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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茶山 經學의 脫朱子學的 世界觀/ 금장태

茶山經學의 脫朱子學的 世界觀

1. 茶山經學의 체계와 과제

다산은 자신의 학문체계를 “六經四書로써 修己하고 一表二書로써 天下.國家를 위하니, 本末을 갖추었다.”1)고 하였지만, 그의 경학저술이 걸치는 범위는 ‘六經四書’를 중심축으로 삼아, 小學‧修養論‧禮學‧經世論에 까지■확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六經四書’의 經學이 經世論인 ‘一表二書’와 本.末을 이루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곧 다산의 經學이 經世學과 단절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茶山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茶山經學이 그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 되고 있다.2)

다산은 자신의 경학체계를 ‘六經.四書’라 언급하여, ‘四書’보다 ‘六經’을 앞세우고 있다. 경학사를 돌아보면 먼저 공자에 의해 경전은 ‘六經’의 체제로 편찬되었다 하며, 다음으로 秦代에 파괴당한 뒤에 漢代에 와서 복구된 경전은 ‘五經’이었고, 이에따라 ‘五經’중심의 경학체계를 이루었다. 그후 宋代에 와서 朱子에 의해 ‘四書’의 체제가 정립되면서 ‘四書’를 ‘五經’보다 앞세워 ‘四書五經’으로 일컬어지면서 ‘四書’중심의 경학체계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산이 ‘六經’을 앞세워 표방하는 것은 주자의 경학체계를 탈피하고 漢代의 경학을 넘어서 先秦경학의 체계로 돌아가서 출발하고자 하는 다산경학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다산은 ‘四書.五經’의 주자학적 경학체계화로부터 벗어나, ‘六經.四書’라는 새로운 경학의 틀을 짜고 있는 것이다.3)

茶山의 경학적 형성과정은 4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太學生시절인 23세때(1784) 正祖의 70條問에 대한 對策인 ⌈中庸講義⌋를 저술할 때로서 茶山經學의 봄으로 ‘發芽期’라면, 둘째 단계는 28세에서 39세까지 正祖측근에서 벼슬을 할 때 經筵講義인 ⌈熙政堂大學講錄⌋(1789)과 ⌈熙政堂禹貢講義⌋(1792)를 저술하고 正祖의 800條問에 답하면서 『詩經講義』(1791)를 저술하던 시기로서 이 기간은 다산경학의 여름으로 ‘成長期’라 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40세때부터 57세때까지(1801-1816) 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의 대부분 경학저술이 이루어지던 시기로서 다산경학의 가을인 ‘收穫期’라고 한다면, 57세때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온 이후의 만년은 『易學緖言』(1821)을 마무리하고, 『尙書』연구를 중심으로 『讀尙書補傳』‧『閻氏古文疏證抄』(1827)을 지었으며, 『尙書古訓』과 『梅氏書平』(1834)을 改修하였던 시기로서, 다산경학의 겨울인 ‘補修期’라 할 수 있다.4)

다산의 경전주석체계는 바로 그 자신의 철학체계를 제시하는 기반이며, 성리학의 체계로부터 독립된 실학파의 독자적 철학체계를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를 열어주었다. 곧 다산은 자신의 경전해석체계를 통하여 道學-朱子學의 정통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실학의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다산경학의 형성과정에는 배경적 조건으로 세가지 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조선사회를 지탱하던 道學-朱子學이 17세기의 조선후기로 넘어오자 강력한 체제유지의 정통이념으로 강화되면서 사회변화에 적응력을 상실하고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는 보수적 권위체계로 굳어져가고 있는 사실이다. 17세기 道學-朱子學의 정통의식은 尤菴 宋時烈(1607-1689)이 주도한 배타적인 華夷論.排淸義理論에 근거하고 있었다. 둘째는 안으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조선후기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道學-朱子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대두하면서 朱子의 經學체계에 대한 재검토가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17세기에 활동하던 白湖 尹鑴(1617-1680)와 西溪 朴世堂(1629-1703)은 朱子의 경전해석을 재검토하여 異見을 제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尤菴 宋時烈로부터 斯文亂賊이라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셋째는 밖으로부터 도입된 새로운 사상조류로서 16세기부터 전래해온 陽明學의 확산과 17세기부터 전래하기 시작한 西學의 침투로 朱子學에 대한 비판이론이 다원화되고 있는 사실이다. 양명학을 통해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려고 시도한 인물은 霞谷 鄭齊斗(1649-1736)이며, 西學의 자연과학 지식을 도입하여 주자학의 陰陽五行論的 自然觀을 극복한 인물은 18세기의 星湖 李瀷(1681-1763)과 湛軒 洪大容(1731-1783)을 들 수 있다.

다산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활동하면서 자신의 시대에 주어진 다양한 사상조류를 종횡으로 포괄할 수 있는 큰 안목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는 소년시절 星湖의 저술을 읽으면서 학문의 폭넓은 시야를 길렀으며, 청년시절 그 자신 西學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천주교 신앙에도 깊이 빠져들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그는 처음부터 道學-朱子學의 정통주의적 권위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淸朝로부터 도입된 西學과 考證學은 물론이요, 앞서 도입된 陽明學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취사선택의 입장을 취하였고, 朱子의 경학체계를 탈피하기 시작한 先學인 西溪.白湖에 대해서도 그 經學사상의 연장선상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산경학의 기본성격은 바로 이 시대의 다양한 사상조류를 폭넓게 수용하고 이를 종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독자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을 구현해가는데서 드러나는 것이다. 곧 다산경학이 지닌 다양한 사상조류의 종합적 성격은 朱子의 경학체계를 근본적으로 비판.극복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한다. 淸朝 考證學이나 漢代 訓詁學 및 陽明學에 대해서도 어느 하나를 옹호하여 祖述하는 입장이 아니며, ‘洙泗學’을 표방하였다고 하여 先秦經學에 귀결시키는 복고적 태도를 지닌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자신의 시대 현실에서 모순과 불합리함을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혁의식을 각성하고, 새로 전래된 西學의 과학적 사유방법과 신앙적 세계관에서 받은 영향까지도 포함하여, 유교경전에 새로운 빛을 투사하여, 다산경학의 체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다.

고증학이 경전해석의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道學-朱子學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다산경학이 새롭게 구축하는 세계관의 정립과정에는 특히 西學의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은 우주론의 기본구조로서 天‧人관계, 人‧人관계, 人‧物관계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인간이해를 정립하였으며, 이를 통해 이 시대에 성취된 脫朱子學的 세계관의 가장 정밀한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에 작용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조류의 복합적 요인을 분석하면서 특히 西學의 영향이 지닌 의미를 주의깊게 검토하고자 한다.


