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20세기의 에큐메니컬 선교적 교회론에서 민중 신학은 1970년 초기에 발생하였다.
그때 이후로 그것 은 현대적 한국의 개혁적 성향으로 사회적 민중운동과 함께 연계하면서 한국 사회에 널리 자리 잡게 되 었다. 그 운동은 민중 그들 자신이 통치하는 그룹에 빼앗긴 그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얻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 당시에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자들에 통치를 당하던 시대였다. - 박정희(1963년 12월~1979년 10월), 전두환(1980년 9월~1988년 2월), 노태우(1988년 3월~1993년 2월).
가능한 오랫동안 그들의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인권 운동, 사회 운동, 민주화 운동하는 인사들과 학생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살인하기도 하였다.
독재적인 군사 정권 아래에서는 모든 시민이 행동, 생 각, 여행에 제한을 받았고 미디어와 출판물 역시 통치를 받았다. 많은 보수주의적인 교회들이 통치하는 정부를 방어하고 지지하였을지라도 진보적인 교회들과 민중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교회들은 사회운동 가들과 고난 겪는 학생들을 도왔고 민중 신학을 한국교회와 사회 안으로 가져왔다. 이 연구는 하나님의 미션으로서 ‘한국교회는 민중의 고통 하는 장소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교회는 한국의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였는가,’ 그리고 ‘교회는 한국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무엇을 이바지 했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저들 분석과 함께 21세기의 한국교회는 어려운 문제들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탐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생산하고 있다—목회자들의 성 폭행과 추행, 교회 재산 횡령, 목회자 자녀 교회 세습, 기독교인들의 비도덕적 행동. 이들 문제와 함께 한국교회는 찰스 펜샴이 말하는—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하 여 교회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1
1Charles Fensham, Emerging from the Dark Age Ahead—The Future of the North American Church (Ontario, Canada: Novalis Publishing Inc., 2008), 20. 2
21세기 선교의 어려움을 경험하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나는 펜샴에 의한 저들 질문들을 가지고 민중 신학으로부터 어떤 해결점들을 논할 것이다. 그 단어 “민중”은 마가복음서의 본문 곳곳에서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 ὄχλος(Ochlos)를 가리킨다— 예수를 따랐던 가장 낮은 계급.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과 같은 민중 신학자들은 통치하는 독재자들과 그들의 군사적 계층들에 의해서 핍박받고 고난 받는 시민들을 민중이라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이 접근 방법과 관련하여 교회의 미션으로서 민중 신학을 점검할 것이고 20세기 에큐메니컬 미션의 교회론적 관 점에서 논증한 신학자들에 의한 해석학적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민중 신학과 관련하여 예수에 의해서 실행된 하나님의 미션의 기원을 보여 주는 본문들의 순서를 나 열하기 위하여 파트 1장은 마가 복음서에 나오는 그 단어 Ochlos를 민중으로서 이해하면서 민중 신학 의 교회 본성과 예수의 미션을 분석할 것이다. 고통으로서 “한”은 민중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 근본적이 기 때문에 파트 2장은 “한”에 대한 한국 문화의 이해와 한국교회의 미션 사이에 어떤 관계성을 탐구할 것이다.
어떻게 교회는 민중 신학을 실행할지를 분석하기 위하여 파트 3장은 교회가 민중의 고통을 덜 어 주고 참여하는 것에 의하여 어떻게 민중 신학을 도구로써 사용할 수 있는지를 점검할 것이다.
21세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미션으로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파트 4장은 20세기 미션의 교회론과 관련하 여 민중 신학들을 이용한 21세기 한국교회 방향들을 고찰할 것이다. 결론은 ‘한국교회는 과거 어디에서 왔으며,’ ‘현재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요약하고 제시할 것이다.
Ⅰ. 마가 복음서에서 민중으로서 Ochlos와 민중 신학의 관점에서 예수의 미션과 교회의 본성
한국에서 그 단어 ‘민중’의 기원은 조선왕조 시대(1392 C.E.~1910)에서 발생하였다. 조선의 사회는 ‘양반’은 낮은 계층을 일컫는 ‘상민’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귀족계급이었다. ‘상민’은 아무리 우수한 재능 과 능력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더 높은 ‘양반’의 계층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양반’과 ‘상민’의 경계는 한 사람이 태어났을 때 한 사람의 부모가 어느 계층에 속해 있느냐가 결정한다. 민중이 라고 불리는 상민의 계층들은 대개 사회의 노동자들을 일컬었다. 사전에 정의된 데로 그들은 농노들, 도 살업자들, 선원들, 구리세공인들, 양반의 노예들, 매춘부들로 구성된 사람들이며 양반에 의해 지배되었 다.2
민중 신학자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안병무는 민중의 의미는 마가 복음서에서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 ὄ χλος(Ochlos)와 같다고 단언한다.3
그들은 예수가 그의 선교에서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 리는 예수의 따르는 사람들과 민중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병무는 이 정 의를 이용하여 예수에 의해서 지상에서의 미션을 이어받은 교회가 어떻게 진정한 미션을 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역사적 예수의 활동들과 Ochlos의 관계를 연구하면, 우리는 ‘예수가 누구였는지,’ ‘그는 무 엇을 하였는지,’그리고 민중 신학에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미션(Missio Dei)과 관련하여 ‘어떻게 표 현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 예수로부터 지상에서의 선교를 알기 위하여, 마가복음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가복음서는 공관복음서 가운데 첫 번째로 쓰였으며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는 예수의 사역에 대하여 마가복음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역사적 예수와 관련하여 예수가 선택하고, 부르고, 돌보았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들, 아픈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었다. 안병무에 따르면, 마가는 그들을 “민중”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오클러스(Ochlos)”라고 불렀고 그 당시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환 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4
2이희승, 『국어 대사전』 (서울: 민중서림, 1992), 1328.
3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서울: 한길사, 1993), 169-177.
4안병무, 『역사와 민중』 (서울: 한길사, 1993), 34.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서 전통적인 셉튜어진트(Septuagint)에서 마가는 군중 을 라오스(laos—λαός) or 플레토스(plethos—πλῆθος) 보다는 오클로스(Ochlos)로 본다.
앞에서 언급 되었듯이 그 오클로스는 “낯선 사람들,” 그리고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라오스는 일반적인 “국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에 말하는 집합적인 “대중”을 말한다.5
그리고 플레토스는 “명사로서 와 형용사로서 많은 것”을 뜻한다.6
그 단어 오클로스 “Ochlos”는 마가복음서에서 36번 언급되지만 라 오스 “Laos”는 “셉튜아진트에서 200번, 구약성서를 제외하고는 언급되지 않는다.”7
마가복음서에서 그 단어 오클로스의 빈번한 사용을 고려하면 예수의 미션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 선택 한다—억압받는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과거의 한국 역사에서, 마가 복음서에서 표현된 오클로스(Ochlos)로서 민중은 동시대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착취되고 지배받는 대상들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원하는 것은 사회적 억압들과 제한들로부터 해방이고 구원이다. 민중 신학은 예수가 악한 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축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환자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논증한다. 그러므로 민중 신학의 관점으로부터 교회의 미션은 동시대의 고통당하는 사람 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주는 것이다. 이 사실은 함께 모이고 역사의 주 체로서 그들이 변두리부터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다.8
민중 신학의 선구자들 중의 한 명인 서남동은 역사적 예수의 사역 이해를 일본 신학자인 타가와(Tagawa)의 신학에 동의하면서 더 발전적으로 이해한 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내가 타가와(Tagawa)를 이해하는 첫 번째와 관련하여 그는 예수 자신보다도 오히려 마가의 신학 주제 가 민중이 되는 것을 인식한다.
두 번째로는 군중(crowd)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보다도 더 많이 오클로 스(Ochlos)라는 민중의 의미가 있다. 타가와의 관점에서는 그 그룹들은 통치하는 그룹에 의해 억압받았 고 나는 예수가 아닌 민중을 중요한 관심을 명백히 밝히고 싶다. 민중 신학의 경우에 예수를 이해하는 수단이 민중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는 민중을 정확히 이해하는 수단이다.9
마가의 신학이 예수 그 자신보다 민중이 된다는 것은 예수가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보내진 것 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는 통치하는 권력 그룹들, 유대교의 대 선지자들, 로마 권력자 빌라도에 의해 서 십자가에 못 박힌다(마가복음 15:1-47). 윌리암 베르데(William Werde)의 ‘메시야 비밀’은 마가복음 의 주제가 민중이라는 사상을 확고하게 만든다. 베르데에 따르면 “예수는 엄격하게 그리고 짜여진 계획 대로 그의 마지막까지 그의 메시아 정체성을 비밀스럽게 유지한다.”10
5Ibid.
