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 전쟁과 지식의 보급
2. 규범으로서의 전쟁상식 확산과, 기업과 당국의 유착
3. 복수(複數)의 전쟁상식의 현실화 :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자본가의 생존
4. 나가며
[국문초록]
이 글은 ‘총력전’에 따른 경제 변동을 중심으로 당국의 지식 보급과 전쟁상식이 구축되는
국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군비경쟁은 승전을 위한 생산력의 끝없는 확대를 함의하기 때문에
전쟁은 경제구조의 재편과 생산관계의 변동을 야기할 수 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쟁지
식의 보급이 중요하게 되는데, 식민지민이 납득할 정도의 지식을 완벽히 확보한 식민본국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시에 적합한 지식이 곧바로 산출되는 것도 아니다. ‘합리적’인 전
쟁상식이 구축되는 데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전황 변화에 따른 당국의 지식 보급에
주목해야 한다. 전시체제로의 편입은 평상시 상식과의 급격한 단절과 새로운 전쟁상식으로의
인식론적 전환을 강제했다. 이러한 변화가 근본적으로 조선에 받아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황(戰況)’이라는 현실이 부인할 수 없는 상황논리로써 전쟁상식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여
기서 지배권력이 전시 이슈를 창출하고 공론화한 지식과 담론은 가혹한 경제적 수탈을 은폐
하고 지속되어야 할 전시 생산관계의 붕괴를 막는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한 지식의 보급과 경제정책의 변동의 상관성에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렇다면 모든 국민의 희생을 요구한 전쟁은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어떻게 재편했는가. 지주와
촌민의 간극은 조금 줄었다. 전반적으로 전비 부담의 형평성을 둘러싼 계급 간 갈등도 크게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언론의 효과적 통제와 대다수의 삶이 빈곤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방증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공론화되지 않거나 가시화 되지 않
은 곳에서 김성수와 같은 기업가는 관치금융, 정경유착의 혜택을 받고 대재벌로 성장했다.
해방 이후 노동자들이 공장의 자치경영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현실적 모순이 표출된 일면이
겠다. 요컨대 이 글은 시국에 따른 경제 변동을 중심으로 지식의 보급과 상식화 국면을 분석
하여 전시 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전시체제의 성격을 구명(究明)하고자 했다. 이때 문학의
현실 재현은 전시 경제형 인간으로의 전환 과정과 급변하는 경제현실의 국면을 함의할 수밖
에 없다. 따라서 당시 문학은 전시 경제논리의 작동과 그것의 일반화와 상식화 과정에서 열
악해져가는 경제상황, 재구조화되는 불평등의 국면, 또 그런 현실을 견뎌내야 했던 조선인의
삶을 제한적이지만 파악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주제어] 최재서, 박태원, 이태준, 총후부인, 군국의 어머니, 생명정치, 최정희, 식민지 자
본가, 김송, 지식문화사, 김성수, 안회남, 최인욱, 김태진, 이북명
1. 전쟁과 지식의 보급
이 글은 ‘총력전’1)에 따른 경제 변동을 중심으로 당국의 지식 보급과 ‘전
쟁상식’이2) 구축되는 국면을 분석하는 게 일차적 목표이다. 전쟁은 인류의
1) 이 글에는 ‘총력전, 독물(讀物), 결전, 내지’ 등 당시 일본인이 썼던 용어를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일본의 논리와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의 명확성, 당대 언어의 뉘앙스와 실감, 경제
상황의 변동, 역사성을 고려한 때문이다. 또한 주지하듯, ‘총력전’은 일본에서 논의된 용어이지만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독일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군 사령관 루덴도
르프는 ��총력전��에서 “군대만으로 수행하는 전쟁 시대는 끝났으며 근대전은 무력전과 동시에 국민
총력을 결집시킨 경제전 외교전이며, 적을 선전하고 위무하여 교란시키는 사상전”이라고 했다. 또
한 1941년 총력전연구소의 이무라 소장은 「극비 총력전 요강」에서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거나
또는 전쟁을 예상할 때 그들을 굴복시키거나 또는 전투 의욕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일, 바꿔 말하자
면 국방을 위한 고도의 국가활동이 국가총력전”이라고 하면서 “무력전, 경제전, 사상전”을 강조했
다. 이노세 나오키, 박연정 옮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2011, 45․49쪽.
2) 상식은 ‘common sense’의 번역어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오감의 지각을 구분하는 정신작용(super
sense)을 상식으로 간주한 이래 공통감각(한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와 믿음), 비판받
을 수 없는 자명한 사실,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능력 및 지식, 기본적인 판단(분별)능력,
경험지식 등 다양한 의미로 정의되어 왔다. 이처럼 상식은 ‘감각+기본지식+경험+윤리’가 중첩되어
있는 개념으로서 앎의 한 형식이다. 여기서 ‘앎’이란 엘리트지식인이 흔히 독점한다고 상상되는 (고
급의 특권적) ‘지식’이 아니라 모든 인민people이 지적 활동 및 지각(知覺)의 주체로 참여하는 인식
행위이자 그 산출물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전쟁지식’이 단순한 정보, 소식 및 개별적 지침의 성격을 갖는다면, ‘전쟁상식’
은 전쟁 정보와 전시체험, ‘결전생활’의 도덕, 규범으로 요구되는 (생활)도덕과 지식 등을 포괄하는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61
비극이지만 사회관계와 체제의 극심한 변동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당대 사회
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제국 간 전쟁은 국력의 비교 우위를 가
늠하는 체제대결의 장이다. 이때 제국은 식민지를 점유한 탓에 내부적으로
반전 봉기 및 혁명을 방지하고 체제의 결속을 꾀해야 했다. 식민모국은 식민
지를 전쟁에 동원하면서도 전쟁수행의 지속성과 체제안정성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다. 따라서 전쟁은 동원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사회진단과 전
쟁 비전을 수반한다. 여기서 전시 플랜과 전쟁의 정당성 확립 등 지배권력의
정치력이 발휘된다. 이 때문에 당국의 선전 내용과 그 효과가 중요하다.
이 시기 기존 연구는 전시 동원과 황민화를 위한 주체 구성 및 정체성을
둘러싼 주요 담론 구명(究明)에 집중되어 왔다.3) 하지만 엘리트 및 당국이
생산한 담론 연구는 그 담론이 기층 인민에게 얼마나 어떻게 퍼져나가는지에
관해서는 미흡했다. 당대 주요 담론이 곧바로 인민에게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엘리트 및 당국이 생산한 담론과,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것으로써 ‘전시 황국신민’이 갖춰야할 도덕적 앎의 형식이자 ‘규범으로서의 전쟁상식’을 함의한다.
전사회구성원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전쟁 하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인민은 국가가 유포한 ‘전쟁상식’
을 습득해야 하는 ‘앎의 주체’이기도 했다. 이 경우 ‘전쟁상식’은 인민의 ‘앎’이 된다. 비상식적 사회
구성원은 비국민이 된다. 그러나 상식이 체험을 포괄하듯, 전시 체험 그 자체가 인민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점에서 인민에 의해 재구성된 ‘전쟁상식’은 일본 당국의 ‘전쟁상식’과 균열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전쟁상식’은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지배-종속의 단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엘리트지식인
의 범주를 넘어서 모든 인민의 ‘앎’과 생활, 아래로부터의 대응을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고려 지점이 될 수 있겠다. 기존 식민지 조선의 상식 연구로는 이행선, 「1920년대 초중반 상식담론
과 상식운동 (1)」, ��상허학보�� 43집, 상허학회, 2015.2; 이행선, 「식민지 조선의 경제공황과 경제상
식」, ��한국민족문화�� 54집,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5.2가 있다.
3) 친일/반일, 협력/저항의 이분법적 연구의 극복을 토대로 한 이 시기 연구로는 포스트콜로니얼 이론
을 도입해 유동적이고 혼종적인 주체의 복잡한 양가성에 주목한 윤대석의 연구가 있고, ‘동양론’과
의사-제국주체의 욕망을 결부지어 식민지 지식인의 주체 형성과정을 분석한 정종현의 연구가 있
다. 또한 전쟁과 함께 야기된 지구적 지정학적 변동과 조응하는 당시 전통 담론을 통해 세계 및
주체 인식의 구조와 성격을 분석한 차승기의 연구가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 질서와 조선 로컬리티
를 둘러싼 공간 인식과 경계감각을 파악하기 위해 동아지아 지역주의 담론과 조선 로컬리티 담론
을 고찰한 오태영의 논문이 있다. 여기서 전자는 주체 구성 논의, 후자는 세계체제 변동에 따른
인식의 변화에 집중한 연구임이 파악되는데, 이들 연구는 결국 당대 주요 담론과 결부된 정체성
연구로 설명될 수 있다. 국문학 연구의 폭을 확장한 이들 연구는 주요 담론을 매개로 당대 사상사,
지성사, 정치사를 구명(究明)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윤대석, 「1940년대 ‘국민문학’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6; 정종현, ��동양론과 식민지 조선문학��, 창비, 2011; 차승기, ��반근대적 상상력의
임계들��, 푸른역사, 2009; 오태영, ��오이디푸스의 눈��, 소명, 2016.
362 한국학연구 제43집
요구되는 ‘앎’은 다를 수 있다. 때문에 위로부터 유포되는 담론이 기층 인민
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엘리트의 담론만으로
는 당대 일상생활의 영역을 포괄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총력전기 인민의
생활사와 관련된 지식 연구의 부족을 보여준다.
엘리트의 정체성과 지식을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당대 ‘앎’을 둘러싼 당국
과 인민의 관계, 인민들의 생활세계에 접근하기 어렵다. 당국의 지배와 지식
이 어떻게 기층에서 상호작용하고 현실적 지배력과 효과를 갖는지에 대한 고
민이 필요하다. 총력전기가 전시 총동원체제라고 했을 때, 동원의 기반은 강
제명령이나 전시 정회제와 같은 조직만이 아니다. 전쟁으로 야기된 사회갈등
과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동원의 명분이 되는 지식이 중요하다. 그 지
식은 물적/인적 희생과 밀접하다는 점에서 당국의 구체적 전시 플랜과 조선
인의 실재적 삶의 관계를 고려할 때, 경제적 현실과 지식의 상관성을 구체화
해야 전시의 삶의 생활사이자 총체사 파악에 일조할 수 있다. 전시 중 조선
인은 직접적인 동원과 물자수탈을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했다. 이 작업을 효
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당국의 수단을 파악할 필요가 있겠는데, 필자는 조
선인에게 시국에 맞춰 구체적인 지식 및 지침(서)을 생산하고 주입해하고자
노력한 당국의 조치에 주목했다.
당대 미디어는 군사정보, 시국해설, 가정상식, 전쟁 명분과 정당성, 전쟁
비전, 전쟁 수행을 위한 황민의 자세, 전쟁무기, 전쟁의 역사, 방공방첩, 국민
보건 등을 전쟁상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팔굉일우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같은 류의 선전은 전통과 역사가 다른 조선인의 공감
을 이끌어낼 만한 지식은 아니었다. 애초에 식민지민이 납득할 정도의 지식
을 완벽히 확보한 식민본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시에 적합한 지식이 곧바
로 산출되는 것도 아니다. ‘합리적’인 전쟁상식이 끊임없이 재/구축되는 데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전황 변화에 따른 당국의 지식 보급에 주목해
야 한다. 그런데 승전을 위한 전쟁지식은 일본당국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
일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고 보급하여 조선인이 전쟁을 학습하고 전시태세를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63
강화하는 수준에4) 머무르지 않았다. 생산력강화 중심의 철저한 통제경제는
전시경제의 현실을 실제적으로 체감하게 하며 기존의 경제생활과 경제관념
의 전면적 변화를 강제한다. 군비경쟁은 승전을 위한 생산력의 끝없는 확대
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쟁은 경제구조의 재편과 생산관계의 변동을 야기할 수
있다. 당국은 식민지민을 ‘제국국민’으로 격상하고 애국심을 확인하려 할 뿐
만 아니라 통제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유
도했다. 조선인은 황민화 문제를 넘어서 생활관념을 바꿔야 했다. 따라서 조
선인이 총후국민으로서 행해야 할 의무 중에서도 당국의 경제지침을 준수하
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여기서 개별적으로만 보이던 당국의 지식
들이 실상은 경제와 큰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국의 지침화한 지식은 곧 수탈을 함의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
화 및 단절이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당국의 지식을 정당화해
줄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전시체제로의 편입은 평상시 상식과의 급격한 단
절과 새로운 전쟁상식으로의 인식론적 전환을 강제했다. 군국주의와 반개인
주의․반민주주의․반자본주의, 공영권 내 분업구조의 결합이 전체주의국가
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주의적 생활방식이 부정되고 재화의 전시 공
공재로의 전환, 전시 공공성 관념의 확립이 새로운 전시공동체의 가치가 되
었다. 이러한 변화가 근본적으로 조선에 받아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황(戰
況)’이라는 현실이 부인할 수 없는 상황논리로써 당대인을 지배했기 때문이
다. 당국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대내 안정과 국민의 지지, 전쟁물자의 효과
적 동원의 정당성은 ‘전쟁’ 그 자체에 있었다. 전시에 위배되는 말과 행동을
한 사람은 비국민이었다. 당국의 (경제) 지침 및 지식이 ‘전시’라는 상황논리
와 결합하면서 조선인의 반발은 약화된 것이다. 이는 역으로 그 결합이 순조
롭게 진행되었을지 묻게 한다.
