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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⑴(최미진/부산대)

1. 서론
2. 신문매체의 재편과 명망주의 작가의 복귀
3. 새로운 ‘국가 만들기’와 공공성의 강화
4. 역사의 소환과 민중적 열망의 공론화
5. 결론


국문요약
이 글은 공론장으로서 신문매체의 지형 변화에 주목하여 해방기 신문
소설의 위상을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해방 직후 신문매체는 현실
정치의 도구로 전면에 나서며 정론성을 강하게 드러냈으나, 미군정기를
거쳐 단정수립기에 급격하게 우익지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신문
소설은 신생 신문매체를 중심으로 명망주의 작가에 의해 창작되고 향유
되었다. 이 시기 신문소설은 혼란한 사회현실과 가파른 매체지형의 변
전 속에서 새로운 국가건설을 둘러싼 열망을 서로 다른 이념과 형식으
로 담아내고 있었다. 당대 사회현실을 형상화한 신문소설들은 시의성과
계몽성으로 무장한 이념서사가 공론장을 견인하고 있었고, 연애서사는
약화되거나 파행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국어와 국사교
육에 대한 높은 관심과 운신의 폭이 넓었던 창작 환경 속에서 역사소설
이 이념서사보다 양적으로 우세하였으며, 단정수립 이전까지 신생 신문
매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 역사소설은 시의성 있는 제재

를 대상으로 민족 영웅을 소환함으로써 공론장에서 배제된 민중의 열망
을 공론화하며 위무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방기 신문소설은 새로운 국
가 건설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서로 다른 형식과 이념을 통해 공론화한
공공성 강화가 특징적이라 하겠다.


1. 서론
신문매체는 사회적 지배력과 특정 능력을 지닌 조직화된 의사소통의
통로를 둘러싼 제도화된 체계 가운데 하나로,1) 공론장을 제공하고 여론
을 형성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신문매체를 사적 영
역과 공적 영역을 중개하는 공론장의 탁월한 제도로 평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재봉건화된 부르주아 공론장이 “상반되는 경향들이 서로
충돌하며 대중매체에 의해 지배되는 격투장으로서, 정치체계라는 하나
의 극과 생활세계의 사적 부분과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행동체계라는 또
다른 극을 매개하는 중간구조를 형성했다.”2)고 지적한 바 있다. 자본주
의 이행과정에서 국가 개입과 신문매체의 상업화가 공론장을 대중매체
와 소비문화에 의해 공동화된 표면상의 영역으로 변화시켰으며, 이러한
변화는 곧 대중매체의 역할 변화와 주체 구성의 분화를 가져왔던 것이
다. 이러한 맥락에서 손석춘은 신문매체로 대표되는 한국의 공론장이
아래로부터의 공론화 요구와 갈등구조를 이루어왔다고 주장한다. 근대


1) 베르너 파울슈티히, 황대현 옮김, 근대초기 매체의 역사, 지식의풍경, 2007, 12쪽.
2) 위르겐 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 나남, 2009, 25~55쪽.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9


계몽기 이후 이러한 갈등구조는 정치상황의 변화와 연동된 법적 제재를
통해 지속되었으며, 민중의 요구에 대한 내적 배제와 일본이나 미국에
의한 외적 왜곡과 맥락을 같이 해왔다는 것이다.3) 그만큼 한국의 신문
매체는 형식적으로는 공론장을 표방했지만 국가주의와 식민성에 과도
하게 노출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매체 환경은 신문매체의 생존 전
략과 결합되어 상업주의에 함몰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언론의 사사화
경향을 강하게 유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특성들이 어느 시
대에나 균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두루 알다시피 신문소설은 신문매체의 논리와 문학이 결합된 근대적
문학양식이다. 상이한 두 논리가 결합하는 까닭에 신문소설은 특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신문사가 주관하는 현상문예공모나 신춘문예에서
“신문소설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라는 일련의 규정들이 단적인 예
다. 특히 장편연재소설은 연재 가능한 형식과 내용에 대한 암묵적인 합
의를 내장하고 있다. 이는 신문소설이 단절기법의 형식이나 시의적 내
용을 재현해야 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문학과 신문매체의 관계
는 균질적이지 않으며, 여기에는 다양한 요구들과의 복합적인 갈등이
존재한다. 신문소설의 창작과 향유에는 작가와 독자대중의 기대지평뿐
만 아니라 국가나 신문사 등의 외적 요구가 서로 맞물려 경합하거나 조
율되는 과정이 얽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문소설에 개입되는 ‘암묵적
합의’에 대한 다층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다. 특히 신문매체의 전략이 신
문소설의 향방을 결정짓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신문매체의 지형 변화에 주목하여 해방기 신문소설의
위상을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4) 해방기는 억압되었던 공론장이 활성


3) 손석춘, 한국 공론장의 구조변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51쪽과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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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되면서 담론 생산과 유통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조직 구성과 노선에
따른 이념 갈등이 격심했으며, 민중과 지배세력의 요구가 상충되는 갈
등구조가 표면화되었다. 이에 따라 봇물처럼 분출되는 다양한 요구를
수렴할 공론장으로서 매체 발간이 두드러졌으며, 신속성과 기동성을 갖
춘 신문매체야말로 공론장을 대표하는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문학인들
또한 이러한 매체 발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문화전선을 구축해 나
가고 있었다. 그런데 홍수에 비견될 만큼 매체가 양산되는 가운데 미군
정의 언론정책에 따라 신문매체의 지형 또한 새롭게 재편되었다. 1946
년 이후 미군정은 남한의 신식민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과 반공규율국
가 수립을 도모하며 매체 통제를 강화하였는데, 이는 한국 신문매체의
이념적 성격과 기본구도, 신문체제의 틀을 일정한 방향으로 정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5) 이러한 성격은 단정 수립 이후 한층 강화되
어 갔다. 신문소설 또한 매체 지형의 재편과 맞물려 새로운 변화를 모색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해방기 신문소설의 위상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
펴보고자 한다.6) 하나는 신문매체의 지형 변화가 신문소설의 존재방식
4) 이 글은 중앙지에 100회 이상 연재된 장편연재소설을 대상으로 삼았다. 연구대상은
김남천의 1945년 8ㆍ15(자유신문, 1945.10.14~1946.5.28), 염상섭의 효풍
(자유신문, 1948.1.1~11.3), 김동리의 해방(동아일보, 1949.9.1~1950.2.16), 김
말봉의 카인(佳人)의 시장(부인신보, 1947.7.1~1948.5.8), 박계주의 진리의 밤
(경향신문, 1948.10.1~1949.4.23), 박종화의 민족(중앙일보, 1945.11.5~ ), 청
춘승리(자유신문, 1947.6~12), 홍경래(동아일보, 1948.10~1949.8), 박태원의
임진왜란(서울신문, 1949.1.4~12.14), 군상(조선일보, 1949.6.15~ 1950.2.2),
윤백남의 회천기(자유신문, 1949.4~9)이다.
