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문제
Ⅲ. 불교의 죽음관
1) 원시불교의 죽음관
2) 부파불교의 죽음관
3) 유식사상에서의 생명과 죽음관
Ⅳ. 불교의 육도 윤회설
Ⅴ. 티베트 불교의 죽음관
Ⅵ. 불교의 뇌사관
Ⅶ. 불교의 죽음관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
Ⅷ. 맺는 말
․ 영문초록
Ⅰ. 들어가는 말
생명윤리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뇌사와 장기이식과 안락사 등의 문제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는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다. 그리고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해탈해주기 위한 종교로서 인간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종교이다. 특히 그 가운데 죽음의 고통과 근본적으로 대결하는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서 죽음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부족하다. 필자는 죽음의 문제를 불교의 발전전개에 있어서 어떻게 전개되어나가는지 살펴보고, 결국 생명윤리에 있어서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뇌사판정에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에 불교의 죽음관에서 본 뇌사문제를 살펴보며, 불교의 죽음관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인간은 자기의 죽음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한다고 본다. 성수대교를 건설한 건축업자가 자기의 죽음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였다면, 예술적인 아름답고 튼튼한 다리를 생전에 건설하였을 것이다. 감옥에 간 어느 지도자도 자기 죽음 문제를 성찰하였다면 한없는 욕망을 어느 선에서 억제하였을 것이다.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할 시점이다. 자기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만이 진지한 삶을 살 수 있다.
Ⅱ.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문제
불교에서는 생과 사를 따로 떼지 않고 언제나 생사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현대인, 특히 젊은이는 죽음의 문제는 입에 담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러나 생자필멸은 필연의 법칙이다. 유교문화권, 특히 한자문화권에서는 四와 死가 그 발음이 같다고 해서 건물의 4층이나 14층 등은 그 표시마저 기피하고 있다. 그러나 기피한다고 해서 4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이란 실로 어리석다. 이런 일은 서양에서는 종교적 이유로서 13이라는 숫자를 기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두가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인간은 나면 반드시 죽게되어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거나 입에 담기조차 기피하려고 함은 우스꽝스런 일이지만 여하튼 그것이 현실인 것은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존재는 ‘죽음에의 존재’라는 표현을 하였다. 즉 현존재의 본질은 죽음에의 존재라는 것인데, 그 말이 지니는 뜻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게 결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죽음을 향해서 출생하고 있다. 즉, 죽음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오는 것이며, 한 번은 다가온다는 따위가 아니라 죽음은 날 때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죽음은 생과 언제나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자의 말이지만 그것은 바로 불교가 생사라고 표현하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의 존재방식은 죽음의 존재 이외의 다른 방식이란 있을 수가 없다. 젊었을 때는 마치 죽음의 문제라는 것은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서 늙어지면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당연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죽음이란 실제로는 늙음 젊음에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나 당면한 절실한 문제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바깥활동이나 생산활동이 많은 젊은이가 교통사고라든가 산업재해 등의 위험성이 더욱 크기 때문에 죽음에의 위험성은 나이만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란 나이와는 상관없이 생의 기초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사람은 태어났을 때 이미 죽을 만큼의 충분한 나이를 먹고 있다는 신랄한 말을 했던 것이다.
1, 10, 20, 30, 40, 50, 60, 70, 80세 모두가 죽을 자격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인간존재라는 것의 여실한 구조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 애써 눈을 감으려고 하는 경향이 쉘러가 근대유럽인의 근본적인 정신경향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확실하고 엄연한 사실에 눈을 감고 덮어두려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없다. 있어도 나와는 무관하다. 죽음이란 멀고도 먼, 어쩌면 나에게만은 다가오지 아니하는 그런 것으로 애써 멀리 내쫓아 버리려는 경향이 현대사회에는 널리 깔려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문제를 저 먼 곳으로 내쫓아 버리려 하면 인간이 인간임을 진실로 성취할 수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고금의 위대한 종교가나 현인들은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이 점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뛰어난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소크라테스(Socrates)나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B.C. 427~347)도 그러했다. 플라톤은 ‘철학한다는 것은 곧 죽음의 훈련이며 죽음을 배우는 길’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이들의 견해에 관해서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문제로 한 것은 영원 안의 자기이지, 사회 안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은 물론이다. 시간공간을 초월한 것에 비춰진 자기가 문제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벗들이 죽음을 피해서 도망가기를 권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자인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대화편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재판관을 향해서 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재판관 여러분, 이것으로 그대들과 이별이다. 나는 죽어 가기 때문에, 그대들은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만은 잘 기억해 두시오. 지금 나를 사형하려고 하는 여러분도 머지 않아서 죽음 앞에 서게 되기 때문에, 그때는 놀라는 일이 없도록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잊지 마시오.”라고 전제한 다음에 “진리를 안 사람, 진정한 것을 알게된 사람에게는 생전도 사후도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진리를 안 사람은 완전히 자유다. 죽음으로서 저해되지 아니한다. 살아 간다거나 죽어가는 따위의 재난에 현혹되지는 아니한다는 것이다. 즉 살거나 죽거나 그 어느 편도 무관하다라는 그러한 평화심이라는 것이 자연히 베풀어진다. 그것은 진리의 힘이다. 그것은 자기의 의지라든가 자기의 마음이 강하다든가 하는 그런 힘이 아니라, 진리의 힘이 그와 같이 만들어 준다. 그 진리가 나에게서 나타났을 때, 나는 나를 괴롭혀왔던 죽음의 두려움, 죽음의 불안이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된다. 진리란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성경에도 진리는 그대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진리라는 것은 인간을 괴로움으로부터 해방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되면 그는 철학자이지만 동시에 종교의 본질을 가르쳐 주는 종교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조금도 평소 때와 다르지 않은 스승을 보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치가를 지망했으나 철학으로 바꾼 것도 그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일부러 꾸며댄다거나 허세를 부린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고, 평소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보통 일반의 이야기를 하는 것같이 말할 수가 있었던 그러한 평상심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의 비밀, 즉 말하자면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것, 그런 것을 젊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탐구하게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평화로운 곳에서 살수가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그로 하여금 수많은 대화편을 쓰게 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의 스승만큼은 되지 못한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했던 것 같은 영혼의 불멸을 증명하는 일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자기가 영원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시간 속에 자기자신의 육체가 멸하면 그와 더불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당연한 진리이고 자신이 죽으면 그와 더불어 자기도 또한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제멋대로 품고 있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세상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은 나쁜 일이라 정하고 있다. 죽는 것이 나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는 것을 싫어한다. 만약에 죽음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대들이 어떻게 죽은 뒤가 나쁘다는 것을 아는가”라며 소크라테스는 묻고 있다. 그들은 죽어본 일도 없으면서 사후세계가 나쁜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것은 그대가 알지 못하는 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그것을 무지이면서도 지자처럼 건들거리고 있는 교만에 지나지 않다고 소크라테스는 지적한다.
