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3회
그래도 ‘추노’라는 유명한 드라마를 통해 노비가 도망가면 쫓아잡는 추쇄관 제도를 이 때 페지하면서 노비를 향한 잔인한 제도 하나를 사라지게 됐다.
”사람은 구업으로 한 때의 쾌락을 얻으려 해서는 아니 되느니 나는 천한 마부에게라도 일찍이 이 놈 저 넘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홍재전저>
당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운송 수단은 말(馬)이다. 보통 말 위에 오를 때 양반들은 종의 등을 밟고 올라타고 장군은 병사의 등을 밟고 올라탄다.
당연히 왕도 내시의 등을 밟고 올라가고 내려온다
하지만 인간 존엄과 가치를 깨달은 정조는 사람이 사람의 등을 밟고 오라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조는 하마석을 제작해서 이를 이용했을 정도다
또한 정조는 다른 임금들과 다르게 가마를 이용하지 않았는데 가마를 타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가마꾼들이 겪는 수고와 고통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재임시절 여러 차례 왕실의 재산인 내탕금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북도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가서 먹이도록 하시고 공상供上에 관계된 모든 물건들을 모두 감면 하시고 내탕금을 내어 따로 곡식을 무역해서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셨으며 백성들의 주림과 배부름과 곤궁함과 편안함을 자신이 그런 것처럼 여기셨으니 여기신 뜻이 미치는 곳에 누가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 정조실록 정조 12년 10월 19일>
또한 화성 건설을 추진할 때 내탕금으로 부근 백성들의 땅값과 이주비를 넉넉하게 쳐주고 화성 건설 부역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급료를 지불했다.
그러면서 화성 건설에 참여한 기술자와 인부들의 이름을 화성 성역의 궤에 넣고 성벽에 새겨내어 자부심을 갖게 했다.
정조는 200년 전 평등을 외친 계혁의 군주다.
18세기는 18세기에는 전 세계적인 변화가 인권 자유 평등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처음 얘기했던 시대로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이런 변화나 민중의 의식 성장으로 시작된 변화였기에 걷잡을 수 없는 힘과 전파력이 있었다.
반면, 조선의 민주주의는 기반이 되는 민중에서의 시작된 버텀업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가장 상층 부위에 있는 국왕 정조가 추진한 탑다운 방식이 변화였다.
그러다 보니 기득권의 강한 반발에 방해가 맞서 이들을 돌파하는 에너지원이 부족했다.
국왕일지라도 한 사람의 개혁 의지로는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쉽지 않은 변화의 추진이었다.
세종과 함께 국민에게 사랑받는 정조와 인기 비결은 백성을 위한 개혁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상처를 가진 사람으로 좌절을 겪고 아쉬움을 남긴 생애 때문이 아니었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4회
정조가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존경받는 군주인 이유는 인간미 때문인 것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들은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
만약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의 개혁 성공이 안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정조와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던 좌의정 심환지가( 1730년 1802년) 친척 의원인 심인을 왕의 주치의를 추천하면서 심인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으로 남인들이 주장하면서 남인들의 근거지인 영남 지역에서 독살설이 많이 퍼졌다.
하지만 화병과 스트레스가 복합된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현재 들어서며 주류 의견이 되고 있다. 정조의 청년 청소년기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고통이다.
죽는 아버지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열한 살의 소년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또한 세순 시절 노론의 살해 위협 앞에 잠도 못 자며 가슴 조아리는 긴 시간을 견뎌야겠다. 어찌 보면 화병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정조는 이 화증火症이 원인이 되어 종기를 달고 살았고 결국 정조는 종기로 인한 후유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죽음에 이르렀다. 정조 스스로 이렇게 얘기했다.
”상上이 이르기를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 했다.“
< 정조실록 정조 24년 6월 14일>
한편 정조의 어찰첩이 발견되면서 독살설이 힘을 잃고 있다.
어찰첩의 대상은 놀랍게도 정적이라고 잘 알려진 노론의 영수 심한지였다.. 이를 통해 심환지가 정조의 정적 관계가 아닌 정치적 파트너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서 심환지에 의한 독살설 또한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한편 정조가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까지도 끊어 안으려고 했던 노력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정조가 상당한 전략가로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편지로 정조의 독살설를 완전히 배제하기에는 어렵다.
암살은 항상 측근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어찰첩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상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말미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5회
정조의 개혁 정책 하나하나가 시행될 때마다 노론의 입지는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규장각을 만들어 노론에 맞설 인재들을 양성하고 장룡령을 만들어 공권을 쥐고 있던 노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며 금난정권 (도심상권)폐지를 통해 실질적으로 노론이 정치자금을 끊는 계획이 되었다.