5) 김해식, 한국 언론의 사회학, 나남, 1994, 44~45쪽.
6) 이 글은 2012년 상반기 대중서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기획발표로 마련된 논문이
다. 발표 당시 1950년대까지 폭넓게 다루었으나, 이 글에서는 연구범위를 해방기에
한정하여 신문소설의 위상을 명확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11
에 어떠한 변수로 작용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기 신문매체는 현실
적인 권력으로 간주되면서 국가권력과 갈등하거나 연합하는 양상을 띤
다. 정론지로서의 면면은 해방 이후부터 지속되었지만, 신문매체가 국
가권력의 법적 통제를 받았으면서도 이들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유지되
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정책은 신문매체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국가권력의 통제권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만든다. 때문에 신문매체는 국가적 통제에 대한 대응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내부에서 독자적 전략을 마련해야 했다. 신문소설의 존재방식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이러한 전략들이 시기별로 어떠한 차이를 지니는지
개괄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문매체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인식에 비추어 신문소
설의 성격이 어떻게 정향되어 갔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공론장 개념의
확산이 신문매체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특권화 되었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이는 사회구성원들 전체를 계도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난다.
한국사회에서 신문매체의 사회적 역할은 과학적 사고, 정치적 해방, 자
유, 진보, 계몽 등 근대성의 선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나아가
언론의 지사적 전통과 결합하여 공론장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이러한 공공성 못지않게 중
요한 것이 신문매체의 대중성이다. 신문소설이 신문매체의 오락적 기능
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중에게 읽을
거리를 제공하고 휴식과 위안을 주는 것은 신문소설의 주요한 기능 가
운데 하나다. 이러한 성격은 신문매체의 공공성과도 결부되어 있기 때
문에 매체 지형의 변화에 따른 신문소설의 성격을 고찰함으로써 신문소
설의 위상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12 대중서사연구 제27호
2. 신문매체의 재편과 명망주의 작가의 복귀
해방기는 이념과 정치의 시대이자 매체 투쟁의 시대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식민지 잔재 청산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요구로 점철
되어 있었고, 그것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매체에 주목하였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는 단연 연설이었다.7) 하지만 시공간의 제
약과 대상의 한정이 걸림돌이었다. 라디오 또한 열악한 수신기 보급 탓
에 대중과의 소통이 원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중과 폭넓게 소통할 수
있는 신문매체가 현실적인 권력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측면
에서 신문매체의 폭증은 예견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신문매체
는 서로 다른 지향 속에서 발행주체의 이념적ㆍ정치적 목적이 두드러진
정론지의 성격을 뚜렷이 했다.
그런데 신문매체의 발행종수에 견주어 신문소설은 양적으로 얼마 되
지 않는다. 해방 후 기념저작물들이 속속 출간되고 개인 창작집의 발간
과 재발간이 봇물을 이루었던 출판계나 상이한 이념 지향 속에서 민족문
학의 건설을 내세우며 발행을 서둘렀던 잡지계와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특히 해방기 신문소설은 신문사의 부침과 인지도 등 신문매체의 변전
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해방 후 신문매체는 공산주의 계열, 보수
우익 계열, 진보주의 계열로 크게 삼분되어 있었으며, 언론계를 주도한
것은 통일전선운동을 지원했던 진보주의 계열의 신문이었다.8) 이때 신
문소설이 첫 선을 보인 것도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진보주의
7) 강준만, 한국대중매체사, 인물과사상사, 2007, 329~330쪽. 연설의 영향력은 당시
집회문화를 통해 확인 가능한데, 이러한 맥락에서 천정환은 해방 초기 거리의 정치
와 표상의 의미를 논의한 바 있다. 천정환, 「해방기 거리의 정치와 표상의 생산」,
상허학보제26집, 상허학회, 2009, 55~101쪽.
8) 김민환, 한국언론사, 나남, 2002, 323~340쪽.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13
계열 신문이었다. 김남천의 1945년 8ㆍ15가 자유신문에, 박종화의
민족이 중앙신문에 각각 연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도구로 전면에 나섰던 신문매체가 지배 권력의 표
적이 되면서 신문소설은 검열과 연재 중단 등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
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언론의 자유를 대외적으로 허용했으나, 1945년
10월 30일 ‘신문 기타 출판물의 등록제 규정’을 통해 좌익 언론의 실태
파악에 나서는 한편 귀속재산 처리를 통해 신문사의 경영권을 압박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공산주의와 진보주의 계열의 신문 통제는
1946년 5월 29일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을 공포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법령의 골자는 신문 등 정기간행물의 발행을 허가제
로 변경하고 주무관청에 폐간ㆍ정간 등의 권한을 부여하여 행정권에 의
한 ‘사전억제체제’를 도입한 것이다.9) 1945년 8ㆍ15의 연재 중단은 이
법령이 공포된 날부터이며, 해방일보에 연재 중이던 이태준의 불사
조도 얼마 후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무허가 신문의 발행을 금지
한 이 조치는 남한사회에 좌익과 진보언론을 배제하고 우익언론을 고착
화시키는 외양을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친미주의와 친자본주의를
앞세우려는 미군정의 정책적 기조를 내장하고 있었다. 이 법령의 공포
이후 좌익신문이 줄지어 허가 취소되었던 반면 우익신문은 해방 직후의
위축된 상황을 벗어나게 되었다. 군정당국의 지원으로 인쇄기와 인쇄시
설 문제를 해결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친미 계열인 안재홍의 한
성일보와 극우 계열인 이종영의 대동신문, 그리고 가톨릭재단의 경
향신문 등 우익신문이 남한 언론계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상 노선의 전환을 꾀하는 신문들도 속출했다.
일례로 해방기 신문소설을 가장 많이 게재했던 자유신문은 1946년 말
9) 김해식, 앞의 책, 49쪽.
