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유학 : 조선시대(중기)
조선 초 이래 훈구파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와 훈구 대 사림의 시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
유교는 의례를 매우 중시한다. ≪국조오례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복제도(五服制度)는
상당히 복잡해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 논의해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현종 대에는 효종에 대한 조대비(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간의 예송(禮訟)이 일어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였다.
숙종 조 50년 간 당쟁은 더욱더 치열해졌다.
조선조 중기에는 유학의 도를 밝혀 선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이
세워진 한편 지역 사회의 미풍양속을 이루고자 향약이 권장되었다.
조선조 성리학은 이황*이이를 배출한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황은 단순히 주자학을
답습하지 않고 이존설을 주장해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내적 성찰의 방법을 통해 천명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인간적 고귀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성리학적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외침에 저항하는 의리학파의 충렬 정신
이 두드러졌다. 조선과 명나라가 비록 대국과 소방(小邦)의 구별(分)은 있었지만 인도를 높이고
불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춘추의리의 이념에 있어서는 같았다. 화이론이나 존주론(尊周論)의
근본 정신도 여기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과 저항 정신에서,
그리고 효종대의 북벌론과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서도 의리학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예학의 시대’라 할만큼 예학이 발달하고 많은 논저가 나왔다. 임진*병자 양난을
전후해 무너진 기강과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순후한 민풍을 일으키는데 예학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조선조 후기까지 예학은 계속 탐구되어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 그리고 정약용
(丁若鏞)과 같은 실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유교는 일상 행위를 통해서 떳떳한 이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유교의 의례에는 관혼상제의 사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상례는 동양의 뿌리깊은 종법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리였다. 의례의 생활화는
곧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림을 뜻한다.
이 시기에 실학사상도 대두하였다. 유교는 일상적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학의 성격을 띤다. 주자학에서도 노불(老佛)을 공허하다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유학이 수기치인과 경세제민을 근본으로 하는 점은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조선조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던 주자학은 순수철학과 사회철학의 양면이 있었다. 전기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철학이 크게 발달했고, 후기에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이용후생을 위주로
한 실학이 발달하였다.
중국 명대 유학인 양명학은 수입 초기부터 영남*기호를 막론하고 주관주의철학으로 인식되어
거부당했다. 하지만 양명학에 대한 비평이 계속되면서도, 한편으로 국내외의 자극과 관심으로
인해 양명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생사와 영욕을 돌보지 않고 국가적 환란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주체적인 판단과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사상마련(事上磨練)을 주지로 하는 양명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던 한국 양명학은 중국의 양명학과 달리 선학의 풍을 띠지도 않았고
반주자(反朱子)를 표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사(實事)와 실공(實功)을 중시했던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조선 초 이래 훈구파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와 훈구 대 사림의 시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
유교는 의례를 매우 중시한다. ≪국조오례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복제도(五服制度)는
상당히 복잡해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 논의해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현종 대에는 효종에 대한 조대비(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간의 예송(禮訟)이 일어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였다.
숙종 조 50년 간 당쟁은 더욱더 치열해졌다.
조선조 중기에는 유학의 도를 밝혀 선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이
세워진 한편 지역 사회의 미풍양속을 이루고자 향약이 권장되었다.
조선조 성리학은 이황*이이를 배출한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황은 단순히 주자학을
답습하지 않고 이존설을 주장해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내적 성찰의 방법을 통해 천명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인간적 고귀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성리학적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외침에 저항하는 의리학파의 충렬 정신
이 두드러졌다. 조선과 명나라가 비록 대국과 소방(小邦)의 구별(分)은 있었지만 인도를 높이고
불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춘추의리의 이념에 있어서는 같았다. 화이론이나 존주론(尊周論)의
근본 정신도 여기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과 저항 정신에서,
그리고 효종대의 북벌론과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서도 의리학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예학의 시대’라 할만큼 예학이 발달하고 많은 논저가 나왔다. 임진*병자 양난을
전후해 무너진 기강과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순후한 민풍을 일으키는데 예학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조선조 후기까지 예학은 계속 탐구되어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 그리고 정약용
(丁若鏞)과 같은 실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유교는 일상 행위를 통해서 떳떳한 이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유교의 의례에는 관혼상제의 사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상례는 동양의 뿌리깊은 종법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리였다. 의례의 생활화는
곧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림을 뜻한다.
이 시기에 실학사상도 대두하였다. 유교는 일상적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학의 성격을 띤다. 주자학에서도 노불(老佛)을 공허하다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유학이 수기치인과 경세제민을 근본으로 하는 점은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조선조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던 주자학은 순수철학과 사회철학의 양면이 있었다. 전기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철학이 크게 발달했고, 후기에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이용후생을 위주로
한 실학이 발달하였다.
중국 명대 유학인 양명학은 수입 초기부터 영남*기호를 막론하고 주관주의철학으로 인식되어
거부당했다. 하지만 양명학에 대한 비평이 계속되면서도, 한편으로 국내외의 자극과 관심으로
인해 양명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생사와 영욕을 돌보지 않고 국가적 환란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주체적인 판단과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사상마련(事上磨練)을 주지로 하는 양명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던 한국 양명학은 중국의 양명학과 달리 선학의 풍을 띠지도 않았고
반주자(反朱子)를 표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사(實事)와 실공(實功)을 중시했던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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