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3회
현재 권력 vs 미래 권력
경종와 영조는 이복 형제였다.
경종의 모친은 희빈 장씨(장흐빈), 영조의 모친은 숙빈 최씨(무수리출신)다.
숙빈 최씨는 훗날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해치려 한다고 숙종에게 알려 사약을 받게 한 인물이다.
두 사람의 생모는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것이다
양측을 지지하는 당파도 달랐다.
경종은 소론이, 영조는 노론이 각각 지지했다.
모두 서인이다.
희빈 장씨를 지지했던 남인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상태였다.
외가와 정치기반을 모두 잃은 경종의 왕권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소론이 새로운 지지기반이 되어줬지만, 당시 정치사회의 권력은 노론으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즉, 소론은 소수여당이었고, 그 외부를 거대 야당인 노론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죠.
후사를 두지 못한 경종이 입양을 고민했지만, 동생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그러니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인 경종과 영조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살설이 자라기 좋은 토양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비유하자면 영국 헨리8세의 두 딸이자 이복 자매였던 메리 여왕(가톨릭)과 엘리자베스 여왕(성공회)의 관계 같았을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를 핍박했던 메리와 달리 경종은 동생을 무척 아꼈다.
경종 1~2년(1721~1722) 반역 모의를 벌였다는 밀고로 노론은 풍비박산이 난다.
이 사건으로 김창집·이이명 등 이른바 '노론의 4대신'이 모두 처형되고 관련자 200여명이 처벌받는 등 노론 대숙청이 벌어진다..
소론 강경파는 연잉군도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경종은 이를 제지하고 동생을 끝까지 보호했다.
연잉군 역시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 형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여러차례 토로했다.
"황형(皇兄·경종)의 지극한 우애와 지극히 인자함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내가 68세에 이르게 된 것도 다 우리 황형께서 주신 것이다." (『영조실록』 37년 8월 8일)
"황형의 병세가 위독하였을 때 나를 위하여 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게 하라고 하신 자상하신 뜻을 생각하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비록 찌는 듯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시 어떻게 문을 열라는 하교를 듣겠는가? 생각의 일어남이 여기에 미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덮는다.
<영조실록. 23년 6월 28일>
정치적 풍파 속에서 때로는 갈등하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한 끈끈한 정은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경종의 치세 기간(4년)은 꽤 짧았다.
그를 전후해 즉위한 숙종(45년)과 영조(52년)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어쩌면 온전치 못한 자신의 상태를 감안해 두 시기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기꺼이 맡았는지도 모른다.
경종과 영조의 애증을 다룬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에서 경종은 연잉군(훗날 영조)이 가져온 인삼차에 독이 든 것을 알고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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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치세의 어두운 얼굴~
흔히들 52년간이나 재위한 영조를 두고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진 임금으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영조실록>을 찬찬히 뜯어보면 영조 시대의 어두운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역시 전세계에 불어닥친 소빙하기의 끝자락이었다.
1731년(703명), 1733년(2081명), 1741년(3700명)의 전염병 희생자수는 약과였다.
1749년(영조 25년) 12월4일 <영조실록>은 심상치않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역(전염병)으로 인한 민간의 사망자가 거의 50만~60만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1750년(영조 26년) 1월5일 <영조실록>은 전국 8도에 전연병 때문에 사망한 백성이 즐비하자 그저 “시신을 묻어주는 것이 왕정(王政)의 큰 일”이라고 했다.
전염병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다. 두 달 뒤인 3월23일 “전염병 사망자가 전국적으로 10만명이 넘었다”(3월23일)고 했다.
영조는 안간힘을 다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5월10일 영조는 “지금 전염병은 전쟁보다 심하다”면서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영조는
“아! 저 백성의 죽음이 줄을 이어도 그 임금 된 자가 부덕해서 구해내지 못한다”면서 “이는 하늘의 저버림”이라고 한탄한다.
왕조시대엔 이와같은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나면 신하들이 벌떼처럼 나서
“임금이 모자란 탓이니 마땅히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반성하여 하늘의 징계를 두려워 해야 한다”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이를 ‘공구구성(恐懼修省)’이라 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것이 못마땅했다.
