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目 次 >
1. 序言
2. 불함문화론의 성립 및 내용
2.1 <불함문화론>의 성립 경위
2.2 <불함문화론>의 구성과 내용
3. 불함문화론의 중국신화 수용에 대한 검토
3.1 제6장 <泰山府君과 大人>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3.2 제7장 <神仙道의 胎盤>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3.3 제14장 <支那文化의 東夷素 또는 不咸素>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3.4 제15장<伏羲氏와 帝 堯舜>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4. 육당의 중국문화관
4.1 중국문화의 성립에 대한 다원적 인식
4.2 華夷論적 문화사관을 벗어난 자생적 동양학의 제창
5. 불함문화론의 현재적 의미
6. 結語
1. 序言
六堂 崔南善(1890-1957)은 근대의 國學 大師로서 학문 각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 신화학의 성립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육당 신화학에 대한 연구는 육당의 국학 제
분야에 대한 연구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가령 조현설의 <만주의 신화와
근대적 담론 구성>1), 조윤정의<최남선의 신화연구와 문학의 관련 양상>2), 김영남의<한국
신화학의 ‘자기식민지화’ 과정-공동환상의 창출과 일원적 고대상의 형성>3), 황호덕의 <사승
이라는 방법, 육당의 존재-신화론>4) 등이 비교적 晩近에 이루어진 이 방면의 논고들인데
이들 논고에서는 육당 신화학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련성을 밝히는 데에 주력하는 양상
이다. 그러나 육당의 대표적 문화담론인 ‘不咸文化論’이 비교신화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전개
된 것이니 만큼 육당 신화학에 대한 주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최근 이른바 ‘신화의 귀환’이 범세계적 문화현상이 된 이래 신화학 역시 다시 흥기하는 추세
에 있으며 특히 비교학적 연구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서 육당 신화학은 풍부
한 時宜性을 지닌 신화학적 자산이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정황에 유념하면서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육당 신화학에 접근하
고자 한다. 첫째, 기존의 연구는 육당 신화학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밝히는 데 주
력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정작 육당 신화학의 실질 내용에 대한 검토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사실상 육당 신화학의 학문적 위상은 치밀한 내용 검토
를 통해 定位될 수 있을 것이며 연후에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도 보다 더 객관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에 따라 육당 신화학의 중요한 조성 부분인 중국신화의
내용에 대해 고찰을 시도할 것이다. 둘째, 목하 세계화의 획일적 확산에 대응하여 지역화
(localization)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국가 간의 合縱連衡이 일어나면서 유럽연합(E. U.), 아
세안 등 지역연대의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중일 학계 일각에서는 한, 중,
일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연대를 목표로 한 이른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 즉 ‘동아시아 담
1) 조현설, <만주의 신화와 근대적 담론 구성>, 《근대의 문화지리: 동아시아 속의 만주/만슈》(동국대
학교 문화학술원, 2007).
2) 조윤정, <최남선의 신화연구와 문학의 관련 양상>, 《한국현대문학연구》(2007),제22집.
3) 김영남, <한국신화학의 ‘자기식민지화’ 과정 - 공동환상의 창출과 일원적 고대상의 형성>, 《최남선
다시 읽기》(현실문화, 2009).
4) 황호덕, <사승이라는 방법, 육당의 존재 - 신화론>, 《최남선 다시 읽기》(현실문화, 2009).
六堂 신화학의 중국신화 수용과 그 문화사적 의미 ― ‘不咸文化論’을 중심으로 / 387
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신화학을 근거로 성립된 육당의 초국가적 문화담론인 불
함문화론이 새롭게 재평가될 여지는 없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상술한 두 가지 관점 하에 먼저 논문 <불함문화론>에서 중국의 불함문화를
논의한 4개의 章節을 통해 육당 신화학에 수용된 중국신화의 내용을 차례로 검토한 후 육당
의 중국문화관을 살펴보고 불함문화론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게 될 것이다.
2. 불함문화론의 성립 및 내용
2.1 <불함문화론>의 성립 경위
<불함문화론>은 육당이 1925년에 탈고했던 것을 《朝鮮及朝鮮民族》(경성: 조선사상통신
사, 1927), 제1집에 발표한 논문이다. 불함은 원래 《山海經》에서 백두산을 지칭하는 이름으
로 처음 등장했던 것인데5) 육당은 이를 태양숭배와 관련한 광명, 하늘, 하느님, 천신 등의
표현으로 해독하고 있다. 불함문화론이란 불함산 곧 백두산을 터전으로 성립된 태양숭배,
천신숭배의 문화가 조선민족의 단군신화 등을 통해 표출되었고 이것이 고대 중국과 일본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나아가 유라시아 전역에 확산되었다는 거대한 스케일의 가설이다.
