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目 次 >
1. 시작하며
2. 문화 유랑인의 출현: 90년대 이후 문화공간과 문화실천
3. 카메라-나와 역사들(histories)의 응시: 문정현의 「할매꽃」 경우
3.1 가족을 응시하는 카메라-나
3.2 대문자 History와 갈등⋅타협하는 개인의 역사들
4. 냉전과 서발턴: 고통을 성찰하는 his/herstories
4.1 비국민의 경계에서 고통을 성찰하기: 양영희의 「디어 평양」
4.2 작은 역사들과 고통의 치유: 왕빙(王兵)의 「和鳳鳴」
5. 나오며
1. 시작하며
급격한 정치적 변동, 전지구적 후기자본주의체제와 소비대중문화의 확산 속에서, 1990년
대 이후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문화화(culturalisation)가 진행 중이다. 1990년대 이후 지속
적으로 일어난 삶의 변화는 거시적인 정치⋅경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에서
민감하게 포착되고 있다. 급격한 변화만큼이나 자신들의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도 이전처럼
단일하지는 않다. 포스트냉전, 포스트모던, 포스트사회주의처럼, 어느 순간 담론에 퍼진 ‘포
스트post’라는 용어는 기존 구조로부터의 변화⋅이행을 해석하고자 하는 다양한 비평의 의
지들을 견인 한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던가, 중국대륙의 자본주의화라는 식의 상
징적인 사건들을 거론하며 냉전의 종식과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라는 말을 고민 없이 사용하
는 경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의 변화에 쉽게 순응해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
구조로부터 ‘벗어나거나(de-, 脫)’ 오래된 역사기억의 ‘바깥’과 ‘이후(after, 後)’를 말하는 것
은 단순하지 않다. 특히 기존 현실의 곳곳에 뿌리 박혀 살고 있는 다중의 기억과 감정 구조
를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1). 역사를 ‘벗어나거나’ ‘이후’를 말한다는 것은 현실에 여전히 존
재하는 고통의 기억들의 경계에 서야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 출현한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의 카메라-나(camera-I)
는 개인사를 응시하는 가운데 다중의 기억과 감정구조를 문제 삼는다. 그들은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자신의 ‘눈’과 ‘펜’으로 삼고 가족 혹은 무명의 개인의 과거를 응시하면서 개인의
삶에 침전된 역사들(histories)을 응시한다. 90년대 전후 청년기를 보냈던 카메라-나
(camera-I)가 윗세대 개인들의 기억을 응시하는 이 과정은 흥미롭다. 90년대 이후 전지구
적 자본주의의 수렴과 균열은 동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생산 공간의 변화를 야기했으며, ‘카
메라-나’들은 이러한 90년대를 청년기로 통과하면서 문화의 생산을 자신의 노동으로 선택한
새로운 문화주체들이다. 이들은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자신의 표현매체로 삼고, 타인의 삶
의 경계에 서게 되는 다큐멘터리를 자신들의 노동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
지(양영희의 「Dear 평양」(2006)), 외할머니(문정현, 「할매꽃」(2007)), 무명의 할머니(왕
빙(王兵)의 「和鳳鳴」(2006))처럼 윗세대들의 과거를 응시하는 가운데 50년대 냉전체제가
개인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시간의 문제를 응시하게 된다. 1950년대의 ‘그때’를 2000
년대 ‘지금’ 현재로 재구성하게 되는 이 작업들은 매우 사소한 개인의 기억들로부터 출발하
지만, 개인의 삶과 기억을 응시하는 이 과정은 공식적 역사에서 배제된 채 침묵하는 역사기
억들과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이 글은 90년대 청년기를 통
과했던 사람들이 ‘카메라-나’의 태도로 윗세대 개인들의 기억을 응시하는 과정과, 이 과정에
서 카메라-나와 피사체 사이에 고통의 대면과 자기성찰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음을 주목한
다. 변화한 문화생산 공간과 문화실천들 속에서 역사기억은 블록버스터 영화산업 속에서 소
비되어가기도 하지만2), 한편으로는 사적다큐멘터리처럼 개인의 삶 깊숙한 곳에 침묵하고
1) 천꽝씽, 백지운, 송승석, 임우경 역, 《제국의 눈》, 창비, 2003 180-265쪽.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47
있던 고통들을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의 얽혀있는 역사들(Entangled Histories)이 일
종의 치유의 작업 속에서 부면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90년대 이후 후기자본주의체제와
소비대중문화가 진행되는 동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화 과정 속에서, 정치의 문화화가 진행될 뿐
만 아니라 동시에 문화의 정치화가 일어나고 있는 맥락을 상기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2. 문화 유랑인의 출현:
90년대 이후 문화 공간과 실천의 문제
1990년대 동아시아 담론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는 문화비평의 의지는 본래 비평(critic)이
위기(crisis)라는 어원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급격한 변화와 이행을 일종의 ‘위기(crisis)’로