인간은 제아무리 무지한 사람일지라도 교만은 있는 법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듣지 않겠다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결코 적지 않겠지만, 그러면서도 자기자신은 결코 무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을 지적해서 불교에서는 我見이니 我慢이니 하는 낱말을 만들어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아견은 어떠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있다.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인생이란 것은 이런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아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굳어져서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게 된다. 무지는 실은 교만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하였다. 죽는 것은 싫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로서 본능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러나 이 단순한 상태에는 단지 인간의 본능으로서만 처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거기에 교만이 섞여 있다. 존재를 여실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것을 거절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의 탓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교만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뜻에 있어서도 석가세존의 가르침은 참다운 인식, 진정한 지혜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다운 신앙의 신심이라는 것은 바로 나는 이와 같이 믿고 의심하지 아니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편에 힘써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힘써 하는 생각이나 노력 따위가 모두 부서지게 되어서 나오는 자기판단의 믿음, 그런 것은 역시 일종의 아견과 아만을 벗어났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참다운 신심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아견이나 아만의 분쇄야말로 바로 신심의 바탕이 된다는 점을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信心은 信知라는 말과 연관시키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를 깊이 內觀해 본다면 죄악이 무겁고 깊은 몸임을 느끼게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알게되는 것을 信知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신지라는 것은 나의 생각에 넣는다거나 또는 억지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자기자신에게는 죄악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자기를 무한자의 광명에 비추어 보면 자기생각이 부서지고 자기의 죄악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 이와 같이 눈이 열리게 되는 것, 즉 자각이 신지이며, 참다운 신심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진리에 대하여 눈이 열리는 큰 각성이 신이라는 것이다. 무한의 여래의 세계 안에 있다는 자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이다.
석가세존에 있어서는 진리에 눈을 떠서 깨달음을 연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구제였었던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실상에 대하여 석가세존께서 눈을 뜨신 것이다. 그 눈을 떴다는 것은 크나 큰 해방이었으며, 자유였던 것이다. 불교의 염불도에 있어서는 신을 획득했다는 경험도 바로 그러한 큰 세계 안에 있는 자기에게 눈이 열린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나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무한의 우주, 나의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이 우주라는 것이, 눈이 열리고 보니 실은 나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고맙고도 훌륭한 우주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전환이 바로 信知이며, 또는 줄여서 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세계에는 불안이 아니라, 자비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을 각도를 달리해서 말한다면, 나 자신을 끝없는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은 그러한 불안의 바다(海)라고 생각해 왔던 이른바 生死海가 바뀌어서 자비스런 여래의 서원의 바다, 즉 本願海, 고맙고도 바라던 生命海였었다고 신됨으로써 자기가 지금까지 진실을 거꾸로 보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것을 일컬어 신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란 어떠한 특별한 것에 골몰하고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부터 거기에 있는 세계라고 하는 것의, 즉 원래의 모습에 대하여 눈이 열리는 것을 뜻한다. 참다운 종교라는 것은 이러하다는 것임을 여러 조사님들은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다. 자기파의 에고이즘을 떠난다면, 불교나 다른 종파나 할 것 없이 모두 그 점에 있어서는 공동의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있어서 자파, 타파의 우열의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이와는 다른 차원의 기준에서 나오는 판단이라고 하겠다.
Ⅲ. 불교의 죽음관
1. 원시 불교의 죽음관
1) 죽음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먼저 해결해야 될 것은 의․식․주의 확보라 하겠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주어진 삶 자체가 지닌 형이상학적인 문제성을 더욱 크게 의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 결코 죽어야 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은 뒤는 어떻게 되는가. 사실 우리들은 언젠가는 이렇게 물으면서 고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 중에서 보다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이미 태어나서 여기에 살고 있지만 죽음은 이제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 의문이야말로 인간이 던지는 형이상학적 질문 중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며 나아가 인간이 지닌 문제 중 가장 고뇌스러운 문제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대개 두 가지의 기본적인 견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죽음이란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것으로 죽어도 마음만의 불멸에 의해 사후 존재가 지속된다는 영혼불멸론이다. 이에 반해 또 하나의 죽음이란 몸을 이루는 물질 요소의 흩어짐인데 마음이란 것이 물질에 종속된 현상에 지나지 않아 죽고 나면 흩어지는 물질만 남을 뿐 사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斷滅論이 그것이다.
이러한 두 견해는 역사적으로 면면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상들로서 피차간에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정립되었다. 그런데 그 근거들은 역으로 서로에게 치명적인 모순점을 일깨우고 있어 그 어느 견해도 완벽한 진리라고 볼 수 없음이 죽음을 중심으로 마음과 물질을 연구하는 현대철학의 결론이라고 한다.
사실 아함도 三法印說과 三世輪廻說을 통해 두 견해를 일단 부정하고 지양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2) 윤회와 무상․고․무아
아함에 설해진 여러 교설 가운데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이다. 이 교설은 현재의 삶이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그것은 과거 및 현재에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꾸준히 선업을 지음으로써 다가올 미래에도 적극적인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이 교설은 업보가 전개되는 범위로 숙세․현세와 더불어 내세를 설정하고 있어서 죽음을 문제삼는 우리에게 큰 암시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삼세윤회설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경문을 하나 살펴봄으로써도 알 수 있다. 즉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報를 받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현세와 내세는 죽음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이 경문은 죽은 뒤 내세에서는 어떤 방식에 의해서든 과보를 받을 존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할 것이다. 결국 아함은 사후존재를 일단 긍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삼세윤회설을 통해 아함이 죽음에 대해 지닌 기본입장이 단멸론이 아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적인 견해를 지양한 아함은 三法印을 누누이 설함으로써 이번에는 영혼불멸론적인 입장이 아님도 강조하고 있다. 사후에 영속하는 불멸의 마음이란 일체의 육체적 작용을 통어하고 모든 인식작용을 종합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대개들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나(我)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함은 그러한 주체를 열두 포섭처 중 의지(意, manas)에다 포섭하고 있다. 여기서 그 의지는 눈․귀․코․혀․몸과 함께 덧없고 괴로우며 무아(無我)라고 단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는 영속성이 없으며(無常) 또한 주체성(主帝性)도 결여하고 있다(苦)고 한다. 따라서 불멸의 마음이란 잘못된 견해임을 현실의 관찰로부터 자명한 사실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함은 三法印을 설하면서 죽음에 대한 영혼불멸론적인 견해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업보의 삼세윤회설과 삼법인설이 죽음과 사후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아함의 기본입장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과 사후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 더 나아가 죽음의 근원적인 극복을 위해서 아함에 설해진 새로운 차원의 교설을 다시 면밀히 음미해야 할 것이다.