2. 洙泗學의 표방과 考證學的 실험

1) 漢.宋의 止揚의 洙泗學的 視野

다산경학은 우선 ‘洙泗學’이라는 이름아래 경전의 본래 정신을 재발견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경전정신에 벗어난 해석을 ‘洙泗의 舊가 아니다’(非洙泗之舊<中庸自箴>)라 하여 거부하여 비판적 지적을 하기도 하고, ‘洙泗의 참된 근원에 접한 사람’(接洙泗之眞源者<十三經策>)을 높여서 일컫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洙泗學’을 학문의 기준으로 표방함으로써, 당시의 정통적 경학으로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던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내지 의리론적 경전해석을 벗어나서 先秦시대의 경전정신 그 자체에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다산은 주자의 의리론적 경전해석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당시 淸朝의 경학을 이끌어가던 학풍인 漢學 곧 考證學(訓詁學)의 학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宋學-朱子學의 경학에서 漢學-訓詁學의 경학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라, 宋學과 漢學의 치우치고 왜곡된 경전해석을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곧 다산경학에서 ‘洙泗學’이란 바로 宋學과 漢學을 넘어서 聖人(공자)의 경전정신과 다산 자신의 현실에 기반하는 세계관을 일치시켜 확인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산은 經學의 기반 위에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다산의 ‘洙泗學’이 단순한 復古主義가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을 창의적으로 발현하는 방법으로서 ‘復古’를 표방한 것이라 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다산이 ‘洙泗學’을 일컫는 것은 단지 자신의 창의적 사상을 제시하기 위한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孔.孟의 권위를 끌어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만큼 다산경학은 그의 학문체계에서 방편적 수단이 아니라 근원적 위치를 지니는 것이다. 곧 다산경학은 다산자신의 세계관이 지닌 새로운 빛으로 孔.孟의 진정한 정신을 재발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洙泗學’이요, 다산은 자신의 경학체계를 재구성함으로써 경학의 기반을 사회개혁을 위한 원천으로 확립하고자 한 것이라 하겠다.5)

다산의 경학적 입장은 宋學-朱子學이나 漢學-訓詁學을 배타적 입장에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 입장에서 그 긍정적 의도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宋學과 漢學을 지양한 자신의 經學세계가 지닌 근원적 진실성을 공자의 정신과 일치되는 것으로 확인함으로써, 이를 일단 ‘洙泗學’이라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中庸講義補』에서 송대 유학자들의 인성론이 善을 즐거워하고 道를 찾고자 하는(樂善求道) 마음씀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주자를 비롯한 송대 유학자들의 경전해석이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공자의 본래적 경전정신으로서의 ‘洙泗舊論’과 서로 어긋나고 있음을 명확히 지적한다.6)

여기서 다산은 주자학의 의리론적 경전해석에 따른 왜곡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자의 본래정신으로서 ‘洙泗學’을 진리의 기준으로서 밝히고 있다. 다산이 도학-주자학의 경전주석체계를 비판하면서 경전 자체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洙泗舊論’을 강조한 것은 創新을 위한 기반으로서 復古을 추구하는 것이며, ‘洙泗舊論’은 바로 학문적 진실성을 관철하기 위한 비판정신의 기준을 확립하는 방법이다. 곧 도학적 관념체계에 의해 왜곡된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진실의 기준이요 실용의 근거를 ‘洙泗舊論’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편으로 도학의 관념적 해석체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訓詁-實證을 중시하는 淸朝 考證學 곧 ‘漢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漢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한계를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經學체계를 ‘洙泗學’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은 경전의 해석 방법으로서 聖賢의 말씀을 전해 듣는 ‘傳聞’, 스승의 해석을 계승하는 ‘師承’ 및 의리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意解’의 세가지가 있음을 제시한다.7) 여기서 그는, 『대학』을 經1章과 傳10章으로 분석하며 經1章을 공자의 말씀이요 傳10章은 曾子의 뜻이라 단정하는 주자의 해석은 傳聞이나 師承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결단하는 ‘意解’의 경우로 지적한다. 따라서 주자의 경전주석은 意解에 치우쳐서 ‘傳聞’과 ‘師承’을 상당히 벗어난 것으로 본다. ‘傳聞’과 ‘師承’으로 경전의 전승되어온 인식을 넘어서서 보편적 의리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결단을 내린 ‘意解’가 중심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傳聞’이나 ‘師承’의 경우에는 시대가 멀어질수록 확실성이 떨어지므로, 隋.唐보다 魏.晉이 낫고, 그보다 漢代가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四書三經에 대한 송대의 주석인 『七書大全』만 알고, 『春秋』나 『三禮』도 소홀히하며 漢唐시대의 注疏를 모은 『十三經注疏』를 무시하는 당시 도학의 경학적 학풍을 비판하고 있다.8)

그는 고증학적 입장을 따라 ‘經書’를 논의하면서 반드시 먼저 詁訓으로 ‘字義’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字義’를 밝히지 못하고 句와 章과 篇의 뜻이 이해될 수 없고, ‘字義’도 온전히 통하지도 않은채 경전의 大義부터 논의하기 시작하는 것은 微妙한 뜻을 캐들어갈수록 聖人의 뜻은 더욱 은폐되어가서 착오만 깊어지게 할 뿐임을 역설한다.9) 이처럼 그는 경전해석에서 ‘字義’의 訓詁 및 ‘傳聞’과 ‘師承’ 등 증거를 보다 확고하게 정립할 것을 요구하여, ‘漢學’을 존중하는 고증학의 실증정신을 경학의 기본방법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경학방법은 ‘漢學’을 그대로 준용하려는 입장은 아니다. 마치 그가 意解에 치우친 ‘宋學’을 비판하는 것처럼, 詁訓에 사로잡혀 있는 ‘漢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五學論⌋에서 性理學의 본래 의도를 ‘道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니, 이로써 그 실천할 도리를 스스로 힘쓰는 것’(所以知道認己, 以自勉其所以踐形之義)이라 인정하면서 당시의 성리학이 개념의 분석과 분파적 분열에 빠져있는 폐단을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訓詁學(考證學)에 대해서도 ‘경전의 字義를 밝히는 것이니, 이로써 도덕과 교화의 의도에 통달하려는 것’(所以發明經傳之字義, 以達乎道敎之旨者)이라 제시하면서 훈고학이 字義를 밝히고 句節을 바로잡는데 불과하고, 先王‧先聖의 도덕과 교화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곧 당시의 考證學이 ‘漢‧宋의 折衷’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지는 漢學을 받들어 글자만 통하게 하고 구절만 떼었을 뿐이요, 그 속에 담긴 性‧命의 이치를 이해하거나 孝‧弟의 가르침이나 禮‧樂과 刑‧政의 제도를 인식하는데는 어두운 사실을 지적하여, 훈고학-고증학이 근시적 맹목성에 빠져있음을 경계하고 있다.10)

다산의 입장에서 보면 漢學(訓誥學)은 ‘考古’의 고증을 방법으로 삼았으나 명확한 변론의 분석이 부족하니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學而不思) 폐단이 있으며, 宋學(性理學)은 ‘窮理’를 위주로 하여 考據(고증)에 소홀함으로써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思而不學) 허물이 있음을 지적한다.11) 따라서 그의 경학방법은 漢學의 훈고적 방법과 宋學의 의리적 방법을 포괄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종합‧지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는 조선시대 經學史에서 독자적 경학체계와 독자적 세계관의 철학적 기반을 확고하게 정립하는 획기적 업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처럼 경학을 통한 다산의 학문관이 객관적 사실의 분석적 인식으로서 고증적 내지 실증적인 태도를 학문의 기초적 방법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실증의 방법을 천착하는데 매몰되지 않고 여기서 나아가 실용의 목적을 추구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존재의 실현이나 사회적 질서의 구현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실증의 방법을 통해 추구하는 목적을 상실한 일종의 맹목현상임을 경계한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洙泗學的 經學의 視野는 자신의 경학체계에서 고증학적 방법을 도입하지만, 淸朝 考證學(漢學)의 학풍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가치질서의 인식을 위한 해명에 관심의 목표를 두고 있다. 나아가 洙泗學的 經學의 視野에서는 주자의 경학체계를 정통화하여 배타적 폐쇄성을 강화해갔던 道學의 경학태도와는 정반대로 洙泗學的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면 陽明學의 견해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 그만큼 정통성의 권위가 아니라 진실의 개방정신을 洙泗學의 핵심정신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2) 考證學的의 방법의 활용

