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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김인환/고려대)

1. 김동리의 자작 해설
2. 모화 : 무녀 어머니
3. 낭이 : 예술의 승리
4. 결론
참고문헌


1. 김동리의 자작 해설
김동리는 「무녀도」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고 여러 차례 그
작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무녀도」를 괴테의 ?파우스트?보
다 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1958년에 「무녀도」를 해
설하면서 “모화가 파우스트와 대체될 새로운 세기의 인간상이란 것
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백년만 두고 봐라! 모든 것이 증명
될 것이다!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1)라고 말했다. 「무녀도」는 조
선중앙일보에서 발행한 잡지 ≪중앙≫의 1936년 5월호에 처음 발
표되었고 그 후 1947년에 발간한 창작집?무녀도?(을유문화사)에서
상당한 부분이 개정되었으며 1963년에 발간된 창작집 ?등신불?(정
음사)에서 다시 “무녀도는 검으스레한 묵화의 일종이었다.” “아직
몸이 완쾌하지 못한 낭이는 여윈 손에 ?신약전서? 한 권만 쥐고 가


1) 김동리, ?창작의 과정과 방법―「무녀도」편?, ≪신문예≫1958년 11월호,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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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히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라는 두 문장이 삭제되어 현재와 같
은 형태로 고정되었다. 김동리는 1978년에 「무녀도」를 장편으로 개
작한 ?을화?(문학사상사)를 발표하였는데 무속에 대한 작가의 주석
이 늘어났을 뿐, 사건의 전개에 새로운 면이 없고 마지막 굿의 삭
제로 결말의 밀도가 낮아져서 산만하고 평범한 작품이 되었다. 욱
이에 해당하는 영술이만 죽는 ?을화?의 구성은 모화만 죽는 1936
년판 「무녀도」의 구성과 대조된다. 영술이가 죽자 을화는 마을을
떠나고 월이도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 1936년판의 사건전개는 다음
과 같다.
① 열서너 살에 절에 들어간 욱이는 열아홉 살에 우연한 서슬로 분이 치받쳐
승려 하나를 돌로 쳐 죽인다.
② 감옥살이를 하다 감형이 되어 풀려 나온 욱이가 낭이를 임신시킨다.
③ 모화는 낭이의 아이를 신령님의 아이라고 주장하고 해산하는 날 낭이가 말
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④ 아이는 유산되고 낭이의 입도 열리지 않는다.
⑤ 예기소의 굿판에서 모화가 죽는다. 욱이는 어디로 떠나고 낭이는 외할머니
가 와서 돌본다.
1936년판의 욱이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모화는 욱이가 아니라 기
독교와 대결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은 하느님의 딸
이고 처녀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다면 자기의 딸 낭이도 처녀로서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모화의 대결의식이다. “천상천
하에 짝없이 떠다니는 신령님이 있습니이다. 이 신령님은 종종 여
인네가 잠자는 틈에 꿈으로 태어와 몸을 섞읍너이다. 그러므로 늘
방성을 못보고 덧없이 세월을 보내던 부인네가 여러 해 용왕님게
공을 들이면 문득 몸이 일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꿈 중에 그 신령
님을 느껴 잉태되는 것입너이다.”2) “예수 귀신이 진짠가 신령님이
진짠가 두고 보지.”(36년판 101쪽) 하는 모화의 대결의식을 김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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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 하느님을 반대하는 근대가 끝나고 하
느님과 더불어 사는 시대가 오는데 기독교의 초자연적 신은 너무
높아서 사람과 함께 살기 어려우므로 새로운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무속의 자연적 신을 모시게 될 것이라는 것이 김동리의 생각이다.
김동리가 「무녀도」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해설한 최초의 글은 ≪문
장≫ 1940년 5월호에 실린 ?신세대의 정신?이었다.