14 대중서사연구 제27호
신익희를 사장으로 내세워 우익신문으로 거듭난다. 물론 법령 공포 이
후에도 문화일보, 우리신문, 노력인민 등 좌익 신문이 창간되었
고, 우익신문 내부에서도 공산주의와 진보 세력이 일소된 것은 아니었
다. 하지만 ‘군정법령 제88호’ 공포 이후에도 신문소설은 우익 친미 계열
신문에서 지속적으로 연재되었다.10)
단정수립 이후 신문정책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내세워 언론의 사상통
제와 함께 이승만 정권에 비우호적이었던 신문에 대한 견제 성격을 강
하게 노정하고 있었다. 1948년 8월 9일 이승만 정권은 ‘광무신문지법’의
유효성을 밝힌 이래 9월 22일 언론단속지침 7개항을 발표하였으며, 그
해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공포하면서 강압적 국면을 조성하였다. 일련
의 조치들은 잠복 발행되었던 공산주의 계열 신문을 폐간시키는 데 그
치지 않고, 관련 기사와 작품도 문제 삼았다. 일례로 태양신문에 연재
되었던 이광수의 서울은 공산주의 사상을 선동한다 하여 공보처로부
터 연재 중단 경고를 받았다. 단정수립 후 반이승만 노선으로 돌아선 동
아일보를 비롯한 우익신문들의 경우에도 정부 비판적 기사를 게재하여
정간과 휴간을 거듭했고, 신문사 간부와 기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서
울신문도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독립노선을 견지하다 1949년 정
간과 휴간 조치 끝에 여당지로 변전하였다. 그만큼 정부와 언론 사이에
긴장 관계가 조성되어 갔고, 신문소설도 이러한 강압적인 국면에서 자
유로울 수 없었다. 이처럼 해방기 신문매체는 정치상황의 격변과 긴밀
10) 출판계의 경우, 월북한 이태준의 소련기행이 1947년 백양사에서 출간되어 인기를
끌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고 사상대립이 격화되었던 그해 11월 13일 압수 조
치가 이루어졌으나 책방과 지인들을 통해 팔려나갔다. 공식적인 판금 조치는 단정
수립 후인 1948년 12월 10일에야 이루어졌다. 그만큼 출판계는 신문매체와 달리 지
배 권력의 통제정책에서 다소 자유로운 편이었다. 이중연, 책, 사슬에서 풀리다,
혜안, 2005, 87~110쪽과 273~300쪽.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15
하게 연동되면서 통제 대상이 되었으며, 점차 새로운 지형 속에 놓이게
되었다. 신문소설 또한 양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했을 뿐 아니라 연재 중
단 등 불안정한 매체 환경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문소설의 창작주체로 나선 것은 명망주의 작가들
이었다. 김남천, 박종화, 염상섭, 박태원, 박계주 등 문학적 역량뿐 아니
라 독자대중에게 인지도 높은 작가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긴 호흡의 연재를 소화해야 하는 신문소설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다른 매체에 비해 여건 마련이 수월치 않았다. 더욱이 이러한 작가의 등
장에는 큰 걸림돌이 존재했다. 하나는 우익지 위주로 재편된 매체 상황
에서 좌익 혹은 진보주의 사상에 편향된 작가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의 친일 이력이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작
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대중독자들과 소통해야 하는 신문소설의
특성상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해방 직후 식민지 잔재 청산에 대한 사
회적 요구가 팽배했고, 정당성과 신뢰를 확보해야 하는 신문소설에서
작가의 친일 이력은 소통의 가능성을 희박하게 하는 것이었다. 친일파
배척 분위기가 강했던 해방 직후 경성출판노동조합의 ‘민족반역자의 출
판물 거부’11) 등은 표면화된 일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기 신문
매체가 좌우익을 불문하고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군정의
정책과 제반 조치들에 의해 구획되었는데도, 친일문인들은 신문매체 내
부에서 암묵적인 배제의 대상이었다. 문인-언론인들12) 또한 일제강점
말기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 재직했거나 문필 활동을 했다는 점에
서 이러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상
11) 신조선보, 1945.10.23.
12) 이 글에서는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문필활동을 벌였던 작가들을 ‘문인-언론인’으로 통
칭한다. 해방기 문인-언론인의 현황은 정진석의 인물한국언론사(나남출판, 1995),
213~239쪽을 참조할 것.
16 대중서사연구 제27호
과 친일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작가, 나아가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작
가가 드물었던 셈이다. 대부분 작가들은 친일 이력에 대한 부채의식으
로 관망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13)
그런데도 명망주의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견인하였던 것은 무엇보다
신문매체가 직면한 새로운 매체환경에 이들이 효과적으로 부응할 수 있
었기 때문이다. 해방기 신문매체 연재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새롭게 창
간된 신문매체, 특히 자유신문이었다. 자유신문이 신문소설에 비중
을 두었던 것은 한편으로 매체적 지향과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창간사
에 따르면, 자유신문은 “조선민족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민중여론의
공기(公器)가 되기”를 자처하며, 그 방편으로 “대중의 문화적 신생활 건
설”을 강조했다.14)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대중의 역량이 문화적 소양
의 향상에 있다는 점에서 신문소설에 주목한 것이다. 그 결과 매체의 부
침에도 불구하고15) 김남천의 1945년 8ㆍ15(1945~ 1946), 박종화의 청
춘승리(1947), 염상섭의 효풍(1948), 윤백남의 회천기(1949) 등 매
년 한 편씩 신문소설을 연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신문소설은 열악한
매체 상황의 타개책이기도 했다. 창간 초기부터 자유신문은 편집진의
특성상 자본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매일신보 출신의 동인지로서
독립적인 발언권을 가지는 수평적 구조의 위원제를 채택하였지만, 정치
13) 그런데 반공주의가 친일 이력에 면죄부로 작용했던 단정 수립 이후에도 친일부역자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당시 상황이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점진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1949년 말 이광수가 신문소설가로 영입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4) 「창간사」, 자유신문, 1945.10.5, 1면.