육당은 이러한 불함문화를 인도유럽 계통의 문화, 중국 계통의 문화와 더불어 세계 3대 문
화권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육당의 불함문화론 창안에는 물론 개인의 독보적인 식견
이 크게 작용했겠으나 일찍이 1910년대에 朝鮮光文會를 통해 교유했던 申采浩, 朴殷植, 鄭
寅普 등 당대를 風靡했던 국학자들과 羅喆 등 大倧敎 관계 인사들의 문화인식과 상고사 지
식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육당은 1922년 무렵 시사주간지《東明》에 조선
사연구방법론을 개진하면서 불함문화를 제기하였고 1927년 당시 단군신화를 비롯 조선 상
고사를 말살하려 했던 일제 관방학자들의 기도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조선 민족문화의 始原
및 발전 상황과 관련된 불함문화론을 日文으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6)
5) 《山海經》 <大荒北經>: “대황의 한가운데에 불함이라는 산이 있고 숙신씨국이 있다(大荒之中, 有
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6) <불함문화론>의 성립 경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최남선, 《불함문화론》(우리역사연구재단,
2008), 정재승, 이주현 역주의 <해제> 참조. 이하 이 글에서의 《불함문화론》인용은 이 책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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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불함문화론은 1930년대 이후 滿鮮一體論, 日鮮同祖論 등의 친일 문화담론
으로 연계된다는 혐의를 갖게 되나7) 이 글에서는 일단 1920년대에 성립된 <불함문화론>
자체의 경우, 육당 후년의 親日是非로부터 자유로운 텍스트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2.2 <불함문화론>의 구성과 내용
<불함문화론>은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논리적 전개에 따라 순차적으로 서
술되었다기 보다 주제별 연관성에 따라 논술되었다. 그 구성과 전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제1장 <동방문화의 연원>과 2장 <白山과 天子>는 불함문화론의 기본관점, 분석방법을 서
술한 서론이다. 여기에서는 동방문화의 초석으로서 단군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太白山
등에 보이는 ‘白’ 곧 ‘밝’의 태양신화적 의미가 불함문화론의 핵심임을 주장하였다.
제3장에서 제17장에 이르는 15장은 본론이라 할 수 있는데 서론에서 제시한 ‘백’ 곧 ‘밝’의
태양신화적 의미를 아시아 및 세계의 각 지역으로 확대하여 비교언어학, 비교민속학, 비교
종교학, 비교신화학 등의 견지에서 논증하였다. 본론 중 제4장 <白山의 음운적 變轉>, 5장
<금강산은 斫迦羅山>, 10장 <조선 神道의 大系>, 11장 <건국설화상의 天과 檀君>에서는 조
선의 불함문화, 제6장 <泰山府君과 大人>, 7장 <神仙道의 胎盤>, 14장 <支那문화의 東夷素
또는 不咸素>, 15장 <伏犧氏와 帝 堯舜>에서는 중국의 불함문화, 제3장 <일본의 밝산>, 8장
<대가리와 텡그리와 天狗>, 9장 <히코와 다카>에서는 일본의 불함문화, 제16장 <몽고의 鄂
博과 만주의 神杆>에서는 몽고와 만주 등의 불함문화, 제12장 <불함문화의 계통>과 13장
<불함문화의 세계적 투영>에서는 불함문화의 세계적 확장 및 분포에 대해 서술하였고 제17
장 <조선과 일본과의 祭祀上의 일치>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불함문화를 비교하였다.
마지막인 제18장 <불함문화권과 그 楔子>는 결론으로 ‘밝’문화 곧 불함문화의 중요성과
세계적 분포, 문화사적 위상과 의의에 대해 천명함으로써 大尾를 장식하였다.
한다.
