여 차례 시행해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들으려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4회

영조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백성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

이런 쌍방향 소통을 생각한다는 것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동반자로 여긴 것이었기에 영조의 소통이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의 강한 반발로 호포법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양반 사대부들과 유생들까지 합세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저항한 것이다.

영조는 이에 한 발 물러서면서 사대부들을 강하게 질타했다.

너희들은 유생에게 호포를 부과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여길 것이나 위로 三公에서부터 아래로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역役은 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또 백성은 나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해야 된다. 너희들 처지해서 백성을 볼 때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 줄 모르나 네가 볼 때는 모두가 나의 적자인 것이다.

<영조실록 영조 26년 7월 3일>

영조는 또 “내가 만일 잠저潛邸(임금이 되기 전 거주)에 있다면, 나도 의당 호포를 냈을 것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다

영조는 양반이나 평민이나 다 같은 나의 백성이라는 신념을 지녔으며 백성을 ‘동포’라고 자주 표현을 했다.

동포이며적자인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임금은 그 대안으로 균역법을 실시햇다.

균역법은 백성들이 군포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기존 2필을 징수하던 군포를 1필로 줄인 세금 경감제도다.

물론 국가적으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지만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던 영조의 결단이었다,

세금 경감에 따른 세수 부족을 위해 박문수가 제안한 어전세漁箭稅.염새鹽稅.선세船稅등을 재정으로 포함하게 하여 균역청에서 관장하게 햇다,

이렇게 영조의 대표적인 애민 정책인 균역법이 1751년 9월 공포 된 것이다.

양반까지 포함된 개혁은 아니었지만 백성들의 세금을 확기적으로 줄였고 이후 양반까지 과세한 호포법이 실시( 1873.1월 흥선대원군) 되기 까지 120년이란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영조는 백성을 생각하는 정책을 많이 펼친 애민군주다 .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5회

영조 50년 ,1774년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지은 「어제문업御製問業」에는 영주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자신의 업적을 소개했는데

첫째가 탕평이오

둘째가 균역이며

셋째가 준천이라고 기록했다.

준천은 지금의 청계천을 정비해 수도 한양의 물 흐름을 원활히 한 사업이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한 예민정책이었다.

당시 천변에 살던 빈민들이 침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 물이 넘치지 않게 했다.

그러면서 준천 작업에 빈민들을 동원해 임금을 주어 생계를 지원했다.

백성을 위한 공사를 하면서 일자리 창출까지 한 조선판 뉴딜 정책에 임금의 애민 정책이 묻어났다.

공사에 담긴 임금의 사랑은 사랑을 백성들도 알았는지 승려와 맹인 등 자원으로 참여하는 이가 늘어나면서 2개월 만에 청계천 정비공사가 마무리됐다.

이때 개천에서 퍼낸 흙을 쌓아 방산芳山이라 명했는데 악취 나는 흙더미를 ‘향기 나는 산’이이라는 반어적인 표현으로 지은 것이다.

지금의 을지로 방산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준천사업도 백성들과의 소통에서 시작했기에 소통으로 필요한 정책을 찾은 셈이 된다.

또한 백성의 소리를 끊임없이 들으려 했던 영조는 신문고를 다시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했다.

태종 때 만든 신문고 제도가 연산군 때 폐지됐는데 애민군주 영조가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영조는 1725년 ‘앞슬형’ 이라곤 잔인하고 처참한 형벌을 없애 인간 존중의 기준을 한 단계 진보시켰다.

‘압슬형’이라는 사기 조각을 깐 바닥 위에 무릎을 꿇리고 무릎 위에 사람이 올라가는 형벌로 건강한 남자도 몇 회 만에 하반신이 망가져 걷지 못하는 끔찍한 형벌이다.

또한 얼굴에 칼로 문씨를 새기는 경자黥刺 등의 가혹한 처벌도 폐지시켰다.

사형수에 대해서는 세 번의 심사를 받을 수 있는 ‘삼복 법’을 엄격히 지키도록 해 목숨을 빼앗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이처럼 죄수 인권도 가벼워 여기지 않았던 영조의 애민 정책이 돋보인다 .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6회

참 아름다운 글이다!!