다산은 “讀書란 오직 義理를 구하는 것이니, 만약 義理를 얻는 바가 없으면 비록 하루에 천권을 독파하더라도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字義의 訓詁에 밝지 않으면 義理도 따라서 어두워진다....이것이 옛 선비들이 經傳을 해석할 때 많은 사람들이 訓詁를 급선무로 삼은 까닭이다.”12)라고 하여, 讀書에서 ‘義理’를 얻는 것이 목적이지만 먼저 訓詁를 통해 字義를 밝히지 못하면 그 義理도 왜곡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처럼 다산은 고증학을 경학의 기초적 방법으로 확인하고 있으며, 訓詁를 통해 字義를 명확하게 밝히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산이 경전해석에서 訓詁의 고증학적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 사실을 먼저 그의 『시경』해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자는 『詩經集傳』에서 ‘風’을 ‘민속에서 노래부른 시’(民俗歌謠之詩)라 해석하고, ⌈周南⌋.⌈召南⌋ 詩의 ‘南’을 ‘남방 제후의 나라’(南方諸侯之國)로 해석하고 있는데 대해 다산은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다. 다산은 『주역』.『맹자』.『孔子家語』.『白虎通』의 여러 문헌을 증거로 끌어들여서 ‘風’에는 ①위에서 아래를 風化하는 것(風敎.風化.風俗)과 ②아래에서 위를 風刺하는 것(風諫.風刺.風喩)의 두가지 뜻이 있음을 고증하고, 주자의 경우에서는 ‘風刺’의 뜻을 제거하고 ‘風化’의 뜻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 지적하였다. 따라서 다산은 ‘風’이 아래에서 위를 향한 풍자(諷)의 뜻이 있음을 강조하고, 바른 말씀(正言)으로서의 ‘雅’와 은미한 비유(微喩)로서의 ‘風’을 대조시켜 ‘風’의 字義를 정밀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는 ‘風’이 ‘민속의 가요’를 위해서만 지어진 것이라면 聖人의 經傳에 열거될 수 없음을 지적하여, 字義를 밝힘으로써 義理를 바로잡는데 까지 나가고 있다.13) 또한 그는 『시경』(小雅).『禮記』(文王世子).『左傳』.『呂氏春秋』 등을 이끌어서 ‘南’이 악곡의 이름이요, 주자가 말하는 ‘남방 제후의 나라’가 아님을 고증하고 있다.14)

또한 그는 『대학』주석에서도 먼저 『대학』을 曾子가 지었다는 주자의 주장은 道統의 맥락을 잇기 위한 것으로서 근거가 없음을 비판하고, 淸代 고증학자 阮元이 『大戴禮記』의 ‘曾子’10편을 表章하여 注解한 것도 道統의 맥락을 연속시키는데 의도가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15) ‘大學’이라는 명칭에 있어서도, 다산은 주자가 ‘대학’을 ‘大人의 학문’(大人之學)이라 해석하여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예기』(學記)에 근거하여 ‘大學’이란 본래 ‘太學’으로 읽었음을 확인하고, 학교로서의 ‘國學’을 가리키는 것이요, ‘冑子’ 곧 天子의 元子나 公卿.大夫의 嫡子로서 나라나 가문을 계승할 자제들이 머물면서 교육받던 곳이라 고증한다. 그는 또한 주자가 『大學』이라는 책을 옛날 ‘태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이라 보는 견해를 거부하면서, 太學에서는 禮樂.詩書.絃誦.舞蹈.中和.孝悌를 가르쳤던 사실을 『주례』‧『예기』(王制‧祭義‧文王世子)‧『大戴禮記』(保傳篇)를 증거로■삼아 제시하고 있다.16) 이처럼 다산의 『대학』해석은 경전에서 증거를 찾아 경전의 의미를 증명해가는 ‘以經證經’의 고증학적 경학방법을 적용시킴으로써, 주자의 의리론적 해석을 그 기초에서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이다.17)