4) 전쟁 관련 각종 정보가 총력전기 내내 지식의 형태로 제공되었다. 외국전쟁의 사례 통해 전쟁의
실체를 알려주는 수준의 전쟁지식도 다수 있었다.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조선인에게 전쟁을
환기하는 작업이겠다. 일례로 「소년지식-전쟁난 구라파에서 신문전보는 몇 시간에 오는가」, ��조
선일보��, 1939.09.17, 호외 2쪽.
364 한국학연구 제43집
원래 국가의 명운과 국민의 생명, 재산의 안전을 좌우하는 전쟁에서 국가
의 전시 지침과 그에 대한 구성원의 협조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개인은 국가가 어떤 혜택을 주지 않으면 쉽사리 움
직이지 않는다.5) 특히 식민지민은 식민모국의 전쟁을 ‘우리’의 전쟁으로 인
식하지 않을 경향이 높다. 그래서 전시의 지배권력은 죽음의 공포와 패전의
불안뿐 아니라 경제적 이해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다. 만주사변을 경험한
조선인은 중일전쟁에서 또 한 번의 전쟁특수를 기대했다. 이를 배경으로 당
국은 조선인의 '애국심'과 경제적 협력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전쟁특수와 무
관한 다수의 조선인은 경제적 불평등과 절대적 빈곤에 처해지게 된다. 이들
에게는 일본의 패전이 ‘우리’의 공멸(共滅)이라는 논리가 작동해야 했다. 이
에 따라 지배권력이 전시 지침과 의무를 창출하여 공론화한 지식은 가혹한
경제적 수탈을 정당화 하고 지속되어야 할 전시 생산관계의 붕괴를 막는 전
략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점을 유념하며 이 글은 중일전쟁과 함께 나타난 당국의 각종 지침
및 지식을 사상사나 기타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경제’의 문제와 결부지어
전쟁상식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총력전기를 해석하고자 했다. 이는 일본 당국
이 유포한 지식을 민족(일본인-되기)이나, 고급 세계인식(교토학파), 동양론
등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전시 일본은 조선인을 어떻게 살 수 있게 하는
가’ 하는 생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총력전과 결전생활’의 문제에
서 경제와 전쟁상식을 결부시킬 때, 이 글이 전쟁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
을 포괄하는 전쟁상식을 논한 이유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첫째 조선인의 외면을 받았을 당국의 지식 및 지침이 전쟁이 지속되고 전
황이 변동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시간이 소요된다. 전쟁 방침과 그 하
달이 일반화되고 지식이 축적되며 상식화되는 과정과 수탈의 정도를 파악하
는 데 전쟁지식보다는 전쟁상식이 더 타당하다. 가령 ��신생활의 상식보고��는
5) 참고로, 나치를 지지한 독일 민간인은 성공할 기회나 돈의 혜택이 없으면 지배권력이 독재정치를
하든 민주주의를 하든 체제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고 진술했다. 밀턴 마이어, 박중서 옮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갈라파고스, 2014, 97쪽.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65
1944년에야 출간되지만 그와 유사한 내용들은 전쟁 초기부터 다양한 이름의
‘~란’에서 다뤄졌다. 둘째 당국의 지식에는 일본의 정신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지식은 당국에 의해 황국신민이 당연히 갖춰야할 상식이자 국민윤
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감각, 기본지식, 경험, 윤리’가 중첩된 상식
common sense이 황국신민의 지식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전쟁지식보다 적절
하다. 셋째 상식의 속성에서 ‘경험’이 중요하다. 일본 당국의 입장에서 전쟁
상식은 일본인의 국민윤리였지만 그것이 차별받는 조선인의 그것과 꼭 동일
한 것은 아니다. 전시생활의 경험을 통한 ‘전쟁상식’의 체득과 그 실체는 당
국이 보급한 전쟁상식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당국의 지식에서 오류
가 발견되고 그 허상이 드러나고 만다. 따라서 전쟁상식은 당국과 조선인의
균열을 포착할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넷째 전쟁지식을 강조할 경우 기
존의 연구처럼 방공지식, 총후부인, 시국 지식, 전쟁무기 지식 등을 개별적으
로 접근하는 연구방식을 극복하기 어렵다. 당국의 지식 산출의 핵심 동인이
분석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필자는 ‘경제’에 주목했다. 따라서 당국의 지식
을 포괄하는 전쟁상식과 경제를 결부 짓는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주지하듯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은 일본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병참기지
가 됐다. 식민모국은 전쟁지식을 만들어 주입하고 전황을 알려 식민지민의
지원을 이끌어내려고 힘썼다. 이런 지식은 당국의 입장에서는 ‘국민’이 당연
히 지녀야할 규범이기도 했다. 전쟁상식이라는 윤리/논리가 현실 전시경제를
운용하는 당국의 주요한 원리였던 셈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국에 따른 경제
변동을 중심으로 지식의 보급과 상식화 국면을 분석하여 조선인의 삶에 다가
서는 데, 그중에서도 전시 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전시체제의 성격을 구명
(究明)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전에도 농업공황과 경기불황이 있었지만
총력전기는 조선인이 극심한 경제적 착취를 당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과
정에서 지식의 존재방식도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2장에서는 총력전기 전반에 걸쳐 보급된 서적과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전쟁지식의 출현과 상식화 과정을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고찰한다. 이
366 한국학연구 제43집
는 방공지식, 총후부인의 (가정)지식, 전쟁무기 지식, 시국 지식 등을 분절하
는 개별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전시경제의 문제 하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전쟁수행의 주요 주체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당국은 시국의 변화에 맞춰 동원의 대상을 호명하며 관련 지
식을 유포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당국의 지식 보급에 일조하기도 했던 문
학을 통해 전쟁상식의 형성 속에서도 그것과 균열하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
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간접적이지만 인민의 세계와 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 지식사회사 연구는 총력전기의 총체사, 총체적 경험의 복원을 궁극
적으로 지향한다.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자료는 (1) 기관지 및 잡지류와
정책자료, (2) 문학작품, (3) 개인일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미디어에서
공적으로 표현되고 상호영향관계를 맺은 것은 일기를 제외한 (1), (2)이기 때
문에 2장에서 (1)을, 3장에서 (2)문학을 배치했다. 여기서 다룰 문학작품들은
조선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는 1942년 중반 이후의 ‘국민문학’적 경향의 작품
으로 설정했다. 국책에 협력한 문학 역시 성전(聖戰)의 명분에 가려진 식민
지민의 경제적 현실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의 경제여건과 당국의
전쟁상식의 괴리에서 발생되는 문학적 변용, 의미의 왜곡이 전시 조선인의
삶과 당대 인식을 복원하고 당국의 지식의 실효성을 분석하는데 제한적이지
만 기여하겠다. 요컨대 이 글은 일상에서 전쟁 상황에 따른 동원과 사회경제
적 불평등을 호도하기 위한 지식 보급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맥락을 분석하여
총력전기 당국과 기업 및 지주, 인민의 관계가 어떻게 재편되는지 구명(究明)
하고 전쟁상식의 존재방식과 실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2. 규범으로서의 전쟁상식 확산과, 기업과 당국의 유착
전쟁은 중국의 공격 때문에 일어났으며 일본의 목적은 비참한 중국 4억만 민중
을 구하여 동양평화와 전세계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가 자국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67
의 영토가 아닌데도 일본이 빼앗은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다. 하지만 만주 인민은
일본 밑에서 훨씬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이 전쟁을 확장하고 “장기
항일을 외치면서 북지사변이 지나사변”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이다. 이런 시국에
조선인은 “지식이 부족”하여 러시아가 일본에 대항을 할 것이며 영미가 일본을
공격해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 조선인은 ‘병합’ 이후
일본 덕에 조선의 농상공업과 경찰, 위생, 교육, 산업 등이 향상 된 것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조선인 역시 일본국민이 되어 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조선인은 아직
병역의무는 없으나 내선일체를 실천해야 한다. 특히 가정부인은 안으로 소비절약,
밖으로 애국단체에 들어가 부인의 의무를 착실히 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유지들의
발기로 애국금차회가 생길 것이다. 애국헌금과 위문대 등으로 국가의 은혜에 감사
하는 것은 총후국민의 의무다.6)
인용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전쟁 원인은 중국이다. (2) 만
주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며 일본 하에서 만주인민은 행복하다. (3)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없다. (4) 조선은 일본 덕분에 발전해 왔다. (5) 조선인도 일본
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6) 국가의 은혜에 대한 부인의 보은은 의무이다. 이
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이 대대적으로 발간한 소책자 ��지나사변과
조선인의 각오��(1937.9)의 내용이다. “조선인의 지식부족”을 지적한 이 작은
책자에는 일본의 전시 동원논리의 초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독자에게
‘전쟁 발발의 원인, 전쟁의 범주(중국) 확정, 조선인의 전쟁 협력 의무의 근거
6) 조선총독부, ��支那事變과 朝鮮人의 覺悟��, 京城: 朝鮮總督府, 1937.9, 1~2․8~9․12~15쪽. “총독
부에서는 약 일만 삼천 원의 경비로 이번 사변 발생의 원인 경과 급 사변에 대한 조선인의 각오를
기술한 “지나사변과 조선인의 각오”라는 팜플제트 오십 만부를 만들어서 조선내는 물론 일본내지
만주, 북지, 상해, 화태 등 조선인의 거주하는 지방에는 일제히 배부하기로 하고 5일부터 발송에
착수했는데 조선내의 배부는 전호수 9호에 1권 평균으로 배부하야 각 호가 모다 한 번식은 이 책을
읽도록 순회연락시키기로 하엿다.” 「時局認識의 小册 五十萬卷 發刋 總督府서 萬餘圓 經費로」, ��동아일보��, 1937.10.07, 2쪽; 참고로, “만주사변 이후 1934년 10월 1일 육군성에서는 ‘국방의 본
의와 그 강화의 제창’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육군성에서 국방의 이름 아래 새로운 전쟁관을 심어
주기 위해 총력전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즉 전쟁은 단순한 무력전이 아니고 외교전, 경제전, 사상
전을 통합한 총력전이어야만 한다는 논리였다.” 이은주, ��근대 일본의 지식장과 젠더투쟁��, 소명출
판, 2016.1,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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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당성’ 등의 전쟁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전쟁 발발의 원인’은 전쟁명분 및 책임론과 관련해 중요하다. 국민
의 재산과 생명이 요구되는 전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국가정책의 정
당성은 매우 근원적인 문제다. 만주사변 이래 조선에서는 ‘1935년 위기설,
1938년 예정설 등 전쟁이 이미 예견되고 있었는데도’7) 일본은 중일전쟁의
책임을 중국에 전가하고 동양평화를 수호하는 도의국가로 자국을 포장하며
도덕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이후 팔굉일우, 성전(聖戰), 대동아공영권8) 등
으로 나타났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부정’은 확전(擴戰)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승
전의 확신을 줘 불안 심리를 제거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다. 이처럼 이 책은
조선인이 전시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했다. 일
본으로서는 조선인이 시국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없어서 풍문이나 유언비
어에 휘둘린다면 식민지배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당국이
생산한 지식은 전쟁의 공포와 불안을 종용하고 전쟁 열기와 전의(戰意)를 높
여 사회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전략적 수단이기도 했다. 실제로 시국해설, 뉴
스영화, 문학 및 공연, 라디오 등은 전시준칙과 전황을 알리고 전시를 실체화
했다.9) 따라서 ‘총력전’을 위해 보급된 전쟁정보는 당국의 프로파간다 논리
를 파악하고 전황 변화에 따른 전시 이슈와 동원 대상을 알 수 있는 전쟁상
식이었다.
전쟁 원인과 대상이 확정되면 ‘국민’으로서 의무인 전쟁 참여가 구체화된
다. 일본은 동원 논리를 구축하고 보급해가면서 전쟁수행의 주체로 조선인을
7) ��삼천리��, 1934.5, 60쪽.
8) 1942년 2월 16일 의회에서 도조 수상은 아직 각국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 대동아공영권을 조급하
게 호소했다. 이에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던 지식인들이 이 싸움을 대동아공영권론에 기초한 식민지
해방전쟁으로 받아들이면서 도조는 지식인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호사카 마사야스, 정선태
옮김,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페이퍼로드, 2012, 384쪽.
9) 또한 당시 일본에서 신문은 사상전을 관철하기 위한 ‘紙의 폭탄’을 제조하는 군수공장 등으로 간주
되었다. 황국신문인의 자각을 양성하는 신문통제기관인 ‘일본신문회’는 신문기자를 보도전사, 종군
기자, 총후의 기자로 연성을 실시했고 기자등록제(1945년 1월)를 실시하여 국체관념과 국가적 사
명을 명확히 한 기자로 통제했다. 前坂 俊之, ��太平洋戰爭と新聞��, 講談社, 2007, 400~411쪽.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69
호명했다. ‘열등한 조선인은 강대국 일본의 국민으로 인정받는 데 감읍하여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주장은 평등을 가장한 친밀성의 전략이다. 친밀
한 듯 표방하지만 식민모국은 식민지와의 민족 간 격차를 강조하여 일본에
미달된 조선인의 수준을 환기한다. 이는 이후 다양한 심리정치로 확장된다.
