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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4·19의 연장으로서 5·16 -1960년대 초 5·16을 둘러싼 혁명 담론/변성호.조선大

 

1. 서론

 

2024년 12·3 비상계엄은 한국 사회에서 사라졌다고 생각되었던 몇 가 지를 소환하였다.

‘비상계엄’은 40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다시 선포 및 작동 하였고, 12·3의 본질은 친위쿠데타로 규정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친위쿠 데타는 1950년대 초 ‘부산정치파동’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한 적이 있었다. 몇 시간 내에 국회 의결로 해제된 12·3 비상계엄은 이후 대통령 탄핵과 새 로운 대통령 선거로 이어졌고, 이 과정은 ‘빛의 혁명’으로 명명되기도 하였 다.

즉 불법 쿠데타를 극복한 혁명이 2024년 말부터 현재까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주요 서사가 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와 5·16은 이 과정의 역 순으로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한 민주혁명인 4·19를 군부 세력이 불법 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짓밟은 5·16이라는 식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실 제로 1960년대 초반의 문헌을 보건대 혁명과 쿠데타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 았고, 담론적으로 둘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았다. 이 글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혁명으로 불렸던 1960년대 초반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16을 그 참여 세력의 자기변호나 박 정희 대통령의 장기 통치를 옹호하는 식으로서 혁명으로 본다는 것은 아니 다. 역사적 사실로서 적어도 1960년대 초반까지 5·16이 나중에 정권의 비 판자가 되는 인물과 집단으로부터도 ‘혁명’으로 명명되고 이해되었다는 사 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5·16의 혁명으로서 의 입지는 1년 먼저 발생하여 한국 현대사에서 혁명의 문을 연 4·19에 빚 지고 있다.

즉 5·16은 4·19와의 관계를 통해서 혁명의 위상을 주장할 수 있 었다. 그러므로 5·16에 대한 혁명 담론은 불가피하게 4·19의 혁명 담론과 얽혀 있다.

‘혁명’ 담론 차원은 아니지만 식자층의 1960년대 초 5·16 옹호 는 쿠데타 권력의 다중성과 지식인의 이념이 미정립, 미분화 상태였던 점으로,1 혹은 장면 정부의 대중적 지지 상실, 사회운동의 약세, 4·19 이후 불황 과 민생고로 인한 현상 변경 요구의 팽배로 설명된 바 있다.2

 

  1 .임대식(2003), 「1960년대 초반 지식인들의 현실인식」, 『역사비평』, 11월, 역사비평사, p. 329.

  2.이종오(1988), 「반제반일민족주의와 6・3운동」, 『역사비평』, 1호, 역사비평사, p. 50.

   

이 글이 혁명 담론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당시 넓은 의미로 한국 지식인이 4·19에서 불과 1년 지나 5·16을 지지했던 사실을 해명하기에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 기 때문이다. 즉 4·19와 5·16이 1964년 이후 명확히 분기하여 대립하는 양 상만을 유일한 정상성으로 판단하기보다 1960~63년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지식인에게 5·16이 4·19와 연속된 혁명으로 보였던 것도 또 다른 정상성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4·19와 5·16에 관한 연구는 많이 축적되어 있으나 4·19 연구가 압도 적으로 많고, 5·16 연구는 적은 편이라 더 늘어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 들에서 4·19는 ‘혁명’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고, 5·16을 혁명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더라도 당시의 맥락에서 혁명 개념과 담론을 다룬 경우는 적다. 5·16이 한국에서 군부 쿠데타의 시작점이자 노태우 정권까지 이어진 군사 정권 계보의 출발점이기에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긍정적 변화의 의미를 담 은 ‘혁명’으로서, 특히 4·19와 연속된 혁명으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주로 1960~61년 5·16이 4·19와 연속되는 차원에서 한국인에게 ‘혁명’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여기에는 ‘혁 명주체세력’을 자처하며 국가권력을 독점한 쿠데타 세력 측의 일방적인 발 화와 강요, 검열이 작동했음은 물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을 납득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한 여러 식자층이 반응은 위로 부터의 강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존 연구 중 4·19와 5·16이 상반되는 두 입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원과 실질적 내용에서는 유사점이 상당히 많다거나 두 사건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주장하는 연구가 있다. 최정운은 두 사건이 배태된 시점이 1956년경으로 같지만 실체가 유사하면서 다른 ‘이란성 쌍둥이’인 ‘두 개의 혁명’이라고 주장하였다.3

천정환, 권보드래는 ‘5·16이 되어버린 4·19’라는 주제로 공동 연구서를 냈고,4 특히 권보드래는 “4·19의 좌절이 불가피한 역 사적 코스에 가깝다”고 보았다.5

그리고 4·19와 5·16이 대립 관계로만 교 육되었지만, 실제로는 혁명과 반동 사이의 전이·길항·공모의 관계가 성립 하고, 두 사건의 기원이 많이 겹친다는 점을 지적했다. 4·19와 5·16의 분기 는 1960년대 말에야 분명해진다는 것이다.6

이상록은 4·19 이후 장면 정권 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적이 없었고, 학생과 지식인들이 적극적 으로 한국인을 생산적 주체로 주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5·16은 장면 정권의 실정을 지적하며 신속・과감한 초기의 조치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며 마찬가지로 국민을 생산적 주체로 창출하고자 하였다.7

오제연은 민족주의 담론을 4·19 이후 ‘민족혁명론’과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를 관통하는 담론으로 파악하였다.

한국의 후진성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고,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 그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끌 강력한 지도 자를 지식인들이 원했다.

그러나 1964년 6·3항쟁 과정에서 민족적 민주주 의 장례식은 민족주의가 다시 지배와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분화하는 지점 이었다.

그럼에도 양자의 경계는 여러 해석의 여지 때문에 흔들렸다.8

 

    3  최정운(2016), 『한국인의 발견』, 서울: 미지북스, pp. 201-277.

    4,권보드래·천정환(2012), 『1960년을 묻다: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서울: 천년의 상상

   .5 권보드래(2013), 「[북클럽 논쟁] 1960년을 묻다」, 『문화/과학』, 74호, 문화과학사, p. 213.

    6권보드래(2013), p. 234.

    7이상록(2011), 「경제제일주의의 사회적 구성과 ‘생산적 주체’ 만들기: 4.19~5.16 시기 혁 명의 전유를 둘러싼 경합과 전략들」, 『역사문제연구』, 25, 역사문제연구소.

     8.오제연(2011), 「1960년대 전반 지식인들의 민족주의 모색: ‘민족혁명론’과 ‘민족적 민주 주의’ 사이에서」, 『역사문제연구』 25, 역사문제연구소.

 

홍정완은 1960년 후반 대학생들 사이에 민족주의가 비등하며 서구적 표준의 자유민주주의 대신 파시즘을 옹호하거나, 현명하거나 강력한 독재 자를 원한 사례들을 제시했다.

5·16과 유사한 무언가를 예고하거나 심지 어 기원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존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9

황병주는 「콘론 (Conlon) 보고서」와 4·19 이후 이만갑의 『사상계』 글을 거론하며 홍정완의 글에서처럼 4·19 이후 상황에서 선의의 강력한 지도자를 기대하는 심리, 그리고 그런 인물이 군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이미 제시되었다는 점을 지적 했다.10

변성호는 4·19가 혁명으로 규정되었는데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평 가된 대학생이 혁명을 이끌지 못하는 공백 사태가 벌어졌고, 그럼으로써 마 치 5·16이 4·19를 보완할 새로운 혁명 주체세력이 된 것처럼 인식되었다는 혁명의 명명 효과를 연구하였다.11

임대식도 4·19와 5·16이 단절적 관계가 아님을 강조했다.12

 

    9 홍정완(2020), 「4월혁명과 근대화 주체론의 변화」, 『4월혁명의 주체들』(오제연 등), 역사 비평사.

   10 황병주(2020), 「4월혁명의 담론과 주체」, 오제연 등.

    11 변성호(2024), 「‘혁명’의 무게: 4.19의 혁명 명명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58집 3호, 한국정치학회.

    12 임대식(2003).

 

당 연구는 1960년대 초 지식인을 교수, 언론인, 대학 생으로 다룬 방식이나, 지식인과 국민이 쿠데타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거나 심지어 군사정권을 기대하고 협조한 상황을 상세히 다룬 점, 일부 인용한 문헌 등에서 이 논문과 일정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군부를 분석의 중심에 두었고, 지식인 외에 군부의 혁명에 대한 논리와 담 론도 다루고, 회고록 위주가 아닌 1960년대 초반 당시의 자료 분석을 중시 했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그리고 이 글은 왜 5·16 이후 대학생, 지식인, 언 론이 5·16을 담론의 차원에서 4·19에 연속된 혁명으로 이해했는지에 초점 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 글은 우선 4·19의 시간 동안 한국군이 혁명 담론과 어떻게 연관되 어 있는지를 간략히 정리한다. 이후 비혁명 정권인 민주당 정부의 몰락 과 정과 쿠데타 음모의 시작과 성공을 거쳐 쿠데타 세력의 혁명 담론을 정리 한다.

