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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조형화된 역사인가 역사의 조형화인가 -/김 재 수.강원대

<국 문 초 록>
역사는 과거사(過去事)의 기록이 아니라 당대사(當代事)의 기록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자기시대를 반영한다. 그래서 역사 속에는 시대의 정신뿐만 아니라 이데올로
기도, 문화도, 예술도 배여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미술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술가는 저마다 다양한 양식으로 시대를 조형화하려 한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시대를 초극하려는 양식일지라도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어떤 시대의 초극도
과거와 현재를 그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쿨터만도 미술의 역사는 시대의 조건에 종속되는 전개과정, 변화하는
인간의 요구에 종속되는 전개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자기시대의 안목으
로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조명하고 발견해온 미술사의 조형화 노력은 동,서양간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의 현대미술사가 지나온 궤적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20세기는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적 혼란과 이후 극심한 이데올
로기 대립 속에서 투쟁과 생존을 이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세계화’의 파고는
우리에게 보다 넓고 깊은 안목으로 한국의 현대사와 그 속에서 성장해온 현대미술의
모습을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거기에는 어느 때보다도 시련과 굴곡이
많았던 우리의 현대사가 조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미술 속에는 지난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평가가 주류이면서도
그 반대도 적지 않게 눈에 뜨인다. 그만큼 그 시대를 살아간 미술가들도 시대인식을
저마다의 안목으로 조형화하려 했다. 그들은 은연중에도 역사인식을 조형하며
역사화(歷史化)하려 한 것이다. 시대정신에 대하여 잠재된 인식의 조형화마저도
역사화(歷史畵)가 된 것이다. 그 점에서도 지난날의 미술작품들에 대한 평가와
가치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새롭게 물어야 할 역사적 당위와 의무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도 한국 현대사의 예술적 자취로 남아 있는 ‘민족기록화’를
중심으로 그 의미와 한계,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 주제어
상속욕망, 기록으로서의 역사, 역사화, 민족기록화, 민중미술

C ontents


1. 시작하는 말
2. 역사화로서 민족기록화
2.1 역사화의 개념과 발전
2.2 역사화의 기록성과 표현성
2.3 민족기록화로서 역사화
3. 반성적 토대로서 한민족기록화
3.1 회고와 반성
3.2 태생적 한계
3.3 탈관변화와 민중미술
4. 역사화의 가능성
5. 맺는말


1. 시작하는 말
인간은 어떤 종(種)보다도 삶의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이 강한 존재다. 인간
은 종족의 보존을 비롯해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남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 기술, 학문, 예술 등의 발전과 진보가 모두 끊임없는 보존과
상속욕망의 결과물들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문자나 조형기호, 즉 기
록으로서의 역사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욕망들이 역사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주로 욕망행위의 동기에 대한 역사라
면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무엇보다 그것의 결과에 대한 역사가 된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인간은 일찍이 문자나 문양, 또는 기호로써 사유와
감정의 흔적을 조형화해왔다. 문자기록으로서 철학의 역사가 그렇게 만들어
졌듯이 조형기록으로서 미술의 역사도 그렇게 이어져왔다. 하지만 모든 기록
으로서의 역사가 과거지향을 그 본질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역사
는 자기시대를 기록한다. 역사는 초시간적이라기보다 시간구속적이기 때문
이다.
역사는 과거사(過去事)의 기록이 아니라 당대사(當代事)의 기록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자기시대를 반영한다. 그래서 역사 속에는 시대의 정신뿐만 아니
라 이데올로기도, 문화도, 예술도 배여 들게 마련이다. 이것은 미술의 역사에서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57


도 마찬가지다. 미술가는 저마다 다양한 양식으로 시대를 조형화하려 한다.
설사 의도적으로 시대를 초극하려는 조형언어이거나 표현양식일지라도 그 시
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어떤 시대의 초극도 과거와 현재를 그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쿨터만도 미술의 역사는 시대의 조건에 종속되는 전개과
정을, 즉 변화하는 인간의 요구에 종속되는 전개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한 시대에는 과거의 상을 새롭게 보는 위대한 미술가들이 있고,
미술사가도 이들의 시각에 의해 형성된다. 모든 현재는 다 무한하며, 그 안에는
생생하게 보존된 과거가 모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미술사학이 언제나 갖게
되는 과제는 그때그때 달라진 상황에 맞춰 과거를 생생하게 보존하고 이를
자기 시대의 안목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1)
이처럼 자기시대의 안목으로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조명하고 발견해온 미술
가들의 조형화 노력은 동,서양간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의 현대미술
사가 지나온 궤적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의 20세기는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적 혼란과 그 이후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 속
에서 투쟁과 생존을 이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세계화’의 파고는 우리
에게 보다 넓고 깊은 안목으로 한국의 현대사와 그 속에서 성장해온 현대미술
의 모습을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거기에는 어느 때보다도 시련과
굴곡이 많았던 우리의 현대사가 조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미술 속에는 지난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평가가
주류를 이루면서도 그 반대도 적지 않게 눈에 뜨인다. 그만큼 순탄치 않은
현대를 살아간 한국의 미술가들은 시대인식을 저마다의 안목으로 조형화하려
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역사인식을 조형하며 역사화(歷史化)하려 했지만 은
연중에도 이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편향된 이데올로기나 잠재된
시대인식마저도 역사화(歷史畵)가 된 것이다. 국내의 미술가뿐만 아니라 심지
어 피카소 같은 국외자까지도 한국동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견과 역사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한국의 역사화에 끼어들기할 정도였다. 무엇
보다도 한국의 현대사가 그만큼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도 한국의
현대사에 대한 미술가들의 조형적 반응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중요하다. 그런