친절과 질서를 강조한 당국은 모범국민에 미달된 조선인상을 유포하고 질서
와 효율의 이름으로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다. 이렇게 호명된 조선인 중 앞에
서 살펴본 책의 전쟁수행자는 ‘기업과 가정부인’이었다. 아직 징병제가 실시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청년은 제외 됐고 군수물자를 직간접적으로 조달
해야 할 기업과 가정부인에게 가장 먼저 총후의 소명이 부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책은 시국에 따른 당국의 정책 변화와 전시
준칙을 알리는 지침서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래서 친밀성의 본래적 의미는
‘의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전쟁 초기 책자에 표현된 당국의 뜻은 조선인이
일본국민으로서 갖추기를 바라는 지식이었고 그것의 확산을 꾀했다는 점에
서 상식화 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효과적인 전쟁수행을
위한 지식의 주입이다. 전쟁지식과 미디어 유통의 결합은 전쟁상식화를 의미
하며, 전황 관련 전쟁지식은 전쟁상식과 중첩돼 있고, 전쟁상식을 구성하는
전쟁지식은 시국에 따라 변화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 초기 “조선
인도 일본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수준의 발언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시국
에 따른 전쟁상식의 변화는 조선인에게 부과된 의무, 곧 ‘정신적․물리적 희
생’의 변동을 함의한다. 전황의 변동은 전쟁 주체와 의무, 희생의 강도를 결
정짓는 주요 원인이다. ‘전황과 경제, 의무’가 맺는 역학관계와 재구성되는
전쟁상식의 고찰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의무는
전시사회의 ‘도덕’이 된다. 다시 말해 ‘규범으로서의 전쟁상식’은 전시경제의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변용하는가.
전쟁 중임에도 당국과 호명되는 대상의 권력관계와 이해관계는 각기 다르
다. 그래서 전쟁서적과 전쟁상식은 당국의 관심사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수탈
370 한국학연구 제43집
을 은폐하기도 했다. 전시 하의 사회경제적 관계의 재편을 감지할 수 있다.
��지나사변과 조선인의 각오��에서 기업과 가정부인이 지목됐지만 기업은 선
전물이나 문학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기존의 이 시기 사상사나 독
서사 연구도 천황이데올로기나 군국/총후의 어머니에 집중되었다. 이제 주요
전쟁상식의 대두 속에 은폐되는 당국의 수탈, 당국과 기업의 관계에 주목해
야만 하는 것이다. 전쟁이란 막대한 양의 물자와 군자금을 필요로 한다는 점
에서 당국과 기업 및 지주의 관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다가서
기 위해 우선 가시화된 당국의 전쟁상식 하에서 경제적 문제가 어떻게 거론
되며 수탈이 정당화 및 은폐되는지 파악해 나갈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
시기마다 유포된 서적에 주목해야만 당국과 일상영역의 인민의 관계에 더 직
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중일전쟁 발발 후 당국은 총독부 통보(通報)에 총후미담을 실어 전조선에
반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요 시정사항의 통속해설 기타 제재료와 중앙
정부로부터 공포의 내외정세에 관한 정보 등을 채록하여 관민이 알아야할 상
식(常識) 내용”10)으로 삼았다. 또한 조선 총후의 활동광경을 필름에 담아
<총후의 조선>이란 영화를 제작하여 각도에 배급하기도 했다.11) 이각종의
��시국독본��(1937.8)12)이 발간되었고, 일본으로부터 국가이데올로기를 강조
하는 ��국체의 본의��가 유입되었다.13)
이렇게 시작된 당국의 지침 및 서적을 시기구분 해보면 범박하게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결정 즈음을 경계로 ‘군인 남성-총후 어머니’의 구도로 나
뉜다. 여기서 차별적인 성별분업구조와 연동된 전쟁상식의 실상과 변동을 살
펴볼 수 있다. 이것은 가부장제사회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고착화 문제를 넘
어서 남성의 경제활동과 징용, 여성의 근로봉사와 직업여성 및 ‘위안부’ 등
각종 경제적․인적 동원을 은폐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이는 전시의 압도적
10) 「미담집 발간」, ��동아일보��, 1937.8.7, 3쪽.
11) 「“총후의 조선” 각도에 배급」, ��동아일보��, 1937.10.9, 3쪽.
12) 李覺鍾, ��時局讀本��, 京城: 新民社, 1937.8.
13) 文部省, ��國體の本義��, 1937.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71
화두인 경제문제와, 그 협력적 주체인 기업과 당국의 관계를 미디어에서 가
시화 되지 않도록 작동한다. 요컨대 전황과 경제사정에 따라 전장에 나가야
할 남성과 총후 어머니가 갖춰야할 규범으로서의 전쟁상식의 내용과 그 변
동, 그리고 그것이 경제난과 그로부터 야기된 갈등을 사회적으로 가려버리는
맥락을 살펴보자.
1) 전시 생사관과 성공기의 유포, 강화되는 세금
구체적으로 남성의 전쟁지식을 살펴보면, 조선에서 국가총동원법(1938.4)
과 육군특별지원병제(1938.4.3)이 시행되면서 ��육군특별지원군독본��(1939.7)
이 나왔고 그 유명한 ��보리와 병정��14)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1940)15)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한 히틀러의 측근인 괴벨스의
��勝利의 日記��가 1941년 11월 제일서방 전시체제판으로 초판 5만부, 2쇄 3
만부 증쇄됐으며 이광수의 ��동포에 고함��이16) 동년 10월에 이미 46판, 1원
30전에 팔리고 있었다. 전장의 병사 재현은 총후 조력을 정당화하고 전열(戰
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여기에 더해 독일의 전쟁 경험은 패전과 봉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반면교사가 되며, 독일 전쟁영웅의 거론은 일본의 영웅을
소환케 했다. 일례로 진주만 습격(1941.12)에서 사망한 9명의 용사는 구군신
이 되었다.
이 구군신은 각종 미디어에 보도되었다. 이는 바람직한 전쟁인간상의 창출
이자 유포, 전사회의 상식화 과정이다. 가령 1942년 4월 ��신시대��에는 구군
신을 호국지신 특별공격대로 추앙하는 글이 실렸다. 여기에는 구군신의 사진
이 계급 순으로 배치되었다. 이런 용사들은 전쟁 초기에는 사후 2계급 특진,
14) 이 책의 서문에서 조선총독부 문서과장은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읽혀 성전 認識의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火野葦平 著, 西村眞太郞 譯, ��보리와 兵丁��, 京城: 조선총독부,
1939, 3쪽.
15) 이 책은 1941년 10월에 이미 14쇄 1만 7천부, 총32만 2천부를 찍어내고 있었고, 11월에는 15쇄
2만부 증쇄되고 있었다. ヒットラア, 室伏高信 역, ��我が鬪爭��, 東京: 第一書房, 1940.
16) 香山光郞, ��同胞に奇す��, 東京: 博文書館, 1941.
372 한국학연구 제43집
후기에는 1계급 특진을 받았다. 전쟁 도중에 죽은 장병을 전시효과로 활용하
는 것은 외국에서는 특이한 예였다. 미국에서는 장병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해서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일본은 구군신처럼 수를 붙여주는 게 특징적이
다.17) 이것은 만주사변 당시 육탄3용사의 또 다른 버전이며, ��전진훈��
(1941.1)과도 상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전시 중 적에게 잡히면 포로가 되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도조는 포로는 일본군의 수치이며 죽음으로 항전해야
한다는 훈시를 내렸다.18) 이러한 전시 생사관을 바탕으로 군신과 옥쇄가 일
본식 군대문화의 상식으로 일반화 되어갔다. 이런 상식은 당시 청(소)년이
읽어야할 책으로 권장된 ��독일전몰학생의 편지��나 일본 마루젠 서점에 팔린
��프랑스 패배��19) 등에 의해 강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전쟁서적의 확산, 전쟁인간상의 상식화는 지원병을 독려하고 이
후의 징병제 작업을 촉진하며 후방의 전쟁열을 가열시켜 전시태세를 강화하
는 데 기여한다. 이처럼 군에 사회적 이목이 집중될 때 경제관계의 급격한
전시체제로의 전환이 정당화되고 경제문제가 은연중에 은폐되어 갔다. 이때
사회 내 균등한 전쟁부담은 경제 문제의 한 축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무렵인
1937년은 쌀이 풍작이었고 1940년까지 계속해서 이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
이 되었기 때문에 식민본국의 식량조달에는 걱정이 없었으며 전쟁 하 중점산
업은 중화학 공업이었다. 일본은 준전시체제였던 1935~1937년 법인세를 높
여 악성체납을 한 대기업을 정리하고 1941년까지 법인소득세를 강화하여
1934년부터 난립했던 부실․영세 중소기업의 도태를 유도했다.20) 또한 중요
산업별 생산판매 독점체인 카르텔체제를 규정한 ‘중요산업 통제법’이 1937
년 3월 조선에 적용됐다. 1942년에는 기업의 통폐합과 판매조직의 일원화를
위해 기업정비령이 마련되었다.21) 그래서 총력전기 하면 조선에 진출한 일
17) ��신시대��, 1942.4, 42쪽. 버마 / 자바 장악 일본 최대 범위
18) 가타야마 모리히데, 김석근 옮김, ��미완의 파시즘��, 가람기획, 2015, 292~293쪽; 三浦藤, ��戰陳訓��,
東京: 東洋株式會社, 1941.1. 이런 전진훈은 전쟁 후반부에는 ��軍人勅諭集��(조선군보도부 감수, 인
문사, 1944)에 덧붙여져 “군영의 聖典”으로써 조선에서 유통되었다. ��國民文學��, 1944.6, 26쪽.
19) ��신시대��, 1941.9, 88쪽.
20) 정태헌,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역사비평사, 1996, 207․398쪽.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73
본 대기업은 각종 면세 혜택을 받고 성장한 반면 조선인 기업은 존립 자체가
어려웠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이는 당사자의 전쟁불만의 향방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기업이 전쟁비용을 민간인보다 더 과중하게 부담한 것은 아니
다. 1942년경부터 종전할 때까지 기업의 법인세 부담은 경감되어 갔다. 오히
려 1942년부터 저소득납세층을 포함한 무차별 증징체제로 전환되어 개인소
득세가 높아지면서 민간인의 조세부담이 급증했다. 세금은 능력에 따라 내야
하는데 대자본일수록 법인세가 경감하는 소득역진적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즉 전쟁상식의 창출과 일반화 하에서 민간인과 기업인 간 전쟁부담의 문제가
현실적인 전시관계의 쟁점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 당시 민간인은 고물가에 시달리고 있었다. 과거 당국은 전쟁이 발발하
자 생필품을 통제하고 ‘9.18가격조정령’(1939)을 시행하여 물가를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생산확충과 저물가대책은 상충하는 정책목표였고, 가격이 정지
되지 않은 상품의 가격이 급상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대책으로 ‘폭리취
체령’이 제정되지만 이미 가격이 등귀한 사후의 조치였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당국은 기업에 유리한 증세를 단행해 버린다. 인플
레를 방지하기 위해 증세를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는데, 재계의 요구를 받
아들여 기업의 조세감면과 사치소비세에 방점을 둔 간접세 중심의 증세가 기
획됐다.22) 재계와 당국이 결탁하여 종전까지 전쟁비용을 민간인에게 전가하
는 역진적 조세정책을 펼친 것이다. 1939년 조선 농촌은 최악의 대한발을
겪어야 했고 1940년부터 지정가격강제수매, 식량배급과 강제저축, 식량공출
제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민간인의 고충은 가중되어 갔다.
돈과 성공, 생존, 행복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전쟁 하 민간인의 불
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일본은 주부지우(主婦
之友) 사장인 이시카와 다케미의 ��내가 사랑하는 생활��(1941.6)을 식민본국
과 식민지에 보급했다.23) 이시카와는 자신의 책을 “행복한 인생의 지침서(指
21) 정태헌,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역사비평사, 2010, 135쪽.
22) 「시국해설-오늘의 내외정세」, ��신시대��, 1941.9, 145~147쪽.
23) 石川武美(이시카와 다케미), ��내가 사랑하는 생활��, 主婦之友社, 1941. 조선어본 50전, 내지본 1원
374 한국학연구 제43집
針書)”로24) 설명하며 성공의 노하우와 태도에 관한 지식을 제공했다. 한 사
업가의 처세, 수양, 입지전의 성공담을 다룬 이 책은 험난한 역경을 극복해야
성공할 수 있다며 관동대진재 때 사옥이 불타버린 시련을 예로 든다. 이를
통해 사업가로서 그가 밝힌 성공논리는 ‘근로, 검약, 민족적 단결→현재 경
제․정치적 희생․양보→나중에 경제적 호황’으로 요약된다.25) ‘성의성심,
멸사봉공, 근로주의’를 내세운 저자는 독자에게 전시수탈을 감내하라고 조언
하고 개인이 노력으로 성공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주류경제학
류의 이윤정당화 방식인 자본가의 ‘절제설, 모험설, 감독설, 마진설’은, 전시
하 자본의 폭력적 착취와 불균등한 자원배분을 은폐하고 부의 증식을 합법화
하는 논리였다. 기업인의 성공기의 유포와 노동근로의 상식화는 결국 당국과
기업의 유착 관계를 은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임금이 일부 상승한 기업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포함한 당국
의 근검절약 강화 논리에 납득하지 못하거나 생존조차 힘겨워진 다수의 조선
인들은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당국의 전쟁상식이 빈궁한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런 불만을 막기 위해 당국은 조선임시보안령(1941.12)
을 공포하여 언론․집회․출판․결사․운동과 유언비어의 취체를 단행하
고,26) 다른 한편으로는 ��언문방공독본��(1941.12)을 출간하여 “지식의 박약”
을 비판하고 “방공지식”을 유포하여 전시태세를 강화했다. 주지하듯 방공훈
련과 방공독본은 실제 방공을 대비하는 목적이라기보다 일본의 행정력을 과
시하고 전시훈련을 반복하여 전쟁위기와 국가총력전을 환기하고 국민정신을
다잡기 위한 조치였다. 진주만 공습 직후 나온 이 책은 시국변화의 분기점에
80전. 이시카와가 운영하는 잡지 ��主婦之友��는 “가정생활의 향상을 指導”하기 위한 기사(지식)를
제공하는 잡지임을 천명했다.