毛火는 제 딸을 求하기 兼예수敎에 對抗하여 딸의 事件을 두고 어떤
異蹟을 宣約했으나 終局실패한다. 이 失敗란 毛火에게 精神的으로나 現
實的으로나 全面的敗北를 意味하게 된다. 여기서 이 作品은 클라이맥스
로 들어가 毛火의 마지막 굿이다. 어떤 물에 빠져 죽은 女人의 靈魂을 건
지려 毛火는 넋대로 물을 저으며 시나위가락에 맞추어 청승에 자지러진
巫詞를 읊으며, 또 그 가락에 맞추어 몸의 律動(춤)을 지니고 서 점점 물
속으로 들어가다 문득 모화의 몸뚱이는 그 목소리와 함께 물속에 잠겨 버
린다. 이러한 簡單한 敍述로서는 毛火의 마지막 勝利(救援)를 理解하기 힘
들 것이다. 여기 시나위가락이란 내가 위에서 말한 ‘仙’ 理念의 律動的表
現이요 이때 모화가 시나위가락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함은 그의 全
生命이 시나위가락이란 律動으로 化함이요 그것의 律動化란 곧 自然의 律
動으로 歸化合一한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東洋精神의 한 象徵으로 取한 毛
火의 性格은 表面으로는 西洋精神의 한 代表로서 取한 예수敎에 敗北함이
되나 다시 그 本質的世界에서 悠久한 승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3)
김동리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자연에 귀의하는 것을 仙의 이념
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모화는 仙의 靈感으로 인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경지에 있다. 모화란 새 인간형은 김동
리가 인간의 개성과 생명의 구경을 추구하여 얻은 한 개의 도달점
이었다. 김동리는 모화에 대하여 그녀가 “이 時代이 現實에서 別般
2) 김동리, 「무녀도」, ≪중앙≫1936년 5월호, 44쪽.
3) 김동리, 「新世代의 精神―文壇新生面의 性格, 使命, 其他」, ≪文章≫1940년
5월호, 9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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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가지지 意義못함은 내 자신 잘 알고 있으나 그러나 (그녀의 경
지는) 인간이 個性과 生命의 究竟을 追究하여 영원히 넘겨보군 할
그러한 한 개의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4)고 말하였다. 천상과 지상,
무한과 유한, 정신과 물질, 종교와 과학 중에서 중세는 뒤의 것을
몰랐고 근대는 앞의 것을 배제하였다. 근대의 실증주의는 제한된
평면에서 더 갈 데가 없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김동리의 근대비판
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우리의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
것의 전개에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수행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천지의 파편에 그칠 따름이요 우리가 천지
의 분신임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며 이 체험을 갖지 않는 한 우리
의 생은 천지에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우리의 이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것의 타개에 노력하는
것, 이것이 곧 구경적 삶이라 부르며 또 문학하는 것이라 이르는
것이다.”5) 그러므로 김동리는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도 얼
마든지 문학 속에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실증적이
냐 몽환적이냐 하는 것은 문학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동리는 개
성의 진실이 들어 있고 세계의 律呂와 생명의 맥박이 통할 수 있는
작품을 ‘훌륭한 리얼리즘’6)이라고 정의한다. “本來文字로 表現하게
마련인 것이 文學일진대 어느 文章이 文字아닌 것이 있으랴마는 먼
저 思想이 있어 그것의 表現으로 文字를 빌리는 것이 떳떳한 文學이
요 思想일 거지, 이것은 文字에서 인스피레이션을 얻어 가지고는 온
갖 희한한 말씀들을 막 演繹해 내니 이건 思想도 文學도 아니요 文
字病이라 이름지을 것이다.”7) 일종의 신체적 사고를 강조하는 이러
한 문학관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으나 모화를 새 인간형으로 보거나
4) 김동리, 같은 책, 92쪽.
5) 김동리, 「문학하는 것에 대한 私見」, ?김동리전집?제7권, 민음사, 1997, 73쪽.
6) 김동리, 「나의 소설수업」, ≪文章≫1940년 3월호, 174쪽.
7) 김동리, 「文字偶像―偶像論노트의 一節」, ≪朝光≫1939년 4월호,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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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을 가진 인물로 보아서는 「무녀도」의 구조가 균형 있게 해명되
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동리의 자작해설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무녀도」의 주제를 이념의 승리로 규정한 자작해설에 대하
여 작품의 구조에 근거하여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 작품의 주
제가 예술의 승리에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2. 모화 : 무녀 어머니
모화는 경주읍에서 성밖으로 십여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 살았다.
역말촌 또는 잡성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모화와 그녀의 딸
낭이는 마을 사람들과 별다른 교섭 없이 외톨이로 살았다. 굿을 청
하러 오는 사람들이 가끔 들릴 뿐이었다. 모화는 어느 하루도 살림
이라고 살고 있는 날이 없었다. 그녀는 굿을 할 때 이외에는 대개
주막에 가 있었다. 여름 저녁에는 낭이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들고
돌아왔다.