6Byung Mu Ahn, “Jesus and the Minjung in the Gospel of Mark,” in Minjung Theology, ed. the Commission on Theological Concerns of 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TC-CCA)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1), 139. 7Ibid.
8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에서 CWME or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은 “선교는 중심으로부터 변두리 그리고 특권층으로부터 소외계층으로 이동 하는 운동으로 이해되어 왔다.”—CWME, 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 (05/2012), 5-(5).
9Nam Dong Suh, “Historical References for a Theology of Minjung,” in Minjung Theology, ed. the Commission on Theological Concerns of 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TC-CCA)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1), 160. 10William Wrede, The Messianic Secret, trans. J. C. G. Greig (Greenwood, S.C. : Attic Press, 1971), 24.
예수는 그의 정체성을 숨길지라도 민중을 치료하고 먹이는 일을 통하여 민중의 상태를 폭로한다—하나님의 나라의 그의 미션에서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폭로한다.
민중 신학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은 동시대의 사회에서 통 치하는 그룹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이고 구원은 “주제들”11이 된다.
오클로스(Ochlos)의 부활의 원인 때문 에 로마와 유대교의 권력에 의해 처형당할지라도 예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이미지에 의해서 창조한 그들의 인간 존엄성과 권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아낌없이 준다. 데비이드 제이 보쉬(David J. Bosch) 에 따르면, “예수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영역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 낮은 사람들, 비난받는 사람들 가운데 하고 있다 …. 가난한 사람들의 파괴된 삶은 하나님의 목 적들에 반대이다. 예수는 그들의 비천에 오고 그것을 끝내려고 온다.”12
이 의미에서 예수는 가난한 사 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졌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 들을 오클로스(Ochlos)로서 민중과 동일시 할 때, 그들은 예수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 즉, 하나님의 사 람들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민중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교회가 될 수 있는지를 민중 신학에 질문할 수 있다.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 따르면, 교회의 본성에 관하여 “교회의 본성과 미션에서 다양한 성서적 안목을 올리기 위하여 다양한 접근들이 요구된다. 4개—‘하나님의 사람 들,’ ‘그리스도의 몸,’ ‘거룩한 영의 성전,’ 그리고 [친교와 공동체로서] ‘코이노니아’ ….”13
앞에서 논증 한 것처럼, 예수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요한복음 1:12-13). 그들은 교회의 구성원들이다. 교회의 탄생 전에 예수의 미션을 고려할 때 예수의 따르는 사람들은 오늘의 회중이 된다. 즉, 땅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의미한다. 민중 신학은 역사적 예수 그 자신이 민중일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 올려진 그리스도는 민중이 된 다. 예수는 민중 안에 있는 목수의 가정 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민중의 고통을 그의 고난과 고통으로서 간주한다. 안병무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사는” “민중의 수난사”로서 둘은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기 적을” 실행하는 “예수와” “예수의 수난사를 연결하는 것이” 마가에게서 비롯되었든 “민중자신의 구전 과정에서 되었든 간에” 그것들의 관계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14
서남동은 민중을 올려진 그리스도, 즉, 민중과 동일시한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민중은 메시야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이 영웅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중의 고통을 통하여 그들은 불공정하고 차별화하는 사 회를 향하여 대항하고 맞서 싸우고 개혁한다.”15
11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중에 관련하여 서남동은 “… 민중신학은 민중이 점차적으로 그들 자신들을 역사적 대 상이 되는 위치로부터 역사적 주체가 되는 위치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민중의 역사와 신학은 민중이 그들 자신의 힘을 가지고 그들을 결정하고 제한하는 외부적인 조건들을 이기고 그들 자신의 사회적 상황과 운명의 주체가 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Ibid., 169. 12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2011), 28.
13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Nature and Mission of the Church—A Stage on the Way to a Common Statement (Faith and Order Paper 198), 6.
14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246.
15서남동, 『민중신학의 연구』 (서울: 한길사, 1983), 218.
서남동과 안병무의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융엔 몰트만 (Jürgen Moltmann)의 책,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왜 그리고 어떤 방법에 따라서 고통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은 가난하고 포기된 하나님이 되는 가? 대중적인 예배에서 십자가의 신비주의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고통 받고 파괴된 사람들은 부유한 사 람들과 그들의 주인들보다 그들의 구체적인 상황 때문에 십자가에 못 막힌 하나님을 확실히 더 잘 이해 하였다. 그들은 그를 더 잘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그들의 주인들보다 그 들을 더 잘 이해하였다고 정확히 확신했기 때문이다.16
몰트만이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왜 민중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 과 억압받는 사람들은 부한 사람들과 억압하는 사람들보다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의 고통들과 부끄러움 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17
이 관점의 중요성은 가난하게 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사회 안에 서 불공평한 경제와 사회적인 구조들로부터 고통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민중으로서 예수는 동시 대의 유대교 사회와 로마제국 안에서 완전히 소외된다. 다른 표현으로는, 예수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 의 상태이고 동시에 민중의 고난이다. 이와 연결하여, 교회로서 민중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교회의 본성에 대하여 민중은 성령의 성전이며, 그 민중 안에서 성령은 민중의 전체적인 의미로서 “한 개체”18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를 개혁시키는 데에 공헌한다.
개혁과 전환을 구체화하기 위 하여, 서남동은 기독교의 민중 전통과 한국 민중 전통을 거룩한 성령의 사건으로서 본다. 그는 자기의 논문 “민중 신학의 역사적 언급들”에서 민중시인 김지하와 1974-5년에 쓰인 그의 수필 “감옥에서의 메 모”를 소개한다. 그 수필에서 해방에 대한 설교를 한 기독교 설교가 장일남은 한국 민중 전통과 기독교 민중 전통의 상속자로 상징이 된다.19
그 이야기에서 그는 사창가로 내려간다. 그리고 한 아이를 낳는 매춘부를 만난다. 그녀는 심각한 성병과 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에게 해방에 대한 설교를 시작한다. 이 현장목회와 관련하여, 김지하는 한 아이를 낳으면서 죽어가는 그 매춘부의 환 경을 바라보면서 장일남의 생각을 묘사한다. “장일남은 인간의 타락 장소에서 새로운 생명을 보는 진리 의 깊은 인식을 받는다.”20
서남동에 따르면,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메시아 왕국의 상속자들은 일꾼들 혹은 농노들 혹은 공산주의자 변혁을 주도하는 계층도 아니라 가장 아래에 있은 비천하고 도덕적으로 하찮은 사람들이다.”21
나의 관점으로부터 민중은 항상 비도덕적 상태에서조차도 고난과 비천함을 동반 한다. 동시에 생명을 창조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그들의 상황들을 개혁하려고 한다. 변화와 개혁적인 사건으로서 창조는 거룩한 영에 의해서 결정된다.
J. E. 레슬리 뉴비긴이 논증하는 것처럼 현 실 안에서 참여들과 경험들은 거룩한 영에 의해서 인도된다.22
16Jürgen Moltmann, The Crucified God—The Cross of Christ as the Foundation and Criticism of Christian Theology, trans., R. A. Wilson and John Bowden (Munich: SCM Press LTD, 1974), 47. 17Jon Sobrino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스캔들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고통들을 하나님에게 속 하는 길로서 본다. Jon Sobrino, Christology at the Crossroads: A Latin American Approach (New York: Orbis, 1976), 184, 195 18민중 신학에서 민중에 관련있는 것으로서 개체적인 면은 집합의 전체민중으로서 다루어진다. 19Suh, Historical References for a Theology of Minjung, 177. 20Ibid.
21Ibid.
22Michael W. Goheen, As the Father Sent Me, I am Sending You: J. E. Lesslie Newbigin’s Missionary Ecclesiology (Dissertation/09/23/1995), 32.
