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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42)/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3회

 

正祖 어찰첩(御札牒)(보물제 1923호)

 

正祖 어찰첩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로 좌의정을 역임했던 심환지에게

 

1796년 8월부터 정조가 사망하기 직전인 1800년 6월에 이르기까지 약 4년간 보낸 300여통의 비밀 서찰들로, 2009년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6년 11월 16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正朝 어찰첩은 사신私信이면서 밀서密書였다.

 

발신자는 국왕 정조이고 수신자는 정조 치세의 중심인물인 심한지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원래 정조가 심환지에게 공식적으로 보냈던 편지들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정조어필(正祖御筆) 2첩&정조신한(正祖宸翰) 셋트가 그것으로 정조어필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36통이,

 

정조신한에는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정조가 보낸 편지 30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9년에 공개된 300통의 편지들은 정조와 심환지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 편지들로 정조는

 

자신의 편지가 사전에 발각되지 않도록 읽고 나서 바로 찢어버릴 것을 강조하고 당부하고 있다.

 

정조는 비밀 편지에서

 

"내가 사류(士流)의 두목이니, 지금 사류의 전형을 구한다면 형편상 경을 먼저 꼽을 것이다. 경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나의 마음은, 서야(徐也)에게보다 열 배가 넘는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정조가 자신을 사류의 두목으로, 심환지는 사류의 전형으로서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는 감독이 되고,

 

심환지를 주연 배우로 삼아 정국을 끌고 가겠다는 단적인 표현으로,

이로 인해 심환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두렵지만 자신이 그를 늘 잊지 못하고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크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감독인 자신이 의도한 대로 심환지가 움직이도록 그에게 여러 주의해야 할 행동을 각별히 부탁하면서

 

심환지가 중진(重鎭)으로서 ‘준엄한 기상’으로 위엄을 보이며,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 정조 자신의 대소사나 몸의 아픔 등을 여과없이 호소하는 내용 또는 심환지의 잘못된 행동을 통렬히 꼬집으며 꾸짖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편지가 공개되자 학계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충격을 받았다.

그 의미는 긍적인 측면에서 일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4회

 

이전까지 잘 알려졌던 정조와 심환지의 관계 및 각각의 이미지와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심환지는

평면적인 형태의 정적(政敵)이 아니라 협력과 대립을 오가는 복잡한 위치에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그러한 심환지와 협력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정조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의지 강한 개혁 군주겸 학자 군주로만 알려졌던 정조가,

 

실제로는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까지 구사하는 독설가이자 다혈질인 성격을 가졌다는게 나타나고 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1797년 1월17일에는 하루에 4통을 보냈고, 1799년 9월20일에는 아침에만 3통을 보낸다.

 

임금이 이렇게 조급하게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 까?

 

특별히 중한 일은 없어 보이는 데 아마도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해 8월10일 예조판서 심환지에게

 

"금강산 1만2000봉을 유람하는 일이 매우 통쾌한 일인데, 공명을 누린 사람이 산수의 즐거움까지 누린다니 어떨지 모르겠다"고 썼다.

 

다음 날에는

"1~2일 안에 휴가서류를 올리고 길을 떠나라"고 하면서 정승으로 발탁하겠다는 언질을 미리 준다.

 

정조는 8월28일 심환지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조정에 올라오기를 독촉하는 글을 금강산에 보냈다.

 

이렇게 정조는 비밀편지를 통해 심환지가 사직소를 올릴 시기와 문안(文案)까지 상의한 끝에 10월28일 심환지를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런 내용을 알 길 없는 정조 측근 서용보는 심환지가 느닷없이 여행을 떠나자 뒷말이 생길 것을 걱정했다. 정조의 막후 정치에 측근조차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짜고치는 여당과 야당?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1800년 6월15일)고 하여 특급비밀인 왕의 건강을 나눌 사이로 독살설은 근거가 없다는 증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내용을 통해 노론 음모론 및 정조 독살설이 완벽하게 격파(?)된다.