다산은 『대학』의 내용에 뒤바뀌고 빠진 것이 있다는 주자의 錯簡說을 거부하고 이른바 『古本大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明明德은 人倫을 밝히는 것(明人倫)이요 親民은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小民)이다.”라고 하여, ‘親民’이란 ‘明明德’을 사회에 실현한 것이라 해석함으로써, 程子.朱子가 ‘親民’을 ‘新民’으로 고친 것을 반대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다산은 王陽明 및 尹鑴의 입장과 일치하고 있다. 또한 주자는 『대학』의 기본구조를 ‘三綱領’(明明德.新民.止於至善)과 ‘八條目’(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으로 분석하였지만, 다산은 “태학의 條例는 綱을 ‘明德’이라 하고, 目을 ‘孝.弟.慈’라 할 뿐이다.”라 하여, 一綱(明明德)과 三目(孝.弟.慈)의 구조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주자의 ‘三綱領八條目說’을 ‘一綱三目說’로 대치시킴으로써 『대학』해석의 일대 혁신을 수행한 것이며, 다산은 “一綱三目을 하늘이 이루고 땅이 정해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원래 큰 꿈이다.”라 언명하여, 자신의 『대학』해석이 지닌 혁신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18) 이처럼 그는 주자의 경학체계에서 핵심을 이루는 『大學章句』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주자학에서 완전히 탈피하였던 것이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도 古註로 何晏의 『論語集解』와 皇侃의 『論語義疏』와 邢昺의 『論語正義』를 취하고, 新註로 주자의 『論語集註』를 취하며, 그 밖에도 청대의 顧炎武.毛奇齡과 일본 古學派인 伊藤仁齋.荻生徂徠.太宰春臺의 주석 등을 광범하게 인용하면서, 보완(補).반박(駁).質疑.引證.考異 등의 구성으로써 고증을 기반으로 하여 비판과 반박을 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해석이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孟子要義』에서도 趙岐.鄭玄.孫奭.朱子.顧炎武.毛奇齡 등 여러 주석들을 검토하면서 논평하고 반박하여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다산의 『상서』연구는 今文.古文의 쟁점에 대한 고증학적 검토에 상당히 많은 힘을 기울였다.19) 우선 그는 史書를 통해 『상서』의 전승과정에는 今文과 古文이 나누어져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실을 해명하면서, 『상서』를 세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20) 곧 ①‘伏壁今文’: 秦의 伏生이 壁에 숨겨두었다가 前漢 文帝때 전해준 『今文尙書』 29편은 晉의 懷帝 永嘉(307-312)연간의 난리에 망실되었다. ②‘孔壁古文’: 前漢 景帝때 魯共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헐다가 벽 속에 감추어져 있던 古文경전들을 발견하였는데, 孔安國이 이를 정리하여 武帝때 나라에 바친 『古文尙書』 46권(伏生의 『今文尙書』 29권과 증가된 16편 및 ⌈僞太誓⌋ 1편)은 중도에 무너지고 관학에서도 폐지되었으나 후한 光武帝때 杜林이 전하고 賈逵.馬融.鄭玄이 주석을 붙여 세상에서 받들었으나 唐나라때 와서 없어졌다. ③梅賾의 『僞古文尙書』 혹은 『尙書僞孔傳』: 東晉때 梅賾이 孔安國의 『古文尙書』라 칭하면서 나라에 바쳤던 58편(孔安國의 『古文尙書』와 같은 33편과 증가된 25편)은 東晉 元帝때 學官이 세워졌으며, 이를 원본으로 삼아 唐 太宗때 孔穎達이 『尙書正義』를 저술하고, 南宋때 蔡沈이 『書集傳』을 저술하면서, 오늘날 통행하는 『尙書』가 되었다. 그 밖에도 前漢 成帝때 張覇가 『尙書』 102편을 위조하여 나라에 바쳤다가 바로 쫒겨난 사실도 들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孔穎達과 蔡沈이 梅賾의 『古文尙書』를 주석하면서도 그 僞作임을 밝혀내지 못하였음을 지적하고, 宋代에 吳棫.朱子와 元代의 吳澄이 梅賾의 『古文尙書』에 의문을 제기하여 그 거짓됨을 분별하였던 사실을 중시하였다. 이와 달리 淸代의 毛奇齡이 『古文尙書寃詞』를 저술하여 朱子에 의한 의문제기로 『古文尙書』가 억울하게 당하였다 하여 ‘성인의 경전을 지킨다’(衛聖經)는 명분으로 朱子의 견해를 비판하였는데, 다산은 『梅氏書平』에서 毛奇齡의 견해를 철저히 비판하였으며, 청대 宋鑒의 『尙書攷證』에서 제시된 견해가 『梅氏書平』에서 밝힌 자신의 견해와 일치함을 확인하고 있다.21) 그러나 洪奭周.洪賢周형제로부터 淸代의 閻若璩가 저술한 『尙書古文疏證』을 얻어보고나서 閻若璩가 폭넓은 문헌고증으로 梅賾의 『古文尙書』를 치밀하게 비판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자신이 문헌이 부족한 유배지의 열악한 조건에서 수행한 작업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閻若璩의 견해를 수정하는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閻氏古文疏證抄』를 편찬함으로써 『尙書』의 고증학적 연구를 한층더 심화시켜가고 있다.22) 또한 그는 『尙書古訓』을 저술하면서도 자신의 논증내용이 文字가 다른 것은 ‘考異’라 하고, 義旨가 잘못된 것은 ‘考誤’, 이끌어다 증거하는 것은 ‘考證’, 서로 토론하는 사항에는 ‘考訂’, 서로 논쟁하는 사항에는 ‘考辦’, 案說과 다른 것을 드러낼 때는 ‘論曰’.‘訂曰’, 經旨와 관련없이 문장에 따라 義理를 제시할 때는 ‘衍義’라 일일이 구분하여 밝힘으로써, 『尙書』연구에서 고증학적 방법을 엄밀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3)


3. 西學의 수용과 세계관의 전환

1) 天(上帝)觀의 신앙적 재조명

다산이 자신의 경학체계를 통하여 제시한 세계관은 이 시대 정통이념인 주자학의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탈피하는 것으로서, 사상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朱子經學이 老.佛의 영향을 받았지만 經傳의 정신을 재정립함으로써 당시를 풍미했던 老.佛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사상사의 혁명적 전환을 이루었던 사실과 상응되는 것이라 하겠다. 다산이 朱子學的 세계관을 탈피하여 洙泗의 經傳을 새로운 빛으로 조명할 수 있었던 사상적 원천으로는 考證學-漢學을 비롯하여 王陽明에서 尹鑴에 이르는 다양한 反朱子的 經學이 활용되고 있지만, 그의 세계관을 혁신적으로 전환하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西學(서양과학과 천주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23세때 봄 李檗을 통해 西學의 신앙에 빠져들었지만, 이에앞서 16세때부터 星湖 李瀷의 저술을 접하면서 서양과학에 관련된 서학지식의 이해가 축적되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산은 주로 마테오 릿치의 『天主實義』를 비롯한 예수회선교사들의 補儒論的 교리서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西學의 補儒論은 성리학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유교경전과의 공통성을 확인하는데 주력하였던 입장이다.24) 다산은 36세때(1797) 자신을 천주교도라 비난하는데 대해 그 스스로 해명하는 상소문으로 ⌈辨謗辭同副承旨疏⌋를 올렸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弱冠(20세무렵)의 초기에 西學書를 읽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사모하였으나, 태학에 들어간 뒤로 과거시험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으며, 28세에 벼슬에 나온 뒤로는 方外(異端)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여, 일찍이 천주교를 버렸음을 주장하였다.25) 그러나 다산의 주장대로 늦어도 벼슬길에 나온 뒤로 西學의 신앙을 버렸던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20대의 청년기에 그가 몇해동안 심취하였던 西學의 새로운 세계관은 쉽게 지워질 수 있는 한낱 단순한 신앙적 열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산에게 서학의 문제는 주자학 정통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정연한 논리의 사유체계를 제공하였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경학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기본구조는 태학생시절인 23세때 正祖의 70조에 걸친 질문에 조목별로 대답한 『중용강의』를 통하여 이미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26) 곧 다산경학의 기본적 세계관은 『중용강의』를 통해 제기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저술은 실학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정립한 다산경학의 출발점이요 기본설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다산은 『중용강의』를 작성할 때 친우 李檗과 정밀하게 토론하였으며, 바로 그 직전에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天主實義』 등 서학서적을 읽으면서 천주교의 세계관에 깊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던 만큼, 이 『중용강의』에는 천주교 교리의 영향이 다각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중용』의 주석에서 天.上帝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간의 心性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및 사물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天.地.人의 세계구조에 대한 주자학적 인식을 전면적으로 변혁하면서 자신의 시야를 열어가는 이론적 배경으로서 천주교 교리서의 세계관으로부터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다산은 천주교 교리의 이론을 공개적으로 인용하거나 드러낼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산의 洙泗學的 經學을 구성하는 해석체계에서 천주교 敎理書가 비쳐준 빛을 제거한다면 현재와는 엄청나게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곧 다산이 天.上帝觀에서 事天의 신앙적 인식이나 明德개념을 ‘孝.弟.慈’로 파악하고 있는 점은 尹鑴와 상통하고, 性을 3品으로 제시하는 이론에서 荀子와 흡사하기도 하며, 五行說을 부정하는 自然觀에서 洪大容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 유사성을 찾아가는 것으로 다산경학이 추구하는 세계관의 전반적 구조와 논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전반적 이론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사상적 원천에서는 西學의 敎理書가 가장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27)