15) 자유신문은 기대했던 좌우합작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찬탁 입장 표명으로 폐간 위
기에 내몰렸다. 이에 1946년 10월 신익희를 사장으로 영입하여 수직적인 국부제로
전환하는가 하면, 1947년 4월 주식회사로 발기하여 일신을 꾀한다. 일련의 신문 정
상화 과정은 당시 통제정책의 대응책으로서 우익지로의 변전을 보여주는 한편 발행
부수에 민감했던 신문사 내부의 열악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17
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확실한 후원자가 없던 상황이었다. 미군정의 보증
으로 대출받은 50만원과 동인들의 각출로 창간되었지만,16) 발행부수에
따른 구독료가 주된 수입원이었던 까닭에 급등하는 인쇄용지 등 자본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신문소설은 안정
적인 구독료를 확보하는 방편이 될 수 있었다. 창간호에 신문소설의 연
재광고를 실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측면을 고려했음을 방증한다. 매일신
보 출신 기자들이 주축이 된 신문사였고 보면, 신문소설이 매체의 대중
적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적인 방편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체적 지향과 상업적 효과를 동시에 수렴할 수 있
는 연재소설가가 필요했으며, 그 결과 명망주의 작가들의 영입이 줄지
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친
일문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신문 편집의 영향력에서 볼 때, 그들의 영입
은 초기에는 좌익 성향이 강했던 주필 정진석이, 매체의 변전 이후에는
부사장 정인익과 편집국장 이정순이, 그리고 단정수립 이후에는 정계로
진출한 그들을 대신해 편집국장인 문인-언론인 마태영이 각각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례로 1945년 8ㆍ15를 보더라도,
자유신문뿐 아니라 조선신문기자회, 조선문학가동맹 등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했던 정진석이 같은 단체에 몸담았던 김남천을 영입했
을 가능성이 크다.17) 이러한 명망주의 작가의 영입이 자유신문을 비
롯한 신생 신문매체의 활로를 개척하는 데 조력했음은 물론이다. 신문
매체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명망주의 작가들 또한 신문소설 창작에
대한 내적 욕망을 지니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새로운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테제에 대한 작가적 대응이 신문소설의 창작으로 이어졌다
16) 오승진, 「해방직후 좌우 언론인의 연대와 분열」, 서강대 석사논문, 2007, 6쪽.
17) 오승진, 위의 글, 7~9쪽.
18 대중서사연구 제27호
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면면을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3. 새로운 ‘국가 만들기’ 와 공공성의 강화
해방기 신문소설을 범박하게 분류하면 당대 사회현실을 형상화한 소
설과 과거를 소환한 역사소설로 유형화할 수 있다. 먼저 전자의 계열에
해당하는 소설로는 김남천의 1945년 8ㆍ15, 김말봉의 카인의 시장,
염상섭의 효풍, 박계주의 진리의 밤, 김동리의 해방 등이 있다.
이들 소설들은 당대 사회에 팽배했던 해방의 감격과 기대, 갈등과 대립
국면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발표매체와 관련된 특징
적 면모에 주목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들은 해방기의 혼란 정국에서 사뭇 다른 작가의
신념과 태도를 드러내는 이념서사가 부각되어 있으며, 그것이 신문매체
의 성격과 매체상황의 추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해방 이
후 새로운 ‘국가 만들기’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이념 지향이 신문매체의 변
전 과정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김남천의 1945년 8ㆍ15(1945~1946)는 해방 직후 언론의 자유가 허
용되었던 시기 진보주의 계열의 자유신문에 발표된 미완성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해방의 감격은 삐라와 격문이 범람하고, “이틀새 정치단체
가 43개”나 생겨나며, 공공장소와 거리에서 개인적 요구가 거리낌 없이
분출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은 이념과 체제 선택의 자유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에 가능했던 혼란이자 희망의 표상이
다.18)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 속에서 새로운 ‘국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19
가 만들기’에 대한 민족적 열망을 표상하고 실천하는 양상을 띤다. 김지
원과 박무경을 중심으로 한 좌익 노동운동의 실천이 한 축이라면, 친일
자본가 이신국과 최진성을 둘러싼 우익 정치단체의 활동이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시각은 후자의 비판을 통해 전자의 “역
사적 대의를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는 데 집중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단계 속에서 지식인이 자기비판과 변혁을 통해
노동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소설은 진보적 민
족문학건설과 사상계몽의 효과적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김말봉의 카인의 시장(1947~1948)은 이러한 소설의 정치성이 다르
게 맥락화되어 있다. 이 소설은 해방기 공창폐지운동에 대한 작가의 신
념과 계몽 의지를 연애서사와 결합시켜 보여준다. 1946년 8월 10일 결성
된 폐업공창구제연맹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당시 공창폐지운동은 이데올
로기 갈등을 뛰어넘어 여성운동가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였다.19) 이 소설
은 창녀 오채옥의 수난사를 중심으로 당시 공창폐지운동의 필요성을 사
실적으로 재현하고, 폐창구제연맹 위원장 정민혜를 통해 그 목적과 의
의를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까 공창폐지운동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민
족 보건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산시키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부각
되어 있는 셈이다. 이 소설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기관지 부인신보에
발표되었지만, 공창폐지운동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 속에서 미완으로 남
겨진다.20) 부인신보의 대대적 홍보와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연재였음
18) 김한식, 「김남천의 1945년 8ㆍ15연구」, 현대소설연구제15호, 한국현대소설학회,
2001, 259쪽.
19) 최미진, 「광복기 공창폐지운동과 김말봉 소설의 대중성」, 한국 근대소설의 이면,
소명출판, 2010, 53~55쪽.
20) 박선희, 「김말봉의 佳人의 市場개작과 여성운동」, 우리말글제54집, 우리말글학
회, 2012, 5쪽.