 

정조가 자신의 병환과 증세, 처방법을 편지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고,

이를 심환지에게 직접 언급함으로서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이 정조에게 독살을 시도할 리 없다는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찰첩이 독살설을 뒤집는 논거가 될 수 없다는 학자도 여전히 많다

 

 

정조는 흔히 개혁군주 혹은 호학군주라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그의 치세에서 실학이 발흉했기 때문에 실학군주로 인식되기도 했고

 

친부 사도세자가 조부 영조에 의해 살해당한 사실로 인해서 입지가 곤혹스러웠고 위태로웠는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서 대단한 지적을 이룬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5회

 

큰 정치는 적도 품을 줄 알아야 할까~

 

동아시아 제왕학에서 군주는 자고로 말이 적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조는 정반대였다. 말이 많은 다변(多辯)의 군주로 보인다.

 

이는 격정적이고 화를 참지 못 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밀 편지에서 보이는 신하들에 대한 가감 없는 평가가 그런 성격을 증언한다고 보겠다.

 

지도자는 온화하고 덕이 많고 화를 안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개인적 인격보다는 큰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예컨대 정조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徐龍輔·1757~1824)에 대해서는

"호로자식"(胡種子)이라 하는가 하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金邁淳)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자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고 혹평했다.

 

나아가 황인기(黃仁紀)와 김이수(金履秀)라는 신하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정조는 반대 세력인 심환지와 은밀한 방법으로 서찰을 교환하며 당대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했으며, 특히 심환지를 통해 노론 벽파계 인물들을 통제하려 했고,

 

주요인사 문제를 협의하고 국정운영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또 심환지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린 것으로 나온다.

 

한데 이번 비밀 어찰을 통해 이 또한 정조와 심환지가 미리 각본을 짜고 벌인 일종의 '정치 쇼'였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1798년 9월18일,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심환지에게 첫 번째 사직상소를 언제 낼 것인지를 물었으며, 그에 대한 답변과 사직상소 문안이 도착하자

 

"사흘 후(9월24일)에 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고 직접 사직상소 문안까지 서로 입을 맞추고 손 본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여 왕명을 거역하고 관을 벗고 나가라고 하고 삭탈관직을 하고 이후 다시 부를 것도 귀뜸 해준다.

 

왕과 영의정의 이런 냉기류에 대관들은 아연질색했고 고모의 회갑연은 큰 말없이 지나가는 데 고도의 정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6회

 

이 편지들 중에는 심지어 "내일 어전 회의에서 이런 사안을 논의할 터이니, 심환지 당신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 놓으면 내가 승인하겠다"고 미리 입을 맞추는 내용도 있다.

 

공개된 비밀 편지를 보면 정조와 심환지가 긴밀한 협력 관계로 보아 심환지가 정적이라기보다는 심복이었음을 입증한다.

 

이 어찰첩은 인사에 관한 사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사 문제는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정국 운영을 위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서 인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막후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안을 조정하고 자신의 안을 관철시키려 노력하였다.

 

한 대목을 보자

 

“이조참의(김조순) 정사政事는 그래도 너무 치우쳤다고 하겠다. 볼품없는 말석조차 소론과 남인을 의망하는 것은 거론하지 않았으니 말이 되겠는가?

鄭을 서반西班으로 보내지 않는 것은 선善을 권장하는 뜻이 전혀 아니다.

한두 가지 일 때문에 반세半世의 원한과 유감이 날로 심해지니 이러한 것들을 어찌 유념하지 않는가?

참판(홍명조)이 들어올 것이니 이번 정사에서 서반으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참의의 사직상소는 반드시 베껴서 보는 것이 어떠한가?

참으로 볼만할 것이다.

이만 줄인다

1797년 6월 27일 ”

 

정조는 이조참의였던 김조순의 인사처리 방식을 문제 삼았다.

 

정조는 남인과 소론을 의망하지 않는 처사는 반세의 오난과 유감을 심화시키는 것이라 지적 지적하고 김조순의 처리를 비판하고 있다.

 

위에서 정은 바로 정약용을 말한다. 이 무렵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는 비방을 받아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는데,

 

김조순이 정약용을 서반의 인사에서 배제한 것은 정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으므로 이를 비판한 것이다.

 

정조는 소론과 남인을 인사에서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구상하는 탕평인사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판단하였다.