그리고 1961년 4·19의 혁명주체세력으로 인지되었던 서울의 대학생 그룹의 5·16에 대한 생각과 언론과 지식인 그룹의 5·16에 대한 혁명으로서 의 평가를 살펴본다.

 

2. 4·19와 한국군

 

4·19에서 시민의 감정이 격동된 주요 요인 중 하나는 경찰의 폭력적 인 방식이었다. 경찰은 고문을 비롯한 강압 수사를 했지만 더욱 심각하게 도 국민에게 수차례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4월 19일 계엄 령 선포 이후 한국 육군이 경찰을 대신하여 치안을 담당하였다. 계엄군은 물리적 폭력의 규모가 경찰보다 훨씬 큰 군에 시민들이 환호하는 것을 이 상하게 여겼는데, 실제로 계엄군은 시민들에 대한 폭력을 자제하였다. 발포 를 극도로 자제한 계엄군의 태도는 경찰과 대조되어 시민들의 호의적 반응 을 얻어냈다. 시민들이 탱크에 올라타 나아가는 등의 장면에서 마치 시민과 군이 함께 혁명을 일으키는 듯한 인상마저 받을 수 있다. 1960년 4월 26일 경무대 인근에서 찍힌 사진에서 이승만의 하야 방송 이후 계엄군의 조재미 준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시민들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고,13 4·19 이후 부산의 계엄 담당자였던 박정희도 도청 앞 광장의 데모 군중 앞 에서 만세를 불렀다.14

 

  1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2010), 『4월혁명 사료총집 8: 사진 기록』,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p. 493.

   14 박정희가 4.19 당시 계엄군으로서 만세를 부른 기록으로 1960년 9월 『부산일보』의 기사 가 있다. 데모를 무마하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만세였다. 「혁명을 지킨 장군」, 『부산일보』, 1960. 9. 11.

 

4·19 당시 군에 대한 시민들의 환호와 신뢰는 당시 위기 상황을 성공 적으로 관리한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에 대한 정치적 기대로 까지 나아갔다. 송요찬은 미국과 학생들 양측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김정 렬은 회고록에서 이승만 하야 발표 후 미국 국무성이 훈령을 통해 송요찬 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지원할 계획이 있었음을 밝혔다.15

송요찬은 이승 만이 하야를 발표하는 26일 아침에 시위 군중에서 대표 5명을 뽑아서 이승 만과 대화를 주선했는데, 그 대표들은 송요찬에게도, 이승만에게도 송요찬 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16

이들은 경무대를 나오면서 “여· 야 정객은 모두 믿을 수 없으니 군정을 포고해 달라”고 요청했고, 송요찬은 “헌법을 존중하고 정치체제 밑에서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면서 “군정은 절대로 안 될 말”이라며 요구를 거절했다.17

요는 송요찬이 정권을 일시적 으로 잡을 기회와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 거부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군 대가 정권욕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군에 대한 일반의 호감을 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18

 

     15 당시 송요찬의 부관이었던 김운용이 군사 고문단장 하우츠(Howtz)의 편지를 읽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단한 변동을 겪는 한국에서 미국 정부는 앞으로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김정렬(1993), 『김정렬 회고 록』, 서울: 을유문화사, p. 270. 그러나 김운용은 후일 그런 편지의 존재가 기억나지 않는 다고 증언했다. 김운용(2012), 「구술 자료(면담자: 오제연, 면담 일시: 2012. 2. 28.)」, 현 대한국구술자료관,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 2. 15. https://mkoha.aks.ac.kr/oralRecord/ OralRecordSelect.do?oralRecSeq=215

    16 같은 자리에 있었던 허정도 ‘학생 대표’가 송요찬에게 정권을 인계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 었다. 「시위 군중 대표, 대통령 사퇴 성명 발표 전 이승만 면담」, 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 동기념사업회, 2026. 2. 15. https://archives.kdemo.or.kr/workoutlog/workoutlog/view/ APR_1960_04_26_n006 이 웹사이트에 정리된 여러 자료에 송요찬의 군정을 원했던 당시 의 목소리가 남아있다.

     1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 일지(1960).

     18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제각각인데 시민 대표 일원인 유일라는 하야 이후 권력 형태를 묻는 이승만의 질문에 대표들이 “‘나셀’을 어떻게 보느냐”는 식으로 송요찬을 거명하지 않은 것처럼 회고하기도 하였다. 「4.19 비화: 그 날의 이박사 하야 권고」, 『선데이 서울』, 1970. 4. 19., p. 17.

 

송요찬은 이후 박정희의 요청에 따라 3·15부 정선거에 가담한 책임을 지고 육군참모총장에서 사퇴하게 됨에도 불구하 고 일반적인 평가에서 부정선거에서의 역할은 언급되지 않고 그가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금지함으로써 4월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점 때 문에 칭송받는 경우가 많았다.19

심지어 4·19 당시 군에서 한직에 있었던 백선엽에게도 CIA 한국 지국 장인 피어 드 실바가 쿠데타를 제안했다는 회고도 있다. 시점은 4·19 며칠 전이었는데 흥미롭게도 백선엽은 미국의 제안이 있기 전인 1957년 참모총 장이던 시절에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보며 본인이 쿠데타를 상상했다고 고백했다.20

 

       19 공교롭게도 이것은 박정희가 송요찬의 사퇴를 권유할 때 예상했던 효과였다. 조갑제 (2015), 『박정희 3: 혁명 전야』, 서울: 조갑제닷컴, p. 162.

       20 “군대가 나서서 장택상 박사, 조병옥 박사 등 명망있는 분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한 다음 물러나면 좋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었다. 백선엽(2013), 「백 선엽의 6·25 징비록 ①」, 프리미엄조선, 조선일보, 2023. 6. 4. https://premium.chosun. com/site/data/html_dir/2013/11/07/2013110702145.html

 

마찬가지로 제1군사령관 유재흥은 4·19 이전 주한 미대사 매 커너기와 만났는데, 매커너기가 “자꾸 데모가 일어나고 국민이 불안해 하는 데 야전군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회상했다.

유재흥 은 절대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으나 매커너기의 질문은 쿠데 타 의향에 관한 질문으로 읽힐 수도 있다. 당시 대화의 맥락상 유재흥이 그 렇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으나, 미국이 백선엽이나 송요찬에게 정 권을 권유했다면 4·19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다른 주요 군 지휘관 들의 의중을 미국 측에서 궁금해했을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제기된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실질적으로 한국 군부 의 쿠데타를 희망 혹은 종용했는지를 밝힐 수 없으므로 몇 가지 남겨진 기 록을 통해 그럴 수도 있었다는 정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유재흥은 또 4·19 국면에서 어느 공학 박사가 찾아와 “오늘날의 세계 추세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 나라를 안정시키고 있다. 당신은 육군 병력 의 전체 전투 병력을 지휘 장악하고 있으니 정권을 잡아 나라에 이바지하 는 것이 어떻습니까. 지금 정권을 잡으면 미국도 인정할 것입니다”라고 권유했다고 회고했다.21

송요찬의 부관이었던 김운용은 연세대학교의 조효원 교수가 전화를 걸어 송요찬에게 밀리터리즘이 한국에서 라이징(rising)한다 고 설명했고, 그것이 송요찬에 대한 “아양”이었다고 평가했다.22

5·16 쿠데 타가 발생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군 고급 지휘관들에 대한 이러한 권력을 향한 유혹이 안팎에서 흔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군 내에서 박정희와 김종 필 등의 세력 외에 다른 쿠데타 계획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듯이 당시 한국 사회에서 군부 쿠데타는 성공 여부를 차치하고 시기의 문제였을 수 있다. 1960년 1월부터 『사상계』에 번역되어 연재된 「콘론 보고서」는 한국 에서 “만일 정당정부가 완전히 실패하면 언제나 한번은 군사지배가 출현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고 예언하였다.23

추가로 4·19 직전의 1950년대는 혁명과 쿠데타가 개념적으로 혼용되 었던 시기였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혼용과 그로 인한 혼란은 당 시의 주요 일간지, 지식인 모두로부터 관찰된다. 주로 후진국의 반복적인 쿠데타가 ‘혁명’의 이름으로 언론에 보도되었고,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중 심제가 그러한 ‘혁명’의 원인이므로 같은 제도를 가진 대한민국도 의원내각 제로 개헌해야 한다고 반복하여 주장하였다. 이때의 혁명은 4·19를 긍정적 의미로 표현할 때의 반독재혁명, 민주혁명과는 뉘앙스가 다른 내란이나 쿠 데타로서의 혁명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언 론에서 일상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결국 1950~60년대 후진국의 쿠데타 와 형식적으로 유사한 5·16을 한국 사회에서 혁명으로 납득하는 데 기여했 다.24

 

   21 유재흥(1994), 『격동의 세월』, 서울: 을유문화사, p. 381.