20 대중서사연구 제27호
에도 미완성작이라는 점은 작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당대 여성운동의
정치적 한계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염상섭의 효풍(1948)은 우익지로 거듭난 자유신문에 연재된 소설
로,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던 작가의 냉철한 시각이 돋보인다. 미소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1947년 말에서 1948년 봄에 이르는 시기 박병직과 김
혜란의 애정 갈등을 주축으로 ‘국가 만들기’를 둘러싼 남한 사회의 상황
을 재현하고 있다. ‘스왈로 회담’ 장에서 잘 드러나듯 조선 민족 내부의
요구와 배리되는 미군정에 의한 왜곡이 점증하고, 친일자본가 박종렬처
럼 이에 편승하는 부정적 세력이 부상하는 상황 속에서 ‘삼팔선’으로 대
표되는 남북분단과 전쟁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좌
우합작에 의한 통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대한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박병직이다. 그는 좌파 최화순과의 동반 월북
이 좌절되자 생활과 애정 면에서 우유부단했던 태도를 청산한다. 그리
고 김혜란에게 청혼하며 공부를 통해 그러한 신념을 함께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통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대한 작가의 신념은 독
자대중이 “새 질서를 차저가는” “희망”을 읽어나가기를 바랐던 집필의도
와 맞닿아 있다. 소설 연재 당시 염상섭은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
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명 서명에 동참하였으며, 재직 중이던 신민
일보가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구류되기도 했다.21) 자
유신문에 작가의 이러한 신념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대외적인 우익
지로의 변모와는 달리 다양한 사상적 경향의 편집위원들이 존재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특히 실권을 쥐고 있었던 편집국장 이정순은 여운형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인물로 당시 미군정청 출입기자로도 활동했던 터
21) 김재용, 「8ㆍ15 이후 염상섭의 활동과 「효풍」의 문학사적 의미」, 염상섭선집2: 효풍,
실천문학사, 1998, 347~348쪽.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21
라22) 중도파인 염상섭을 신문소설가로 영입하여 그의 소설을 게재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계주의 진리의 밤(1948~1949)은 새로운 사회건설의 일환으로 창
기갱생사업을 실천하는 작가의 기독교 사회주의 입장이 두드러진 소설
이다. 지운을 둘러싼 임한녀와 설영의 애정갈등보다는 설영을 매개로
한 지운의 자기변모와 사회적 실천과정이 전면화되어 있다. 해방 이후
지운은 자기만족과 안일을 추구해 온 조각가이자 교수이지만, 부패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반공주의 사상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깨진 조각료와 인생역정을 담은 편지를 설영으로부터 받은 후, 그는 자
기반성을 통해 초대 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협동체원리를 실천하고자 마
음먹고 창기갱생사업의 일환으로 ‘마리아의 집’을 운영하게 된다. 김말
봉의 화려한 지옥이 공창폐지운동에 목적을 두었다면, 이 소설은 그
후의 실질적인 창기갱생사업에 초점을 두고 있다.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사상적 기반 아래 실천과정의 갈등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아울러 해방 후 김영주, 조풍연과 함께 고려문화사를 열고 중도잡지 민
성 주간으로 있었던 박계주가 소설에서 강도 높은 반공주의 사상을 피
력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단정수립 이후 반공주의가 강화되
었던 상황과 이미 우익지로 변전한23)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는 점으
22) 오승진, 앞의 글, 9쪽.
23) 경향신문은 미군정으로부터 조선정판사를 인수받아 1946년 10월 6일 창간되었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엄정중립(嚴正中立)’을 표방하였던 경향신문은 창간 후 1년
간은 좌우 이념대립을 지양하고 남북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의 필요성에 역점을
두는 등 중도지적 성격을 띠었다. 신문사의 정상화에 힘입어 창간 1년을 앞두고 단
행된 대규모 인사개편은 내적 충실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1947년 7월 9
일 주필 정지용과 편집국장 염상섭의 퇴사에 이어 정경부장 유흥태와 사회부장 이
태우도 물러났다. 9월 1일 개편된 편집진용은 주필 겸 편집국장 오종식, 편집국차장
우승규, 정경부장 정윤조, 사회부장 이정구, 편집부장 허식, 문화부장 김동리 등이었
다. 경향신문 사사편찬위원회, 경향신문 사십년사, 경향신문사, 1986, 93~98쪽. 그
22 대중서사연구 제27호
로 미루어볼 때, 진리의 밤은 작가의 이념노선을 분명히 피력한 계기
적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24)
김동리의 해방(1949~1950)은 좌우익의 대립과 애정 갈등을 교직시
켜 놓은 작가의 첫 신문소설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소설은 해방
초기 좌익 계열의 청년단체 해체를 요구하다 대한청년단장 우성근이 피
살된 직후부터 시작되고,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좌우익과 우익 내
부의 갈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애정 갈등을 통해 서사를 다각화하고 있
다. 이장우는 우성근의 죽음으로 청년단 책임자가 된 인물로, 해방과 함
께 신생의 기초를 극우적 민주주의 민족국가 건설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하윤철과의 정국논쟁에서 엿볼 수 있듯, 이념선택의 계기가 불분명한
채 우익의 당위를 주장하고 그에 따른 정치질서의 회복을 열망하고 있
다. 이러한 가운데 좌우 대립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잣대가 유
효하게 작동한다. 법보다 정의를 앞세워 폭력성을 정당화하고 이에 배
리되는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우익 청년단 내부의 논리와 실천은
책임자인 이장우의 체포로 일단락되지만, 냉전체제에서 반공주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될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즉 극우적 민주주의 민족
국가 건설이 좌익과 중도파뿐 아니라 우익 내부까지 공론장에서 배제
가능하다는 점에서 반공주의의 폭력적인 우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다. 소설이 연재되던 1949년이라는 시점이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가 종
교화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냉전 논리를 정당화하
러나 당시 인사개편은 신문사 내부의 중도좌파에 대한 견제와 우익 인사의 영입이
두드러졌던, 즉 우익지로의 체제개편 성격을 띤다. 이를 토대로 경향신문은 5ㆍ10
선거 및 단정수립과정을 적극 지지하게 된다. 윤덕영, 「해방 직후 신문자료 현황」,
역사와 현실 제16호, 한국역사연구회, 1995, 358쪽.
24) 박계주가 1949년 우익지 한성일보의 취체역 겸 편집고문을 맡게 된 것은 반공주의
를 피력했던 진리의 밤 연재가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23
려는 작가의 정치성을 기반에 두고 있다 하겠다. 작가의 첫 신문소설이
대표적 중앙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는 점은 해방기 작가의 문단적ㆍ
정치적 입지를 방증하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소설의 정치성과 불편하
게 조합된 대중적 장치는 매체의 권위를 의심하게 한다. 연재 당시 민국
당 기관지로 일신하여 야당지의 입지를 다지던 동아일보가 정치권력
의 견제에 부심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체의 대응방식으로 반공주의
의 강화25)와 이를 표방한 작가의 소설이 맞물리고 있다 하겠다.
다음으로, 이 소설들은 대중적인 연애서사를 차용하지만 대부분 이념
서사의 과도함으로 말미암아 신문소설의 흥미 진작과는 거리를 둔다.
일반적으로 연애서사는 사랑이라는 사적 감정이 구체성을 획득하고 그
것으로 촉발되는 사건들을 통해 전개되는데, 그런 면면이 단편적으로
드러나거나 이념서사에 파묻히는 경우가 많다.