1) Udo Kultermann, Geschichte der Kunstgeschichte, Prestel, 1996, 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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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도 격동기 한국의 미술작품들에 대한 평가와 가치를 돌아보고 그 의미
를 새롭게 물어야 할 역사적 당위와 의무가 오늘에 주어진다.
피카소, <한국에서의 대량학살>, 1951, 판자에 유화
최근 들어서 3.1운동과 한국미술, 한국전쟁과 한국미술, 일본근대미술과 한
국미술 등 우리의 현대사와 미술과의 관계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는 왕조시기와 현대사를 잇는 역사적 전환기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 말로 현재를 이해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도 한국 현대사의 예술적 자취로 남아 있는 ‘민족기록화’를 중심으
로 그 의미와 한계, 그리고 가능성을 돌아보며 새로운 발전의 기초로 삼고자
한다.


2. 역사화로서 민족기록화
2.1 역사화의 개념과 발전
역사화(歷史畵)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거나 기념할만한 사건과
사실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그림’을 말한다.2) 사건과 사실을 조형화하는 의미


2) 한정혜, 「조선시대의 역사화」, ?조형? 제20호, 1997. pp.8~9.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59


로서의 역사화는 미술의 역사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역사화(History Painting)의 용어 사용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즉 유럽에서
18세기 말엽부터 사용되어온 이 개념이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유럽화
단에서 역사화의 개념을 도입한 일본작가들에 의해서 1890년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3)
근대적 개념의 역사화는 처음으로 투시도법(원근법)에 기하학적 기초를 부
여한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이스토리아(Istoria)를 그 기원으로 한다.
이스토리아는 최초의 근대적 회화론인 알베르티의 《회화론》(De Pictura)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기념비적 성격과 극적인 감동을 자아내기 위한 사실성과
표현성이 합쳐진 인문학적 내용을 의미한다.4) 그 때문에 야콥 부르크하르트도
회화가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학문(기하학이자 역사학)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평한다. 이처럼 알베르티에 의해 회화 속에 자리잡은 이스토리
아는 그 이후 17~18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아카데미즘 미술의 모델로 자리를
확보하면서 작품의 질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
것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사에서 후원자의 요청이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역사화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가늠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정체성의 형성과정을 거치면서 역사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
까지 유럽에서는 풍성하게 제작되었다. 다시 말해 조형예술로서 역사화도 인
문학적으로 역사주의 시대를 반영하려 했는가 하면, 예술사적으로도 과거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감수성’(sense of the lost)과 ‘상상력’(imagination)을 원동
력으로 하는 낭만주의에 동참하며 ‘기록’으로서 뿐만 아니라 ‘표현’으로서도
그 의미를 확대하려 했다.
또한 역사화는 역사적 주체의 단위에 따라 집단과 개인의, 즉 권력구성체나
사회체의 이념이나 기념할만한 사건과 사실을 기록한 역사화와 개인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화로 구분되었다. 전자(前者)의 경우는 대개 정치적, 재정적으로
미술가를 후원하는 왕과 주류세력이 애국(愛國)의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위해 정치적 매개로 활용되는 경우에 해당되며5), 후자는 체제순응적이든 아니


3) 정형민, 「한국 근대 역사화」, ?조형? 제20호, pp. 37~38.
4) 정영목, 「한국 현대 역사화 : 그 성격과 위상」 ?조형? 제20호, pp. 58~59.
5) 들라크로아(Delacroix)나 풍경화의 선구적 위치에 있었던 루소(Rousseau)도 1830년 루이 필립
(Louis-Philippe) 국왕과 프랑스 정부의 위임을 받아 왕권과 부르주아 계층이 선호하는 역사화
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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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반체제적이든 작가 개인의 시대정신과 이념의 표현수단으로 동원되는 경우
가 대부분이었다.
예컨대 1855년 제1회 만국박람회가 주관한 미술전에 출품을 거절당한 귀
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돌 깨는 사람들」(The Stone Breakers)과
「오르낭의 매장」(The burial at Ornans)이 훗날 역사화로서 주목받는 이유가
그것이다. 특히 아카데미즘에 대결하기 위해 그가 이들 작품과 더불어 세상
에 던진 <사실주의 선언문>이 바로 기록으로서의 역사의 증언이 되었기 때문
이다.
“민중에게 진정한 회화를 제시하고 진실한 역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미술을
갱신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진정한 역사란 언제나 도덕관을 타락시키고 개인
을 처참히 쓰러뜨리는 그런 초인간적인 차원의 개입이 배제된 역사를 말한다.
진정한 역사란 여러 가지 허구의 속박을 벗어난 역사다. 미술가는 진실을 그리
기 위해 현재 시간으로 열린 시선이 필요하다. 머리가 아니라 눈으로 바라보아
야 한다”6)는 쿠르베의 주장은 사실주의 선언을 넘어서 역사화가 어떤 것이어
야 하는지를 충고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2.2 역사화의 기록성과 표현성
역사화는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큼 중요한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조형적 표현
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회화이므로 조형적 속성인 재현과 표현의 선택지
(alternatives)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사건의 가능한 재현
을 그 본질로 삼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역사화의 기록성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의 조형화도 역사에 대한 일종의 실증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화에는 실증주의 역사가 지향하는 재현의 엄밀성보다 회화로서 표현의 가변적
자유가 애초부터 주어져 있다. 역사화에서 기록성보다 표현성이 강조되는 이
유가 거기에 있다.
더구나 이념중립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나아가 가치중립적인 역사가
있을 수 없듯이 그와 같은 사정은 역사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작품은
양식과 표현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일 뿐 이념개입적이고 가치개입적이기 때
문이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사유의 경계초과도 마다하지 않는 초현


