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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37)/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3회

 

이후 450년 동안에 조선의 과세 기준 원칙으로 적용될 만큼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이 정책은 우리 백성을 위해 고민하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다.

 

국가 정책에 변화를 줄 때 이렇듯 신중하게 접근하는 세중의 리더십은 현재 정치인들이 깊이 들여다보고 본받아야 할 정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은 즉위 후 십여 년간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주림에 고통스러웠다.

세종은 이른 백성들의 아픔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많을 정도로 백성들을 아꼈다.

 

”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며 18일부터 앉아서 날 새기를 기다렸다. 이 때문에 병이 났으나 외인外人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때 와서 여러 대신들이 알고 고기 찬 시기를 청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7년 7월 28일>

 

세종은 경작지 확대를 위해 서해안의 강화부터 남해 거제에 이르는 해안가에 벌어진 섬들을 개간하는 사업을 국가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일조량이 줄고 이로 인해 가뭄과 흉작이 이어지면서 농토를 확대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당시 강원도에서 영서의 가구가 9509호였는데 굶주림으로부터 없어진 호수가 2567호라고 기록돼 있다.

 

농업이 국가와 경제에 기반해서 시대의 계속된 흉년은 국가적 위기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세종은 불철주야 고심했다.

 

그러면서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을 나와 경희루 앞에 초갓집을 짓고 2년 동안 그곳에서 묵었다.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했다는 것이 세종의 의지였다.

 

세종은 농업을 일으키고자 민생을 구조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임을 명확히 인지했다.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는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년 2월 12일>

 

”밀과 보리가 익었다 할지라도 나는 굶주린 백성이 있을까? 염려되니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백성의 산림을 조사하게 하여 만일 굶주린 자가 있으면 구제하게하라.“

< 세종실록. 세종 3년 4월 27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4회

 

세종은 천문 프로젝트 완성이 백성들에게 삶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과 이순지 김담 이천 등과 함께 과학기구 개발에 매진해 15세기 최고의 물시계인 자격루를 완성했다. 이로 인해 조선인은 표준 시계를 갖게 되었고

시간 개념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해시계인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를 만들고 측우기와 혼천의 등의 발명과 제작에 성공한다.

 

이렇듯 세종이 천문과학기구 발명에 뜻을 둔 것은 백성들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배려이고 도전이었다.

 

태종 12년에 발탁된 장영실은 엄밀히 얘기하면 과학자라기보다는 뛰어난 기술자였다.

 

 

 

세종은 자신이 구상한 천문 기계를 만드는데 궁중 기술자인 장영실이 적임자라고 판단하였고 그와 함께 구상을 현실화시켜 조선의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

 

부산의 관노였던 장영실은 문신들이 근무하는 상의원(왕실 물품 제조)에 배속돼 별좌(종5품)의 벼슬을 받았다.

 

그 후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 속에서도 세종은 장영실을 종3품 대호군까지 승진시킨다.

 

노비 출신으로 종 3품이 오른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었지만 그는 장영실과 같은 인재를 등용하는 국가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겠다.

 

제2의 장영실 제3의 장영실이 나올 수 있도록 해서 신분이나 제도에 묶이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가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인재 등의 제한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세종은 아버지 태종 때 시행했던 인재 추천 제도인 도천법을 전극 활용해 인재의 발굴에 소홀하지 않았다.

 

세종은 신분이 낮은 사회 약자들도 자신이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1430년 「공처 노비 산하 휴가법」 을 만들어 관노비가 출산할 경우 그가 주던 7일간의 휴가를 100일로 대폭 누리면서 출산휴가의 원조가 됐으며,

 

그 남편도 30일간의 휴가를 주도록 했다.

 

출산휴가를 법으로 정한 세계 최초의 사례이며 이것이 600년 전 세종의 복지 정책이었다.

 

또한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자들에게도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었다,

 

한편 일부에서는 아버지 태종은 ‘노비종부법’을 실시하여 노비 신분은 아버지를 따라가도록 했는데 세종은 ‘노비종모법’으로 바꾸어 실시,

어머니가 노비이면 자식 모두가 노비가 되도록 하여 조선에서 노비를 양산하는데 기여(?) 한 임금으로 평가하여 백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임금으로는 인정하길 주저하는 학자도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5회

 

”옥이란 것은 죄 있는 자들을 징계하는 것이요.