이 의미에서 민중이 사는 곳에 거룩한 영 은 머물고 그들을 한 개체와 사회의 새로운 창조 안으로 인도한다. 교회의 본성은 코이노니아(교제, 공동체)이므로 민중은 교제하는 공동체라고 불릴 수 있다. 민중이 모이는 장소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민중 공동체는 그들의 소유들과 믿음을 나눈다.
마가복음 2:13-17 이 진술하는 것처럼, 오클로스(Ochlos)—죄인들, 세금 징수원들—즉, 민중과 대화하면서 예수는 그들과 함께 마시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의 저런 모습을 비 난한다. 안병무는 예수와 함께 교제를 오클로스의 특징이라고 간주한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세례 요 한은 민중을 위해서 일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 그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었다.
그를 위하여 민중은 단 지 그의 설교의 대상들이었고 그러나 함께 살고 서로와 함께 교제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는 그와 그들 사이에 그 경계선을 깨뜨리고 그들을 향하여 자비를 베푼다.… 이들 행동들은 그가 동시 대의 억압받는 구조들과 문화들을 깨부순다는 것을 의미한다.”23
민중의 억압 받는 상황을 이해하는 예 수는 그 자신을 그들의 고통을 경험하기 위해서 그들의 상태로 내려가서 그들에게 음식을 가지고 섬기 며 그들의 슬픔, 비참, 기쁨을 껴안는다. 반면에, 마가복음 6:30-44에서 언급되었듯이 민중은 예수에게 작은 음식,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5000명 이상의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가져온다. 게다 가, 마가복음 2:1-12에서 4명의 동료가 군중이 밀집해 있는 집의 지붕을 뚫고 한 중풍 병자가 예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돕는다. 여기서 예수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의 친구들의 믿음 때문에 그의 병을 고쳐준다. 교회의 본성을 논의할 때 하나님의 선교의 기초적인 목적은 코이노니 아에 의해서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 개인들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다른 창조물 사이에 깨어진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24
그러므로 교회의 미션은 항상 전체적인 구원을 목적 으로 하는 것이고 교제로서 가장 좋은 관계성의 회복을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의 오클로스(Ochlos)와 한국 역사에서 민중 사이에 관계성들은 같은 억압받는 사람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그 오클로스는 예수 그 자신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이고 예수는 하나님 의 선교로서 그들의 해방을 위해서 그의 전 생애를 헌신한다.
이 사실은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 지고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들을 위해서 일한다—가난한 사람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은 더 높은 계층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땅 위에서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본성을 예수의 미션의 연속으로 고려해야 한다. 교회의 본성 첫 번째 요소로서 예수의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들이다.
왜 냐하면, 예수는 그들의 해방을 위하여 세계로 왔다. 예수의 몸으로서 교회의 본성은 민중을 나타낸다.
민중은 예수의 부활을 예상하지 않지만, 예수의 고통과 수난사건(passion—cross event)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잘 이해한다.
오히려, 민중은 그들 자신의 수난(passion)에서 예수의 수난사건(passion)에 대하여 직접적인 참여와 받아들임을 부활로서 고려한다.25
이 의미에서 예수와 민중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처럼 연합한다. 민중은 예수의 몸을 나타낸다.
민중은 하나님을 함축하므로 민중의 고통은 하나님과 예수의 고난을 보여 준다. 거룩한 영이 머무는 민중은 거룩한 성전을 암시한다.
거룩한 영은 사회 안에 모순적인 구조들을 변화시키고 개혁한다.26
23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서울: 한국 신학연구소, 1990), 139.
24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Nature and Mission of the Church—A Stage on the Way to a Common Statement, 8-9.
25안병무는 예수의 수난사건에서 부활의 실재를 언급하면서 예수의 수난은 우리의 것이고 그의 수난의 구경꾼 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우리 사이에 하나의 연대를 가지며 같은 고통을 인식하다고 말한다. 안병무, 『갈릴래 아의 예수』 (1993), 283-6.
26서남동은 개혁의 사건과 변혁을—통치하는 그룹에 대하여 민중의 일어남을—부활로서 간주한다. 서남동, 『민 중신학 연구』, 251.
결과적으로, 민중은 개혁적인 사건과 하나님의 영역에서 부 활을 경험하고 그 부활 사건에서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교제하고 민중 공동체에서 그들의 소유들과 믿음을 나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와 사회에서 변두리로부터 중심으로 이동하여 주체가 되는 것뿐만 아 니라 삼위일체에 의해서 하나님의 미션뿐만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된다.
Ⅱ. ‘한’에 대한 한국 문화와 한국교회의 선교
한국은 매우 특별하고 심리학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지리학적으로 반도국가로서 한국은 북쪽으 로는 중국과 러시아가 있고 남쪽으로는 일본이 남동쪽으로 대양이 있다. 문화, 군사, 그리고 무역을 위 한 저들 세 국가의 만나는 중심지로서 지리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한반도는 저들 나라들로부터 셀 수 없 는 크고 작은 전쟁들을 통하여 공격 받아 왔다. 그 예들로서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식 민지화하였다. 게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은 남한과 북한 사이에 분단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 한국 전쟁은 많은 고아들이 생기게 하였고 셀 수 없는 이산가족들이 남과 북에서 흩어져 살게 되었다. 한국 전쟁 후에 남한의 사람들은 1960년부터 1990년까지 군사 독재들에 의해서 억압받아 왔었고 그동 안에 진보적인 민중 신학은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많은 복음주의적 교회들과 보수주의 교회들은 거대하 게 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국 역사에서 전쟁들, 일본의 식민지화, 그리고 군사정권은 많은 희생자들을 나오게끔 하였다. 그리 고 그런 사건들은 국민의 마음 깊은 곳에 ‘한’으로 나타났다. 그 단어 ‘한’은 일반적으로 아픔 혹은 트라 우마로 불려졌고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가 되었다—예를 들면 ‘한’에 대한 많은 종류의 아리랑 노래, 영 화, 문학작품, 예술, 음식. 한국인들의 문화와 심리학적인 세계에서 깊이 놓여 있는 ‘한’의 역사에서 교 회의 미션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조차 ‘한’의 해방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 다. 나는 한국인들에게 ‘한’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것이다. 또한, 왜 한국교회는 그것을 다루어야만 하는 지를 연구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중 신학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이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질문할 때 그들의 과거 아픔들을 이야기하 곤 하고 공통적인 의미에서 한 사람은 더 강한 사람이나 계층에 의해 오랫동안 그들 위에 괴롭히진 고 통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에 동의한다. 한국어 사전에 의하면 ‘한’은 거짓의 비난에 의해서 떠안은 한 탄스러운 사건이며 그 사건은 고통 안에서 한 사람의 마음 안으로 스미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27
엔드류 성 박은 그의 책 “상처로부터 치료”에서 며칠 동안 방에서 나갈 수 없는 한 여자를 묘사하고 있다. 그 녀는 어떤 것을 잃고 천천히 죽는 것 외에 어떤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28
“국내 폭력 의 많은 희생자들이 희망 없음을 경험한다.
그들은 현실적인 지옥의 가정으로부터 도망갈 어떤 장소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가정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다.”29
27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41454000
28Andrew Sung Park, From Hurt to Healing—A Theology of the Wounded (Nashville: Abingdon Press, 2004), 10. 29Ibid.
일반적인 고통으로부터 엔드류 성 박은 ‘한’을 잘 예시한다.
그러나 그의 논증은 희망 없고 불공정한 대우들에 관련된 문화적 이해와 계층에 접근하지 못하는 듯이 어떤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민중의 한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 로,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그룹에 착취된 상태로부터 오랫동안 상속되어 왔다.
구약성서 창세기 16장에서 처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불임에 대한 고난은 그녀의 몸종인 하갈의 고난과는 비교될 수 없다.
물 론, 그녀는 후에 그녀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남자 아이 이스마엘을 낳았다.