 

기본적으로 정조는 모든 정파를 아우르고 각 정파의 의견을 조성하는 인사를 염두에 두었다

 

때문에 자신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인사를 처리한 김 조선의 행동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원하는 인사를 위해

1797년 10월 30일 심환지에게 이조판서를 제수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7회

 

심환지가 이조판서를 맡자 정조는 편지를 보내 충청도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자리를 안배할 것을 지시하고 영남의 고을에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남명 조식의 후손을 수령으로 쓰도록 지시하며 초사의 경우 시파와 벽파를 골고루 섞어 의망할 것을 지시하는 등 자신의 구상을 심환지를 통해 현실화시켰다.

 

“ 시사試事로 바빠서 보내온 초본에 대해 이제야 의견을 적어 보낸다. 초사인初仕人(첫 벼슬)과 그 관직은 각별히 유의하는 것이 어떠한가 ?

이번 정사는 오직 두루 인재를 등용하고 탕평을 하여 내 뜻을 알리는 단서로 삼는 것이 좋겠다.

이기헌에 관한 일은 내가 가부를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김기서로 하고자 한다면, 헌(이기헌)을 부망副望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니면 수망首望으로 삼고자 하는가?

편한 대로 해라”

[1797년 12월 19일 밤]

 

위와 같이

정조는 인사를 시행하기 전에 미리 반대파 우두머리 심환지에게 도목정사都目政事(공적조서.승진목록)의 초본을 요구하고 심환지는 초본을 보냄으로써 막후에서 서로 의견을 조정하였다.

 

정조는 심환지가 이조판서에게 임용된 후 인사에 만족해 한 것을 보면 막후에서의 지시와 조정이 현실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정조는 항상 인사 문제와 관련하여 여론의 동향과 각 정파의 시선을 시선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의 관심에 심환지는 적극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심한지는 정조의 뜻을 헤아려 처리할 줄 아는 노련한 충신 종신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사실이다.

정조의 시책에 결코 반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인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노론벽파(심환지). 노론시파(정조임금),남인(정약용).소론 등의 적절한 안배였다. 인사의 탕평이었다.

 

당시의 여론이었다(백성이 아닌 사대부들 의견)

 

정조임금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사문제가 정리 되자 심환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8회

 

“도목정사(근무성적평가+인사이동)가 잘되었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다. 퇴근한 뒤로 잘 있었는가?

인사여론을 대강 들어 보니 시파時派와 소론은 그다지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고 간혹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무관들 조차도 놀랍다고 하며 입을 모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 매우 다행이다.

남인南人들은 초사(初仕.첫 벼슬)을 얻지 못한 것을 자못 불만스러워한다는데 차후에 김성일의 자손을 거두어 써서 크나큰 비난을 막는 것이 어떠한가?

감역監役(감리 업무)을 소론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또 무슨 욕을 먹겠는가?

껄껄걸.. 이만 줄인다

<1797년 12월 21일 저녁>

 

정조임금은

국정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자신의 반대파인 벽파계의 다양한 인물과 접촉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찰첩’울 보면

벽파계의 지도자 김종수가 사망하자 심환지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벽파계 인사들의 진퇴를 조정하며 자신의 정치적 구상에 따르는 인물을 인사에 반영하기를 원하였다.

 

그럼에도 정조임금이 인사에서 가장 중요시 한 것은 벽파.시파.남인과 소론의 안배였다.

 

정조임금은 각 정파간에 그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인식고 이 바탕위에서 심환지의 협조를 얻어 정국을 자신의 구상에 맞춰 운영 하고자 화였다.

 

정조임금은 국왕인 자신을 중신ㅁ으로 각 정파가 정국운영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원하였고 이것이 ‘인사의 탕평’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상소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인사 문제 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편지를 보내 막후에서 여론을 조정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정조는 정국 운영을 유리하도록 공론화시키는 데도 주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심환지의 입과 글을 활용하였다. 심환지에게 상소의 내용까지 지시하고 심환지가 상소할 발언의 수위의 내용까지 서로 조절하였다.

 

이러한 장면은 ‘어찰첩’ 곳곳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하나의 사례를 보자

”윤함이라는 자가 또 상소를 올리려 한다는데 어찌 이렇게 함부로 올리는 일이 있단 말인가 요동遼東의 돼지와 비슷하다.

