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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唐宋代 유학자들의 排佛意識--한유와 주희를 중심으로(4)


2-3 청년기의 불교이해

주희의 부친인 주송을 비롯하여 건안의 세 선생들은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접지 않고 중앙무대로부터 축출 당한 사람들이었다. 주희는 부친의 유지에 따라
소흥13년(1143)부터 세 선생에게 사사하게 되었다. 특히 유자휘를 통해서 선학에 대한 이해와
선승들과의 교유가 가능하였다.

유자휘는 선승들과의 교유가 활발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선공부를 실천하기도 했다.
유학자로서 유학적 지향을 체득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선학을 택했다는 점이 전제되기는
하지만 그의 선적 취향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주희는 유자휘와 교유하던 선승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스승과 선승이 대화하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듣기도 하면서 선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주희가 과거시험을 보러 가면서 당시 看話禪의 대표자였던
大慧宗의 어록 한 권을 지니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선에 대한 그의 관심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5세 이전 주희가 심취하였다고 추정되는 불교, 특히 선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소년기 스승의 영향으로 선에 대한 관심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소년기 스승의 영향으로 선에 대한 관심을 강화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대혜종고나 그의 法嗣인 道謙과 교류했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근거해서 그가 간화선 측의 선학을 경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희는 "내가 열 대여섯 살이 되었을 때 여기에 마음을 둔 적이 있다. 어느 날 병옹의 집에서 한
승려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상응하는 대답만 할 뿐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유선생과 대화하면서 밝고 신령한 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선생이 후에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고 나는 드디어 그 승려에게 더욱 오묘한 경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의견을 물으러 갔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매우 좋았다. "고 술회한 바 있다.

당대로부터 주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적 교양은 사대부들의 일반상식이라 할만큼 보편적
으로 일반에 침투해 있었다. 따라서 주희가 불교를 접하였던 것은 자연스러운 맥락에서 이루어
졌을 것이다. 특별히 유명한 선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스승의 선학적 방법을 보면서 좀 더
심화된 형태의 불교에 대한 지식과 견해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주희 불교이해의
첫 단계가 되는 유년기의 불교이해는 당시의 사상적 분위기와 스승의 영향으로 구성되었다고 하겠다.
이 때는 당연히 불교를 우호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띄었다. 이는 유학자로서의 주희의 사상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2-4 배불 의식
2-4-1 불교에 대한 의식의 전환

주희가 불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이동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이동은 25세
이후 주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스승이다. 이동은 나종언에게 배웠으니 역시 정이 계열의
학문을 한 사람이다. 주희는 이동을 처음 만나서 선에 대한 질문을 했지만 이동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성인의 서적을 잘 보라는 말을 했을 뿐이라 한다. 그 자리에서 주희는 이동이 선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범범한 대답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동의 충고에 따라 유학의
경전을 세밀하게 독서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결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주희는 이동과의
만남을 통해 유학에 경전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어려서 지식이 없었을 때 선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이 선생은 그것이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곡진하게 말씀해 주셨다. 뒤에 자세히 생각해 본 뒤에는 이쪽에 대한 흥미가 많이 생겼다.
이쪽에서 얻은 것이 늘어난 만큼 저쪽에 대한 관심은 줄어서 지금은 닫히고 녹아버려 뜻을 둘
것이 없다. 결국 불교에는 옳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이동이 주희에게 이야기한 핵심은 유학에 철저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관심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였고, 이동은 그 점에 주목해서 복잡한 설명 없이 그 때에 꼭 필요한
말만 전했을 것이다. 이후 주희는 불교에 대한 인식에서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우호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인 입장으로의 전환이었다. 이는 이동의 조언대로 유가의 경전을 상세히
연구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결점을 찾아내게 되었고 이를 통해 불교비판의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던 계기는 말했던 바와 같이
이동과의 만남이었고, 그 외에 또 다른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방관으로서의 정치참여였다.

주희와 이동의 처음 만남은 주희가 동안현의 주부가 되어 임지로 가던 길에 이루어졌다.
주희는 23세 때 동안현의 주부로서 현실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주희는 50여년 동안
네 명의 황제(고종, 효종, 광종, 영종)를 거치면서 지방관으로서의 외임기간 9년에 40일 간의
내임을 제외하고는 家居나 도교사원을 관리하는 사록관으로 지냈다. 직접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던
기간은 극히 짧았으나 23세 이후 당시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견해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고
해야 한다.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식은 주희가 현실정치에서 유학적
이상의 실현을 지상의 목표로 삼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현실적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사유라고 판단되었던 불교의 영향으로부터의 탈피였을 것이다.
불교에 대한 대응의식은 당시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사유에 대한 극복의
과정과 통하는 것이다.