자각하며 보다 깊이 현실의 그늘 속으로 개입하려 한다. 급격한 정치적 변화와 후기자본주
의 체제의 대중문화의 확산을 통해, 일상에서는 현실 변화에 순응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왕샤오밍처럼 현실의 변화를 ‘위기’로 감지하는 비평의 의지는
일상 깊이 침전된 문제들을 찾아내고, 현실에 순응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중국적 맥락에서는
現代化)가 탈정치화된 문화주의의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지점들을 부각한다.3) 문혁의 그늘
에서 탈주하다가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그물에 걸린 중국의 문화장(cultural
fields)을 주목하며, 자신의 비평 행위는 곤혹에 처하면서도 반복적으로 저항하는 글쓰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다이진화4)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를 감지하는 비평의 행위는 1990
년대 이후 현실의 일상 속으로 내려가며,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대중의 일상 속에서 수렴되
는 과정과 그것의 균열을 읽어내려 한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들의 현실의 변화를 ‘위기’로
보며 비평을 수행하는 과정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에 따른 문화의 동일화 속에서 문화
화의 지역화 과정을 주목하게 된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것은 비판적으로 지역적 맥락을 만
들어가는 문화실천을 수행하게 된다. 중국연구자인 아리프 딜릭이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문화장(cultural fields)을 ‘2차 문화혁명’이라 불렀던 것은 바로 이러한 후기자본주의체제
2) 한국의 「쉬리」(1999),「태극기 휘날리며」(2004)처럼 현대사의 기억을 다루는 것에서부터, 중국
의 경우 「英雄」(2002), 「孔子」(2010)와 같은 팩션에 기반한 역사극들이 대표적이다.
3) 王曉明, 《半張臉的神話》,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3, 1-23쪽.
4) 戴錦華, 《霧中風景: 中國電影文化1978-1998》, 北京大學出版社,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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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렴과 균열이 일어나는 중국의 지역화 과정을 주목한 것이기도 하다.5)
이것은 1980년대 후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하며 사회의 문화화가
진행된 한국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문화의 사회변화가 ‘사회과학의 시대’로부터 ‘문
화의 시대’로 이행했다는 표현처럼6), 대중의 일상과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정치성을 모색하
는 것은 이른바 80년대 남한의 문화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변화한 1990년대를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했다7). 이들은 권력과 갈등의 양상이 문화적인 형태로 재현되는 흐름을 포착하
면서 정치의 문화화와 문화의 정치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에 주목하려 한다.8) 이들이
보기에 다국적 문화자본의 이데올로기의 교착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떠오른 대중문화의 장
(이른바 ‘한류(korean wave)’ 등)과 여기에 결합되는 문화산업⋅문화정책이란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실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화의 과정 속에서 이들은 한국의 정치적
지형과 접합하면서 다양한 정치지향적 문화담론이 형성되는 흐름을 주목한다9). 이러한 문
화비평은 90년대 이후 소비대중문화가 확산되는 가운데 생겨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수
렴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균열들을 주목하는 것인데, 특히 그것은 정치의 문화화와 더
불어 문화의 정치화가 동시에 수행되는, 동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화의 맥락을 주목하는 것
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 정치의 문화화의 과정은 신자유주의의 확산 속에서 가속화된다. 하지만 이
러한 정치의 문화화와 더불어 90년대 이후 동아시아 문화의 지역화 과정에는 문화의 정치화
가 동시에 추구되고 있다. 문화의 정치화 문제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고유한 역사적 계보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신문화운동, 문화대혁명 등처럼 20세기 내내 문화의 역할과 정치⋅사
회 변혁의 연관은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10)또한 80년대 한국의 미술⋅연
5) Arif Dirlik, <市長⋅文化⋅權力: 中國第二次‘文化革命’的形成(Markets, Culture, Power; The
making of ‘Second Cultural Revolution’ in China)>, 《文化硏究》 第2輯. 2002.