김남천의 1945년 8ㆍ15에서 연애서사는 이념서사와 겹쳐 함몰되거
나 그 정당화의 방편으로 기능하고 있다. 김지원과 박문경의 연애서사
25) 해방에서 친일파의 규정과 처벌 수위에 대한 논의는 당대 상황과 더불어 동아일
보의 매체 기반과 상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했
던 심재영은 해외에 있었다고 친일파가 아니랄 수 없고 친일파로 지목되지 않은 사
람 중에도 악질적인 친일파가 존재할 수 있다며 친일파 범주를 전 민족으로 확대하
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혹독했던 일제의 고문
으로 변절했으며, 변절 후에도 조선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변명한다. 문제는 긍정적 주인공 이장우가 심재영의 논리에 휘말리면서 인간적인
동정의 태도를 보이고, 자발적으로 아부 협력한 친일파를 처벌 대상으로 삼았던 그
의 소신도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가슴이 뻐근해”진다는 이장우의 반응은 해방기
친일파가 애국자로 거듭나는 역설적인 상황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에 다름 아니다.
연재 당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반민특위의 해체로 무력화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
려한다면,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친일파에게 합리적인 존립근거를 부여하는 기현상
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반공주의가 심급으로 자리매김한 당대 사회에서 친일
파 처단이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경영진이
친일 지주와 자본가계급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반공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에
게 면죄부를 허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4 대중서사연구 제27호
에서 사적 감정은 과거의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며, 해방 후에는 김지원
을 연인이 아닌 지도자로 부상시켜 자기비판과 사상계몽의 과정을 통해
공적 영역으로 변전하고 있다. 부수적인 연애서사인 박무경과 김광호의
처 이경희에게는 사적 감정이 구체화되나 다각화되지 못한다. ‘불륜’이
환기하는 타락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잣대와 더불어 자본주의에 대
한 비판이라는 의미망에 갇히고 말기 때문이다.
박계주의 진리의 밤은 지운을 둘러싼 여대생 임한녀와 창녀 설영의
애정갈등을 보여주는 연애서사 하나뿐인데, 개별적 국면만 부각되어 있
다는 점이 특징이자 한계다. 그들의 연애서사는 개별적으로 본다면 사
랑의 감정이 구체적으로 재현되고, 설영의 경우 질투의 감정이 부각되
기도 한다. 그러나 작중인물 간의 관계형성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
는 까닭에 상상적 관계 속에서 이념서사에 의해 조율되는 관념적 성격
을 지닌다.
이에 반해 김동리의 해방에서 연애서사는 이념서사와 어긋나게 맞
물려 서사의 완결성을 저해하고 있다. 주인공 이장우를 둘러싼 연애서
사가 사적 감정을 단편적으로 제시하는 데 머물러 있다면, 부수적 인물
신철수를 중심으로 한 연애서사에서 사적 감정과 성적 욕망, 그리고 정
치적 이해관계는 서사적 계기가 불분명한 채 얽혀 있다. 신철수는 사이
비신문 해방주보의 주필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윤정혜, 박선주, 하미
경에게 차례로 접근하지만, 모두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공통
적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윤정혜가 결혼을 전제로
연애감정을 발전시켜간다면, 부녀동맹원인 박선주는 쾌락의 의무와 권
리로 간주하여 즐기고, 미망인 하미경은 우성근의 살해범인 동생 하기
철의 안전을 담보로 삼고 있는데도 그에게 끝까지 저항한다. 특히 박선
주는 성적 문란자로 간주되어 공산주의에 대한 정치적ㆍ도덕적 비판대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25
상이 된다. 서로 다른 방식의 연애서사는 신문소설의 특성을 감안한 서
사적 장치로 보이지만 서사 간의 연계성과 완결성이 뒤떨어진다.
세 소설들에 비해 염상섭의 효풍과 김말봉의 카인의 시장은 연애
서사와 이념서사가 잘 혼융되어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효풍에서는
박병직의 돌발적인 청혼에 값하는 연애감정이 불분명하고, 카인의 시
장은 연애주체들의 관계형성이 우연성에 기대고 있다는 한계에 노출되
어 있다.
이상에서 보듯 해방 정국을 형상화한 소설들은 매체 지형의 변화 속
에서 새로운 ‘국가 만들기’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이념서사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정치의 시대에 신문소설이 신문매체의 지향과 변전 속에서 문
학의 정치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 소설들은
대중적인 연애서사를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서사와의 부조화 속
에서 서사의 흥미 진작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기 신
문소설의 지형은 공공성의 강화가 두드러진 반면 사적 영역의 내밀성이
약화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역사의 소환과 민중적 열망의 공론화
역사소설은 해방기 사회현실을 형상화한 소설보다 양적으로 우세하
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내재되어 있다. 우선, 해방 직후 국어와
국사교육에 관심이 높았던 현실과 관련이 깊다. 일제강점 말기 강압적
인 황국신민화 정책 속에서 금지되었던 ‘조선적인 것’이 해방과 함께 사
회적 관심이 증폭되면서 분출되었던 것이다. 출판계의 경우 국어와 국
사 관련서적이 발행되기 바쁘게 팔리고 있었고26), 라디오방송도 고정
26 대중서사연구 제27호
프로그램으로 <국어강좌>와 <국사강좌>를 따로 두어 강연을 진행하였
다.27) 이렇듯 점증한 국어와 국사교육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신문
매체에서도 역사소설의 창작을 독려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작가가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부담감에서 비껴나 창
작에 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념과 정치 노선의 갈등이 치열하게 전
개되고 있었고 신문매체에 대한 통제가 점차 강화되는 상황에서 당대의
현실을 재현하는 일은 작가에게 크나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소재는 그러한 위험에서 한 걸음 물
러나 있었다는 점에서 작가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학적 원천으로
기능하였다. 작가의 역사인식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아 왔다는 점에서도
역사소설의 창작은 이념의 실천이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으로, 해방 이후 작가의 인지도 변화에 크게 부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박종화와 윤백남의 경우 일제강점 말기 친일
활동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역사를 호출함으로써 민
족주의와 손쉽게 결합시켜 나갈 수 있었던 까닭에 해방 이후 신문매체
활동의 복귀를 앞당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역사소설은 해방기 신문소설의 우선순위에 놓여 있었다.
신문매체의 부침이 심했던 시기였지만 신문소설은 매체의 사회적 인지
26) 당시 출판계의 정황은 “가장 매력이 있고 요망되었던 ‘조선에 관한 것’, 즉 역사ㆍ어
학ㆍ문학ㆍ고전ㆍ미술 등에 관한 모든 향토적 발굴은 최초의 상당한 기세로 흡수”
되었다는 조풍연의 지적에서 단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조풍연, 「더 한층 곤경에」,
개벽, 1948.1, 60쪽.