본의가 사람을 죽게 하자는 그것이 아니거늘 옥을 맡은 관원이 마음을 써서 고찰하지 아니하고 심한 추위와 찌는 더위에 사람을 가두어 질병에 걸리게 하고 혹은 얼고 주려서 비명에 죽게 하는 일이 없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련하고 민망한 일이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아 항상 몸소 상고하고 살피며 옥내를 수리하고 쓸어서 늘 청결하게 할 것이오 .

질병이 있는 죄수는 약을 주어 구호하고 치료할 것이며 옥바라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자에게는 관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호하게 하라

그중에 마음을 써서 거행하지 않는 자는 서울 안에서는 헌부에서 외방에서는 감사가 엄격히 규찰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

<세종실록 세종 7년 5월 1일>

 

‘여름에는 냉수를 갖추고 두 달에 한 번은 목욕을 시켜라’

‘ 겨울에는 짚을 깔아서 얼어 죽는 이가 없도록 배려를 해라 ’

 

세종은 죄수들에게까지 세심한 배려를 했다. 또한 「금부삼복법」이라 하여 사형죄의 경우 재판 오심을 막기 위해 세 번을 심리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억울한 죽음을 경계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근대화까지도 인권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사회였음을 생각할 때 600 여년을 앞서간 세종의 인권정책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임금이었는지

그리고 백성을 아낀 구의 군주였는지 지금은 리더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간 천제 리더 세종대왕의 이러한 모습을 만백성의 아버지로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5년부터 세종대왕의 생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이다.

 

안질 비만 당뇨 등등 ~~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6회

 

세종은 권력보다 효율을 중시했다.

왕권을 강화하기보다 그 권한을 나누어 국정운영의 효율을 높이려 했다. 세종은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욕심은 없었으나 좋은 정책을 펴기 위한 욕심은 많았다.

 

신하들의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상대를 비난하고 욱박지르면서까지 관철시켰다 .

 

앉아서 결재를 받는 군림형 임금이 아니라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고 연구했던 성실한 왕이었다.

 

그런 왕이었기에 국사를 위해 권력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 태종이 핏값으로 얻은 왕위를 안정시키고자 육조 직계제를 통해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면,

 

세종은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채택한 의정부서사제(정1품 정승과 종1품 찬성(장관)으로 이루어진 회의) 를 부활시켜 경험 많은 정승들이 국정을 운용하는데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당시 좌의정은 이조 예조 병조를 관장하고

우의정이 호조 형조 공조를 관장하게 하도록 했다.

 

영의정은 삼정승 중 가장 높은 서열이기도 했지만, 직접적 업무가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는데 세종은 이를 고급 인력이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의정 황희을 중심으로 의정부 활동에 힘을 실어주며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킨 것이다.

세종 18년 때의 일이다. 재능 있는 큰아들 문종에게도 업무를 맡기고 싶었던 세종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통해 국왕 수업을 하는 동시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 운전대를 잡은 서른 살의 서론에 젊은 문종이었지만 옆자리 아버지 세종이 앉아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7회

 

그리하여 세종의 후반부 성과 중에 문종과 함께한 치적들이 많이 있다.

앞서 설명한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기초로 한 전세법을 통해 불합리한 세제를 개선했으며 용비어천가 편찬과 훈민정음 창제에도 부자가 함께한 작품으로 보인다.

 

세종은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관리가 지방으로 파견 근무를 떠날 때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통상 감사(도지사)나 부윤(시장)까지만 왕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세종은 이 범위를 넓혀 수령 .현령인 6품까지 확대했다. 확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관리의 신상을 파악하고 그 지역의 문제와 해결 과제 등을 일일이 얘기하며 업무에 집중하게 했다.

 

왕의 얼굴을 본 것도 영광인데 왕이 자기를 알아봐 주고 업무 지침을 직접 열어주니 얼마나 감개무량했을까?

 

새로 부임지로 떠나는 그들에게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최고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까?

 

세종은 할 일이 너무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런 그런 워커홀릭 세종에게 가장 큰 핸디캡은 건강이었다.

고기 반찬이 없으면 식사를 못 할 정도로 육식 애호가인 세종은 움직이지 않고 책을 읽었다 많이 먹고 적게 움직이니 몸은 비대하고 건강을 지킬 도리가 없었다.

 

세종은 비만으로 인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린다.

세종 4년.

태종이 유언으로 ”주상한 고기가 아니면 진지을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를 마치라“ 고 했다. 그만큼 세종은 육식에 애호가 였다.