다산은 주자학의 목적이 聖人을 이루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聖人을 성취할 수 없는 이유로서 ①天을 理라 하고, ②仁을 만물을 살리는(生物) 理라 하고, ③‘中庸’의 ‘庸’을 平常이라 하는 세가지로 지적하면서, 이에 대응하여 聖人이 되기 위한 그 자신의 방법으로 “①愼獨하여 하늘을 섬기고, ②恕에 힘써서 仁을 구하며, ③恒久하여 중단함이 없을 것”을 제시하였다.28) 그것은 주자학적 세계관이 기초하는 성리설의 기반이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한계를 선언하는 것이요, 이와 반대로 그 자신이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기본방향은 理의 본체를 찾아가는 사변적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愼獨事天.强恕求仁.恒久不息의 적극적 실천의 현실적 세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는 주자학에서 天을 理로 인식하여 형이상학적 원리로 파악하는 ‘義理的 天觀’을 거부하고 天을 神으로 인식하여 두려워하고 섬겨야할 대상으로 파악하는 ‘信仰的 天觀’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氣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自有之物)이라 하고, 理는 ‘기대어 붙어있는 것’(依附之品)이라 정의한다. 마테오 릿치도 ‘사물의 범주’(物之宗品)를 실체(自立者)와 속성(依賴者)의 두가지로 구분하면서, “理 역시 속성의 부류이니 스스로 자립할 수가 없다.”(理亦依賴之類, 自不能立)고 하여 理를 속성으로 규정하고 있다.29) 이처럼 다산과 마테오 릿치에서 ‘理’를 자립적 존재에 붙어있는 속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理’를 근원적 본체로서 인정하는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근본전제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는 구절에 대해 주자는 『中庸或問』에서 자신이 못 보고 못 듣는 곳이라 하기도 하고 남이 못보고 못듣는 곳이라 하여 두가지 해석을 하는데, 다산은 그 어느 쪽의 경우도 戒愼.恐懼하는 두려움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 거부한다. 여기서 다산은 『논어』(季氏)에서 “小人은 天命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는 말을 근거로 삼아, ‘不睹.不聞’(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은 天命을 말하는 것이라 확인한다. 또한 그는 “天地의 鬼神이 환하게 늘어서 있으나 鬼神이란 것은 形象도 소리도 없는 것이다.”라 하고, “不睹.不聞이란 鬼神이 내려와 살피는 것이다.”라 해석한다.30) 곧 그는 ‘不睹.不聞’을 天이 명령하는 자리로 보는 동시에 鬼神이 내려와 살피는 자리라 하여, 인간이 天-鬼神 앞에 마주서서 두려워하는 신앙적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中庸의 德은 愼獨이 아니면 이룰 수 없고, 愼獨의 功은 鬼神이 아니면 두려워함이 없으니, 鬼神의 德은 우리 유교가 근본하는 것이다.”31)라고 하여, 『중용』의 성립근거가 戒愼.恐懼를 통한 ‘愼獨’에 있으며, 愼獨은 鬼神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음을 들어서, ‘鬼神’의 역할이 바로 유교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 강조한다. 그만큼 다산은 鬼神을 두려워하는 신앙자세를 바로 유교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으로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중용』(16장)의 ‘鬼神’개념에 대해서도 당시 주자학에서는, “天을 理라 하고, 鬼神을 ‘功用’이라거나 ‘造化의 자취’라거나 ‘二氣의 良能’이라 하여,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득하여 하나같이 지각이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어두운 방에서 마음을 속이기를 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으니, 평생토록 道를 배우고도 堯舜의 경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모두 귀신에 대한 설명에 밝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32)라 하여, 天.鬼神觀의 오류에 따라 道를 배워도 聖人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라 지적한다. 이에 대해 그는 옛 사람의 태도를 “實心으로 하늘을 섬기고, 實心으로 神을 섬겨,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함에서나 한 생각이 싹터나옴에서, 참되거나 거짓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날이 감시함이 여기에 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戒愼.恐懼하여 愼獨의 절실함이 眞切하고 篤實하여 天德에 도달한다.”33)라고 하여, 신앙적 자세를 ‘實心의 事天學’으로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鬼神의 德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여 정결하게 하고 성대하게 제복을 갖추고서 제사를 드리게 한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는 祭祀를 다산은 上帝에게 드려지는 郊祭라 확인하고, “上帝의 體가 形이나 質이 없어서 鬼神과 德이 같으므로 ‘鬼神’이라 하며, 감응하여 내려와 비쳐준다는 점에서 鬼神이라 한다.”34) 하여, 上帝와 鬼神을 일치시키고 있다. 또한 “明神에 祭祀하는 것도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35)라는 언급도 事天하는 방법으로서 明神(靈明한 神)에 祭祀하는 것을 제시한다.

다산은 『주역』이 지어진 이유를, “聖人이 하늘의 명을 청하여 그 뜻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다.”36)라고 언급하여, 易을 하늘을 敬畏하고 天命을 받드는 신앙적 실천방법으로 해명하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주역』의 접근방법에서 ‘卜筮’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면서도, 卜筮를 통해 天命을 받는 방법은 철저히 하늘을 섬기는 경건한 신앙심을 전제로 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 신앙적 경건성을 상실한 卜筮란 사특한 술법이라 본다. 그는 卜筮를 지금 세상에 다시 행하게 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며, 자신이 임금의 뜻을 얻는다면 卜筮를 금지하게 할 것임을 밝히면서, “무릇 하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감히 卜筮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나는 ‘지금 하늘을 섬긴다 하더라도 감히 卜筮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겠다.”37)고 하여, 卜筮가 더 이상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이처럼 다산은 『주역』이 본래 卜筮를 통해 天命을 받았지만, 그 자신의 시대에서 天命을 받는 방법은 卜筮가 아니라 道心을 통해 부여되는 것임을 중시한다. 곧 다산은 ‘天命’에 두가지 양상이 있음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인간이 태어나는 처음에 性(嗜好)으로서 부여된 것’(於賦生之初, 卑以此性)이요, 다른 하나는 ‘天命과 인간 마음(靈明)이 無形한 體요 妙用의 神이라는 점에서서 같은 類로서 서로 들어가 더불어 감응하는 것’(無形之體, 妙用之神, 以類相入, 與之相感)이라 한다. 여기서 前者가 일회적으로 주어진 일반적 속성이라면 後者는 隨時的으로 작용하는 구체적 교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하늘이 인간의 마음(곧 道心)에 수시로 교류하는 구체적 양상을 설명하여, “天이 경계하여 깨우쳐줌은 有形한 耳目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無形한 妙用의 道心을 따라 이끌어주고 깨우쳐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天이 속마음을 이끌어준다’는 것이다....天의 靈明은 사람의 마음에 곧바로 통하니 살피지 못하는 은미한 것이 없고 비추지 못하는 미미한 것이 없으며, 이 방에 내려와 비추며 날마다 여기에 감시하고 있다.”38)고 하여, 天命의 양상이 性으로 주어진 것과 더불어 道心에 부여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바로 道心에는 ‘天의 喉舌’이 맡겨져 있다 하여, 道心을 하늘의 목소리가 들리는 자리요, 道心이 경계하여 깨우쳐주는 것은 바로 天命이 경계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39) 이처럼 道心을 통해 끊임없이 天命을 받아 따르는 것이 바로 다산 事天學의 핵심과제라 하겠다.