   22 조효원의 전화를 실제로 받은 인물이 김운용인데 조효원이 송요찬과 통화했다고 착각했 다. 김운용(2012).

   23 콜론 어쏘시에이츠(1960), 「콜론·어쏘시에이츠 보고서: 미국의 대아세아정책」, 『사상계』 1월, 사상계사, p. 127.

   24 변성호(2025), 「1950년대의 혁명 담론: 한국전쟁 이후부터 4.19 이전까지」, 『정치사상연 구』, 제31집 1호, 한국정치사상학회, pp. 109-119.

 

3. 장면 정부의 몰락과 쿠데타의 기원

 

3.1. 비혁명 정권으로서 장면 정부

 

장면 내각은 4·19 ‘혁명’에 의해 탄생했지만 혁명 정부는 아니었다. 4월혁명의 요구를 많이 수용하려고 했지만 보수 정당으로서의 근본적 한계 와 더불어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또한 창당 이후 이어진 구파와 신파의 갈등은 제2공화국의 형성 과정에서 가중 되어 민주당과 신민당의 물리적 분리로 이어졌다. 민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 이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5개 항목의 선거공약을 확정했다.25

“사월혁명의 완성”을 첫머리에 놓았지만 이하 공약 들은 혁명 공약이라기보다 개혁 공약이었다. 장면은 1960년 7월 14일 서울 의 민주당 민·참의원 후보 합동강연회에서 “이정권을 물리친 4월혁명 학도 들의 피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민주당은 모든 부패를 제거하고 혁신적인 책 임정치 구현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확언하였다.26

장면이 제2공화국의 국무 총리로 결정된 이후의 기자회견, 국회에서의 시정연설 등에는 4월혁명 계 승, ‘혁명정신’에 입각한 정책 실천 의지가 언급되지만 장면 정부의 정책이 혁명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혁명의 뒤치닥거리”를 하거나, 혁명과 업의 완수를 특별법 제정을 통해 처리한다는 입장을 보였다.27

 

     25 「4월혁명을 완성」, 『조선일보』 1960. 6. 25(조간).

     26 「4월혁명에 보답」, 『경향신문』, 1960. 7. 14(조간).

     27 「내주 초까지 강력내각 편성」, 『동아일보』, 1960. 8. 20(석간).

 

1961년 민주당 선전부장이었던 김대중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에 대한 답을 혁명정부가 아니면서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민주당의 비극’ 에서 찾았다. 혁명과업의 완수는 “법과 현존 규제를 초월해서 일도양단 아 래 해치웠어야 하는”데, 이러한 “초법적인 혁명과업의 수행은 혁명의 주체 세력에 의해서 구성된 혁명정권만이 강행할 수 있는 권위와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1960년 7월 29일 총선이라는 일반적인 수권 절차를 거친 ‘비혁명 정권’이었다. 더구나 학생들로 간주할 수 있는 혁명주 체세력은 이승만이 하야한 후 기존 법질서를 옹호했고, 구정권이 임명한 허 정 과도정부를 그대로 신임했으므로 이에 이어지는 민주당 정부로서도 허 정의 과도정부와 마찬가지로 “비혁명적인 수법으로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했다는 논리이며 이를 비극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비극이 민주당의 것일망정 대한민국의 비극은 아니라고 보는데, 만약 혁명정권이 혁명적 방 법으로 혁명과업을 완수했다면 일시적으로 국민의 속이 시원했겠지만, 토 이기(튀르키예)처럼 새로운 독재 밑에서 신음했을 것이라며 현재의 비극을 차선으로 긍정했다.28

허정은 4·19를 혁명이 아닌 의거로 보았기에 비혁명 적인 방법을 선호했는데, 민주당 인사들은 4·19를 혁명으로 인정하면서도 민주당 정권은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보았다. 민주당 정권은 상황을 개선할 방안, “새로운 구상”을 일부 갖고 있었으 나 정책을 실천할 시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김대중은 ‘혁명’을 맛본 국 민이 과거와 다른 변화를 재촉함을 이해하면서도 정책이 실현되기 위한 시 간을 요구했다. 국민이 “모든 책임을 정부에게만 떠맡기는 경향”이 있으나 국민의 협력 없이는 국민이 원하는 생활 향상을 이룩할 수 없음을 지적했 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 서독, 일본의 부흥도 “국민들의 내핍(耐乏), 저 축, 근면의 눈물겨운 협력”이 있어서 가능했는데, 당시 한국인들은 양담배 를 피우고, 외래품을 선호하고, 돈만 있으면 낭비하며, 이승만 정권에서 익 숙해진 자포자기에서 온 타성에 익숙했다.29

 

     28 김대중(1961), 「민주당의 비극」, 『경향신문』, 1961. 2. 5.

     29 김대중(1960), 「민주당 선거공약과 총예산안」, 『인물계』 11월. 

 

민주당 정권의 새로운 정책, 개혁안이 있어도 국민의 협력 없이 이룩될 수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주 장이다. 5·16 이후와 비교한다면 민주당 정권은 혁명정권으로서의 권위가 부재한 상황에서 혁명의 후속 조치를 점진적으로 그러나 가능한 한 속도감 있게 진행하려고 했지만, 국민의 협력 없이는 목표 달성이 어려웠다. 국 민의 협력이라는 조건은 5·16 정권에서도 계속 요구하는 항목인데, 그들은 5·16이 혁명임을 국민에게 반복적으로 환기하고 주입함으로써 국민을 동 원하려고 했다. 민주당은 5·16 군사정권과 추구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 았지만, 김대중의 설명을 통해서도 국민 동원을 위한 담론의 호소력이 군사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음을 알 수 있다.

 

3.2. 군사 쿠데타의 기원

 

4·19 당시 이미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에서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이미 혁명이 일어나 포기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이미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국면에서 미국이 군부를 이용한 쿠데타 를 고려했고, 여기에 박정희도 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0

 

    30 홍석률(2006), 「5·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기억과 전망』 Vol.1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pp. 94-95. 

 

쿠데타 직후 주한 미국대사관과 유엔군사령관이 장면 정권을 옹호한 초기 대응을 볼 때 5·16을 미국이 전 정부 차원에서 부추긴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 만 5·16 혁명주체세력, 특히 박정희와 김종필의 좌익 경력 혐의는 끊임없 이 미국 측의 의혹과 재확인의 대상이었음에도 미국은 상대적으로 젊고 강 력한 군부 지도자의 등장을 환영했다. 민주주의의 외피를 유지하기만 하면 쿠데타 세력을 용인한 것인데, 그래서 박정희와 주요 측근들은 불가피하게 군정의 기한을 정하고 군에서 전역한 후 민간인으로서 정치의 세계에 참여 해야 했다. 콘론 보고서에서도 지적하는 바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대에 백 선엽, 정일권, 이형근 장군 등을 번갈아 육군참모총장에 기용하며 군내 계 파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군부의 특정 인물이 권력자로 부상하는 것을 방 지하였다. 1950년대의 한국군은 미국 원조의 주요 수혜 대상이며, 정치권과 결탁한 부패가 만연했다. 그러나 앞서 서술하였듯 4·19 국면에서 계엄군의 발포 자제로 시민들은 군에 환호했다. 4·19 이후 박정희, 김종필 등이 군 내부에서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整軍)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운동의 주도자들이 5·16의 주체 세력으로 변한 부분도 5·16의 정당성 혹은 5·16에 대한 기대에 기여한 것 으로 보인다.

특히 김종필은 4·19라는 시대적 변화 요구로 인해 군 내부의 변화, 즉 정군운동이 필요했고 이 운동의 실패가 쿠데타 혹은 그의 언어로 ‘혁명’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31

정군운동의 실패가 쿠데타로 이어지는 논리적 연계를 정당화하기에는 불충분하지만 4·19의 적자 중 하 나로서 5·16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쿠데타 세력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쿠데타는 1961년이 아닌 1960년에 일어날 수 있었다. 계획 차원에서는 1960년대 초부터 수차례 쿠데타 계획 이 박정희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1960년 3·15 부정선거 이전부터 박정희 는 장도영에게 ‘혁명’ 동참 여부를 타진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 다가 박정희 등은 3·15 부정선거의 여파를 확인하며 동년 5월 8일 ‘혁명’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하지만 4·19가 발생하며 군부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 다. 그러나 4·19 이후 정군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하극상 사태가 일어난 후 제2공화국의 정책이 제대로 펼쳐졌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른 시점부터 쿠데 타 계획이 재개되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해병대에서 단독으로 1961년 4월 15일 쿠데타를 계획한 바 있고 이후 육군의 ‘4·19 기념일 계획’과 육군 과 해병대가 합세한 ‘5·12 계획’이 무산된 이후 5월 16일에 쿠데타가 실행 되었다.32

 

    31 김종필(2016), 『김종필 증언론 1』, 서울: 와이즈베리, pp. 35-39.