노론으로서는 정조의 개혁 정책이 초과될수록 자신들의 입주가 좁아져 결국 통치 행위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위기 의식이 고지되고 있었으나 노론에 의해 암살당하게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정황 증거다.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 1800년 6월 14일부터 28일까지 정조의 종기 치료 과정에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석연찮은 일들이 많았다.
고약으로 정조의 종기를 잘 치료해 내의원으로 발탁된 피재길이 이 기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지방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내의원 책임자인 도제조를 노론의 영수 심한지가 겸직하고 있었다.
심환지는 친척 의원인 심인을 왕의 주치의로 불러들여 탕약을 짓게 하는데 인삼이 주원료가 되는 경옥고를 만들어 정조에게 처방한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피료 과정에서 ‘동의보감’에 심취하여 많은 연구를 해서 책의 문제점을 보완한 의학서적 ‘수민묘전’을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 도통한 임금이다.
그런 정조 스스로가 자신은 몸에 열이 많아 인삼이 맞지 않으니 인삼을 뺀 탕약을 먹어 왔는데 심인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6월25일 정조의 병세가 호전되어 내의원들과 신하들이 기뻐하는 기록이 나온다.
”신하들이 앞으로 나가 살펴 본 뒤 서로 돌아보면 기뽀하며 아뢰기를 ‘피고름이 다 나왔으니 근이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사스럽고 다행하기 그지 없습니다.“
<정조실록 정조 24년 6월 25일>
그러하다보니 인삼문제는 별로....
정조의 쾌유를 기대할 만한 순간도 있었지만 며칠 뒤 6월 28일 정순왕후(정조 반대세력)가 탕약을 들고 처소인 창경궁 양춘헌을 찾는다.
방에 있던 승지.내의원 사관들이 모두 방에서 나 올 수 박에 없었다.
일곱 살 많은 할머니가 손자를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순왕후가 울면서 뛰어 나와 주상이 승하하셧다고 외친 것이다
놀란 승지와 신하들이 방으로 뛰어 갔을 때 정조 임금은 이미 숨을 거두기전 몇 마디를 남겼다.
” 상上이 무슨 분부가 있는 거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修政殿‘ 세글자 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거쳐하는 곳이다.
마침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므로 신하들이 큰 소리로 신들이 들어 왔다고 아뢰었으나 상上은 대답이 없었다.“
<정조실록 정조 24년 6월 28일>
수정전은 바로 정순왕후의 처소다.
정조기 죽기 직전에 왜 정순왕후를 의미하는 수정전을 애기 했을까?
정순왕후는 정조를 방문하기전 임금이 아직 살아있음에도 승지(비서)를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 한 인물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6회
”승지 한치웅을 체직하고 김조순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정조실록 정조24년6월 28일>
사도세자의 죽음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김한구의 여식으로 정조의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정순왕후,내의원 책임자인 심환지는 임금 정조가 죽고나서 귀향을 가는게 정상이지만 정순왕후는 심환지를 영의정에 앉힌다.
다시 노론의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신유박해(천주교 박해사건)로 남인들은 숙청을 당하며 정조의 개혁과 계획은 깡글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정조의 감작스런 죽음은 그가 24년간 추진하던 모든 개혁이 물 건너가 버림 뼈 아픈 결과를 가져왔다
정조의 병이 생기기 보름 전인 188년 5월, 규장각 경연에서 정조는 ’오회연고五晦筵敎(군주에 맞서는 자에 대한 경고메세지)‘를 선언했다.
7월부터 정약용등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겠다는, 노론에게 마치 선전포고 같은 사건이다.
정조의 개혁정책으로 불편해진 노론에게 정권까지 교체하겠다는 선언(친위 쿠테타?)이었으니 노론은 정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하는 정치를 도와줬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인데 내가 이처럼 분명히 일러준
이상 앞으로는 더 이상 여러 말을 하지 않겠다. 임금의 뜻에 부응하는 책임은 오로지 경들에게 있으니 우선 경들부터 사소한 혐의는 전부 쓸어버리고 각자 책임을 지고 속습俗習을 바로잡을 방책을 생각하도록 하라 “
<정조실록 정조 24년 5월 30일>
오회연교 이후 정조는 정약용 이가환 등 남인들에게 7월부터 국정 운영에 참여할 것을 알리고 준비를 명했다.