레띠 M. 러셀에 따르면, 사라 는 그녀의 불임으로 고통 하고 있지만 하갈은 그녀와 그녀 아들의 생존과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고통하 고 있다.30
더 낮은 계층 혹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더 높은 계층과 억압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할 지라도 전자들은 훨씬 더 많이 고통을 느낀다. 이 현상은 다른 문화에서도 그 같은 종류의 고난은 나타 난다. 그러나, 사라와 하갈의 고통이 다르듯이 그 고통의 정도는 문화마다 다르다. 파트 1장에서 보았듯 이 한국전통의 문화는 유교 사상에 의해서 양반이라는 통치 그룹에 의해서 계층과 차별화가 이루어졌 다. 앞에서 분석되었듯이, 한반도는 한국문화의 유교 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침략으로부터 고통 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한국의 민중이 느끼는 ‘한’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미국과 같은 부유한 국가에서 사는 사람의 같은 무게의 고난에 비교하여 더 심각하고 무겁게 느껴왔다.31
한국 민중 안에서 ‘한’으로서 인간 고통은 각 문화, 풍습, 전통,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계층에 의해서 접근되어야 한다. 우리가 분석했듯이, ‘한’은 한국 문화 안에서 정신이 된다. 한국 문화와 풍습 안에서 정신에 접근하 기 위하여 교회는 무엇보다도 세대 간 걸쳐서 내려오는 억압받는 ‘한’을 인식해야만 한다. 교회의 미션 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지 민중의 한을 해방하기 위하여 책임을 취해야만 한다. 게다가 교회의 에큐메니 칼 운동을 위하여 ‘한’은 한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 서로와 함께 대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함께 만나기 위 하여 공통적인 관심과 주제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워지는 장소마다 문화적인 정신으로서 미션을 위하여 ‘한’을 관심 가질 때에 ‘한’에 대한 문화 정신적인 예비적인 이해는 다른 교파들, 다른 종교들,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조차 주목 할 수 있는 주제가 된다. 문화와 신학과 관련하여 코수케 코야마 에 따르면, 인간 상황은 항상 문화적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문화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꾸어서 문화는 인 간 조건의 창조이다. 문화들은 항상 교차하므로 문화는 항상 내부적이다. 신학적인 상황적인 것은 문화 의 복잡한 현실과 함께 서로 엮어지는 것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문화로부터 떨어진 순수한 신학적인 단어는 없다. 문화는 말들을 제공 하고 신학은 그것들에 세례를 주고 그것들을 사용한다. W. A. 비서트 후프트는 바울과 요한이 기독교 이전의 연결을 뜻하는 그런 헬라 단어들 ‘로고스’ ‘소테르’ ‘미스터리아’ ‘메타모르포시스’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는 위험을 취하였다는 것을 관찰하였다.32
30Letty M. Russell, Church in the Round--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Church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 28.
31Ecumenical Association of Third World Theologians(EATWOT 1981)에 따르면, 부유한 나라들(the First World)과 가난한 나라들(the Third World) 안에서 유럽 아메리칸 기준의 전통적인 신학은 “성차별, 인종차 별, 자본주의, 식민주주의, 그리고 신식민지주의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로는 존중하는 방법으로 토착문화들, 전통들, 그리고 관계성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대한 실패는 교회 선교의 실패 로 이어진다. 그래서, 저들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하여 EATWOT는 “우리는 제3세계를 위한 관계신학이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면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Ecumenical Association of Third World Theologians, The Irruption of the Third World: Challenge to Theology, New Delhi, 1981 (MSA 100-3/2), 131-2.
32Kosuke Koyama, 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University of Edinburgh, April 2002), 6.
하나님의 미션은 사람들의 고통들을 치료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주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슈화 하고 제거해야만 한다. 그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교회는 다른 교파들, 다른 종교 들, 그리고 전체적인 비기독교인들을 만나야 한다.
좋은 예로서, 한국의 특별한 경건주의와 관련하여 한 국의 개신교회들은 각 교회에서 매일 새벽 4시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매우 놀랍게도 이 전통은 한 국의 샤머니즘 전통으로 온다.33 많은 한국 교인들은 새벽에 하나님이 기도를 잘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하루의 첫 출발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 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샤머니즘의 생각에서 새벽에 ‘귀신들’34과 싸우고 기도들을 통하여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한국 교인들의 생각에는 그 시간에 기도하는 것 을 통하여 그들의 억압 받아 온 ‘한’을 해방시킨다. 개인적인 ‘한’외에 한국 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제로서 민중의 ‘한’을 위로하고 제거해야만 한다. 한국교회에 의한 ‘한’의 치료는 두개의 면에서 확실하다.
그 하나로서 개인적인 ‘한’은 개인적인 구 원, 회개, 용서, 화해, 계획된 기도 모임들을 통하여 위로된다.
그 다른 하나와 관련하여, 민중 신학으로 서 민중 운동과 함께 그 억압받는 사회 안에서 집합적인 ‘한’은 군사정권이나 불평등한 사회와 경제적인 구조에 대항하여 사회적 운동을 선도하거나 지지해 주는 것으로 해결 될 수 있다.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들은 ‘한’에 대하여 전자에 중점을 두지만 진보적인 교회들, 성공회, 가톨릭교회는 후자에 더 많은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서남동은 기독교인들이 ‘한’의 성직자들이 되기를 격려한다. 그에게서 ‘한’ 은 민중의 외침이다. 그 외침은 민중이 억압받아 왔고 화를 당했고 인간 권리와 존엄성을 잃었고 아무 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외침이고 한탄이다.35
서남동에게 하나님의 미션에서 기독교 인들과 교회들이 ‘한’의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억압받는 사람들, 잃은 사람들, 저주받고 퇴출 당한 사람들, 죄인들, 나그네들과 같은 민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상은 마치 예수가 신약성서에서 잃어버린 양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하나님과 세계의 탄식에 대하여 매개인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동 시에, 그 억압하는 구조들과 권력에 맞서 대항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36
33See 이덕주, 『한국의 토착교회 형성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69. Cf. 옥성득, “평양 대부흥 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한국기독교와 역사」 25 (2006), 57-96. 옥성득은 그의 논문에서 새벽기도회 기원을 길선주의 기독교로 개종전 종교인 도교의 영향으로부터 온다고 하나 같은 논문안에서 그는 이덕주의 주장 에 대하여 또한 동의한다. 이덕주는 새벽기도회의 기원을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여인들의 “새벽”에 “정한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에게 “가족들과 자녀들의” 건강을 기원하는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34여기서 ‘한’에서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말한다.
35서남동, 『민중신학의 연구』, 44.
36Ibid.
서남동의 교회에 대 한 미션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교회는 무엇을 해야만 하고’ ‘어떻게 교회는 사회 안에서 존재해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교회는 세계 혹은 비기독교인들의 걱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세계를 지도 하고 세계 빛에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게 더 좋은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J. C. 호에켄디즈크는 그의 책 “교회의 안에서 밖으로”에서, 우리는 그룹들의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일해야만 한다.
더 이상 개인적이어서는 안 된다.
즉, 우리는 구 체적인 관계성으로 와야만 하고 복을 그들의 둘레 안에서 태어나게 해야만 한다. 이 접근은 미션분야에 서 매우 친근하다. … 예를 들면,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 [노동자들] 가운데 오늘날 행해져 있고 그곳에 서 상황 의식으로부터 너무나 강하게 행동한다. 우리는 전체적인 이웃들을 복음의 대상으로서 다가가야 한다.37
호에켄디즈크는 교회의 미션은 한 사회 안에서 복음의 증언들을 하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 증 언은 비기독교인들을 전환시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의 미션은 역사적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 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했던 것이고 민중의 ‘한’과 같은 그들의 고난을 수용하고 따뜻하게 껴안는 것이 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에 관하여 뉴비긴은 서구사회의 개인주의와는 달리 서로 서로(이웃들)를 향 하여 관계성들과 책임은 정의와 자유의 해방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선사하는 기초적인 요소가 된다.38
37J. C. Hoekendijk, The Church Inside Out, eds., L. A. Hoedemaker and Pieter Tijmes, tran., Isaac C. Rottenberg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96), 55-6.
38Lesslie Newbigin, Lesslie Newbigin: Missionary Theologian - A Reader (Grand Rapids: Eerdmans, 2006), 156.
민중신학이 민중의 ‘한’을 껴안은 것처럼 교회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관계성과 책임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민중의 ‘한’은 예수의 제자정신으로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고통이 되어야 한다.