    32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1963), 『한국군사혁명사 제1집(상)』, 서울: 국가재건최고회 의, pp. 205-232; 5·16혁명사편찬위원회(1962), 『5·16 혁명실기: 5. 군사혁명위원회』, 서 울: 5·16혁명사편찬위원회, p. 1. <5·16 혁명실기>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복사본을 열람 하였고, 자료 간행 연도는 연세대학교 소장 <혁명실기 요약본> 정보를 활용하여 1962년 으로 추정 및 표기하였다.

 

4. 5·16에 대한 혁명 담론

 

4.1. 쿠데타 세력의 혁명 담론

 

4·19는 대규모 시위의 날이지만 이 사건이 ‘혁명’으로 명명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5·16은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부터 ‘혁명’의 이름을 내걸었고, 모의 단계부터 주도자들은 ‘혁명’을 운운 하였다. 그런 면에서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의 혁명 담론에서 4·19 때 나 타난 것과 비견할 만한 미묘한 전환점을 논할 수 없다. 그들의 생각은 혁명 공약 6개 조항에 집약되었고, 5·16 초기 민간에서도 이 혁명 공약을 근거로 삼아 5·16의 혁명으로서의 성격을 평가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5·16은 선전을 위해 5월 16일 새벽부터 국가권력을 다 장악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주한 미대사관, 유엔사령관의 반대라는 비우호적인 국제정세와 더불어 쿠데타에 대한 군내의 반발도 무마해야 했 다.33

 

      33 쿠데타 세력의 공식 자료집에서도 쿠데타가 실패할 가능성이 상당했던 이틀 간의 긴장 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1963), pp. 242-265. 

 

5·16은 혁명의 명목상 수장인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조차 완전히 설득 하지 않은 채 시작된 쿠데타였다. 그래서 쿠데타가 완전히 성공했다고 판단 되기 전까지 그들은 혁명 공약 수준의 발언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혁명과 쿠데타의 구별, 그리고 반혁명 사건 등을 통해 그들의 혁명에 관한 생각과 담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5월 16일 남산의 방송국을 통해 처음 전달된 ‘혁명군’의 혁명 공약의 6개 조항에는 ‘혁명’이라는 말이 없다. ‘혁명 공약’이라는 이름도 없었다. 방 송 내용 중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거나,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라는 궐기의 이유를 통해 이들이 군사력을 이용한 쿠데타를 일으켰음을 인 지할 수 있다. 혁명 공약 중 실제로 행동과 정책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혁 명적인 과격한 조치로 보이는 것은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겠 다는 3항 정도였다.34

하지만 16일 새벽 서울 시내에 총소리가 났고 탱크 가 돌아다니며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함이 분명했다.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내로 쿠데타는 성공하였고, 5월 18일 오 전 육사 생도의 시가행진이 포함된 ‘혁명기념식’을 통해 혁명은 공식화 및 안정화되었다. 이 자리에서 장도영은 ‘무혈’혁명의 성격을 강조하였고, 여 섯 번째 공약대로 시급한 조치가 완료되면 군대로 복귀하겠다고 약속하였 다.35

1961년 5월 19일은 중요한 시점이었다. 장도영이 박정희를 대동하여 기자회견을 하였고, 반동과 ‘반혁명’ 세력인 혁신계를 단호히 조치하겠다 고 선언하였다. 실제로 큰 타격을 입게 될 혁신계가 용공, 친공 혐의가 있 는 ‘반혁명’으로 규정되며 ‘혁명’의 성격이 드러났다. 또 ‘군사혁명위원회’ 가 1963년 말까지 지속될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즉시 변경되었다. ‘혁명’의 최고 기구 명칭에서 혁명을 없앴다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다음 날 최고회의의 내각이 ‘혁명내각’이라고 언론에 발표되는 등 군사정권의 정책 은 곳곳에서 혁명을 포함하게 되지만 ‘혁명’을 국가기구의 이름에서 제외하 자는 것이 쿠데타 세력의 의도였다. ‘혁명정권’으로의 변경은 대외적 부담 이 될 수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를 갑자기 발표했다가 설득당해 하 루 만에 번복하였다.

윤보선이 하야하면 대통령이 없는 대한민국, 즉 실질 적으로 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혁명정권’을 자유우방국들이 재승인해 야 하는 국제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36

 

     34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1963), p. 236.

     35 「시청 앞서 혁명기념식 성대히 거행」, 『경향신문』 1961. 5. 18.(석간).

     36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1963), p. 270.

 

그래서 제2공화국 헌법하에서 실권이 거의 없는 대통령직이 존속된 상태에서 군사정권이 유지되었 고, 1962년 결국 윤보선이 물러난 후에는 박정희가 권한대행으로서 군사정 권의 헌법적 외형 혹은 합법성을 위태롭게 유지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 정권이라는 현실을 합리화하게 될 6월 6일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통해 제2공화국 헌법을 대부분 무시하면서 동시에 헌법을 유지하는 줄타기 를 시작했다. 1961년 7월 3일 호외를 통해 장도영 대신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음이 일반에 알려졌다.

7월 9일에 공개된 장도영이 포함된 반혁명 음 모 사건 때문이었다. 장도영이 혁명 세력 내부에서 파벌을 형성하고, 박정 희 등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는 상세한 설명도 덧붙었다.37

 

     37 「장도영 중장 등 반혁명음모사건」, 『동아일보』 1961. 7. 10.(석간). 

 

‘반혁명’ 사건 을 통해 5·16이라는 ‘혁명’의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후대에 해석되는 것처럼 쿠데타 세력 내부의 권력 투쟁, 박정희의 권력 공고화 과정 정도였 을 것이다. ‘혁명’이 지상목표라면 ‘반혁명’ 음모는 최악의 범죄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과 쿠데타라는 명칭의 문제는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 냐하면 단적으로 5·16이 발생한 직후 국내 4대 일간지는 1면 기사에서 예 외 없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발화의 주체가 주장하는 ‘(군사)혁명’과 사태의 객관적 묘사의 하나인 ‘쿠데타’를 기사에서 혼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쿠데타 성공이 확실시되었던 5월 18일이 지나자, 군이 검열하는 가운데 5·16을 쿠데타로 묘사하는 것 자체가 극도로 감소했 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에서 5월 19일 쿠데타가 포함된 기 사가 2건, 20일 1건에 불과하며 이후로도 같은 경향이 지속된다. 5·16에 비 하면 작은 에피소드인 ‘한국청년당’ 사건 주요 인사 3인은 5월 1일 제2공화 국에 대한 ‘쿠데타’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는데, 공교롭게 5월 18일에 모두 석방되었다.38

진짜 성공한 쿠데타 앞에서 민간인 수 명의 음모는 사소한 일이었음에도 그 때문에 일반에 ‘쿠데타’가 언급될 필요 자체를 없앤 조치 였다.

4월혁명의 경우 4·19냐 4·27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어느 쪽을 선 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다. 그러나 5·16은 거사의 당일로 사건이 명명됨이 당연하게 보였다. 하지만 쿠데타가 안정화되기 전까지 ‘5·16’이라 는 명칭이 일반에 굳어지지는 않았다. 신문을 통해 보면 17일부터 ‘5·16군 사혁명’, ‘5·16쿠데타’, ‘5·16혁명’이 차례로 등장한다. ‘5·16’은 쿠데타 세 력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한 언어라기보다, 민간 언론과 장도영으로 대표 되는 군부의 공식 발언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사용되었다. 17일에 언론에 ‘5·16군사혁명’, ‘5·16쿠데타’라는 표현이 나타났고,39 18일 신문에는 육사 생도의 행진을 다루는 기사 속에서 장도영의 발언으로서 ‘5·16군사혁명’이 등장했다.40

『최고회의보』 창간호가 1961년 8월에 발간될 때 ‘혁명’, ‘5·16 혁명’, ‘5·16 군사혁명’ 등의 표현이 모두 사용되었고, 박정희는 해당 호에 실린 글에서 ‘혁명’, ‘군사혁명’을 모두 사용하였지만 5·16이라는 수식어는 쓰지 않았다.41

 

      38 「한국청년당 세 간부 송청」, 『조선일보』 1961. 5. 1.; 「세 명 모두 석방」, 『동아일보』 1961. 5. 18.(석간).

      39 「시경산하 전경찰관 출근」, 『경향신문』 1961. 5. 17.(석간); 「외신이 본 쿠데타」, 『한국일 보』 1961. 5. 17.(조간).   

      40 「지축 흔드는 애국의 우렁찬 함성」, 『한국일보』 1961. 5. 18.(석간). 41 박정희(1961), 「혁명정부의 사명」, 『최고회의보』, 창간호, 국가재건최고회의, pp. 4-5.