6) 이광래, ?미술을 철학한다?, 미술문화사, 2007, p. 93.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61


살바도르 달리, <히틀러의 수수께끼>, 1939
실주의자까지도 역사화
에 참여함으로써 역설의
감행에 주저하지 않는다.
예컨대 살바도르 달리의
반 ( 反) 유 태 주 의
(Anti-Judaism)에 대한 희
롱이 그것이다. 그는 히
틀러가 게르만민족의 서
구제패를 위해 정치적 공
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을 일으키며 군사적 대공
세로 전환하기 시작한 1939년 「히틀러의 수수께끼」를 통해 독재자의 야망을
희화하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역사화는 철저한 실증적 기록이나 사료같은 문서들
(archives)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 즉 생략이나 과장을
통한 조형적 ‘표현’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역사화의 대표
작으로 일컬어지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나폴레옹의 대관
식」의 경우가 그러하다. 작가인 다비드가 세 번의 수정을 통해 법왕(法王)이
주는 왕관을 수여받기보다는 자신이 왕후 죠세핀에게 관(冠)을 씌워주는 모습
을 통해 주인공 나폴레옹의 권위와 의지를 표현하려 한 것은 역사화의 기록성
보다는 표현성을 더 잘 드러내려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화의 표현성은 개인을 소재로 한 초상화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의 초상화는 주문자의 직,간접적 요구—사회적 권위와 성공을 드러내길
원하는—에 부합하는 표현이 작품의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
의 <인노켄티우스 10세>를 희화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인노켄
티우스 10세 연구>가 그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죽음과 불안의 절망적
실존을 체득한 부조리의 작가 베이컨은 근엄과 평안의 상징인 교황을 불안과
공포의 상징으로 대치시킴으로써 ‘부조리의 철학’에 대해 회화가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주저 없이 실험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느라
크게 벌린 입과 겁에 질려 일그러진 교황의 얼굴을 통해 부조리의 화가 베이컨
은 진정한 역사화를 그리려 했던 사실주의자 벨라스케스에게 본래적으로 부조


262 _ 인문과학연구 30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70


리한 인간의 실존을 설교하는 것이다.7)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과오도 증오하고 있다.