과거 시험에 제출된 답안지를 보고 영조가 한 감탄사다.

영조 46년, 1770년에 치러진 대과(문과) 1차 시험 초시에서 34세 청년 박지원이 장원을 차지했다.

훗날 천재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박지원의 글에 영조임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 후 치러진 복시에서 박지원은 백지 답안을 제출했다.

임금도 기대하고 있던 장원 박지원의 백지 제출은 시험관들을 당혹케 했다.

입신양명의 유일한 수단인 과거시험을 보이콧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연암 박지원(1737년 ~1805년)은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1차 시험에 장원을 하고 영조가 박지원의 특출난 능력을 칭찬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인재가 필요했던 정치권에서 박지원을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계속된 정치권의 섭외가 줄을 이었지만 박지원은 평소 당쟁과 편 가르기에 반감이 컸고

당시 난장판 같은 혼탁한 과거 시험을 통해 실시하는 것의 의미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속리산 가야산 천마산 묘향산 등 국내 명산을 두루 유람했다고 연암 집은 정한다.

박지원의 가문은 청빈한 삶을 대대로 이어온 선비 집안이었으나 가풍을 이어 혼탁한 세상에 몸을 섞지 않은 것이다.

정계 진출을 포기한 박지원은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그의 작품은 일관되게 양반 기득권의 형태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양반전’. ‘허생전’ 등이 그것이다. 또 그 풍자에는 유머도 담겨 있었다.

‘양반전’에 소개된 내용 중 양반兩班을 냥 +반(半) =1.5냥으로 해석하여 개(犬) 개값이 2냥이니 양반이 개만도 못한 존재라고 기가 막힌 풍자도 있었다.

실학은 당시 진보적인 젊은 성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사구시에 입각해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여 ‘실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리공론만 따지는 헛된 학문 즉 ‘허학’이 아닌 ‘실학’을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실학을 통해 조선을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 즉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국강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농업을 중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농학파와 상공업이 발전해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주장하는 중상학파로 나뉜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는 중농학파의 주장은 토지를 농민들이 실제 경작할 수 있도록 나누는 것이 핵심인데 지주들이 자기 땅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제도 개선은 불가능했다.

홍대영 박지원 박제가로 대표되는 중상학파는 농업에 기초한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기술 혁신과 대외무역을 통해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던 실학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7회

박지원은 정조 4년 , 1780년 5월 ,영조의 부마이며 자신의 8촌 형인 금송도위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축하를 위한 사은사로 북경에 갈 때 자제(子弟)군관으로 따라갔다 .

박지원은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26권의 책으로 엮어 ‘열하일기’를 펴냈다 이 책은 조선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

혼탁한 정계가 싫어 과거시험에서 백지를 던졌던 박지원이었지만 청나라를 다녀온 후

“괴이한 구경거리와 모르는 것이 많아 문자로서 형용할 수 없어 한스럽다,” 고 할 정도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박지원은 나이 50세에 음서(추천)로 관직을 받았다.

글로만 풀어냈던 실학사상을 적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방관이 된 박지원은 청나라에서 배웠던 수레와 벽돌 물레방아 등을 제작해 실학을 구현했다. 백성들을 진정으로 위하고 구휼에 힘썼던 박지원은 임금과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진정한 실학자 였다.

청나라를 오랑캐로만 보지 말고 배울 것은 배우자는 북학사상을 주장했다.

82세가 된 영조는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세손(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을 자신의 후계자로 공포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영조는 세손과 대신들을 집경당으로 불렀다.

노론의 반대를 뚫고 왕위를 물려주어야 하는 난관에도 대신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으로 말을 시작했다.

“신기神氣가 더욱 피곤하니 비록 한 가지의 공사公事를 펼치더라도 진실로 수응하기 어렵다

이와같은 데도 어찌 만기萬幾를 수행하겠는가?

국사를 생각하느라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

남인南人을 알겠는가?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다 두겠는가?

나는 어린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

<영조실록 영조 51년 11월 20일>

다시맣해 영조인금은 세손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맡기겠다는 이야기였고 결론은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선 대신들은 놀라면서 한편으로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노론 벽파를 대표해서 좌의정 홍인한이 나섰다.