7) 이러한 혐의에 대해서도 쟁론의 여지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박은숙, <‘滿洲國’ 建國精神과 六堂의
不咸文化論>, 《한국어문학연구》(2008), 제51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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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함문화론의 중국신화 수용에 대한 검토
3.1 제6장 <泰山府君과 大人>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육당은 불함문화론의 핵심 내용이라 할 태양숭배와 관련하여 광명을 뜻하는 어휘인 ‘밝’과
하늘을 뜻하는 ‘대갈(Taigar)’의 어근 및 의미 범주를 중국의 泰山神話에 확대한다. 육당은
태산을 위요한 齊, 魯 지역이 동이의 거주지역이라는 전제하에 태산을 지칭하는 ‘泰’, ‘岱’ 등
이 ‘대갈’, 태산을 다스리는 신격인 泰山府君의 ‘부군(pukun)’이 ‘밝은(parkan)’, 태산의 여
신인 碧霞元君의 ‘벽’이 ‘밝’ 등의 東夷語로부터 유래하였으며 태산에 대한 제사 의식인 封禪,
東嶽大帝에 대한 숭배 의식 등은 동이의 ‘밝’ 제사의 유풍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육당이 태산 일대를 동이문화권으로 간주한 것은 중국신화학에서도 긍정하는 견해로서 문
제의 소지가 없다고 본다. 아울러 육당의 어휘 추정 방식 역시 신화 어휘 및 서사가 지니는
‘동어반복성(tautology)’의 본질을 고려할 때 타당성이 없지 않다. 다만 대만의 비교신화학
자로서 육당과는 달리 태음학파에 속하는 杜而未는 육당과 비슷한 방식을 구사하여 중국신
화상의 저명한 인명 및 지명을 ‘달(月亮)’ 의 고대 語音의 다양한 변형으로 파악하였는데 환
원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만큼 육당의 태양학파적인 해석 방식이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지 사항 하나하나에 대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하겠다.
일례로 육당은 태산부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태산에 한하여 그 主神을 府君pukun이라 칭하여 그 명칭이 晋代의 古傳에도 기
재되었는데 부군으로서 산의 神體를 이름지어 부르는 것은 중국에서 다른 유례가
없으므로 이 역시 東夷의 原語를 승계한 것이니 다름 아닌[밝은 parkan]을 번역한
글자일 것임은 너무도 명백하다.8)
그러나 부군이 태산에만 쓰였던 용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령 唐 王度의 《古鏡記》
를 보면 華山府君9)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부군은 태산뿐만 아니라 五嶽의 하
8) 《불함문화론》, p.76.
9) 王度, 《古鏡記》: “저는 華山府君의 사당 앞 큰 소나무 밑에 살던 천년 묵은 여우입니다(某是華山
府君廟前長松下千年老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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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던 화산에도 쓰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부군은 본래 관청(府)의 책임자(君)로서 漢代에
군수나 현령 등을 지칭했던 용어인데 산을 다스리는 산신에게도 官長의 명칭을 부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고대 한국의 ‘부군’이 ‘밝은’의 借音임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이
용어가 중국에 들어가 官人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인지, 한대 이후 중국 관인의 용어가
우리에 의해 차음된 것인지 그 선후 관계에 대해서는 고증이 요청된다.
벽하원군의 ‘벽’이 ‘밝’의 차음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보다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태산
의 여신인 벽하원군의 원형이 처음 출현하는 것은 東晋 干寶의 《搜神記》에서이다.
문왕이 강태공을 관단령으로 삼았다.....문왕이 꿈에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는
데 길을 막고 울고 있었다.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저는 태산의 여신으로 시집
가 동해 해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지금 관단령에 의
해 길이 가로 막혔습니다. 그 분은 덕이 있는 사람이라 저의 길을 막는 것입니다.
제가 가게 되면 반드시 큰 비바람이 이는데 그것은 그 분의 덕을 손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문왕이 깨어나 강태공에게 물으니 그날 과연 큰 비바람이
강태공의 고을 밖으로 지나갔다고 하였다. 문왕이 이에 강태공을 대사마로 임명하
였다.
(文王以太公望爲灌壇令,........文王夢一婦人, 甚麗, 當道而哭. 問其故, 曰吾泰山
之女10), 嫁爲東海婦, 欲歸, 今爲灌壇令當道, 有德, 廢我行. 我行必有大風疾雨, 大
風疾雨, 是毁其德也. 文王覺, 召太公問之. 是日果有疾風暴雨從太公邑外而過, 文王
乃拜太公爲大司馬.)11)
태산의 여신은 최초에 《수신기》에서 ‘泰山女’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여신이
벽하원군이라는 도교적 尊號를 받게 되는 것은 宋 眞宗 때의 일이다. ‘벽’이 ‘밝’의 차음이었
다면 이미 《수신기》에서부터 ‘벽’과 관련된 칭호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굳이 송대에 이르러
벽하원군으로 불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치상 고대로 올라갈수록 동이계 어음
인 ‘밝’과 가까운 이름으로 불리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泰山之女’는 곧 泰山神의 딸로서 이에 따라 태산의 여신으로 의역하였다. 뒤의 ‘東海婦’의 ‘東海’
도 동해의 海神을 의미한다.