2.3 민족기록화로서 역사화
역사화는 ‘개인과 공동체’가 머금고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이나 사실을 표현
한 회화를 지칭한다. 이때 개인이나 공동체는 역사와 무관한 존재일반이 아니
라 기록되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개인이거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개인
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조형화일수도 있고 국가나 민족, 나아가 세계시민으로
서 인류공동체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회화적 표현일 수도 있다. 이른바 민족
기록화로서 역사화도 그렇게 해서 출현하는 것이다.
1830년 7월 혁명을 상징하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
신>(1870)이나 독일 나치 콘도르 비행단의 스페인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폭격
에 항의하기 위해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이 폭격으로 작은 바스크
인 마을 전체 가옥의 80%가 파괴되고 민간인 150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처럼
한 민족이 겪은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재현한 소위 ‘민족기록화’는 그 작품의
제목이나 주제의 의미에서부터 역사화를 명시하고 있다. 두 민족기록화 속에
서는 어떤 실증적 사료(史料)보다도 절대권력으로부터의 해방과 희생이라는
상반된 역사적 사건들이 극명하게 오버랩되고 있다.
한편 이렇게 조형화된 역
사적 증언으로서 민족기록화
는 한민족의 역사화에서도 찾
아보기 어렵지 않다. 한국에
서의 민족기록화는 1966년 당
시 정치적 실세로 알려진 5.16
민족상 이사장 김종필에 의해
착안되었다. 그 뒤 1967년 3월
당시 국가비상위원회 상임위
원 이원엽이 소장으로 있는
‘기록화 제작사무소’가 중심
7) 이광래, ?미술을 철학한다?, 미술문화사, 2007, p. 191.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63
이 되고, 거기에 역사적 소재를 표현하는 작품을 그리는 다수의 미술가들이
동참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들의 제1차 전시회(1967.7)에는 당시 55명의 작가
들이 단군왕검의 「개천도(開天圖)」를 비롯하여 구국위업의 행적이나 한국전
전승을 표현한 1천호 30점, 5백호 25점이 전시되었다.8)
이렇게 일종의 관변화로서 시작된 한국의 민족기록화 작업은 그 이후 역사적
실증성을 보충함으로써 역사화로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국사편찬위원회의 도움으로 초기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역사적 고증(考證)
을 보완한 것이다. 그 이후 전시회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모두 다섯 차례
에 걸쳐 진행되었다. 정권에 의해 기획되고 주문된 민족기록화였지만 그것 또한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조형화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 이후 민족기록화는 역사적 소재의 다양성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전국
의 기념관, 교육원, 박물관, 역사관 등에 수천점이나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이
들 작품은 단순히 역사의 조형화나 조형화된 역사화 이상의 의미를 지니면서
현실적으로도 역사를 가시적으로 실증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
다. 그 때문에 현재까지도 모든 역사교과서와 교육자료에는 이 작품들이 게재
되어 우리 국민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3. 반성적 토대로서 한민족기록화
3.1 회고와 반성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한국의 민족기록화는 그 일천한 역사만큼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닌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기록으로서의 사료(reading data)
를 조형물로서의 사료(watching data)로 전환하는데, 즉 역사의 조형화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 경험, 고증, 시스템 등 외적 조건뿐만 아니
라 작가 자신들의 내적 역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의 미비함이 그 원인일
8) 박영남 「민족기록화 10년의 채점표」 ?계간미술?, 1979. 가을, pp.167~173.
민족기록화 전시 1차 : 1967.7 (주제 : 구국위업& 한국전) 2차 : 1969 (주제 : 산업,문화)
3차 : 1972.12 (주제 : 월남전 참전) 4차 : 1972~1976 (주제 : 새마을 운동) 5차 : 1973~1978
(주제 : 5개로 분야로 나누어 전시. ①1차 경제편-30점 ②2차 경제편-20점 ③ 전승승편-20점
④ 구국위업편-20점 ⑤ 문화편-5점
264 _ 인문과학연구 30
장우성, <집현전 학사도>, 1974, 장지에 채색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기록화제작사무소를 중심으로 시작된 민족기록화 제1
차 전시회를 위한 작품의 제작기간은 이제까지 전시회에 대해 경험이 전혀
없었던 주관자들의 이해부족으로 인해 애초부터 불과 3개월밖에 주어지지 않
았다. 그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가 60%에 불과하자 주최 측에서 1개월을 연장하
여 4개월로 마무리했을 정도였다.
또한 월남전의 참전과 그 활약을 주제로 한 제3차 전시회의 경우에도 4개월
동안 2점의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의 경우 제작
기간으로 3년이 소요된 것과 비교하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은 졸속이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루게와 게라르라는 두 명의 조수가 작가 다비드를
도운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부족한 것은 제작시간만이 아니었다. 대작을 다루는 작가들의 경험 부족이
나 작가의 선정과 자료의 고증, 그리고 시스템의 부족도 한국의 민족기록화로
서 현대역사화가 드러낸 부실과 졸속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작가들
은 추상이든 구상이든 대개 50~100호정도 작품을 다루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500~1000호에 이르는 대작을 제작해본 경 험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론
가 이일(李逸)도 “화가들이 종전에는 큰 화폭을 경험하지 못해서인지 기록화의
명제에 맞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이나 분위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지
적한 바 있다.
한편 오광수는 작가들의 기초적
인 표현능력의 부족을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의 “제작자 55명중에 추
상계열의 작가가 25명이나 포함되
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들의 데
생력이 부족하여 지나치게 평면화
된 작품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사실계열의 작가들도 지나친 사진
적 표현으로 치우쳐 생동감이 결여
되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것