3) 계층을 지닌 존재
앞서 예시한 두 견해는 죽음과 사후를 설명하는 전제로서 마음의 본질을 세심히 살피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란 몸을 이루는 물질과는 전혀 다른 실체라는 견해를 가진 것이 영혼불멸론이고, 마음을 물질의 종속적 현상으로 본 것이 단멸론이었다. 이와 같이 두 견해는 마음의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을 이루는 물질에 대해서는 거의 비슷한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두 견해가 물질에 대해서 서로 비슷하게 이해한 내용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물질이란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라는 입장이다. 이것을 ‘주어진 장소를 차지하는 존재’라는 정도로 두 견해의 물질에 대한 파악이 끝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질이 그렇게 간단한 것일까. 물질을 깊이 연구한 현대의 자연과학은 ‘물질이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기술하는 편리한 공식’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꽤 까다로운 설명이지만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란 관점과는 자못 다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든 현대물리학의 물질관도 현재 개척중인 첨단이론에 입각한 것이어서 계속적인 연구와 수정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죽음과 사후를 설명하는 전제로서 마음의 본질을 살피는 것은 물론 필수적이지만 그와 함께 물질에 대한 정확한 파악도 선결될 것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래서 아함에서는 마음과 함께 물질의 고찰도 결코 등한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음과 물질의 본질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그들을 따로따로 살피기보다는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음과 물질을 동시에 고찰한다. 바로 이러한 미분적 고찰에 의해 물질과 마음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갖도록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살폈듯이 정신과 물질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열두 포섭처(十二處)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두 포섭처란 정신과 물질 등 일체 존재를 분류, 포섭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함은 열두 포섭처 전체를 고찰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시각에서 살핌으로써 마음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 정확한 견해를 제시한다. 여기서 ‘새로운 시각’이란 열두 포섭처의 ‘질적인 변화’에 주의함을 말한다. 즉 앞서 우리가 열두 포섭처를 살필 때는 ‘형태적인 변화’에 주의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돌을 밀면 돌을 민만큼 밀린다고 할 때 우리는 형태적인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나 돌 자체는 변함이 없이 그들이 존재했던 위치 등의 외적상태의 변화만 관찰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두 포섭처는 형태적 변화뿐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언젠가는 보인다. 예를 들면 사람의 성장 및 노쇠과정이 그것이며 우유나 酪(버터)이 되고 酬(치즈)가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열두 포섭처의 질적인 변화를 세심히 고찰한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시각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출발하여 아함은 마음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의 본래적인 구조를 밝혀내고 죽음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의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간단히 소개한 현대물리학의 물질관에 대한 이해가 까다로운 것 이상으로 아함이 밝히는 존재의 본래적 구조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아울러 그런 구조에 이르는 과정도 쉬이 납득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아함에 정연히 전개되어 있는 과정과 결과들을 간단히 언급함으로써 죽음의 근원적인 극복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존재의 질적 변화의 일례로서 우유가 낙(버터)으로 변할 때를 살펴보자. 우유가 낙으로 변할 때 우리는 낙을 우유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알게 된다. 이렇게 ‘다르게 아는 것’을 아함은 식별(識, vijñāna)이라고 부른다. 식별은 다시 여섯 가지로 세분되며 그 뜻은 보다 포괄적이지만 핵심적인 뜻은 열두 포섭처의 질적인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다. 그런데 낙이 우유와 질적으로 다르다면 낙은 생하였고 우유는 멸했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변화 후 주어진 공간에서는 우유는 사라지고 오로지 낙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낙의 발생에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만 한다. 첫째는 온도나 압력과 같은 외부의 인위적인 작용이 주어지는 것이며, 둘째는 우유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낙은 변화의 결과로써 여섯 식별에 해당하며, 외부의 인위적 작용은 변화의 動力因으로서 여섯 감관(六根)에 포섭되며 우유란 변화의 質料因으로서 여섯 대상(六境)에 들어간다. 그래서 아함에서는 낙이라는 결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의존해야 된다는 뜻으로 “여섯 감관과 여섯 대상을 연하여 여섯 식별이 생한다”라고 종합적으로 설하고 있다. 여기서 ‘연(緣)한다’라는 술어가 바로 ‘의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함은 생멸하는 전후의 두 존재 곧 여섯 식별과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의 사이에서 성립하는 ‘의존관계’를 발견하고 있다. 그런데 의존관계는 현실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의존하는 것’과 ‘의존되는 것’이 동시에 갖춰져야 성립할 수 있다. 낙이 발생하기 위해 우유 등에 의존한다면 의존하는 낙과 의존되는 우유는 동시에 존재해야 할 것이 강력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의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가졌던 生滅의 개념을 수정하게 된다. 즉 낙이 生했다고 할 때 낙은 완전한 無로부터 생했다기 보다는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현상계로 ‘올라왔다’고 보게 된다. 또 우유가 滅했다 할 때도 우유는 완전한 無로 사라졌다기 보다는 현상계로부터 ‘내려갔다’라고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생멸의 개념을 수정함으로써 우유와 낙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둘 사이의 의존관계는 원만히 성립하게 된다.
그래서 아함은 다른 차원의 두 세계를 오르내리며 의존관계를 맺고 있는 여섯 식별과,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을 열여덟 계층의 교설(十八界說)로 그리고 있다.
“열여덟 계층이 있느니라. 곧 여섯 감관의 계층(六根界)․여섯 대상의 계층(六境界)․여섯 식별의 계층(六識界)이 그것이니라.”
여기서 계층(界, dhẫtu)은 층․요소 등을 뜻하는 술어로서 그 뜻을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이 이루는 중층적 구조를 잘 설명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러한 열 여덟 계층의 교설에서 아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즉 좀더 관찰을 진행하면 여섯 식별과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이 모두 몇 개의 기본적인 물질원소가 결합해서 이뤄진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아함은 당시 인도의 四大說을 받아들여 地․水․火․風의 4원소를 기본원소로 잡고 있다. 그런데 이를 4원소의 입장에서 열 여덟 계층을 재조명하게 되면 열여덟 계층은 땅의 계층․불의 계층․물의 계층․바람의 계층․공간의 계층․식별의 계층으로 구성된 여섯 계층(六界)으로 파악된다고 한다.
결국 열여덟 계층과 여섯 계층을 설하면서 아함은 마음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에 대해 하나의 귀결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존재는 이제 주어진 공간을 메우는 단순한 개체로서 파악해서는 안된다. 질적인 변화에 참여한 전후의 두 존재가 의존관계를 중심으로 차원을 달리하며 이루고 있는 층과 같은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된다. 여기에 더하여 기본적인 원소들이 동일한 차원의 공간 속에서 서로 결합과 분리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존재에 대해 정당한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을 이렇게 파악할 때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철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存在觀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한번 살핌으로써 우리는 죽음이란 어떤 것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보다 타당하고 진리로운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4) 인간존재의 성립
생명의 유한성은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깊은 불안은 인간에게 역으로 생명과 죽음의 정체를 규명하게 만든다. 내적 불안과 함께 생사의 정체를 추적하였던 역대의 사상가들은 먼저 마음과 몸을 세밀히 관찰함으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현상의 관찰에만 그치고 배후에 숨은 원리를 파악하는데는 좀 미흡한 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몸을 이루는 물질 일반에 대한 각 사상가들의 견해가 너무 피상적임을 보아도 드러난다. 이점에서 불교는 독특한 접근을 보여준다. 아함은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마음과 물질을 포함하는 일체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을 밝히고 있다. 본래의 모습이란 존재의 질적인 변화를 고찰대상으로 삼아 철저하고 정연한 논리적 성찰을 행할 때 누구나 반드시 이르게 되는 한 구조를 말한다. 이러한 존재의 본래적인 구조를 아함은 일단 여섯 계층의 교설(六界說)로 그려낸다. 앞서 살폈듯이 여섯 계층의 교설의 내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상․하로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地․水․火․風으로 대표되는 기본존재들이 무수히 있다. 기본존재들은 앞서 밝힌 두 공간의 상․하에 하나씩 배열되어 중층 구조를 이룬다. 중층구조를 이루는 존재들은 자유로이 상․하의 위치를 바꾸며 오르내린다.
그런데 존재의 본래모습이 이와 같다고 할 때 현실에서 보는 존재의 모습과는 매우 다름을 우리는 직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현실은 두 개의 공간도 없을뿐더러 존재들도 단지 주어진 공간을 채우는 거대한 덩어리의 단일구조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상의 차이는 마침내 존재란 본래는 중층구조를 이루는데 현실적으로는 단일구조로 관찰되는 묘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본래의 중층적인 구조가 현실에서는 단일구조를 갖게 되었는가를 물으면서 인간 및 자연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게 된다. 아울러 이 물음에 대해 아함이 내리는 답을 심사숙고함으로써 인간개체 형성에 대한 매우 새로운 관점을 경험하게 된다.
아함은 존재의 중층적인 구조와 현실의 단일구조 사이의 간격을 다섯근간의 교설(五蘊說)을 설하면서 반듯하게 연결한다.
