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부터 번지기 시작한 불길이 서서히 산 아래로 번지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침봉 사이로 번지는 불길은 능선의 날등을 먼저 태우고 이내 온 산을 홀랑 태울 듯 시시각각으로 번져간다. 대둔산은 사철 불 붙어 타오른다. 봄이면 암봉 사이마다 핏빛 진달래가 산을 온통 태우고, 여름이면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이 번뜩이는 붉은 화강암벽을 태울 듯 달구고, 가을이면 곳곳마다 시뻘건 단풍의 불길이 넘실거린다. 겨울이면 새하얀 재를 덮어쓴 채 다 타버린 장작더미처럼 고즈넉해진다. 새파란 하늘, 청명한 대기, 시원한 바람, 화려한 단풍, 눈부신 햇살,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그리고 대둔산이었다. 이른 아침, 용문골 입구 야영장에서 대둔산을 올려다본다. 칠성봉 일대의 침봉 사이로 조금 이지러진 새하얀 달이 둥실 떠 있다. 새하얀 달이 떠 있는 새파란 하늘 아래로는 화려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각양각색의 암봉들이 도열하듯 서 있다. 용문골로 오르는 등산로는 언제나 정겹고 호젓하다. 오랜만에 찾아왔어도 친근하고 익숙해서 좋다.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도 즐겁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멀지않아 그만이다. 용문골 암자의 할머니도 여전히 건강하고 밝은 미소 그대로다. 암자 아래 야영장 옆 텃밭에는 변함없이 배추와 무가 자라고 있다. 저 텃밭의 배추가 늘 삼겹살의 상추 대용으로 우리들 바위 식탁에 오르곤 했었는데. 가벼운 인사와 함께 수통에 물을 채우고 신선바위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전주와 대전 클라이머들의 주된 암벽훈련장 신선바위 바로 옆으로 붉은 화살표와 함께 ‘새천년’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오늘 올라야 할 루트의 시작점이다. ‘새천년’은 대전시산악연맹 산악구조대가 지난 9월 중순경 개척작업을 마무리했다. 개척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대전산악연맹 손중호(50세) 회장이 자주 산행에 참가해 함께 등반을 했으며 루트명을 지었다고 한다. 물론 ‘새천년에는 등반을 더욱 열심히 하자’라는 뜻이다. 오늘 모인 ‘새천년에는 더욱 열심히 등반을 할 ’것임에 틀림없는 사람들이 모두 열 명이다. 손중호(50세·대전시산악연맹 회장), 윤병렬(44세·대전시산악연맹 산악구조대 대장), 연헌모(39세·대전쟈일클럽), 조인식(37세·대전쟈일클럽), 이기열(35세·대전시산악구조대), 정군목(30세·대전중경공전OB), 윤기운(29세·대전등산학교 동문회), 사희무씨(28세·산이 좋은 사람들) 등 대전의 8명, 기자와 정종원 사진기자까지 총 열 명은 반드시 ‘새천년에는 더욱더 등반을 열심히 할 것’을 다짐했다. ‘새천년’에는 더욱더 열심히 손중호 회장이 은빛으로 번쩍이는 멋진 헬밋을 꺼내 쓰며 다시 한번 다짐할 때 윤기운씨는 어느덧 첫마디를 올라 “완료”를 외친다. 20미터 가량의 첫마디는 크랙을 이용해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등반 인원이 너무 많아 일부는 첫마디를 우회해 바로 두 번째 마디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촬영을 위해 주마링으로 오르는 정종원 기자는 익숙치 않은 탓에 연신 헛힘 만 써 댄다. 아마도 가장 열심히 등반할 것을 다짐해야 될 사람인 듯. 첫 마디 등반을 마치고 15미터 가량의 하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두 번째 마디의 등반을 시작한 정군목씨는 어느덧 등반을 마무리한 채 바위틈에 숨어 또 드러누웠다. 지난 5월 ‘연재대’ 리지를 함께 등반했던 정씨는 그 당시에도 틈만 나면 바위틈에 숨어 드러누웠었다. 그 당시에는 등반이 워낙 어렵고 힘들었던 탓이었지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차고 추워서라며 애써 변명을 한다. 첫 마디 종료 지점에서 15미터 하강을 하는 사이 연헌모씨가 두 번째 마디 등반을 시작한다. 88년 갸충캉(7952m)을 등정한 바 있는 연씨는 여전히 날렵한 몸매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으며 동작마다 부드럽고 여유가 넘친다. 이 두 번째 마디가 ‘새천년’의 전체 다섯 마디 중 가장 어려운 구간으로 꼽힌다. 80∼90도 정도 경사의 페이스로 이루어진 이 구간은 아래로 형성된 크랙을 따라 등반이 이루어진다. 두 번째 볼트를 지나 세 번째 볼트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미묘한 밸런스가 요구된다. 정군목씨가 순식간에 올라버렸고, 연헌모씨도 부드럽고 쉽게 오르는 것을 보고 기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신발끈까지 느슨하게 묶은 채 등반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바로 두 번째와 세 번째 볼트사이에서 여지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추락하면서 왼쪽 팔꿈치를 바위 턱에 찧었고, 그 아픔에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결국 두 번째 볼트에 매달려 목에 건 카메라를 풀어 배낭에 넣고 신발 끈을 조이며 ‘새천년에는 정말 더욱더 등반을 열심히 하자’를 속으로 수십 번 더 다짐해야 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팔꿈치가 너무 아팠다. 