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불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 김현이 1969년에 [세대] 10월호에 발표한 글로 무협소설에 대한 한국문학 최초의 비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의 30여년이 지난 2001년 예림기획에서 나온 [무협소설이란 무엇인가]가 나오고, 서울대 중문과의 전형준 교수가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2003), [한국무협소설의 작가와 작품](2007) 두 책을 내기 전에는 그랬죠. 당시 주로 읽히던 와룡생, 진청운 류의 무협소설을 대상으로 해서 그 외의 다양한 무협소설 경향, 이를테면 고룡이나 김용의 소설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이후에 무협소설이 이룩한 발전등에 대해서는 조명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가 있습니다만 무협소설을 왜 읽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의 제기와 그것을 한국 중산층 계급의 허무주의가 부정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하는 나름의 해답은 지금 다시 읽어도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도 퍼와서 올립니다. 김현이 이 글을 쓴 이후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무협은 비평의 대상으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최근 들어서 여러 소장학자, 문인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러모로 생각해볼 부분인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도록 하겠습니다.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허무주의의 부정적 표출
무협소설은 기이한 마력을 갖고 있다. 나의 동료중 하나는 무협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전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무협소설을 읽게 되면 딴 일에 전연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되고, 밥맛도 없고, 잠도 못 잘 정도로 기인(奇人)들의 기묘한 세계 속에 빠져들게 되어 자기 자신의 체력과 전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멋있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의 동료들의 상당수는 무협소설의 재미를 인정하는 데 전연 인색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러했다는 것은 전해들은 것이지만, 나의 동료들도 모 일간지에 연재된 무협소설은 서로 신문을 빼앗다시피 다투어 읽었었다. 이 무협소설에 대한 경사는 영화에 있어서 007류의 압도적인 인기와 거의 맞먹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협소설의 무엇이 독자들을 그렇게 끌어당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이러한 의문을 오래 전부터 던져 왔는데 거기에 대한 성찰은 소위 순수한 소설이라고 알려져 온 것들에 대한 성찰과는 다른 각도에서 행해진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나에게 도출시켜주었다.
나 자신이 무협소설을 처음으로 대한 것은 김광주(金光州)의 『정협지(情俠誌)』를 통해서였다. 이 소설은 소위 한국에서 무협소설 붐을 일으키게 한 최초의 서적이다. 『정협지』가 나온 2,3년 후까지 비교적 조용하던 무협소설계는 2년 전의 『군협지(君俠誌)』의 발간과 동아일보 지상에 연재된 『비호(飛虎)』를 통해 급속도로 팽창한다. 김광주는 계속해서 『흑룡전(黑龍傳)』 『호유기(豪遊記)』 『사자후(獅子吼)』 『풍운검(風雲劍)』을 발표하고, 지금은 중앙일보에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고』를 연재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번안소설인데, 무협소설에서 쓰여지는 몇가지 세팅 외에는 거의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리 필체가 다르다. 그와 동시에 무협소설계의 거성이라는 와룡생(臥龍生)의 제작(諸作)들이 연달아 번역된다.
한 두 권짜리의 짧은 소설이 아니라, 8권(『變風防』), 10권(『飛龍』 『飛燕』)등의 대하소설이 계속 번역 제공된다. 번역의 질은 지나칠 정도로 형편없고 줄거리조차도 어떤 경우에는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읽은 바로는 『비룡(飛龍)』 『비연(飛燕)』이 비교적 정확히, 아니 보다 더 옳은 말을 하자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번역되었을 뿐, 딴것들은 거의 읽을 수도 없는 정도이다.