앞서 약술한 여섯 계층은 상․하의 두 공간에 배열된 존재들이 자유로이 아래위로 위치를 바꾸며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보통 오르내리는 기본존재들이 어느 순간 차분히 정지할 때도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 집착이 가해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즉 한 때 멈추게 된 존재들이 이루는 일시적인 ‘형체’를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집은 현실에서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고집과 맥을 같이한다. 여기서 아집이 가해진 형체는 상․하의 공간에 걸쳐있다. 따라서 위․아래의 존재 중 어느 층의 존재를 중심으로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을 일단 갖게 된다. 실제 인식이 영위되는 것이 위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층의 존재도 자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래층의 존재와 위층의 존재를 중심으로 합하여 하나의 존재라는 판단 즉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아집이 가해진 ‘형체’는 실은 상․하의 공간에서 층을 만들며 오르내리던 두 존재가 일순간 멈추는 데서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성격상 다시 오르내리려 한다. 그러자 오르내리려는 경향은 곧 그 ‘형체’에게 불안함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오르내림이 수행되면 집착된 ‘형체’는 여지없이 붕괴될 것이므로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붕괴될 것 같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불안의 원인인 오르내림이 불가능하도록 상․하의 두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붙여야 된다는 의도가 이어서 일어나게 된다.
붙이려는 의도가 있게 되면 자연히 ‘결합’이 일어난다. 즉 실지로 아래층의 존재를 위의 존재에게 ‘결합’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이 마무리되면 두 존재는 하나의 개체가 된다. 그런데 그 개체는 이전과는 모습이 다른 데가 있다. 두 존재가 떨어져 있는 경우와 하나의 개체로 결합된 형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르다고 파악하는 ‘식별’이 있게 된다.
이리하여 최후로 ‘식별’된 개체는 이미 두 종류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일한 공간에서 단일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일해진 개체는 역시 주위의 숱한 존재들에 싸여있고 그들과의 작용․반작용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주위 존재의 자유로운 변동이 계속되는 한 끊임없이 붕괴의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스스로 주위의 존재들을 자신에게 병합시킴으로써 가능한한 붕괴의 위험을 감소해간다. 그런 과정에서 개체는 횡적으로 부피가 증대해가고 필요에 따라 감각기관 등의 생물학적 기관을 갖추게 되어 일반적으로 생물이 탄생하게 된다. 인간이란 그렇게 성립된 생물의 한 부류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형성에 무엇보다 근원적인 것은 일시적으로 집착된 물질적 ‘형체’와 그를 지속하기 위해 연이어 발생한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불교의 다섯 근간의 교설(五蘊說)은 바로 이러한 내면적 소식을 전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섯 근간이 있느니라. 곧 형체(色, rũpa)․느낌(受, vedanā)․생각(想, saṁjñā)․결합(行, saṁskara)․식별(識, vijñāna)이 그것이니라.”
아함은 이상과 같이 설하고 있다. 더욱이 온(蘊)이라고 흔히 번역되었던 이 술어가 ‘근원적인 부분’ 또는 ‘근간적인 부분’이란 뜻을 지닌 범어 ‘skandha'의 번역임을 생각해보자. 그러면 ‘형체’ 등의 다섯 가지가 인간존재의 ‘근간’을 이룬다고 살펴왔던 앞의 견해는 바로 다섯 근간의 교설 내용으로 적확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여섯 계층의 교설(六界說)과 다섯 근간의 교설(五蘊說)을 통하여 인간존재 성립에 대해 축약적인 이해를 시도해보았다. 그런 개략적인 설명가운데서 죽음의 이해를 위해 우리가 특히 관심을 보여야 할 부분은 ‘결합’작용이다. ‘결합’에 주의하면서 죽음에 대한 구조적인 해명을 시도해보자.
5) 죽음의 형태
신비롭기 그지없던 인간존재의 형성은 불행히도 일시적인 ‘형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한순간 성립된 어떤 ‘형체’ 위에 가해진 아집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느낌’․‘생각’․‘경합’․‘식별’ 등의 일련의 작용이 덩달아 일어남으로써 인간개체의 시원적인 부분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상․하로 분리된 존재를 붙이는 종적인 결합에 이어서 좌․우 존재를 자기에게 병합하는 횡적인 결합이 일어난 끝에 현실과 같은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즉 인간존재란 상․하․좌․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존재들을 한데 결합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을 이루는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결합(行, saṁskara)’ 작용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개체의 ‘결합력’이란 기본존재들이 보이는 분리의 성향을 언제까지나 막고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들은 주위존재들과 민감한 작용․반응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주위존재들은 수적인 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의 합보다 월등히 많다. 작용력의 면에서도 인간존재의 결합력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막강하다. 여기서 만약 주위 존재들의 작용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들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주어지면 별문제이다. 하지만 주위의 작용은 언제나 인간에게 반하는 방향으로 가해진다. 그리하여 인간개체를 유지하는 근간적인 결합력과 주위존재의 반대작용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조성된다.
여기에 주위존재들의 세력이 월등히 강하므로, 인간의 결합력은 견딜수 있는 데까지 지탱하다 끝내 한계에 이르고 붕괴해버리고 만다. 이러한 결합작용의 종식과 동시에 인간을 구성하던 무수한 기본존재들도 상․하․좌․우의 본래적인 위치로 주위존재의 작용에 따라 오르내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 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지는 것이 죽음의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흩어진 기본존재들은 다시 여섯 계층(六界)의 모습을 띠게 되고, 여섯 계층의 한 ‘형체’ 위에는 아집이 더해진다. 아울러 ‘형체’를 지속하려는 ‘느낌’․‘생각’․‘결합’․‘식별’의 작용이 진행되고 마침내 또 하나의 인간개체가 형성된다. 인간존재는 주위 존재와의 대치를 견디지 못해 언젠가 또다시 붕괴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여 生死는 바퀴가 구르듯 돌고 돈다. 이것을 生死輪廻라고 한다.
6) 죽음의 극복과 정․성
인간을 비롯한 일체생류의 삶과 죽음이 이처럼 도식화될 때 우리의 가슴은 무겁기만하다. 이생에 닥칠 한 번의 죽음도 그토록 두려웠는데 끝없이 받아야 할 나고 죽음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아가 다섯 근간(五蘊)을 주축으로 삼는 인간은 나고 죽는 것 외에도 병과 늙음 및 대인관계․사회생활을 통하여 언제나 숱한 ‘괴로움(苦, duḥkha)'을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할 때 인간의 괴로움은 자유로운 여섯 계층(六界)의 일시적․부분적 ‘형체’를 나라고 집착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아집의 존속을 위해 떨어진 상․하 두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합쳐올림(集起)’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합쳐올라 하나의 개체를 고수하며 괴로움을 야기하는 형체․느낌․생각․결합․식별 등의 다섯 가지 근간(五蘊)을 ‘멸함(滅, nirodha)’으로써 괴로움의 근원적 극복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집기’한 다섯 가지 근간의 ‘멸함’이란, 주위 존재의 세력을 견디지 못한 붕괴와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붕괴는 죽음에 해당하며 여전히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를 초극하기 위한 근원적인 방법으로 취해질 다섯 근간의 ‘멸함’을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의 ‘길(道, mārga)’이 필요해진다. 그 길은 우선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런 뒤 이를 바탕으로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직업, 바른 삶, 바른 정신, 바른 기억 등의 일련의 행위를 확실히 수습케 하고 끝으로 바른 삼매에 듦으로서 다섯 근간의 ‘멸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다름아닌 아함의 도처에 설해지고 있는 네 가지 성스런 사실(四聖諦) 및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의 교설내용이다. 네 가지 사실 및 여덟 가지 바른 길의 진의를 철저히 파악하고 그에 입각해 완벽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겁의 생사고를 뛰어 넘는다. 그래서 아함은 네 가지 사실 및 여덟 가지 바른 길에 의해 수행하는 수행자가 얻는 과보(道果)를 넷으로 갈라 설하고 있다. 곧 예류(預流; 흐름에 이른 자)․일래(一來; 한번이 있는 자)․불환(不還; 옴이 없는 자)․아라한(阿羅漢; 동등한 자)으로 구성된 沙門四果가 그것이다.