아무리 ‘임금이 곧 하늘’인 왕조시대지만 모든 잘못을 군주에게만 돌리는 신하들의 버릇도 역시 문제라고 본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은 임금의 부덕이라고만 말하지 말라.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심혈을 기울여라. 백성들에게 빌려준 곡식은 가을 추수 때까지 미뤄라.
이 모두가 백성의 고혈(膏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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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로 기록한 전염병 사망자수~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5일 후인
5월15일 <영조실록>은
“각도의 장계를 미뤄보면 역질로 사망한 이가 12만4000명에 이르고 원적지 밖에서 떠돌다 죽은 이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30만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해 <영조실록>은 1월부터 월별로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들의 수를 집계해놓았다.
그에 따르면 1월 전국적으로 1만1692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월 6233명, 3월 3만7581명, 4월 2만5547명,
5월 1만9849명, 6월 3만300명, 7월 2만2261명,
8월 2246명씩 사망했다. 월별 사망자수 집계는 9월 6만7869명이라는 숫자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10월 이후의 사망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다.
9월 한 달간 7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다음 달인 10월부터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등장하는 9월까지의 월별 사망자수가 맞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1750년 한 해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수는 22만3578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영조에 이어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칭송을 받는 정조의 시대는 어땠을까.
예외가 없었다. 12만8000명에 이르는 전염병 사망자가 나온 해(1799년·정조 23년)가 있었다.
정조는
“굶주린 자와 죽어서도 장사조차 치를 수 없는 자들을 돕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고, “각 지방에서 전염병이 가장 번성한 곳을 골라 여제(려祭·전염병 돌 때 올리는 제사)를 드리라”고 지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세종처럼 군주가 직접 나서 처방문을 뽑아 각 지방에 내려보낸 경우도 있지만 지방 수령이나 백성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일종의 ‘전염병 매뉴얼’을 편찬해서 배포한 케이스도 있었다.
중종(재위 1506~1544) 연간에 나온 <간이벽온방>과 광해군 연간(재위 1608~1623)에 편찬된 <신찬벽온방>이 그것이다.
특히 1612년(광해군 4년) 12월 함경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강원도를 거쳐 전국으로 급속히 퍼지자 광해군(1608~1623)은
“전염병 재앙은 과언의 허물 탓”이라고 자인하면서 “그러니 과인이 책임지고 퇴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광해군은 어의인 허준(1539~1615)에게 명해 ‘전염병 매뉴얼’ 격인 <신찬벽온방>을 편찬토록 했다.(1613년 2월) 전염병 발생 두어달 안에 편찬과 배포까지 마무리했으니 그 시대 기준으로는 참으로 발빠른 대처라 할 수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6회
한문 4대가 중 한 사람인 이정구(1564~1635)는 “<신찬벽온방> 편찬으로 누추한 시골의 후미진 골목이라도 다 처방문을 의지하여 구해 살게 되었다”고 했다.
정약용의 전염병 대책~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전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기운을 들이마셨기 때문에 생긴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과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고 하였다.
<목민심서. ‘관질’>
지난 코로나 주의사항과 비숫하다
당시는 전염병을 옮기는 미생물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시대였던 만큼 전염병을 잡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어떤 나라 어떤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로 지금보다 기온이 1.5~2도나 낮았다는 중국 명나라 말기(1600~1640년)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양쯔강(揚子江) 이남 지역을 강타한 자연재해와 뒤이은 전염병은 ‘사람 고기를 먹을 만큼’ 심각해졌다.
1641년 이자성(1606~1645)의 반란군이 인구의 70%의 이상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소멸된 황허(黃河) 이남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는 연구가 있고 하는데 이렇듯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했을 정도였다.
‘코로나19’가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걱정이 든다고 한다
이준호의 논문(‘조선시대 기후변동과 전염병 발생이 미친 영향’)은
“1511~1560년과 1641~1740년, 1781~1890년 사이의 전염병 창궐은 소빙하기 징후로 인한 이상기후가 주된 원인”이라고 보았다.
논문은 “한반도의 경우 2100년 쯤 기온이 평균 1.4도 이상 상승한다”고 예측한 IPCC(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전혀 새로운 전염병과 전염매개층의 창궐, 감염성 질환의 증가 등을 걱정하고 있다.
