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유의 배불 의식
1-2-1 배불의식의 근거
한나라 이후 불교와 도교는 이전에 유가가 점하고 있던 사상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유불도
삼교가 표면적으로는 서로 대결하는 양상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상호영향 아래
자신들의 체계를 재구성하는 형태였다. 도가는 불가의 수양법을 흡수하여 心性론과 內丹을 수련하였다.
불교는 적극적으로 유가의 名敎 논리를 흡수하여, 예를 들면 유학의 五常에 대응하여 五戒를
설명하는 식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중국사회에 불교를 무리 없이 정착시키고자 한 불교 측의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유가 역시 도교와 불교의 사상을 흡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견지하였다.
당나라 초기에는 불도 양교가 모두 성행했지만 도교를 더욱 높이는 분위기였다. 이는 당의 이씨
황실을 대표하는 태종이 황실과 동성인 노자의 사상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도교의 지도자였던 道士와 女冠(여도사) 들의 법정 지위가 불교의 승려 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불교에 대해서도 제약을 가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불경의 번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 시기 불교와 도교의 세력이 강화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그들의 심성학설이
비교적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유가 이론에서 약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양한 이후의 유학은 경학중심의 유학이었고, 거기서는 심성수양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인간의 주체성이나 자각적 의지를 발휘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당 중기 이후 장기간의 군벌 할거로 대표되는 정치적 불안정 상황은 사회적 혼란을 예비하고 있었다.
유교적 강상명교는 이미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고 불교나 도교는 심성이론을
비롯한 화려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곤란한 입장에 처한 사회적, 정치적 , 민족적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당나라가 시작된 이후 줄곧 장기간 사상계의 주도적
위치를 점하며 성행하였던 불교와 도교 자체 내의 모순은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 황실이 도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와 도교 측에서는 당시 대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불교에 대항할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 중기에
이르러 유가 쪽에서 불교에 대한 배척론을 강력하게 들고 나온 이가 바로 한유이다. 한유는 유불도
삼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그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낸 뒤 인의를 중심논리로 삼는 유가의 이상이
아니면 당대 사회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이는 이들 삼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던
유종원 등 보다 더 강력하게 배불론을 펼 수밖에 없었던 맥락과 연결되는 것이다.
한유는 도가와 불가를 반대하는 논리와 유가의 입장을 선양하는 의견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한유는 유가의 기본 이념은 仁과 義이며 仁義의 정신에 기초하고 경전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계도하는 것이 유가의 임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유가는 사회의 정치, 법률제도나 윤리관계의
정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여기서도 인의의 정신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의 기본 원리는 사회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유가의 논리가
현실적 적응력을 가진 이론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당시 선종에서 일상생활 안에서의
불성 체인을 추구하였던 것에 대해 인간의 일상생활과 연관된 문제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유가의 논리를 통해야 가능한 것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한유가 불교 비판의 근거로 삼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로 정리하 수 있다.
첫째는 {열반경}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 그러므로 寂滅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諸行無常寂滅爲樂"는
가르침에 대해 불교가 무위도식하는 종교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불교는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여
마음 닦는 법만을 가르치고 천하를 돌보지 않아 하늘이 부여한 常道를 무너뜨린다고 말한다.
둘째는 "오랑캐들에게 왕이 있는 것이 중국에 왕이 없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의 말에 근거하여
불교는 천박한 오랑캐들의 문화라고 비판하였다.
1-2-2 배불의 몇 가지 논점
한유의 불교비판은 [原道] [論佛骨表] [與孟間書] 등의 글을 통해 제기 되었다. 그는 이들 작품을
통해 몇 가지로 배불의 논점을 제시하였다.
우선 유가의 정통의식 고취의 필요성과 연관된 문제이다. 그는 [원도]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공자 사후 진나라 때는 분서의 화를 입었고, 한나라 때는 황로, 진·위·양·수 동안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도덕인의를 말하는 자들이 양주에게 들어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가고, 도가에게 가지 않으면
불교 쪽으로 갔다. 그런데 저것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이것으로 나와서 들어 간 것은 주가 되고
나온 것은 그에 따르는 경우가 되거나, 들어간 것이 부차적인 것이면 나온 것은 굽은 것이 되었으니
아아! 뒤의 사람들이 인의도덕의 논의를 듣고자 해도 누구를 좇아 들을 것인가?