결국 아함은 여섯 계층의 교설(六界說)과 다섯 근간의 교설(五蘊說)이라는 이론(解)을 우선 바탕으로 한다. 그 뒤 네 가지 사실과 여덟 가지 길의 교설 및 沙門四果라는 실천원리(行)를 제시함으로서 하나의 완벽한 교리조직을 제시한다. 그것은 마치 열두 포섭처의 교설을 이론적 근거로하여 業說이란 실천원리가 설해진 것과 같다.
그런데 업설이 선․악을 취급하는 데 대해 여덟 가지 길의 교설은 정․사를 문제삼는다. 선․악이 상대적이라면 정․사는 절대성을 띠고 있다.
선․악의 업설은 천국에 나는 것(生天)을 최고 목적으로 하여 괴로움의 상대적인 소멸을 꾀한다. 이에 대해, 네 가지 사실 및 여덟 가지 교설은 천국에도 남겨져 있는 생․사의 괴로움과 같은 절대적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 가지 성스러운 사실’을 수식하는 聖이란 술어도 눈길을 끈다. 서양의 종교학자들은 흔히 종교를 ‘성스러운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성스러운 것은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지고의 존재이며 최고의 신앙대상인 성부․성자․성신의 삼위(三位)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실체인 삼위는 그 앞에서 원죄를 시인하며 기도하고 희생을 바치는 피조물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함으로써 참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네 가지 성스런 사실의 성은 자못 사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사실(諦, satya)을 수행함으로써 죽음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음을 살폈다.
그런데 四聖諦와 八正道의 수행을 통하여 생사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욕망 속에서 산다면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
2. 부파불교의 죽음관
부파불교에서는 명근(命根)이라는 원리를 세운다. 명근(jīvita-indriya)이란 인간의 생명을 유지․보존시키는 힘(능력)이라는 의미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14개의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중의 하나이고, 실유(實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명근의 본질은 수이고, 능히 난과 식을 가진다(?구사론?)’, ‘명근은 삼계의 수이다(?발지론?)’라고 하여 육도윤회를 거듭하는 인간의 생명의 본질이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난과 식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명근이 끊어지면 식과 난의 움직임은 없어진다. 즉 인간의 죽음을 의미된다.
또한 5세기경의 대주석가 붓다고사(佛音, Buddhaghosa)는 ?청정도론(淸淨道論)? 제8장 수념업처 중의 사념에 대한 설명 중에서 죽음을 ‘하나의 존재에 있어 명근의 단절’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부파불교에서는 생명의 근원체를 명근으로 삼았다. 따라서 부파불교에서는 명근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명근이 기능을 상실할 때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유식사상에서의 생명과 죽음관
부파불교에서는 생명유지의 근원을 명근으로 삼았지만, 유식에서는 「아라야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였다. 우선 아라야식에 대해 세친(Vasubandhu)의 ?유식삼십송?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 변화적 성숙태(異熟)라고 하는 것은 아라야라고 불리는 인식작용이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종자(種子)를 가지고 있다.
그것에 있어서 <내재적인> 소재(素材)에 관한 인과관계와 <외래적인> 장소의 인식을 명확히 감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1) <대상과의> 접촉, (2) <대상에로의> 지향(志向), (3) <대상의> 감수, (4) <대상의> 표상, (5) <대상에 대한> 심적인 움직임을 동반한다.
다만, 그곳에 있는 (3) 대상의 감수는 <감성적으로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닌> 무기(無記)이다. 또한 이것은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지 않는 「무복무기(無覆無記)」이다. 똑같이, <이것 이외의> (1) 대상과의 접촉 등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그것은(아라야) 강의 급류와 같이 변화를 계속한다.
그것(아라야식)은 아라한에 도달했을 때, <그> 기능을 잃는다.
?유식삼십송?에서의 아라야식에 대한 정의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아라야식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종자(bīja)가 머무는 곳이고, 일체의 종자를 가진 것이므로 일체종자식(sarva-bījaḥ vijñānam)이라고도 한다.
② 아라야식은 과거세의 행위(업)에 의한 훈습(vāsanā)을 받지만,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고 무기(無記)이므로 이숙(vipaka)이라고도 한다.
③ 인간의 생존의 근저에 있으면서 매 순간마다 작용하여 식의 흐름을 형성한다. 따라서 윤회적인 생존은 이렇게 부단히 흐르는 아라야식을 근거로 한다(윤회의 주체)
④ 아라야식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서 찰나마다 상속을 지속하므로 잠재의식 또는 심층의식이라고도 부른다. 반대로 마나식(자아의식)과 육식은 현세적인 식(pravṛtti-vijñāna)이라고 한다. 과거의 행위에 의해 아라야식에 훈습이 남겨져 그 잠재력이 즉, 그 힘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현세적으로 나타난 것이 마나식과 육식이다. 현세화 된 육식과 마나식은 기능함과 동시에 그 훈습(여습)을 아라야식 중에 남긴다. 이렇게 하여 아라야식과 현세적인 마나식과 육식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아라야식의 설명 중에 인간의 생존과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제3게송의 「불가지집수처(不可知執受處)(3ab)」이다. 여기서는 아뢰야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라야식의 대상은 집수(執受, upādi 또는 upādāna)와 처(處, sthāna, 세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식작용은 반드시 대상을 가지고 대상에 작용한다. 인식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동시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각각의 인식작용에 의해 다르다. 예를 들어 안식(眼識)의 대상은 색경(色境)이지, 그 이외의 것은 아니다. 붓다의 경지에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서로 작용하여 인식작용과 대상 사이에 자유로운 관계가 인정된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의 단계에서는 각각의 인식작용과 대상과의 관계는 정해져있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어떠한 심층적인 의식이라도 아뢰야식이 하나의 인식작용인 한, 역시 대상은 정해져 있다.
아뢰야식의 대상은 ‘집수(執受)’와 ‘처(處)’이다. 집수에 대해 ?성유식론술기?에서는 ‘집섭(執攝)’, ‘집지(執持)’라고 하였다. ‘집(執)’이라는 것은, 아뢰야식이 종자를 ‘간수하다’라고 하고, 종자를 ‘보존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아뢰야식의 대상이 된다. ‘수(受)’라는 것은 ‘수령(受領)’․‘각수(覺受)’의 의미라고 하였다. 종자와 신체를 수령하여, 그것을 대상으로 하고, 유근신(身體)에 감각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일으킨다. 간단히 말하면 아라야식의 대상은 ‘종자’와 ‘유근신’이다. ‘종자’는 ‘선험적인 소질․능력․기근(機根)의 본유종자’와 ‘성장의 과정 속에 학습하고 몸에 붙은 신훈종자’로 구분한다. 이것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관계한다는 것은 동시에 집착한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심저(心底)에서 자신의 소질에 집착하고, 자신의 경험, 즉 과거에 계속해서 구애받는 존재라는 인간 인식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소질이나 경험에 바탕을 둔 인생의 확립을 나타내기도 하였지만, 반면 자신의 인생의 한계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유근신은 신체이다. 인간은 심저에서 자신의 신체를 내면으로부터 감지하고, 그것에 관계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인간은 아라야식이 신체를 대상을 삼아 집수할 때만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한다. 반면 아뢰야식이 신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경우에는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성유식론? 권3에서는 여러 가지의 각도로 아뢰야식에 대한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상식의 논리(理證)로서 아라야식을 논증하는 것 중에서 4번째의 논증은 ‘선업에 이끌려 무기인 제팔식(아라야식)이 근원이 되어 우리들의 신체는 감각, 지각 등의 활동을 한다’고 하였고, 5번째 논증에서는 ‘수․난․식은 서로를 의지하며, 상속하고 지속한다. 그리고 수와 난를 가지고 끊어짐이 없이 지속시키는 것이 식(아라야식)이다’라고 하여 우리들의 신체를 유지시키는 것을 아라야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아라야식의 6번째 논증 중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또한 죽음을 맞이할 때는 선악(善惡)의 업에 말미암아 하반신부터 상반신에 냉촉이 점차로 일어난다.”