은 다름 아닌 작가선정의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추진위원과 고증위원을 겸임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65
했던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는 “고증을 하다 보면 역사적 근거를 도저히
제시할 수 없는 사례도 허다하다. 고증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여 무형의 역사
를 조형화한다는 민족기록화 본래의 취지와 맞지 않는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9)
실제로 세종대왕기념관에 소장중인 「집현전학사도(集賢殿學士圖)」에는 바
닦에 카펫이 깔리고, 고려청자와 19세기 청화백자, 최근의 경질도기가 소품으
로 혼재하며, 어울리지 않는 완자창살까지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작품의 배경
이 된 15세기 성균관 공청(公廳)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고증의
부실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과오들은 민족기록화나
역화사로서 ‘작품성의 부족이나 오류’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3.2 태생적 한계
그러면 한국의 현대역사화로서 민족기록화가 이러한 종합적 문제에 이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지닌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
된 것일 수 있다. 민족기록화 제작에 참여한 작가 중 구상계열의 경우 조형적으
로 일본 아카데미즘인 외광파(外光派)의 사실주의, 즉 자포니슴(Japonisme)으
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거나10) 그 작가들로부터 직,간접적인 교육과 영향
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비구상계열의 작가들도 사실적인 민족기록
화 작업에 관한 한 구상작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관변주의 아카데미즘의 본질인 자포니슴은 19세기 중반 필립 뷰르트
에서 모네를 거쳐 마네, 르노와르, 반 고흐11)에 이르기까지 일본 에도시대의
전통화인 우키요에(浮世畵)와 같은 일본화풍에 빠졌던 유럽의 자포니슴의 역수
입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아카데믹한 인상파 화풍’의 일본 외광파의 등장에
9) 박영남 , 앞의 책, pp. 167~173.
10) 오광수, 「한국 근대회화의 정취적 ․ 목가적 리얼리즘의 계보」, ?미술사 연구?, 1993,12,
p. 61.
11) 고흐에게 1887-8년은 <탕기할아버지의 초상>, <일본풍; 꽃이 핀 자두나무>, <일본풍; 비
속의 다리>, <일본소녀>, <의자에 앉아 있는 일본 소녀> 등의 작품에서 보듯이 자포니슴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심지어 그는 “나는 모든 일본미술품에서 보는 것처럼 순수하고 극단적
인 명료함을 원한다. 일본화가들은 마치 옷의 단추를 채우는 것처럼 단순하고 손쉽게 몇
개의 분명한 선으로 형상을 만든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광래,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대화」, ?일본사상?, 제20호, 2011, p. 7.
266 _ 인문과학연구 30
고희동, <정자관을 쓴 자화상>, 1915
는 프랑스의 살롱화가 라파엘 코랭(Raphael
Collin)의 제자였던 일본 자포니슴의 선구
자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나
구메 게이치로(久米桂一郞)의 영향이 크
다.12) 특히 라파엘의 영향 하에 일본누드화
를 개척한 구로다는 유럽에서 개화한 리얼
리즘에 충실하거나 인상파 회화운동에 집
중하기 보다는 ‘절충적인 화풍’을 일본적
감성으로서 정립시킨 것으로 평가된다.13)
즉, 조형적 표현에 있어 정묘한 역사화 제
작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어정쩡한’ 화풍
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의사(擬
似) 자포니슴’(pseudo-Japonisme)인 한국의 외광파의 원류가 되기도 했는 점이
다. 다시 말해 ‘1호 서양화가’라고 불리는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고희동을 비롯
해 도쿄미술학교의 수석을 차지한 김관호, 그리고 김찬영, 나혜석 등 당시 일본
유학파에 의해 한국의 서양화 속에 짙게 투영된 자포니슴의 잔영들이 그것이
다. 이처럼 한국 서양화의 역사는 고희동의 <정자관을 쓴 자화상>(1915)나 김
관호의 <자화상>(1916)에서도 보듯이 그 태생과정에서부터 일본 아카데미
즘14)의 유전인자를 통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라고 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제식미지 청
산의 구호를 앞세운 미술계의 반성에도 불구하고 이념의 청산이나 이미 순치
된 외광파 양식의 변혁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예컨대 민족미술론을 주
12) 홍선표, ?한국근대미술사?, 시공아트, 2009, p. 99. 구로다 세이키는 파리유학을 통해 습득한
신고전주의 형태의 묘사법에 인상주의 색조를 결합하여 아카데미즘화된 인상주의, 또는
인상파적 아카데미즘으로서 외광파 양식을 반영하였다. 그의 지도로 운영되던 메이지 후기
의 도쿄미술학교와 일본문부성 미술전람회 서양화부는 1944년까지 일본의 아카데미즘=관
학풍을 이끌어왔다.
13) 大野郁彦, 「일본 근대미술과 동경미술학교」, ?계간미술?, 1989.9, pp. 64~70.
14) 아카데미즘(Academism)이란 본래 아카데미, 즉 미술학교에서 수업받은 이들에 의한 정통적
인 화풍을 가리킨다. 18세기의 아카데미즘은 당시 미술의 주류였던 신고전주의 경향을
지칭하지만 일본의 아카데미즘은 철저한 신고전주의라기보다 인상파의 신고전풍과 절충된
경향의 화풍이었다. 오광수, 서성록, ?우리미술 100년?, 현암사, 2001, p. 77.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67
장한 길진섭은 “일제가 남기고 간 오욕의 청소가 민족문화 건설의 출발”이라
고 선언하는가 하면 우파 미술계를 이끌어온 고희동마저도 ‘일제시대의 비
(非)를 일소하여 대청소해 버리고 신경역(新境域)을 개척하자’고 부르짖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유로운 길을 건전하게 걸어가면 자연히 우리
미술계는 훌륭하고 거룩하게 생겨나리라고 믿는다’는 애매하고 무기력하며
비(非)반성적이기까지 한 고희동의 주문에서도 보듯이 미술계의 기득권을 가
진 그 주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
할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 뒤를 이어서 이종우, 도상봉, 이마동, 김인승,
박득순 등 1949년 국전을 중심으로 세력화된 한국 아카데미즘의 주역들이 등
장했지만 이들이 주도하는 아카데미즘도 조선적 향토색과 주제만 계승했을뿐
그들 또한 신고전주의와 외광파적 사실풍의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홍선표도 이들의 활동을 가리켜 “정통으로 건국미술의 기초를 튼튼하
게 다지고, 자유시민사회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고상한 이상미를 추구한다”15)
고 평할뿐 자포니슴과의 관계 청산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5,16 군사혁명 이후 암울했던 시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켜보려는 목적으로 혁명의 주체세력에 의해 새롭게 출범한 한국의 민족
기록화 운동에까지 미친 자포니슴의 영향이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1960-70년