11) 干寶, 《搜神記》, 卷四, <灌壇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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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7장 <神仙道의 胎盤>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육당은 前章에 이어 태산의 의미에 대해 부연한다. 夷, 泰, 岱가 어원을 같이 한다고 보고
태산 주위에 살던 동이 종족이 《산해경》에서 大人國 사람으로 기록되었음을 확인한다. 아울
러 태산을 위요한 博, 奉高 등의 지역과 산동 반도의 博山, 白山, 福山 등 산악의 명칭들이
‘밝’의 차음임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된 육당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대갈산의 주위는 神域일 것이요, 이에 상응하는 遺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예로부터 태산을 圍繞하고 博이라 일컫는 도읍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니 지금의 泰安府는 한대에는 博, 嬴, 奉高의 세 縣이 있었던 곳으로서 博과 奉高가
‘밝’에서 온 명칭임은 물론이며 奉高는 동시에 태산을 위한 齋邑이란 뜻도 포함시킨
명칭이다.....이 밖에 산동반도에 있는 博山, 白山, 福山 등의 산악과 博平, 博興, 博
縣 등의 縣邑 중에는 아무래도 ‘밝’과 인연 있는 것이 많으려니와......12)
흥미로운 것은 傅斯年이 殷의 도읍지의 변천을 서술하면서 亳, 浦姑, 薄, 博 등의 지명이
모두 동일한 발음의 표기임을 주장한 것이다.13) 부사년은 은이 발해만 일대에서 흥기하였
고 중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상술한 지명을 남겼다고 주장하였는데 비록 이들 지명의 실체가
‘밝’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발음의 표기임을 논증하는 과정은 육당과 흡사하다. 부
사년의 해당 논문 <夷夏東西說>(1934)이 <불함문화론>(1927)보다 7년 늦게 발표된 것임을
생각할 때 당시 중국 학계의 수준을 뛰어넘는 육당의 견식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육당은 산동 앞 바다인 渤海와 그곳의 섬인 蓬萊 역시 ‘밝’과 관련된 발음임을
말하면서 신선사상이 동이 종족의 ‘밝’ 문화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동이 종족이 ‘밝’
의 바다인 발해를 이상화 하여 봉래산 등의 신선설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육당에 의하
면 신선도의 사제인 方士는 대부분 동이 종족의 무대인 燕, 齊 지역 출신인데 그 어원은 한
국어의 남자무당을 뜻하는 박수와 관련이 있고 秦始皇 때의 방사 徐巿의 이름도 ‘밝’에서 유
래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黃帝, 廣成子 등 중국 선도의 대가들이 동이의 땅에 와서 가르침
을 받았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육당이 방사의 어원을 박수로 본 것은 신선사상의 샤머니즘 기원설과 관련하여 설득력이
12) 《불함문화론》, p.80.
13) 傅斯年, <夷夏東西說>, 《民族與古代中國史》(北京: 北京時代文藝出版社, 2009), pp.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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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하겠다.14) 아울러 신선사상의 발해만 및 동이 기원설은 성립과정에서 육당과 친교가
있었던 李能和와의 교섭 관계가 예상된다. 이능화는 그의 《朝鮮道敎史》에서 桓因, 桓雄, 檀
君의 삼신을 모신 태백산에 대한 전설이 중국에 흘러들어가 발해만의 삼신산 전설이 생겨났
으며 황제 등이 고대 한국에 선도를 배우러 왔다는 전설이 조선 기원설의 증거라고 논증하
고자 했다.15) 신선사상의 동이 기원설에 대해 누가 먼저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
나 사실 이러한 생각은 멀리 신라의 崔致遠으로부터 鄭磏 등 조선 시대의 丹學派 도인들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16)
그러나 신선사상의 동이 기원설에도 사소한 착오는 존재한다. 가령 육당은 이렇게 말한다.
고대로부터 黃帝라든가 廣成子라든가 하는 仙道 聖者들이 텡그리의 변형으로 생
각되는 靑丘, 紫府 등 東夷의 땅에서 敎를 받았다는 전설의 의미도, 燕, 齊가 方士의
본고장인 이유도.....모두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다.17)
이 구절은 東晋의 葛洪에 의해 씌여진《抱朴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염두에 두고 언급된
것이다.