만류할 수 있다면 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이노춘이 상소한다는 소문도 정말인가?

그에게는 굳이 잘못된 짓을 본받지 못하도록 하라 이만 줄인다

<1799년 2월 13일 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9회

 

 

정조는 윤암이 상소를 올려 이명연의 상소를 반박 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심환지에게 이를 제지시키도록 지시한 내용이다.

 

이는 이명연이 정조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경우 지나치게 엄격하고 급하게 처분을 내린다고 정조를 비판한 상소에 대해 윤암이 반박상소를 올리려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윤암의 상소 이전에 이미 신료들은 정조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이명연의 상소에 격분하고 역무에 연루된 자들을 몰래 편 들었다며 이 명연을 극력 비난한 바 있다.

 

 

이 상소를 둘러싼 정국은 정조가 이 명연을 비호함으로써 일단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윤암이 다시 상소를 올려 문제를 비화시키려 하자 정조가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심환지를 통해 중지시켜 논란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어찰첩’ 속 여러 군데서 발견이 된다.

정조는 시급한 현안이나 민감한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론 벽파의 대표 심환지를 비롯해 신임하는 신하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뜻을 심한지에게 사전에 전달하고 의견을 조율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조 실록과 같은 공식적인 사례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어찰첩’을 통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정조의 정국 운영 방식 중의 하나였다.

 

구체적으로 정리곡整理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정리곡은 1795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화성행궁에서 행차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이름으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 구휼한 것이다.

 

당시 정조는 이 정리곡과 관련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정치적 현안으로 떠오르자 심환지에게 어찰을 보내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을 지시하였다.

 

“요사이 듣자하니 각 도에서 정리곡이라면서 2~3잔씩 돈을 주고는 7말의 쌀을 거두어 들이거나 또는 몇 전의 돈을 주면서 가을에 두세 냥의 돈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욱 심하여 지금 민간에서는 모두 떠들썩하게 ‘조정의 사재私財’라고들 말한다고 한다.

시행 초기에 돈을 주고 곡식으로 환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곡식으로 환산한 뒤에도 이렇게 돈으로 돌려받은 것은 어째서인가 정리곡은 피곡皮穀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0회

 

봄에 한 알를 나누어주고 가을에 만 알이 익도록 하겠다는 지극하고 성대한 뜻은 미물도 감동할 만하다.

 

그런데 어떤 놈의 관리가 이처럼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짓을 하는가?

 

자애로운 은혜를 널리 퍼지기 위해 마련한 본뜻이 도리어 원망을 부르는 단서가 되었으니 여기에 미치면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97년 10월5일>

 

“내일 차대(次對.임금에게 정기적으로 아뢰는 일)를 할 것이니 정리곡에 관한 일은 곧 바로 경이 연석에서 아뢰는 것이 어떠한 가?...........”

<1797년 10월6일 밤>

 

정조실록(1797년 10월7일)을 보면

심환지가 정리곡의 폐단을 먼저 발언하고 정조가 이를 받아들이며 표피 1장을 상으로 내란 기록이 나온다.

 

공식기록만 보면 심환지가 먼저 문제를 제기항 듯 보이지만

‘어찰첩’과 함쎄 보면 정조는 이미 정리곡의 폐단을 알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환지에게 협조를 명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심환지에게 상을 내리고 국정 현안을 해결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는 반대파 우두머리 심환지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막후에서 자신의 의중을 보여주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심환지가 움직여 주기를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는 재임당시 가장 민감한 정치적 사안인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인었는데 정조는 이 역시 이런 방법으로 풀어나갔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벽파의 우두머리 심환지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정조의 어찰에는 남인의 핵심 인물인 채재공(蔡濟恭 1720-1799)에 대한 평가도 나온다

일찍이 영조임금은 정조에게

 

“ 나와 너로 하여금 부자의 은혜를 온전히 할 수 있게 사람은 채재공이다. 나에가는 순신純臣이요. 너에게는 충신이니 너는 이것을 알라”고 할 정도로 채재공을 높이 평가하였거니와 정조와 채재공의 관계 또한 특별하였다.