2) 性.德의 재인식과 人間觀의 전환

인간존재의 이해는 天.人관계와 人.物관계를 통해 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다산은 인간을 하늘과 소통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사물과 차별화시킴으로써, 세계 속에서 인간존재의 위상을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天.人관계로서, 주자는 『중용장구』의 22-32章을 天道(22.24.26.30.31.32章)와 人道(23.25.27.28.29章)에 분배하고 있는데 대해, 다산은 “『중용』 전체가 비록 天命에 근본하고 있지만 그 道는 모두 人道이다.”40)라고 언명하여, 하늘(天)과 인간(人)으로 이원화시킬 것이 아니라 ‘天命에 근거한 人道’로서 일관시켜 파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人道를 항상 天道에 근거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다산의 인간이해는 하늘과 소통하는 인간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人.物관계로서, 朱子는 “(인간과 만물 사이에 ) 性과 道는 같지만 氣稟에 혹 차이가 있으므로 過.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니, 聖人이 사람과 만물의 마땅히 행할 바에 근거하여 등급과 절도를 나누었다.”41)고 하여, 인간(人)과 만물(物) 사이에 性과 道의 근본바탕이 같은 것이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다산은 인간의 능력은 살아움직이는 것(活動)이고, 禽獸의 능력은 일정한 것(一定)이라 대비시킴으로써, 過.不及의 차이란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禽獸에는 없는 것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朱子가 人.物을 통합하여 ‘中庸’을 해석하고 있는데 반대하고, “天命의 性은 人性이요, 率性의 道는 人道요, 修道의 敎는 人敎다.”42)라고 하여, 『중용』을 인간의 문제로 해석해야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곧 그는 人과 物을 합쳐서 性이나 道를 설명하는 朱子의 견해를 정면으로 거부함으로써, 인간과 만물의 차별화를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마테오 릿치도 ‘性’을 ‘각 사물 종류의 本體’라 하고, 사물의 종류가 달라지면 性도 달라진다고 한다. 릿치는 사물이 실체(自立者)이면 性도 실체요, 그 사물이 속성(依賴者)이면 性도 속성이라 지적한다.43) 곧 性은 개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그 종류의 본질적 특성을 결정하는 것이므로, 존재의 종류에 따라 性이 달라지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다산의 性개념과 공통기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다산은 인간존재를 神(神明)과 形(形身)이 妙合한 것으로 이를 ‘身’ 혹은 ‘己’라 일컬었으며, ‘神’(神明)에 해당하는 고유한 용어가 古經에는 없었으나, 다른 말에서 빌어와서 ‘心’.‘神’.‘靈’.‘魂’등으로 일컫고, 맹자는 그 無形함을 ‘大體’라 일컬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心’은 五臟 가운데서 血氣를 주관하는 心臟의 명칭인데, 이를 빌어와서 ‘인간의 내면에 함축되어 있으면서 밖으로 향하여 운용되는 것’을 가리켜 ‘心’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44) 여기서 그는 성리학의 핵심문제인 心.性개념의 인식을 탈피하여, ‘性’을 理로서 내면의 본체로 파악하는 주자의 입장을 거부하였다. 곧 그는 ‘性’을 ‘嗜好’라 정의하며, 嗜好에는 꿩이 산을 좋아하고 사슴이 들을 좋아하듯이 ‘눈앞의 탐락’(目下之耽樂)이라는 감각적 嗜好와 벼(稻)가 물을 좋아하고 기장(黍)이 건조함을 좋아하듯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진 것’(畢竟之生成)이라는 본질적 嗜好가 있음을 분별하고 있다. 다산은 『상서』(召誥).『예기』(王制).『맹자』에서 ‘性’을 모두 嗜好로 언급하고 있음을 증거로 삼아, ‘性’을 嗜好로 확인함으로써, 性을 心의 본체로 인식하는 주자학적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性을 心의 속성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산은 『중용』에서 말하는 ‘天命’으로서의 性도 嗜好로 말한 것이라 하여, “인간이 잉태되면 하늘이 靈明하고 無形한 실체를 부여해주는데, 그것은 善을 좋아하고 惡을 싫어하며, 德을 좋하하고 비루함을 부끄럽게 여기니, 이를 性이라 한다.”45)고 하여,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靈明하고 無形한 실체’(靈明無形之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善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性’개념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本然之性’이란 본래 佛經(『首楞嚴經』)에서 나온 말로서,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命’(稟命於天)으로서의 性이 아니라 윤회하는 변화를 넘어서 本然의 體가 시작함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 대비시킴으로써, 경전의 ‘性’개념과 전혀 상반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46)

다산은 ‘靈體’47)에 性(嗜好).權衡.行事의 세가지 양상이 있음을 주목한다. 곧 ‘性’(嗜好)에서 말하면 ‘善을 좋아하고 惡을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孟子가 말하는 性善說이 여기에 해당하며, ‘權衡’(意志)에서 말하면 ‘善을 할 수도 있고 惡을 할 수도 있는 것’으로 告子의 ‘돌고 있는 물의 비유’(湍水之喩)나 揚雄의 善惡混說이 여기에 해당하며, ‘行事’(行爲)에서 말하면 ‘善을 하기는 어렵고 惡을 하기는 쉬운 것’으로 荀子의 性惡說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48) 여기서 다산은 性개념은 嗜好로 인식해야 하는 것임을 전제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靈體’의 權衡과 行事에 따라 揚雄의 善惡渾說이나 荀子의 性惡說도 ‘靈體’의 양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性善說의 의미도 性이 본래 순수한 善이라는 주자학의 견해를 거부하고, 善을 좋아하는 ‘嗜好’임을 강조함으로써, 물이 아래로 내려가고 불이 위로 타오르듯이 자동적으로 善을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善을 하는 것이 자신의 功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다산의 ‘性嗜好說’은 하늘이 인간에게 善을 하고자 하면 善을 할 수 있고 惡을 하고자 하면 惡을 할 수 있는 결정권으로서 ‘自主之權’(自主之權能)을 부여하였다고 제시한다. 바로 이 ‘自主之權’에 따라 선을 행할 때 인간은 선을 행한 功을 이룰 수 있고, 악을 행할 때 악을 행한 罪를 짓게 되는 것이며, 이 점에서 인간과 동물이 갈라지는 큰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라 한다.49) 이러한 ‘自主之權’의 心의 ‘權’ 곧 靈體의 ‘權衡’으로서, 性(嗜好)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인간은 靈體는 도덕적 주체로서 ‘自主之權’ 곧 自由意志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 확인함으로써, 성리학에서처럼 本然之性이 善한 것이라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인간은 善을 좋아하는 性(嗜好)을 따라서 자기 의지의 결단으로 善을 선택하여야 하고, 이 善을 실행해가야 하는 결정의 권리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마테오 릿치도 의지가 있고 자기 의지에 따르거나 중지할 수 있을 때라야만 德이나 사특함, 혹은 善이나 惡이 분별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자유의지가 도덕성의 근거가 됨을 제시하고 있다.50)