모화는 사람을 볼 때마다 늘 수줍은 듯 어깨를 비틀며 절을 했다. 어린
애를 보고도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했다. 때로는 개나 돼지에게도 아양을
부렸다. 그녀의 눈에는 때때로 모든 것이 귀신으로만 비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뿐이 아니라 돼지 고양이 개구리 지렁이 고기 나비 감나무 살
구나무 부지깽이 항아리 섬돌 짚신 대추나무 가시제비 구름 바람 불 밥
연 바가지 다래끼 솥 숟가락 호롱불…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와 서로 보
고 부르고 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성내고 할 수 있는 이웃사람같이 생
각되곤 하였다.8)
그는 지금까지 이 경주 고을 일원을 중심으로 수백번의 푸닥거리와 굿
을 하고 수백 수천 명의 병을 고쳐왔지만 아직 한 번도 자기가 하는 굿이
나 푸닥거리에 신령님의 감응을 의심한다든가 걱정해 본적은 없었다. 더
8) 김동리, 「무녀도」, ?김동리전집?제1권, 민음사, 1997, 82쪽.(이하 이 책의 인용
은 본문 안에 면수만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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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 누구의 객귀에 물밥을 내주는 것쯤은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을
떠주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손쉬운 일로만 여겨왔다. 모화 자신만이 그
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굿을 청하는 사람, 객귀가 들린 사람 쪽에서도 그
와 같이 믿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86)
그러니까 모화는 무당이라고 천대를 받으면서도 그녀 자신의 안
정된 세계에서 편안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모화는 무당이면
서 동시에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무당이기만 한 여자나 어머니이
기만 한 여자는 갈등의 내용을 일원화할 수 있으므로 비교적 쉽게
자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무당이면서 어머니인 경우
에도 반벙어리인 낭이와 둘이서 살 때처럼 한 사람이 모든 일을 주
도할 경우에는 갈등을 축소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들이 서
로 상대방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
이 초래될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무당이라서 생기는 갈등이 아니
다. 전근대 지향의 아버지와 근대 지향의 아들 사이의 갈등은 우리
가 과거에 겪은 것이고 민족주의자 아버지와 신자유주의자 아들의
갈등은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절에 다니는 어머니와
교회에 나가는 딸의 갈등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려면
서로 상대방의 믿음을 인정하거나 어느 한 쪽이 굴복하여 다른 쪽
을 따르거나 해야 한다. 욱이는 귀신이 지피기 전에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 생긴 모화의 아들이다. 아홉 살 되던 해 아는 사람의 주선
으로 어느 절로 보낸 욱이가 십년 만에 예수교인이 되어서 나타났
다. 욱이는 열다섯 살에 절에서 나와 유랑하다가 열여섯 살 되던
해 겨울에 평양에서 이장로의 소개로 현목사의 도움을 받게 되었
다. 우리는 여기서 모화가 왜 무당이 됐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처
녀로서 애를 뱄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심적 外傷이 되었을 것이
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들거나 적응하거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다. 모화가 무당이 된 것도 병드는 대신에 선택한 것일 터이지만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187
무당을 병이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모화는 병이 곧 적응이 되는 예
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화는 동물적이고 본능적
인 모성애로 낭이와 욱이를 대한다. 낭이는 모화가 사들고 오는 과
일을 마치 짐승의 새끼가 어미에게 달려들어 젖을 빨듯이 받아 먹
으며 모화는 십년만에 돌아온 욱이를 어미새가 날개로 새끼를 감싸
듯이 품에 안는다.
낭이는 어릴 때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어미의 품에 뛰어들어 젖을 빨 듯
어미의 수건에 싸인 복숭아를 받아먹는 것이었다.(81)
모화는 장에서 돌아와 처음 욱이를 보았을 때, 그 푸른 얼굴에 난데없
는 공포의 빛이 서리며 곧 어디로 달아날 것 같이 한참 동안 어깨를 뒤틀
고 허둥거리다 말고 별안간 그 후리후리한 키에 긴 두 팔을 벌려 흡사 무
슨 큰 새가 저희 새기를 품듯 뛰어들어 욱이를 안았다.(83)
두 번째 집을 나갔던 욱이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녀들 어미 딸
앞에 나타났다. 모화는 그때 마침 굿 나갈 때 신을 새 신발을 신어보고
있었는데 욱이가 오는 것을 보자 그 후리후리한 허리에 긴 팔을 벌려 흡
사 큰 새가 알을 품듯, 그의 상반신을 얼싸안고 울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
무 푸념도 없이 오랫동안 욱이의 목을 안은 채 울기만 하는 것이었다.(92)
모화가 욱이를 안는 모습은 동일하였지만 두 포옹 사이에는 갈등
의 요인이 개입되어 있다. 욱이가 모화의 무당 일에 반대하였기 때
문에 모화는 아들을 단순한 본능만으로 대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욱이가 다시 집을 나간 후 모화는 자식을 잃을지 모르겠다는 불안
을 느낀다. 무식하고 가난한 대로 자기의 어머니 속에서 어떤 절대
적인 것, 어떤 최고의 것을 발견하여 간직하는 것이 한국인의 전통
이었다. 아들의 그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어머니는 자신의 세계를
편안하게 느꼈고 아들을 즐겨 우주의 중심으로 인정하였다. 인간의
모성애는 동물적인 본능이면서 동시에 재산이나 권력 같은 외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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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요인들과는 별개의 공간에서 최고인 여자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아들을 대하는 내면적인 사건이었다. 기독교를 믿는 아들의 무속에
대한 불신은 이러한 전통적 모자 관계를 파괴한다.