그 이유를 한 젊은 중국 문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화교학교 출신의 우수한 학생들은 해마다 몇 명씩 대만에 유학할 기회를 가진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대만에서 몇 년 공부한 뒤에 귀국하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이 룸펜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짜장면집의 서사 노릇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출판사측에서 번역자로 채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이 번역자들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10원 혹은 20원의 싼 고료를 받고 번역을 하기 때문에 그 질이 형편없게 된다. 싼 고료가 나쁜 번역을 만드는 셈이다. 더구나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명예, 혹은 체면 때문에 힘들여 번역할 필요도 이 번역자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설명을 출판사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가, 보충한다. 이 번역자들의 대부분은 한국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원본을 완역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이 번역하는 것은 대략의 줄거리이며, 그 줄거리에 살을 붙이는 것은 출판사 측이다. 한 사람 혹은 두서너 사람의 윤필가들이 엉성하게 번역된 줄거리에 살을 붙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뒤의 서술이 걸맞지 않은 부분이 이따금씩 생겨난다. 첫 권에서 죽었던 기인이 셋째, 넷째 권에서 갑자기 등장, 맹활약하는 따위의 혼동은 부지기수이며, 비교적 믿을 만한 김광주의 번안소설에서도 서술의 혼란은 많이 눈에 띈다.
이렇게 급조된 무협지들은 5천, 혹은 6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월부 판매된다. 하지만 원가가 거의 들지 않은 책들이기 때문에 심한 경우는 4할의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동대문 시장에서는 보다 더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러한 급조 무협물들은 능력 있는 외판원의 손을 통해 독자들의 손에 신속하게 배급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종류의 독자들이 이 무협소설을 사보는 것일까? 출판업계의 말로는 주로 은행원, 사기업체 회사원, 중소기업주들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협서설을 애독하고 있는 독자는 소위 중산층 - 여기에는 신중간 계급 역시 예외는 아니다. - 인 것이다.
이것은 무협소설의 독자가 박종화의 『삼국지』, 혹은 김동성()의 『수호전』, 혹은 이어령의 여러 저작물의 독자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읽을거리를 요구하고 있는 독자, 그리고 월부를 통해서지만 생활비의 일부를 서적을 구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독자, 즉 중산층의 야담전집 · 궁중 비화 등의 읽을 거리를 다 읽은 다음 무협소설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 중산층의 독자 외에 대서점(貸書店)에서 책을 빌려보는 저 소득층의 독자를 상정 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는 대부분이 만화 가게로 바뀌어졌지만, 아직까지도 상당수의 대서점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한 대서점을 통한 무협서설의 독자는 대단할 것이라고 추정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부산 · 서울 등을 제외한 중소 도시에서는 매우 현저하다. 나 자신이 확인한 것으로는 시골의 대서점에는 무협소설과 오락잡지 외에는 다른 책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매우 고급한 순수소설, 가령 김동리의『무녀도』, 황순원의 『학』 등도 점두(店頭)에 나와 있던 12,3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상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는 것이지만, 대서점을 통한 잠재 독자는 제외한다 하더라도 소위 중산층이 무협소설에 지대한 흥미를 표현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독자 여러분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에게 되풀이하여 행해진 질문이다. 나 자신이 신중한 계급에 속해 있고 나 자신이 무협소설에 상당한 매력을 느낀 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사르트르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그의 『말』속에서 자기 자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물보다도 괴기소설 · 만화 같은 것을 더 즐겨 읽는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나 자신 어려운 학술 서적이나 오래 생각하고 되풀이 해 읽어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고급 소설보다는 기인들의 기묘한 행위, 멋있는 싸움 같은 것에 본능적으로 더 가까움을 느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독서의 가장 큰 이익 중의 하나가 쾌락을 야기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워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설명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이 나에게는 남는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무협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대해서 곰곰 생각한 뒤에 무협소설이 인간 본능의 한 왜곡된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매우 괴상한 생각에 도달한 적도 있었다.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무협소설의 정통적인 세팅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예를 배운 청년 무객(武客)이 천신만고 끝에 원수를 갚고 보니, 그가 곧 무에계의 일대 마두(魔頭) - 악당이라는 말을 무협소설에서는 마두라고 부른다. - 였다라는 것이다.