다산은 朱子가 ‘仁’을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다.”(心之德, 愛之理)라 해석한 것을 거부하고, ‘仁’자는 人과 人을 중첩시킨 글자로서 “사람과 사람이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 ‘仁’이다.”51) 라고 해석함으로써, ‘仁’을 인간내면의 본질로 보는 성리학적 해석을 탈피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도덕규범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그는 仁.義.禮.智라는 四德의 명칭은 ‘行事’(행위)이후 그 결과로서 성취되는 것이지 복숭아씨나 살구씨처럼 인간의 마음 속에 처음부터 들어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仁.義.禮.智를 行事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면 인간이 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지만, 주자학에서 처럼 仁.義.禮.智를 本心에 갖추어져 있는 全德이라 한다면 “사람의 할 일은 단지 벽을 바라보고 마음을 관조하거나 스스로 마음을 성찰함으로써, 心體를 밝고 환하게 하여 仁.義.禮.智의 네 알맹이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있어서 나의 涵養함을 받게 할 뿐이다.”52)라고 하여, 실천이 없는 禪學的 ‘觀心’에 빠지게 될 것이라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四端’(惻隱.羞惡.辭讓.是非之心)의 개념도 주자학에서처럼 性에 내재한 四德(仁.義.禮.智)을 찾아들어가는 인식의 실마리로서 ‘端緖’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四端이 인간의 性에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고, 이 四端의 마음을 확충하여 실현한 것이 四德이라 한다. 곧 四端의 ‘端’을 불이 처음 붙듯이 샘이 처음 흘러나가듯이 시작한다(始)는 뜻이요, 四端의 마음이 발동함은 바로 四德을 성취하기 위한 실행의 출발점이라는 뜻에서 ‘端始’(端初)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53) 그것은 四端을 통해서 내면의 본체로서 性의 四德을 찾아들어가는 성리설의 ‘도덕본체론’으로부터 四端에서 출발하여 실천을 통해 도덕적 성과로서 四德을 실현해나가는 다산경학의 ‘도덕실천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3) 物의 재해석과 自然觀의 재구성

다산은 草木이나 禽獸 등 생명이 있는 사물의 경우는 하늘이 그 種子를 전해갈 수 있는 생명의 이치를 부여하여 각각 性命을 온전하도록 해주었지만, 인간의 경우는 하늘이 태어나는 처음에 ‘靈明’을 부여함으로써 만물을 초월하는 존재로서 만물을 누리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다. 이에 따라 그는 주자에 의해 人性과 物性이 같은 德을 얻었다는 이른바 ‘人物性同論’을 주인과 노예의 등급이 없는 것으로서 上天이 만물을 낳는 이치가 아니라 하여 근원적으로 비판하였다.54) 이와 더불어 그는 “사람은 (개처럼) 새를 뒤쫓고 도둑을 향해 짖을 수 없으며, 소는 (사람처럼)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할 수 없는 것이니,...사람과 사물이 性을 같이 할 수 없음이 확실하다.”55)고 하여, 기본적인 기능의 차이를 기질의 차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天命의 性이 다른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萬物一體說은 옛 경전에 없었던 것이며, ‘인간과 사물의 性이 같다’는 것은 佛家의 말이라 하여, 人物性同論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56)
여기서 다산은 생활은 하지만 지각이 없는 草木과 생활을 하며 지각하는 禽獸와 생활하고 지각하며 靈明하고 善함이 있는 인간의 성품이 다른 차이를 性三品說로 제시하고 있다.57) 이처럼 性을 보편적 본질로 인식하는 주자학적 입장을 탈피하여 사물의 종류에 따른 고유한 성질로 파악하고 있다. 그만큼 다산은 형이상학적 개념 위에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존재의 기능과 속성을 분석하는 경험적 실재에 관심의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중용』 첫머리의 “하늘이 명한 것을 성품이라 한다.”(天命之謂性)는 구절에 대해, 주자는 “하늘이 陰陽.五行으로 萬物을 化生함에, 氣로써 形을 이루니 理도 여기에 부여되었다.”58)고 해석하여, 인간과 만물의 형질을 구성하는 질료로 陰陽‧五行의 氣를 제시하고, 이를 理‧氣구조로 해명하고 있다. 다산은 여기서 ‘陰陽’이란 햇빛이 비치는지 가렸는지에 따른 명칭으로 明‧暗이 있을뿐이요, 본래 體質이 없으며 實體가 아님을 지적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부모가 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59) 따라서 茶山은 陰陽의 實體를 부인하지만 陰陽의 對待관계의 형식이나 奇數‧偶數의 表象으로 인정하고 있다.60)

또한 ‘五行’도 사물 가운데 다섯가지에 불과함으로 만물을 낳을 수 없다 하여, 주자학의 陰陽.五行說에 근거한 자연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茶山은 洪範九疇의 ‘五行’에 대하여 形質이 있는 것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材物이기는 하지만 天地의 生成之理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언명하고, ‘五行’을 다만 만물가운데 다섯가지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만물을 생성 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61) 이 기본 材物을 四‧五‧六‧八의 몇가지로 열거하는가에는 깊은 이치가 없는 것이라 하여 五行論의 생성론적인 근원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茶山은 易에서 乾(天)‧坤(地)‧坎(水)‧離(火)의 ‘四正卦’가 相合‧相錯하여 巽(風)‧震(雷)‧艮(山)‧兌(澤)의 ‘四偏卦’가 성립하며, 이 八卦의 변화에서 만물이 생성되는 것이라 제시함으로써 ‘四正卦’를 만물생성의 기본형질로 제시하기도 한다.62)

나아가 다산은 자신의 ‘氣’개념은 바로 孟子가 말하는 ‘浩然之氣’의 氣를 가리키는 것이요, 形質이 있는 것을 氣라고 보는 理氣家의 ‘氣’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理氣說의 ‘氣’개념과 혼동하지 말 것을 역설하였다.63) 여기서 그는 인간의 生‧養‧動‧覺하는 활동의 근거가 되는 두가지 구성요소로서 ‘血’(혈액)과 ‘氣’가 있다고 본다. 이때 마음이 발동하여 나타나는 ‘志’(의지)는 ‘氣’의 장수로서 ‘氣’를 부리며, ‘氣’는 ‘血’의 통솔자로서 ‘氣’를 부리는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서 ‘氣’는 마치 天地에 遊氣(공기)가 있듯이 人體중에 충만되어 있는 것이라 한다.64)


4. 茶山經學의 확장과 특성

1) 茶山經學의 經世論的 확장

李乙浩교수는 ‘洙泗學的 茶山經學’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修己治人의 人間學’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65) 修己.治人은 茶山經學의 구성내용이면서 동시에 다산의 經學과 經世論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과제이다. 다산 자신이 六經四書의 經學과 一表二書의 경세론으로 本.末을 갖추었다고 하였듯이 경학과 경세론은 다산의 학문체계에서 本.末의 유기적 연관구조를 이루고 있다.