6) 김창남, 《대중문화와 문화실천》, 한울, 1995.
7) 이동연, 《대안문화의 형성-한국대안문화의 최전선》, 문화과학사, 2010.
8) 김예란⋅신현준⋅전규찬, 《미래사회의 문화인프라 예측 및 구축: 구조로부터 콘텐츠로, 콘텐츠
를 넘어 실천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2005.
9) Kim, So-yong, “The birth of the local feminist sphere in the global era: ‘trans-cinema’ and
Yosongjang”,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4 No.1 April 2003.
김예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문화생산 공간과 실천에 관한 연구(A Study on ‘cultural
site’: Cultural space and practice in Korean society since the 1990s)>, 《언론과 사회》, Spring
2007 Vol.15 No.1 2-39쪽.
10) 모리스 마이스너,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이산. 1998. 陳來, <20世紀文化運動中
的急進主義>, 《知識分子立場: 激進與保守之間的動蕩》, 時代文藝社. 1999. 이욱연, 《포스트 사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49
극⋅영상⋅문학 등이 민족⋅민중 문화운동의 형태를 통해 정치⋅사회적 변혁을 모색했던
것처럼, 20세기 동아시아에서 문화의 정치화는 문화혁명, 문화운동 등의 형태로 역사적 계
보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문화의 정치화 문제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대중
문화가 부각되며 트랜스 글로벌한 문화의 시장화⋅대중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90년대 문화
공간 속에서, 문화의 정치화가 변주되었던 20세기의 역사적 기억들을 품은 채 단절 혹은
전환의 형태로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새로운 맥락은 여러 층위에서 구성될 수
있지만, 변화하는 문화 공간에 출현하는 문화생산자들의 시선으로부터 해석해 볼 수 있다.
“나는 89년 이후 돌연 베이징이라는 무대가 비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갑자
기 극도의 흥분, 특별한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사람이 없을 때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우원광(吳文光))”
93년 다이진화의 인터뷰 속에서, ‘신다큐멘터리운동’의 시발로 평가되는11) 우원광은 자
신의 다큐멘터리(「流浪北京-最後的夢想家」(1990))가 ‘89년 이후 베이징’을 ‘공허한 적막과
흥분’으로 느꼈던 순간에서 시작된다고 회고하고 있다. 우원광이 카메라를 들고 베이징의
거리로 나간 것은 베이징은 텅 비어있으며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주관적인 ‘공허감’에서 비
롯된다. 하지만 89년 이후, 90년대 중국의 문화 공간은 문화의 시장화와 대중화가 진행되
며,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등 서양과 중국의 각종 담론들이 각축한다. 도시의 문화
공간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다원화된 시선과 이데올로기들이 횡행하는 가운데 다이진화의
표현처럼 ‘안개 속의 풍경’이 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과잉되고 들뜬 기표들이
이 문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한편 여전히 주류적인 문화생산시스템과
이데올로기가 이 공간에 공고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을 적막함과
공허감으로 배회하던 우원광의 카메라-나는 오히려 이 장소에서 ‘후커우(戶口)’도 고정된 직
업도 고정된 거주 공간도 가지지 못한 채 도시를 유랑하는 이주 예술인의 군상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12)
우원광의 카메라가 포착한 90년대 초 문화 유랑인들은 안정된 직장이나 정규적인 노동체
회주의 시대의 중국문화》, 서강대학교출판부, 2008.
11) 呂新雨, 《紀錄中國: 當代中國新記錄運動》, 北京: 三聯書店, 2003.