‘한’은 한 개인 혹은 한 사회 안에서 뿌리 깊게 내재해 있고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한탄이다—더 강하고 높은 계층에 의해서 억압 받고 세대에 걸쳐서 상속된 것이다.
그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문 화적이고, 풍습적이고, 사회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다. ‘한’의 문제들과 해결들에 접근하기 위하여 교회는 한국 전통의 문화와 사회적 계층 안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들과 사회들이 같은 종류와 무 게의 고통을 당할 지라도 문화와 경제가 낮은 계층에 따라 그 고통들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이 의미 에서 한국 민중은 유교주의, 많은 전쟁들, 일본이 식민지화, 군사정권에 의해서 억눌러져 살아왔으므로 교회는 가장 아래의 장소로부터 돌보고 치료하기 위하여 가장 낮은 영적인 위치에 까지 내려가야 한다.
‘한’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공통적인 관심이다. 모든 한국 사람들—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은—모두가 우선적인 사회적 종교적 관심으로서 ‘한’의 해방을 대화 할 수 있다.
교회들은 민중의 ‘한’을 통하여 십 자가 위에서 고통 하는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다.
많은 보수주의 교회들이 한 개인의 ‘한’의 해방과 구 원에 초점을 맞추어 왔을지라도 민중 신학이 사회의 집합적인 ‘한’에서 ‘한’의 성직자와 매개체로서 했 던 것처럼 집합적인 민중의 한을 해방하기 위하여 참여를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그 리스도의 교회는 이웃에 대하여 관계성과 책임을 유지할 수 있다.
Ⅲ. 민중의 고통 하는 장소들에 참여하는 민중 신학과 교회 한국
사회의 현대 시기에서 두 개의 주목할 사건들—1970년 11월 13일에 일어난 산업 노동자 전태 일의 죽음과 1987년 6월 10일에 일어난 거대한 6월 항쟁은—노동자들의 구조적인 개혁과 민주화의 시 작을 가져 왔다.
이들 사건들은 민주화가 사회 안으로 변화가 되기 시작하는 정치적 변화에 영향을 주 었다.
이들 사건들과 교회가 전면전에서 주도적으로 하진 못하였지만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어야만 했 는지를 보여 준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저들 사건들에서 ‘교회는 무엇을 했는지’ ‘민중 신학은 어떻 게 사회 참여를 해석 하였는지’ ‘다른 교파들과 비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에큐메니칼 운동에 협력하였는 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나는 저 질문들을 가지고 20세기 미션의 에큐메니칼 교회론에 의해서 분석 할 것이다.
산업 노동자 전태일은 휘발유를 그의 몸에 부었고 성냥과 함께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가 일하는 산 업현장에 대한 환경 조건들, 대우, 봉급, 노동시간, 노동자들의 건강을 개혁하라고 정부와 회사, 우리 사 회에 요구하고 외치었다.
서울 청계천에서 미싱사로서 일하면서 전태일은 그의 동료들이 점심식사를 제 외하고 쉴 틈도 없이 “하루에 14시간 이상” 일하면서 지붕으로부터 “1.2~1.5 미터”로서 먼지가 가득한 비위생적인 “다락방” 안에서 건강을 잃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39
지역 안에 있는 회사들과 공장들 안에서 노동자 단체들을 조직 하면서 전태일은 정부에게 노동과 근로기준법들을 개혁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고용주들을 지지하였다.
그의 활동들 때문에 그는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하였다. 비록 몇 몇 교회들이 도시산업 선교회를 조직하고 일해 왔을 지라도 그들이 성서와 삶에서 믿음과 노동을 연결 하였던 것은 그의 죽음이 와서야 시작하였다.
서남동에 따르면, 전태일의 죽음은 교회가 산업 선교에 참 여하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 실행은 과거에 접근한 것보다 새로운 접근이었다. 즉, 기독교의 믿음을 노 동과 연합하는 것이었다.”40
창세기 3장에서 보는 것처럼, 믿음과 노동의 이 연합은 기독교인들이 인간 의 의무에 대하여 기억하게끔 만든다—한 남자는 그의 토지를 경작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기 위하여 고 통을 참고—하나님은 그들이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은 것에 대한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임에 대하여 묻는다. 게다가,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성령 을 통하여 일한다(John 15:26). 사도행전 18:1-4에 따르면, 바울은 그의 생계를 위하여 텐트 만드는 사 람으로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한다.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 존재들에게 땅 위에서 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무임에는 틀림없다.
전태일의 죽음과 관련하여 안병무에 따르면, 비록 그가 자살을 선택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그의 죽 음은 통치하는 계층의 살인이었다.41
안병무의 생각은 교회가 자살을 다시 생각하게끔 하였다. 그 당시 에 한국 교회들은 자살을 심각하게 죄를 범하는 것으로, 지옥으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하 나님은 인간 존재들에게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몇몇 보수주의 교회들만을 제외하고 진보주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전태일의 장례식 예배에 참석하였고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배들을 지켰다.42
39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전태일』 (서울: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2002), 78-81.
40서남동, 『민중신학의 연구』, 224.
41안병무, 『역사와 민중』, 200.
42Ibid.
마가복 음 2:12-28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그의 제자들을 안식일에 밀을 까는 것을 비난하는 것을 지켜보면 서 바리새인들에게 한 사람이 안식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한 예로서, 그는 다윗 왕과 그의 신 하들이 배가 매우 고파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법적으로 높은 성직자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은 것을 언급하였다.
안병무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살은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무엇이 한 사람을 자살하게 했는지에 대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더불어, 한국교회들은 모든 자살들이 하나님이 준 생명을 포기하 는 부정적인 의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또 다른 역사적 중요한 사건인 6월 항쟁(1987년 6월 10일~29일)은 한국 군사 독재정권 정부에 의해 서 살해된 두 명의 대학생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명은 서울대학교 학생 고 박종철이었고 다 른 한명은 연세대학교 학생 고 이한열이었다.
그 첫 번째 비극은 1987년 1월 14일이었고 두 번째는 1987년 6월 9일이었다.
박종철은 독재자 전두환과 그의 정부에 대항한 사회 민주적 학생 운동가였다.
그는 폭력과 전기 고문에 의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결국 고문에 의해서 죽 었다.43
두 번째 희생자는 또 다른 학생 운동가로서 그의 대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을 선도하는 민주화 운 동에 참여하는 학생이었다.
민중화 운동의 거리 행진에서 그는 경찰의 쏜 최루탄에 맞아서 살인 되었 다.44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군사적 독재자 전두환과 그의 정부에 의해서 희생되었을 지라도, 이들 두 개의 사건은 6월 항쟁을 일으키는 촉매적 역할을 하였다. 많은 한국 시민들은 한국의 6월 항쟁에 대 대적으로 민주화를 위한 혁명의 항쟁에 참여하였다.
거대한 항쟁의 결과로서 전두환의 군사적 정부는 그들의 계속적인 권력유지를 포기하였고 어쩔 수 없이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45
그들의 힘을 시 민들에게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저들 사건들에서 선도하는 그룹 가운데 핵심적인 지도자들 중의 서남동과 안병무 같은 신학자들이었 고, 목회자들은 문익환과 문동환이었다.
거기에는 가톨릭교회의 정의사회 구현 사제단, 한국 성공회, 한 국 장로교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개혁), 한국 성결교회, 한국 감리교회가 있었다.46
6월 항쟁의 그 첫 번째 모임과 선언은 서울에 있는 한국 성공회 대성당에서 시작되었다.47
이 역사적 사실은 에큐메니 칼 운동에서 구성된 교회가 정부의 절대적 권력과 폭력 앞에서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그 운동을 지지 하였다는 것이다. 교회들은 하나의 주님 아래에서 함께 모이었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목 소리를 들었다.
서울에 있는 가톨릭교회의 명동 성당은 선도하는 민주화 인사들과 학생 운동가들이 몸 을 숨기는 장소가 되었다.48
그 당시에 정부 경찰들은 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추기경 김수환은 경찰들에게 그들을 포박하려거든 나를 제일 먼저 체포할 것이며 그 다음에 성직자들 그리고 그 다음에 수녀들, 마지막으로 그들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49
그의 강한 메시지는 교회가 가 난한 사람들, 고통 하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억압 받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6월 항쟁에 대하여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인 접근을 통하여, 안병무와 서남동은 교회 안으로 그리스도 의 부활의 의미를 심는다. 안병무는 민중의 봉기를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간주한다.