27) 서울중앙방송국이 <국어강좌>와 <국사강좌> 프로그램을 개설한 것은 1945년 12월부
터다. 오후 6시부터 1시간 동안 <국어강좌>는 화, 목, 토, <국사강좌>는 월, 수, 금으
로 주3회씩 방송되었다. <국어강좌>는 최현배, 김윤경, 이희승 등이 연사로 나섰고,
<국사강좌>는 김도태, 이병도, 김상기, 황의돈 등이 맡았다. 바른 말글과 역사를 배움
으로써 민족의식을 앙양하고자 개설된 이들 프로그램은 관심에 걸맞게 청취율도 높
았다. 한국방송공사 편, 한국방송사, 한국방송공사, 1977, 156쪽과 172~173쪽.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27
도 확보와 더불어 구독자 확대를 위해 주효했고, 역사소설은 매체와 작
가의 지향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환영받았던 것이다. 특히
중앙신문, 자유신문, 경향신문 등 새롭게 창간된 신문매체는 기
존 매체보다 역사소설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박종화의 민족과 박태
원의 태평성대는 각각 중앙신문과 경향신문이 창간된 얼마 후부
터 연재되었는데, 이는 창간 당시 역사소설의 연재를 염두에 두고 사전
작업을 진행했음을 방증한다. 노선과 편제를 달리한 자유신문 또한
박종화의 청춘승리를 통해 재도약의 발판을 튼튼히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기존 매체는 단정수
립 이후에야 신문소설에 지면을 할애하기 시작했다. 1949년에 접어들면
서 비중은 커졌으나 역사소설에 국한된 수용이었다. 이는 매체기반이
튼튼한 신문일수록 오히려 보수적이고 안정적 선택을 선호하였음을 보
여준다. 그만큼 해방기 신문소설의 입지가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기 역사소설은 박종화가 주도하고 있었고, 박태
원과 윤백남 등이 창작 일선에 가세하고 있었다.
아득하고 오래기 반만년 전 송화강반 백두산(白頭山) 아래 성스러운 천리천평
(千里千坪) 신시(神市)의 때로부터 가까이 설흔 여섯 해 동안, 뜻 아니한 왜노의
잔인한 압박과 구속 밑에서 강조로 동조동근(同祖同根)의 굴레를 뒤집어씌우고
창씨(創氏)와 개명(改名)까지 당했던 을유년 팔월 십사일 어제까지―조선민족은
다만 하나요, 둘이 아니다. <중 략>
민족은 위정자를 감시해야 한다. 민족은 뭉쳐야 한다. 절대로 배타주의가 아니
다. 살기 위하여 자립을 꾀하여 한맘 한뜻으로 뭉쳐야 한다.
조선민족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28)
28) 박종화, ‘序說’, 월탄박종화대표작전집 6: 민족, 삼경출판사, 1976, 15~16쪽.
28 대중서사연구 제27호
인용문은 해방기 첫 역사소설인 박종화의 민족 ‘서설’ 가운데 일부
다. 작가는 소설 제목뿐 아니라 서설을 통해 ‘민족주의’를 소환하고 있다.
이때 민족주의는 조선민족의 해방, 독립, 통일, 자립, 자랑으로 확대되면
서 다분히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성격을 띤다. 그럼에도 민족주의를 앞세
워 해방의 감격을 이야기하고 작가의 이미지 쇄신과 강화를 이끌어낸다.
해방 후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민족주의의 전유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이념과 정파를 떠나
민족주의로 하나 되는 국가건설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를 공
론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역사소설은 시의성 있는 제재를 통해 공론화하고 있다는 공
통점을 지닌다. 시의성이 당대 대중독자들의 최대 관심사를 포괄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29), 역사적 제재 선택은 역사소설의 시의성 획득과 관
련된다. 당시 역사소설은 대체로 해방 정국의 혼란상을 불러왔거나 닮아
있는 과거 반제ㆍ반봉건 시대의 수난사를 제재로 삼고 있다. 박종화의
민족은 고종의 친정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민중봉기와 갑오농민전쟁의 과정을 중심에 둔다. 우익지로 전환한
자유신문에 첫 선을 보인 청춘승리는 광주학생운동부터 해방 직후
까지를 배경으로 하며, 홍경래는 순조 12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
래난을 소재로 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1949년 서울신문에 연재된
박태원의 임진왜란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부터 선조가 의주로 피
신하는 과정까지를 정사(正史)의 나열에 치중하여 다루고 있으며, 6개월
후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군상은 철종 5년 조선이 서양 제국
주의의 침입 앞에 노출되기 시작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윤백남의
29) 임성래, 「신문소설의 입장에서 본 혈의 누」, 신문소설이란 무엇인가?, 대중문학
연구회 편, 1996, 10쪽.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29
회천기 또한 갑오농민전쟁의 투쟁과정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들 소설은 한결같이 민족 수난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의 동요와
반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민중의 울분과
항의는 당대 민중의 정서에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당시의 역사소설은 현재의 전사(前
史)로서 반제ㆍ반봉건시대의 수난사를 소설화하여 시의성을 확보하고
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기 역사소설은 민족영웅을 소환하여 당대 민중의 요구와
열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 있었다. 소환된 영웅은 청춘승리의 임일
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홍경래의 홍경래, 회천기의 전봉준과 같
은 민중봉기에 앞장선 인물들이다. 이들은 반제ㆍ반봉건시대의 부패와
압제에 맞서 사회개혁을 요구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당시
출판계에서도 사회개혁의 열망을 담은 역사물들이 연이어 발행되었는
데, 홍명희의 임꺽정과 박태원의 조선독립순국열사전, 약산과 의
열단, 홍길동전30) 등이 대표적 예다. 식민지 잔재 청산과 토지개혁
에 대한 당대 민중의 열망이 사회개혁을 실천했던 과거 민족영웅에 대
한 소환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역사소설에 대한 관심은 역사 그
자체를 떠나 사회개혁을 이뤄줄 민족영웅으로 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해방기 역사소설은 민중의 요구와 배리되거나 갈등구조를 형
성하고 있는 공론장에서 민중의 열망을 공론화하고 위무하는 우회적 통
로였다고 볼 수 있다. 공론장에서 배제된 민중이 민족수난사와 영웅서
사를 통해 자신들의 열망을 충족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0) 안미영, 「해방 이후 박태원 문학에 나타난 ‘영웅’의 의의」, 한국현대문학연구제25
집, 한국현대문학회, 2008, 345~382쪽.