12) 우원광의 다큐멘터리 생산의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천진, <‘DV(Digital Video)운동’을 통해
본 현대 중국의 문화주체의 변화-1990년대 이후 우원광의 다큐멘터리 생산을 중심으로>, 《중국
학보》 제63집, 2011. 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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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부터 벗어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문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화가, 예술사진작가, 실
험극단 감독, 아방가르드 시인 등 도시로 몰려든 문화 유랑인들은 일상적으로 누리는 사회
적 체제와 보장 바깥에서(혹은 거절하며) 고정된 수입 없이 문화생산을 자처하고 있다. 현
재의 빈곤과 불안이 자신을 압도하지만, 일에 대한 욕망을 형성하고 실천하기 위한 열정은
마치 ‘최후의 몽상가’처럼 도시를 배회하고 방랑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문화 유랑인의 군
상은 우원광의 다큐멘터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蒋樾의 다큐멘터리 「彼岸」(1993)
에 포착된 아마추어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극영화에서 다큐멘터리 충동
(documentary impulse)을 불쑥불쑥 노출시키는 張元, 王小帅같은 경우, 자신들의 영화 속
캐릭터처럼(「北京雜種」, 「冬春的日子」 등) 도시의 보헤미안을 자처한다.13) 도시의 보헤미
안들의 카메라는 “역사를 우언으로 쓰는 것은 그들(5세대)의 작업일 뿐”이라 단언하면서,
“나는 내 주변의 일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뿐(張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실
천은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 MTV의 제작 등 대중문화산업이 만들어내는 각종 아르바이트
생활과 병행하며 진행하게 된다. 이들은 90년대 이후 적나라한 문화산업 권력의 주변에 서
성이면서 확산하고 있는 각종 대중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을 통해 생계를 도모한다. 이것은
贾樟柯나 王兵처럼 山西나 陝西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도시 안으로 이주하는 도시 속 이주
예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아장커처럼 도시로 들어와 광고 게시판, 상점 간판을 그리
거나 TV 드라마 에피소드를 대필하는 식의 거듭되는 비정규적인 아르바이트의 생활과 ‘사
라져가는 보통 사람들의 중국을 기록하는’ 문화실천의 열망을 추구하는 것은 병행⋅교차하
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90년대 소비대중문화와 후기자본주의체제가 도시 공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할 때, ‘문화유
랑인’ 군상들은 90년대 중국의 문화 공간 속에서 문화실천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우원광의 카메라는 막 변화가 시작되는 90년대 문화 공간과 문화 실천을 포착한다. 60년대
태어나 80년대 개혁 개방기를 거쳐 90년대 청년기를 도시의 문화 유랑인으로 살았던 사람
들. 이들은 90년대 문화공간에서 경제적으로는 빈곤과 불안에 노출되지만(혹은 자처하지
만), 주류의 바깥을 서성이며 비슷한 관심과 지향의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일
종의 비물질적 형태의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고 있다. 자신들을 ‘신인류’로 경계 짓고 ‘개인
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張元)라는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문화주체로 떠오르지만, 한
편 이러한 문화실천들은 문화산업과 시장이 확산되는 가운데 개인이 가진 모든 것을 자원화
13) Zhang, Zhen ed. The urban generation: Chinese cinema and society at the turn of the
twenty-first centur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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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시장에 전유되는 상황에 노출되기도 한다.
유랑하는 예술가의 군상은 탈냉전의 기표가 떠돌던 베이징만의 풍경이 아니다. 90년대
이후 ‘사회과학의 시대’에서 ‘문화의 시대’를 내걸었을 때, 한국의 다수의 젊은이들에게 문화
는 소비의 영역으로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회인이 되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노동의 영역
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80년대 후반 민주화의 격변기 속에서 이전의 문화운동권들이
각종 문화교육기관, 저널리즘, 출판, 시네마테크, 영화아카데미, 대안전시공간, 동아리 등
제도적⋅비제도적인 형태14)로 문화공간의 상징적 지형을 형성해 나갔던 것과 관련이 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태어난 청년⋅청소년들이 대중문화가 부각되는 90년대를 통과
할 때, 문화는 단순히 소비의 문제가 아닌 노동의 문제로도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러한 노동
개념의 변화는 90년대 한국의 문화공간이 문화의 산업화⋅시장화가 확산되고 ‘창의산업
(creative industry)’과 같은 정부 문화정책이 개입하면서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영상문
화만 보더라도 이것은 고부가가치를 낳는 ‘영상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 형태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영상문화의 산업화의 형태로 소비대중을 확산시키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동
네 비디오 대여점, 인터넷 영화 상영관, 뿐만 아니라 시네마테크, 예술전용관, 각종 영화제
를 비롯하여 《Cine21》 《Kino》와 같은 영화비평의 증가가 동반하면서, 이 과정에서는 단순
한 소비대중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참여하는 생비자(prosumer)의 네트워크가
생겨나기도 한다(이동연, 2003).