“오마니 어디 갔다 오시나요?”
“저 박급창 댁에 객귀를 물려주고 온다.”
“오마니가 물리면 귀신이 물러나갑데까.”
“물러나갔기 사람이 살아났지.”
“오마니, 그런 것은 하나님께 죄가 됩네다.”(86)
욱이의 반대는 모화의 존재의 핵심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조선시
대 5백년간 선비들이 중과 무당을 천시하였으나 불교와 무속은 서
로 의지하여 탄압을 견뎠으며 양반들이 어떻게 생각했건 대부분의
농민과 양반 부녀자들은 무속을 버리지 않았다. 무속은 한국 민속
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었다. 마을에 조그만 교회당이 서고 신자들
이 늘어가면서 “무당과 판수를 믿는 것은 절대적 한 분밖에 안 계
시는 거룩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죄가 됩니다”(96과 98)라는 말
을 모화에게 대놓고 하는 사람도 생겼다. 사람들은 “두 눈이 파랗
고 콧대가 칼날 같은 미국 선교사를 보는 것은 원숭이 구경보다도
더 재미나다고들 하였다.”(96) 기도를 드려서 병을 고친다는 부흥사
가 왔다. 神癒(spiritual healing)는 신약성경에도 여러 번 나오는 기
독교 교리의 일부로서 무속의 치유와 비교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태초 이래 인간의 신체 구조가 크게 바뀌지 않았으므
로 질병의 종류에도 큰 변화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약과 양약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을 과학과 비과학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유와 무속의 치유는
죄의식(guilt complex)을 파괴하여 질병을 낫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종교와 미신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189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의 월숫병 대하증 쯤은 대개 죄씻음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밖에도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고 반
신불수와 지랄병가지 저희 믿음 여하에 다라 모두 죄씻음을 받을 수 있다
는 것이었다. 여자들의 은가락지 금반지가 나날이 수를 다투어 강단 위에
내걸리게 된다. 기부금이 쏟아진다. 이리 되면 모화의 굿 구경에 견줄 나
위가 아니라고 하였다.(97)
모화는 겉으로는 “양국놈들이 요술단을 꾸며 왔어”(97)라고 비웃
었지만 내심으로는 초조하였다. 특히 아들 욱이가 그들 편을 드는
것이 야속하였다. 욱이는 모화가 무당을 그만두고 낭이가 말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였다. 욱이는 현목사와 이장로에게 경
주에 교회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내어 대구 노회에 간청하도록 하
는 한편 대구의 교인들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단순히
과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낭이를 말하게 해달라는 욱이의 기도나 아
들에게서 예수 귀신을 떠나게 해달라는 모화의 굿이나 모두 비과학
적인 미신에 속하는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신
유와 무속의 치유는 약을 쓰지 않는 치료방법이라는 점에서 정신분
석과 통한다고 할 수 있으나 정신분석은 자료에서 출발하는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고 기독교와 무속은 직관에서 출발하는 신비적 방법
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모화에게는 오래된 것이 편한 것이고 새로운 것이 낯선 것이었는
데 욱이에게는 새로운 것이 편한 것이고 오래된 것이 낯선 것이었
다. 욱이에게 모화의 집은 사람의 거처가 아니라 도깨비 집에 지나
지 않았다.