그 항쟁의 시대에 가 톨릭 성직자 정양모와 대화하는 동안 안병무는 “정 신부님, 저것 보세요. 저게 예수 부활 사건입니다 .”50고 말한다.
서남동은 안병무에 동의하면서 그리스도 부활에 대하여 세 가지 의미들을 부여한다—교 회, 성서, 민중. 그의 관점에 따르면, 왜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리스 도의 형제들과 누이들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성서는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생명을 깨 닫고 그 생명 안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민중은 그들이 억압 받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인간 해방을 위하여 항쟁한다.51
43https://ko.wikipedia.org/wiki/6%EC%9B%94_%ED%95%AD%EC%9F%81
4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9C%EC%97%B4
45https://ko.wikipedia.org/wiki/6%EC%9B%94_%ED%95%AD%EC%9F%81
46서중석은 어떤 보수적인 교회들이 독재적인 정부를 지지할지라도 대부분의 보수주의 교회들과 복음주의적 교 회들 조차 박종철의 죽음의 결과로서 6월 항쟁에 참여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현한다. 서중석, 6월 항쟁 (파주: 돌베개, 2011), 630-6. 47앞의책, 260-6, 284.
48김형수, 『문익환 평전』 (서울: 실천문학사, 2004), 661.
49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ed. 오지영 (서울: 평화방송• 평화신문, 2004), 307.
50김남일, 『민중 신학자 안병무 평전: 성문 밖에서 예수를 말하다』 (파주: 사계절, 2007), 269.
51서남동, 『민중신학연구』, 254. 13
서남동에게 부활은 민중을 상징하는 한 부활은 개인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전체로 서 함께 부활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남동에 따르면 “비록 개인적인 죽음이 서로서로로부터 다를지라도 부활은 사회적으로, 전체적으로, 그룹 안에서 함께 일어난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적인 부활 외에 부르주아가 좋아하지 않는 이 사실을 기억하지 않았고 가르치지 않았다.”
안병무와 서남동은 새로운 신학적이 고 문화적인 이해 안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가져온다. 이 새로운 해석은 한국 교회에 도전을 가져 왔고 교회는 예수의 부활은 무엇이 되는 지를 인식 하기 시작하였다—사회적 정치적 변화로서 자 유와 해방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20세기에서 민중 신학에서 교회의 미션은 교회론적이고 에큐메니컬 신학을 반영한다. 전태일의 죽음 과 6월 항쟁에서 증명되었듯이 군사적 독재 정권의 억압과 감시에도 불구하고 민중 신학과 교회는 세계 쪽으로 경제적(economic—oikonomia)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교회는 노동자들의 고 통 하는 장소에 참여하였고, 그들의 고통을 교회의 고통으로서 받아들였고,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돌보았다. 이 사랑은 경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물에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경제 적 삼위일체로서 하나님과 창조물의 관계에 대하여, 찰스 펜샴에 따르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다 사랑 안으로 모으는 것이다. “창조를 위하여 새롭게 하고 치료하고 생명을 주고 해방시키는 하 나님의 일은 이 방법에서 일한다. 이 일과 이 치료하는 하나님의 현존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역이 다.”52
경제적 삼위일체에 대한 펜샴의 선교적 사상의 기초 위에서 민중 신학은 한국에서 민중에게 생명 과 자신 주는 역활을 하였다. 자신을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교파들이 예수의 선교를 위하여 어디에서 만 나는 장소에 대하여 알려 줌으로써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일으킨다—인간 자유. 에큐메니컬 운동으 로서 두 번째 바티칸 공의회는 “그 단어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의 다양한 필요에 따라서 기독교의 일 치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기회들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격려되고 조직된 기구를 의미한다”53라고 선언한 다.
52Fensham, Emerging from the Dark Age Ahead—The Future of the North American Church, 18.
53Vatican Council II-The Conciliar and Post Conciliar Documents, ed. Austin Flannery, O. P. (Northport, New York: Costello Publishing Company, 1975), 456-7. 14
많은 진보적인 교회들과 보수적인 교회들조차 6월 항쟁의 날에 민중의 해방과 인간 존엄을 위하여 함께 모이었고 민중의 고통과 해방을 경험하고 나누기 위하여 내부적인 활동의 교회를 바깥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은 경제적(economic—oikonomia) 삼위일체의 자신 주는 사랑에 의해서 하나의 주 님 아래에서 연합한 자들이 되었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 이래로, 한국 사회에서 많은 회사들과 노동자들은 노동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노동과 근로기준법들을 만들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교회는 많은 산업현장에서 하나님의 미션의 역할을 하였다—성서 연구 모임, 기도 모임, 상담소 설치, 의료선교.
6월 항쟁은 민중 안에서 하나님의 미션의 목적으로서 억압 받는 사람들에 대한 해방을 폭로하였다.
교회는 억압하는 자들에 의해서 받는 고통 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과 생명을 줌으로서—교회의 안에서 바깥쪽으 로 나오는 교회의 미래 교회의 역할로써—그들의 비천한 모습을 교회의 고난과 박해로 받아들였다.
모든 개신교 교단들과 카톨릭 교회가 한 장소에서 만나고 민중의 고통들과 운동의 방향들을 대화하는 장소에 서 교회의 일치는 하나의 주님 아래에서 시작하였고 다른 종교들과 비기독교인들과도 협력하게 되었다.
왜 6월 항쟁이 에큐메니컬 운동으로서 성공적으로 성장했던 이유는 인간 존재들과 창조물들의 정의와 해방이 경제적 삼위일체의 미션을 통한 자신을 주는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통하여 구체화 되었기 때문이다.
Ⅳ. 20세기 선교적 교회론 안에서 민중신학 관점을 통하여 본 21세기 한국교회의 방향들
2008년에 한국 개신교는 선교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였다. 반면에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선교 역 사는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첫 번째로 받은 후에 200년이 흘렀다.
20세기 동안 한 국의 인구 40,000,00054이상 가운데 4명 중의 한 명은 개신교 교인으로 기록되었다.
21세기 시작에서 많은 개신교 교인들이 그들의 교회를 떠났고 가톨릭교회로55 전환하였고 다른 종교들로 간 교인들도 있 었고 과거의 종교가 없었던 상태로 다시 돌아갔다.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 두 개의 이슈들이 그들이 교 회를 떠나게 했고 그것들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조차 교회를 비방하게 했다—성폭행과 성추행 같은 목회 자들의 도덕적 타락들—교회 재산의 횡령. 그런 요소들과 함께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개신교의 위 기를 불러왔다.
왜 그 문제들이 교회 안에서 발생 되었는지를 진단하기 위하여, 우리는 20세기의 선교와 에큐메니컬 교회론의 빛에서 그 요소들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20세기 교회론 적 신학에서 보여 준 민중 신 학이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하여 어떤 방향성을 나타내주고 교회는 무엇을 해야만 하고 어떻게 한국 사 회에서 선교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무엇이 진심으로 복음적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교 100년 전에 북미 와 유럽의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복음 소식과 함께 다른 나라와 민족의 문화와 문명을 배격하고 교회의 권위적 점령의 시작은(Christendom) 한국 사회에서도 그런 선교적 흐름은 나타났다.
펜샴에 따르면, “이들 시대 동안에 그리고 이 시대까지 유럽과 북미의 기독교 운동은 점령의 요소와 힘으로 성장했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진 원론적인 진리에는 낯설게 다가왔다.”56
삼 세계 신학 자들의 에큐메니컬 연합체(The Ecumenical Association of Third World Theologians or EATWOT)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삼 세계 나라들을 식민지 하려는 유로 아메리카인들의 정책과 함께 그들의 교회들은 그 본토 원주민들의 문화와 종교들을 파괴하고자 영 적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하는 정책들을 도왔다.57
541983년에 대한민국 인구는 40,000,000이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C%9 D%B8%EA%B5%AC
55카톨릭 교회는 수적으로 증가해 왔다. 개신교와는 달리 어떤 비도덕적 행위들과 교회재산의 배임이나 횡령 등은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를 유지했고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초 점을 맞추었다.