이 세팅을 더욱 강조시키기 위해 소위 중국 무술계의 정통 9대 문파(門派)에는 주인공이 속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주인공이 9대 문파의 한 파에 소속된다면, 그리고 그 주인공을 끝내 영웅 대협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두 가지의 난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9대 문파 간의 서열 문제이다. 대부분의 무협소설은 소림(少林) · 무당(武當) 양파를 무림의 2대 문파로 인정한다. 만일 주인공이 이 두 문파 중의 어느 한 문파에 소속이라면 나머지 7대 문파는 관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2대 문파 중 딴 문파와의 대립이 미묘해진다. 더욱이 아미 · 청송 · 곤륜 등의 미세한 문파에서 주인공이 나타난다면 문제는 더욱 곤란해진다. 그리고 9대 문파의 서열 문제가 무협소설의 중대한 테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어느 소설에서도 풀려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가능하다면 9대 문파 외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9대 문파의 알력을 다른 마두와의 싸움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는 '나쁜 편'의 선정 문제이다. 주인공이 9대 문파의 어느 한 파에 소속된다면, 다른 문파는 마땅히 나쁜 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무협소설의 논리상 불가능하다. 그 대립은 한 파의 멸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술계의 정통 9대 문파는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좋은 편'으로 치부된다. 특히 소림 · 무당 양파가 그렇다.
주인공은 '반드시' 9대 문파의 어느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소속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해도 표면상으로는 소속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소림파의 비전(秘傳)을 전수받은 서원평(徐元平)이 그렇고, (『군협지』), 곤륜파에서 파문 당한 양몽환의 경우가 그렇다.(『비룡』『비연』)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은 언제든지 9대 문파의 밖에서 행동한다. 그것이 복수라는 테마에 아주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들은 그러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무술을 익히지 않는다. 그들의 스승은 이제는 은퇴한 무예계의 거물이거나, 전연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검성(劍聖)이다. 그들이 배우는 무학(武學) 역시 그들의 스승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기괴하고 기발하다. 김광주는 장풍(掌風) · 지풍(指風) · 각풍(脚風) 등의 기묘한 술법을 창조까지 하고 있다. 보통의 무협소설에서는 '손속'이라고 번역되는 권술(拳術)을 그는 권풍이라는 멋있는 말로 신비화시킴으로써 무협소설을 나관중의 『평요전(平妖傳)』 경지에까지 이끌어간다.
주인공들의 이러한 기묘한 무술은 일상의 좁은 테두리 속에서 항상 억압당한 모든 독자들을 압도한다. 자동소통처럼, 십여 장 거리에 있는 적을 손을 한 번 휘두름으로써 무찌른다거나 경신술이라는 몸 움직이는 무예로써 십여 리 거리를 단숨에 뛰어간다든가 하는 것은 분명히 유쾌한 일에 속한다.
이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무술은 일반적으로 2종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내공(內功)이라고 불리는 진기(眞氣)이고 또 하나는 장풍, 경신술, 어검술(御劍術)등의, 몸을 실제로 움직여 사용하는 외공(外功)이다. 진기는 한방(漢方)에서 말하는 365처(處)의 혈(穴) - 소위 침놓는 자리이다 - 과 임(任) 독(督) 두 곳이 완전히 유통되어야 얻어질 수 있는 내부의 힘이며, 불문(佛門), 특히 소림파의 반야 신공으로 대표된다. 외공은 소위 오행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맥고 있어 수로써 표시된다. 가령 오초검법(五招劍法) · 천강십이겁법(天岡十二劍法) 등이 그렇다. 주인공들은 단숨에 이 모든 것을 익혀 절대적인 위치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두와의 불붙는 듯한 접전을 통해, 그를 돕고자 하는 다른 고수들에게서 점차로 그런 절기(絶技)를 익혀간다. 나에게는 바로 이 점, 한 청년 고수가 대협으로 커나가는 과정이 마치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처세술, 혹은 자기 본능을 억제하는 억제술 비슷하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한 청년 고수가 배우는 무예는 항상 정통적이며, 암기(暗器) 및 독을 쓰지 않는 무예이다. 그러나 그와 대적하게 되는 마두란 대부분이 독약과 암기의 명수이며, 그것들에 한번 걸리기만 하면 몸을 버리기가 일쑤이다. 무협소설에서 몸을 버린다는 것은 무공을 잃는다는 것, 혹은 무예계에서 은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자기의 존재이유를 박탈당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의 신표물(信票物)의 상실로써 상징된다.