다산의 경학적 이론체계는 그 자신의 사회개혁사상과 연결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특히 『주례』에 깊은 관심을 지녀, “三代의 다스림을 진정 회복하고자 한다면, 이 『주례』가 아니고는 착수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66)라고 하여, 비록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주례』를 주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다산은 ‘예경’을 비롯한 경학연구에서 『주례』를 증거로 폭넓게 인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세론의 구상에서도 『주례』의 기본구조를 이상적 제도의 모형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곧 『經世遺表』의 개혁의식도 “사백년 紀綱解弛.庶事不振의 정체적인 국가를 周禮的 封建制에 의한 규격화-간소화하자는 것”67)이라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주례』가 그의 경세론적 저술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산의 『대학강의』와 그의 경세론 저술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목민심서』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기도 한다.68)

『논어』(爲政)에서 德治를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는데 모든 별이 받드는 것’(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으로 비유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는 “덕으로 다스리는 것은 無爲하지만 천하가 귀속한다.”(爲政以德, 則無爲而天下歸之)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淸淨無爲’란 漢儒의 黃老學이나 魏晉시대의 淸談이요 聖人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고, ‘無爲而治’란 모두 異端邪說이라 규정한다. 따라서 그는 “일함이 없으면 정치도 없다.”(無爲則無政)고 선언하며, “임금이 바르게 자리하여 德으로써 다스리면 모든 관리와 백성이 따르게 되어 임금과 화합하지 않음이 없다.”69)고 해석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를 治者가 자신을 바르게 하고 德으로 이끌어가서 전체가 따르게 하는 적극적 실천행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분발하여 사업을 일으키고 천하의 사람을 동원하여 근면하게 실천하였던 정치의 모범으로 堯.舜을 들고 있으며, 이러한 입장은 『經世遺表』의 서문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70) 이처럼 다산의 經學은 정치를 ‘無爲’를 내세워 안일과 부패에 빠진데서부터 근면한 사업을 수행하고 실용에 맞게 개혁을 추구하는 과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경세론적 방법을 재해석해내고 있는 것이다.

다산은 工人에게 規矩나 樂師에게 律呂가 법도를 이루는 것처럼 仁政의 법도는 井田法에 있음을 제시한다. 따라서 그는 맹자의 일생동안 經世濟民함이 ‘토지의 經界’에 있었다 하고, 方圓을 그릴 때 規矩에 의존하듯이 王政은 井田法에 의존하는 것이라 하여, 田政이 바르게 된 다음에라야 禮.樂과 兵.刑의 모든 일이 조리를 갖추게 되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에 井田法을 시행할 수 없지만 均田法은 임금이 결단을 내리면 행할 수 있을 것이라 제시한다.71) 이처럼 다산의 경세론은 그의 경학 속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경학에서 확장되어 나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서경』에서 ‘典’은 법도를 내려준 것(垂法)이요, ‘謨’는 계책을 돕는 것(贊猷)이요, ‘誥’는 백성을 이끌어주는 것(牖民)으로서, 이들이 모두 경계하는 말씀으로 인심을 맑게 하고 세상의 다스림을 편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하며, 『시경』의 경우도 찬미하는 ‘頌’은 『서경』의 ‘典’에 견주어질 수 있고, 은미한 말로 비유하는 ‘風’과 바른 말인 ‘雅’는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하여 분발하게 하고 사람의 나태한 의지를 징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72) 그만큼 『시경』과 『서경』이 지닌 治道로서 敎化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2) 茶山經學의 實學的 특성

19세기 전반의 다산경학은 주자의 성리학적 경학체계를 전반적으로 탈피하고 독자적 경학체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다산경학의 정립은 여전히 주자의 경학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18세기 전반의 星湖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17세기 후반의 白湖 尹鑴의 脫朱子的 경학의 연장선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다산경학은 白湖의 古學的 經學보다 탈주자학적 경학으로서 더욱 정밀하고 종합적인 체계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특히 다산의 경학에는 성리학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물론이요, 서학.양명학.고증학의 다양한 이론과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다산경학’의 독자적 세계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며, 그만큼 다산경학은 실학파 경학의 結晶版을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經으로써 經을 증명하는’(以經證經) 고증학적 방법을 철저하게 적용하며, 동시에 제자백가와 역사서를 포함하여 선진시대에서 청대까지에 걸친 經學史의 축적된 광범한 업적들을 종횡으로 인용하고, 경전의 미세한 술어와 쟁점까지 정밀하게 분석하고 빈틈없이 고증해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실증적 논리로서 기존의 해석들을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한국경학사 속에 다산경학이라는 독립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그는 경전해석을 통해 天‧上帝와 인간존재와 자연에 대한 일관된 철학적 이론체계를 이끌어냄으로써 실학의 철학적 기초를 새롭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실학사상사에서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결정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산의 경학체계에서는 ‘六經’을 ‘四書’보다 앞세우지만, 때로는 ‘四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곧 그는 “四書로써 내 몸을 거처하게 하고, 六經으로써 내 식견을 넓혀간다.”73)고 하여, ‘四書’를 중심으로 삼고 ‘六經’을 그 활용으로 삼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六經四書’의 다산경학체계에서 六經의 중요성은 四書를 앞서고 있다. 다산 자신이 자부하고 있는 것처럼 『주역』과 ‘禮經’의 연구가 그 독창적 성격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특히 다산의 ‘禮經’연구는 ‘五經’으로서 『예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례』.『의례』.『예기』의 ‘三禮’를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의례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곧 그는 ‘禮經’을 경전별로 주석하는 것이 아니라 喪禮나 祭禮의 의례를 중심으로 의례를 기본 주제별로 재분류하여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예학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다산의 『春秋考徵』도 『춘추』와 『주례』를 기준으로 삼아 周代의 의례를 확인하는 고증학적 작업을 수행한 것이요, 그만큼 『춘추』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라 周代 儀禮의 고증학적 연구서이다.

다산은 당시의 정통이념인 道學-朱子學의 세계관을 비판‧극복하면서 자신의 경학적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天을 ‘理’로 규정하는 天卽理說을 거부하고 天을 ‘神’으로 확인하며, 敬畏의 신앙적 대상으로서 天‧上帝를 인식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白湖와 같은 맥락의 事天學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性卽理說에 따른 선험적인 天理의 人性을 거부하고 인간의 靈體(心)가 지닌 속성으로서 善을 嗜好하는 人性을 확인하며, 개체적 자율성을 확립하여 도덕적 책임의 근거를 ‘自主之權’(자유의지)으로 확인하고, 인간의지가 인간관계를 통해 실천하는 功으로서 도덕성을 강조한다. 셋째, 人物性同이나 物我一體의 자연관을 거부하고, 물질적 세계를 인간존재로부터 분리시켜 斷層的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자학에서 제시하는 天‧地‧人의 유기적 일체관을 깨뜨리고 天을 섬기는 신앙적 인간, 地(物)를 利用의 대상으로 발견하는 과학기술의 실용적 인간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경학의 중심축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인간, 개체의 자율성을 지닌 인간, 물질적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우주적 질서 속의 인간관을 중심으로 확립함으로써 인간관계의 도덕의식과 사회질서를 재구성하는데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다산경학이 주자학의 치밀한 사유체계와 견고한 정통적 권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는 과정에는 西學의 세계관이 중요한 빛으로 조명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다산경학은 다양성을 종합‧지양하면서 실증적 정신으로 독자적 경학을 구축하였던 것이요, 결코 西學이나 어떤 기존의 사상체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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