?유가사지론? 권1에는
“장차 임종을 맞이할 때 악업을 짓은 자는 (中略) 상체는 점차로 냉촉(冷觸)이 일어난다.”
?섭대승론?에서도
“악업을 짓고 선업을 지어 장차 죽음을 맞이할 때, 혹은 하체(下體), 혹은 상체(上體)의 소의가 점차로 차가워진다.”
그리고 ?섭대승론?을 주석한 무성과 세친의 양주석서(兩註釋書)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주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식논서의 대부분은 인간의 육체가 죽어갈 때는 상체와 하체가 차갑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신체가 차갑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계속해서 ?성유식론? 권3에서는
“오직 이숙심(아라야식)만이 먼저의 업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두루 상속하여 신체를 집수한다. 집수(執受)를 버린 처(處)에 냉촉(冷觸)이 생기한다. 수․난․식의 3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라고 하여 아라야식이 신체를 집수(執受)하면 신체를 유지하지만, 아라야식이 신체를 집수하지 않을 때는 처(處-감각기관)가 차갑게 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유식사상 입장에서의 인간의 죽음은 아라야식이 신체의 집수를 버릴 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아라야식으로부터 집수를 받지 못하여 냉촉(冷觸)이 일어나면 인간의 신체는 다음과 같이 된다고 ?성유식론?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즉, ‘냉촉이 일어난 處(신체)는 비정(非情)이 된다. 아라야식이 변연(變緣)한 것이지만, <아라야식이> 집수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여 신체가 차가워진 상태는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또한 아라야식으로부터 변현한 것이지만 아라야식으로부터 집수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유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한 세계는 아라야식의 변현이다. 그러나 인간과 器世界(세계)의 차이점이 있다. 인간도 세계도 아라야식으로부터 변현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세계는 아라야식에 집수되지 않지만, 우리들의 신체는 아라야식에 집수된다는 것이다. 아라야식의 집수에 의해 우리들의 신체는 체온을 유지하여 차갑게 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이 신체의 집수를 포기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개체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Ⅳ. 불교의 육도 윤회설
불교에서는 깨치지 못하면 죽어서도 윤회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윤회설을 검토해보자.
윤회설은 말한다. “네 전생을 알려거든 현재의 삶을 보아라. 그리고 내생을 알고자 하거든 현재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아라”. 이처럼 윤회설은 자신의 모든 잘잘못의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되며, 세상의 모든 일은 因果의 엄정한 법칙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 법칙을 알아 지혜롭게 살아가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와 건강은 모두 지난날의 선한 행위와 노력에 의한 것이고, 가난과 천함과 질병은 게으름과 오만함 등 악한 행동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악한 의지와 행동을 반성하고 선해지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윤회설을 교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채용하고 있는 불교에서는 생명체가 나고 죽는 과정과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들에 관한 자료들은 소멸되지 않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쌓여 항공기의 블랙박스 기록처럼 보조된다. 그렇게 보존된 자료들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자료의 질과 양에 따라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여섯 갈래로 태어나게 된다.
지옥은 온갖 고통이 심한 세계로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열 가지 나쁜 업을 저지른 결과로 이르게 되는 곳이다. 아귀는 배고픔의 세계로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고 남에게 인색한 사람이 가는 곳이다. 소나 말, 돼지 등 동물의 세계인 축생의 세계는 감정에만 치우쳐 아주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세계이다. 이들 지옥, 아귀, 축생은 육도 가운데서 고통만을 받은 세계이므로 三惡道라고도 부른다.
아수라는 싸움을 좋아하여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교만하고 성내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게된다. 삼악도보다 지혜는 있으나 나라는 자의식이 강하기에 고통이 심한 세계이다.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고 있는 인간계는 크게 고통을 받을 만한 악행이나 행복만을 약속받을 만한 뛰어난 선행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경우에 태어나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는 지은 바 복과 죄에 따른 보상과 벌이 있을 뿐인데 비해,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인간계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고통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천상에 나거나 지옥에 나게 하는 선업과 악업을 짓는 것은 오직 인간계에서만 가능하고, 수행을 통해서 성불을 하는 것도 인간계에서만 가능하다.
인간계보다 한 단계 위인 천계는 괴로움은 적고 평화롭고 즐거움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만 하면 해결된다는 천계는 열 가지 착한 업(십선업)을 지으면 태어날 수 있다.
선한 업을 많이 지으면 향상의 세계, 즉 하늘 세계에 태어나 즐거움을 누리고, 악한 업을 지으면 지옥이나 아귀, 축생 등의 삼악도에 태어나 고통을 받는다는 불교의 이러한 윤회설을 육도 윤회설이라고 한다.
Ⅴ. 티베트 불교의 죽음관
티베트의 밀교승들은 죽음의 세계까지도 분석하였다. 그것은 이집트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한 본격적인 분석이었다.
인간이란 살아가며 죽어가고, 죽어가며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자칫 쾌락주의에 빠지기 쉬울 것이며, 죽어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염세주의로 빠지기 쉬울 것이다. 쾌락주의도 염세주의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손등과 손바닥을 함께 볼 때 손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하고 볼 때 우리의 인생의 본질을 알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시실리섬의 시민들의 생활을 비판한 말,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내일 죽을 것처럼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또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집을 짓고 있다.”라는 비판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한다. 우리 주위에 넘치는 저 사치풍조는 우리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만 집착했기에 전개되는 문제가 아닌가.
티베트 밀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배워라. 그러면 삶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티베트 밀교에 의한 죽음의 세계를 탐구한 ?사자의 서(Book of Dead)?는 수천 년 동안 티베트에 비밀로 전해오다가 서양의 학계에 소개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음천도밀법?은 일천 수백 여 년 동안 전해져 온 진언밀교의 성전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임종, 그리고 재탄생까지 49일간의 모습이 선명한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고,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갖지 않은 상태인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것이고 다만 영혼의 무한한 여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갓난아기가 이 세상에 눈을 떠서 이 세계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듯 죽은 자는 사후세계에 눈을 떠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 책을 깊이 연구한 W.Y. 웬즈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이 넌지시 가르쳐 주는 참다운 과학적, 요가적 방법에 의한 인간이라고 하는 그 알지 못할 존재에 대한 탐구야말로, 지구 밖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차원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육체가 달 또는 금성 그리고 그 어떤 천체 위에 서 본다는 것은 아마 인간의 지식에 보탬이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수롭지 못한 지식을 좀 더 걷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책에서의 현인(guru)의 가르침처럼 사물을 넘어선 초월, 바로 그것이다.”라고 격찬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사후 다른 생을 얻기까지 49일 동안 흔히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을 현대적 언어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 인간들에게 가르친다. 모든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임종 때,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은 육체의 중추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떠나간 영혼은 처음에 희미한 어둠 속에 떠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대개는 곧 밝고 맑은 빛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영혼은 아픔으로부터 해방된 매우 평온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
많은 영혼은 그것을 겁낼 것이다. 즉, 영혼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육체는 죽었지만 새로운 몸이 생겼다고 많은 영혼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몸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투명하게 무게가 없으며 공중에 떠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육체의 죽음을 알고 절망하거나, 혹은 육체가 죽은 것을 잘 모르고 죽은 곳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도 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은 빛 속을 더욱 날아가서 전에 죽은 육친과 친구들의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다.