 

쿠데타 세력의 인식 속에서 5·16은 처음부터 확고하게 ‘혁 명’이었고, 이 혁명을 어떻게 수식할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5·16보다 약 1년 전에 발생한 4·19가 한국 사회에서 이미 ‘혁명’의 이 름을 독차지한 상황에서 쿠데타인 5·16을 어떻게 혁명으로 위치시킬 것이 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1963년 박정희의 이름으로 출간된 『국가 와 혁명과 나』에는 4·19와 5·16의 관계가 잘 정리되어 있다.

박정희에게 4·19와 5·16은 “두 차례의 혁명”이었다.

그는 정치와 무관하여야 할 학생 과 군대가 혁명을 주도한 것은 일으킬 만한 다른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혁명이 없었다면 나라는 망했다고 본다.42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 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 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고, 박정희가 “기회 있을 때마다 5·16군사혁명이 4·19학생혁명의 연장이라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 다. 그에게 구정객(舊政客)은 모두 청산의 대상이었다. 그는 구정객을 외적 에 비견할 “내적”으로 보고, 그들을 목표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 는 4·19 이전 군에서 ‘혁명’을 도모했음을 밝히고, 다행스럽게 “민권혁명” 이 일어나서 일단 포기했지만 결국 5·16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그래 서 5·16의 목표가 “두말할 것 없이 4·19혁명을 계승하고, 경제, 정치, 사회 일반문화의 향상과 신민족 세력을 배양하는 데 있었다”고 정리한다.43

남겨진 기록을 보건대 1961년 5월부터 박정희의 그런 입장이 확립되지 는 않았다. 5월 18일 신문의 육사 생도 시가행진 기사에서 4·19와 5·16의 연속성이 언급된 정도였다.44

4·19는 ‘의거’, ‘학생의거’, ‘혁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렸다. 5·16이 한국 역사에서 유일하고, 최후이며 성공한 혁명 이 되기 위해서 4·19가 혁명이 아닐 필요가 있었다.45

 

     42 박정희(1963), 『국가와 혁명과 나』, 서울: 향문사, p. 33.

    43 박정희(1963). pp. 74-81.

    44 “사관생들은 (…) 이번 혁명이 4.19의 연장이라고 전제하고”, 「조국수호를 다시 다짐: 혁 명의 젊은 뒷받침들!」, 『경향신문』 1961. 5. 18.(석간). 실제 육사 대표의 결의문에서는 4·19와 5·16의 연속성이 명확하게 강조되지 않고 암시된 정도였다. 5.16혁명사편찬위원 회(1962), p. 124.

    45 1963년 시행된 개정 헌법 전문에서 4·19가 의거, 5·16이 혁명으로 규정된 것이 대표적이 라 하겠다. 

 

다른 한편 4·19로 한 국 역사에서 근대적 혁명이 시작되었지만 기성 정치인이 ‘혁명의 뒤처리’를 못한 상태에서 5·16이 혁명의 완결을 짓는다는 논리 속에서 4·19는 혁명이 될 수도 있었다.

박정희는 1961년 6월 26일 대구의 재건국민운동 행사에 참여하여 격려사를 하며 “5·16군사혁명은 4·19혁명의 연장”46 혹은 “4월혁명 의 연장인 5·16혁명”47이라고 발언하며 두 사건을 모두 ‘혁명’으로 파악했 다.

 

    46 「구정권은 용공세력만 용인」, 『경향신문』 1961. 6 .27(조간).

    47 「민주당 정부 일부 요인 오열과 접선」, 『동아일보』 1961. 6. 27(석간). 

 

이어서 보겠지만 대학생이 더 이른 시기에 두 사건을 연결된 두 혁명으 로 인식하였다.

 

4.2. 대학생

 

기존 연구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5·16 직전에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5·16과 같은 군부 독재를 원했거나 예견하는 듯한 글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리고 매우 직접적으로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한 서울 시내 대학교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육사(5월 18일), 공사(5월 19일), 부산에서 해사 (5월 20일) 생도들이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하는 동안 5월 19일 성 균관대, 경희대 학생들도 행진하며 ‘혁명’을 지지하였다.48

 

      48 당시 언론에 따르면 대학생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민간인 주도의 ‘혁명’ 지지 데 모가 있었다. 임대식의 연구에서 육사보다 앞선 “여러 대학”의 쿠데타 지지 데모가 언급 되었지만 18일 육사에 이어 19일 두 대학의 시가행진이 있었다. 임대식(2003), p. 312. 

 

사관생도 행진의 경우는 쿠데타 세력의 직접적인 요청에 의해 성사되었지만, 일반 대학에서 시가행진을 한 이유는 4·19 이후 형성된 ‘혁명’ 담론의 차원에서 찾아야 한 다. 당시 대학생은 스스로를 4·19의 ‘혁명주체세력’으로 간주했으나 혁명을 주도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구시대의 정치인도 ‘혁명’을 진전시키고 완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군인이 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혁명을 완수하기를 기 대하였다.

시가행진에 참여한 학생 규모는 성균관대 학생 800~2,000여 명, 경희 대 학생 500~3,000여 명이었다.

플래카드의 내용은 성균관대의 경우 “① 5·16혁명은 4·19의 연장이다, ② 깨끗한 마음 깨끗한 정치, ③ 뭉쳐서 닦아 가자 새나라 새터전”, 경희대의 경우 “① 군사혁명은 4·19의 연장이다, ② 자유평화의 수호자 혁명군 만세, ③ 부패무능한 기성정책을 즉각 제거하라” 였다.49

4·19 당시 서울 주요 대학 상당수가 시위에 참여했던 것과 큰 차이 가 있지만 사건 발생 3일 만에 5·16을 ‘혁명’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 지한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무시할 수 없다. 그들 은 4월혁명의 주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 진을 함으로써 혁명과업완수를 위하여 용약매진하고 있는 대한학도의 모 습을 전 시민에게 보여주었다”는 대학생의 인식은 그들이 5·16이라는 ‘혁 명’과 그들이 주체였던 4·19 ‘혁명’이 동일 선상에 있다고 여겼음을 보여 준다.50

시가 행진은 안 했더라도 1961년 5월 중하순에 발행된 서울의 주요 대 학의 학보에서 당시 대학생 혹은 교수가 5·16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글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51

 

       49 「5.16은 4.19의 연장」, 『조선일보』 1961. 5. 20(조간).

       50 경희대 학보의 내용이다. 「군사혁명지지‘데모’」, 『대학주보』, 1961. 5. 31.

       51 가장 적극적인 지지의 글은 중앙대학교 임영신 총장의 선언서였다. 임영신(1961), 「임영 신 총장 29일 시국특별선언서」, 『중대신문』 1961. 6. 1.

 

기존 연구에서 소개가 안 된 자료를 통해 상 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주간성대』 5월 23일 자에는 19일에 성균관대 학생이 5·16 지지 행진 을 한 내용을 비롯하여 5·16 관련 글이 다수 실렸다.

19일의 「선언문 요지」 는

“장했다! 용감했다! 대한의 국군장병! 이제 침묵을 깨뜨리고 국군은 봉 기했다. 수술은 시작되었다. (…) 우리 학도들은 4·19혁명이 5·16혁명으로 국민과 자유 우방 국민이 원하는 결실을 맺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서,

‘혁명’이 병든 국가와 민족에 대한 불가피한 ‘수술’이라는 쿠데타 세력 의 반복되는 비유가 포함되었고, 4·19와 5·16을 모두 ‘혁명’으로 인식하면 서 5·16이 미완성 상태였던 4·19혁명의 결실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같 은 지면의 「동포에게 보내는 멧세지」에는 쿠데타 세력과 다르게 기성정치인은 혁명 완수에 대한 성의와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혁명군’에 보내는 메시지는 쿠데타 세력에 대한 ‘혁명군’ 지칭을 포함 하여 “젊은 학도들”의 강력한 지지가 담겨있었다.52

사설에서도 유사한 정 서가 반복되었다. 특히 “절차의 합법성 여부라는 공식론보다도 국가를 누란 의 위기에서 구출했다는 역사적 현실”에 감사한다며 쿠데타의 불법성을 국 가의 위기 앞에서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4월혁명의 선봉이었던 대학생 들”이 “혁명뒷처리를 부탁한 기성정치인에게 완전히 배신을 당”했다며 기 성세대 전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는 당대 대학생에게서 많이 나타나 는 인식이었다. 『주간성대』의 같은 날 1면의 「명륜춘추」에는 쿠데타와 혁명에 대한 대 학생의 인식이 드러난다. 이 글은 우선 1961년 5월 한국의 현실이 “절박했” 음을 농촌, 통일문제, 외자도입 등의 분야로 나눠 서술했다. 이후 익명인 필 자는 “20세기 후반을 가리켜 ‘쿠데타의 시대’라 할 만큼 세계사가 조성되고 있는 때에 우리의 세대는 ‘쿠데타’의 현상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쿠데타’ 는 혁명이다.”라며 1950~60년대 세계 각지에서 쿠데타가 빈발한 국제적 조 류 가운데 한국에서도 ‘쿠데타’가 전면적으로 일어났음을 확인하였다. 그리 고 별다른 설명 없이 쿠데타를 혁명과 동일시하였다. 이렇게만 보면 상당히 문제 있는 인식일 수 있는데 곧바로 이어진 내용을 통해 대학생의 지지가 무조건적이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허나 그 성장이 문제다. ‘쿠데타’의 타락 은 바로 ‘반혁명’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 세대는 4월의 구정(旧政)독소 를 수술했으니만큼 5월의 재수술을 거시(巨視)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서 4·19는 대학생이 주도한 ‘수술’로서의 ‘혁명’이었는데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실패했고, 5·16은 ‘재수술’하는 ‘혁명’인데 이제 시작이니만큼 4·19처 럼 미완성 혹은 실패한 ‘혁명’이 될지가 앞으로의 장기적 행보에 달렸다는 대학생의 인식을 확연히 보게 된다.53

 

    52 「선언문 요지」, 『주간성대』 1961. 5. 23., p. 3. 

