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3회
하지만 그런 긴장감 속에 반전이 일어나 1608년 2월 선조가 사망했다.
사망 전 선조는 3세의 영창대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었기 때문에 광해군을 차기의 왕으로 지명하고 수모를 거둔다.
참으로 우여곡절 끝에 백성과 신하의 지지를 받은 세자 광해군이 34세의 나이로 조선 제15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광해군은 16년간의 실무 경험을 쌓은 준비된 왕이었기에 모두가 기대하며 즉위를 반겼다 .
전쟁의 상혼을 어루만지며 대화합의 장을 연 광해군~
눈물의 세자 시절을 견디고 왕위에 올랐지만 전후 피폐해진 조선 상황과 주변국의 위협 등 국가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었기에 분열보다 화합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싶었다 .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민생을 안정시키길 원한 것이다. 광해군은 즉위하면서 탕평을 인지의 등용의 원칙으로 천명했다.
“각기 명목을 만들어 서로 배척함에 있어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으니 이는 배우 국가의 복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의당 피차를 막론하고 오직 인재 만을 천거하고 어진 사람만을 기용하여 다 함께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게 하라 ”
<광해군 일기 즉위년 2월 25일>
임진왜란 전 서인 정철의 옥중 처결를 두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서면서 붕당은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광해군을 지지하면서 즉위를 도왔으며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조정의 모든 권한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예상을 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붕당을 묻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광해군 즉위 후 첫 영의정은 남인 이원익이 맡았으며 이항복 이덕형 기자헌 등 붕당과 관계없이 골고루 기용했다.
경험이 많은 서인과 남인의 원로 대신들이 정승과 6조에 포진돼 국정운용을 이끌었고 조정의 언론과 인사를 맡은 이조판사와 이조전랑 승지 대간 등의 주요직은 북인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광해군의 첫 인사는 아주 균형감 있는 연립 정권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굶주림과 무질서 속에 도시는 황폐했다. 성흔의 「우계집」을 보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여 얻어먹는 자가 수천 명이고 죽는 자가 매일 60내지 70명 이상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광해군 초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로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대동법(특산물로 바치던 세금을 쌀로 납부케 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그동안 방납업자가 세금으로 내야 할 특산물을 구해주는 대가로 폭리를 취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는데 이런 방납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4회
지방관과 방납업자 사이의 커넥션 문제는 이전부터 있었는데, 중종 때 조광조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내게 한다는 수미법을 처음 주장했다.
그리고 선조 때에 넘어와 율곡 이이와 유성룡이 다시 수미법을 주장했지만,
기득권의 반발로 실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법안을 광해군의 용단으로 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실시하게 된 것이다.
광해군은 토지 1결당 12두를 거두어 재산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한마디로 요즈음의 부자 증세를 단행한 것이다.
토지 1결에서 약 300두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으니 3.5% 정도의 세금을 징수한 것이다.
당연히 부자들과 방납업자들의 반발이 컸다 .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면서도 이것이 정말 옳은 정책인지 잘못된 정책인지 혼란스러워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개국 후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계속 특산물로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갑자기 바꾸면서 반발이 일어나니 스스로 갈등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08년 5월 대동법 시행 9개월의 광해군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을 보기로 한다.
“당초 나의 생각에도 이는 진실로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예로부터 나라를 소유한 자가 모두 토양의 실적에 맞게 공물(貢物)을 바치게 한 데는 그 뜻이 있다.”
<광해군 일기 광해 1년2월5일>
대동법을 우선적으로 실시한 경기도 지역의 백성들은 매우 흡족해하면서 기념비까지 세웠다 대동법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주들의 반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타 지역으로 확대가 전격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인조 때 강원도로 확대되고 여러 왕을 거치며 결국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기까지 무려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대동법이 광해군의 완전한 업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일부 역사가들도 있지만 백성들의 욕구에도 이전 왕들이 실시하지 못했던 개혁 법안을 출발시킨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동법은 백성을 위한 정책이었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으므로 광해군의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 불타버린 궁궐을 재건해 왕실의 위엄을 되찾으려고 했다.
161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건국하고 전통적 강자인 명나라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에 1618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은 만 3천여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이런 비상시국임에도 광해군은 궁궐이 언제 완성되는지 관심을 놓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 조선은 3개의 궁궐을 가지고 있었다. 태조 때 만들어진 조선의 정궁 경복궁,
태조 때의 왕의 임시 거처인 이궁으로 만들어진 창덕궁.
성종 때 왕실의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진 창경궁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25회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3개의 궁궐이 모두 불에 타버렸고 전후 선조는 경복궁을 다시 건립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창덕궁을 복원해 광해군 2년에 완성한다.