이러한 과정은 97년 IMF 이후 노동시장이 유연화 되면서 대량으로 양산된 구조적 실업
자와 청년실업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유연화 된 시간 노동의 형태는 1990년대 후반
청년들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들은 기존 정규노동시장으로 편입하기 위해 무한경쟁에 포섭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유보 조정하며 일종의 ‘백수’를 자처하기도 한다. 스스로
유보 조정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봤을 때 아무런 일도 안하는 것이고 또는 사회적으로는 상
품적 가치라던가 상업적 가치가 하나도 없는 것이지만 스스로는 뚜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존심 속에서 생겨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문화백수’로 부른다15).
이들은 비정규직 형태의 멀티 플레이어를 하며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의 생활을 하지만, 자
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열망을 따라 뚜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정서 상태를 유지한다.
한편 90년대를 청년기를 ‘문화 백수’로 자처하며 이들이 정치성을 모색하는 데, 80년대 문
14) 이상길, <1990년대 한국 영화장르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 연구: 영화장의 구조 변동과 영화 저널
리즘의 역학을 중심으로>, 《언론과 사회》, Vol.13 No.2. 2005. 63-116쪽.
15) 김숙현, <문화백수의 정체성과 정치성에 대한 탐구-독립영화 제작인들을 중심으로>, 연세대학
교 영상대학원 석사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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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운동의 진영이 90년대를 통과하며 만드는 상징적 지형들은 문화지도(Reguillo, 2004)16)
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독립다큐멘타리 공동체 ‘푸른영상(PURN production)’17)에 터를
두고 독립다큐 「할매꽃」(2006)을 찍은 문정현의 예가 그렇다.
내가 좀 어리다. 94학번인데 운동을 하려고 대학에 들어갔더니 다 끝났다고 하더
라(웃음). 전라도 광주 출신이다. 고등학교 소풍 때 민중가요도 부르고 그랬다. 그
무렵 「상계동 올림픽」을 봤는데 너무 강렬했다. 그때 이후로 카메라를 들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영화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거창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회적, 정신
적 진보를 이룰 수만 있다면.18)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간 경우, 사회과학에서 문화의 시대로의 이행이
라고 불렀던 것처럼, 대부분 80년대의 “운동은 다 끝났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94학번이
었던 문정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김동원의 다큐 「상계동 올림픽」은 이후 문정현이
독립다큐모임 ‘푸른영상’19)이라는 상징적 지형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상계동
올림픽」은 「바보선언」(이장호, 1984)의 조감독을 하던 충무로 영화인 김동원이 ‘광주비디오’
를 보고 받은 충격 속에서 우연히 상계동 강제철거 현장을 체험하면서 제작된 것이다. 80년대
후반 ‘빈민영상’의 출발을 알린 김동원의 이 다큐는 91년 독립다큐 공동체 ‘푸른영상’의 시작이
기도 했다. 이 다큐를 시작으로 ‘푸른영상’은 90년대와 2000년대를 통과하면서 검열철폐문제,
문화의 산업화 속에서 독립영화협회의 출범 등을 모색했으며, 이러한 노력 속에서 정치가 문
화화 되는 90년대 상황에서도 문화의 정치화를 모색하는 상징적 지형을 형성하게 된다. 20대
초반 청년이 충격으로 받아들인 다큐멘터리와 이후 이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자신이 다큐멘터
리를 찍고 생활하게 되는 데까지 연결되고 있는 이 과정은, 80년대의 문화실천들이 90년대로
진입 하는 가운데 한국의 문화공간에서 만들어내게 되는 문화의 정치화의 한 유형이다.