    53 「명륜춘추」, 『주간성대』 1961. 5. 23., p. 1. 

 

5·16이 4·19의 연장이자 완성이라는  인식은 군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군부에서 4·19와 5·16의 연속성을 선 전 구호처럼 강조하기 전부터 대학생들은 4·19를 한국에서 일어난 근대 적 의미의 ‘혁명’으로 사유했고, 그 혁명의 좌절에 절망하던 와중에 발생한 5·16을 ‘혁명’의 계보에 포함했다.54

 

      54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의 1961년 5~6월 발행분에는 “4·19의 거사 뒤에 수습의 힘이 없었던 안타까움이 이제 ‘밀리타리즘’의 억센 힘에 기대본 셈”이라는 평가를 비롯하여 4·19와 5·16을 일련의 혁명 과정으로 인식하는 여러 글이 있다. 

 

5·16이 4·19에서 이어지는 혁명이라는 사유가 특히 대학에서 나타난 이유는 1961년 4월 4·19 1주년을 맞이하여 정부 차원의 행사도 있었거니 와 각 대학에서 1주년 행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자체 학보에서 대대적으로 4·19를 평가하는 글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4·19는 ‘젊은 사자’, ‘성난 사자’인 대학생의 ‘피’를 통해 성공한 혁명인데 허정 과도정권과 민주당 정 권 모두 제대로 혁명과업을 완수하지 못했고 오히려 못난 모습만 보여줬다 는 공통된 인식이 대학생층에 만연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5·16이 ‘혁명’을 내걸고 대학생을 비롯한 국민의 주된 비난 대상인 기성 정치인을 권력으로 부터 몰아낸 것이 대학생에게 속이 시원한 처사이자 마치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하게 만든 4·19와 동일한 결과를 낳은 ‘혁명’으로 이해되었다. 위에서 나타났듯 4·19가 장기적으로 성공한 혁명이 못 되었기 때문에 5·16이 혁명 으로서 성공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4·19의 연 장인 이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왜냐하면 군부는 사태를 수습하고 곧 군으 로 돌아간다고 하였으므로 그 약속을 신뢰하는 가운데, 대학생을 포함한 국 민 전체가 군의 지도하에 새 ‘혁명’을 지지하고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1961년 8월 6일 인쇄된 연세대학교 교내 잡지의 설문조사에서 5·16혁 명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으로, “와야만 할 것이 왔다고 할 수 있다”, “만사가 「사필귀정」이니 권력에 의한 기만과 부패, 무능은 결코오래 가지 못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는 과단성 있는 용기가 필요 하다고 새삼스럽게 느꼈어요”, “한국의 민주주의의 젊음이 쉴 새 없이 움트 고 있다는 사실”, “새 역사는 정의와 양심의 투철한 정신과 과감한 행동력 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국민선도의 입장에 있는 정 치가들은 부패하지 않아야 될 뿐만 아니라 능력이 없으면 정치계에서 스스 로 은퇴해야 한다”, “용기와 결단성 그리고 참신”, “허영과 허탈에 싸여서 자 기를 잊고 헤매었던 생활을 청산하고 본래의 우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감하고 신속 정확한 행동의 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 민을 위한 정부만이 길이길이 존속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재인식했다” 등이 제출되었다.55

해석하기 애매한 대목도 있지만 최소한 5·16 쿠데타 세력에 비판적인 입장은 없었다. 위에 답변을 통해 기존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함 께 그들과 대조되는 군인의 과감함, 젊음, 새로움에 대한 대학생들의 기대 가 지배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잡지의 다른 글은 혁명 공약 6조를 근 거로 삼아 5·16이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질적 변환이 아니라 4월혁명의 연 장이며 계승”이라고 평가하였다.56 같은 시기인 1961년 8월에 발간된 고려대학교 교내 잡지 『고대문화』에 실린 글들도 마찬가지로 5·16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고, 무너진 장면 정 권에게 동정적이지 않았다. 권두언 글에는 마치 4·19, 아니 4·18의 주역인 고려대학생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한 태도가 나타난다.

“그저 엉겁결에 내려 써진 동의서, 성명 삐-라의 글귀 몇줄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내려가 보 노라면 아아, 그것은 얼마나 가소로운 헛수고였던가!”57

 

     55 편집부(1961), 「앙케트」, 『화백』, 제5집,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pp. 142-145.

     56 이은호(1961), 「아세아의 제군사혁명과 민주주의의 고민」,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p. 84.

     57 윤장근(1961), 「시대와 사회의 주인된 사명」, 『고대문화』 제3집, 고려대학교고대문화편 집위원회, pp. 12-13.

 

이 글은 기존 권위 와 지식에 대한 강력한 거부와 함께 젊은이들이 시대와 사회가 나의 것이 라는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함을 강변하는 추상적인 논조가 이어진다.

시기적 근접성 때문에 5·16이라는 큰 사건을 언급하지 않기가 오히려 어려운데 이 글을 포함하여 이 잡지의 대부분 글이 내용상 5·16을 의식하고 있고 작 성되었음에도 직접적으로 5·16을 언급한 경우가 별로 없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과거를 돌아보거나 아쉬워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자세를 다짐한다는 면에서는 5·16의 추세에 부합하는 논조는 분명히 드러난다.

 

4.3. 언론과 지식인

 

앞서 다뤘던 것처럼 5·16 직후 주요 일간지들은 사태를 객관적으로는 ‘쿠데타’로 그러나 쿠데타 주도세력의 주장을 전달할 때는 ‘혁명’으로 표현 했다. 검열의 효과로 혹은 현실이 된 성공한 쿠데타 이후 사태를 ‘혁명’으로 납득하기 위해서 일간지에서 5·16은 주로 ‘혁명’으로 묘사되었다.

5월 19일 『한국일보』에는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혁명으로 해석하는 전형적인 방식의 기사가 등장했다.

 

그후 나셀은 쿠데타로 실머리를 만든 에집트 혁명을 과감한 민족혁명에 로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늘날 후진지역의 쿠데타는 새로운 혁 명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 비정상적인 방법인 무력에 의하지 않고는 부패부정을 숙정할 수 없을 때에는 왕왕이 사용되는 것을 본다. (…) 그러 나 구정의 독소를 완전히 빼고 양심적이요 유능한 민주주의 지도자에게 정 권을 이양하고 쿠데타 군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면 국정발전에 적지않게 플러스가 된다. 이른바 쿠데타는 병든 나라에는 신약(神藥)에 의한 점진적 안정요법이 아니라 수술과 같은 방법이다. 수술 자체로는 이렇다 할 가치판단이 서지 않으며 결국은 그 효과가 문제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쿠데타가 혁명에까 지 성장하느냐 아니면 반혁명에로 타락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결국 민중의 지지와 서정쇄신을 통해서 얼마나 속히 맑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느냐가 문제일 것이다.58

 

5·16이 실제로 주요하게 참고하였던 사례인 1950년대 나세르 주도의 이집트 ‘혁명’을 통해 쿠데타로 시작된 사건이 ‘민족혁명’으로 전화될 수 있 다는 주장과 함께 후진국이라는 특수 사정에서 쿠데타가 ‘혁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합리화도 포함된 기사다. 앞서 소개한 『주간성대』의 글이 이 기사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보이는데, 쿠데타가 혁명이 될 수도 있고 ‘반혁명’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인식도 중요하다. 기사 전체가 5·16을 ‘혁명’으로서 합리화하는 글로 보이기도 하지만 ‘혁명’의 성공 여부 는 민주주의의 성숙, 기존 사회악의 제거, 민중의 지지 등 다양한 분야의 성 과를 확인해 봐야 할 문제였다. 이 기사는 아직 유보적인 입장에 서 있었고, 5·16 불과 3일 후임을 감안하면 이해할 만한 태도였다.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가 5·16 직후의 1961년 6월호 「권두언」 코너 에서 5·16을 지지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4·19 이후 민주당 정권의 시기가 완전히 실패하여 “누란의 위기”를 초래하였고, “민족적 활로를 타개 하기 위하여 최후수단”으로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고 했다. 장면 정권 은 경제발전을 우선순위로 내세웠지만 장준하는 제2공화국에서 “국민경제 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는 소수자의 수중으로만 집중”되었다며 경제정책의 실패를 질타했다. 그리고 앞서 대학 생의 인식과 유사하게 5·16이 4·19의 계승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4·19는 “민주주의혁명”이고, 5·16은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는 것이다. 장준하는 장면 정부가 실패한 4·19혁명 과업의 완수를 위해 “새로운 혁명세력” 즉 군부의 “5·16혁명”이 일어났다고 당위성을 부여했다.59