대의 정치적 암흑기에 반대급부적으로 반사이익을 보게 된 문화예술계는 이때
를 문화적 ‘중흥기’라고 부른다. 미술계에서도 이때의 정치사회적 암울한 현실
에 대한 반작용이 두 가지의 상반된 양상으로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난세의 현실도피적인 추상계열의 대두와 이와 반대로 현실수용적인 구상계열
의 역사화의 출현이 그것이다.
전자가 암흑기의 불행한 트라우마를 그 역으로 표백한 ‘백색모노크롬’의
등장과 유행이었다면16), 후자는 민족기록화 세력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어두
운 정치현실을 의도적으로 표백하거나 외면함으로써 현실과의 거리감을 유지
하려 했던 추상화와는 달리 민족기록화는 또 다른 관변화(官邊畵)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참여한 작가들이 지닌 태생적 한계들로 인해 내재
적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한 채 중흥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15) 홍선표, ?한국근대미술사?, p. 289.
16) 김복영, ?한국현대미술이론; 눈과 정신?, 한길아트, 2006, p. 36.
268 _ 인문과학연구 30
3.3 탈관변화와 민중미술
모든 역사에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1980년대 민족미술,
또는 민중미술의 출현과 더불어 관변화의 일종인 민족기록화에 대하여 일어난
반발과 거부가 그것이다. 윤범모도 “민족기록화전은 관변적인 의도 아래 졸속
된 전시회”로 전제하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80년대에 활동한 민족미술운
동 진영의 미술이 “몰역사적이고도 탈민족적이었던 보수적인 시각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했다.17)
또한 정영목도 “기록화에 대한 정치, 사회적인 태도는 전혀 변화하지 않았
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비합법성을 역사를 빌어 합리화시키려 하는 정치심리
의 복선이 깔려 있다. 본격적인 한국 현대 역사화의 출현은 1980년대 들어와
그 결실을 얻는다. 소위 민중미술(民衆美術) 이라고 일컬어지는 움직임의 기
점인 1980년의 <현실과 발언> 이후부터이다. 민중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고 하여 전자와 동일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18)
오윤, <여공의 수기>,1985, 목판
<공해시대>, 1985, 목판
김복용도 “민중미술은 1970년대 미술이 가지는 일체의 규범을 그것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 하에 이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하였다”19)고 전제한 뒤
17) 윤범모, 「미술에 나타난 독립운동정신」 ?월간미술?, 1990. 3 pp. 51~56.
18) 정영목, 앞의 책. pp.67~69.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69
판화가 오윤의 <애비>(1981), <공해시대>(1985), <여공의 수기>(1985) 등의 흑
백판화에서 보듯이 민중미술이 사회와 역사의 연계성에 의해 영위되는 현실들
의 표현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그는 민중미술의 출현이 민족미술로 이어지는
단초라고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1970년대 민족문학의 대두 이래 민족주의 지향을 수용하면서
소위 민족미술의 이념을 굳게 신봉해온 민중미술과 이에 대립해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술이념 간에는 깊은 단층이 존재하게 되었다. 민중미
술이 민족미술로 변신했던 이면에는…민족예술에서 나타나듯이 민중의 비애
가 자신의 비애로 육화되며, 민중의 기쁨, 용기, 꿈 등 민중의 현실로부터 민족
의 현실에 이를 수 있고 이것을 미술로 실천할 수 있는”20) 시각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민중미술의 출현은 당시의 어두운 사회현실을 역사적으로 증언하려는
강한 역사의식의 발로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사회현실을 야유, 조소, 경멸,
풍자, 익살 희롱기 넘치는 대상으로 보았으며, 미술의 미적 가치나 형식성,
고유성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시각적 충격과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서성록에 의하면 “이러한 활동양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것은
1984년 ‘삶의 미술’이라는 행사였다. 젊은 작가들이 결집한 이 전시회에는 무
려 105명이 총 133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관훈미술관, 아랍문화원, 제3미술관
세군데에서 동시에 전시를 열었으며,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워크숍을 갖는 등
1980년대 중반을 결산하는 대단원의 활동을 과시했다.…이 작가들이 사회문제
의 발언 강도를 높이고 구체적 현실비판성을 띠게 됨에 따라 1985년 민중미술
은 심각한 침해를 당했는데, 즉 공권력이 개입하게 된 것이다”21)
그러나 모든 역사는 탄압과 저항을 더욱 주목하게 마련이다. 동서양을 막론
하고 역사화도 늘 거기서 생명력을 얻어온 게 사실이다. 당시 공권력의 탄압에
맞서 공동대응에 나선 민중미술의 결집이 그것이다. 그래서 출현한 것이 바로
‘민족미술협의회였다. 다시 말해 1985년 “건강한 민족문화의 건설과 민주화운
동에 적극 기여”라는 목표를 내세우고 민중미술운동의 결집체로 그 협의체가
출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더욱 공고하게 결성된 협의회원들의 역사인식의
19) 김복영, ?한국현대미술이론; 눈과 정신?, p. 79.
20) 김복영, 앞의 책, p. 81.
21) 서성록, ?우리미술 100년?, 현암사, 2001, p. 349.
270 _ 인문과학연구 30
단서는 무엇보다도 고달픈 노동자들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전시공간도
당연히 재야의 노동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화도 대개는
이른바 노동미술이라고 부르는 걸개그림들이었다. 심지어 1987년 7월에는 ‘걸
개그림 전문창작단’이 생겨날 정도였다.
서성록도 20세기 100년간의 한국미술을 돌이켜 보며 민중미술에 대하여
평하길, “1980년대 초반 민중미술의 목표가 ‘반독재’와 ‘반모더니즘’이었고 이
러한 모습을 ‘민중성’과 ‘민족성’ 개념으로 발전시켰다면, 1980년대 후반의
목표는 계급해방론 또는 계급투쟁론의 실천으로 집약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파적 현실주의를 목적의식적 지도원리로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미술
운동의 지도이념으로 확립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현실을 가장 올바르게 표현
할 수 있는 미술형태로 단언하는 데서도 확인된다”22)는 것이다.
그러나 반정부적이고 좌파 이데올로기적 지향성을 강화하는 민중미술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민중미술은 이미 미술의 본질이나 그
보편성에 충실하기보다 민족기록화로서의 편향성뿐만 아니라 정치적 당파성
을 갈수록 짙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심상용은 이에 대해 “순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대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배임이며, 참여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이분