30 대중서사연구 제27호
5. 결론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신문매체가 근대문학이나 근대문학제도의 형성
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매
체와 문학, 독자라는 문학제도로 눈길을 돌릴 경우 문학과 신문의 관계
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신문소설이 통속적인 경향을 부추
긴다는 우려는 근대문학에서 신문소설의 자리를 약화시키고 주변화하
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문소설 연구는 통속소
설로 폄하하는 인식과 싸워야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망실되었거
나 읽어내기 힘든 상당한 분량의 자료와 고투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다른 분야에 비해 연구 성과가 집적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신문소설 연구는 근대계몽기와 일
제강점 초기에 집중하여 근대성의 여러 의미항을 도출하는 한편, 신문
소설의 대중성에 집중하여 주변화된 신문소설의 자리를 재고하는 양상
을 띠고 있다. 작가별, 작품별, 주제별로 접근한 연구들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이 글은
신문매체의 지형 변화에 주목하여 해방기 장편연재소설을 대상으로 삼
아 신문소설의 위상을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해방 초기 신문매체는 현실정치의 도구로 전면에 나서면서 정론성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법적 통제와 귀속재산 처리 과정
을 통해 우익지로 재편되었으며, 단정수립 이후에는 그 연장선에서 사
상통제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 대한 견제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신문
소설 또한 연재 중단 등 불안정한 매체 환경에서 양적인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신문소설의 창작주체로 나선 것은 친일문인과
일정한 거리를 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망주의 작가들이었다. 당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31
시 그들의 복귀를 주도했던 자유신문에 기대어 본다면, 이들의 전면
등장은 신문매체의 지향과 열악한 경제적 국면을 타개하기위한 일환이
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작가들 또한 소설을 통해 해방정국에 대한 참여를
꾀하고자 했음은 물론이다.
해방기 사회현실을 형상화한 소설들은 새로운 ‘국가 만들기’를 둘러싼
작가들의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이를 통해 신문
매체의 변전 과정과 추이를 보여주었다.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시
기 진보주의 계열의 자유신문에 발표된 김남천의 1945년 8ㆍ15가
청년세대를 호출하여 좌익 노동운동의 역사적 대의를 강조하고 실천을
촉구하고 있었다면, 부인신보에 발표된 김말봉의 카인의 시장은 이
념대립을 뛰어넘어 공창폐지운동에 대한 작가의 신념과 계몽의지를 보
여주고 있었다. 언론통제가 가시화된 후 우익지로 변전한 자유신문에
발표된 염상섭의 효풍은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
에 대한 작가의 신념을 제시하며 진중한 ‘모색’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단정수립 후 우익지로 변전한 경향신문에 발표된 박계주의 진
리의 밤은 기독교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창기갱생사업을 전개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반공주의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반공
주의가 종교화되었던 시기 야당지 동아일보에 발표된 김동리의 해방
은 이념대립과 애정갈등과 교직시키는 가운데 극우적 민주주의 민족국
가건설을 당위로 주장하고 그에 대한 열망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상의 소설들은 대중적인 연애서사를 차용하고 있었지만 이념서사
의 과도함으로 말미암아 신문소설의 흥미 진작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염상섭의 효풍과 김말봉의 카인의 시장은 연애서사와 이념서사가
조화를 이룬 편에 속한다면, 다른 소설들은 연애서사의 편린들이 제대
32 대중서사연구 제27호
로 드러나지 않거나 파행을 낳기도 하였다. 이렇듯 해방기 신문소설의
지형은 공공성의 강화가 두드러진 반면 사적 영역의 내밀성이 약화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해방기 역사소설은 이념서사보다 양적으로 우세하였다. 그것은
해방 직후 국어와 국사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과 더불어 작가들이 격변
기 정치현실에 대한 부담감에서 비껴나 과거의 역사를 호출함으로써 민
족주의와 손쉽게 결합시켜 나갈 수 있었던 데 힘입었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소설은 매체의 사회적 인지도 확대와 구독자 확보를 위해 효과적인
소설 양식이었다. 그럼에도 역사소설의 수용은 신생 신문매체가 주도했
고, 기존 신문매체들은 단정수립 이후에야 재개하였다. 이 시기 역사소
설은 반제ㆍ반봉건 시대라는 시의성 있는 제재를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
며, 민족 영웅을 소환하여 당대 민중의 요구와 열망에 적극적으로 부응
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해방정국의 공론장에서 배제된 민중의 열망을
공론화하고 위무함으로써 공공성과 함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신문은 해방기 공론장을 대표하는 사회적 형식 가운데 하나다. 이 시
기는 신문사의 매체 이념과 편집진의 이념 지향, 국가의 매체 통제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비교적 호흡이
긴 신문소설의 성격과 작가의 특성, 작품의 창작과 향유에 관여했던 요
인을 살피는 일은 당시의 공론장을 다층적으로 읽어내는 방식이기도 하
다. 앞으로 매체 투쟁의 성격이 다분했던 해방기 신문소설의 연구 영역
을 중앙지뿐만 아니라 지역지까지 포괄하여 신문소설의 위상을 고찰하
는 일이 남아 있다. 이러한 작업을 1950년대까지 확대하여 신문소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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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소설의 위상(1) / 최미진 35
Abstract
Changes in the Media and the Status of Newspaper Novels⑴
Choi, Mi-Jin (Pusan National University)
This paper aims at exploring the status of newspaper novels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by looking into the changes in the newspaper landscape as the
public sphere of the time. The newspaper media during this period went to the front
as an important political tool, strongly expressing their political point of views, but
the continued control and regulation during the following period, from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to the Found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realigned the newspaper media to become right-wing. Against this backdrop,
newspaper novels were created and enjoyed by writers pursuing reputation mainly
in the newly emerged newspapers. The aspiration for nation-building displayed in
these newspaper novels of the time took different forms with conflicting ideologies
in the midst of chaotic social situation and rapidly changing media landscape. Novels
which described the reality of the time were equipped with timeliness and
enlightenment, while different ideological narratives were playing a leading role in
the public discourse. So much so that love narratives lost momentum. In addition,
during this period, historical novels were stronger in numbers than ideological
narrations thanks to keen interest in Korean and Korean History education and more
flexible writing environment. Until the Republic of Korea was founded, however,
these historical novels were published mainly in nascent newspapers. These historical
novels tried to bring back national heroes in touching upon timely subjects to
publicly deal with the strong aspirations of the people, which had been excluded
from public sphere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Therefore, newspaper novels
during this period can be characterized by their strengthened publicness which
allowed the public discourse on people's passion for nation-building through various
forms and different ideologies.
(Key Words : Independence Period, newspaper media, newspaper novel,
public sphere, new nation building, ideological narratives,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