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유교 : 고려시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송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
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어지는 <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 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의 ‘말학(末學)’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근본’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
까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을 형성하였다.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송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
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어지는 <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 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의 ‘말학(末學)’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근본’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
까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을 형성하였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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