 

     58 S, 「오늘의 세계: 쿠데타의 의의와 윤리」, 『한국일보』 1961. 5. 19(조간).

    59 조의설도 “이제 우리 민족은 4월혁명의 불철저, 미완성의 혁명과업을 5월혁명에 이르러 완결을 지었다”며 유사한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쿠데타의 비합법성, 비민주주의적 성격  을 ‘혁명=비약성=후진국가에 필요’ 식의 논리로 정당화하였다. 조의설(1961), 「5월혁명 의 역사적 의의」, 『연세춘추』 252호, p.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준하가 쿠데타 세력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고 5·16이 4·19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점에 주의해야 한다. 장면 정권하의 혼란상은 장준하가 보기에 국가질서가 무너질 만한 수준이 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인 민족을 일단 살려내기 위한 군부의 ‘혁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5·16혁명은 일시적인 조치여야 하 며, 군부가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는 정책을 펼치지 말고 4·19혁명의 계승 에 걸맞는 노선을 지향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글의 후반부에서 그는 혁명정권이 권력을 남용하지 말고, “시급히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최단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라고 주문했다.60

그 는 1961년 7월에도 유사하게 5·16을 ‘혁명’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도 민정으로의 조속 복귀를 재차 군부에 주문하였다.61

원래는 없다가 추가 되어 발표된 민정 이양의 혁명 공약 조항은 장준하가 5·16 쿠데타 세력을 처음에 신용했던 주요한 이유로 보인다.

함석헌은 이른 시기에 5·16을 비판한 인물이었다.62

 

    60 장준하(1961), 「[권두언]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 『사상계』 6월, 사상계사, pp. 34-35.

    61 장준하(1961), 「[권두언]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 『사 상계』 7월, 사상계사, pp. 34-35.   

    62 그런데 흥미롭게도 함석헌은 1961년 8월에 발행된 『최고회의보』에 「민족개조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싣는다. 

 

그는 5·16이라는 ‘혁명’에 대해 말이 없음을 걱정했다. 신문과 라디오에 소감 비평이 전혀 없 고, 유언비어도 없다는 것이다.

국민에게는 배출구가 필요하며 그것이 언 론과 유언비어의 역할임에도 사람들이 총칼을 보고 겁을 내고 침묵하는 것 을 우려했다. 그는 “군사혁명은 먼젓번 학생혁명”보다 수준이 낮아졌다고 도 평가했다. 그는 혁명의 주체는 사람이고 민중인데, 학생과 군인은 사람 이 아니라고 보았다. 학생은 잎이고 군인은 꽃이라는 비유를 통해 잎은 아 직 나무가 못 되었고 꽃은 잠깐 피었다가 떨어져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함석헌이 혁명을 수술에 비유해 빨리 종료된 후 일상성으로의 복귀 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 것과 연결하면 그의 글은 5·16 자체의 수준이 낮음을 비판함은 물론 5·16 ‘군사혁명’이 빠르게 종료되어 민주주의 정부 가 수립되어야 함을 주장한 셈이다.63

또한 그가 5·16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혁명’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음은 주의와 추가적인 평가를 요청한다.

1961년 6월 한기식64은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혁명을 분석한 글을 남겼 다. 그는 ‘4월혁명’, ‘학생혁명’에 이어 자칭 ‘군사혁명’이 일어나 혁명 개념 에 대한 논란이 생겼고 일반인들은 단순히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자 신은 사회과학자로서 엄밀히 분석하겠다고 주장했다.65

그는 서구의 혁명 개념과 기준에서 ‘4월혁명’과 ‘5월혁명’은 엄격한 의미의 혁명이라 볼 수 없 고 개혁이나 정변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이 혁명이라 부 른 요인을 그는 한국 언론의 과장과 개혁이라는 개념에 만족하지 못하는 시민의 혁명에 대한 욕구 등으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한국적 특수성의 차원 에서 보면 ‘4월혁명’이 전통사회에서 탈피하는 “역사상의 혁명적 계기”였기 에 혁명으로 인식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5월군사혁명’은 기존 사회질 서의 근본적 변혁을 꾀하지 않았고 혁명의 위기에서 기존 가치체제를 보존 할 목적으로 나타난 ‘질서독재’의 한 유형이기 때문에 오히려 혁명의 반대, 즉 현재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듯이 5·16을 4월혁명의 부정으로 볼 수도 있 었다.66

 

  63 함석헌(1961), 「5.16을 어떻게 볼까?」, 『사상계』 7월, 사상계사, pp. 37-47.

  64 필명 한승조로 알려져 있으며, 후일 고려대학교 교수가 된다.

  65 한기식(1961), 「혁명사회학적 견지에서 본 오월군사혁명의 위치」, 『고대문화』 3호, 고려 대학교고대문화편집위원회, p. 14.

   66 한기식(1961), pp. 15-17.

 

그도 박수를 보내며 5·16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임시 독재’와 ‘과도조치’임을 믿었다.

그는 4·19 이후 일련의 글을 통해 혁명 이 후에 독재가 등장한다거나 후진사회에서 잠정적인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이미 발표하였다. 그의 사회과학적, 정치학적 이론에서는 4·19 이후 5·16이 “필연적 귀결점”이었다. “5월혁명은 4월혁명의 전진과정이오 그 통 과점이라는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5·16 이전의 맥락이 없 다면 5·16은 그 자체로 혁명이 될 수 없다고도 단언했다. 이후 그의 혁명관 이 드러나는데, 전근대에서 현대로 진행되는 역사 과정에서 세계의 국가들 은 ‘혁명독재’를 겪어야만 했다는 시각이다.

그는 프랑스의 자코뱅과 나폴 레옹, 영국의 크롬웰, 러시아의 공산당 독재는 물론 독일, 이탈리아, 일본, 중국, 튀르키예, 이집트 등을 사례로 열거하였다.

그는 직접적으로 한국현 대화과정이 한국혁명으로 환언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67

혁명은 전근대 에서 근대 혹은 현대로의 비약이고 그 과정에서 특정 세력의 독재는 불가 피했다.68

그는 독재가 혁명 이후에 나타난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으며 그의 독재에 대한 관념은 특히 고대 로마의 독재관, 즉 한 사회가 위급한 상황일 때 일시적으로 등장하여 권력을 독점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단시일 내에 원 래 자리로 복귀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69

그러므로 그는 군부가 2년을 기한으로 한국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군에 복귀한다면 서구 전 통의 ‘독재’ 개념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상계』 1961년 8월호의 좌담회 글70이나 동년 11월호 신일철의 글71 은 모두 5·16이 혁명으로서 4·19의 연장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가 담겨있 다.

 

    67 한기식(1961), pp. 17-18.

   68 그의 혁명 4단계론은 호퍼의 이론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Rex D. Hopper(1950), “The Revolutionary Process: A Frame of Reference for the Study of Revolutionary Movements,” Social Forces 28(3), pp. 270-279. 69 한기식(1960), 「독재정치의 개념」, 『고대신문』, 250호.

   70 양호민, 박준규, 서태원, 신상초, 엄민영(1961), 「기성정치인의 솔직한 발언」, 『사상계』 8월, 사상계사.

   71 신일철(1961), 「소리없는 혁명」, 『사상계』 11월, 사상계사.

 

군부가 권력을 독점했다고 하여 위로부터의 강요만으로 혁명이 완수될 수는 없고, ‘국민혁명’이나 민중이 성장하여 주체가 되는 ‘소리없는 혁명’으 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72

 

    72 ‘소리나는 혁명’은 쿠데타를 지칭한다.

 

제대로 된 혁명에 강한 권력, 주체세 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요소일 뿐 국민 전체의 수용, 자각, 성장, 참여가 동반되어야 함은 당연했다.

그리고 1961년 말에 그렇게 될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5·16의 ‘혁명’으로서 성격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한국의 문제는 당시에 흔히 장기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서, 단지 해방 후만이 아니라 조선 시대 당쟁, 더 길게는 한국 역사 전체에 걸친 고질병으로 설명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2년의 군정 기간으로 교정하기에 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5. 결론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대규모 시위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계 엄군은 시위 군중을 유혈 진압하거나 1950~60년대 유행과 같았던 군부 쿠 데타를 실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계엄군은 발포를 극도로 자제하였고, 시위대와 하나가 된 듯한 여러 장면을 연출하였다. 5·16 쿠데타 이후 한국 인들의 저항이 없었던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만, 4월혁명 절정 국면 군의 처신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을 시민들이 신뢰하게 된 하나의 근거였다.