24) ��新時代��, 1942.1, 165쪽. 이 책은 “가정부인을 지도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꼭 지킬만한 좋
은 이야기가 많다”고 광고되기도 했다. 「石川武美氏著『내가 사랑하는 생활��家■指導의 好書 飜譯」, ��매일신보��, 1941.8.14, 4쪽.
25) 이행선, 「총력전기 베스트셀러 서적, 총후적 삶의 선전물 혹은 위로의 교양서-‘위안’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48,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8, 84쪽.
26) 통제는 사상범예비구속령, 치안유지법 개정(1941.3), 국방보안법(1941.5), 애국반의 상호감시 등
법령과 조직이 추가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75
나온 셈이다. 그래서인지 국가 당국을 믿고 안심하며 “무지(無知)의 공포”에
떨지 말고 “당국의 지시”를 잘 따를 것을 지적하고 있다.27)
그런데 이웃과 애국반에서 돌려 읽으라는 ��언문방공독본��은 애국반에 대
한 당국의 관심이 본격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
(1937.10)이 결성되면서 10호 단위로 조직된 애국반은 총후활동의 추진력이
며 전시국민의 기본조직이다. 전쟁이 장기화 되는데 따른 전쟁피로와 빈곤의
확대는 애국반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유지를 필요로 했다. 즉 애국반과 관
련된 이 서적의 출현은 이 시점까지 지원병 모집과 남성의 노동 및 경제활동,
방공훈련에 중점을 두었던 당국의 관심, 전쟁상식 구축의 노력이 여성으로
더욱 옮겨가는 국면을 함의한다.28) 이는 시국에 따라 전쟁상식이 재구성되
는 지식변동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당국에게 중요해진 애국반의
주류는 가정주부였다. 가정주부의 강조는 임금 여성노동자를 비가시화하면
서 동시에 실제 주부의 곤궁한 경제적 여건을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 중일전
쟁 초기 가정주부에게 강요된 의무와 희생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엄중해
진 시국의 변동이다. 그만큼 경제문제가 더욱 중요시 되어 가고 있다는 방증
이다.
2) 총후 여성의 ‘결전생활’과 격차사회
여성하면 1942년 5월 징병제 결정과 함께 더욱 강조된 ‘군국의 어머니’를
떠올리기 쉬운데29) 시기별로 총후부인과 ‘군국의 어머니’의 경중을 살피면
서 시국에 따라 당국의 ‘전시여성의 자세와 상식’론의 변화추이를 파악할 필
요가 있다. 전쟁 초기 총독은 “내선의 마음이 일체가 되어 국가에의 봉공을
27) 신시대사, ��애국반가정용 언문방공독본��, 박문서관, 1941.12, 106쪽․115쪽. 이 책은 “방공지식의
최고봉이요 결정판”으로 광고되었다. ��신시대��, 1942.2, 180쪽.
28) 남성의 징용 독려와 합리화는 1944년 무렵 ��조선징용문답��(1944), ��국민징용의 해설��(1944.10) 등
을 통해 이루어진다.
29) 총후부인에 관해서는 권명아, 「식민지 경험과 여성의 정체성: 파시즘 체제하의 문학, 여성, 국가」, ��한국근대문학연구�� 6-1, 근대문학회, 2005; 군국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공임순, 「가난과 국가, 군
국모의 연기하는 신체정치」, ��한국어문학연구�� 61, 동악어문학회, 2013 참조.
376 한국학연구 제43집
다할 때가 왔다. 조선 부인들은 나아가서 시국에 눈을 뜨고 가정을 지키는
위에 아동을 양육하야 실로 일본국민의 반수가 되는 여성으로서의 본분을 의
식하야 십분 뜻을 머금어 주기를 바란다.”30)고 했다. 이 당시 조선인은 군에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국의 어머니’ 보다 총후부인의 호명을 받았다. 일
본에서도 대중운동조직인 국방부인회나 관료와 지역명망가 및 부유층으로
구성된 애국부인회의 군사원호가 활발했지만, 1940년 전후에야 도나리구미
(隣組)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가정이 국방국가의 구성단위가 되었다.31) 조
선에서는 비교적 일본부유층인 애국부인회의 세가 국방부인회보다 컸기 때
문에 조선인이 가입해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애국반이 주요
조직이 되었다.32) 근검, 절약 등이 총후부인 및 대중의 일상적․생활적 상식
이 됐고 저축운동 등이 확산되어 갔다.
그러다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이름이 ‘대동아전쟁’으로 바뀌
고33) 구군신이 출현하면서 1942년 당국은 ‘군국의 어머니’론을 유포하고자
했다. ��매일신보��에 「진주만두구군신유가족방문기」(1942.3.11.~14)34)와
「군국의 어머니 열전」(1942.6.23.~30)이 실리고, 잡지 ��신시대��, ��조광�� 등
에도 구군신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내지의 본받을 만한 어머니 얘기와 구군
신의 어머니를 엮은 박태원의 ��(조광 가정강좌 제1권) 군국의 어머니��(1942.
10)와35) ‘아동과 가정교육’에 김유신, 강감찬 등 조선의 ‘어머니의 힘’을 추
가해 부록으로 엮은 김상덕의 ��어머니독본��(1942)36)도 출간되었다. 이 단계
의 ‘어머니독물(讀物)’은 전장에 나간 아들이 전사해도 슬픔을 겉으로 표출하
지 않는 게 미덕이었다. 이는 일본식이며 눈물과 목청으로 슬픔을 애도하는
30) 「비상시국에 대한 부인의 각오」, ��동아일보��, 1937.8.13, 3쪽.
31) 후이지 다다토시, 이종구 옮김, ��갓포기와 몸뻬, 전쟁��, 일조각, 2008, 6쪽, 101쪽.
32) 히로세 레이코, 「식민지 조선의 애국부인회」, ��제국과 식민지의 주변인��, 이형식 편, 보고사, 2013,
210쪽.
33) 7일 진주만 공격 후, 12일 각의에서 결정 「��大東亞戰爭��으로 昨日閣議 今次戰爭의 名稱을 决定」, ��매일신보��, 1941.12.13, 1면. 이와 함께 대동아전쟁의 정세와 전망에 관련해 “국민 필독서”를 표
방한 ��大東亞戰爭の目的と意義��(人文社)가 출간되었다. ��國民文學��, 1942.3, 2쪽.
34) 「眞珠灣頭九軍神遺家族訪問記」(총4회), ��매일신보��, 1942.3.11.~14, 2쪽.
35) 박태원, ��軍國의 어머니��, 조광사, 1942.10.
36) 金相德, ��어머니讀本��, 京城: 南昌書林, 1942.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77
조선의 전통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조선인에게는 낯선 전쟁예절이자 장례상
식이었다. ‘장병에 나갈 아들은 제자식이 아니라 천황의 자식이므로 사심 없
이 나라에 바쳐야 한다’는 논리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천황이데올로기이자
새로운 전쟁상식이었다. 이는 전쟁 초기 아직 온전한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조선 여성이 황국신민의 여성으로서 자격을 갖추는 과정에서 당국이
강요한 상식화 과정이다.
조선의 어머니만 다루었던 김상덕의 ��어머니독본��은 일본 편이 추가되면
서 ��어머니의 힘��(1943.5)37)으로 재출간되었으며, 나폴레옹과 에디슨 등 서
양 어머니까지 포함한 ��동서현모열전��(1943.3)38)도 간행되었다. 이후에는
1942년 9월부터 10월까지 일본 도쿄 요리우리 호-찌에 연재된 기사가 조선
군사령부 보도부 주선으로 ��일본의 어머니��(1944.3)39)로 번역되었다. 이렇
게 언뜻 보면 모친의 감화를 강조한 ‘군국의 어머니’상이 지속된 것처럼 보이
지만 실상은 다르다. ‘군국의 어머니’ 상에 ‘충효의 나라 일본’이라는 이미지
가 덧씌워졌다. 군신을 양성하는 어머니의 덕성과 행실을 찬양하는 과정에서
멸사봉공, 일사보국의 충신인 남성과 대비되어 열녀와 며느리의 효와 덕이
결합했다.40) 이리하여 ‘군국의 어머니’는 현숙한 아내이자 며느리가 된다. 김
상덕의 책은 소국민 육성에 힘이 되어달라는 뜻으로 총후의 어머니께 바쳐졌
으며, 당시 ‘일본의 어머니’로 추천되어 상을 받은 여성을 직접 방문하여 기
록한 ��일본의 어머니��는 과부여성의 재가 반대와 정조 유지, 시부모와 자식
부양, 철저한 검약과 근로주의를 가정부인의 소명이자 자질로 표방하고 있
다. 이러한 일본부인상은 조선 부인의 귀감으로 고평되어 상식적인 생활지식
을 이루었다. 이 책은 1942년의 방문기인데, 1943년 일본에서는 영양지식,
의복, 아이교육, 부부생활, 결혼보국 등을 다룬 ��전시부인독본��41)이 발간되
37) 金相德, ��어머니의 힘��, 京城: 南昌書林, 1943.5.
38) 金井淸郞, ��東西賢母列傳��, 京城: 明文堂, 1943.3.
39) 內鮮一體社 編譯, ��日本의 어머니��, 京城: 內鮮一體社, 1944.3.
40) 김송이 펴낸 ��충효야담집��도 나왔다. 당국은 중국식 유교를 비판하고 충효를 강조했는데 그 중에서
도 충을 더욱 강조했다. 그런데 이 책은 충효뿐만 아니라 식민사관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이 백제를
크게 원조했고, 백제를 도와 당․신라와 싸운 것은 일본적 정신의 발양이며 임나지방의 남방을 백
제에 증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金松 편, ��忠孝野談集��, 廣韓書林, 1944.5, 219~234쪽.
378 한국학연구 제43집
어 내용 전환을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지원병훈련소나 대화숙
등에 조선부인의 체험이 권장됐다. 전시에 합당한 일본부인의 생활감정을 습
득하도록 하기 위한 대화숙 운영과 관련한 특집이 1943년 5월 ��신시대��에
실렸고 이는 ��대화숙일기��(1944.6)로 결실을 거두기도 했다.42)
이러한 여성 전쟁상식의 질적 변화는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면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잡지의 여성상식 관련 기사의 표제 변천이 좋은 참조
점이다. ��신시대��의 1941년 중엽 영양의 기초 지식과 영양합리화, 대용식43)
등을 다룬 기사의 표제는 <잘 살기 위하여>였다. 그러다 1943년 중반에는
보건상식, 구호상식, 영양상식 등 앞에 <총후여성독물(讀物)>이란 명칭이 붙
었다. 1944년 신년호부터는 “결전 하 부인문제와 청소년문제”에 중점을 두
어 이들을 위한 잡지로 꾸미겠다며 잡지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진다. 편집진은
“자녀양성을 위한 부인전사를 위해, 이들을 위한 잡지가 가장 필요하며 주부
되시는 분은 <주부수첩>부터 읽어주기 바란다.”44)고 공지를 했다. 이때만 해
도 <가정란>과 <주부수첩> 등의 이름으로 지식이 제공됐는데, 1944년 중반
이 넘어가면 <결전가정란>으로 표제가 바뀐다. 즉 앞에서 본 ��내가 사랑하는
생활��이 나온 시점에는 <잘 살기 위하여>였다가 1942년 ‘군국의 어머니’를
거쳐 1943년 군국의 어머니+총후여성, 1944년에는 ‘결전 총후부인’으로 바
뀌는 변모과정을 범박하지만 범주화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전황의 불리와
경제의 악화 국면에 상당히 맞닿아 있다.
가령 9.18가격조정령의 한계로 공식도매물가는 2.7배, 실제 물가는 매년
폭발적으로 등귀하고 공정가격의 6~10배에 달하는 암시장이 형성되었다. 미
곡의 상대적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1941년 이중미가제와 장려금교부가 시
행되지만 그건 지주에게 유리하고 소작인 등 생산자에게 불리한 제도였다.
41) 이 책은 일반부인, 특히 가정부인에게 봉공의 도를 알려주고 그것을 직접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市川房枝(이치카와 후사에) 編, ��戰時婦人讀本��, 東京 : 昭和書房, 1943. 7, 1쪽.