이렇게 조선 개혁의 순간이 결정을 향해 가던 순간 갑작스럽게 정조가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런 여러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정조의 사망이 그냥 병사病死였다고 하기에는 수긍하기에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세종이 15세기 조선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면 정조는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라 할 것이다.
정말 이쉬은 것은 조선의 전성기가 계속 이어가질 못했다는 것이다
영.정조시대는 군주의 뛰어난 자질로 국가 운영되었지만 이후 군주들은 그렇지 못했다
격무속에 담배와 술로 심신을 위로하며 개혁을 멈추지 않았던 외로운 왕
노론의 권신들에게 기울어진 나라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강한 집념을 보인 군주
어린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살해 협박을 당하면서 받은 충격의 휴유증으로 얻은 화병으로 인한 종기와 부스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세상을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고 말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7회
정조의 남자 3사람
채제공 홍국영 정약용
정조는 즉위 초 자신의 최측근인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금위대장을 겸직시킨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겸직하는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된 것이다.
여기에 정조 개혁의 정치의 산실인 규장각을 설립한 후 최초의 직제학 자리까지 맡기니 그야말로 홍국영의 시대라기도 무방하다.
정조가 홍국영에게 중임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권 초기 마땅히 믿고 맡길 만한 자신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홍국영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이 되었다. 과거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음에도 (병과 11위 전체 합격자 33명 중 21위에 해당한다.) 왕의 측근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당시 명분으로 인정받는 명문으로 인정하는 받는 풍산 홍씨 가문의 프레미엄이 영향이 또 있는 것 아닌가 한다.
홍국영은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초안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래서인지 영조에게 총애를 받았고 이후 동국시강원(세손 교육기관) 설서가 되면서 정조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세손 시절 정조가 노론에 핍박받을 때 옆을 지키며 정조를 보좌하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 정조의 오른팔 역할을 한 것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세손에게는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준 홍국영이었기에 그의 야망이 어떠하든 그를 신념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신임과 실권을 앞세운 홍국영이 정조의 정적인 홍인환과 정후겸 등을 숙청하고 정조의 외가인 홍봉환과 정순왕후의 동생 김기죽 일파도 무너뜨렸다.
홍국영의 이런 막강한 권세에 노론 벽파의 수장 김병수는 ’홍국영과 갈라서면 역적‘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홍국영의 위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홍국영의 야망이 정조의 개혁에 걸림돌이 되기 시작한다.
노론 집안 출신인 홍국영은 소론과 남인이 정조에게 접근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차단했다.
또한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 후궁으로 만들고 아들을 낳으면 차기 왕으로 만들겠다는 계산까지 한다.
결국 주인 없는 노론의 우두머리가 되어 조선을 지배하고픈 발톱을 서서히 드러낸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8회
현명한 정조의 눈에 이것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궁녀들을 희롱하고 재상들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은 도덕적 문제까지 불거지며 홍국영을 질책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커지자 정조는 결단을 내렸다’
정조 3년 (1799년)년,
결국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을 전격 경질한다. 물론 자진사퇴 형식으로 물러나게 하면서 봉조하( 퇴직 공직에게 내리는 특별관직)까지 하사하는 배려를 했다.
정약용
노론에 의해 아버지 시도세자가 죽었지만 복수 봏다는 탕평책을 펼치면서 소외된 지식인 남인드을 등용한정조. 그 덕에 남인의 후손 정약용을 얻을 수 있었다
1783년 2월,
세자 책봉을 기념해 치러진 생원 진사과 시험에서 전국의 수많은 유생들이 참가했다.
정조는 합격생들의 답안지를 보던 중에 보던 중 눈에 띄는 답안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합격자들을 위한 사은 잔치에서 그 답안의 주인공을 만난다 .
그가 바로 22세의 정약용이었다. 생원 진사 시에 합격한 이들은 하급관원이 될 수 있지만 대부분 성균관에 진학해 대과(문과)에 다시 응시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성균관에서 문과 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자주 들렸고 유생들과 토론을 하며 인재들을 격려했다.
한 번은 정조와 유생들에게 이기론理氣論에 대해 질문했다.
퇴계 이황의 이기론과 율곡 이이의 이기론 중에 어느 것이 옳냐고 보는가를 물었다.