“홍인한이 말하기를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가가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조정업무)까지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51년 11월 20일>

스물네 살이나 되는 세손이 국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세손의 왕위 계승 반대를 넘어 세손의 존재를 무시하며 차기 왕권은 세손몫이 아니다는 격렬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세손에게 임명권을 수점受點하라고 명하면서 문.무관 임용 대기자 명단을 주었다. 더불어서 순감군巡監軍의 지휘권을 세손에게 넘기면서 힘을 실러 주었다.

세손에게 군시 지휘권이 넘어가자 대신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조는 내친김에 임금의 호위부대인 상군廂軍과 협련군挾輦軍을 불러 들였다. 영조의 의지를 확인한 대신들은 컬 앞에서 한 발 물러섰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8회

영조임금은

그해 12월 8일 영조는 세손의 대리청정 절목을 마련하고 정식으로 대리청정을 맡겨 공식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22일 대리청정 조참에 신하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끝까지 세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노론의 표현이었지만 영조가 승하하면서 자연스럽게 줄다리기가 끝났다.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 수 없다는 노론의 반대를 뚫고 정조가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영조의 덕분이다.

만약 정조가 임금이 되지 못했다면,

조선은 노론에 의해 그리고

노론을 위해 국가가 경영되면서 암흑기로 후퇴했을 것이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영조는 3개월 후 경희궁 집경당당에서 승하했다.

사망 전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고 구토가 잦은 증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폐렴으로 사망한 듯하다는 것이다.

묘호는 원래 영종이었으나 고종 29년에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묘호인 영조로 바뀌었다.

영조는 스스로 자신의 업적 중에 ‘탕평. 균역. 준천’을 가장 자부심이 느끼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그 중 균역법 시행은 영조 통치시대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을 위해 반값 군포를 시행 한 것은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는데 크게 기여 했디 때문이다. 군포 1필이 약 20냥 정도 됐는데 1냥으로 쌀 20킬로를 살 수 있었으니 현재가치로 보면 대략 100만원정도의 세금을 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조는 솔섬수범하는 리더십도 보여줬다 친경의례를 통해 왕이 직접 농사짓는 모범을 보이면서 백성들에게 농업을 소중히 여김과 동시에 농업을 권장하는 행사를 열었다 .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4회의 친경을 하며 농민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의욕을 심어주며 농업을 장려했다.

영조는 조선왕 27명 중에 가장 장수한 왕으로 80세를 넘긴 유일한 왕이다.

당시 조선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

그렇다고 영조가 건강한 체질로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

‘승정원 일기’는 영조가 어릴 때부터 잔병이 많았고 특히 몸이 차서 복통을 자주 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9회

영조의 장수의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건강에 대한 영조 자신의 관심도 큰 몫을 했다. 영조는 52년 재위 기간 동안 총 6195회의 진맥을 받았다. 연평균 119회. 월평균 10회의 진맥을 받을 정도로 건강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다./

이는 할아버지 현종이 15년간 50회. 아버지 숙종이 46년간 869회의 진맥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다 .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의관에게

“1년 동안 내가 먹은 인삼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 고 물은 기록이 있다.

이에 의관은 “20근 정도를 드셨습니다. 전하.”하고 대답하였다. 20근은 대략 13kg 정도이니 엄청난 약의 인삼을 복용하며 건강에 신경 쓴 것을 알 수 있다.

영조 21년 8월,

‘승정원일기’는 “ 살찌는 것보다 마른 것이 나은데 동궁은 지나치게 뚱뚱해서 염려스럽다.”

“ 내가 평소 별다른 질병이 없는 것은 살찌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영조의 평소 건강 철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조는 항상 소식을 했다.

조선시대 임금은

조반과 야참까지 하루 5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영조는 현재 우리처럼 하루 세 끼를 먹었다. 또한 육식 보다는 채식 위주로 식단을 꾸미고 흰쌀밥 대신 현미와 잡곡밥을 섞여 먹었다.

영조는 똑똑했고 예리함을 갖춘 정치가였다.