이후 소실된 창경궁도 다시 건립했다.
광해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궁궐을 다시 짓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전란 후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신하들은 궁궐에 집착하는 광해군에 비판적이었다.
“서사西師가 패전하여 수만 명의 백성이 쓰러져 죽어갔으니,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운송하여 강변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당장의 급선무였는데도 밤낮으로 일삼는 것이라고는 오직 궁궐을 짓는 한 가지 일밖에 없었다.
만약 궁궐을 짓고 보수하려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어찌 어지럽거나 망하는 화가 있었겠는가.”
< 광해군 일기 광해 11년 3월 17일>
광해군의 궁궐 건립은 창경궁을 끝으로 멈춰야 했지만, 인왕산 아래 왕기가 서려있다는 얘기를 들은 광해군은 정원군의 옛집을 빼앗는 등 인왕산 아래쪽으로 인경궁과 경덕궁을 추가로 짓는다.
어렵게 왕이 된 광해군이 왕권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려는 생각에 몰두하면서 냉정함을 잃었고 이로 인해 점점 국가재정 압박에 시달리며 민생을 어렵게 했다.
광해군은 어려워진 재정 확보를 위해 관직을 팔게 되는데 이른바 공명첩(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관직 임명장)을 만들어 팔고 이것을 산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관직을 얻었다.
또한 ‘속죄은’ 제도를 만들어 죄수들 중 돈을 낸 사람이 죄를 면해줬다 .
유전무죄를 합법한 악법까지 만들어 내며 재정 확보를 열을 재정 확보에 열을 올리니 신하들에게 반정의 이유를 더 만들어 준 것이다.
광해군이 왕권을 지키는 것과 왕의 권위에 유난히 집착했음을 보여주는 행위가 있다.
전호는 왕이 승하한 신하들이 지어 올리는 것인데 광해군을 자신의 존호를 직접 지은 것이다. 무려 48자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긴 전호였다.
조선시대에는 혼군으로 불렸지만 1930년대가 되면서 광해군이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로 조선을 이끌려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또 1970년대에는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모두 가진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학계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논란이 많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26회
[나라의 안녕을 위해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외교정책]
광해군 10년( 1618년)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다. 조선조정은 재조지은(再造之恩: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 를 외치며 명나라에 파병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출병에 신중했다.
훈련되지 않는 군대를 파병하면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아까운 목숨만 허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라가 망할지언정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명목적 신념에 사로잡힌 신하들과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요동 진출을 사전에 막고자 조선 땅을 전장터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명나라 자국을 위한 출경이었다.
이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광해군으로서는 자신의 세자 책봉을 수차례 거부하고 국왕 승인 과정에서도 많은 은을 욕구하며 갑질을 한 명나라의 출병 욕구에 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의 후금이 명나라의 군사보다 강하다고 판단했기에 후금의 원한을 사게 될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명나라의 승리를 예상하며 파병을 하지 않는다면 명나라의 보복이 우려된다는 반대 입장을 내놓으며 팽팽히 맞섰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전후 복구에 집중해야 할 조선에게 파병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큰 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분주 활동을 하며 전쟁과 명나라 군사력을 잘 이해하고 있던 광해군은 전란을 경험한 신하들이 남아 있지 않음을 한탄했다.
“옛사람들은 적의 형세를 잘 정탐해가지고 그에 맞게 잘 대응하였다.
설사 해당 관청의 당상관이라 하더라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선비가 어떻게 군사 기밀과 군사 업무를 알 수 있겠는가?”
<광해군 일기 광해 13년 6월 22일>
결국 조선은 파병을 결정했다.
1619년 2월 19일
강흥림이 이끄는 만 3천여 명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출발했고 3월 2일 심하(선허)에 도착해 명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했다.
명나라는 10만 대군을 투입해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홍경)공격을 시도했다.
적을 기다리지 않고 적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은 멸망을 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명나라는 홍경을 향해 북로군. 중로좌익군 .중로우익군. 남로군 4개의 군으로 나뉘어 진격했다.
조선군은 남로군에 합류해 연합군을 형성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명연합군이 남쪽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사로 병진 작전을 썼는데 여러 갈래의 병진 작전은 명나라가 주로 사용하는 작전이었다.
후금은 여러 갈래로 진격하는 명군를 향해 각개격파를 선택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7회
3월 1일
후금은 주력부대인 팔기군을 보내 명의 중로 좌익군을 격파하고 다음날 북로군을 전멸시킨다.
두 부대의 패배를 지켜본 명나라의 중로우익군은 전투를 회피하려고 도주했다.
