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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唐宋代 유학자들의 排佛意識--한유와 주희를 중심으로(3)


2. 주희의 배불 의식과 이기론
2-1. 장재의 배불의식과 기론

송대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이 공맹의 정통 유학을 직접 계승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송대의 새로운
유학은 당대의 불교시대를 거치고 당말 오대의 혼란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왕조와 조응하는 이론으로
정립된 체계이다. 유학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불교사상과
대결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상 발전의 역사에서 전 시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그것을 딛고 나아가는 새로운 사유형태를 개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불교에서 주자학으로의 전환 과정도 그러한 법칙을 벗어나지 않았다.

송명의 유학-주자학은 인의를 핵심개념으로 하는 유가의 윤리, 도덕관념에 기초하면서 불교의
사변구조를 원용하고 아울러 도가의 우주론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철학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불교의 사변 구조를 원용하는 데에서는 표면적으로 대결양상이 강하게 드러났고 내부적으로
그 이론을 수용하는 형식을 보인다. 불교에 대한 비판적 수용의 종합은 주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북송의 다섯 선생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주희의 이기론이 선배 사상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불교 비판의
맥락도 그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여기서는 그들 중 비교적 선명하게 불교 비판의식을 보인 장재의 경우를 살펴보려고 한다.
장재도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상식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었다.
이는 여러 해 동안 불교와 도가의 서적을 연구하였음을 술회하는 글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재는 어렸을 때 범중엄으로부터 {중용}의 독서를 권유받았는데 여기서 큰 인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와 도교 측으로 시선을 돌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유학의 육경에 주목하면서
특히 {주역} 연구에서 일정한 성취를 보게 되고 이 때부터 다시 유학의 입장과 이론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때는 1056년 무렵이었고 장재 36세 때였다.

장재는 이 세계가 기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 기를 가지고 이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존재론은 장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기의 작용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기는 太虛이고 이것이 우주의 본체라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太虛卽氣'고 표현하였다. 기는 태허와 만물이라는 두 가지 존재양식을 가지며
그것은 모이고[聚] 흩어지는[散] 두 가지 운동을 통해 상호 전화된다. 기가 모이면 만물이 되고
그 기가 흩어지면 태허로 돌아가게 된다는 논리이다.

태허는 기의 본체로서 無形으로 존재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무한히 존재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형이다. 태허는 구체적 사물로 형상 되기 이전의 상태인 동시에 구체사물이
궁극적으로 귀결되는 상태이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有와 無의 관계가 아니라 幽와 明으로 설명
되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이 세상은 유의 세계임을 논증하고자 한 것이 장재의 입장이었다.
이는 무를 강조하는 불교의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장재는 有無 논쟁을 통해 유학은 실제적인 '있음'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그러한 세계를 중시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것과 '없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불교의 차별을 드러내었다.

허공이 곧 기라는 사실을 안다면 있음과 없음, 숨음과 드러남, 신과 화, 성과 명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며 둘이 아니니 모이고 흩어지고, 나가고 들어오고,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은 것의 근본을
미루어 볼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주역}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일 萬象이 태허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物과 虛가 서로 연관을 갖지 않고 형은 저 혼자 형이고, 성은 저 혼자 성이 되어
형과 성, 하늘과 사람 등이 서로 대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교와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장재는 기의 논리를 가지고 실제 세계를 헛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초월한 무의 세계를 추구하는
불교의 세계관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은 '있는 것'의 세계이고 다만 눈에 보이는 것[明]과
보이지 않는[幽]는 존재·상황이 공존할 뿐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없음'의 부정이다.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과 함께 공격의 목표가 되었던 부분은 현실 생활을 부정하는
태도였다. 불교에서 윤회설에 기초하여 사후에 또 다른 생을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현세의 삶을
경시하는 태도는 현실적 실천을 중시하는 유가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실에 대한 불교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배불 의식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2-2 교양으로서의 불교

주희는 전 시대의 시대사상으로 기능하였던 불교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사상은 화엄학과 선학으로 대표되는 당대 불교사상의 변용과 극복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만큼
불교사상과의 적극적 교섭을 통해 형성되었다. 따라서 주희사상의 기본 틀을 이루는 이기론도
불교사상과의 영향관계를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주희가 살았던 당시에 불교사상에 대한 지식은 교양인들의 상식이었다. 이는 불교가 송대 지식
사회의 근저에 뿌리내리고 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희는 유년기에 부친의 친구였던
세 사람의 스승을 만난다. 그들은 '건안의 세 선생으로' 불리는 유자휘, 유면지, 호헌이다.
당연히 이들도 불교에 대한 지식을 상당정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선승들과의 교유도 빈번하였다.
주희는 세 명의 스승 중 호헌에게 가장 오랜 시간동안 지도를 받았고, 유면지의 사위가 되었으며,
유자휘와 지역적으로 가까운 데에서 학습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유자휘의 문하에 있는 동안에
선생과 교유하던 승려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주희는 이 같은 사회적,
개인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주희의 불교에 대한 입장은 몇 개의 단계를 두고 고찰해야 한다. 첫째는 당시 일반교양이었던
불교에 우호적으로 접근하였던 시기가 있었다. 두 번째는 불교에 대한 우호적 인식에서 벗어나
그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는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보다 적극적인 배불 의식의 발현을 통해
자기 사상의 정립을 기하였던 시기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주희 배불 의식 형성의 과정을 점검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그 이기론 형성의 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상은 그 전 시대의 사상을 경험적 토대로
그것의 극복과 변용의 과정에서 드러난다는 관점에 동의한다. 주희의 불교비판은 사상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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