사람도 단풍이 된다 두 번째 마디 종료지점에는 널따란 테라스가 있다. 그 테라스에 걸터앉은 연헌모씨와 조인식씨는 발 아래 펼쳐진 능선들을 바라보며 무언가 얘기에 열중이다. 가만히 엿들어 본다. “여기서 쐬주 한잔하믄 끝내 주겄는디. 담에 올 때는 꼭 챙겨 와야 쓰것다.” 서쪽으로는 케이블카가 무시로 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그 안에는 빼곡이 사람들이 실려 매달려 오르고 있다. 저렇게 매달려 올라가며 바라보는 단풍과 이렇게 기어 오르다가 간혹 팔꿈치까지 아파 가며 바라보는 단풍은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와! 멋지다.” 이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의 감탄사. “산이 브리치 염색을 한 것 같은데!” 이건 서툰 주마링으로 양팔에 힘이 다 빠져버린 정종원 기자의 감탄사. “아이구. 팔꿈치 아파라.” 이건 물론 기자의 감탄사다. 세 번째 마디의 출발 지점에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약 4미터 가량의 수직 우향크랙을 레이백 자세로 올라야 하지만 보기에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정군목씨가 바위 바로 앞에 있는 참나무에 올라 힘겨운 레이백 구간을 피해 프렌드 2호를 설치하더니 손쉽게 올라가 버린다. “다음에 와서는 저 나무를 베어 버려야겠어.”이기열씨의 말. 그러나 이씨도 그 나무를 이용해 오른다. 아마도 저 나무는 영영 베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 같다. 종료지점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에 와이어와 하강용 링이 설치되어 있다. 조인식씨의 노란색 셔츠는 그대로 은행나무의 이파리, 윤기운씨의 헬밋은 새빨간 단풍나무의 이파리, 윤병렬 대장의 빨간색 배낭도, 기자가 입은 주황색 바지도 그대로 대둔산을 불태우는 단풍의 일부분이 된다. 연헌모씨의 선글래스와 햇빛에 번쩍이는 손중호 회장의 은빛 헬밋에도 대둔산의 단풍빛이 그대로 담겼다. ‘새천년’에서는 사람도 단풍이 된다. 단풍 불타는 대둔산에는 우리말고도 단풍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쪽 우뚝우뚝 뾰족하게 늘어선 암봉들 사이에서 몇몇 사람들이 ‘우정길(본지 99년 8월호 참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도 단풍과 뒤섞여 그대로 단풍이 되었다. 대둔산에는 우정길 외에도 ‘동지길(본지 95년 4월호)’과 ‘연재대(01년 5월호)’가 있었는데 이제 새천년이 한해 더 지난 지금 바로 이 ‘새천년’이 추가된 것이다. 세 번째 마디 종료지점인 굵은 소나무에서 바로 등반을 시작해 쉬운 슬랩으로 이루어진 네 번째 마디의 등반을 마무리했다. 네 번째 마디의 종료지점에 올라서자 동북쪽으로 대전시가지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야경이 근사하겠다. 다시 연씨와 조씨의 대화 내용. “여기서 비박하면서 마시는 것이 낫것는디. 대전시내 불빛을 바라보며 한잔 마시는 겨. 어때?” 이제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겨두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발 아래 속세를 굽어본다. 멀리 남동방향으로 덕유산 향적봉에서 남덕유에 이르는 덕유능선이 정확하게 한 뼘의 거리로 가늠된다. 그 앞으로는 단풍이 아름다운 적상산이 정말 치마를 두른 듯 자리잡았다. 동쪽으로는 서대산이 웅장하게 서 있다. 위로 오를수록 나뭇잎들의 색깔이 붉어지고 샛노래진다. 산이 불타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하산로는 미로 찾기 약간 오버행 진 다섯째 마디의 출발 지점을 윤기운씨가 성큼 올라서 버린다. 말 잔등처럼 생긴 바위 등을 타고 올라서니 의외로 넓고 평평한 마당바위다. 눈앞으로 시원한 조망이 일품이다. 산꼭대기에서 번진 단풍 불길이 산 아래로 번져 가는 모습이 실감난다. 아직 산 아래로는 푸른 신록이 남았고, 능선의 등성이 마다에는 울긋불긋 물이 들었고, 산꼭대기 바위 첨봉 사이에는 새빨간 단풍의 불길이 한창이다. 정종원 기자의 머리 색깔처럼 영락없는 브리치 염색이다. 대둔산이 브리치 염색을 한 사람의 머리라면 그건 틀림없는 봉두난발(蓬頭亂髮)한 광인(狂人)의 머리통일터. 그 머리통 사이를 꼬물대며 오르는 우리는 또 무엇일까? 우정길을 오르던 사람단풍도 등반이 끝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더 차가와졌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다섯째 마디 종료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쌍볼트에는 하강용 링이 설치되어 있다. 약 20미터 가량 오버행 하강을 해야 한다. 하강을 마친 뒤 붉은색 화살표를 따라 하산하는 길은 꼭 미로 속에서 헤매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이리저리 화살표는 끊길 듯 이어지더니 급기야는 도저히 길이 이어질 듯 보이지 않는 바위틈을 향해 있다. 배낭을 벗어 끌고도 겨우 한 사람 빠져나갈 수 있는 개구멍 바위를 통과하니 바로 신선바위에 닿는다. 정기자는 하산로가 더 재미있다며 마냥 신기해한다. 하산하던중 대둔산을 돌아본다. 울툴불퉁한 암봉들이 여전히 버티고 섰다. 문득, 팔꿈치가 쑤셔온다. 그래도 다시 한번 다짐한다. ‘팔꿈치가 부서져도 새천년에는 더욱더 등반을 열심히 하자’고. <글|윤대훈 기자 사진|정종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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