그 명랑한 찬송가 소리와 풍금 소리와 성경 읽는 소리와 모여 앉아 기
도를 올리고 빛난 음식을 향해 즐겁게 웃음 웃는 얼굴들 대신에 군데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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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려가는 쓸쓸한 돌담과 기와 버섯이 퍼렇게 뻗어 오른 묵은 기와집과 엉
킨 잡초 속에 꾸물거리는 개구리 지렁이들과 그 속에서 무당 귀신과 귀머
거리 귀신이 들린 어미 딸 두 여인을 보았을 때 그는 흡사 자기 자신이
무서운 도깨비굴에 홀려든 것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90)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 버섯
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
데군데 헐린 채 옛 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고이는 대로 일 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여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키어 있었다. 그 아
래로 뱀같이 길게 늘어진 지렁이와 두꺼비같이 늙은 개구리들이 구물거리
고 움칠거리며 항시 밤이 들기만 기다릴 뿐으로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사람의 자취와는 인연이 끊어진 도깨비굴 같기만 했다.(79)
모화의 집에 대한 이 묘사는 감정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초
점을 모으고 있는데 이러한 감정이 작가의 주석인지 욱이의 시각인
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의 일반적인 분위기인지 분명하지 않다. 모
화와 낭이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을 도깨비집이라고 느끼지는 않
았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도 오래 그들 사이에 있어왔기 때문에 이
미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는 그 집을 사람의 자취와 인연이 끊어진
집이라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느꼈다면 모화에게 굿을
부탁하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묘사는 욱이와 욱이
처럼 서양 사람들의 집을 경험한 적이 있는 기독교인들의 시각일
것이다. 그런데 김동리는 소설의 이 부분에서 왜 모화의 집을 기독
교인의 시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일까. 여기서 김동리는 무속을 무
너져 가는 낡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이 묘사는 모
화를 파우스트보다 더 보편적인 인간상이라고 한 자작 해설과 어긋
난다. 이 부분의 묘사는 중립적이고 비개입적인 묘사라고 할 수 없
다. 인물시각과 섞여 있는 작가의 주석 어디에도 이 집의 분위기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191
묘사에 반대한다는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다.
모화는 욱이를 제 편으로 돌려놓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욱
이에게 잡귀가 들렸다고 생각한 모화는 신주상 위의 냉수 그릇을
들어 물을 머금고 욱이의 낯과 온몸에 확 뿜으며 ‘엇쇠 귀신아 물
러서라’ 하고 외쳤다. 욱이는 어리둥절해서 모화의 푸념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수그려 잠깐 기도를 올리고 나서 일어나
잠자코 밖으로 나갔다. 욱이의 태도는 모화를 점점 더 초조하게 하
였다. 긴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낭이에게 욱이가 언제 온다고 하더
냐고 따져 묻기도 하고 욱이 밥상을 차려놓지 않았다고 낭이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욱이가 다시 돌아온 날 “모화는 웬일인지 욱
이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오랫동안 툇마루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꼴이었다. 긴 한숨과 함
께 얼굴을 든 그녀는 무슨 생각으론지 도로 방으로 들어가더니 낭
이의 그림을 이것저것 뒤져보는 것이었다.”(92) 이것은 최후의 결전
을 각오하는 자세이었다. 모화는 잠든 욱이의 품에서 성경책을 꺼
내 불사르고 탄 재 위에 소금을 뿌리며 살풀이를 한다. 잠에서 깬
욱이는 부엌문을 박차고 들어가 모화를 말리려다 모화가 휘두르는
식칼에 찔린다.
욱이는 모화의 칼날을 외쪽 귓전에 느끼며 그의 겨드랑이 밑을 돌아 소
반 위에 차려 놓은 냉수 그릇을 들어 모화의 낯에다 그릇째 끼얹었다. 이
서슬에 접시의 불이 기울어져 봉창에 붙었다. 욱이는 봉창에서 방안으로
붙어 들어가는 불길을 잡으려고 부뚜막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자 물그릇
을 뒤집어쓰고 분노에 타는 모화는 욱이의 뒤를 쫓아 칼을 두르며 부뚜막
으로 뛰어 올랐다. 봉창에서 방안으로 붙어 들어가는 불길을 덥쳐 끄는
순간, 뒷등허리가 찌르르하여 획 몸을 돌이키려 할 때 이미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은 허옇게 이를 악물고 웃음 웃는 모화의 품속에 안겨 있었
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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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이는 머리와 목덜미와 등허리 세 군데 상처를 입었다. 현목사
가 찾아와 건네준 성경을 안고 욱이는 숨을 거둔다. 모화도 욱이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았다면 책은 종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았을 터인데 성경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들의 갈등은 모화도 큰 무
당이 아니고 욱이도 진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다. 성경이 일자일획도 틀리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히브리어 구약이나 희랍어 신약에 해당되는 말이
지 오역 투성이 국역 성경에 해당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간음한
여자를 포용한 예수가 무당을 배척했을 것 같지는 않고 오래 전에
불교와 화해한 무속이 새삼스럽게 기독교를 배제했을 것 같지도 않
다. 맥아더를 모시는 무당이 있는데, 예수를 모시는 무당이 왜 없겠
는가? 모화에게 예수는 서역에서 와 자기 아들을 빼앗아 잡아먹는
굶주린 귀신이다. 욱이의 편협한 기독교 신앙이 모화를 기독교의
적으로 만든 것이다.