정당한 방법으로 대결하여 - 검, 내공, 경신술 등의 대결을 말한다 - 마두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원수를 갚기를 희망하는 청년 고수에게는 이중의 의미를 띤다. 복수의 성공과 사회에서의 인정이 그것이다. 그는 그 마두를 처치함으로써 자기 내부의 욕망(증오)을 외부로 발산, 승화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그는 정당한 자기 위치를 확보한다.
그 마두는 때때로 그와 대결하는 청년 고수의 본능과도 같아 보인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절기(絶技)도 악랄하지만 특히 그가 사용하는 독이야말로 인간 본능을 최대한도로 자극시키는 흥분제이기 때문이다. 아무 여자와 성교를 가능하게 하여 체액을 유출시킨 뒤에, 전신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것이다.(『사자후』 『비룡』 『쌍봉기』 등등에서 그것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난다.)
동양처럼 체면과 정조를 중요시 하는 지역에서는 결혼의 약속 없는 성교란 파렴치의 극치이다. 무술의 대결에서 상대방이 여자인 경우 젖가슴과 하복부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의 약속 없는 성교는 본능의 한 극점이다. 마두의 독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있다. 상대방을 죽이는 것 보다 그의 체면과 의리를 엉망으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다시는 상대방을 세상에서 활보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마두가 쓰는 독의 효능이다.
이 독에 쓰러진다는 것은 그러므로 본능의 유혹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마두를 처치한다는 것은 자기 본능의 유혹, 특히 성적인 유혹을 이겨낸 것을 말한다. 마두는 밖에 있지만,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자후』의 마두가 무영객(無影客)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쌍봉기』의 마두가 용부인(容夫人)이라는 여자인 것은 이런 관점에서 관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두의 독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보이지 않는(=無影)' 욕망이며, 그것은 여자를 향한 성욕이다.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주인공은 사회 기성 윤리의 견고한 성 속에 편안히 안주할 수 있게 되는 대가를 얻는 것이다.
마두의 독이 성욕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마두가 흔히 거처하고 있는 산속 깊은 동굴, 혹은 묘나 지하의 석부(石府)는 회의와 불안의 표상이다. 『군협지』의 고독지묘(孤獨之墓), 『쌍봉기』의 지하석부(地下石府), 『호유기』의 비밀장소(秘密場所)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 어두컴컴하고, 축축하고, 기괴하고,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미로는 청년 고수의 내면의 불안과 회의, 초조를 그대로 표상한다. 주인공인 청년고수는 마두를 찾아 묘나 동굴로 뛰어드는 것이지만 그 속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불안과 회의에 휩싸인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에서 무엇이 자기를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불안감, 과연 목적지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초조감, 이러게 헤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회의가 시간시간 그를 죄어온다. 도중에 쓰러진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환영 앞에 쓰러지는 것과 다름없다. 불안, 초조, 회의는 모두 그가 만들어낸 그의 환영이기 때문이다. 『호유기』의 주인공이 심법(心法)을 극복하는데 제일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는 것, 그의 스승마저도 그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를 천운에 맡겨버렸다는 것이 이 점에서 본다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묘나 동굴에서 '보물'을 취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심법을 이겨낸 후의 평안함과 밀접히 상응한다.