56Fensham, Emerging from the Dark Age Ahead—The Future of the North American Church, 12.
57Ecumenical Association of Third World Theologians(EATWOT), Ecumenical Dialogue of Third World Theologians, Dar es Salaam, Tanzania, August 5-12, 1976, (MSA 100-3/2), 216.
오늘날조차 많은 한국 교회들은 유로 아메리칸 교회의 선교적인 승리와 정복적인 (식민지화) 힘을 계승해 왔다.
그래서 교회 선교의 미션은 다른 사람들을 존경으로 서브하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들을 점령하는 의식을 하고 있 다.
교회의 강단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성공적인 삶을 쟁취하는 힘과 권력을 선포하고 상당한 돈을 축적하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그들은 이 모든 성취를 하나님에게서 오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승리 적인 설교는 기독교인들을 유혹하는 도구가 되며 교회 헌금의 수입을 늘리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세계 선교와 복음주의 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or CWME)는 복음주의가 왜곡되어 왔고 신용을 잃어 왔다고 비평한다.
그들에 따르면, “복음주의는 회개, 믿음, 세례 의 중요성을 두는 태도, 우선성, 목표들의 변화를 가져온다.”
“복음주의는 잃은 사람들의 구원, 아픈 사 람들의 치료,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유, 그리고 전체의 창조를 의미한다.”58
앞에서 민중 신학의 마가복 음 주석에서 보았듯이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 돌보는 것이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고 그들의 현재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창조된 창 조물을 자유롭게 하는 의미이다. 마치 이것은 오클로스(Ochlos)가 예수를 통하여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21세기에 하나님의 미션을 하면서 정복하고 승리 적인 유로 아메리카의 선교 정책의 유산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고통 하는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섬기고 자유롭 게 하는 정신을 격려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세계에서 정복과 승리주의--성공주의 뿐만 아니라 도덕적 해이는 한국 교 회 안에서 만연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서구 기독교 세계 안에서 복음주의가 도덕 문제들을 생산하는 것 이 일반적인 것과 같다. 한국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그들이 설교와 크리스챤 삶에서 도덕적 행동들을 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 선교를 얼마나 많은 새로운 교인들이 매주 들어오느냐에 관심과 목표를 두고 있다.
포커스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들의 믿음의 척도는 기도 모임과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교회의 일에 할당하느냐가 기준이고 관건이다. 결국, 미션 의 목적은 오랫동안 증가하는 숫자들이고 늘어나는 헌금의 양이다. 왜, 한국 교회는 도덕적 해이에 둔감 하고 나태해지고 있는가?
호에켄엔디크는 그의 책 “교회의 안쪽에서 밖으로”에서 술주정뱅이와 회의주 의자들이 복음주의의 대상들이었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그들을 성서적 이교도들 그리고 야만인들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들의 설교는 “혐오스럽게도 도덕적이고 낮추는 행위를 후견하며 변명을 늘어놓은 것”으 로 선포하였다.59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죄들의 용서가 난폭한 과거를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 로” “술주정뱅이 구원을 더 좋은 도덕적 재무장”하는 것으로, 회의론자들에게는 “지혜”에 대한 이해를 “어리석음을 간과”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다.60
한국선교의 시작 이래로, 이 왜곡은 서구의 기독교에 의해서 한국 교회 안으로 전승되었다. 성공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로 표현된다.
이 를테면, 술주정뱅이는 알코올을 포기하고 회의론자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판타스틱한 미래를 희망한다.
매우 자주 볼 수 있듯이 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은 난폭하고 회의론적인 과거의 삶을 자랑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들은 크리스챤 삶으로서 도덕적 삶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민중 신학에서 민중의 한은 통치하는 그룹과 권력이 민중들을 돌보지 않고 억압함으로써 도덕성을 잃는 것에 서 출발한다.
통치하는 그룹과는 달리, 교회는 정부와 사회가 본받을 수 있도록 도덕적 리더십을 보여 주어야 한다.
남아프리카 교회들이 정부와 사회를 향하여 도덕적 리더십에 집중하였지만 서구교회들은 도덕적 리더십을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의 선교의 중요한 이슈로써 고려한 적이 없었다.61
58CWME, 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 30 (84).
59Hoekendijk, The Church Inside Out, 19.
60Ibid.
61Andrew F. Walls, The Great Commission (1910-2010), 9. 16
나는 정부와 국 민이 교회가 사회를 종교 사회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 사회로 인도하기를 원한다고 생 각한다. 물론 교회가 종교 사회를 꿈꾼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체의 사회를 인 도하기 위하여 도덕성의 큰 위임을 받고 있다. 성폭행, 성추행, 목회자들의 교회 재산 횡령과 도덕적 타락,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였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던 교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한국 교회의 말과 행동의 일치는 매우 중요하다. 뉴비긴은 그의 인도 선교 경험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선포들과 이웃들과의 대화에 서 말하는 말들은 행동과 일치해야 한다고 선언한다.62
그가 성스러운 거리에서 설교할 때 그는 자기의 청취자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처럼 들린다고 알고 믿을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행위들 없는 말들은 권위가 부족하다!”라고 주장한다. 거꾸로 “말 없는 행위들은 들리지 않고 의미가 부족하다.” “그 두 개는 함께 간다.”63
우리가 민중 신학에서 보 았듯이 믿음과 노동의 관계는 말과 행동의 관계와 같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사랑 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같은 방법에서 펜샴의 포이에시스(poiesis) 성서적 해석과 선교와 관련하여 이론과 실재를 포함한다.64
물론 펜샴은 보쉬의 “컨트롤과 밸런스—조화”를 그 포이에시스 안으로 적용 한다.65
그 두 개의 관계성을 컨트롤하고 조화 있게 하면서 믿음과 노동의 일치, 말과 행동의 일치, 이 론과 실재의 일치는 우리가 고통 하는 이웃들과 함께함으로써 실재의 경험 안에서 참여하게 만든다. 한 국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설교가 아무리 신선하고 강할지라도 21세기 안에서 그들의 설교가 행동들과 일 치하지 않는다면 잃은 양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양들도 교회를 떠날 수 있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단지 명예, 존경, 높은 셀러리를 평신도들에게서 받는 것을 즐겼고 비기독교 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많은 시민은 그들의 사치스러운 삶들을 비난하였다. 물론 많은 지역 교회들은 개척교회들을 포함하여 수입에서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미래에 성공적인 목회자들로 거대한 교회들, 호화로운 아파트, 값비싼 자동차들을 꿈꾸면서 평신도들이 완전히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섬기기를 바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민중 신학은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한탄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그들을 위한 자신 희생에 중요성을 둔다.
과거 민주화 운동에서 전경들과 경찰들이 명동 성당에 피신해 있는 학생들과 시위자들, 그리고 그 리더 들을 체포하려고 할 때에 추기경 김수환은 자신을 그들 보다 먼저 체포할 것을 말하고 그 다음에 성직 자들과 수녀들을 체포한 뒤에 맨 나중에 학생들과 시위자들을 체포할 것을 선언 하였다. 추기경 김수환 은 어떻게 교회와 목회자들 (성직자들)이 부하고 건강하고 가진 사람들보다 가난하고 소유를 잃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희생해야 하는지를 예로서 보여 주었다.
교회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 생명을 주는 장 소에서 교회의 힘과 에너지는 민중과 같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중해야만 된다. 이 행동은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재창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펜샴은 내재하는 삼위일체 안에서 각 인격체는 차이점을 보여줄지라도 삼위일체는 하나의 자신을 주는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은 창조적이고, 구속적이고 세계에 자신을 주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방법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미션으로서 하나님의 자신을 주는 행동들을 해야만 한다.66
62Newbigin, Lesslie Newbigin: Missionary Theologian - A Reader, 140.
63Ibid.
64Fensham, Emerging from the Dark Age Ahead—The Future of the North American Church, 28.
65Ibid., 35.