16) Reguillo, R, The oracle in the city: Beliefs, practices, and symbolic geographies. Social
Text. 22(4), 2004. pp. 36-46.
17) 푸른영상 http://www.docupurn.org/
18) 문정현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
092916&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NEW_GB
19) 푸른영상 http://www.foruma.co.kr/workshop/eng/purn.htm
Chris Berry, The documentary production process as a counter-public: notes on an
inter-Asian mode and the example of Kim Dong-Won,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4 No.1 April 2003.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53
20세기 내내 동아시아 곳곳에서는 다양한 문화실천들이 존재했으며, 그 과정에서 문화의
정치화는 다양한 지역화의 계보를 형성하게 된다. 탈냉전의 기표가 90년대 이후 대중문화가
확산되는 동아시아 곳곳을 부유하는 가운데, 20세기 동안 지속된 문화의 정치화의 흐름들은
변화된 90년대 문화 공간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상징적 지형들로 나타나게 된다. 상징적
지형들은 80년대의 그늘로부터 단절⋅혹은 전환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
적 지형들은 90년대 문화유랑인, 문화백수들이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재생산하며 유랑하는
데 필요한 문화지도가 되고 있다. 90년대 초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간 개인들, 예를 들어
우원광을 비롯한 장웨, 단진촨, 왕빙 등 다양한 중국의 개인 다큐멘터리 작가들이나,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독립영화네트워크를 배회하는 한국의 다큐멘터리 작가⋅지망생들,
90년대 후반 타이완의 작은 일상과 내면들을 응시하는 전위적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아마도
동아시아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문화주체들임은 분명하다. 그들은 기존 시스템의 주류적 노
동생산형태에서는 유보되면서도(혹은 스스로 유보하거나) 자신들의 문화 열망을 쫓는 문화
유랑인들이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화유랑인들 사이에서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또
이산을 거듭하면서 이전과 다른 형태의 ‘정체성의 정치’를 모색하게 된다.
3. 카메라-나와 역사들(histories)의 응시:
문정현의 「할매꽃」 경우
3.1 가족을 응시하는 카메라-나
독립다큐 공동체 푸른영상의 2006년 작품은 문정현20)의 「할매꽃」이다. 앞서 보았던 것
처럼 문정현은 90년대 초 「상계동 올림픽」을 강렬하게 보았던 20대 대학생이었지만, 2000
20) 다큐멘터리 공동체 ‘푸른영상’ 소속의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2005년 「슬로브핫의 딸들」,
2006년 「아프리카의 미혼모」를 연출했다. 2007년 완성한 「할매꽃」은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 운
파상(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올해의 독립영화상,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 진출 등 세계 유수
의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호평을 받았다. 2009년 용산 사건에서 출발하여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현재의 MB정권과 용산 참사로 이어지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사
적인 기억으로 구성한 「용산」(2010)과 4대강 문제를 다룬 「강의 진실」(2010)이 있다.
