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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창군고난사(6)/받은 글

https://blog.naver.com/pjjyym/224157153194

《創軍의 苦難史 제51회》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정부 전복과 창군을 방해하다 🐕 죽음을 당한 빨갱이들의 말로 ☆

7. 한라산에도 평화가 오고ᆢᆢ

초대 제주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48년 8월 12일 월북한 뒤 2대 유격대 사령관직을 부사령관 이덕구가 이어받았습니다.

이덕구는 제주도 조천면 사람으로 일본의 입명관 대학 재학중 학병으로 징집된후 간부교육을 받고 관동군 소위로 복무 중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와 조천면 민정 책임자와 조천중학교 체육교사를 하다 47년 3.1시위에 주동세력으로 참가하여 사건을 일으킨 후 입산하여 김달삼과 함께 인민유격대를 이끌었습니다.

김달삼이 자취를 감춘 얼마동안은 잠잠하였으나 이덕구가 사령관이 되면서 48년 9월 15일 중문면 대동청년단장 문두천을 칼로 난자하여 학살한 사건을 계기로 악랄한 폭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9연대장 송요찬이 겸직토록 하였습니다.

폭도들은 10월 23일 한라산 50여개 봉우리에 봉화를 올리고 24일에는 이덕구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송요찬 경비사령관은 인민유격대를 완전하게 진압하기 위해 폭도들과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분리하는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는데 9연대와 제주경찰대 내부 푸락치들이 인민유격대에 누설시키므로써 번번히 작전에 실패하였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경비사령부에서 조사를 한 결과 푸락치 장교 6명과 사병 80명을 범인으로 체포하였으며, 제주경찰 푸락치 11명과 도청, 법원, 해운국 등에서 암약하는 푸락치 75명을 비롯하여 제주 일원의 좌익 선동자 1,000여명을 검거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부에서는 제주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11월 17일 제주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과감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덕구는 국군토벌대의 강력한 토벌작전이 진행되자 세 불리함을 느끼고 49년 6월 7일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하려고 해안가로 내려 오다 경찰대의 매복에 걸려 사살되었습니다.

이덕구의 시체는 제주도 관덕정 앞에 전시하여 지나가는 주민들로 하여금 돌을 던지게 하였으며 폭도들의 만행을 낱낱이 공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덕구가 사살되었는데도 3대 사령관으로 김의봉이 추대되어 투쟁을 하다 토벌군에 의해 사살되고 51년 3월에 허영삼이 3대 사령관에 추대되었습니다.

허영삼도 사살되자 4대 사령관에 김성규가 추대되어 끈질기게 투쟁을 하였으나 토벌대에 쫓겨 폭도들은 분산되어 2~3명 단위로 연명하다 57년 4월 2일 오원근이 마지막으로 생포됨으로써 제주 반란 사건은 평정이 되고 한라산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48년 4월 3일 촉발된 제주 4.3사건은 만 9년만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50회에서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를 못했는데 보충하겠습니다.

지리산의 빨치산은 산청 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1963년 11월 12일 새벽에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내려오다 내원사 계곡에서 이홍이(남)가 사살되고 정순덕(여)이 생포됨으로써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정순덕의 경우는 1950년 11월에 입산하여 만 13년을 산짐승 처럼 살았으니, 그녀의 손발은 곰 발바닥이나 한가지였다고 합니다.

《創軍의 苦難史 마지막회》

☆結 言

창군의 고난사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우리 軍은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6년 1월 15일 제1연대를 필두로 6.25 전쟁 이전까지 8개 사단 22개 연대를 창설하였습니다.

창군멤버들은 지식이나 경험은 일천했으나 오로지 해방된 조국을 지킬 군대를 창설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2,30대의 젊은 혈기로 까칠한 미군들의 간섭과 경찰 예비대라는 모멸감도 참아가며 군내부에 침투한 좌익세력의 난동을 진압해 가며 가두모병으로 부대를 창설하였습니다.

창군멤버들이 그런 고통을 참고 견딘 것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장차 독립된 조국의 국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투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창군과정에 제주도 폭동진압군 연대장 박진경 대령과 지리산 공비토벌군의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을 비롯한 많은 장병들을 잃는 뼈저린 아픔도 참아야 했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군내부(軍內部)에 기생하는 좌익을 척결하기 위해 숙군(肅軍)을 단행하여 전군의 1/10에 해당하는 1만여명의 장병을 처벌해야 했던 살을 찢는 고통도 참고 견뎠습니다.

군이 창설되자마자 태백산과 지리산 및 한라산에 준동하는 무장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어야 했던 軍은 쉴틈도 없이 급박한 상황에서 북괴의 남침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역사가 일천한 군대였지만, 숙군(肅軍)으로 군(軍)을 정화해야 한다는 선각자들이 있어 군과 사회 곳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북괴의 남침과 동시에 봉기를 일으키려 했던 좌익세력을 6.25 직전에 척결함으로써 김일성이 기대했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미군이 증원될 때까지 한강선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창군초기의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오늘과 같은 현대화된 군대의 주춧돌을 놓아준 창군멤버들의 공훈(功勳)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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