라고 하여 유가의 도가 전승되지 못하고 끊긴 이유를 말하면서 끊어졌던 도를 다시 이어야 할 것을
핵심으로 하는 도통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도가나 불가의 것과 다르다.
요는 그것을 순에게 전했고, 순은 우에게 전했으며, 우는 탕에게 전하고 탕은 문·무·주공에게
전하였고, 문·무·주공은 공자에게 전했는데 공자가 맹자에게 전했다"고 하여 요순에서 맹자에
이르는 유가 정통의 맥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맹자 이후에 그 도가 전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 뒤 다시 그 도를 복구함으로써 유가의 정통적 입장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할 것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것은 배불 의식의 전제가 되는 항목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한유의 배불은 유가의 입장을
다시 강조하고 실현하기 위한 의도에서 진행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엔 구체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도의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유가의 관점으로 비판하는 부분이다.
우선 유가에서 대대로 전승하였던 도의 핵심은 인의를 강조하는 도덕관이다. 이것은 경전에
잘 드러나 있으며 이 논리에 따르면 사회가 질서 있게 운용될 수 있고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조정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불교는 미신적 성향이 짙어서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무시하고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다고 비판하였다. 사회의 정상적 생활과 생산에 무익한
논리라는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사회분업의 측면에서도 언급되었다.
옛날의 백성은 네 계층으로 구성되었었는데 지금의 백성은 여섯으로 이루어진다. 옛날에는
가르치는 사람이 하나의 계층을 차지했었는데 지금은 가르치는 사람이 세 개의 계층을 차지한다.
농사짓는 계층은 한 계층에 해당되고 나머지 여섯은 식량을 소비하는 계층이고 공업에 종사하는
계층은 하나인데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은 여섯이다.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은 하나이고
여섯 계층이 그것에 의지한다. 이런 상황이니 어떻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도둑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생산과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은 적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은 전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비율로 불어나서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생산과 직접 노동을 경시하는 불교적 의식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한유의 주장이다.
또 인륜을 무시하는 불교의 관점은 사람의 관계를 해체한 것이고 이는 사람이 풀어가야 할 현실
사회의 문제에 무력한 관점임을 지적하였다. 불교에서는 "군신 관계를 버리고 부자 관계를 제거하며
서로 길러주는 도리를 금지함으로써 청정 적멸의 경지를 구한다"고 하면서 이런 생각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요순으로부터 전해진 도가 맹자 이후에 단절 된 것이 그 원인이라 하였다.
그래서 {대학}의 팔조목에서 正心과 誠意는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임에
반해 불교에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천하 국가를 도외시하고 그 인륜을 지워버림으로써
자식이 그 부모를 부정하고 신하가 군주를 부정하며 백성이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을
초래하도록 하는 것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교의 입장은 국가 체제의 존립을
흔드는 관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논불골표]에서는 역대 제왕이 불교를 신봉함
으로써 국가의 멸망을 초래했던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
위와 같은 배불 의식에 기초하여 한유는 유학의 선양을 주장하고자 했다. 한유가 강조한 유학의
형태는 우선 유학의 기본관점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유학의 기본 이념은 인의라고 정리하고
그것의 실천은 博愛의 실행으로 파악했다. 박애를 실천하는 장은 인간의 일상 안에서임을 강조
하면서 불교의 출세간적 경향과 대비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유가의 실천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학}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방법을 강조하였다.
