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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唐宋代 유학자들의 排佛意識--한유와 주희를 중심으로(1)


* 당송대 유학자들의 排佛 의식 -한유와 주희를 중심으로


1. 한유의 적극적 배불 의식
1-1 당대의 불교
1-2 한유의 배불 의식
1-2-1 배불 의식의 근거
1-2-2 배불의 몇 가지 논점
1-2-3 이고의 소극적 배불 의식

2. 주희의 배불론과 이기론
2-1 장재의 배불 의식과 기론
2-2 교양으로서의 불교
2-3 청년기의 불교 이해
2-4 배불 의식
2-4-1불교에 대한 의식의 전환
2-4-2 불교경전 비판
2-4-3 육구연 비판
2-4-4 배불 의식과 이기론

3. 배불의식의 사상사적 의의
.........................................


1. 한유의 적극적 배불의식

1-1 당대의 불교

불교가 중국에 수입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세기 후반 한의 明帝 8년(65)에 楚王 英이 사문을
공경하고 불타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한대에서 위진 남북조까지
중국불교의 성립기에는 譯經사업과 道安, 慧遠, 鳩摩羅什, 축도생등의 초기 불교 이론가들에 의한
불교 이론의 소개와 불교의 중국화가 진행되었다. 한나라의 통치이념은 유학이었다.
유학의 영향하에 있었던 당시 중국 사회에 수입된 불교는 너무 낯선 이론이었다. 현실의 구체적이며
실제적 가치를 중요시하며 특히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유학에 비해 불교는
의식주를 비롯한 실제생활과 교리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논리였다.

이에 불교는 당시 민간에서 유행하던 도교와 손잡고 중국 사회로 진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불교가
문화적으로 현격히 다른 중국사회에 정착해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도교와의 결합이라는
전략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중국사회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중국 고대의 역사에서 한 절정기를
이루었던 한왕조(기원전 202-220)가 무너지는 데에 따른 사회적, 사상적 혼란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2세기 후반 사회적, 정치적 병폐의 조짐이 뚜렷해지면서 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과 농민들의
동요가 심화되었다. 이제 유교이념에 의한 사회질서는 사실상 붕괴되었던 것이다. 사회현실과
조응하는 의미를 상실한 유교는 통치자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이에 따라 지식인들의
관심은 도가사상 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들은 '淸談'이라 하는 논의를 일으켰지만 그것이 사회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적극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정치적·사상적 정황은 새로운 사상이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한대에 수입된 불교는 수당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 동안 유교와
도교 측의 불교비판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하게
중국사회에 침투하였다. 유교와 도교는 한나라와 삼국시대를 거쳐 위진 남북조와 수당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반면에 불교는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던 당나라 때에는 불교가 중국문화를 선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의 비판을 자기 발전을 위한 자극으로 수용하면서 불교의 중국화를 시도
했던 것이다.

사상계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했던 불교는 역사적 불교 박해사건으로 인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불교 탄압의 원인은 종교간의 갈등만이 원인이 아니었다. 당시 전성기를 맞은 불교는 사원 소유의
장원을 늘릴 수 있었고 이에 따라 국가 경제에 문제가 생길 지경에 이르렀다. 교단 내부에서는
승려들의 부패와 타락이 정도를 지나쳤으며 제멋대로 승려가 되거나 거짓으로 승려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 권력화된 이후의 어떤 지점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
하겠다. 수당대 동안 다양한 사상적 발전을 기하였으며 권력층의 비호를 받았던 불교는 이제
사회적인 부조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건들은 새로운 환경을
요구하도록 하였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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