42) 綠旗聯盟 編 , ��大和塾日記��, 興亞文化出版, 1944.6.
43) 대용식은 당대 대용품산업 및 대용식 정책에 관한 전시체제의 맥락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경제적 현실과 전쟁상황의 변화가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44) 「餘滴」, ��신시대��, 1944.1, 134쪽.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79
1939년에 이어 1942년에도 가뭄이 심해지고 높은 소작료에 농민의 불만이
표출되기도 했지만 그 분노가 지주를 향하기 어려워져갔다. 식량공출제가 시
행되면서 쌀 현물이 아닌 쌀전표만 지주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식량의 이동이
불가능하고 지주 역시 암시장에서 비싼 쌀값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당시 일본에 협력한 대지주를 제외하고 지주와 농민의
간극은 조금 줄어들었으며 지주는 반일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45) 이 얘기
는 전쟁비용을 국민이 균등하게 부담하는 형평성과 직결된 문제다. 사회구성
원 간 비용분담과 배급의 불공정으로 인한 사회갈등은 전시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문제다. 당국은 1941년 쌀 통장제도를 만들어 전조선에 골고루 공정하
게 분배할 수 있다고 합리화 했다. 하지만 이건 전면적인 미곡수탈을 정당화
하는 논리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1942년부터 조세정책이 기업 부담의 법인세 하락, 개인소득세와
간접세의 증세로 이어진 것을 감안하면, 조선인의 불만은 기업으로 향해야
했다. 당시 조선인 기업은 쇠락했다고 하지만 중일전쟁을 기회로 박흥식은
1939년 화신무역을 신설했으며 태흥무역, 조선비행기 공업으로 확장해갔다.
경성방직은 남만방적 주식회사를 창립해 만주 일대로 확장할 수 있었고 카르
텔 덕분에 품질․가격경쟁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으며 총독부가 제품 품질기
준을 낮추고 가격을 높게 유지해줘 전시기 동안 회사 고정자산이 50배 이상
증가하고 엄청나게 많은 적립금을 비축할 수 있었다.46) 이런 점에서는 격차
45) 당국은 1942년 구장 대우개선책을 추진했고 식산계를 증설했다. 당국은 구장, 식산계 주사, 부락연
맹이사장을 가능한 통합하고 이를 매개로 행정과 관제자치조직, 경제조직의 촌락 내 통합을 꾀했는
데 이는 1943년 중순경 완성됐다(김민철, ��기로에 선 촌락��, 혜안, 2012, 133~147쪽). 이 무렵 군
수용 식량공급을 원활히 하고 지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선농업계획요강」(1943.7.31)이 발
표되었다. 지주계급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지주가 소작인을 지도하도록 했으며
농민과 지주의 관계를 더욱 온정주의로 결합시키려고 했다. 농업생산성이 높은 자작농을 대규모로
육성하는 일은 지주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이다(같은 책, 68~73쪽). 이 무렵 도양곡주
식회사나 조선식량영단(1943)은 소작료를 징수하여 지주에게 공출대금을 지불하였다. 게다가 농민
의 증산 의욕을 높이기 위해 소작료를 인하하고 생산자 미가를 지주 미가보다 높게 책정하였다.
그 결과 1940년대 전반에 실질소작료율이 하락하여, 일제의 패망 직전에는 30%대에 머물렀다.
1942년부터 생산량도 격감하여, 소작료의 양이 현격히 줄었다. 이헌창, ��韓國經濟通史��, 해남,
2016, 354쪽.
46) 카터 에거트, 주익종 옮김, ��제국의 후예��, 푸른역사, 2008, 186~187쪽.
380 한국학연구 제43집
사회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기업이윤의 증가와 당국의 동맹체제는 상공업,
두부장사, 복덕방, 노천상까지도 총독이나 도지사 허가를 받도록 한 기업허
가령(1941.12)이나 중소기업을 정리하고 통폐합 하는 기업정비령(1942.6),
그리고 공장 노동시간 제한을 폐지(1943.7)하여 장기간 노동을 합법화한 조
치에 의해 지속가능했다. 일본에서는 학도와 징용자들이 민간기업의 사장과
주식을 위해 일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태업 등을47)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싱가포르 함락 즈음 남방무역특수의 기대감에 잠시 현혹
되기도 했고 비판을 한다고 해도 기업의 증세를 바라는 정도의 발화만이 가
능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일본은 조선인에게 “당국의 지식에 쫓아 행동하라”48)고
선전했을 뿐이다. 오히려 징병제 결정과 함께 조선인은 가정생활의 전면적
전환을 요구받고 1943년 접어들어서는 최저생활을 강요받았으며 이 해에는
또다시 간접세 중심으로 대증세가 이루어졌다. 당국에서는 군인의 일본정신
(충절, 예의, 무용, 신의, 質素)과 ‘결전체제’ 하 총후국민의 개로도, 절약도,
저축도만을 더욱 강조했다. ��전시농민독본��(1943.5)은 황해도 곡창지역민에
게 증산의 국가적 사명만을 강요했으며,49) 농민연대책임의 부락책임공출제
가 시행됐다. 게다가 강제저축이 조세액의 3.5~3.7배나 되는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어 조선인의 시름은 깊어져갔다.50)
이처럼 (지주, 소작농의 관계와 달리) 전시공업의 대기업과 민간인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벌어졌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의 곤란은
가중되었다. 당국은 각종 지식을 보급하여 조선인의 경제적 불만을 완화하고
은폐하거나 오히려 동원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쟁지식은 전쟁이 발발하
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화되고 축적되면서 상식화되어 갔고 일본은 조선인
이 “상식 있는 황국신민”이 되도록 유도했다. 팔굉일우나 대동아공영권은 전
47) 호사카 마사야스, 정선태 옮김,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페이퍼로드, 2012, 502쪽.
48) 「대동아전쟁과 국민의 일상요강」, ��신시대��, 1942.1, 58쪽.
49) 黃海道農政課, ��戰時農民讀本��, 黃海道, 1943.5.
50) 정태헌, 「일제말기 국채구매 및 강제저축과 인플레」, ��殉國�� 69호, 순국선열유족회, 1996.10, 53쪽.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81
쟁 초기부터 징병 담론 등과 함께 유포됐고, 가정부인의 소양은 각종 미디어
즉 ��신시대��나 ��춘추��, 관변잡지인 ��반도의 빛��(1941.4~) 등의 ‘상식기사’로
나타났다. “영양강좌, 의식생활, 위생 및 보건상식, 대용식, 육아교육, 오락,
성병상식, 구호상식, 주부수첩, 염색” 등 분야도 다양했다. 당국의 여성 전쟁
상식은 가정경제와 지역사회의 민심의 중추가 된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
이기도 했던 것이다.
종국에는 중일전쟁 이래 당국이 산출한 전쟁지식이 축적된 결과가 “상식”
으로 일반화되어 ��신생활의 상식보고��(1944.1)로 집성되었다. 신체제의 신
생활에 합당한 이념과 생활양식이 완전히 구축된 셈인데 이 책은 국민이념과
정신에 집중했고, 구체적인 가정경제와 관련해서는 1944년 7월에 나온 ��결
전생활 가정요람��에 기술되었다. 전자는 “지식과 학식이 얕은 소년, 부녀를
위한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신명의 나라 일본이 도의국가이자 전체주
의국가임을 밝히고 황국신민과 철저한 국가우선주의 지식에 집중되었다. 충
격적이게도 이 책에는 당시 조선인이 엄청난 액수의 강제저축을 하고 있는데
도 불구하고 민족성이 저열하여 저축정신이 부족하다고 적혀 있다. 또한 남
녀관계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는데, “반드시 남자가 주체가 되고 여자는 남자
에게 종속되어야 하며, 남편의 부재시 아내가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한다.”51)
고 가르친다. 그동안의 군국/총후여성의 담론의 기저에 깔린 인식이 공론화
된 셈이다. 후자는 ‘결전’ 시기에 모든 총후국민은 애국반이라고 주장하며 가
정의 합리화와 과학화를 추구한다. 이 저서는 ‘결전기’ 당국의 지식과 조선인
의 생활상태를 제한적이지만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조
선인은 여전히 음식을 함부로 먹는 민족이었다. 조선인은 “가축사료로 쓰던
잡곡과 비료에 쓰던 풀을 가루로 만들어 흥아빵을 만들어 먹고, 학교 점심은
빵도시락을 활용해야 하며, 식료품 가게에 행렬을 지어서 아우성치는 것은
51) 이 책의 목차는 <1.서론, 2.인류사회의 조직, 3.제국의 국가조직, 4.국민의 가족제도, 5.국민의 의무,
6.국민의 직책, 7.국민의 실천, 8.세계 급 국가의 정세와 조선동포의 진로>이다. 伊達昇漢, ��新生活
의 常識寶庫��, 南昌書館, 1944.1, 72․76쪽; 「주간 아동常識-조선 안에서 한 저금이 일억 원이
넘어-그러나 내지만은 아주 못하다」, ��매일신보��, 1939.12.3, 4면 참조.
382 한국학연구 제43집
국내 식량부족을 적에게 선전하는 것이니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52) 이를
보면 열악한 식량사정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점심을 못 먹고 죽을
먹는 일이 일상일 정도로 상황은 더 나빴다.
요컨대 당국의 전쟁상식이 구축되고 일반화 되는 동안 조선인은 가렴주구
에 시달려야 했다.53) 당국의 전시기 담론과 그 주체는 ‘군인 남성-총후 어
머니’의 구도로 형성됐다. 전쟁상식은 이런 담론과 중첩되기도 했지만 시국
에 따른 실제적 조치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담론은 당국의 실
제적 수탈을 은폐하지만 지식은 지침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다. 지침과 생
활경험이 가미된 전쟁상식의 문제는 ‘담론의 인지구조, 인지체계’의 차원과
다르다. 그래서 기존 연구의 ‘지식-담론’의 관계가 아니라 일상의 ‘지식-상
식’의 문제가 중요했다. 지식으로 포장한 명령의 하달과 은근한 복종의 요구
는 수탈과 가부장적 군대문화의 전파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구호화 된 이
데올로기공세와 ‘명령화 된 지식’은 자본의 자기이해에 기반을 둔 정치경제
적 선호를 전시경제체제의 논리로 치환하고 가정적으로 길들여진 여성상을
이상화하며 인력과 자원 징발을 합리화 했다. 오직 정신력에 기초한 생산주
의가 사회 전체에 팽배했다. 빈곤과 실업은 의존문화, 성품과 태도의 문제,
노동윤리와 책임의식의 실종 탓으로 환원되는 등 빈자의 권리는 미약하고 의
무만 있었다. 정경유착과 전시 불평등의 심화 속에서도 보통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저지른 경제사범은 경미한 죄도 엄벌주의로 다스려졌다. 조선구호령
(1944.3)은 명목상 조치일 뿐이었다.54) 전쟁은 모든 사회구성원의 평등을 가
52) 이 책의 목차는 <1.결전식량, 2.결전하의 영양상식, 3.가정상식, 4.유아의 양육, 5.전시가정부인의
행할 일, 6. 전쟁과 바다와 병기, 7.방공, 8.가정염색법, 9.농업해충구제법, 10. 인사하는 법>이다.
동년 11월에 재판이 나왔다. 金田松圭, ��決戰生活 家庭要鑑��, 廣韓書林, 1944.7, 36․39․45면.
53) 군국/총후여성 관련 서적이나 글을 읽으면 이들에게 농사를 비롯한 식량자급의 막중한 책임이 집
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담론이 퍼지면서 농사에 동원된 학생들이나, 스스로 자급해야했던 군부
대의 농사반 발족과 농경병으로서 종전을 맞아야 했던 실태들이 조명되지 못했다. 三井 喜二郞, ��戰う陸軍農耕兵―農事班四百日の記錄��, 光人社, 2006, 123~132쪽.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전
시의 삶을 ‘국민생활’이라 명명하고 일상을 통제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도덕적 애국심’이 아니라
‘냉철한 논리’가 요구됐다. 이 글에는 당시 일본이 취한 각종 (경제)정책이 전반적으로 잘 소개되어
있다. 이송순, 「일제말 전시체제하 ‘국민생활’의 강제와 그 실태: 일상적 소비생활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44집, 고려사학회, 2011.8, 305~342쪽; 김정인․이준식․이송순, ��한국근대사�� 2,
푸른역사, 2016, 229~313쪽 참조.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83
져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계급 간 권력자원의 격차를 심화했다. 그 중심에는
기업이 있었다. 전황에 따라 구성된 지식은 명령이자 이념, 생활준칙, ‘과학’
이었고 그 지식의 적합성은 전쟁 그 자체가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사실로
조선인에 주입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위기, 불확실한 미래의 위험 부
담, 곤궁의 책임이 식민지 조선인에게 전가되고 민족성이 폄하되는 희생양
정치 및 비난의 정치가 자행되었다.