그렇지 못하고 묘에서 쓰러진 청년 고수를 우리는 『군협지』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주인공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비장감은 그의 불안을 그가 극복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차탄(嗟歎)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의 복수담은 그들이 사회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과장하여' 내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무술은 일상인이 배우는 학문, 처세술이며, 그들의 상대인 마두의 독은 자기 내부의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헤매는 미로는 일상인의 불안과 초조이다. 이러한 분석을 행함으로써 나는 무협소설이 일상인의 본능을 왜곡하여 - 상상력이란 항상 왜곡하여 사실을 내보여주기 때문이다 - 소설의 세계를 꾸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나는 또 다른 하나의 의문에 부딪혔다. 한 인간 이기성의 윤리관에 종속되어 편안히 일상성 속에 안주하는 것을 그린 무협소설이 중산층의 대단한 애호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의미를 띠는 것인가, 일상인이 일상인이 되는 과정을 과장하여 그린 무협소설은 '열광적인'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데, 일상인의 왜소함을 그리는 자연주의 이후의 현대소설은 왜 그만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가. 무협소설이 나에게 제기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밝혀진다면 중산층의 일인인 나 자신의 정신구조 역시 밝혀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까지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오랜 성찰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한국적 허무주의 = 비개성적 허무주의의 음험한 발로와 맞부딪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하나는 무협소설은 "왜 예술이 아닌가?" 하는 측면이고, 또 하나는 무협소설은 "왜 비개성적 허무주주의 발로인가?" 하는 측면이다. 뒤에 무협소설과 그 다른 점이 밝혀지겠지만 원초적인 면에서 관찰한다면, 한 개인이 일상인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소설에는 교양소설이라고 불리는 한 유형이 있다. 한 개인의 의식이 어린,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자기 주위의 여러 사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상태로 변모하는 과정을 교양소설은 즐겨 그린다. 교양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개인이란 평범한 일상인이다. 그 일상인은 어떤 중요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자기 세계의 방향을 설정한다. 프랑스의 신비평가들의 표현을 빌면 한 원초적인 경험이 그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 경험은 사회의 조그마한 축소판인 가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개인이든 자기를 사회의 한 일원이라고 느끼는 계기를 갖는데, 그 계기가 그를 '어느 인간형'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 계기는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화』나 헤세의 『유리알 유희』 혹은 아주 짧은 단편이지만 매우 감동적인 『시인』의 주인공들처럼 예술의 세계로 개인을 몰고 가기도 하며 사르트르의 『어느 지도자의 유년시절』의 주인공처럼 '개새끼'가 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계기의 어느 것도 일회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어느 인물이든 그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으로 그 계기와 맞부딪치며, 자신의 전부를 그것에 것었다는 뜻에서 전면적이지만 그것으로 그의 세계관의 주축이 이루어 진다는 점에서 일회적이다. 그 뒤의 그의 모든 행적은 그 계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이 준 인상을 확실히 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계기의 의미는 끝내 논리화시키지 못한다. 그 계기는 그가 그것을 논리화시키면 시킬수록 미궁 속에 빠져들고, 개념화시키면 시킬수록 환상처럼 되어 버린다.
말을 바꾸면 인생의 의미는 영영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을 보는 독자들은 그의 부단한 움직임을 통해 생의 가능한 여러길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보여준 인생을 통해 자신의 생을 반성하면서,독자들은 일상성 속에 빠져들어 판단의 기준을 습관에 의거하게 된 자신의 일면을 알게 되며, 『유리알 유희』를 읽으며, 가장 지적인 세계가 가지는 신비성과 모호성을 통해 자기 정신의 미숙을 ,세속성을 깨닫는다.
교양소설은 한 개인의 형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그 세계 속으로 이끌고 간다. 그렇지만 독자 자신으로는 그 세계란 무섭고 불편한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는 일상의 편안함마저 불편한 것으로 느껴지며, 쾌락은 증오와 혐오로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라는 발음을 무의식적으로 해대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말에 주의를 돌리는 순간, '어''머''니'라는 세 음소의 결합이 매우 불편하고 우스꽝스럽게 돌변하는 것과도 같다.