이때 정약용은 율곡 이이의 이론이 맞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정조는 정약용의 유연한 사고와 소신 발언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남인이었던 정약용이 같은 남인 계열인 이황 이론이 아닌 서인 이이의 사상을 지지한다는 것은 당시 붕당의 정체성을 넘어선 쉽지 않은 대답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정조와 정약용은 첫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호감을 확인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9회
이후 25세 때의 정약용은 문과에 응시해 탁월한 답안을 제출하였지만 정조는 남인 계열의 정약용이 두각을 나타내며 정적들로부터 공격받을 것을 염려해 일부러 선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약용에게 ”네가 지은 것이 사실은 장원에 못지않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정조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서두르지 않고 정약용의 학문적 성장을 돕고 자신의 오른팔로 키워나간다.
이후 28세가 되었을 때의 문과에 급제한 정약용은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발탁돼 학문적 깊이를 더하게 했다.
1794년 10월,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9.11 대책을 시행한 정조는 지방의 수령들이 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감찰하기 위해 15명의 암행어사를 각 지역으로 동시에 파견한다.
이때 암행어사로 감찰을 수행한 정약용은 수령들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고발했다.
각종 수탈로 백성을 괴롭히고 괴롭게하고 비리를 저지른 사람 중에 왕실의 최측근도 있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병을 치료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어의 출신 강명길과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긴 지관 김양직 등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엄벌을 주장했다.
정조 또한 엄벌을 지시하며 개혁군주로서의 부패와 함께 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이때 백성들의 참상을 그린 다산의 시조가 남아있다.
”큰 아이 다섯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작은 애도 세 살에 군적에 올라 있어 두 아들 세공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어서 죽길 원할 판에 옷이 다 무엇이랴“
<다산 시문학 집 제2권>
정조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정약용이었지만 천주교가 심각한 정치 문제로 대두되면서 정약용에게 정적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0회
1799년 5월,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 천주교도라는 상소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처음 조선에 자리 잡을 때 서양의 선진 학문과 과학 기술로 받아들여 서학西學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주로 관직 진출이 어려웠던 남인들을 관심을 갖게 했다.
그러다 점차 학문적인 면에서 종교적인 면으로 경도되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도가 된 경우가 많았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랐던 노론들에게는 천주교 사건이 정약용과 남인들에게 제거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남인 중에는 천주교를 찬성하는 신서파와 반대되는 공소파로 나뉘니 남인들의 존립이 이태로운 상황이었다.
이 중 천주교 배척론자인 남인 홍낙원은
”천 명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왕의 최측근 정약용이었지만 같은 남인들의 공격까지 가세되는 상황에서 정약용은 정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정조 사망 후 천주교 탄압으로 정약용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이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와 각종 천주교 성물 등을 숨기려다 한성부 포교에게 적발되고 만 것이다.
이를 빌미로 정약용과 정약전까지 국문을 받게 되고 참수를 당한 정약종과 달리 두사람은 유배를 떠난다.
이후 정약용의 조카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남인들은 더욱 입주가 좁아지며 노론의 탄압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유학적 기반이 약한 전라도 지방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기에 이들을 보내 경고 메시지를 준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유배 생활에 좌절하지 않고 유배지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연구와 저술 활동에 힘써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
일본인 학자 왈
”정약용의 18년 유배는 개인에게는 불행이지만 조선에게는 실로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말 했을 정도였다.
그는 유배생활중 182책 503권을 저술하여 제자들 또한 양성한다.
18년으로 환산하면 1년에 10책씩 책을 집필한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저술한 책의 장르가 정치. 경제.역사.지리,음악.과학.국방 등 실로 다양하다는 점이다.
갛 만물 박사 천재라고 봐야 한다
정약용운 유배생활 중 후반 10년을 강진 다산초당에서 지냈는데 이곳 만덕사는 예로부터 차밭이 많아 차로 유명했다.
다산은 차 다 자를 써 정약용 후가 된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만들어낸 관계다.
스승과 제자 .왕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 동지로서 함께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1회
정조의 죽음은 개혁군주의 한 사람을 잃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정약용과 같은 유능한 인재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아마도 조선의 몰락과 19세기 역사적 아픔은 이때 예고된 것이 아닌가 싶다.
채제공은 35세인 1755년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사도세자의 스승이 되어 그에게 학문을 가르친다.
3년 후 도승지가 된 채제공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 끝에 세자를 폐위하라는 영조의 명령이 왕의 옷을 부여잡고 울면서 세자 폐위를 반대했다.
실로 목숨을 건 주청이었다.
그 덕에 영조는 세자 폐위를 철회시켰다.
이 사건으로 영조는 채제공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조는 훗날 정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 채제공은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여 너(정조)의 충신이다.”