황제가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고 풍산을 지나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전수
받아 온갖 신들을 부렸다
(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劾召萬神.)18)
그러나 《포박자》의 글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황제는 “서쪽으로 중황자를 뵙고 아홉 가지
의 방술을 전수받았으며 공동산을 지나 광성자로부터 자연의 경전을 전수받았(西見中黃子,
受九加之方, 過崆峒, 從廣成子受自然之經.)”19)을 뿐만 아니라 남쪽, 북쪽으로도 가서 大神
들로부터 선도의 비결을 전수받았다고 서술한다. 이렇게 보면 신선사상이 동이의 땅에서 발
14) 정재서, 《不死의 신화와 사상》(민음사, 1994), pp.65-66.
15) 李能和, 《조선도교사》(보성문화사, 1977), 이종은 역주, pp.33-52.
16) 신선사상의 동이기원설은 결국 도교의 한국 자생설과 상관되는데 가령 조선의 洪萬宗은 그의
《海東異蹟》에서 檀君을 最古의 신선으로 기록한다. 도교의 한국자생설과 관련된 논의는 정재서,
《한국도교의 기원과 역사》(이화여대 출판부, 2006), pp.69-92 참조.
17) 《불함문화론》, pp.82-83.
18) 葛洪, 《抱朴子⋅內篇》 <地眞>.
19)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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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했다는 가설은 적어도 《포박자》내에서는 설득력을 잃는다. 그리고 광성자가 황제와 더불
어 동이의 땅으로 도를 받으러 갔다는 앞서의 언급도 원문의 본의와 다름을 알 수 있다.
3.3 제14장 <支那文化의 東夷素 또는 不咸素>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육당은 동이문화의 특징으로 天 숭배를 들고 중국문화에서의 天命, 天子, 天王 등의 어휘
및 개념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說文解字》, 《書經》, 《白虎通》, 《獨斷》등의 전적
등에 수록된 관련 구절들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육당에 의하면 중국에서 천을 신격화한 것
으로 太一, 天極, 泰一, 天皇 등이 있고 태산에는 望秩, 封禪 등 천에 제사드리는 의식들이
있는데 모두 동이 拜天思想의 유풍이며 불함문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된 육당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天을 대표함에 北斗로서 함이 통례인데, 斗에 太一, 太乙,
天極, 天皇과 한가지로 天罡, 斗君의 명칭이 있으므로 우리가 天의 本生으로서 탕그
리나 텡게리 또는 그 類語를 상상함이 그다지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20)
太一과 泰一은 사실상 동일한 신으로서 중국신화에서 이들은 기원적으로 북두성 숭배와
상관이 있고 그것의 문화적 기반은 샤머니즘이라 할 것이다. 巫風이 성했던 楚 지역에 東皇
太一이라는 신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태일은 동이문화권의 산물이어서
육당의 논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육당은 이들을 일반적이고도 넓은 의미의 천 숭
배와 관련시키고 있어서 중국신화상의 태일 개념과는 약간의 相違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리고 육당이 천을 신격화한 일례로 중국신화상의 천황을 들고 사실상 조선이 주체인
불함문화의 영향이라고 언급한 이면에는 일본 천황의 절대성을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3.4 제15장 <伏羲氏와 帝 堯舜>에서의 중국신화 수용
육당은 이 장에서 가장 많이 중국신화에 대해 언급하였다. 육당은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
20) 《불함문화론》,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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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등이 중국에서의 제왕을 뜻하는 皇, 帝로 변모하였는데 황으로는 복희가, 제로는 요,
순이 이러한 취지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복희는 동방에서 유래하였고 봄을 관장하여 ‘밝’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요의 이름인 放勳은 ‘밝은’의 음차이고, 순의 이름은 重華로 역시 광명
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어 이들을 단군의 중국적 現示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육당은
천지를 개벽한 거인 盤古는 물론 인도의 푸르샤, 북유럽의 오딘도 ‘밝은’에 어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고 반고신화는 남방의 槃瓠 신화와의 상관성을 예로 들어 순수한 漢族 신화
로 보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육당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더욱 나아가서 우리들은 중국신화의 源頭에 소급하여 명백한 ‘밝’ 전승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의 開闢설화가 이미 그것인 것이다. 《五運曆年記》에 의하면.......이라
하여 중국에서도 소위 巨人化生설화로써 우주의 創成을 설명한다. 반고신화는 그
모티프가 이미 그러하거니와 명칭 역시 인도의 푸르샤, 북유럽의 오딘과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견해로서는 이들을 통틀어서 그 총기원을 ‘발’ 또는
‘밝은’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반고가 漢민족 專有의 것이 아님은 《후한서》 南蠻 西
南夷 列傳 所載의 槃瓠전설과 《述異記》 소재의 南海中 盤古國 전설에 의해 알 수
있다.21)
육당은 또한 복희가 雷澤에서 대인의 자취를 밟은 어머니에 의해 탄생됐다는 感生神話를
簡狄, 徐偃王 등의 卵生神話와 더불어 동이계 종족의 고유한 신화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상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육당이 상당히 정확하게 중국신화의 내용과 특성 그리고 근거자
료를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내용에서 상위가 있는데 반고신화가 한족
신화가 아니라는 견해는 탁견이지만 반호신화와 동일시한 것은 사실과 맞지 않으며 감생신
화를 동이계 종족의 신화만이 갖는 특징으로 본 것도 오류이다. 동이계와 적대관계에 있던
화하계의 신 황제도 감생신화에 의해 탄생이 신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요를 순과
더불어 동이계 종족의 임금으로 본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문헌상 요의 世系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최근의 고고 발굴에서는 요의 근거지인 고대 唐의 遺址
를 山西省 陶寺 지역에 比定하고 있으며 요를 이 지역의 君長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22)
반고신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唐嘉弘이 동이문화에 대한 논술에서
21) 《불함문화론》, pp.159-161.