4·19 무렵의 군대는 완전무결한 집단이 아니었다. 1950년대 미국의 한국 원조가 상당 부분 군대에 할당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정치권과 연결된 비리 의 온상이었다.

4·19 직전인 1960년 4월 9일에도 유류 부정처분 혐의로 양국진 중장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73

 

      73 「양국진중장 구속」, 『조선일보』, 1960. 4. 9(석간). 

 

군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도 적극 가담하여, 군내 선거 부정의 핵심인 송요찬은 4월혁명 기간 계엄사령관으로서 국민의 큰 지지를 받았음에도 박정희의 사퇴 요구를 받아들였다.

송요찬은 참모총장이 되면서 1959년부터 정군을 추진했고74 4·19 후 계엄 군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나 그 자신이 정치권력의 요구에 따라 부정선거를 지휘했다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 내 개혁의 신세력으로서 군대의 정당성은 애매한 문제였다.

그래서 4·19 후 군에서 벌어진 정군운 동을 주도한 박정희와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생은 부패하지 않았거나 부패할 지위에 있지 않은 군인 장교로서75 군의 부패 이미지를 없애는 데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5·16 쿠데타의 성공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 타 세력이 공식적으로 밝혔듯이 쿠데타 계획 자체는 4·19 전부터 존재했 다.

그러나 4·19 후의 혁명적 분위기가 이들 5·16 ‘혁명 주체세력’의 정군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했고,76 그들의 또 다른 ‘혁명’인 ‘군사혁명’의 성공에 기여했다.

 

    74 「과감한 숙군 계속」, 『경향신문』, 1959. 4. 19(조간).

    75 박정희는 남한 출신이라 1950년대 군내 양대 파벌인 평안도파와 함경도파에 속하지 않 아서 인사상의 특혜와 돈을 제공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청렴한 장교로서 소장 장교들의 신임을 얻었다. 홍석률(2001),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pp. 326-327.

   76 홍석률(2001), pp. 327-328.

 

쿠데타를 실행한 군부 세력의 첫 대외 메시지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수 립과 혁명 공약이었다.

갑작스러운 군부 쿠데타에 국민 다수는 사태를 관 망하였고, 굳이 장면 정권 수호를 위해 나서지는 않았다. 쿠데타 성공 이후 각 대학에서는 5·16이 4·19의 연장이라는 인식이 담긴 구호, 시가행진, 글 등이 이어졌다. 쿠데타는 ‘혁명’의 이름으로 개시되었지만, 5·16이 4·19라 는 ‘혁명’의 연장이라는 인식은 군부보다 민간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되었 다.

4·19 ‘혁명’의 주역인 대학생은 혁명을 더 이상 기존 정치인에게 맡길 수 없었다. 1960년 4월에 시작된 ‘혁명’을 제대로 이끌 세력이 없다는 4·19 직후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부득이하게 군부에서 그나마 깨끗하다는 평 가를 받을 만한 세력의 임시 집권은 환영을 받았다. 합법성의 한계를 초월  하고 시작된 쿠데타의 ‘혁명’ 정책은 4·19 이후 보수 정치권의 개혁 정책과 달랐다.

쿠데타는 불법적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던 후진국의 보편적 현상으로 해석되었고, 심지어 후진국이기에 쿠데타를 통한 비약이 필요하 다는 발상도 등장했다. 군부가 혁명 공약대로 민간에 정권을 신속히 이양할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1963년 정상적 정치가 재개되리라는 군부의 약속은 쿠데타가 일시적 현상이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쿠데타 세력의 한계는 분명했다.

아무리 장교 그룹이 미국 유학 경험 자가 많은 한국 사회 엘리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경험은 제한적이 었다.

특히 경제정책을 그들이 잘하기는 어려웠다.

쿠데타 정권은 많은 민 간의 전문가를 활용하고 포섭하였다. 4·19와 5·16의 일종의 융합은 이런 식으로도 일어났다. 물론 4·19로 촉발된 학생운동이라는 한국 사회의 주 요 흐름은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대대적인 저항에 나섰기 때문 에 4·19는 분기하였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혁명정권이 아닌 합법 정권 이 되었으므로 ‘혁명’의 게임은 갑자기 종료되었다. 그러나 후진성 극복을 위해 특히 경제성장에 주력하여 외형적 성장을 이룬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4·19로 서구적 ‘혁명’을 시작하여 후진성의 최악은 모면했다는 안도와 자 신감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제대로 된 혁명이 존재한 적 없었다는 평가와 ‘혁 명’의 이름이 붙은 사건이 너무 많다는 상반된 진실이 양립하고 있다.

이 글 은 5·16이 학문적으로 객관적인 ‘혁명’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1960년대 초반이라는 특수한 시기에 한국은 담론적 차원에서 ‘혁명의 시간’이었고, 그런 차원에서 당대인은 4·19에서 시작된 혁명이 5·16으로 연장되었다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쿠데타를 ‘혁명’으로 설명함에 곤란한 점이 없지 않다.

2024년 12월의 친위쿠데타를 옹호하고 서부지법 파괴 행 위를 ‘혁명’이라 주장하는 적지 않은 인구 집단이 한국에 존재하는 상황에 서 그러한 우려가 더 커질 수도 있다.

쿠데타는 객관적인 사태의 묘사인 경 우가 많고, 혁명은 많은 경우 담론적 논쟁의 영역이다.

5·16은 쿠데타임이 분명하나 초기 몇 년은 담론적으로 ‘혁명’으로 인정되었다.

그것은 1960년 초 한국의 절박한 상황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의 친위쿠데 타를 계기로 삼아 교훈의 차원에서라도 5·16 연구를 기피하지 말고 더 깊 이 파고들어야 한다.

 

 

참고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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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5·16은 군사 쿠데타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1960년대 초반에 많은 한국인에게 ‘혁 명’으로 인식되었다. 4월혁명 시기부터 군대는 ‘혁명’의 일부이자 공헌자로 이해되었으 며, 제2공화국의 실정이 국민에게 실망과 불만을 초래한 가운데 5·16이 일어났다. 처음 부터 ‘군사혁명’의 이름을 내걸었던 5·16에 대해 다수 대학생과 학자, 언론인, 일부 정치 인까지 이를 미완성 혁명인 4·19의 완결을 이룰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조속한 민 정 이양을 약속한 공약이 그러한 믿음을 형성시켰다. 5·16은 기왕의 ‘혁명’인 4·19의 혁 명 담론을 이용하여 5·16이 혁명이라는 주장을 강화할 수 있었다. 1961년 지식인층은 5·16을 혁명으로서 지지하였지만 혁명의 원인인 한국의 여러 고질적 문제를 군부가 단 기간에 해결하리라 순진하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1960년대 초의 5·16 혁명 담론은 위로 부터의 강압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4·19 이후 경제적 불만, 안보 위기 의식, 기성 정치 인에 대한 불신, 군에 대한 신뢰 등이 합쳐져 형성된 시대적 산물이었다.

주제어 5·16, 4·19, 혁명 담론, 쿠데타 

 

 

 

ABSTRACT

May 16 as an Extension of April 19 Discourse on the May 16 Coup as a Revolution in the Early 1960s 77

Byeon, Seong Ho(Post-doctoral Researcher,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and International Relations, Chosun Univerity)

The May 16 event was a military coup, yet it was perceived as a “revolution” by many Koreans in the early 1960s. Since the April Revolution, the military had been understood as a part of and a contributor to the ‘revolution’, and May 16 occurred amidst public disappointment and dissatisfaction caused by the misgovernance of the Second Republic. Regarding May 16, which had advocated the name “Military Revolution” from the beginning, many students, scholars, journalists, and even some politicians viewed it as an event that could complete the unfinished April 19 Revolution. Pledges promising a swift transition to civilian rule fostered such beliefs. May 16 was able to strengthen its claim as a revolution by utilizing the revolutionary discourse of the preceding April 19 “revolution”. While the intellectual class in 1961 supported May 16 as a revolution, they did not naively expect the military to resolve Korea’s various chronic problems in the short term. The discourse of the May 16 Revolution in the early 1960s cannot be judged solely by coercion from above; it was a product of the era, formed by a   combination of economic dissatisfaction after April 19, a sense of security crisis, distrust of established politicians, and trust in the military.

Keywords 5·16, 4·19, Discourse of Revolution, Coup d’État

 

 

 

원고 접수일: 2026년 1월 12일, 심사완료일: 2026년 2월 5일, 게재 확정일: 2026년 2월 8일 

인문논총 83권 1호(2026. 2. 28.), pp. 475~510 

15_일반_변성호_4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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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oi.org/10.17326/jhsnu.83.1.202602.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