그러나 성품은 직선적이며 관대하지 않았고 예의 범죄를 따지는 깐깐한 스타일이었다. 이런 영조에게 독설에 가까운 직언을 하는 신하가 있었으니 바로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영조가 왕세자로 임명했을 때 부터 인연을 맺었다.

박문수은 거칠 것 없는 자신감으로 임금에게 당당하게 틀렸다고 지적하는 고집불통이었다. 한마디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영조는 박문수를 내치지 않고 아꼈다. 소통하는 과정이 거칠긴 했지만, 자신이 갖지 못한 생각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박문수의 소중함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부분이 바로 영조를 좋은 리더로서의 평가할 수 있는 큰 장점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참모를 선택할 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선호한다.

코드가 맞는 사람은 생각과 철학이 비슷해 거부감이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조합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함정이 될 수 있다. 리더가 참모의 서로 다른 사고를 지닐 때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이 없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놀란만큼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박문수를 편견 없이 대하고 그의 직언에 귀를 기울인 것이 영조의 소통 능력을 배울 만한 점이다.

국왕이 될 수 없는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던 영조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성실한 왕이었으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소통으로 정책을 결정하려 했던 애민군주다 .

아들 사도세자를 잃고 괴로워 했지만, 그로 인해 깨달음으로 손자를 지키며 대업을 물려주었던 조선의 최장수 국왕 영조와 그 정적들에게 둘러싸인 손자 정조를 국왕으로 세워온 공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0회

영조 멘탈 붕괴시킨 게장 독살설의 진실 ~~

경종임금이 게장과 감 먹고 5일 만에 사망

사망 배후는 이복동생 영조?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정말 성불구자 였나?

"25년이나 지났는데 지겹지도 않냐.“

"경종 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떻게 왕이란 말이오?"라고 외치는 죄인에게 영조는 이렇게 내뱉는다. 그러고는 귀를 씻어버림다.

혜경궁 홍(정조 임금 어머니)씨가 지은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좋지 않은 말을 들으면 반드시 귀를 씻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나주 궤서사건'이 모티브였던 것 같다.

영조 31년(1755) 1월 전라도 나주에서 영조를 비방하는 익명의 글이 붙었던 사건이다.

조선 시대에 이런 글을 궤서(掛書)라고 불렀다.

나주 궤서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조가 직접 나선 국문 과정을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신치운이 말하기를, ‘신(臣)은 갑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영조실록 31년 5월 20일>

여기서 영조의 멘탈을 붕괴시킨 건 게장이다.

대관절 게장이 뭐길래 영조임금은 분통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격렬하게 반응했을까.

숙종 임금 아들, 경종은 게장을 먹고 죽었다?

신치운이 말한 갑진년은 1724년. 경종이 사망한 해다.

이해 8월 경종은 한 달을 앓다가 사망한다.

34세. 왕위에 오른지 4년째였다.

그런데 신치운의 말 속엔 뼈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날 이후 경종은 8월 20일 먹은 생감과 게장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고 결국 닷새를 버티지 못했다.

"임금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하여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황금탕(黃芩湯)을 지어 올렸다." <경종실록 4년 8월 22일>

"임금의 설사의 징후가 그치지 않아 혼미하고 피곤함이 특별히 심하니, 탕약을 정지하고 잇따라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 을 올렸다."

<경종실록. 4년 8월 23일>

게장과 생감을 들인 것은 당시에도 지적이 나왔다.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

<『경종실록. 4년 8월 21일>

한의학에서는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곤란하다고 본다.

모두 차가운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병이 있거나 소화기 계통이 약한 사람은 큰 탈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종은 허약체질이었고 당시엔 한 달여간 제대로 식사를 못했기 때문에 심신이 피폐한 때였다.

그랬기에 게장과 생감을 올린 것은 사실상

'독약'을 보낸 셈이라는 것이죠.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1회

지금까지 누가 보낸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에 경종 주변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였다.

게장을 올린 범인은 영조?

물론 영조는 '가짜 뉴스'라며 펄쩍 뛰었다.