22) 이와 관련된 논의는 王曉毅⋅丁金龍, <從陶寺遺址的考古新發現看堯舜禪讓>, 《山西師大學報(社
會科學版)》(2004, 제3기) 참조.
六堂 신화학의 중국신화 수용과 그 문화사적 의미 ― ‘不咸文化論’을 중심으로 / 395
앞서 부사년이 亳과 同音으로 간주한 蒲姑의 音變으로 簿古, 盤古, 槃瓠, 扶餘 등을 거론한
것이다.23) 다소 소략한 언급에 그쳤던 육당의 논의가 최근 중국의 학자에 의해 좌증을 확보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묘한 느낌마저 준다. 다만 당가홍은 동이문화의 터전을 산동 등 내
지에 국한하고 그것이 부여 등으로 파급된 것으로 보는 중원문화 중심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육당의 불함문화론과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4. 육당의 중국문화관
4.1 중국문화의 성립에 대한 다원적 인식
육당은 중국문화가 중국 영토에서 중국인에 의해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일원론적 관
점을 인정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중국이란 나라는 민족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하나의 커다란 沈澱池요 合金의 용광
로이다24).
물론 중국의 다원주의는 오늘날 미국문화와 같은 샐러드 디쉬(salad dish)의 형국이 아니
라 장기간에 걸쳐 타문화를 융합한 멜팅 팟(melting pot)의 경지이므로 이른바 ‘多元一體의
格局’으로 운위된다. 이러한 관점은 근래에 이미 定論이 되어 있다. 용광로와 같은 문화적
상황에서 중국인 자신은 物, 我를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육당은 중국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준 중요한 외래적 요소로서 동이문화를 거론한다.
중국문화에 있어서 동이의 遺物은 料外로 다량이며 또한 그 중요한 부분을 점유
하고 있음을 본다.25)
23) 唐嘉弘, <東夷及其歷史地位-序言>, 《東夷古國史論》(成都: 成都電訊工程學院出版社, 1989), 逢
振鎬 著, p.9.
24) 《불함문화론》, p.143.
25) 《불함문화론》, p.144.
396 / 中國小說論叢 (第 35 輯)
물론 동이를 山東 등 중국 내지에 자생했던 종족으로 보는 중국 학계의 일부 견해에 의하
면 동이문화는 외래문화가 아니라 중국의 토착문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육당은 비교언어
학, 비교민속학, 비교종교학, 비교신화학적 관점과 분석에 의해 동이가 불함문화의 주역이
고 그들의 무대는 본래 중국 밖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동이는 중국의 타자로서 영향
을 미친 세력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음을 육당은 비판한다.