예술이란 그런 의미에서 자각이며 고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여러 가능성을 하나하나 확인해주며, 그 중의 어느 하나만을 택한 것에 대해 질타한다. 예술은 순간적인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적인 자기 각성이다. 교양소설이 무협소설에 비해 인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우리에게 내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들이 내보여주는 것은 기존 윤리의 확대이며, 성공한 인간의 확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편안한 것을 희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면에 정착하여 거기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을 때에 쉽게 얻어진다. 무협소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인데, 그러기 위해 무협소설은 기존의 윤리를 강조하며, '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회의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지나치게 크게 확대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행위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오히려 무관심하다. 그의 확대된 행위 때문에 모든 다른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은 그의 확대된 행위의 커다람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다. 퀴즈 문제로서 흔히 사용되는 것에, 보통의 사이즈보다 몇 배 크기로 어떤 물건을 확대해 놓은 뒤에 그 원형을 밝히는 것이 있다. 흔히 우리는 그 사이즈의 크기에 놀라 그 원형을 식별해 내기에 곤혹감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은 정의, 의리......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물 대신 정의, 의리 등의 추상적 개념만 남게 된다.
가령, 한 주인공이 스승의 병을 고칠 약을 구하러 떠난다. 기일은 3일, 그러나 갈 길은 3일이 넘어야 왕래할 수 일을 만큼 멀다. 그렇지만 그 주인공이 행하는 행위란 무엇인가? 죽을 지경에 처한 약자를 구하고 그를 따라 악인의 소굴로 잠입하여 체포되고...... 그리고 그 악인을 처치한다. 스승은? 주인공은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다. 독자 역시 주인공의 호쾌한 행동에 눌려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자기의 완전한 소멸이다.
무협소설은 추상적 개념을 확대하여 인간을 없애고, 독자의 의식마저 마취시킨다. 나는 위에서 예술은 고문이며 자기 확인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무협소설은 오히려 무든 것의 소멸이다. 무협소설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상토화한 구조이며, 독자는 미리 반성하는 것을 포기하고, 편안히 그 속에 몇 시간 들어갔다 나올 뿐이다. 그의 몸은 그 구조 속에 들어갈 때나 거기에서 나온 뒤나 아무런 흔적도 갖지 않는다. 무협소설은 고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협소설이 '좋다' '어울리지 않는다' ' 문체가 엉망이다'라는 비판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이란 그것이 고문하지 않는다는 알리바이 때문이다. 고문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사회인으로 안주하게 되는 것이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의 한 염원이다. 반대로 교양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인으로 안주하기까지의 과정을 행동한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생의 의미란 미리 주어져 있으며,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에게는 존재의 무의미성, 존재의 다면성이란 없다. 생의 의미는 단 하나이며 그들은 그것을 위해 싸운다.
교양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존재의 무의미함, 존재의 다면성을 깊이 알고 있다. 다만 어느 계기를 통해 그 한 면을 택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주저하고 더듬거리고 모색한다. 예술이 이런 모색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면 무협소설은 분명 예술이 아니다.
다음에 문제되는 것은 왜 무협소설은 비개성적 허무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위에서 나는 무협소설의 독자들이 중산층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 점은 무협소설이 갖는 비개성적 허무주의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요건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인 예에 있어서 중산층은 한 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짓는다. 상위층은 중산층이 만든 세계관과는 초연한 위치에 서 있으려고 애를 쓰고, 하층민은, 도대체 아무런 것도 생각지 않는다. (몽테를랑의 멋있는 표현을 빌면 대부르조아지는 관대를 그 속성으로 삼고 있고 하층민은 돈에 대한 집착을 그 속성으로 삼고 있다.) 그 사이에 끼어 그 두 층을 어느 정도 융합시키는 역할을 중산층은 맡고 있다. 중산층의 주인은 대부르조아지를 부러워하고 하층민을 멸시하지만, 자기들이 자기 시대라는 느낌을 항상 갖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달로 중산층은 점차로 영세민화한다. 자기 시대의 중추적 세력이라는 자각은 점차 대부르조아지에 대한 복종과 공포로 뒤바뀐다. 전통적인 중산층은 고용인으로 타락하든가 아니면 심한 좌절감을 안고 수공업 체제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개인의 무력감, 개인의 무의미성은 점차로 모든 중산층을 파고든다. 봉급생활자의 경우,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도 옛날처럼 '인간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봉급 생활자들은 '주인'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며 주인과 인간적인 우정관계를 맺을 엄두조차 못 낸다. 비개성적으로 된 것이다. 영세 수공업자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게, 자기가 왜 망해가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에 봉급 생활자와 같은 불안, 초조를 느낀다. 그 불안, 초조는 그를 무력하게 만들고, 그의 대인 관계를 활기 없게 만든다. 중산층의 이러한 비개성화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공업 사회에서 더욱 심해진다. 미국의 중산층에 절대적인 인기를 보유하고 이는 '미키 마우스'는 이러한 경향의 한 표현이다. 그 만화 영화의 주제의 하나는 언제나 작은 것이 엄청나게 큰 것에 박해 받는 위기에 봉착하는데, 그때마다 우연에 의해 그 위기를 벗어나며, 어떤 대는 그 큰 것을 때려눕히기까지 한다는 유의, 작은 것을 살아남음(survivre)이다. 그것은 물론 중산층이 갖고 있는 비굴감과 공포의 한 표현이다. 그 비굴감, 공포감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 추종의 원인이 된다. 중산층이 내 보이는 비개성적 추종은 프롬에 의해 "자동 인형적 순응"이라는 충격적인 말로 표현된다.