그는 공자와 맹자를 높이는 동시에 요순으로부터 맹자에 이르는 도통을 제시하면서 유가 정통사상의
재정립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1-2-3 이고의 소극적 배불의식
한유의 제자이며 당말 유학 측의 새로운 동향을 이야기 할 때 한유와 병칭되는 인물이 바로 이고
(774?-836?)이다. 한유가 적극적으로 불교에 대항하는 의식을 드러내었다면 이고는 유학에
불교적 사유를 절충함으로써 유학의 이론적 발전을 시도하였다. 한유의 배불 논리는 주로 구체적인
현실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에 비해 이고는 심성이론 등의 철학 개념을
근거로 배불 의식을 폈다. 그래서 이고는 문학적인 면에서 스승을 넘어설 수 없었지만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이후 유학자들에게 한유 보다 깊은 영향을 미치는 심성론을 제시하였다고 평가되기
도 한다. 이고는 심성론에서 '불교에서 빌려서 유학으로 들여온다 援佛入儒'의 관점을 가졌다.
한유가 {대학}에서 제시한 현실적 방법론을 강조했다면 이고는 {중용}의 심성설을 중심으로
하면서 불교의 심성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복성서]를 지었다.
그래서 송유의 연원을 말할 때 이고의 [복성서]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역} {중용} 노장,
불교를 종함하여 구성되었고 궁극적으로 유가의 도를 천명하였다. 이고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의 말을 없애지는 못할 것 夫子復生 不廢吾言'이라는 자긍심을
보였다. 이고는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성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성을 미혹시키는
것이 정"이라고 전제하고 본성을 밝히는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의 성과
성인의 성은 본래 다르지 않은 것이므로 누구나 다 본성을 회복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일반인들의 복성을 위해 禮樂의 제정과 그 실천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 명의 연관에 관한 논의가 이미 유가의 경전 속에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불교나 노장에서
그걸 구하려 한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한유와 이고는 불교에 대한 태도에서 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지만 유학을 개조하고 부흥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한유는 {맹자}를 높였으며 {대학}의 논리를 강조했고, 이고는
{대학}과 {중용}의 논리를 유학의 요체로 파악하였다. 이는 이전의 유가들이 육경을 중시하였던
것과 다른 부분이다. 한유와 이고는 {맹자}와 {대학}과 {중용}을 {논어}와 함께 중시하였다.
송대의 유자들이 사서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펼쳤던 태도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1-2-1 배불의식의 근거
한나라 이후 불교와 도교는 이전에 유가가 점하고 있던 사상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유불도
삼교가 표면적으로는 서로 대결하는 양상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상호영향 아래
자신들의 체계를 재구성하는 형태였다. 도가는 불가의 수양법을 흡수하여 心性론과 內丹을 수련하였다.
불교는 적극적으로 유가의 名敎 논리를 흡수하여, 예를 들면 유학의 五常에 대응하여 五戒를
설명하는 식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중국사회에 불교를 무리 없이 정착시키고자 한 불교 측의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유가 역시 도교와 불교의 사상을 흡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견지하였다.
당나라 초기에는 불도 양교가 모두 성행했지만 도교를 더욱 높이는 분위기였다. 이는 당의 이씨
황실을 대표하는 태종이 황실과 동성인 노자의 사상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도교의 지도자였던 道士와 女冠(여도사) 들의 법정 지위가 불교의 승려 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불교에 대해서도 제약을 가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불경의 번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 시기 불교와 도교의 세력이 강화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그들의 심성학설이
비교적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유가 이론에서 약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양한 이후의 유학은 경학중심의 유학이었고, 거기서는 심성수양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인간의 주체성이나 자각적 의지를 발휘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당 중기 이후 장기간의 군벌 할거로 대표되는 정치적 불안정 상황은 사회적 혼란을 예비하고 있었다.
유교적 강상명교는 이미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고 불교나 도교는 심성이론을
비롯한 화려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곤란한 입장에 처한 사회적, 정치적 , 민족적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당나라가 시작된 이후 줄곧 장기간 사상계의 주도적
위치를 점하며 성행하였던 불교와 도교 자체 내의 모순은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 황실이 도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와 도교 측에서는 당시 대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불교에 대항할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 중기에
이르러 유가 쪽에서 불교에 대한 배척론을 강력하게 들고 나온 이가 바로 한유이다. 한유는 유불도
삼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그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낸 뒤 인의를 중심논리로 삼는 유가의 이상이
아니면 당대 사회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이는 이들 삼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던
유종원 등 보다 더 강력하게 배불론을 펼 수밖에 없었던 맥락과 연결되는 것이다.