3. 복수(複數)의 전쟁상식의 현실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자본가의 생존
전쟁으로 외부의 공동의 적이 등장하자 식민지배관계 및 조선 내부의 (적
대)관계가 재조정됐다. 당국이 주도적으로 구축해간 전시 프레임은 황민의
봉공 즉 철저한 의무로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국체관념의 체화를 요구했
다. 이에 따라 이 시기 조선인은 생활양식을 전면적으로 바꿔야했다는 점에
서 고난의 시기였다. 당국이 생산한 지식의 보급에는 ‘국책문학’, ‘국민문학’
등의 이름으로 문학도 일정부분 일조했다. 문학은 전쟁과 국책을 정당화하고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조장했다. 특히 여기서 다룰 문학작품처럼 조선의 경
제사정이 악화되는 1942년 중반 이후의 ‘국민문학’적 경향의 작품은 그러한
혐의를 더욱 받아왔다. 하지만 당시 문학인들에게 국책이데올로기와 문학의
결합은 언제나 난제였다. 이는 예술성의 약화만을 뜻하지 않았다. 문학은 자
신의 이익을 기반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보통사람들에게 상식을 넘어선 경
제적 수탈이 가해지는 현실 하에 있었다. 문학의 현실 재현은 전시 경제형
인간으로의 전환 과정과 급변하는 경제현실의 국면을 함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문학은 전시 경제논리의 작동과 그것의 일반화와 상식화 과정에
54) 이와 관련해서는 윤홍식, 「일제강점기 한국 분배체계의 특성, 1910-1945 : 자본주의 분배체계로의
이행의 시작」, ��사회복지정책�� 43권2호,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2016, 35-60쪽 참조.
384 한국학연구 제43집
서 열악해져가는 경제상황, 재구조화되는 불평등의 국면, 또 그런 현실을 견
뎌내야 했던 조선인의 삶을 반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당국의 상식과 문학
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왜곡과 변용을 제한적이지만 파악할 수 있겠
다. 이는 당국의 ‘전쟁상식’으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조선인의 ‘전쟁상식’
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상식의 균열을 보여주는 ‘징후’
로서의 소설 독해는 수용자․생활자로서의 당대 인민people에게 상식이 미
친 영향을 검증하기 위한 직간접적 시도이다.
자칫하면 신체제는 물질적 불행의 원인을 빚어낸 것처럼 오해되어, ‘이익 봐서는
안 된다, 사치해서는 안 된다’라는 일면만이 강하게 감수되어 그 결과로 신체제는
국민생활을 압박하고 협위하는 것이다. 신체제는 우리들로부터 뺏어갈 뿐이다. 이
러한 감정이 없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허나 이것은 요컨댄 국민 갂자의
개인생활, 소비생활에 있어서 신체제는 무엇을 주려는 것인가함을 잘 인식치 않아
서 그렇잖었나 생각되며 생활신체제는 정히 이 문제에 대해서의 회답을 주어야
될 줄 압니다. 신체제는 결단코 우리들에게 봉공만을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우리들이 생산자로써의 생활에 있어서 진실로 직역봉공의 지성을 다한다 할진댄,
우리은 또한 소비자로써의 생활에 있어서 충분히 국가사회의 은총을 받을 수 있잖
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 금후는 국가에 기여한 인물에게는 물심양면의
표창이 있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이를 받는 쪽에서도 정신적보수로써 물질적인
것보담 더 광휘 있는 것으로 생산하여야 할 것입니다. …(중략)… 이러한 습관을
조장하기 위해서는 애국반이라든가, 정회 등의 가까운 이웃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
을 해내는 것으로 이때까지는 「저이는 부자」이니까 남보다 월등하게 사치해도 아
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도 일변시켜 「저이는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니까 우리들은 소중히 해야 된다. 그리고 우리보담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하
다」고 생각하게끔 되어 질투심 없이 그이를 존경애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그것
이 곧 신체제입니다. 제 아무리 부자라도 삼십평 이상의 건축에는 제한이있고, 사
탕, 성냥, 목탄은 기뿌제입니다. 도회지에서는 일본쌀을 먹을 수 없고 대낮부터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85
술도 못먹고 고운 옷을 입을 수 없는, 견고한 소비제한이 되어 있으므로 돈을 가지
고도 쓸데가 없는 형편이 되고 말었습니다.55)
전쟁이 발발하자 일상의 상식적 삶인 사치와 사익 추구는 서구식 개인주
의와 결부되어 터부시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국가에 헌납해야 할 때 영리
주의와 경제적 은닉은 비국민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지침과 별개로 현실에서
는 전시라도 자본주의는 작동한다. 사회적 빈곤이 확대되는 국면에서도 전쟁
특수의 혜택을 입은 부자가 등장하고 전비(戰費) 부담이 차등화 되면 사회갈
등이 고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국은 ‘신체제가 국민생활을 압박하고 빼
앗아 가는 것만이 아니며 충실히 봉공한다면 그 기여도만큼 국가가 보상해준
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 보상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 영광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부자와 일반인과의 경제적 격차가 가시화 되자 ‘소비제
한 때문에 부자도 돈을 쓸 데가 없다’는 이유로 계층 갈등을 무마하려 한다.
이는 부자도 하루 세 끼만 먹는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또한 황당하게도
‘부자의 사치를 질투하지 말고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생각하라
는 논리가 전개된다. 오히려 이들을 ‘존경해야 하는 게 신체제’라는 지침이
보급됐다. 앞의 글은 국가와 기업 주도의 구조화된 불평등을 가시화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부유층의 결합 및 공존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불평등을 구조화하는 요소는 본래적으로 전쟁에도 있었다. 전장의 전선과
후방 구분은 장병(남성)과 총후국민(여성)의 구도를 낳았다. 즉 성별분업구
조에 기초해 가족을 매개로 한 가부장제적 불평등 체계가 구축되었다. 그 중
심에는 장병과 총후부인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당국의 선전도 이루어졌
다. 이 가부장제적 불평등 체계가 징병과 군국/총후부인 담론으로 변형․확
산되면서 국가와 기업주도의 구조적 불평등이 은폐되고 징용이나 노무동원
된 남성, 여성근로자나, ‘위안부’ 등 실제적으로 전쟁에 이용된 사람들의 빈
곤과 처우, 강제성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전혀 공론화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55) 小畑忠良(기획원 차장), 「생활의 신체제」, ��신시대��, 1941,4, 31~34쪽.
386 한국학연구 제43집
먼저 사회적 공론이 집중된 모범국민, 즉 지원병과 군국/총후 부인을 중심으
로 문학과 경제 불평등의 문제를 살펴봐야한다. 또 그 문학이란 앞에서 언급
했듯이 당국의 지식과 문학의 괴리에서 당국의 논리가 무너지는 것을 파악
가능한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복수(複數)의 전쟁상식의 현실화, 인민의 전
쟁체험과 전쟁상식의 재구성을 가늠할 수 있다.
군에 갈 장병은 조선을 떠나 사실상 귀환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불
평등과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다. 가령 최재서의 「보도연
습반」(��국민문학��, 1943.7)은 전쟁의 새로운 단계에 대처하기 위해 동원된
지식인들이 군부대에서 보도전사로서 훈련과 연성을 받는 내용인데, 군대의
조선인 지원병은 국가의식과 시국인식을 깨우친 존재이다. 이들은 ‘내지인
사회’가 훌륭한 것은 군대훈련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장병은
충군애국과 군대문화를 찬양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누가 지원병이
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지원병들은 “모두 가난한 백성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생활의 부담을 짊어지고 날품팔이로
혹은 토목공사판으로 혹은 만주를 방랑하며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56)
했던 이들이다. 당시 지원병 중에는 고학력자도 있고 전시에 적극적으로 협
력한 대지주 등은 자식을 군에 보내 충성을 증명해야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불평등 체제가 이미 자리 잡은 조선에서 사회적 기회가 차단된
빈곤층이 군입대에 더 많은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당국의 군
대지식․문화 보급과 지원병의 계급적 실상을 여실히 환기하고 있다.
따라서 모범국민이 군 입대와 군국/총후 부인이라고 했을 때, 이들은 군대
지식과 전국민의 군대식 생활문화의 소양을 갖추고 재물과 생명에 무사심(無
私心)한 존재여야 했다. 이들은 당국의 전쟁상식을 체화한 ‘국민’이다. 장병
은 군에 입대해 조선을 떠나면 그 자체로 최고의 영예를 얻었지만, 아들과
남편을 떠나보내고 가정에 남은 총후부인은 사정이 달랐다. 여성은 애당초
56) 최재서, 「報道演習班」(��國民文學��, 1943.7), ��최재서 일본어 소설집��, 이혜진 옮김, 소명출판,
2012, 43쪽.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87
사치의 화신으로 낙인찍혔었다. 특히 전시 중에는 ‘도시의 사치하는 인텔리
여성’ 대 ‘농촌의 총후부인’이라는 공간적 분할로 담론이 작동했다. 최정희의
「여명」(��야담��, 1942.5)에서 세 명의 여성 경자, 은영, 헤봉은 여학생시절을
거쳐 부인이 된 동창이다. 이들은 군국의식에 따라 위계서열화 되어 있다.
나라를 위해 자식을 바쳐야 한다고 연설하는 경자는 남편을 여읜 과부로 ‘군
국의 어머니’를 연상케 한다. 황국의 어머니가 된 은영은 서양인에게 우호적
인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일본의 대의를 따라야 한다면서 헤봉을 설득한
다. 헤봉은 자신이 여학교시절 외국인 영어선생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를 잊
지 못하고 있다. 진주만 습격 직후인 1942년 1월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오랜 생활양식과 습관을 서구의 것과 동일시하고 그러한 사고의 전면적 전환
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신여성의 군국어머니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오히려 어머니를 교화한다. 이에 어머니
는 “생각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겠다”57)고 다짐한다. 합리적 근거 없이 사고
의 정지와 결단을 통해 군국/총후의 어머니가 탄생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학교시절=오랜 생활양식과 습관=개인주의적 소비주의시대=사치=서구적
삶’의 내포를 균일화하고 조선인의 생활감정을 바꾸려고 하지만, 말 그대로
오랜 생활양식과 습관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전황이 악
화된 1943년 후반, 사치는 금물이며 몸빼가 예뻐졌고 생활 속에서 미의식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 여성들은 시큰둥하며 강요된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
다.58) 이것이 문학의 전쟁상식과 현실의 괴리다.
이 소설에서 경자의 남편에 대한 정보는 없고 은영의 남편은 중학교 국사
선생님이고 헤봉은 지배인남편을 두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관한 얘기는 없
다. 관념적인 생활의식과 서구를 관련지은 의식의 변화가 핵심이다. 이와 달
리 시골출신 여성을 다룬 안회남의 「은실의 마음」59)에는 실제 경제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주인공 은실이는 과부이다.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과부
57) 최정희, 「黎明」, ��야담�� 8-5, 1942.5, 82쪽.
58) ��신시대��, 1943.10, 38~39쪽.
59) 안회남, 「恩實의 마음」, ��放送小說名作選��, 李弘基 편, 조선출판사, 1943,12.
388 한국학연구 제43집
가 결혼을 하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거나 자식을 키우는 것은 당대 전형적인
플롯이다. 이와 약간 다르게 은실은 자식이 없다. 이 작품은 은실이 고향에서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싫어서 서울로 상경하여 식모가 되
었다가 스스로 가난한 홀아비를 선택하는 서사이다. 이 작품이 이목을 끄는
것은 은실이 서울로 상경하여 식모가 되는 설정이다. 당시 당국은 식모를 쓰
는 것을 부르주아가정의 사치로 간주해 철저하게 비난했다. 앞의 소설의 말
을 빌리면 오랜 생활양식과 습관의 전형이 식모였고 당국은 이를 조선의 저
열한 예로 간주하고 바꾸고자 했다. 그런데도 식모가 소설화되고 방송소설의
명작선으로 꼽혀 실렸다.60) 당국이 전시체제의 삶을 전부 통제하는 것은 불
가능했다. 여기서 ‘당국의 전쟁상식-문학의 전쟁협력-현실’의 괴리가 발견
된다. 더 근본적으로 식모는 경제구조, 노동과 관련이 있었다. 식모는 조선의
봉건적 생활양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일상화된 식모는 19세기
자본가의 성장과 함께 하녀와 가정부 등의 급증으로 이어진 역사가 있다. 생
활이 윤택해진 부유층이 여성에게 일을 시키는 사회적 현상이었다. 과잉인구
출현과 불평등한 급여와 근로조건에 의해 낮은 임금을 받는 여성이 가정과
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뒷받침해 왔던 것이다. 식
모는 조선 특정계층의 의식문제만이 아니었다. 식모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조선 현실이 식민지자본주의 체제의 일면이었다.
당국이 근절하려한 물욕(物慾)과 사치는 일상인의 생활감각뿐 아니라 국
책 협력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전쟁상식에서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했을 때 지역유력자를 포섭하여 식민지배정책을 펼치려했
던 것처럼 식민체제는 조력자 없이 지배되기 힘들었다. 전시기 지주의 지지
가 약화된 상태에서 군수사업과 각종 공출사업이 중요했다. 만일 해당 사업
수행자가 몰래 전략물자나 생활물자 등을 빼돌리거나 돈을 착복해서는 효과
적인 전시체제의 운용이 힘들었다. 그래서 애국심에 기반한 검약과 무사심
60) 이러한 평가와는 별도로, 필자는 이 작품이 여성의 ‘희생정신’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국책소설이라
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89
(無私心)의 체화는 당국이 가장 바라는 황국신민의 요건이자 상식이었다.