 

실제로 태종 사망 후 고기 반찬을 거르고 식사를 한 세종이 얼마 후 허손병(몸이 약해지는 병)에 걸렸다는 웃지 못할 기록이 있다.

 

”내가 전부터 물을 자주 마시는 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을 앓는 병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병에 걸린 것이 이제 벌써 2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병의 뿌리가 다 근절되지 않은 데다가 이제 또 임질淋疾를 얻어 이미 열하루가 되었는데 “

<세종실록 세종 20년 4월 20일>

 

사실 세종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해도 모방할 만큼 많은 병을 가지고 있었다. 30대부터 당뇨가 생기고 40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여러 당뇨 합병증으로 힘겨워했음이 기록에 나타난다.

 

50대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시야가 흐려 앞사람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몸이 안 따라주나 아들들과 신하들에게도 일을 맡겼다 주변의 인재들을 활용해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8회

 

결국

세종 27년(1445년) 5월 1일

 

세종은 세자에게 선의를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몸이 그렇게 아픈데도 끝끝내 한글을 만들어 낸 걸 보면 세종의 정신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겠다.

참 대단한 정신력이며 요즘 말로 멘탈갑이었다.

원 없이 일하고 후손에게 많은 것을 물려준 왕 .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궈낸 결과물로 인해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남아있다.

 

아마 이것으로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았을까?

세종의 향년 54세로 숨을 거두었다.

 

”임금이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薨 하였다.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闔에 있을 때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 중략)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의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들이 살아가기를 즐겨 한 지 무려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음에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

<세종실록 세종 32년 2월 17일>

 

우리 민족이 자랑이며 영웅인 세종의 치세는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세종 사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일들이 연속된다.

 

왕위를 물려받은 맏아들 문종의 이른 사망으로 손자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만 둘째, 아들 수양에게 쫓겨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게다가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 안타까운 인재들이 사망하고 공신들의 비리가 만연한 세상이 되어 버린다 .

 

역사에서 만약에는 있을 수 없겠지만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우리는 종종 만약이라는 얘기를 하곤 한다.

 

문종이 왕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인 39세의 나이로 죽는다 .

아버지의 총명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문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리덕의 건강관리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들 단종이 12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다. 단종이 스무 살만 되었어도 삼촌이 야욕을 드러내지 못했을 텐데 아쉬움이 든다.

 

조선 왕실 기준으로 문종의 나이 39세에 아들의 나이가 12세인 것에 매우 낮은 것이다.

후사가 늦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종에게 책임이 없지는 않다

 

단종은 문종이 단종을 낳기 전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다.

문종은 나이 12세 때 세자빈으로 희빈 김씨를 맞이했다. 하지만 문종이 희빈 김씨에게 마음이 없어 가까이 하지 않자 그녀는 문종이 좋아하는 궁녀의 궁녀의 신을 불에 태워 그 가루를 술에 타 마시게 하면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듣고 압승술(주술로 남자를 미혹시키는 일)을 쓰려 했다.

그러나 결국 발각되어 궁에서 퇴출되고 만다.

아버지 세종으로서는 기대가 많은 아들의 문종의 아내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 씨를 누대累代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뜻밖에도 김 씨가 미혹시키는 방법으로 압승수를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세종 11년 7월 20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9회

 

 

두 번째로, 세종은 세자빈이 간택하기 전 세종의 아들이 희빈 김씨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모를 갖춘 순빈 봉씨를 세자빈으로 만는다.

하지만 순빈 봉씨도 품행이 정숙하지 못해 파혼을 당하고 만다.

 

이후 세 번째로, 얻은 세자빈 권씨가 바로 현덕왕후가 되고 단종을 낳게 된다.

 

시아버지로서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었던 세종은 아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며느리가 부족하다 싶으면 이혼을 시켰다 .

 

맏아들 문종뿐만 아니라 넷째 아들 임영대군과 여덟째 아들 영웅대군도 이혼 경력이 있다.

모두가 아버지 세종에 의해서 이혼한 것이다.

 

영웅대군이 아버지 사후에 전처와 재결합한 것을 보면 아버지 때문에 원치 않는 이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

 

결국 문종의 후사가 늦은 것도 아들의 결혼 생활에 까지 깊이 개입한 세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이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자신의 지세를 태평성대로 만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시대가 후대에 이어받지 못한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세종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조정의 중요한 일을 맡기면서 자연스레 조정대신들과 관계를 맺고 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자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아들들이 맡았으며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실세로 떠오르게 했다.