조선군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명나라의 주력부대가 패배하거나 도주한 상황으로 이미 전투의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3월 4일
후금을 만난 조선군은 순식간에 좌.우영군을 잃으며 타격을 받아 항복했다.
후금의 팔기군은 10만의 명군보다 군사는 적으나 전쟁으로 모인 군사 집단이 아니라 평소에도 집단으로 사냥하는 조직에서 출발해 함께 생활하였으므로 응집력과 팀워크가 명군에 비해 탁월했다.
광해군의 예상대로 후금이 강했고 명나라는 패배했다.
이는 파병을 반대했던 광해군이 전국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군을 이끈 강홍립이 항복이 문제가 된 것이다.
특히 서인들은 강홍립이 전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투항한 것이 광해군이 비밀리에 내린 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훗날 광해군 축출의 명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사례를 종합해보면 의도적 투항의 사전 약속은 없었다는 것이다. 좌우영군이 전멸해 이미 절반 이상의 군사를 잃은 조선군은 본영마저 포위돼 있었고,
후금이 수차례 투항을 권유했기 때문에 강홍림은 부하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 투항을 결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강홍립은 전투가 벌어지기 사흘 전 통역을 맡은 역관 하세국을 후금 진영으로 보내 조선은 후금과 원한이 없음을 알리고 명나라의 요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린 것으로 보인다.
양강 구도에서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광해군은 항복을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강국인 후금과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니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강홍립에게 명했을 뿐이다.
정무감각을 가진 강홍립은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목표가 명나라인 후금 또한 조선과는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
강홍립이 포로로 잡혀있던 때에도 광해군은 강홍립과의 서신을 후금과의 대화창고로 삼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사대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강국 후금을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후금과의 소통을 이어간 것이다.
강홍립과 함께 포로가 된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에는 후금도 조선과의 대화가 필요한 때 강홍립을 활용해 대화를 이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와 대립 관계에 있던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대화를 감추지 않고 조선이 후금과 화친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명나라를 압박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8회
광해군은 약소국의 군주로서
당시 국제정ㅅ[를 정획히 판단하고 적절한 전략을 구사하고 바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사람들처럼 아버지 국가인 명나라에 보답만을 강조하는 ‘재조지은’의 맹목적인 사대주의만을 고집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철없는 소리만 해대니 광해군은 이렇게 알침했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 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짓밟는 날에 이들을 담론으로써 막아 낼 수 있겠는가
붓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 광해군 일기 광해 13년 6월 1일>
우방인 명나라는 달래고 후금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약소국 군주의 외교 정책이었다.
지혜로우나 잔혹했던 광해군~
광해군 5년 (1613년) 4월
문경새재를 지나던 은 상인을 살해하고 은 700냥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여주 강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강변칠우라 불리던 7명의 서자 출신들 이었다.
범인은 전 정승 박순의 서자 박응서와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등 고관의 자제들이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이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표출된 사건이었지만
대북파에 의에 역모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른바 「칠서의 난」으로 둔갑되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한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자백을 한 것이다.
이 자백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박응서에게 이이첨이 살길이 있다면서 회유하며 시작했다.
“이이첨이 김재남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와 짜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말하게 했다고 「묵재일기」는 전한다.
김재남은 이들을 알지도 못하며 만난 적도 없다고 부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김재남을 포함한 관련 인물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이것이 ‘계축옥사 癸丑獄事’다.
또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비정하게 이런 어린 영창대원을 강화해 유배 보내 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퍼 쪄 죽였다.
광해군은 사건의 진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정적 제거에 무게를 두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대북파 세력과 함께 이를 체결하여 다른 당파들과의 불만을 샀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불안한 마음에 죄 없는 친형 임해군을 역모사건으로 귀향을 보내 죽였다.
그런데 그가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에 힘없는 어린 동생 영창대군까지 죽인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집착으로 보인다.
대북파가 중심이 되어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를 폐할 것을 주장하며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도 대북 강경파를 제외한 서인과 남인 서북 세력까지 모두 폐모를 반대했다.
남인 이원익과 이덕형 서인 이향복 등 패모론에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 귀양을 가거나 쫓겨났다.
광해군은 강경파 이이첨과 손잡고 당론을 무시한 채 페모론을 지지했다.
결국 영창대군의 모친 인목대비을 폐서인한 광해군은 자식이 부모와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유교 사상을 무시하고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며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리게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9회(
대북파 세력은 모든 당파를 밀어내고 권력을 독점했지만,
그 세가 워낙 작아 집권당으로서 역할을 하기가 역부족이었다.