66Charles Fensham, “Emerging from the Dark Age Ahead: The Canadian Church in the Third Millenium,” eds., Mortensen, V & Osterlund, in Walk Humbly with the Lord: Church and Mission Engaging Plurality (Grand Rapids: Eerdmans, 2011), 131. Miroslav Volf는 “삼위일체의 단어들만을 계속적으 로 생각한다는 것은 보편성과 다원화사이의 이분화를 회피하는 것이다. 삼위의 하나님은 unum multiplex in seipso (John Scotus Erigena)이다. 만약 일체와 다원성이 하나님 안에서 equipriman라면, 하나님은 일체와 다원 성의 기초(ground)이다.” Miroslav Volf, After our Likeness: The Church in the image of the Tri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8), 193.
하나님의 자신을 주는 사랑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행동 하는 것 이 아니라 자신을 주는 대상들로부터 어떤 보상의 기대 없이 하나님의 자신과 생명 주는 사랑을 페리코 레시스(Perichoresis)로서67 행동한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자신을 주는 사랑은 어떤 보상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책 교회의 모양 안에서 ‘비성직자화하는 교회 (A Declericalization Church)’를 통하여 칼 라너는 “미래 교회는 아래의 레벨이나 아래의 그룹들로부 터 와야 한다”68고 말한다.
그는 교회가 “오피스 홀더(office-holders)”의 권위에 의해서 운영되는 사회 적 회사와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 한 경영인은 고용된 사람들을 지시하고 지배한다.69
67Fensham, Emerging from the Dark Age Ahead—The Future of the North American Church, 186.
68Karl Rahner, S. J., The Shape of the Church to Come, tran., Edward Quinn (London: SPCK, 1972), 57.
69Ibid., 58-9.
미 래 교회의 힘이 아래의 포지션으로부터 온다는 말은 자신 주는 사랑은 그 힘과 권위를 아래의 그룹에게 양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하여 교회와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아래의 그룹—고통당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낯설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 회와 교회를 재창조 할 수 있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이 기억 해야만 하는 것은 그 들의 현재의 높은 포지션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변화가 있어야 하고 이동해야만 한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이 21세기 시작부터 계속적으로 사회에서 비난 받고 하나님의 미 션에 어려움을 만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 복음주의적 의미를 오해한 결과이다.
그들은 개인들의 중생의 체험 후에 성숙한 신앙생활을 살지 않았다.
그들은 그 들의 신앙적인 경험과 함께, 비기독교인들과 경쟁을 통하여 그들은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였고 존경받 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비기독교 세계를 식민지하는 승리적이고 제국적 미션은 서구교회의 기독교 세계관으로부터 왔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과거로부터 중생의 체험 이후에 그 실천과 목표는 치료, 돌봄, 자신과 생명 주는 것, 불공정한 환경과 사회로부터 아픈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사람 들에게 자유를 가져오고 해방시키는 것이다.
민중 신학은 고통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통치하고 억압하는 그룹들을 향하여 비판할 힘을 실어 주고 그들의 ‘한—고통’을 교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만나고 보호하는 장소를 제공하면서 그들이 고통으로부터 치료받고 해방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미션을 거절하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도덕적 성숙과 말과 행동의 일 치를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삼위일체로서 하나님 자신은 어떤 보 상도 없이 세계 안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성령은 교회가 예 수 그리스도가 했던 하나님의 미션을 실행하는 것을 돕는다.
교회는 예수 대신에 하나님의 미션을 해야 만 한다. 민중 신학에서 보여 준 대로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진실한 미션에 참여하기 위하 여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을 억압하는 불공정한 사회를 재 창조해야 한다.
결론
20세기 중반에 민중 신학은 에큐메니컬 운동으로서 한국 문화와 환경에서 태어났다.
이 신학적인 운 동은 암흑의 시대에서 한국교회와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상황들을 위해서 일하고 고뇌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빠른 경제적인 성 장 가운데 부유한 사람들과 통치하는 그룹으로부터 소외와 희생당한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 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면서 민중 신학은 21세기 에큐메니컬 선교적 교회론에 하나의 좋은 모델로 남아 있다.
어두운 시대에서 등대의 역할로 오늘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어디로 부터 왔는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물음을 받고 있다.
그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관하여, 민중 신학과 성서적 관점으로부터 한국교회는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하여, 공관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쓰이고 다른 복음서에 영향 주었다고 알려진 마가 복음서 를 통하여 예수가 땅 위에서 무엇을 선교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미션을 위해서 보내진 예수는 오클로스(Ochlos) 혹은 민중을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억압 받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을 선택한다.
예수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 받는 환경과 상황 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졌다. 결과적으로 민중 신학은 예수의 목 회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기원적인 본성으로서 간주한다. 민중 신학에서 민중은 한 교회로서 그리스도 몸과 하나님의 성전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곳에서 민중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함께 모인 다. 하나의 교회로서 민중은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교제하고 상호 관계한다.
그 공동체 안에서 예수는 그들의 불평등한 사회를 향하여 새로운 개혁을 가르친다. 행동과 실천을 중요시 하면서 민중 신학은 민중이 고통하고 억압받으면서 고통에 한숨 짖는 장소에 직접적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산업선교 미션처럼 기도 모임과 성경 공부를 통하여 믿음과 노동을 나 누고 그들의 고난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이 겪고 있는 한을 같이 경험한다.
민중 신학은 기도하는 민 중을 위하여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며 개혁을 준비하고 부와 권력과 힘을 가진 그룹들부터 안전하게 그 들의 몸을 숨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교회는 그들의 영역을 방어하고 불평등한 그룹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민중과 그들이 경험하는 ‘한’의 성직자가 된다.
그들이 억압하는 구조에 항거할 때에 민중 신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민중의 개혁과 자유 안에 재창조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 기독교인들이 21세 안에서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지금 그들의 문 제점들이 그들의 현 주소가 될 수가 있다.
새 신자들은 고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회자들의 성폭행, 성추행, 교회 재산의 횡령 그리고 교회의 전반적인 비도덕적 행위들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한국의 시민 들은 교회의 비도덕적 타락을 비난한다. 가장 큰 이슈는 기존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 보다 그들의 일터에서 이기적으로, 비도덕적으 로, 악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과거 민중 신학에서 보여 주었듯이 교회, 목회자들, 기독교인 들은 진실한 복음적인 운동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교회의 안에서와 밖에서 그들의 특권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사람들, 차별 받는 사람들이 있 는 가장 낮은 장소로 내려가게 된다. 아래로 내려가고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예수가 하나님의 미션을 위하여 그의 권위를 포기하는 일에서 보여 주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비우게 되고 동시에 고통 하는 자신이 된다.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하여 한국교회, 목회자들, 기독교인들 은 모두 다 사회의 고통 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자유롭게 해야 한다.
또한 사회 안에서 전체 구원을 위하여 그들은 비기독교 인들에게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 주어야 한다. 21세기에서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들은 한국 사회 안에서 미래 선교를 예견하 는 일이다. 민중 신학의 관점으로부터 이 전망은 민중은 누가 되는지를 아는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다 문화는 증가하는 국제적 결혼과 함께 이웃 나라들—일본, 중국, 베트남, 필리핀—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다. 외국인 배우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언어적인 불편함과 다른 문화와 민족성에 의하여 불공정한 대우와 차별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약자이면서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사회의 멤버들이 고령화가 됨에 따라 많은 노인들은 어려운 경제, 가난, 약한 건강 상태를 만나게 된다. 사회 안에서 그들은 가장 약한 사람들이고 아픈 사람들이다. 보태 어서, 장애자들과 만성질환 환자들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다. 위에 열거된 사회로 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이 민중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중은 사회의 힘없고 소외 받는 계층이다. 교회의 미션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좋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 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사랑하고 돌보았던 민중 오클로스(Ochlos)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변화와 성스러운 예식과 함께, 교회의 자유와 평화의 미션은 전체 사회와 세계를 위하여 실행되어야 한다. 전체 구원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은 사회의 중심으로 와야 한다. 반면에 부한 사람들과 통치하는 그룹은 변두리로 가야 한다.
그 전환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재창 조하는 방법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자유적인 교회나 보수적인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과 비기독 교인들조차 연합해야 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자유와 해방에 대하여 대화를 통하여 나누어야 한다. 나 는 이 운동이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이고 거룩한 성령의 재창조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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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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