신치운을 국문하고 5개월 가량 지나 영조는 이렇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신치운을 사형에 처한 뒤에 울며 우리 자성(慈聖·숙종의 세번째 부인 인원왕후 김씨를 가리킴)께 아뢰었는데, 자성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게장을 어주(御廚·수랏간)에서 공진(供進)한 것임을 알았다.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린 무리가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여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핍박하였다.“

<영조실록. 31년 10월 9일>

게장을 올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수랏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종 독살설'은 오랫동안 이어지며 영조를 힘들게 했다.

게장 외에 비상 같은 독약을 음식에 넣었을 것이라는 풍문도 돌았을 정도였다.

영조 4년(1728)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도 '영조가 경종 독살범'이라는 구호를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당시 이인좌 세력은 군대 안에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고 조석으로 곡을 하며 민심을 흔들었다고 전해진다.

이인좌의 난은 진압됐지만,

독살설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영조 31년 나주 궤서사건의 배후를 잡아낸 영조는 '토역 정시(討逆庭試)'라는 특별 과거시험을 개최한다.

"임금이 바야흐로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데 한 시권(試券)이 처음에는 과부(科賦)를 짓는 것처럼 하다가 그 아래 몇 폭(幅)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는데 모두 난언 패설(亂言悖說)이었다…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니…여러 신하들이 유시를 받들고서야 아주 패악하고 흉한 말이 있음을 알고 모두 분통하여 죽고자 하였는데…"

<영조실록.31년 5월 2일>

난언 패설, 또 독살설이 튀어나온 것이죠. 독살설의 괴수를 잡은 것을 축하하며 연 과거 시험의 답안지에 독살설이 나오니 영조로서는 팔짝 뛸 일이었다.

이후 영조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조목조목 반박하는『천의소감(闡義昭鑑)』이라는 책을 따로 내기까지 했다.

영조는 정말 억울했을까?

독살설에 대해 전문가들은 근거가 대체로 약하다고 보는 편이다.

『한국의사학회지』에 발표된 논문(「경종독살설 연구」)은 경종이 한 달 가량 더위에 지치고 식사를 못해 기력이 없던 상황에서 차가운 성질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먹고는 끊임없는 설사를 하다가 극심한 탈수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했을 뿐이다.

『왕의 한의학』의 저자인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은 "스트레스와 간질에다 비만성 질환까지 달고 살았으니 게장과 감이 치명타를 줄 정도로 허약한 상태가 됐을 것"이라고 봤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2회

게장이 올려진 것에 대해선 의견이 나뉜다.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수랏간’에서 그런 의학적 지식까지 고려하지는 않았을 거란 견해도 있다.

무엇보다 경종이 한 달간 밥상을 물렸기 때문에 게장을 반드시 먹는다는 보장도 없었다는 것이다.

경종은 과연 성불구였나?

"이 날 희빈 장(장희빈)씨가 사약을 받으면서 어린 세자의 국부를 잡았던 탓으로 후일 세자에게는 후사가 없었다는 것이며,

또한 세자는 이 때의 일로 단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

야사에 전해지는 유명한 내용이지만. 장씨의 그런 행동은 확인되지도 않았다 .

그러나 경종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세자 시절 "원자(元子·경종)에게 경휵(驚搐·놀라고 두려워함) 의 증세가 있어…" (『숙종실록』 15년 11월 8일)는 기록도 있고 스스로도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후사가 없었는데, 후궁을 두지 않았던 유일한 조선의 국왕(조선 20대 경종)이기도 한다.

부인의 문제였다면 후궁을 권하고 들였겠지만 당시 궁 내에선 문제가 경종에게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았던 것이다.

경종의 건강 악화는 복합적 요인으로 보인다.

희빈 장씨의 비극적 죽음, 세자로서 대리청정 3년, 자신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당파싸움 등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쌓인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았다. 해가 지날수록 고질이 됐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경종실록』 4년 8월 2일)는 기록도 있다..

다만 만화나 드라마에서 비실비실한 체형으로 나오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비만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경종에 대해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 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덥고 습한 날씨에 무척 힘들어했다고도 한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잡사(41)/받은 글  (0) 2026.06.24
조선잡사(40)/받은 글  (0) 2026.06.10
창군고난사(6)/받은 글  (0) 2026.05.19
창군고난사(5)/받은 글  (0) 2026.05.15
조선잡사(38)/받은 글  (0) 2026.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