너 이제 보아하니 서역 십만리 굶주리던 잡귀신하,
여기는 영주 비루봉 상상봉헤
깎아 질린 돌 벼랑헤, 쉰 길 청수헤, 엄나무 발에
너희 올 곳이 아니다.
바른 손에 칼을 들고 왼 손에 불을 들고
엇쇠 서역 잡귀신하 물러서라.(94)
욱이가 들어 눕게 되자 모화는 무당 일을 전폐하고 아들의 간호
에 전념한다. 무당을 그만두고 어머니로만 살기로 한 것이다. 처음
에 모화는 자기에게 익숙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새롭고 낯선 기독
교를 배척하고 성경을 태우고 그러한 행동을 제지하는 아들을 칼로
찔렀다. 모화가 성경을 태운 것은 아들에게 붙은 예수 귀신을 쫓아
내면 아들이 잘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한 것이지 아들과 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아들을 해롭게 한 결과가 되었고 아들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193
이 쓰러짐과 동시에 모화 속의 무당이 배후로 물러나고 모화 속의
어머니가 전면으로 나오게 되었다. 낭이와는 어머니이면서 무당으
로서 잘 살았는데 이제 욱이와는 어머니이거나 무당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서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모화는 무당으로서 욱이와 갈
라서거나 어머니로서 욱이와 함께 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작은 무당이고 미숙한 기
독교인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모화는 욱이의 병간호에 남은 힘을 다하여 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낮
과 밤을 헤아리지 않고 뛰어갔다. 가끔 욱이를 일으켜 앉혀서 자기의 품
에 안아도 주었다. 물론 약도 쓰고 굿도 하고 주문도 외웠다. 그러나 욱이
의 병은 낫지 않았다.
모화도 욱이의 병간호에 열중한 뒤부터 굿에는 그만큼 신명이 풀린 듯
하였다. 누가 굿을 청하러 와도 아들의 병을 핑계로 대개 거절을 했다. 그
러자 모화의 굿이나 푸닥거리의 반응이 이전과 같이 신령치 않다고들 하
는 사람이 하나둘씩 생기기도 했다.(95)
마을 사람을 위한 굿을 모두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의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이미 무당이 아닌 여자의 굿이 아들에게 신통
을 보일 리가 없었다. 아들을 위해 온갖 치성을 다 드렸으나 욱이
는 성경책을 안고 숨을 거둔다. 아들을 찌르고 무당일을 그만둔 모
화는 이제 아들이 죽자 어머니 노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자와
사랑을 나눌 나이가 지났으므로 모화는 자기를 여자로 여길 수 없
었다. 모화는 여자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무당도 아닌 無가 되
었다. 무는 죽음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화네 아들 죽고 섭섭해서 어쩌나?”
하면, 그녀는 다만
“우리 아들은 예수 귀신이 잡아갔소.”
하고 한숨을 내쉬곤 했다.
194 민족문화연구 제49호
그녀는 굿을 나가지 않았다.(100)
사람들은 “아까운 모화 굿을 언제 또 볼꼬”(100) 하고 아쉬워했
다. 읍내 어느 부잣집 며느리가 예기소에 몸을 던졌다. 모화는 비단
옷 두 벌을 받고 오구굿을 하기로 했다. 모화는 김씨 부인의 평생
사연을 넋두리하다 전악들의 젓대 피리 해금에 맞추어 춤을 추었
다. 그러나 밤중이 되어도 김씨 부인의 혼백이 건져지지 않았다.