가장 작은 소수당이었던 북인은 그나마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당세가 더욱 악화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작은 조직이었기에 광해군 말기의 반정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사방에서 여러 고변이 있었지만 서인들의 능양궁 추대는 알아채지 못했다.
광해군 15년 3월 12일
반정 당일에도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이 반정에 대한 내용을 광해군에게 고변했으나, 술에 취한 광해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그날 반정군이 들이닥쳤다 .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사가들의 의견도 많이 엇갈린다 .
명군이다.
혼군이다.
평가하기보다는 부분 부분을 잘 잘라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흔히 얘기하듯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며 힘없는 조선을 지키려 한 외교 정책은 광해군의 현명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치의 실패를 거듭해 결국 쫓겨난 국왕이 되고 만다 .
광해군은 소수 강경파에 휘둘려 정치 집단과 소통에 실패했고 통합의 정치를 포기하면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광해군이 세자 시절을 보여줬던 지혜로움과 왕족으로서의 폐기는 많은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신뢰와 믿음을 주었다.
아버지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자신의 살 길을 찾아 북으로 피신할 때 국왕을 대신하는 광해군은 조선의 주인다운 모습으로 책임을 다했다.
집권 초기 보여줬던 광해군의 국정 운영은 광해군이 국왕이 되길 바라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4년부터 시작된 역모 고변에 대응하는 광해군의 모습은 그동안 광해군이 보여준 모습이 아니었다 .
김직제 역모 사건 (광해군 4년), 계축옥사(광해군5년)등의 고변을 들은 광해군은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피의 숙청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왕권에 집착하였던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에 대항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세력은 모두 숙청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후 십여 년간 비슷한 형태가 반복되는 일을 겪으며 신하들은 광해군을 두려워하게 했다.
결국 두려움을 넘어 위험한 인물이라는 판단에 서게 되면서 군주를 교체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변에 대응하는 광해군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고변에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광해군은 스스로도 이런 상황에 지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실제 자신을 쫓아낼 인조반정에 대한 고변은 누구와 언제 역모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고변이 있었다.
그것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광해군은 정치적 판단력을 잃었고 결국 마지막 고변이 있은 다음날 새벽 궁에서 불이 나며 천여 명의 군사가 창덕궁을 습격했다.
광해군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궁을 나서는 광해군의 일행은 내시 몇 명뿐이었다.
임금의 호위무사까지 반정군에 가담해 측근의 신하가 남아있지 않는 외로운 왕이었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0회
광해군이 신하들의 경고를 흘려들은 것은 한 여인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동궁 시절부터 모신 상궁 김계시였다.
늘 여자(?)가 문제다
똥 시屎자를 써 김개똥이라고 부르던 천민 출신 상궁이다.
실록에는 이례적으로 김개시의 외모를 언급했다.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앗다.”
<광해군 일기 광해5년 8월11일>
기록을 보면 그녀는 추녀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광해군보다 나이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보통 상궁이 아니었다. 「연려실기술」에는 대궐 안에 모든 일들이 그녀의 손에서 한결같이 결정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녀는 광해군이 신뢰하는 정치적 조력자였으며 최측근이었다. 일개 상궁이 궁안의 모든 일에 관여했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조선판 비선실세였다.
연산군 때 장록수와 흡사했지만, 뜻은 달랐다 장록수는 끝까지 연산군의 옆을 지켰지만 김개시는 서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반정세력과 손을 잡는다.
그녀는 고변이 들어올 때마다 충성스러운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광해군의 눈과 귀를 가리고 판단을 흐리게 한 배신자였다.
한나라의 임금이 궁녀 한 사람에게 휘둘려 국제 운영을 막힌 것은 개탄한 일이 아닌가?
인조반정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광해군은 쫓겨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상적으로 국적이 운영됐다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광해군 자신이었다.
국가 경영의이 소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
국정 운영을 함께 하는 신하들과 상시적 소통을 통해 최선의 방향을 논의하고 시스템으로 구축된 기구를 통해 실행하는 것이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일 것이다.
쫓겨난 광해와 청나라에 무릎 꿇는 인조~
과연 진짜 승자는 누구일까?
인조반장이 광해군의 폭정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은 서인들의 명분일 뿐 실제적으로는 세력 다툼을 통한 국정 장악이 더 큰 이유였다.
당시 국정을 주도하던 대북피 세력의 전횡에 서인과 남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주도권을 가져오고 싶어 했다.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서인들은 기회가 필요했다. 성리학의 나라 중립 외교를 통해 명나라뿐만 아니라 후금과의 관계도 원만히 하려는 광해군의 정책은 성리학자인 신료들에게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31회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대북파 정권마저도 유학자들이었기에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면서 반기를 들게 된다.