이북명의 「철을 파내는 이야기」(��국민문학��, 1942.10)는 물욕(物慾)의 폐
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 토룡은 아내와 딸 복남(17세)과 함께
K천변에서 살고 있다. 그는 C수전회사와 사택의 쓰레기가 운반되어 오는 K천
변 쓰레기장에서 쇳조각, 양철, 깡통, 철선 등을 주웠다. 고물상61) 니헤이가
고철을 사줬다. 큰 힘들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그는 아내와 딸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돈 맛을 알게 되자 이 가족은 “물욕에 대한 일종의 경쟁심으
로 육친의 정(情)도 초월하여 자꾸자꾸 그 칼날을 날카롭게 해 갔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땅을 파고 “극단적인 에고이스트로 급변”했다. 복남은 비단
옷 하부다에와 가죽구두, 화장품을 사고 싶어 했고 아내는 반지를 사려고 했
다. 그제야 토룡은 쇳조각을 파기 시작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여자라는 동물
은 남자에게 기생해서 살지만 스스로 일해서 수입이 생기면 전혀 다른 사람처
럼 버릇없고 뻔뻔스러워지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후
홍수가 일어나 사람들이 수해복구사업과 폐품회수운동에 매진할 때, 토룡부
부는 몰래 수전회사의 철을 암거래한다. 그 거래의 장면을 딸인 복남이 우연
히 보게 되는데, 어머니는 요기가 깃든 눈을 하고 있었다. 복남은 “부모를
너무나 먼 세계에서 온 인간처럼 생각”하고 집을 떠나버린다.62) 물욕에 사로
잡힌 인물이 인간성을 잃고 요괴처럼 변해가는 과정과 그로인해 딸에게 버림
받는 부모라는 설정은, 물욕을 탐하게 되면 치르게 될 대가를 문학적으로 선
전하는 당국의 전쟁상식과 같다. 그러나 사실 토룡은 수전회사의 철탑공사에
서 일하다가 어깨를 다쳐서 힘든 삯일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가정을 책
임져야할 가장이 폐품이라도 수거해 모은 작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것인데, 애국부인회의 폐품수거운동과 대비되어 그는 비국민이 되고 만다. 토
61) 중일전쟁 이후 고물상 업자의 절도와 부정이 증가하자 총독부는 조선폐품통제주식회사(1940.9.15)
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태평양전쟁 이후 금속회수와 공출이 더욱 강화되면서 조선자원회수통제주
식회사(1942.10.30)로 바뀌었다. 결국 당국은 중요물자영단(1944.2.24) 체제를 통해 모든 고물상
기구를 국가관리 아래 놓았다. 김인호, 「중일전쟁 시기 조선내 고물상 부정의 실태(1937~194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6호,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3, 162~163쪽.
62) 이북명, 「철을 파내는 이야기」(��국민문학��, 1942.10), ��한국 근대 일본어 소설선 1940~1944��, 이
경훈 편역, 역락, 2007, 156~176쪽.
390 한국학연구 제43집
지를 소유하지 못한 임금노동자가 몸을 다쳤을 때 생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구호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폐품수거행위도 비난하는 비인간적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빈곤한 현실의 독자는 문학과 전쟁상식의 간극을 일상의 경험을 통해
쉽게 포착할 수밖에 없지만 불만을 표출하기 어려운 당대였다.
국가생산력증강 사업에 위배되는 행위는 개인의 상황, 빈곤의 문제와 상관
없이 비난받았다. 특히 그 개인이 국책사업의 중간책임자이거나 실질적 운영
자일 경우 애국심과 결합한 무사심(無私心)은 성전(聖戰)을 임하는 국민의
기본자세여야 했다. 최인욱의 「멧돼지와 목탄」(��춘추��, 1942.12)에서 산골
제탄장(製炭場)의 현장 책임자인 주임과 감독은 인부들을 속이고 목탄을 빼
돌리거나 인부들을 상대로 대금업을 하고 있다. 인부 중 김봉식은 주임의 죄
를 숨길 수 없다며 주재소를 찾아간다.63) 당시 목탄은 화로, 목탄가스자동차,
화약 등에 이용되는 국책적 사업이었다. 1940년에는 목탄배급통제규칙이 만
들어져 숯의 수급․가격 조절 등 유통과정을 통제하였다. 이때 각 도에서는
목탄배급조합이 설립되었으며, 144개의 조합으로 조선목탄협회도 설립되었
다. 이처럼 나라를 위한 사업의 중간책임자가 사리사욕을 탐할 때 다른 이가
주재소에 신고하는 것은 상호감시와 같다. 이는 방첩신고의 다른 버전으로
일개인이 경제경찰이 되어 신고윤리를 실천하는 애국민의 탄생이다. 이 신고
의무는 전쟁기에 조선인에게 계속해서 강조된 상식이었다.
이처럼 개인의 물질적 욕망을 제한하고 경제통제를 할 때, 주요 전시산업
의 기업은 특수를 누렸고 이들과 일반인의 부의 격차는 확대되었다. 이때 당
대 기업가에게 쏠릴 수 있는 사회적 시선 및 불만은 다른 대상에게 향해야
했다. 김태진(金兌鎭)의 희곡 「그 전날밤」(��신시대��, 1943.8~9)64)은 극단에
상연된 작품이다. 흥덕광업회사는 산금보국을 실천하는 국책회사다. 진주만
습격 직전인 1946년 12월 6일 시점에서 이 회사의 사장은 미국인 뿌라운이
고, 회사 지배인은 이동훈이다. 이 회사는 금을 캐기 위해 논과 밭 8만평을
63) 최인욱, 「멧돼지와 木炭」, ��춘추��, 1942.12, 170~186쪽.
64) 김태진(金兌鎭), 「그 전날밤」, ��신시대��, 1943.8~9.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91
기계로 뒤집어놔 땅을 망쳐 놨다. 촌민들은 토지보상을 요구하지만 사측에서
는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는다. 이에 고농 출신으로 농촌진흥을 위해 마
을에 들어와 국어강습소장으로 있던 김사민이 중재자로 나서기로 하는데 그
무렵 정길이란 아이가 사라진다. 회사가 금밀수를 한다는 사실을 정길이 우
연히 알게 되자 사장이 납치를 해버렸다. 미국인 뿌라운 사장은 미국의 국익
을 위해 금을 천진으로 밀수하는 음모단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사정을
지배인 이동훈도 알 게 되지만 그는 거지꼴로 살 수 없다며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사장을 조력한다. 그의 여동생 혜순은 “이게 다 오빠의 물욕 탓”이라며
걱정하지만 자신이 사모하던 김사민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결국 김사
민과 촌민들이 저간의 사정을 알고 회사에 쳐들어갔을 때 혜순은 사장의 총
에 맞아 죽게 된다. 총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뿌라운은 신사가 아닌 비문명
인처럼 그려진다. 이 작품은 귀축미영이 제창되는 반미소설이다.
조선에서 외국계회사는 1930년대 이후 이미 영향력을 잃고 사라져갔다.
전시 국책회사의 사장이 미국인이란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데, 사장을 외국
인으로 설정해 국책회사의 잘못과 책임 자체를 묻지 못하게 하고 있다. 농한
기의 산업보국은 일반화된 당국의 지침이지만 그 덕에 촌민은 다음 농사를
못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촌진흥운동을 하겠다고 마을에 온 김사민의
존재가 이목을 끈다. 농촌진흥운동은 1940년까지 이루어졌고65) 진주만 사건
무렵에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이런 문제를 떠나 농민의 실질적 경제향
상을 위한 농촌진흥운동이 전시에 가능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는 김사민
이 국어강습소장이므로 마을사람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외 활동은 알 수 없다. 그가 마을에 들어와 느꼈을 감정은 과거
농촌진흥을 위해 활동했던 엘리트의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이효석의 「10월
에 피는 능금꽃」(��삼천리��, 1933.2)에서 마을은 능금이 피는 계절과 달리 가
난으로 참혹한 꼴이다. 보리 시절을 앞두고 촌민은 세금 등을 체납하자 면서
기는 돌아다니며 돈 대신 가마와 밥솥을 가져간다.66) 이 모습을 보던 엘리트
65) 이송순, ��일제하 전시 농업정책과 농촌경제��, 도서출판선인, 2008,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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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햄릿”이 되어 괴로워할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에 비추어
김사민은 더욱 가혹한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촌민의 빈곤은 귀축미영의
반미 코드로 활용된 미국인 사장의 만행에 덮여 가려지고 ‘일본인’이 악덕기
업주인 작품과 공연은 애초에 상상될 여지도 없다.
「그 전날밤」이 외국인 기업주를 배척했다면, 이태준의 「별은 창마다」(��신
시대��, 1942.1~1943.6)에는 조선인 사업가가 등장한다. 중일전쟁 이후 1938
경 구니다찌 고등음악학원 2학년이었던 여주인공 한정은이 학교를 졸업하고
1년이 지나도록 동경에서 머물고 조선에 들어와 주택사업을 착수한 것이 소
설의 시간이다. 이 작품은 대중소설인데 쓰인 시점이 전쟁 상황인 것을 감안
하면 이색적이다. 과거 유진오의 「화상보」(��동아일보��, 1939.12. 8~1940.5.3)
는 조선이 앞으로 도달해야할 문명의 단계로 상정하여 글을 썼다. 침울한 현
실과의 거리두기인 셈인데, 이에 달리 이태준의 소설은 과거 1939년경을 배
경으로 한다지만 한참 전쟁분위기가 고조된 1942년에 조선인 기업가의 딸이
동경에서 사치를 뽐내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효과가 있다.67) 한정은은
일본에도 6대밖에 없는 2천 6백 원짜리 독일제 피아노를 구입하고 옷과 가
죽구두 등에도 많은 돈을 쓴다. 이는 시국과 위배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피혁은 주요 생필품이자 전시물자인데 한정은의 아버지가 조선 한
성피혁회사의 사장이다. 전쟁으로 피혁 수요는 배 이상 급증하여 회사의 수
익이 급증했는데 별안간 조선 내 피혁회사의 통폐합 방침이 결정된다. 생산
과 가공과 납품을 단순화하고 강화하는 반 관유회사의 출현이다. 당국의 정
66) 보리의 시절을 압둔 앞집에서는 별안간의 소동이었다. 「이왕 못 살 바에야 솥 아니라 집까지 빼가
시오. 이 나그내들 세X만 세X이구-그래 이 백성들은 엇지잔 말요-.」 「마매」는 펄펄 뛰면서 고함
을 쳤다. 그러나 이 고함과는 아무 관계도 업는 듯이 소에게 끌린 한 대의 「술기」가 유유히 뜰
앞을 굴러 나왔다. 장부를 든 면X서기가 두 사람 그 뒤를 따랐다. 「술기」위에는 X금 체납으로 처
분한 가마 밥솥 등이 삐죽이 솟아나아 보고 섯는 이웃 사람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찔렀다. 뼛속까지
파드는 이 야살스러운 풍경을 말살하야 벌이려고 애쓰면서 나는 마을을 벗어나 석방으로 뛰어나갔
다. 들에서 능금 밭으로-능금 밭에서 짜작나무 밑으로. 생활을 떠난 초목의 풍경은 가련한 「햄렛
트」를 용납하기에 진실로 관대함을 깨달은 까닭이다. 그러나 현실은 또한 추근추근하게 척지고 뒤
를 좇았다. 이효석, 「十月에 피는 林檎꼿」, ��삼천리��, 1933.2, 110쪽.
67) 일본에서는 이미 1940년 4월 22일에 ‘생활필수품 할당제’, 7월 7일 ‘사치품 제조판매 제한제’가
실시 됐으며 11월 1일 무도회장이 폐쇄되었다.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93
책에 따라 한성피혁도 합병하게 되는데 그는 대주주로만 참여하고 실무에서
는 은퇴한다. 이와 같은 소설의 내용은 대동사를 떠올리게 한다. 남조선지방
의 피혁생산자였던 대동사는 1938년 총독부가 피혁의 일원적 통제를 위해
피혁배급통제회사를 설립하려던 계획에 반대했다가 타협을 통해 다시 가담
했다. 이때 설립될 조선원피판매주식회사의 자본금은 백만 원이었고, 이후
조선피혁이 3배 증자(삼백만원)하여 단닌(피용약품)제조회사를 만들었다.68)
이에 비추어 소설 속 한성피혁회사는 재산이 삼백만원이다. 대기업이 기업을
포기하고 대주주로만 참여한 셈이다. 이것을 두고 조선인 기업가의 쇠락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대주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인 행보는 이목을
끈다.
통제회사의 대주주가 된 그는 회사정리로 70만 원 이상 수익을 남겼고,
영등포에 사두었던 땅이 통제회사의 기지로 팔려 십만 원 가량 벌었다. 이렇
게 생긴 현금은 생활자금을 제외하고 다시 땅을 사는 데 투자되었다. 또한
그는 토지보다 서화나 도자기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재산가 친구의 영향도
받는다.69) 당시 ‘지대가 통제’는 1941년 후반에야 이루어졌다. 가격이 등귀
하는 토지는 좋은 투자처였고 고완품은 조세회피를 꾀할 수 있는 효과적 수
단이었다. 이 소설은 조선인이 사업가는 아니지만 대자산가로 변신하여 전시
기에도 부를 축적․유지해가는 국면을 서사화한 작품인 것이다.