2-4-2 불교 경전 비판

주희는 불교에 대한 비판의 입장을 확고히 하면서 자기 학문의 독자성을 견지하는 동시에 유학을
사회 전면으로 내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당대의 혼란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출세간적인
노장이나 불가의 사상보다 현실참여를 강조하는 유학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우선 노장이나 불교 사상의 대사회적 무력함을 강조해야 했다. 물론 주희 이기론의
체계를 세우는 데에서 노장 사상 특히 불교의 이론이 상당부분 원용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기본적 태도는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주희는 불교 사상에 대한 비판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그 시대와 조응하는 유학의 새로운 학풍을 조성해 갔던 것이다.

주희의 불교비판에 관한 자료는 그의 {문집}에 들어있는 편지글들과 {주자어류} 권126[석씨]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가 어류에서 언급하는 불경은 {四十二章經} {大般若經} {華嚴經}
{法華經} {楞嚴經} {圓覺經} {金剛經} {光明經} {心經} {維摩經} {肇論} {華嚴大旨} {華嚴合論}
{景德傳燈錄} 등이다. 주희는 중국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불경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불교의 책은 처음에 {사십이장경]만 있었는데 거기서 말한 것이 매우 비루 했다. 이후에 나날이
거기에 더 보태었는데 그것은 다 중국의 문사들이 도와서 지은 것이다. … 대부분 노자와 열자의
뜻을 표절하여 그것을 바꾸고 보태어서 그 설을 꾸몄다.

주희에 의하면 불교의 경전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내용이 부실해서 볼 것이 없는 {사십이장경}
하나뿐이다. 그 외에 당시 유행하던 불경들은 모두 도가사상을 빌려 그 체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단정했다. 기본 경전에 대한 부정은 그 사유의 기초-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비판 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경전비판이라 생각했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언급한
사람이야말로 불교비판의 핵심을 얻은 것으로 평가했다. 이를 통해 불교는 기본적으로 중국사상의
일부인 노장사상의 변용이라는 점을 전제함으로써 그 실체를 부정하는 것을 기초로 하면서
불교의 기본관점 내지는 방법론에 대한 비판을 더하였던 것이다.

주희는 "불가는 우선 열자를 훔쳤다. 열자는 耳目口鼻心體의 여섯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불가는
곧 육근이 있다고 했고 또 여기에 셋씩을 더하여 18계를 만들었다"든지 "{원각경}을 보면 '지금
四大가 모두 흩어졌는데 이제 죽은 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열자의 '육신은 그 뿌리로 돌아가고 정신은 그 문으로 들어가니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훔쳐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불교가 노장계열의 사상을 등에 업고 중국사회에 침투한
이단이라고 전제한 뒤 맹자의 이단 배척 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불교를 배척해야 할 것을 자임하였다.

주희는 35세 때 吳公濟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유학과 불교의 기본입장을 분명히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논어}나 {맹자}에 나오는 관점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불교의 理事無碍說에
들어 있는 모순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화엄학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지적한 말이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유학과 불교는 그 근본은 같지만 말단은 다르다'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근본이 같다면 말단도 반드시 같을 것인데 말단이 서로 다르다면 근본도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두 그루의 나무가 같은 종류의 뿌리를 갖고 있더라도 서로 연관이 없다면 두 가지의
열매를 맺게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해서 유학과 불교는 기본적으로 다른 체계임을 선언했다.
[이백간에게 답하는 편지]에서는 기본적 인간관계와 윤리적 행위를 부정하는 불교의 입장을
지적하였다. "석씨는 바로 깨달으면 인을 행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논의는 고상하고 좋지만
그 실질과 근본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고 해서 부자, 군신 등의 사회관계를 부정하는
불교에서 인을 실천할 수 있는 장이 과연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밝혔다. 계속해서 상달과
하학 공부를 연결시키지 않고 상달 공부만 강조하는 불교의 공부방법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이 현실문제에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불교의 한계라는 것이다.

주희에 의하면 중국 불교의 가장 발전된 형태는 선학이다. 불교가 선학으로 선회하였던 것은
달마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사십이장경}이나 {능엄경} 등의 경전을 제외한
여러 불경은 모두 중국인들이 주로 노장계열의 사유들을 빌려서 꾸민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밝힌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의 논의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한 달마는 그 방법을 완전히 수정하여 면벽정진하는 풍조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선학이 유행하게 되었고 선학의 이론들이 다양하게 나왔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공허한 이론을 감추기 위한 미봉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2-4-3 육구연 비판

주희의 불교비판에는 불교계를 향하는 것 이외에 유학 자체내의 불교적 취향에 대한 비판도
함께 들어 있다. 이것의 대표적 예가 육구연에 대한 주희의 평가이다. 주희와 육구연은 1175년
여조겸의 주선으로 '아호에서의 만남'을 가졌다. 당시 쟁점이 되었던 것은 학문방법이었다.
여기서 육구연은 주희의 학문이 '支離'하고 방만하다는 점을 지적했고, 주희는 육구연의 경전을
중시하지 않는 태도를 중점적으로 비판했다. 이후 육구연이 세상을 떠나는 1192년까지 주희의
육구연 비판은 계속되었다.