한국의 경우, 구미 중산층의 이러한 특성은 더욱 비극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남북의 분열, 이데올로기적인 대치, 농촌 경제와 도시 경제의 엄청난 차이, 과거의 윤리관과는 다른 새로운 윤리관의 급작스런 성장, 매스 미디어의 급속한 팽창 등은 중산층의 판단력을 더욱 혼란 시키고 사태의 위급함에서 벗어나겠다는 도피감만을 조장시킨다.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 어떤 뚜렷한 비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의 중산층의 '안정'에 대한 희망은 매우 커지고,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자기 나름으로 판단하겠다는 판단력이 흐려진다. 더구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많은 사고의 흔적이 발표를 보류 당한다.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 혼란을 이용하여 한국의 중산층과 서구의 중산층을 더욱 혼동시켜 한국의 중산층으로 하여금 서구의 중산층의 충실한 모방자로 변모하게 한다. 유행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하고, 지위에 대해 악착같은 반응을 보이게 한 것은 매스 미디어의 발달에 그 상당량을 빚지고 있다.
중산층의 이 비개성적 성격은 프롬의 분석에 따르며, 파괴적인 충동과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낳는다. 파괴적인 충동이란 자기 자신 밖의 외계를 완전히 파괴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만이 생존해 남겠다는 충동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말살하고 싶어하는 충동이다. 이 충동의 부정적 측면이 권위주의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임으로써 자기 외의, 자기와 비교될 수 있는 대상에게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 태도이다. 이 두 태도를 프롬은 '사도 - 매저키즘적 태도'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두 태도가 한 동전의 안팎이라고 설명한다. 중산층의 무협소설에 대한 기호는 이 태도의 표현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독자들은 무협소설 속에 나오는 기인, 고수들의 상투적인 틀 속에 안주함으로써 현대 소설이 애써 그들을 끌고 가서 그들과 대면시키려 하는 그들의 동료들로부터 안전하게 도피한다. 청년 고수와 함께 행동하는 한, 읽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긋지긋한 상관, 동료, 후배에게서 벗어나 자기 부정의 세계를 향유할 수 있다. 동시에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고수에 대한 찬탄을 통해 독자들은 그들의 권위주의를 만족시킨다.
무협소설을 통해 중산층은 이유 모를 불안감으로 휩싸여 있는 그들의 세계에서 도피하여 동면의 시간을 즐긴다. 그 동면의 시간 동안 그들은 아무런 고문을 당함이 없이 자신의 적을 무찌르고 자신의 동료들로부터 빼내며, 지배하는 자의 쾌감을 만끽한다. 그것은 환각제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세계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다시 일상성의 어려운 세계와 부딪치며, 그 세계가 전해주는 이유 없는 불안감, 초조감을 맛본다. 그렇다면 이 일상성의 비개성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계속 무협을 읽을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답답한 질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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