또한 그 딸인 한정은의 변모는 부의 승계 과정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녀는 가난한 건축학도인 어하영과의 사랑이 실패하고 이별하지만 어하영
과 공유했던 문화주택사업의 꿈은 포기하지 않는다.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
경에서 1년 동안 머물면서 그녀는 장래 자기 사업에 대한 견식을 넓히고 “실
업계 거두들의 회고담이나 수상록 같은 책”을 읽었다. 이후 아버지의 자금을
지원 받아 밭과 논 만여 평, 집터와 논밭(家垈)을 삼사천 평, 임야 삼만여 평
을 구입해 문화주택사업에 착수한다. 그녀가 국가적 문화운동 운운 하지만
68) 「대동사는 반대 태도」, ��동아일보��, 1938.11.28, 3쪽; 「原皮통제회사 설립준비 진보」, ��동아일보��,
1939.1.14, 4쪽; 「단닌회사설립 조선피혁증자 이유」, ��동아일보�� 1939.4.12, 4쪽.
69) 이태준, ��별은 창마다��(1942.1~1943.6), 깊은샘, 2000, 189~192쪽.
394 한국학연구 제43집
자선사업이 아니었다. 고급문화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고객은 빈곤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70) 이 사업은 만일 실패해도 투자금의 환수 가능성을 고려
하여 철저하게 추진되었다.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버지가 투자를 결정
했을 때는 딸의 사업계획과 투자타당성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리 없
다.71) 그녀의 사업가로서의 변신과 행보는 대자본가 2세의 출현과 부의 이
전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당국의 전쟁상
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가는 국면의 저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전시기 기업
가 및 자산가의 생존방식’, 그리고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물욕(物慾)을 비난받
는 일반인과 자본가의 경제적 격차가 어떻게 해서 심화되었는지 가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요컨대 당국은 시국과 애국심 기반의 군국이데올로기, 일본국민의 생활양
식과 함께 물욕(物慾)과 사치 근절 등의 생활감각을 전쟁상식으로 표방했다.
이것은 전황(戰況)과 결합해 절약과 수탈의 합법성을 보장하고 정당화하며
불합리를 은폐하는 경제상식으로 작동했다. 국가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려
했던 일본의 생산/생산력주의는 단순히 많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제
와 억압체제를 유지하고 사회전체를 전시생산에 적합한 제도로 개편하려 했
다는 점에서 조선인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하지만 이번 장의 문학작품은 당
국의 지식을 전유하거나 전복하여 오히려 고통어린 현실을 재현하거나 환기
했다.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황군이 아니라 가난한 가정 출신의 지원병, 당국
의 지침을 어기고 식모의 존재와 역할을 고평, 국가를 위해 무사심의 소양을
갖춰야할 사람들이 물욕을 강하게 드러냈고 국책산업의 관계자는 책임의식
을 버리고 물자를 착복했으며 기업은 전시 중에도 재산을 불리기 위해 혈안
이었다. ‘국민문학’, ‘국책문학’이 강요되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현실
의 총체성과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문학의 속성상 당대 문학의 상당수가
당국의 전쟁상식과 균열하고 인민의 지난한 현실과 고충, 생활감정, 생존욕
70) 1942년 서울의 불량주택 거주자가 약 7500호, 3만여 명이었다.
71) 당시 주택정책 관해서는 이명학, 「총동원체제기(1937~1945년) 조선총독부의 주택임대가격 통제정
책 시행과 운영」, ��민족문화연구�� 70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6.2, 295~330면을 참조.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95
망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72) 이는 당국의 전쟁상식이 조선인에게
부정당했다는 의미에서 그 실효성을 가늠케 하며, 문학을 통한 당대 인식의
유효성을 확인할 수 있다.
4. 나가며
“진충보국을 다하는 어버이가 되십시오. 대동아전쟁은 어떠케 되어 이러낫는가?
대동아전쟁의 목적은 무엇인가? 금후 우리일본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움직임은
어떠케 되나? 이런 것을 바르게 알아서 일본인으로서의 영광을 자각하고 일시동인
의 성지를 바뜨는 훌륭한 황국식민으로서 진충보국을 다하는 어버이로서 어린이에
게 모범을 보이십시오. 어린이에게 시국교육을 철저히 하십시오.”73)
이 글이 보여주듯 전쟁상식은 전쟁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황국신민이
갖춰야할 기본 상식이었으며 생활규범 및 훈육의 규준이었다. 일본은 상식
있는 황국신민을 바랐다. 당국의 입장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전쟁에 대한 조
선인의 무관심과,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인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이 절실해
졌던 일본과의 엄청난 괴리 문제”를74) 시급히 해결해야만 했다. 이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당국의 실제적 조치인 지식 및 지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 당국이 다양다기한 전쟁상식을 산출한 것은 전쟁의 정당성, 지속성과
체제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고 실제적 이유는 원활한 경제 동원이
핵심이었다. 전쟁상식은 경제상식과 결부된 것이었다. 전쟁은 심각한 경제
난을 야기한다. 조선인의 반발 내지 혁명을 무마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72) 고급 예술소설의 사상성이 건전한 상식을 일상화 한다는 맥락에서 통속소설의 수준 향상이 요구되
기도 했다. 통속소설이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수준 향상이 올바른 상식의 확산에 기여
한다는 의미이다. 「通俗小說論-사상을 상식화 하는 문제」, ��매일신보��, 1940.10.5, 4쪽.
73) 宮本揆百, 「교육도 대동아체제-진충보국을 다하는 정신-전쟁지식과 용기를 기르고」, ��매일신보��,
1942.01.27, 4쪽.
74)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69쪽.
396 한국학연구 제43집
과중한 전쟁비용을 감내하도록 당국은 유도해 내야 했다. 전쟁 하 조선인이
생명을 보전하는 문제는 ‘전시 일본은 조선인을 어떻게 살게 하는가’ 하는
질문이 될 수 있다. 이 시기 전쟁상식의 문제는 담론의 인지구조, 인지체계
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기존 연구의 ‘지식-담론’의 관
계가 아니라 일상의 ‘지식-상식’의 지식사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이
논문은 금지나 억압, 나아가 규율로서의 권력 문제를 넘어서 대중들이 구체
적으로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식(지침)을 주는, 다시 말해 삶을 가능하
게 하는 생 권력으로 총력전기의 식민지 권력을 접근한 시도였다. 지식은 명
령과 지시 같은 직접적인 금지와 규제가 아니며 장려, 촉진의 통치 수단일
수 있다.75) 당국의 지식은 인민의 자발성과 암묵적 동조, 상식 등 세뇌를 유
도하는 기능을 했다. 총력전기가 관료기구 주도의 동원체제이기는 하지만
전시 정회제의 제한된 주민자치도 있었듯이, 엘리트의 주요 담론과 함께 기
층의 인민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전쟁상
식이 체제의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식민지 권력은 전황에 따라 전쟁수행 주체를 호명하고 관련 지식을 배포
했다. 그 과정에서 남성 지원병, 총후부인의 사명과 모범이 강조되면서 실제
삶 속에서 노동자나 농민, 지주, 기업이 처한 경제적 현실이 왜곡되거나 은폐
됐다. 따라서 지식, 상식과 경제의 문제를 결부지어 총력전기를 접근하는 것
은 종국적으로 ‘당국-기업-지주-민중’의 관계 재편을 조망하고 총력전기
경제관계의 총체사, 총체적 경험의 지형도를 그리기 위한 시도이다. 전쟁은
모든 국민의 극단적 희생을 요구한다는 상식(통념)과 실제 현실은 달랐다.
절대절명의 전시 국면에서도 전쟁비용은 각 경제주체의 경제력에 따른 균등
부담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 사회적 불만이 야기 될 수 있다. 전쟁은
구성원의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어떻게 재편했는가. 지주와 촌민의 간극은
전쟁 이전에 비해서는 줄었다. 총력전기에 일본에 협력한 대지주를 제외하고
지주와 농민의 간극은 조금 줄어들었으며76) 지주는 반일 성향으로 돌아서게
75) 토마스 렘케, 심성보 옮김, ��생명정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5.10, 63~91쪽 참조.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397
된다. 전반적으로 전비 부담의 형평성을 둘러싼 계급 간 갈등도 크게 표출되
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언론의 효과적 통제와 대다수의 삶이 빈곤의 깊
은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방증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공론화되
지 않거나 가시화 되지 않은 곳에서 김성수와 같은 기업가는 관치금융, 정경
유착의 혜택을 받으면서 대재벌로 성장했다. 당시 여전히 차별정책을 체험해
야 했던 조선 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무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태업과 직장이
탈, 도주를 일삼고 생산기관을 파괴하거나77) 해방 이후 노동자들이 공장의
자치경영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현실적 모순이 표출된 일면이겠다. 그외 자
산가들도 나름의 자산관리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고 유지해갔다. 전시공업의
대기업과 민간인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었다. 당국은
각종 지식을 보급하고 상식화하여 조선인의 경제적 불만을 완화하고 은폐하
거나 오히려 동원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학작품이 보여주듯 조선인은
당국의 전쟁상식이 갖는 허위와 위선을 일정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저항 표출이 어려웠을 뿐이다. 권력자원과 결합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곤궁한 현실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해간 조선인에게는 당국의 ‘상식’이 아니라
‘종전(終戰)’ 소식만이 희망이었다.78)
76) 참고로 연구자 간 관점의 차이이긴 한 데, 하층농의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었더라도 1942년 이후
하층 토지미소유자의 토지취득이 증가하고 토지소유의 불평등이 조금 감소하는 국면을 분석한 연
구도 있다. 홍제환, 이경훈, 「일제 말기 조선 농촌의 경제동향, 1935~1944: 경북 예천군 용문면
소토지소유자 추세를 중심으로」, ��경제사학�� 45권0호, 경제사학회, 2008, 109~141쪽.
77)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선인, 2013.2, 141~159쪽, 313~328쪽. 일부
노동자는 조선인의 전쟁비용부담과 전쟁수행, 일제패망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국방헌금 모집
을 누가 발기했는가. 누구도 일본과 중국이 전쟁한다 해서 우리 노동자가 돈을 낼 필요는 없지 않
은가. 정부는 전쟁준비를 위해 세금을 걷어 우리 노동자로부터 돈을 착취하고 있다. 이 더위에 노동
한 돈을 낼 필요는 없다. 1전도 낼 수 없다. 세계에서 우리 노동자를 위해 싸워 주는 것은 러시아와
스페인 인민전선이다. 노동자가 중일전쟁에 돈을 내는 것은 자살과 같다. 화약을 등에 지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노동자의 이익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만 둬라.” 같은 책,
318쪽.
78) 여러 익명의 심사자 선생님께서 세심한 조언을 해주셨다. 하지만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제대로 반
영하지 못했다. 선생님들께 죄송하고 감사드린다.
398 한국학연구 제4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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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한국학연구 제43집
The Late Colonial Era, wartime economy
and war-common sense in chosun
Lee, Haeng-Seon
This article, focusing on changes in economic policy, I think I will look
at the aspects of war common sense is built with the ‘dissemination of
knowledge’. The arms race, because it implies the expansion of infinite
productivity for victory, war causes a variation in the production relationship
with the restructuring of the economic structure. Here, although the spread of
‘knowledge of war’ is important, colonial home that was completely secure
the intellectual productivity is not the first place there. It does not have
knowledge that is suitable for war be immediately calculated. It built a ‘war
common sense’, in that it requires time and must focus on dissemination of
knowledge of the authorities with changes in game situation. Transfer to
wartime regime, it was forced and rapid disruption of the everyday common
sense, and a new war common sense epistemological transformation. These
changes were able to fundamentally accepted in Korea, because the reality has
configured the common sense of totalitarianism as the logic of the undeniable
situation “during the war”. Discourse which control power is spread by creating
a social issue here is to conceal the harsh economic exploitation, it can grasp
that there be a strategy to prevent the collapse of be sustained produced
relationship. When propaganda books of authorities to spread, to grasp the
economic policy and in mind as the “economic combination of structure and
ideology”, “composition reflecting the dominant discourse of class power” is
식민지 말기 조선의 전시경제와 전쟁상식 401
important. War that requested the sacrifice of all the people, brought even social
equality? Reduced landowners and villagers of the gap is considerable, conflict
between the class over the fairness of the overall war burden did not appear
large. This media has been effectively controlled, also, the majority of people
have proved that it is a poverty of the state. However, the fact that
entrepreneurs such as “Kim Sung Soo” has grown into a large conglomerate
benefited from the cantilever finance, was not well-known. After the liberation,
workers that claimed the autonomy management of the factory, It is what was
a sign of these realistic contradiction. In short, this article attempts to analyze
the spread and common sense of the process of knowledge of the war in the
comparison of economic policy. So we try to analyze the nature of economic
inequality and war footing. Depiction of literature there is no choice but to
imply a situation of economic reality to sudden change. Therefore literature
is worth to be able to investigate the aspects of inequality that has been
re-structured in a common sense of the process of economic logic.
Key words : Choejaeseo, Parktaewon, Gimsong, Leetaejun, Capitalist in
colonial era, Madam in the rear guard, Militaristic Mother,
Biopolitics, Cultural history of knowledge, Kim SungSoo,
ChoiJunghee, Anhoinam, ChoiInWook, KimTaejin, LeePukM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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