법(二分法). 그러나 이것은 어떤 특정한 역사에 대한 신념일 뿐”이라고 전제하
고, (역사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이 그 시대의 산물이자 역사적 조건들의 반향
이라고 하여 이념적 판단을 넘어설 것을 주장하였다.23) 미술의 본질과 보편성
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이념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주의 진영에서조차 역사화에 대한 이러한 탈이데올로기적 관점
을 제기할 정도다. 중국의 조의강(曺意强)은 “이같은 역사화들은 20세기 중국
미술 최고의 위업으로 전제하고 이데올로기 시대의 결과물로만 정의하는 것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고 결론지었다.24) 이러한 논의들은 민족기
록화를 정치적 잣대로만 제단 할 것이 아니라 근대화와 산업화의 산물로서,
또는 역사화에 대한 반성적 토대로서 논의해야 함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긍정적 대안의 제시라는 시대적 요청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2) 오광수, 서성록, ?우리미술 100년?, 현암사, 2001, p. 353.
23) 심상용, 「한국 현대 역사화 : 그 성격과 위상에 대한 질의」, ?조형? 제20호, 1997. pp.77~78.
24) 曺意强. 「이데올로기 시대의 중국 역사화의 운명」, ?조형? 20호, 1997. pp. 98~99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71
4. 역사화의 가능성
앞에서 보았듯이 김복용은 관변역사화의 진화과정에서 출현한 민중미술이
반성의 계기로 제기한 문제들을 형식 대 현실, 창조 대 반영, 동일화 대 소통,
개인 대 공동체, 자유주의 대 민족주의 등으로 제시한다. 이에 반해 심상용은
이러한 이분법적 판단의 유보를 강조한다. 그러면 무엇이 역사화의 정체성에
대한 시비를 불러왔을까? 한국에서의 역사화는 왜 정체성을 의심받는 것일까?
과연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재현미술의 형식으로서 역사화의 정초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역사화의 잠재적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소위 모더니즘 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근본적인 ‘기근’에 있다. 이는 회화란 ‘화포와 안료의 질료적 배합’에 있다
는 모리스 드니 (Maurice Denis 1870~1943)적 예술관, 극단적 환원주의, 잭슨 폴록
(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의 오토마티즘(Automatism) 등 내용보다 예술적
형식에만 집중한 현대미술이 직면한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거기에다 배금주의(拜金主義), 성(性)에 대한 집착, 정치권력에
대한 갈증 등이 맞물려 예술 활동의 ‘근원적 토대’가 미약해졌다는 자기고백(自己
告白)이면서, 또 다른 ‘발전적 대안’으로서의 기도문(祈禱文)이기도 하다.
스테판 코올이 “조형예술과 문학에서 새롭게 탄생된 리얼리즘의 혁명성은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라는 요청에 있기보다는 새로운 소재의 영역을 열어놓
았다는 데 있다”25)고 하여 새로운 소재의 돌파를 리얼리즘의 공적으로 돌린다
면, ‘풍부한 소재’의 새로운 가능성은 역사화의 공적으로도 돌아갈 것이다.
거꾸로 아카데미즘과 비(非)아카데미즘(이대원과 박수근의 화풍과 같은), 또는
아카데미즘과 반(反)아카데미즘(현실과 발언이나 민족미술협의회와 같은)의
대립 등 리얼리즘의 임계점에서 역사화는 아래와 같이 그것의 새로운 가능성
으로 작용할 여지가 충분하다.
첫째, 그것은 역사와 평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난(至難)하고 드라마틱한
한국사의 경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부침과 굴곡이 많은 한국
사의 특징을 고려하면 한국의 역사화나 민족기록화는 그만큼 풍부한 소재로
인해 발전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화의 토대가 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추구해온 사실주의가 의심받지 않는 한 더욱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25) 스테판 코올, 여균동 역,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미래사, 1982, p.85
272 _ 인문과학연구 30
도 실증적 사건으로서의 역사는 역사화의 영원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화는 재현미술과 추상미술로 양분해온 양식사적 구분 이외에도
제3의 양식으로서 정체성을 마련하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을 표현하는 거시적 조형화 작업이지만 역사학에서 아날학파의
생활사와 같이 삶의 사소한 현장을 표현하는 미시적 조형화와 대비적 양식으
로서 짝짓기도 가능할 수 있다.
셋째, 역사화는 재현미술의 새로운 쟝르의 출현에서도 그렇다. 카메라의
발명 이후 가시적 동일성의 재현을 위협받아온 재현미술에 있어서 역사적 재
현의 역할은 안전한 쟝르를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현대
역사화의 역할과 기여를 기대해 볼만 하다.
넷째, 기존의 역사화가 고증사학이나 실증사학, 또는 역사방법론과 협력한
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학문의 융합을 강조하는, 그리고 학예융
합방법론에 고심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단지 심상용이
염려한대로 현실적 상황과 이분법적인 가치판단으로 인해 접근이 조심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논의를 이어 갈 때 비로소 ‘영원의
관점’에서 역사를 표현하는 진정한 역사화를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26)
다섯째, 역사화의 또 다른 가능성은 창조적인 양식의 발현에 있다. 개인의 역사
가 다르고 민족적, 국가적 공동체의 역사가 다름으로 인해 합당한 창조적 조형언
어의 필요와 요구는 시대적, 또는 민족적 당위다. 민족기록화 제작 당시 “기록화
제작에 충분한 토의와 고증이 앞서야 했었다. 그 속에서 민족형식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고 하는 유준상의 지적은 이제라도 귀담아 볼만 하다.
5. 맺는 말
역사화의 개념이나 발전을 고찰할 때 민족기록화는 현실적으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크게’ 존재하는 역사화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민족기록화는 그
출발에 있어서 개인의 절실한 필요나 공동체의 집단적 표출에 있다기보다는
관변화(官邊畵)의 일종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관료적 기획과
더불어 작가의 개인적 경험의 한계, 미술사적 배경의 부족, 정치적 판단으로
26) Donald Kuspit, 「미국의 현대 역사화」 ?조형 20호?, 1997. p,148~150.
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73
인한 발전적 논의의 애로 등 다양한 장애요소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화나 민족기록화가 갖는 잠재적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형식에만 매달린 기존의 현대미술의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격동기를 살아온 우리의 삶을 통해
가장 합당하고 풍부한 예술적 자양분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80년대