한유는 도가와 불가를 반대하는 논리와 유가의 입장을 선양하는 의견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한유는 유가의 기본 이념은 仁과 義이며 仁義의 정신에 기초하고 경전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계도하는 것이 유가의 임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유가는 사회의 정치, 법률제도나 윤리관계의
정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여기서도 인의의 정신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의 기본 원리는 사회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유가의 논리가
현실적 적응력을 가진 이론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당시 선종에서 일상생활 안에서의
불성 체인을 추구하였던 것에 대해 인간의 일상생활과 연관된 문제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유가의 논리를 통해야 가능한 것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한유가 불교 비판의 근거로 삼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로 정리하 수 있다.
첫째는 {열반경}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 그러므로 寂滅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諸行無常寂滅爲樂"는
가르침에 대해 불교가 무위도식하는 종교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불교는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여
마음 닦는 법만을 가르치고 천하를 돌보지 않아 하늘이 부여한 常道를 무너뜨린다고 말한다.
둘째는 "오랑캐들에게 왕이 있는 것이 중국에 왕이 없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의 말에 근거하여
불교는 천박한 오랑캐들의 문화라고 비판하였다.
1-2-2 배불의 몇 가지 논점
한유의 불교비판은 [原道] [論佛骨表] [與孟間書] 등의 글을 통해 제기 되었다. 그는 이들 작품을
통해 몇 가지로 배불의 논점을 제시하였다.
우선 유가의 정통의식 고취의 필요성과 연관된 문제이다. 그는 [원도]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공자 사후 진나라 때는 분서의 화를 입었고, 한나라 때는 황로, 진·위·양·수 동안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도덕인의를 말하는 자들이 양주에게 들어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가고, 도가에게 가지 않으면
불교 쪽으로 갔다. 그런데 저것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이것으로 나와서 들어 간 것은 주가 되고
나온 것은 그에 따르는 경우가 되거나, 들어간 것이 부차적인 것이면 나온 것은 굽은 것이 되었으니
아아! 뒤의 사람들이 인의도덕의 논의를 듣고자 해도 누구를 좇아 들을 것인가?
라고 하여 유가의 도가 전승되지 못하고 끊긴 이유를 말하면서 끊어졌던 도를 다시 이어야 할 것을
핵심으로 하는 도통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도가나 불가의 것과 다르다.
요는 그것을 순에게 전했고, 순은 우에게 전했으며, 우는 탕에게 전하고 탕은 문·무·주공에게
전하였고, 문·무·주공은 공자에게 전했는데 공자가 맹자에게 전했다"고 하여 요순에서 맹자에
이르는 유가 정통의 맥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맹자 이후에 그 도가 전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 뒤 다시 그 도를 복구함으로써 유가의 정통적 입장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할 것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것은 배불 의식의 전제가 되는 항목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한유의 배불은 유가의 입장을
다시 강조하고 실현하기 위한 의도에서 진행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엔 구체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도의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유가의 관점으로 비판하는 부분이다.
우선 유가에서 대대로 전승하였던 도의 핵심은 인의를 강조하는 도덕관이다. 이것은 경전에
잘 드러나 있으며 이 논리에 따르면 사회가 질서 있게 운용될 수 있고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조정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불교는 미신적 성향이 짙어서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무시하고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다고 비판하였다. 사회의 정상적 생활과 생산에 무익한
논리라는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사회분업의 측면에서도 언급되었다.
옛날의 백성은 네 계층으로 구성되었었는데 지금의 백성은 여섯으로 이루어진다. 옛날에는
가르치는 사람이 하나의 계층을 차지했었는데 지금은 가르치는 사람이 세 개의 계층을 차지한다.