2012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의 핵심은 국제사회가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1850~1900)보다 2도 이내로 제한하고,
1.5도가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설혹 ‘1.5도 상승’ 목표가 지켜져도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을 감안한다면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다.
동북아 온도가 1.5~2도 떨어진 소빙하기의 명나라와 조선의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참고로 1954년 경에는 대략 하루 평균 300여명이 결핵으로 숨지기도 했다.
<출처문헌>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7회
[정조 임금 편]
정조( 이 산)는 1752년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서
1759년 8세의 나이에 세손으로 책봉된다.
그리고 1762년.
11세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지에 갇혀 죽는 모습을 모두 보게 된다.
영조는 자신을 왕위로 올려준 노론 벽파와 손을 잡고 사도세자를 죽였지만 손자만은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이산을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큰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논란을 없애고 세손으로 하여금 국왕 수업을 받게 했던 것이다.
아산의 나이 11세
자신의 방에 놓인 편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편지에는 자신을 살해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기억해 내어 자신의 일기인 ‘존현각일기’에 이 때의 상황을 고스란히 남겼다.
“두렴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놓은 것처럼 위태로웠다..”
정조의 일기로 알려진 ‘존현각일기’는 실제본은 전해지지 않고 1777년 간행된 ‘명의록’에 수록뙈 전해지는데 노론이 무서워 사관도 감히 기록을 못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어 이 때의 상황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내가 아렇게 일기를 쓰는 것은 지금 당하는 핍박을 후세에 전해 알리기 위함이다.“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 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샇펴 나의 동정 하나하나를 살피고 탐지해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영조실록 영조51년 11월 27일>
”저들은 나를 손안에 물건으로 여긴지 오래다.“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조실록 영조51년 1775년 5월3일>
세손이 이렇게 위협받을 정도로 왕실의 권위는 무너졌고 정권을 휘어잡은 노론은 늙은 왕 영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우겸이 상(上)을 사사로이 만나 뵐 때마다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출입을 할 때에는 신발을 끄는 소리가 탁탁 나서 전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었으니 상이 화환(공주)에 이르기를 신발 소리가 어쩌면 그리도 거만한가?’라고 하셨다.
< 영조 51년 1775년 7월 5일>
정조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는 이렇게 괴롭고 힘겨운 시간을 견디며 자신의 시대를 기다렸다.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한 지 닷새 만에 정조는 경희궁에서 조선 후 22대 왕으로 즉위한다.
정조의 나이 25세였다.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서슬 푸른 세월을 견디고 이겨낸 것이었다.
즉위식을 마친 정조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할아버지의 빈전 앞에서 대신들에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일성을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8회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은 놀라 소스라쳤다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생부를 거론하니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노론 대신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연산군이 기억났을까?
그러나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는 표현은 아니었다.
아직 그럴 힘도 없었다.
소론을 지지하던 사도세자가 죽은 후 조정은 노론이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또한 사도세자 문제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인을 어겼다간 노론의 거센 공격이 불을 보듯 뻔하기에 힘없는 정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조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주변에 자기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문반의 세력은 규장각(정조가 설치한 왕실 도서관)에서 키우고 모반의 세력은 장용영( 정조가 만든 호위 군대)에서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11살에 아버지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마저 위태로운 삶을 살았으니 정조가 자기를 억제하고 인내하는 능력은 무서울 정도였을 것이다.
1976년 드디어 왕위에 오른 정조의 첫 번째 키워드는 개혁이었다.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노론 외척들에 대항할 인재들이 필요했다. 이에 규장각을 왕실 도서관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엘리트층 젊은 지식인들과 서얼 출신의 인재들을 규합하고 이들을 자신의 근위 세력으로 양성하는 곳으로 만들려 했었다.
또한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이미 타성에 적은 기득권들이 안주하는 곳이었기에 정조의 의지를 실현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정조는 재위 1년(1777년0,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반포하며 서얼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입법화했다.
실력은 있으나 신분제의 한계로 등용되지 못했던 인재들이 드디어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정조는 이렇게 말햇다
‘서류들 중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로서 나라에 쓰임이 될만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저 서류들도 나의 백성인데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포부도 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또는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9회
또한 정조는 소외된 남인 실학파와 노론 출신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들을 두루 중용해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정약용 등의 활약으로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를 이끌게 된다.