그후 영혼은 이상한 거울도 보게 될 것이다. 이 거울에는 생전에 그 사람이 행한 행위와 생각의 모든 것이 비쳐진다.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편안해 진다. 그러나 나쁜 행위와 나쁜 생각은 비쳐질 때 영혼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시련을 불에 데는 것처럼 느끼는 영혼도 있다. 견딜 수 없는 목마름과 무서운 한랭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또한 더욱 밝은 빛 속으로 날아가는 영혼도 있다.
이 여행은 길다. 혹은 짧다. 도중에 암흑과 빛이 번갈아 나타난다. 그리고 조만간 많은 영혼이 무한한 하늘을 빠져나가 마지막 어두운 길에 들어가게 된다. 그 길은 좁고, 괴롭고, 길고, 혹은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둡고 좁은 그 길의 저 쪽에 다시금 빛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영혼의 세계의 빛이 아니라 다시금 이 세상의 빛이다. 많은 영혼은 이렇게 하여 다시금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전에 살고 있었던 것과 같은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많은 영혼이 아주 다른 곳에 닿는다. 그리고 다시금 어둡거나 혹은 밝고, 길거나 혹은 짧은 육체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표현된 밝음․어두움․길․거울․번갯불 등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생을 마치고 다음 생을 받기 위하여 생전에 자기 자신이 지은 業(Karma), 즉 카르마의 환각을 체험하며 49일간의 중음계를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49일간의 하루하루는 자기자신의 의식구조 속에 고여 있던 이 세상에서의 업이 가시적 환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살아서 이웃에게 베풀고 착하게 산 사람은 역시 죽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악하게 산 사람은 그 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자기심판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자의 서?에 있어서는 궁극적인 목적은 중음계를 여행하는 사자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모두 환각임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더불어 그 어느 환각에도 휩쓸리지 않는 생명의 비밀을 깨달아서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에서는 인간의 초심리 현상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나온 보고서를 보면 ?사자의 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이 점이 서구인들을 경탄케 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풍요속에서 살면서도 빈곤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연속되는 환각으로 하여 슬픔과 기쁨의 소용돌이에서 너는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감정에도 물들게 하지 말자.
네가 보다 높은 세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그 세계의〈비전〉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네가 이 세상에 남기고 온 재물들과 소지품들이 타인의 손에 넘어감을 보고 너는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너를 어둠과 괴로움의 세계로 끌고 갈 뿐이다. 설령 너에게 속계의 재물을 준다해도 너는 가질 수 없다.
집착을 버려라….
Ⅵ. 불교의 뇌사관
1. 뇌사란 무엇인가
1) 뇌사의 개념
과학기술과 서양현대의학의 급속한 발전에 의해 인공호흡기가 발명되었다. 인공호흡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간의 죽음은 심장 박동이 정지하고부터 뇌의 기능이 정지하기까지의 시간차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의사의 사망확인은 가족에게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공호흡기라는 기계가 개입함으로써 인간의 생명기능 정지에 대한 시간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죽음이란 3가지 징후, 즉 ‘심장박동의 정지․자발적인 호흡정지․동공의 고정화’를 죽음의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이 3가지의 기준은 시간의 차이가 없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인공호흡기라는 것이 인간의 죽음에 인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뇌사’ 는 새로운 문제점을 초래하였다.
뇌사라는 것은 뇌의 기능 작용이 정지하고, 그리고 호흡의 정지가 일어나지만, 인공호흡기에 의해 인공적으로 호흡이 유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의 박동, 폐호흡을 자신이 유지할 수 없지만 기계로써 유지되는 상태’이다. 종래의 인간에 대한 죽음의 징후는 동공의 고정화, 즉 뇌간기능의 정지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죽음의 단계였지만, 뇌사에서는 ‘뇌사의 기능정지, 즉 동공의 고정화’가 먼저 생기고, 심장의 맥박, 자발적인 호흡은 기계로서 유지되는 것이다. 기계에 의해 심장박동이나 호흡이 유지된다고 하지만, 호흡과 심장박동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족들의 경우에는 좀처럼 죽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특히 뇌사는 현대 의학적인 관점으로는 죽음의 영역에 속한다고 정의할 수 있지만, 인공호흡기를 멈추게 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가 개입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에 인위적으로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심폐사(심장사)’와 ‘뇌사’라는 두 가지의 죽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뇌사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그 세 가지 유형이란 다음과 같다.
① 대뇌․소뇌․척수의 모든 부분이 본래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상태의 기능정지로, 이른바 모든 중추신경의 기능정지이다.
② 전뇌사, 즉 대뇌․소뇌․뇌간이 기능 정지한 상태.
③ 뇌간사, 즉 뇌간(중뇌․연수․뇌교)의 기능정지 상태
미국 대통령위원회(1981), 일본의 의사회생명윤리간담회(1981)․후생성 연구반(1985)에서는 뇌사의 정의를 ‘뇌간을 포함한 전뇌기능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올 수 없는 기능정지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영국왕립의학회연합총회(영국규약, 1979)와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뇌간의 영구적인 죽음’을 뇌사로 규정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전자의 입장이 널리 지지를 받고 있다. 영국의 뇌사 규정인 ‘뇌간사’를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뇌간은 생명유지에 불가결한 호흡, 체온을 유지시키는 중추가 있고, 의식부분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 뇌간에 장애가 일어나면 의식은 혼수상태가 되고 호흡이나 체온 조절 등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기능이 정지한다. 따라서 뇌간은 죽음으로 다가가며, 결국 전뇌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뇌간사’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뇌간을 포함한 전뇌(대뇌․소뇌․뇌간)의 죽음’을 뇌사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뇌사의 원인으로서는 보통 자동차 사고에 의한 뇌출혈 등의 뇌가 손상되는 경우와 일산화탄소 중독, 약물중독에 의한 원인이 가장 비율이 높다고 한다.
2) 뇌사와 식물인간상태의 차이점
식물상태란 대뇌의 중요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거나, 또는 거의 기능상실에 가까운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자발적인 호흡 기능을 유지시키거나, 심장박동, 갖가지의 반사작용 등의 작용을 담당하는 뇌간의 기능은 살아있으므로 뇌간사, 전뇌사, 식물상태는 구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인 호흡기능, 순환계의 조절은 정상, 또는 정상에 가까운 상태이다. 그러나 뇌간사, 또는 전뇌사의 상태는 이와 같은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식물상태에서는 자발적으로 미세한 호흡이 가능하므로,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지 않고 영양분만 공급하면 살아갈 수 있다. 의식상태는 혼수상태이지만, 호흡기능이 남아있다. 따라서 뇌사와 식물상태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3) 뇌사의 판정
현재 뇌사에 대한 판단기준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것은 없다. 그리고 뇌사 판별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예외 조항도 존재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규정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심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혼수상태
② 뇌간의 기능인 자발호흡이 완전히 정지한 상태
③ 동공이 고정된 상태
④ 뇌간의 모든 기능이 상실된 상태
⑤ 뇌파가 평단한 상태
위의 조항 중에서 뇌간사의 입장을 취하는 영국만(1976) 5번의 조항을 불필요하다고 제외시키고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위의 5가지 규정을 채용하고 있다.