농사짓는 계층은 한 계층에 해당되고 나머지 여섯은 식량을 소비하는 계층이고 공업에 종사하는
계층은 하나인데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은 여섯이다.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은 하나이고
여섯 계층이 그것에 의지한다. 이런 상황이니 어떻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도둑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생산과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은 적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은 전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비율로 불어나서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생산과 직접 노동을 경시하는 불교적 의식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한유의 주장이다.
또 인륜을 무시하는 불교의 관점은 사람의 관계를 해체한 것이고 이는 사람이 풀어가야 할 현실
사회의 문제에 무력한 관점임을 지적하였다. 불교에서는 "군신 관계를 버리고 부자 관계를 제거하며
서로 길러주는 도리를 금지함으로써 청정 적멸의 경지를 구한다"고 하면서 이런 생각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요순으로부터 전해진 도가 맹자 이후에 단절 된 것이 그 원인이라 하였다.
그래서 {대학}의 팔조목에서 正心과 誠意는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임에
반해 불교에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천하 국가를 도외시하고 그 인륜을 지워버림으로써
자식이 그 부모를 부정하고 신하가 군주를 부정하며 백성이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을
초래하도록 하는 것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교의 입장은 국가 체제의 존립을
흔드는 관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논불골표]에서는 역대 제왕이 불교를 신봉함
으로써 국가의 멸망을 초래했던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
위와 같은 배불 의식에 기초하여 한유는 유학의 선양을 주장하고자 했다. 한유가 강조한 유학의
형태는 우선 유학의 기본관점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유학의 기본 이념은 인의라고 정리하고
그것의 실천은 博愛의 실행으로 파악했다. 박애를 실천하는 장은 인간의 일상 안에서임을 강조
하면서 불교의 출세간적 경향과 대비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유가의 실천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학}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방법을 강조하였다.
그는 공자와 맹자를 높이는 동시에 요순으로부터 맹자에 이르는 도통을 제시하면서 유가 정통사상의
재정립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1-2-3 이고의 소극적 배불의식
한유의 제자이며 당말 유학 측의 새로운 동향을 이야기 할 때 한유와 병칭되는 인물이 바로 이고
(774?-836?)이다. 한유가 적극적으로 불교에 대항하는 의식을 드러내었다면 이고는 유학에
불교적 사유를 절충함으로써 유학의 이론적 발전을 시도하였다. 한유의 배불 논리는 주로 구체적인
현실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에 비해 이고는 심성이론 등의 철학 개념을
근거로 배불 의식을 폈다. 그래서 이고는 문학적인 면에서 스승을 넘어설 수 없었지만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이후 유학자들에게 한유 보다 깊은 영향을 미치는 심성론을 제시하였다고 평가되기
도 한다. 이고는 심성론에서 '불교에서 빌려서 유학으로 들여온다 援佛入儒'의 관점을 가졌다.
한유가 {대학}에서 제시한 현실적 방법론을 강조했다면 이고는 {중용}의 심성설을 중심으로
하면서 불교의 심성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복성서]를 지었다.
그래서 송유의 연원을 말할 때 이고의 [복성서]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역} {중용} 노장,
불교를 종함하여 구성되었고 궁극적으로 유가의 도를 천명하였다. 이고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의 말을 없애지는 못할 것 夫子復生 不廢吾言'이라는 자긍심을
보였다. 이고는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성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성을 미혹시키는
것이 정"이라고 전제하고 본성을 밝히는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의 성과
성인의 성은 본래 다르지 않은 것이므로 누구나 다 본성을 회복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일반인들의 복성을 위해 禮樂의 제정과 그 실천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 명의 연관에 관한 논의가 이미 유가의 경전 속에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불교나 노장에서
그걸 구하려 한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한유와 이고는 불교에 대한 태도에서 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지만 유학을 개조하고 부흥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한유는 {맹자}를 높였으며 {대학}의 논리를 강조했고, 이고는
{대학}과 {중용}의 논리를 유학의 요체로 파악하였다. 이는 이전의 유가들이 육경을 중시하였던
것과 다른 부분이다. 한유와 이고는 {맹자}와 {대학}과 {중용}을 {논어}와 함께 중시하였다.
송대의 유자들이 사서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펼쳤던 태도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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