원래 명백한 듯 하면서도 비교적 모호한 것이 중국의 고대사요, 잘 알려져 있는
듯 하면서도 의외로 알 수 없는 것이 중국문화의 성립 경로인데, 특히 그 東夷와의
교섭에 있어서 더욱 그러함을 본다. 소위 중국문화란 것이 그렇게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자료를 그 주위의 민족에게 힘입었음은 이미 알려진 바인데, 우리들이
보는 바로는 중국인들이 가장 문화적 도움을 많이 받았을 東夷族과의 교섭을 이상
하게도 지금까지 지나치게 等閑視하여 왔다는 것이다.26)
傅斯年 역시 중국사에서 동이의 역할을 忽視했음을 개탄하고 그 원인을 춘추 전국시기
학자들의 夏-周 정통의식과 그것을 계승한 司馬遷의 편파적 역사 기술에 둔 바 있다.27) 그
러나 오늘에 이르러 동이를 중국의 타자로 보는 입장은 간단치 않다. 민족과 문화를 애초부
터 흡수와 융합의 결정체로 보는 중국의 견지에서 동이는 이미 근대 이후 중국 민족의 분리
불가능한 조성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동이가 아니더라도 “중국문화란 것이..... 많은
자료를 그 주위의 민족에게 힘입었”다는 중국문화에 대한 육당의 해체론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오늘에 더욱 빛을 발한다.
4.2 華夷論적 문화사관을 벗어난 자생적 동양학의 제창
동이문화 곧 불함문화를 근거로 중국문화에 대해 다원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육당이 중
국의 중심주의 곧 화이론을 탈피한 새로운 문화론을 제창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
이다.
샤먼이건 밝이건 그것이 인도와 중국 두 계통 이외의 제 민족의 문화적 공통 원
26) 《불함문화론》, pp.70-72.
27) 傅斯年, <夷夏東西說>, p.20, 22, 25.
六堂 신화학의 중국신화 수용과 그 문화사적 의미 ― ‘不咸文化論’을 중심으로 / 397
천으로서 예로부터 동방역사 전개의 근본 동기를 이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또한 동방문화의 정점으로 삼는 중국의 고대 문화가 실은 불함문화로서 대부분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불함문화에 대한 학자의 태도와 관념은 앞으로
많이 개정되어야 할 줄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자기들의
문화 내지 역사의 동기와 본질을 고찰할 경우에, 무턱대고 중국본위로 모색함을 지
양하고 자기 본래의 면목을 자주적으로 관찰해야 할 것이며, 한 발 나아가 중국문화
의 성립에 대한 각자의 공동 활동의 자취를 찾아서, 동방문화의 올바른 유래를 밝히
는 것이 앞으로 노력해야 할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28)
동아시아의 문화라 하면 모두가 중국 본위 내지 인도 본위로 보고 또한 가치 지
을 것인 것처럼 운위됨을 볼 때 마다, 동양학의 진전 없음이 成心과 先入觀에 기인
함이 많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29)
주목해야 할 것은 육당의 의도가 단순히 화이론적 문화사관을 극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육당은 동아시아 문화를 중국 본위 아니면 인도 본위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
하는데 세계 3대 문화에서 인도문화를 유럽문화와 함께 묶어서 인도유럽 계통의 문화로 통
칭한 바 있으므로 육당의 개념에는 서양문화의 극복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함문화를 중심으로 한 육당의 문화론 제창은 중국과 서양의 패권적인 관점
을 극복, 지양하고자 하는 제3의 입론이라 할 것이다.
5. 불함문화론의 현재적 의미
육당은 불함문화론을 통해 동이 민족의 태양숭배 문화가 조선, 중국, 일본, 몽고 등 동북
아 일대의 기층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분포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흑해 연안에 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러한 사실은 육당으로 하여금 아시아 諸國이 문화공동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밝 사상의 학구적 흥미를 자아냄이 어찌 단지 역사적 일면에 그칠 것인가? 漫然
28) 《불함문화론》, pp.121-122.
29) 《불함문화론》, p.200.
398 / 中國小說論叢 (第 35 輯)
히,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亞細亞主義를 說하는 자 또한 그 정신적 支柱로서
이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30)
근대 무렵 西勢東漸의 시점에서 서양에 대한 저항적 차원, 혹은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아
시아 제국은 각기 나름의 아시아 공동체론을 제기하게 된다. 가령 중국의 孫文은 “王道 문명
을 지키며 서구의 覇道 문명에 대항하는 아시아 제 민족의 공동전선 결성”을 촉구하는 ‘대아
시아주의’를 제창한 바 있고 일본은 이른바 ‘大東亞共榮圈’의 구상을 침략과 병합으로 현실
화시켰으며 이밖에 梁啓超, 한국의 一進會, 일본의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등도 백인들
의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황인종들의 단합과 동맹을 촉구하는 ‘범아시아주의’를 설파한
바 있었다.31) 육당은 이들 아시아주의의 이면에 깔려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욕망을 비
판하고 불함문화라는 공통의 문화적 원형질에 근거한 아시아론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육당의 불함문화론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착실한 고증에 의해 아시아 문화의 공통
요소를 확인한 것이었다. 최근의 동아시아 담론은 유럽연합(E. U.)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
즘이라는 공통의 문화를 기반으로 결성된 것임에 착안하여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의 전제적
시도로서 공유문화의 탐색에 역점을 두고 있는 바32) 육당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근래 활발
히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 문화론 및 이에 근거한 동아시아 공동체론에 대해 선구적 의미
를 지닐 뿐만 아니라 충분한 자양을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6. 結語
이 글에서는 그간의 육당 신화학에 대한 논의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밝히는 데
에 주력했던 반면 실질 내용의 검토에는 다소 소홀했던 점에 주목하여 불함문화론의 전개에
상당 부분 수용된 중국신화의 내용을 검증하고 이를 통해 육당의 중국문화관 및 불함문화론
의 현재적 의미를 탐색하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30) 《불함문화론》, pp.197-198.