4) 불교의 뇌사관
결론적으로 여러 불교의 죽음관을 검토해본 결과 정확하게 판결된 뇌사상태는 죽음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런 뜻에서 불교의 죽음관은 뇌사를 죽음으로 봄으로 말미암아 장기이식의 길을 열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뇌사를 인정하는 데도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뇌가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 존재는 이생을 위해서도 다음 생을 위해서도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인위적으로 호흡을 시키면서 심장의 박동을 작동시킨다 하더라 해도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육체’와 ‘우리’는 이제 더이상 관계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뇌가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들의 식을 발생시키는 기관의 기능은 마비되어 버리고, 식이 발생할 수 없게 되면 행, 즉 의지작용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의지작용이 발생되지 않으면 업은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업이 만들어지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전의 표현대로 ‘무덤에 버려진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다. 의지작용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는 이미 만들어 놓은 자신의 업에도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지만, 미래의 생존을 위한 여하한 업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장기가 누구에게 주어져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있었을 때 자의에 의해서 사후에 자신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겠다는 마음을 내었을 경우여야만이 선업이 만들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뇌사가 된 상태의 우리의 장기를 누가 잘라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음 생의 우리의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Ⅶ. 불교의 죽음관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 불교가 수입된 것은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였을 때처럼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충격의 양상은 무엇보다도 불교의 그 복잡한 세계관은 고대 한국인의 사고를 뒤흔들었고, 한층 더 심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 특유의 현세 중심의 세계관이 三世에 걸치는 무한정한 세계관으로 바뀌었고 그 삼세를 관통하고 있는 업보설(karma theory)에 대한 이해, 유식학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철저한 분석, 대승보살이 말하는 자비와 구원의 개념 등은 동아시아의 종교에서는 거의 구경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불교는 이미 중국에서 한 번 漢文化圈의 틀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중국 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주로 엘리트적인 가르침에 끼친 불교의 영향이지만 민중 차원에도 불교는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것은 불교의 죽음관을 통하여 극락(천당)과 지옥의 개념을 소개한 것이다. 불교 유입 이전의 동아시아 민중들은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해 대단히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샤머니즘이나 유교에서 저승관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던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극락만 해도 서방정토나 도솔천 등 적어도 두 개 이상을 밝히고 있으며, 지옥의 경우에는 매우 세분화되어 생전에 지은 업보에 따라 어떤 지옥에 처하게 되는지를 아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독사가 우글거리는 지옥, 칼만 무성한 지옥, 춥기만 하거나 배고프기만 한 지옥 등 너무도 그 표현이 적나라하다. 우리가 가끔 하는 욕 가운데 “저런 無間 지옥에 빠질 놈 같으니라고…”하는 것이 있는데, 이 무간 지옥이 바로 불교의 지옥 가운데 가장 지독한 지옥이다. 이러한 불교의 지옥관은 도교와 접목되면서 한국 무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아니 무당들의 지옥관은 불교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조상들은 좋은 일을 하면 극락 가서 편안하게 살고, 나쁜 짓을 하면 해당되는 지옥에 빠져 그 과보를 다 받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업보에 관한 생각은 전통 문학작품에도 많이 반영되었다.
어떻든 우리 조상들은, 또 현재의 우리들은 불교 덕에 사상의 폭이 확장되고 깊어지고 정교하게 되었으며,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되었다. 또 일상 생황 속에서는 삼세인과설 혹은 윤회설을 통해, 현실에서 겪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수많은 고통들을 설명해 내고 위로를 받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려고 노력했다. 종교의 기능에는 틀림없이 사람들에게 의지처를 제공하고 위안감을 주는 것도 중요한 것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불교는 이러한 기능을 해주었다. 유달리 종교적 기능이 약한 유교나 너무 개별화되어 있고 조직-종교 기관의 조직 혹은 사제 계급의 형성 등-이 제대로 안 된 샤머니즘보다는 모든 면에서 훌륭한 체제를 갖춘 불교에서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의 종교적 위안을 찾았을 것이다.
게다가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다. 불교가 아니었다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에까지 향하는 깊은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서 찾았을까? 지금까지 있어 왔던 인류 가운데 가장 자애로운 분이었을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절을 찾을 때마다, 또 중생의 소원은 모두 다 들어주겠다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한 여러 보살들을 절에서 대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은 한없는 편안함과 법열감을 느꼈을 것이다. 유교가 엄격하고 규범을 존중하는 아버지 같은 가르침이었다면, 불교는 언제든지 달려가도 받아줄 ‘엄마의 바다’같은 종교였다.
Ⅷ. 맺는 말
생명윤리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필자는 위에서 불교가 죽음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고 불교에서 보는 뇌사의 문제를 검토해보았다. 그리고 불교의 죽음관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불교도 뇌사의 문제를 죽음으로 인정하여 장기이식 등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새로운 노력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불교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귀결되고, 그 해결도 마음의 자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죽음의 문제가 마음의 문제라면 궁극적으로 불교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도달해야 한다.
죽어서 산다는 것은 대개의 종교들이 설해 온다. 불교는 항상 허무주의에 대항하여 왔다.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불교 전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죽음의 문제도 이해되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죽음도 곧 삶이며, 열반’이라는 인식의 대전환을 가질 때, 곧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주제어 -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문제, 불교의 죽음관,
불교의 육도 윤회설, 티베트 불교의 죽음관,
불교의 죽음관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
▶ 참고문헌
토인비, ?죽음, 그리고 삶?, 범양사, 1980.
한국종교학회편, ?죽음이란 무엇인가??, 창, 1992.
불교신문사편, ?불교에서 본 인생과 세계?, 홍법원, 1988.
칼루피히니, ?불교철학?, 천지, 1992.
히로사치야, ?저승관광?, 금하출판, 1992.
백봉호, ?티베트 사자의 서?, 경서원, 1984.
류시하,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5.
Abstract
The Development Of the Viewpoint on Death in Buddhism
and It's Effect on Korean Culture in Bioethical Perspective
Kwak, Man-youn
(Prof., Dong-A Univ.)
Today, as a result of medical technology, views on death have changed. Conventionally when the breathing and the beating of ones heart stop, it was considered as dead. once such essential functions stop, immediate breakdowns in all other organic systems follow. This meant when one came close to death, it was appeared as a complete death of that individuals entire body to the observers. Within the current few decades, this kind of common view has been challenged by the development of machines to artificially maintain body organs. Use of such machines put an end to the breakdown of both breathing and heart beating at the same time. This kind of situation is commonly found in the cases of almost every patients receiving concentrated medical treatment. These patients are getting artificial pressure from various mechanical devices. A complete breakdown of the entire body organs is the basis of the conventional view on death. But if it doesnt involve all the organs of the body, the question is that functioning of which organ plays the main role in deciding the time of death.
In problems regarding brain death, Buddhist beliefs also show accordance with the brain death and this can be illuminated through various concepts in Buddhist beliefs. For instance, human philosophy in Buddhism related to the concept of selflessness no doubt supports the idea of organ transplant. Confucian idea of human body have dominated the root of Koreans minds and values for a long time and many positive elements can be found in their own way however they, can also be seen as hazards particularly regarding brain death and problems associated with organ transplant. To overcome various existing elements of hazards at a principle level, an introduction of new values were suggested. The idea of mercy in the Buddhists ethic was presented for that.
The fundamental mind of Buddhism lies in the thought of removing pain. Illness is perhaps the most painful of all. Therefore, in this paper the organ transplant will be seen as a positive solution to remove illnesses at a fundamental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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