254 / 中國小說論叢 (第 34 輯)
년대 들어서면 2007년 영화제 수상 및 2009년 개봉관 상영까지 하는 독립다큐멘터리 작가
가 된다. 개봉관 상영은 2008년 늙은 노부부와 소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워낭소리」
(2008)가 관객 200만의 유래 없는 흥행을 얻은 이변 뒤에 시작되었고, 이때 한국의 대중문
화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소비하는 문화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대중이 호응한 다큐들은 대
부분 보통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휴먼다큐’ 류의 TV 다큐멘터리인데, 「할매꽃」의 상영은 극
영화의 충동이 강한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나 휴먼다큐 류의 TV 다큐멘터리를 선호하는
2000년대 대중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감독의 외할머니의 과거사를 다루는 「할매
꽃」은 ‘현실 참여적’ 독립다큐멘터리지만 홍보용 광고에서는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휴먼다
큐멘터리로 조명되곤 했는데, 이러한 경향들은 휴먼다큐멘터리를 소비하는 2000년대 대중
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대중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약진하고 있는 휴먼 다큐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이야
기로 주목받는다. 1990년대 후반 중국 TV다큐멘터리의 경우, 「生活空間」, 「百姓故事」 등의
프로그램이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모토로 삼으면서, 드라마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미디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인간극장」(KBS), 「다큐3일」(KBS), 「휴먼다큐사랑」
(MBC) 등의 프로그램이 꾸준히 지속되면서, 휴먼다큐멘터리가 2000년대 다큐멘터리 산업
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2000년대 블록버스터 헐리우드 영화가 잠식
한 타이완의 문화 공간 사이로, 우이펑의 「Life」을 비롯하여 「無米樂」(Yen Lan-Chuan and
Juang Yi-Tseng,2001)등의 다큐멘터리가 대중의 호응을 받으며 조용하게 약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TV 산업의 하나로 다큐멘터리가 정책적 지원을 받기 시
작하는 등, ‘보통사람들의 삶’을 카메라로 재현하는 동아시아의 휴먼다큐는 바야흐로 대중과
정책의 조용한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대중의 조용한 지원을 받고 있는 동아시아의 휴먼다큐는 보통사람들의 육성과 삶
을 포착한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날것으로
서의 삶과 이야기라는 이 전제는 대중들로 하여금 피사체와 자신 사이의 거리의 의미를 느
끼지 못하게 한다. 한국의 휴먼다큐가 특히 그러한데, 타인의 삶에 대해 슬픔과 동정의 감정
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혹은 의도적으로 집어넣는) 나래이션과 편집은 공감의 정서를 만들
어 내지만, 한편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현실에서는 타인의 삶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
라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영상이 호응을 받는 것 이
면에는 모순적인 태도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즉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공감하면서도 한편 타인의 삶을 관조하면서 타인과 나의 경계를 강화하
는 구경꾼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55
2000년을 전후로 하여 독립다큐멘터리 생산자들은 카메라-나(camera-I)를 사용하여 사
적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21) 한 개인의 주관적인 기억 혹은 가족, 주변을 응시하는
사적다큐멘터리의 출현은 휴먼다큐를 표방하며 보통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TV 다큐멘터리
의 대중적 호응과 맞물리고 있다. 감독의 외할머니의 기억을 다룬 「할매꽃」이나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찍은 양영희의 「Dear 평양」(2006)은 사적다큐의 양식을 취한 독립다큐멘
터리이지만,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TV 휴먼다큐처럼 대중들에게 비교적 친근하게
다가갔다. 하지만 사적다큐의 카메라-나가 가족들의 삶을 포착하는 방식은 TV 휴먼다큐의
카메라가 타인의 삶을 포착하는 방식과 다르다. 카메라-나와 피사체 사이의 관계는 친밀하
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TV 휴먼다큐의 카메라가 타인의 삶을 관조하며
서 있는 방식을 취하기가 어렵다. 피사체를 단순히 관찰만 할 수 없는 사적다큐멘터리의 카
메라-나의 위치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재현하며 관계를 맺는가”라는 카메
라의 ‘윤리적 고민’ 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22). 즉 카메라를 든 ‘나’는 타인의 삶의
경계에 서서 카메라를 통해 타인의 삶에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그들의 삶을 다루어야하는
지를 성찰하며 끊임없이 대상과의 진정성을 고민해야 하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 real의 문제
를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글이 다루는 「할매꽃」, 「디어평양」, 「和鳳鳴」의 경우도 사적
다큐멘터리, 즉 개인의 카메라의 눈으로 찍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한 이상, 카메라-나는
자신이 피사체로 삼은 대상과의 관계, 진정성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일상 속 개인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카메라의 고민 과정 속에서 길어 올리어 지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보
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대문자 히스토리와 갈등⋅타협하는 개인의 역사들
(histories)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3.2 대문자 History와 갈등⋅타협하는 개인의 역사들
「할매꽃」의 카메라-나는 우연한 계기로 외할머니의 과거사를 찍게 된다. “이제는 말할 때
가 된 것 같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된 카메라-나의 촬영은 병상에 누워 아무 말도 못하
는 외할머니의 침묵과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외할머니의 가족들을 인터뷰한다. 그러나 가족
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은 쉽게 말해지지 않고, “말할 수 있다”와
21) 맹수진,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영화의 대항기억 재현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王慰慈 編, 《臺灣當代影像-從紀實到實驗紀錄片1930-2003)》, 同喜文化出版社, 2007.