세종에게 집현전이 있었던 것처럼 정조에게는 규장각이라는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개혁 정치의 산실이 되었다.
특히 정조는 젊은 지식인들이 학문에 집중 할 수 잇도록 ’초계문심제도‘를 만들었다.
초계문신抄啓文臣은 규장각에 소속되어 학문을 연구하는 37세 이하의 문신들을 의미하는데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이들은 자신의 직무를 놓고 학문적 연구에만 전념캐 했다.또한 매월 203회의 시험을 통해 학문적 성과를 평가하고 상벌을 통해 철저히 관리를 했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한 1800년 까지 19년 동안 총 138명의 학자를 배출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을 들 수 있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라 불리는 정약전,서유구.김조순 등이 모두 초계문신 출신으로 정조의 싱크탱탱크 역할을 했다,
세종의’사가독서제‘와 유사한 것이다
아버지 복수 대신 조선의 부흥을 꿈꾼 정조
정조를 향한 7차례의 암살 시도는 그가 얼마나 고단한 왕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정조는 정적들의 끊임없는 공격 앞에 평생 단 하루도 깊이 잠들 수 없었던 왕이었다.
정조의 탁월한 활솜씨와 무예는 끊임없는 위협에 대한 자기방어였을 것이다.
정조 1년. 1777년 7월 28일 새벽
경희궁 정조의 침실인 존현각의 자객들이 나타났다. 자객들은 존현각 지붕을 뚫고 들어가 왕을 암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시각까지 책을 보고 있던 정조 때문에 암살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늦은 시각까지 책을 보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어쩌면 밤늦게까지 독서하는 정조의 학습열은 죽음의 공포에서 맞서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환관 궁녀 호위군까지 연루된 왕의 암살 시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암살 사건이 며칠 후 개방되어 있는 존현각의 경호 문제로 정조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0회
그리고 닷새 후엔 8월 11일 밤 자객들이 다시 궁에 침입하다가 체포되었다.
경계가 강화된 비상 상황 속에서도 대범하게 다시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한 것을 보면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정적들의 다급함과 절실함이 엿보인다.
잡힌 자격을 추궁한 결과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홍계희의 아들 홍술해와 홍상범 부자가 배후로 밝혀졌다 .
홍술해는 황해도 관찰사 시절 백성의 재산과 곡식을 착취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정조의 감형으로 흑산도로 위배되었다.
몸은 흑산도에 있었지만 종을 시켜 한양으로 지시사항을 전달한 것이다.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정조 즉위 후 국왕을 제거하려는 암살 시도가 7차례나 이어졌다 .
그러나 하늘은 정조를 지켰다 .
노론의 나라에서 정조는 자신을 보호해줄 근위 세력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개혁을 위한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할 군사를 키워내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한다.
정조는 1785년 장용위라는 국왕 호위부대를 창설했다. 이후 꾸준히 그 규모를 확대시켜 정조 17년 1793년에는 하나의 군용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다.
처음에는 30명으로 시작된 장용영이 화성 행차 때에는 18,000 명으로 강화되어 그 위용을 자랑했고 화성에서의 대규모 군사훈련에도 훈련을 주도하기도 했다.
화성은 정종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방어 기지로서의 역할을 위해 건설된 신도시였다.
1794년 화성 건설은 10년 계획으로 시작됐지만 2년 9개월 만인 1796년에 완성되었다. 공사 기간을 대거 단축시키면서 약 4만 냥의 재정을 절감했다.
화성 건설을 준비하면서 정약용은 조선에 맞는 거중기를 개발했고 이는 무거운 벽돌을 쌓는 데 효과적으로 유용됐다. 또한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게 급료를 지불하면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
그는 국가 노역의 급료를 지불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루 임금 2전 5푼 곱하기 20일은 쌀 한 섬 144kg으로 구매가 가능했다.
덕분에 예상보다 인력과 비용을 대폭 줄이면서 화성 축성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1회
정조는 노론이라고 하는 썩고 낡은 일당 독재를 깨부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국가 운영이 어렵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고 싶었다 .
그래서 자신의 개혁 정치에 동조하고 함께 할 파트너가 필요했다. 정조가 남인들을 주목하게 된 이유다 .