31) 아시아론의 제 양상에 대해서는 정문길 등 편, 《동아시아, 문제와 시각》(문학과 지성사, 1995)
의 여러 논고 및 《불함문화론》, pp.197-198의 각주 참조.
32) 동아시아 공유문화의 탐색에 관한 논의는 정재서, <동아시아로 가는 길-한중일 문화유전자지도
제작의 의미와 방안>, 《중국어문학지》(2009), 제31집 참조.
六堂 신화학의 중국신화 수용과 그 문화사적 의미 ― ‘不咸文化論’을 중심으로 / 399
논의의 결과 육당의 중국신화 수용은 약간의 오인이나 비약이 없지는 않았으나 전반적으
로 자료 인용에 문제가 없었고 대단히 전문적인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어서 불함문화론 입론
의 객관적 근거 제시로서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중국신화 수용을 바탕으로
보여준 그의 중국문화관은 일원론을 거부하고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중국문화의 형성을 바
라본 것으로서 오늘날 신화학, 고고학에서 정론이 된 중국문화의 다원적 기원론에 대해 先
見으로서의 지위를 지닌다 할 것이다.
끝으로 불함문화론에 근거한 육당의 아시아 공동체론 역시 근래 풍미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 혹은 동아시아 담론에 대해 통시적 의미를 先取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불함
문화론이 갖고 있는 동이문화 중심이라는 종족주의적 관념, 논리전개상의 문제점 등이 제기
될 수 있으나 이는 일제 치하 대항담론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불함문화론의 불가피한 시대적
한계로 감안할 수 있으며 후학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를 남긴 것이라 하겠다.
육당은 불함문화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중국신화, 일본신화, 만주신화, 몽고신화 등 인
접한 동북아 신화를 비롯 그리스, 게르만 신화 등 서양신화까지 원용하고 있다. 향후 중국신
화 이외의 다른 신화에 까지 검토가 진행되어 육당 신화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실질
내용의 검토 단계에 진입하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논의를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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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六堂崔南善做爲近代的國學大師, 對諸多學問分野很有影響, 特別對韓國神話學的成立貢獻很
大。 其間六堂神話學的硏究致力於闡明其政治, 文化上意義, 反而對檢討實質內涵相對有忽略之感。
在本文裏着目這一點, 試圖檢討展開不咸文化論上採用的多量中國神話, 而通過這個論究, 探
六堂 신화학의 중국신화 수용과 그 문화사적 의미 ― ‘不咸文化論’을 중심으로 / 401
索六堂的中國文化觀及不咸文化論的當代意義。
結果, 雖然他採用中國神話上不無一些誤解, 但大槪引用資料上沒有問題, 而且掌握相當專門
的內容, 提示爲成立不咸文化論的客觀資料上, 沒有遺漏。 就他的中國文化觀而言之, 他拒否一元
論, 而從多元主義的觀點來看中國文化的形成。 這一種觀點對在當今神話學, 考古學上做爲定論
的多元中國文化論有先見的地位。 而且根據不咸文化論的他的亞洲共同體論也對最近風靡的東亞
洲共同體論或東亞洲話語有做爲先聲的地位。
六堂在展開不咸文化論上毋論中國神話, 日本神話, 滿族神話, 蒙古神話等隣接的東北亞神話,
希臘神話, 日耳曼神話等西方神話也援用。 希望向後進行檢討到中國神話以外的他方神話, 以進
入對六堂神話學的深入硏究。
關鍵詞: 不咸文化論, 東夷文化, 太陽崇拜, 多元主義, 東亞洲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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