남인이면서도 당파를 초월하려는 채제공의 노력과 행동이 탕평책을 시행다던 영조에게 매우 좋게 보였던 것이다.
채제공은 결정적으로 자신의 제자인 사도세자가 뒤지에 갇혀 죽임을 당할때는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애 내려가 있었기에 사도세자를 구하지는 못했다.
그는 52세안 1772년에 세손인 정조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하면서 이 때부터 정조와 같은 ᅟᅵᆫ연을 맺게 된다
채제공은 1776년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의 일과 세손 시절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했던 영의정 김상로 홍계희 등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금의금부사로 옥사를 체결했다.
1778년 연행사로 중국에 갈 때 이덕무. 박제가 등 신진 학자들을 함께 데려가 젊은 학자들이 견문을 쌓도록 기회를 열어주었다 .
또한 정조의 특명으로 공노비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편화했다.
1780년 홍국영의 세도 정치가 막을 내리고 실각 할 때 홍국영각의 친분 ,사도세자의 추승을 주장하는 무리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 등으로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거의 8년 동안이나 서울 근교 영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1788년 정조의 특명에 의해 채제공은 전격적으로 우의정에 발탁된다. 남인으로서는 80년만에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채제공은 긴 시간 은거하면서 구상했던 정국안정. 국력 회복 .경제력 향상 문화 육성 등에 대한 각종 정책들의 시행을 추진한다.
먼저 정국 안정을 위해
첫째, 황극 (편파가 없는 바른길)를 세울 것 .
둘째, 당론을 없앨 것
셋째, 늘 의리를 밝힐 것
넷째.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다섯째.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여섯째, 권력기강을 바로 잡을 것 등
모두 6조를 선언했다.
그리고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는데 이때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체제로 3년간 국정을 이끌었다 .
독상체제는 매우 드문 일인데다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한 명의 정승으로 국정을 이끌어 간 적은 없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2회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위해 불협화음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조의 결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791년 정조의 대표적인 경제개혁 ’신해통곡‘을 기획하고 주도한 이가 채제공이다.
1793년 수원 화성의 총책임자로 화성을 건설하는데 지휘하게 되고 영의정에 오르며 사도세자를 신원해야 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노론의 비판이 거세졌다 벼르고 있던 채제공은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을 가려보자며 노론에 정면대결을 시사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노론은 채제공의 강력한 대응에 놀라 채제공을 연일 탄핵했다.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정조는 노론의 영수인 좌의정 김종수와 영의정 채제공을 함께 화해시키며 돌파구를 찾는다.
정조는 2품 이상의 고급 관료들을 모아놓고 31년 전 영조가 작성한 금등문서(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영조의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죽은 사도세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영조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나는 글을 듣고 사도세자 죽음에 책임 있는 중신들은 침묵했다.
이 사단事端을 통해 노론은 화성 건설을 문제 삼지 않게 되었고 정조임금도 사도세자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일단락되었다.
영의정이 된 지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내려오며 채재공은 정조에게 화성이라는 선물을 남긴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장덕궁 후원을 거닌 유일한 왕이다.
하루는 규장각을 찾은 정조가 규장각에서 근무하는 30여 명의 신하들을 불러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으로 데리고 왔다 .
이곳은 왕을 비롯한 몇 명만 출입이 허용된 것으로 내원 또는 금훈으로 불렸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비원이다.
이곳에 신하들을 데리고 간 것은 정말 특별한 일로 조선 개국의 40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명의 신하도 출입한 적이 없는 왕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34명의 신하들을 놀라고 신기해하며 거니는데
정조는 전각의 유래를 설명하고 어느 계절에 어떤 꽃이 피며 아름다운지 등등을 신하들에게 설명해 준다.
이런 임금이 또 있었겠는가 신하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건국 이래 최초로 옥류천에 들어가 너무 영광스러워 역사적인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표암. 강세황>
*김홍도 스승. 정조의 초상화 그려준 문신. 화가
애주가이며 애연가였던 정조는 신하들과 놀 줄도 알았다.
창덕궁 연못인 부용지에서 낚시를 함께하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장약용에게 벌주를 내린다
정조는 붓통을 꺼내 50도짜리 청주를 가득 채워 원샷을 시키는데 그렇게 세 잔을 마신 정약용은이 남긴 글을 보면 신하들이 술에 취해 방향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엎드려 개처럼 울부짖은 신하도 있었다고 기록한다.
왕으로서 신하들을 대할 때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개혁을 함께하는 동반자로 그들을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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