“작은 무당 하나가 초조한 낯빛으로 모화의 귀에 입을 바짝 대며
‘여태 혼백을 못 건져서 어떡해?’ 하였다”(102) 모화는 그때 이미
무당이 아니었다. 김씨의 혼백이 무당 아닌 여자의 초혼에 응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모화는 당연하다는 듯이 넋대
를 잡고 물가로 들어섰다.”(103) 모화는 넋대를 따라 점점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 검은 물에 그녀의 허리가 잠기고 가슴이 잠기고
온몸이 아주 잠겨버렸다. “넋대만 물위에 빙빙 돌다가 흘러버렸
다.”(104)
3. 낭이 : 예술의 승리
우리는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하여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무녀
도」에서 무녀는 물론 모화라고 할 것이지만 무녀도를 그린 것은 낭
이이므로 모화는 그림의 인물이고 낭이는 그림의 작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림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널따랗게 흐르는 검은 강
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
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랫벌엔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히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오는 듯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195
한 피곤에 젖어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자 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77)
낭이는 모화가 꿈에 용신님을 만나 복숭아 하나를 얻어먹고 꿈꾼
지 이레만에 낳은 아이라 했다. 낭이는 잘 듣지 못하는 대신에 그
림을 잘 그렸다. 간혹 굿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 찾아와 방문을 열
려고 하면 “낭이는 대개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놀라 붓을
던지며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와들와들 떨곤 하는 것이었다.”(80)
욱이가 절간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낭이는 삼년이나 시름시
름 앓더니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 호리호리한 몸매와 종잇장 같이 희고 매끄러운 얼굴에 빛나는 굵은
두 눈으로 온종일 말 한 마디 웃음 한번 웃는 일 없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앉은 채 욱이가 하는 양만 바라보고 있다가, 밤이 되어 처마 끝에 희부연
종이등불이 걸리고 하면 피에 주린 모기들이 미친 듯이 떼를 지어 울고
날아드는 마당 구석에서 낭이는 그 얼음같이 싸늘한 손과 입술로 욱이의
목덜미나 가슴팍으로 뛰어들곤 했다. 욱이는 문득문득 목덜미로 가슴팍으
로 낭이의 차디찬 손과 입술을 느낄 적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하였으나 그
녀가 까무러칠 듯이 사지를 떨며 다시 뛰어들 제면 그도 당황히 낭이의
손을 쥐어주며 그 희부연 종이등불이 걸려있는 처마 밑으로 이끌곤 했
다.(90)
낭이가 얼마나 욱이를 좋아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김동리
는 근친상간으로 전개했던 1936년 판본과 달리 전집 판본에서는 근
친상간 직전에 사건을 중단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기독교
인이 된 욱이는 성적 욕망을 신앙으로 차단하고 낭이의 접근에서
성적인 내용을 차단하며 낭이는 성적인 욕망을 욱이로부터 전환하
여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욱이의 리비도는 종교에 부착되고 낭이의
리비도는 예술에 부착된다. 근친상간을 향한 욕망이 각각 종교와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화가 욱이의 마음을 돌리려고
196 민족문화연구 제49호
혼자서 춤을 추면 낭이는 저도 모르게 어미를 따라 춤을 춘다.
모화는 혼자서 손을 비비고 절을 하고 일어나 춤을 추고 갖은 교태를
다 부리며 완연히 미친 것같이 날뛰었다. 낭이는 방에서 부엌으로 난 봉
창 구멍에 손을 대고 숨소리를 죽여 오랫동안 어미의 날뛰는 양을 지켜보
고 있다가 별안간 몸에 한기가 들며 아래턱이 달달달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미친 것처럼 뛰어 일어나며 저고리를 벗었다. 치마를 벗었다. 그리
하여 어미는 부엌에서 딸은 방안에서 한 장단 한 가락에 놀듯 어우러져
춤을 추곤 했다. 그러한 어느 새벽, 낭이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가벗
은 알몸뚱이로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 자신을 발견한 일도 있었
다.(92)
낭이는 무당이 될 수 있는 기질을 타고난 여자이다. 그러나 그
녀는 굿을 재미있어 하지만 굿하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좋
아한다. 예술가와 무당은 기질로 보아 공통되는 점이 많은 사람들
일 것이다. 무당과 기생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직업이니 요즈음
의 음악가에 가깝다고 하겠지만 기생은 서예를 하고 무당은 부적을
그리니 미술가라고 할 수 있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림은 낭
이의 근친상간적 욕망을 승화시켜 주었듯이 무당이 될 낭이의 팔자
도 돌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낭이는 무녀가 되지 않고 무녀도를
그렸다. 모화의 춤이 죽음을 넘어 巫女圖로 보존된 것은 바로 종교
에 대한 예술의 승리이다.