결국 중화주의(명이 ‘주인’이고 후금은 ‘오랑캐’라는 사상) 이외에는 모든 것이 배척대상이라고 여긴 유학자들에게는 광해군도 마찬가지 대상이었다.
광해군은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벗어나 백성들이 전쟁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백성을 지키는 일이고 조선의 왕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성리학 틀 안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왕을 원했다. 조선이 추구해야 할 정의가 오직 명나라였던 신료들에게는 백성은 없고 명분만이 중요했다.
단 한 명의 신하도 광해군의 생각에 동조하는 자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친명 배금 정책을 펼치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한 조정은 자신들이 오판이 불러온 지향에 어떠한 책임 의식이나 반증도 없었다.
임금이 오랑캐(후금)와 손잡으려 한다며 쫓아낸 그들은 임금을 오랑캐에게 무릎 꿇고 절을 하게 만들었다 .
두 번의 처절한 패배 앞에서도 조선의 선비들은 배움이 없는 사상적 장애를 보인다 .
인조반정을 통해 새로운 왕위 등극했다는 사실을 아는 명나라와 후금의 반응은 어땠을까?
명나라는 깜짝 놀라며 지혜로운 임금을 왜 몰아냈느냐고 추궁했다.
군대를 보내 바로잡기 전에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키라고 했다.
강경한 입장을 가진 명나라였지만 계속 조선을 압박한다면, 조선이 후금과 손을 잡을 것이 염려해 결국 새로운 임금 인조를 승인한다.
후금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광해군과 원만한 소통을 이어가던 후금에게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며 자신들을 오랑캐라 여기고 배척하니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광해군의 원수를 갖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후금은 정묘호란( 1627년)을 일으킨다 .
3만의 강한 군사력 앞에 준비되지 않는 조선은 그들의 욕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오랑캐라 여기던 후금을 형님 국가로 모시기로 했고 후금은 철수했다.
이후 세력이 강해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으며 이에 조정은 둘로 나뉘었다.
아버지 나라의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척화론자와 청나라와 강한 군사력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자는 주화론자가 대립했다.
이미 쇠퇴한 명나라였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그 틀를 깨지 못하고 그것을 명분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명분과 의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가히 병적이라고 합할 수밖에 없었다 .
결국 조선은 병자호란(1636년)을 맞아 2개월 만에 청나라에 항복하며 굴욕의 역사를 남겼다
임금의 삼전도로 나가 무릎을 꿇고 땅의 머리를 조아리며 “삼궤구고두례(삼배구고두례)의
치욕까지 당하는 조선을 목도한 광해군은 어떠한 생각을 한번 죽어갔을까?
내가 좀 더 잘했다면, 조선이 이런 치욕을 겪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혹시나 하지 않았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32회
광해군은 강화도와 교동도를 거쳐 1641년 제주도에서 19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며 숨를 거둔다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와 책임은 광해군뿐만 아니라 광해군만을 탓하며 국가와 미래를 바라지 못한 국가지도자들에게 있다.
왕을 몰아낼 정도 정도의 조직과 힘이 있었다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지혜와 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반정을 성공한 서인들의 입장에서 광해군 일기가 쓰였기에 그런 부분을 감안한다면, 광해군의 입장에서 억울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세자 시절 집권 초기에 광해군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광해군이 이 정도까지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광해군도 정쟁의 희생양일 수 있다. 그래서 인지 인조 즉위 후 백성들 사이에서 퍼진 「상시가」라는 노래가 승자들을 꼬집고 있다.
”아 ,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마라 그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느냐?“
< 인조실록 인조 3년 6월 19일>
새로 들어선 정권이 광해군 정권과 다르지 않았기에 백성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정을 성공시킨 세력들의 명분은 집권을 위한 구실뿐이었다.
새 정권의 무능한 외교 정책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청나라에굴복한 조선을 보며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당시 국제 정세를 현명하게 판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조선의 살길를 찾고자 한 선구자적 시각을 승자가 남긴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관료들은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했다.
성리학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주변국의 변화를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은 그들은 조선 중화주의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유학자들의 변명일 뿐이다.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임에도 그들은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과 의식이 전무했다.
그것은 무능 때문이 아니라 사상적 절창의 가치 노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광해군은 주변의 변화를 바라보며 약소국 조선이 취해야 할 스탠스를 정확히 판단한 유연한 사고를 가진 리더였다.
변화와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변화 하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는 것을
결국 광해군은 깨지지 않는 단단함으로 결속된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청년시절 전쟁을 누비며 뽐냈던 그의 열정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그라들면서 변화를 포기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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