 

채재공은 1788년 종조의 특지로 우의정에 임명된 뒤로부터 정치적 활약상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정조는 이례적으로 어찰을 적어 채재공을 정승으로 임명할 정도로 그에게 누구보다 각별한 신임을 보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1회

 

채재공이 1790년 좌의정에 임명되어 3년동안 독상(獨相: 삼정승중 1명만 임명,업무를 겸무함)으로 있었던 것만봐도 정조의 신임 정도를 알만하다.

 

이후 그는 좌의정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정조는 채재공에게도 어찰을 보내 정치 현안을 막후에서 논의한것으로도 밝혀 졌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서도 이런 정황을 알 수 있는대목이 나온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어찰을 보내 채재공을 보호하거나 다른 계파에서 채제공을 공격하면 나서서 이를 해결하라고 주문 할 정도로 채재공에 대한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1797년 10월 18일의 어찰은 그런 내용이었다.

 

지평 조수민이 좌의정 채재공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세도世道가 무너지는 시기에 재상은 다른의견을 조화시키고 충돌을 진정시켜야 하거늘 채재공의 차자箚子(위에서 내리는 공문)를 보면 문ㅇ제점을 건드리지 못하고 실언이 많다”는 비판이었다.

 

조수민의 상소가 올라오자 정조는 조수민ㅊ의 상소배후를 조사 해 보라는 심환지에게 지시를 했다,

<1797.10월18일>

 

이어서 정조는 채재공에 대핸 공격이 계속 되자 심환지에게 어찰을 보내 “저들이 바야흐로 유순환 자세로 있는데 떼지어 일어나 이렇게 말하며 공격하니 항복을 애걸하는 사람에게 어찌 무례하다고 책망 할 수 있겠는가?”

<1797년 10월 22일>

 

이렇게 어찰을 보내 그를 적극 보호하기도 했다.

채재공이 사망하자 정조는

“채상이 세상을 떠났으니 허무한 사람이라 할만하다”(1799년 1월18일)라는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심환지에게

“채상 집에는 조문하러 가지 않으면 안된다.살아 있을 적에 한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는데 죽은뒤에 조문 한번 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정이 아니다. 더구나 조정의 체모로 보아서도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1799년 10월14일>

이런점은 벽파계와 남인계의 소통을 바랜 정조의 마음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간밤에 잘 지냈는가? 나는 밤에 더워서 잠시도눈을 붙이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마자 빗질을 하고 세수한 뒤 지금까지 수응酬應하고 있느니 얼마나 피곤한지 알 것이다. 껄껄 웃을 일이다” * 어찰첩의 ‘껄껄’은 한글표시

<1797년 7월8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2회

 

 

“여전히 비가 내릭 것 같으니 두루 적셔 주기를 기대한다. 며칠 밤 사이 계속 잘 지냈는가?

나는 베를 씌운 것처럼 눈이 어둡고 안화(眼花)가 생기는 바람에 책을 보는 일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대개 주서朱書(붉은 글씨책)는 100권에 가까운데 밤낮으로 비점批點(잘돤명문에 표시)과 권점(圈點.벼슬아치 선발시 찍는 점)을 찍는 데다 가뭄 걱정까지 겹치고 또 재계(齋戒.몸과 마음을 께끗이 하는 일) 하는 중에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매마른 소치이니 답답한 일이다 ”

<1798년 5월 26일>

 

정조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고 독서에 매달렸다.

정조는 어찰에서 자신의 바쁜 일상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너무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으니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 1799년 12월 26일>

라고 토로하고 있을 정도였다. 어찰에서 정조는 바쁜 일과 때문에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는 처지을 자주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항상 정무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나았고 앞으로도 좀 나아질 것이다. 그러니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가니 그 괴로움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1799년 1월 20일>

리고 하여 과로로 찌든 자신의 모습을 토로했고

 

”편지는 잘 받았다. 사흘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일하느라 피곤하지만 몸져 눕는 것만은 면하였다.“

<1799년 10월19일>

 

그하고 하여 거의 사경에 이른 자신의 건강을 호소하기도 했다.

 

정조는 거의 매일 일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정무에 매달렸다.

 

”나는 일이 바빠 잠깐 틈도 내기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午時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으니 피로하고 노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될 뿐이다.

라고 했다

<1798년 10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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