이때부터 당쟁은 노론에서 시파와 벽파로 갈리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까지 정권을 주도했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고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시파時派는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는 남인과 소론 계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마침내 정조는 긴 시간 준비하고 고민했던 인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한다.
정조 12년 1788년 .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에게 제소한 것이다. 80년 만에 남인 정승의 탄생은 그동안 억눌렸던 남인 계열에는 실로 엄청난 전환점이 된 것이다.
하지만 노론은 채제공의 정승 임명을 목숨 걸고 반대했다. 왕의 정교를 받아야 할 승지들과 이조판서가 왕명을 거부하는 강수를 뒀지만
정조는 이들을 모두 파직시키고 채제공 임명을 강의했다.
이후 남인들의 출사가 이어졌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러다 정조 16년 이인좌의 난 이후 65년 동안이나 등용되지 못했던 영남의 남인들을 복권시키는 별시를 치르면서 남인들의 등용이 본격화되고 그 세를 이뤄 나갔다.
정조는 의도대로 남인의 세력을 꾸준히 키우다가 제19년 채제공을 좌의정에 이가환를 공조판에, 정약용을 우부승지로 임명하며 자신은 자신과 함께 계획을 이끌어갈 남인들을 요직에 앉 구상을 현실화시킨 것이다.
조선 최초의 민주주의 시작 정조가 했다.
정조의 24년은 숨 가쁜 개혁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나라를 그린 정조는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인재 등용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세종과 흡사한 인재 등용 철학으로 조선의 Top 2 국왕들 모두 제도나 규율에 얽매이보다 실력만 있다면 파격적인 틀 깨기로 인재를 등용했다.
이는 국익을 우선시하는 생각에서 출발해 효율을 중시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혁신 정치였다. 정조는 주변국 어디에도 없는 악법 조선에만 있었던 서얼庶孼차별법이 아까운 인재들을 방치하는 국력 손실이라고 생각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2회
조선의 수많은 서얼 출신들의 인재들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양반 적자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사장 시켜야 했기 때문에 불행했다.
수백 년간 이어온 이 비정한 법은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사회적 제도적 차별이다.
정조는 국가와 서얼 인재 모두에게 손해인 이 제도를 용기 내어 개혁한다.
정조 1년 1777년 .
왕은 ’서류소통절목‘을 반포하고 서얼의 관직 진출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을 통해 서얼들을 인재로 등용시켰다.
” 양전兩銓(이조와 병조)에 명하여 서류庶類들을 소통시킬 방도를 강구하여 절목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
<정조실록 정조 1년 3월 21일>
200년 전 정조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명확한 철학이 있었다. 신분 사회의 조선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라온 왕족이 인간 존중이라는 사고를 갖는다는 게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어릴 적부터 노론의 핍박 속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그 마음의 경계와 시기가 자리 잡고 한을 품고 산 세월 속에 복수심이 들어차 있을 텐데 정조는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를 통털어 정조는 가장 존경 받을 만하고 가히 위대한 왕이 아날까
또한 정조는 백성의 통치자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그들의 삶과 형편을 바라보았다. 1,000회 이상의 격쟁을 통해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듣고자 했던 정조는 왕이 아니라 백성의 아버지로서 그들의 고통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백성이 소리에 귀를 기울인 왕은 결코 그렇게 없었다.
정조의 인간 존엄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정책이 정조 2년 1778년에 추진된다. 바로 노비 제도의 폐지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귀한 존재가 있고 천한 존재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고로 노비는 혁파되어야 한다.“
<정조>
정조는 노비제도 혁파를 위해 실시한 정책들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노비라는 명칭을 ’보인保人 (보인 돕는 사람)으로 바꾸어 노비 본인을 제외한 노비 자신과 아버지는 즉시 해방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노비와 주인이 아닌 서로 계약 관계를 변경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당연히 노비를 재산으로 여겼던 양반들을 반발했다.
이에 정조는 노비 해방에 필요한 비용을 국가와 고용주가 반반씩 부담하는 내용을 놓았다.
그러면서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인 농업계획을 추진하는데 국가 소유의 토지를 조성하고자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맡겨 생산된 비용을 노비 해방 비용으로 사용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 구상들이 모두 실현되기 전에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재임 중에 노비 해방을 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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