 

종친불사宗親不仕(왕의 8촌이내 친족은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제도) 원칙을 무시하고 아들들에게 일을 맡기고 힘을 실어준 결과 결국 수양대군이 권력욕을 키워 세력을 형성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도록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면 결코 이 또한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리더십이다.

 

세종은 아들들의 야심을 견제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세종 자신을 위해 큰 문제 없이 물러선 것처럼 자신의 아들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유교 사상을 추구하며 유교 윤리를 잘 지켜온 세종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는 인재를 아끼는 세종의 습성이 일으킨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명한 세종이 다음 세대를 대비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움이 큰 것이다.

 

빅 보스 세종이 보여준 탁월한 리더십 가운데 딱 한 가지만 골라달라고 한다면, 소통과 위임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 국정의 운영 시작은 회의로부터 시작한다.

 

“먼저 그대들의 의견부터 듣겠다”라며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한 토론을 통해 정책을 결정했다.

 

 

‘소수 의견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허조가 모두 찬성하는데 혼자 반대하기로 유명했다.

 

“ 허조가 홀로 반대했다”라는 기록이 실록에 수차례 나온다.

참을성이 부족한 군주였다면 매번 딴지를 거는 허조를 좌천시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종은 그의 다른 생각을 존중했다.

그의 다른 생각을 존중했다. 그리고 정책이 정해지면 그 일을 맡은 신하에게 충분한 권한을 주고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정책이 정해지기까지는 신중하지만 실행 단계에 주저 없이 믿고 맡기는 소통 위임형 리더로서의 세종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0회

 

뛰어난 인재였으나 때를 잘못 만난 광해군 ~~

 

광해군(1608년~ 1623년)의 자질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정무록」의 기록을 보면

선조가 보물을 진열해 놓고 왕자들에게 고르도록 했다. 여러 왕자가 앞다퉈 보물을 취하는데 광해군은 「붓」과 「먹」을 골랐다 .

선조는 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선조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후궁의 자식들이었다.

세자를 정하기 전 선조는 여러 모양으로 왕자들을 시험 했다.

 

「공사 견문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선조가 왕자들에게 ‘반찬 중에서 으뜸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는데

왕자들은 고기 생선 꿀떡 등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을 대답했다.

그때 광해군은 ‘소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소금이 없으면 아무리 귀한 음식도 맛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반찬이 아닌 으뜸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결론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고 답한 광해군이 왕자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은

품성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이를 토대로 광해군은 어질고 현명한 군주감으로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상의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 이진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 학문을 힘쓰지 않고 종들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폐단을 더욱 심하게 일으켰다 .

그러나 광해군은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중외(中外) 백성들의 마음이 복속하였으므로 상이 가려서 세웠다.”

< 선조 수정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선조가 맏아들인 임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는 이유는

행실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갑진만록」에 의하면 임해군은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했는데 백성의 땅과 노비를 빼앗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등 그 죄악을 이루다 적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한양을 벌이고 피란길에 올랐을 때 제일 먼저 경복궁이 불탔는데

이런 악행 때문에 민가 중에는 임해군의 집이 제일 먼저 약탈과 방화의 대상이 됐다.

 

광해군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자에 임명됐다.

방계에서 왕이 되었다는 열등감을 안고 살아왔던 선조는 자신의 후계만은 적장자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서자들 가운데 세자를 정해야 한다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선조는 굳이 세자를 일찍 정해 권력이 분산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늦게까지 세 자리를 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적장자가 생기길 기다린 이유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1회

 

조선왕조실록은 통상적으로 10세를 전후해 세자에 봉해지고, 30세를 전후해 왕위에 오르며 50세의 죽음으로 차기 왕이 즉위하는 20년 주기의 사이클이 일반적인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세자 책봉을 통해 임금의 통치를 보고 배우며 학습할 수 있는 준비의 시간을 가지게 한다.

 

세자 책봉은 후대 임금을 향한 선대 임금의 배려이며 백년지대계인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급하게 세자를 정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기본적으로 광해군을 총애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선조가 총애한 후궁 임빈 김씨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을 예뻐했기 때문이다.

 

영의정 이산해가 신성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한 것도 선조의 의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에 추대하려다 유배를 간 것도 선조의 마음에 신성군이 있음을 방증한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가 야속했다.