1175년 아호의 만남에서 드러난 주희와 육구연의 쟁점은 비교적 덜 심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갈등은 1181년 여조겸이 세상을 떠나고 육구연의 문하에 있다가 주희의 문하로
들어온 趙建(立之, 1147-1183)의 묘지명을 계기로 심화되었다. 이런 갈등관계는 주희 만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주희에 의하면 육구연의 학문은 선학을 유학으로 끌어와 자기화 시킨 것이다.
그는 1183년 조건의 묘지명에서 자신을 만나기 전에 조건은 육구연으로 부터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육구연과의 관계를 경직된 긴장관계로 가게 하였다.
육구연의 선학적 취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기가 주희 50세 이후에서 만년에 이르는 시기였던
점은 그 시기에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최고조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으로 주희 사상의
체계가 확립되는 것과 불교비판의 논조가 비례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희는 "불교는 허무한 것이고 우리 유학은 실질적인 것이다. 불교는 두 가지로 나누었고 우리
유학은 한가지로 했다. 불교는 사와 리를 긴밀하게 연관하지 못했고 아울러 그것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결국 虛와 實이 불교와 유교의 기본관점이라는 말이다. 주희의 육구연 비판은
유학에서의 불교적 취향을 걷어내기 위한 의도에서 진행되었다고 하겠다.


2-4-4 배불의식과 이기론

사상 외적으로는 국내외 정세의 불안을 타개하고 사상 내적으로는 한당을 풍미했던 도가와 불교
사상에 대응하려는 의도로 제출되었던 것이 송대의 새로운 유학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종합했던
사람이 주희이다. 그는 당대에 동일한 문제의식-'다시 유학으로'라는 의식을 견지한 선배와
동료 유학자들의 성과를 소화, 흡수하여 선진시대와도 다르고 한당의 유학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유학을 생산하였다.

위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유학을 지지하는 이론적 기초는 이기론이다. 따라서 이기론은 주희
사상의 기본적 틀을 이루는 개념이다. 주희는 리와 기 두 개념과 그들의 상호연관으로 세계의
제현상을 해명하였다. 이는 선배사상가들의 생각과 불교나 도가 사상 등 동시대의 다양한 사유를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 체계화된 것이다.

리와 기로 구성되는 세계를 설명하는 논리로 주희는 理一分殊를 말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리와 기로 설명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논의이다. 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 안에
보편적으로 들어있는 원리이고 기는 그들 간의 개별성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기에 의해 구성되는
자연계의 다양한 존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원리를 지니기 때문에 같은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다.
리는 이러한 合一的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인 것이다. 이일분수설에서는 만물의 다양성 안에
들어 있는 각 개별존재의 존재근거와 당위법칙으로서의 보편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천인합일의
원리를 현실사회 안에서 구현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일분수는 보편과 특수, 동일성과 다양성의
연관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일분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體用論이나 화엄의 四法界說 등의 방법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불교의 방법적 원용이라는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일분수설을
통해 주희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불교의 입장과 다른 측면을 향하고 있었다. 만물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논증하는 과정을 통해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행위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실천의 문제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다. 현실 사회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최선인가를 묻는 것이 유가의 기본관점이라면 주희도 바로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
실천에 대한 지향을 사회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와 다른 세계관을 내보인 불교 비판이
우선적 과제였을 것이다.

주희의 불교 비판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에 비롯되는데 자신의 사상적 발전이 심화될수록
그 강도도 강화되었다. 이는 육구연 비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육구연의 선학적 취향에 대한
강한 비판은 1180년대 이후, 주희 나이 50대 이후의 일이다. 불교비판의 핵심은 주로 인간의
일상생활을 경시하는 태도를 중심으로 한다. 이일분수설을 설명하면서도 언급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불교의 사유를 자신의 틀 안으로 들여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영향력 있는
가치로서의 불교에 반대하고 그것의 대사회적 무력함을 드러냄으로써 유학의 새로운 입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 주희의 불교비판의 노선이었다. 주희에 의해 완정된 체계를 보인 송대의
새로운 유학은 불교 사상을 극복, 변용 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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