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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한국의 유교 : 조선시대(전기)

* 한국의 유교 : 조선시대(전기)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법전편찬왕조’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다.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
과학을 망라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
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
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
권람*정창손*서거정*이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
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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