 

비록 서자지만 대신들과 주변들의 평가는 광해군에게 기울고 광해군 스스로도 좋은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선조만은 광해군에게 냉정했다.

이런 아버지에게 한마디도 거스르지 않고 인내했던 광해군은 가슴속에 얼음장 같은 차가움을 간직한 채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러던 중 전쟁이 발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을 세자로 만든 것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도성을 떠난 왕실은 둘로 나뉘어 세자인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맡겨 전쟁터를 누비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게 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조는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조정이 건재함을 알리며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미 점령된 황해도와 함경도 일대의 전쟁을 누비며 목숨을 건 광해군을 백성들은 믿고 따랐다.

 

또한 광해군은 전국의 의병들을 조직적으로 지휘하며 조선군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일궈낸다.

 

「건재문집(의병장 김천일이 남긴 시문집)」을 보면 그가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내린 글이 남아 있다.

 

“종사의 존망이 오직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해 부디 큰 공을 세워주기 바란다.”

 

광해군의 이런 활약은 의병들의 항전 의지를 북돋았다.

뿐만 아니라 의병들에게도 관군과 마찬가지로 군량을 지급하고 면세 혜택을 내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2회

 

 

전쟁 극복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임금을 대신해 광해군의 분조 활동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으며 백성들의 조정 신료들은 광해군이 차기 왕으로 손색없다고 평가를 했다.

 

적자도 아니며 선조임금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핸디캡 많은 세자였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주변의 기우를 잠재웠다.

 

27개월간 조선 각지를 돌며 국가의 구심점이 되어 온 광해군의 분주 활동은 왕실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한 상황에서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요동으로 망명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선조는 조선인 중에 조선을 가장 먼저 포기한 사람이다.

 

명나라가 참전한 이후 전세가 뒤바뀌고 한양을 수복한 선조는 아마도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명나라는 노골적으로 선조의 무능을 꼬집으며 광해군의 분주 활동을 격려했다.

 

그러면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를 광해군에게 맡기라는 칙서를 내보낸다.

 

“ 그대는 마땅히 분발하여 마음을 다해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여 보존토록 도모하라”

<선조실록 선조28년 3월27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선조는 더 이상 광해군과 부자 관계가 아닌 경쟁(?)관계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광해군을 더욱 견제하게 된다.

 

그러면서 선조는 자신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위 소동을 벌인다 .

 

종신들에게 “나와 세자 중 누구에게 충성할래”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권력욕이 강한 선조는 마음에도 없는 이 선위 소동을 재임 기간 동안 21번이나 벌이며 신하들의 충성심을 점검하는 게임을 즐겼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임금이다.

 

신하들은 “또 시작하셨군” 하면서 반복된 이 상황에 적응했을지 몰라도

광해군은 그때마다 드라마에서 보듯, 왕의 침전 앞에 무릎을 꿇고 명을 거둬달라고 해야 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정치적 희생양으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광해군은 이런 상황을 반복하면서 정치 본질과 속성을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의 대안이라고 생각한 신성군이 피란 도중 사망하면서 광해군은 한 시름 놓는가 햇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8년 후인 1606년 계비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가 그렇게도 원하던 적정가 생기며 후계구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다시 시작된다.

세자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는 적자의 탄생은 14년간이나 세자자리를 지켜온 광해군을 위태롭게 했다.

 

조정은 자연스럽게 당시 집권세력이던 북인 정인홍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유영경을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을 영의정에 앉히며 소북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런 상황에 선조는 광해를 더 노골적으로 대했다.

「당의통략」이라는 책에는

선조가 광해군을 향해 “명나라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내가 세자라고 하겠는가?

다시는 문안을 오지 말라”고 했고

광해군은 땅에 엎드리며 피를 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는 기회만 되면 광해군을 폐 세자 시키고 싶었지만 광해군은 16년간의 세자 시절 내내 단 한 번도 책잡힐 행동을 하지 않았다.

긴 시간이었지만 잘 견디고 이겨낸 광해군의 신중하고 치밀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고령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정인홍은 이런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광해군의 정신적 지주이자 후원자로 강단 있게 광해군을 지지했다.

 

어린 영창대군을 광해군 대신 세자에 책봉하자고 주장하는 유영경이 조선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그는 목숨을 걸고 유영경을 탄핵한다

 

하지만 영창대군에게 마음이 있던 선조가 유영경이 아닌 정인홍을 유배 보내면서 광해군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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