출현한 민중미술은 그것이 본격적인 역사화가 아닐지라도 ‘역사화란 이미 그
이전 세기에 지나가버린 유물일 뿐 오늘날에는 기록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에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폄하하는 평가를 무색하게 하기에 충분
하다. 적어도 역사가 지속되는 한 역사화는 어떤 형태와 양식으로든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족의 희노애락을 담아온 민족기록화가 사라질 수
없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내재적 문제는 역사화나 민족
기록화에도 그대로 과제로 남게 된다. 분단현실과 통일의 과제가 그것이다.
물론 예술이 역사적 과제에 대한 직접적인 솔루션(solution)이 될 수는 없다.
예술의 본질과 보편성 자체가 현실참여적이고 역사개입적일 수 없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해 ‘역사의 조형화’는 예술행위 그 이상일 수 없으므로 작가에게
이념적 과제를 직접 제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와 역사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1980년에 출범한
‘현실과 발언’(창립회원; 김건희, 김용태,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백수남, 성완
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오윤, 임옥상, 주재환) 그룹을 비롯하여 1985년의
민족미술협의회의 작가들에게서 보듯이 자신들의 이념을 조형화하기 위해 표
현양식을 개발하려 기울여온 그들의 노력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나아가 남북분단과 같은 역사현실에 대한 작가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조형화된 역사’, 즉 역사화를 통해 작가의 현실인식을 냉철하게
투영하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남북한의 상이한 두 가지의 조형언어와 두 종류의 역사화가 20세기
한국사의 아픔을 반영하고 대변한다 할지라도 남북한의 작가들에게 분단현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풍성한 역사화의 소재이고 민족기록화의 자산이지, 그 이상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화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재현미술의 발전가능성일뿐
사회현실의, 나아가 역사와 민족의 발전가능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274 _ 인문과학연구 30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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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역사화(歷史畵)에 대한 반성적 고찰 _ 275
? Abstract
A Study on the Modern History Painting in Korea
Kim, Jae-Soo
History is not a record of the events in the past but a record of the events
of the time. Thus, it is certain that history is saturated with not only the spirit
of the era but also ideology, culture and art. Each of artists, in various forms,
is trying to model the era. Even the style intentionally conquers the era, it
is bound to be the product of the era. The conquest of any era is certainly
based on the past and the present.
Udo Kultermann, an art historian, claims the history of art is bound to pass
the development process, being subordinate to the conditions of era and the
development process, being subordinate to the demands for humans. Like this,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there is no difference in the efforts for modeling
the history of art in which the past and the present have been newly reflected
and discovered. Especially, the course of the art of modern history in Korea
is not far from that. South Korea's 20th-century underwent the chaos in the
nation history, such as the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and continued the
struggle and survival in a severe ideological conflict since then. And subsequent
the wave of ‘globalization’ provided the opportunity for us to look back the
Korea' modern history and the appearance of modern art which have been
growing in the modern history. It is because, our modern history with more
trials and ups-and-downs than any other time, has been modeled in there.
Inside Korea's modern art in the past, the negative perception and assesment
of the past is the mainstream, yet vice versa also catches our sight not a
little. The artists, who lived that era, tried to model the consciousness of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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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with their own insight. They, without realizing, tried to model the
consciousness of history and historicized that. The modelling of the
subconsciousness for the spirit of the time has been historicized. In that respect,
too, we are given the needs and the responsibilities for eval‎uating the artistic
works in the past and looking back the value of them, and newly questioning
about its significance. Thus, this study, through focusing on ‘National Record
Paintings’, which remain as artistic vestiges, aims to detect their limit,
significance, and new possibilities.
[Key Words]
History Painting, History as record, Plastic Art, the Ethnic Art, Academism,
Japonis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