4. 결론
「무녀도」의 주제를 무교와 기독교의 대립으로 설정한 것은 김동
리 자신이었다. 그런데 김동리는 실증주의에 기반한 근대와 실증주
의와 몽환주의를 포괄하는 새 시대의 대립을 우리 시대의 근본문제
로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교와 같이 전근대에 속하는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197
사상일 터인데 무교는 신체적 사고가 되고 기독교는 신체적 사고가
못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물론 탈식민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
의 인종차별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작품
을 어떻게 읽더라도 우리는「무녀도」에서 식민주의 비판을 끌어낼
수 없다. 나라를 뺏은 것은 일본인데 일본 사람은 나오지도 않고
미국인 선교사 현목사는 별다른 결함이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
다. 그는 한국인에게 너그럽고 특히 욱이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 기독교가 실증주의와 과학주의를 대표하는 사상이 아닌 이상
기독교와 무교의 대립은 김동리의 세계상(비록 유치한 것이기는 하
지만 그것을 세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전달하지 못한다. 더
욱 심각한 문제는 무교와 기독교의 대립으로 작품을 보면 「무녀도」
의 세부가 파괴된다는 데 있다. 나는 이 논문에서 기독교를 “어떤
낯선 것”으로 볼 때에만 「무녀도」의 구조가 균형 있게 분석된다는
사실을 해명해 보고자 하였다. 김동리의 자작해설을 아예 고려하지
않고 기독교의 교리를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요인으로 무시하는 것
이 작품분석에 효과적이라는 가설을 논증하는 데 이 논문의 목적이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무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녀의 그림이다. 우
리는 모화와 함께 모화를 그린 낭이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
으면 안된다. 지금까지 어느 연구자도 낭이를 이 작품의 중요한 인
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녀로서도 실패하고 어머니로서도 실패한 모화의 춤을 예술
로 승화시켜 영원히 살게 한 것은 낭이가 그린 그림의 힘이다. 모
화의 춤이 죽음을 넘어 보존된 것은 예술의 승리를 의미한다. 모화
의 내면에서 전개되는 믿음과 사랑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어 「무
녀도」를 분석함으로써 나는 모화를 仙的理念의 구현자로 보는 자
작해설의 한계를 지적하고 주제를 종교에 대한 예술의 승리로 설정
198 민족문화연구 제49호
하여 이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해명하고자 하였다. ◆
주 제 어 : 김 동 리 , 무 녀 도 , 문 학 비 평 , 종 교 , 예 술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19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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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1989.
홍기돈, 「김동리연구」, 중앙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4.
200 민족문화연구 제49호
【국문초록】
김동리는 자신의 「무녀도」를 괴테의 ?파우스트?보다 더 보편적인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자연에 귀의하는
것을 仙의 이념이라고 하고 모화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장벽이 무
너진 경지에 있는 새 인간상이라고 해설하였다. 그것은 김동리가
인간의 개성과 생명의 究竟을 추구하여 얻은 도달점이었다.
그러나 모화를 새 인간상으로 보거나 사상을 가진 인물로 보아서
는 「무녀도」의 구조가 해명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제를 기독교
와 무속의 대립으로 설정하면 작품의 형태가 왜곡된다. 「무녀도」의
구조를 분석하려면 삶의 원리인 믿음과 삶의 본능인 모성애가 모화
의 내면에서 전개하는 영혼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족
적 세계에 살던 모화가 심정의 분열을 겪게 되는 계기를 이해한다
면 신앙을 위해 아들을 찌르고 아들을 위해 굿을 전폐하는 사건의
개연성과 아들이 죽은 후에 무당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 여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구성의 필연성을 분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무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녀의 그림이다. 우
리는 모화와 함께 모화를 그린 낭이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
으면 안된다. 무녀로서도 실패하고 어머니로서도 실패한 모화의 삶
을 예술로 승화시켜 영원히 남게 한 것은 낭이가 그린 그림의 힘이
다. 모화의 춤이 죽음을 넘어 보존된 것은 바로 예술의 승리를 말
해준다. 모화의 내면에서 전개되는 믿음과 사랑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어 「무녀도」를 분석한 이 논문은 이 작품의 주제를 종교에 대
한 예술의 승리로 설정함으로써 모화를 仙的理念의 구현자로 보는
자작해설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자작 해설의 한계 - 「무녀도」의 경우 - 201
【Abstracts】
9)Kim, Inhwan*
Dongni Kim has eval‎uated his own work, The Picture of a
Shaman, as a more universal work than that of Goethe, Faust. Kim
has regarded the idea of taoism as equivalent to the human being's
conversion to the nature's infinity. According to him, Mohwa,
who is the protagonist of this story, is an embodiment of the
harmony between man and nature. However, the interpretation
that mohwa is a new type of human being equiped with the taoist
thoughts does not reveal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structure of
the work. This paper claims that the focus has to be on a more
intimate psychological level than on religion in general. Moreover,
it is not religion but art that maps the structure of the story.
Mohwa, as a shaman, believes in her gods and, as a mother,
loves her son. Her son's disagreement with her faith causes her the
inner conflict and this unsolved problem leads her to death.
Although she eventually dies in agony, her shaman dance is offered
an eternal life through the picture which her daughter has painted.
This depicts that the theme of the story is the victory of art over
religion.
Key Words : Dongni Kim, The Picture of a Shaman, Literary Criticism, Religion,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