22) 빌 니콜슨, 이선화 역, 《다큐멘터리 입문》. 한울, 2005. 15-54쪽.
256 / 中國小說論叢 (第 34 輯)
“아직 이르다”를 오가며 주저하는 가운데 인터뷰가 진행된다. 다큐멘터리 내내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말해야 된다”를 따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외할머니에 대한 그/그녀들의 이야
기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자신들의 삶
속에 침전된 기억을 끊임없이 검열하는 것인데, 이것은 한국전쟁의 체험을 가진 세대들이
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기억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외할머니의 사진첩을 뒤적이던
2000년대 손자의 카메라는 이 침전된 기억들을 만나게 된다.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의 인터
뷰를 통해 빨치산 활동을 했던 외할아버지,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이상자가 된 작은 외할아버
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좌익 활동을 했던 외할머니의 오빠의 죽음 등, 외할머니의 삶 속에
침묵으로 있었던 기억들을 발견해 가게 된다. 인터뷰의 과정은 카메라-나와 가족들 양쪽 모
두가 기억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던 카메라-나는 몰랐던 기억들을
‘발견’해 나가며, 전쟁을 체험했던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침묵했던 기억들을 ‘발화’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냉전질서가 내재화된 공식역사가
배제했던 개인의 이야기들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할매꽃」은 공식 역사에 속하지 못했던 냉전과 관련된 작은 이야기들을 드러내고 있다.
냉전질서가 고착화된 대문자 히스토리가 전쟁의 부수적인 피해로 처리했던 그/그녀들의 작
은 이야기가 ‘발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 사적다큐멘터리인 이 영상에서 카메라-나는 국
가주의 영웅담에 묻혀 주변적인 과거가 된 그/그녀들의 이야기들23)을 ‘발견’하는 카메라 자
신의 변화도 드러내고 있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카메라-나는 외할머니의 마을을 조용한
농촌의 일상의 풍경으로 포착한다. 하지만 윗마을 상대⋅중대와 아랫마을 풍동 사이에 있는
마을의 작은 길은 ‘나’의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풍경 그 이상으로 포착된다.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카메라-나는 그/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의 이 작은 길이
오래 묵은 양반/상놈의 신분갈등의 경계선이자 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의 경계였음을 ‘발견’하고 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이상 마을은 더 이상 조용한
농촌 풍경일 수 없다. 카메라-나는 냉전질서가 마을 사람들에게 고착화되고 이 고착화 과정
에서 생존자들의 기억이 공식화되지 못한 채 위험한 전쟁 논리가 창궐하고 있는 기존 역사
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누군가를 좌익으로 몰고 그들을 비국민으로 분류하며 그들의 생
사여탈권을 쥔 ‘법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러한 카메라-나의 문제제기는
좌익의 가족이란 이유로 고문을 받고 미쳐버린 작은 외할아버지 같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발견해 가면서 생겨나고 있다.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가 여전히 전쟁 속에 있는 사람들
23) 김동춘, <한국전쟁 60년, 한반도와 세계>, 《역사비평》, 2010 여름호. 152-181쪽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57
의 고통을 ‘발견’하고 공감하는 이 과정은, 한편으로는 카메라-나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구
도 속에서 피해자의 시선에 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카메라-나의 시선은 좌익 활동을
하던 외할머니의 오빠의 죽음을 다룰 때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본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을 하던 외할머니의 오빠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좌익 활동을
했었고, 외할머니의 가족들은 오빠의 전향을 권유하며 잘 아는 마을의 순경에게 부탁해서
전향하러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오빠는 친한 마을의 순경과 자수하러 가던 길
에 처형당하게 된다. 어떤 절차와 어떤 이유로 갑자기 처형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좌익이 우익에게 처형당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다. 이것은 같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일
어난 일이다. 좌익과 우익도 모두 마을사람이며, 처형당한 사람이나 집행한 사람이나 모두
마을 사람이며, 그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모두 지금 마을에 살고 있다. 외할머니의 기억을
어릴 적부터 들었던 ‘나’의 어머니는 그 때 순경은 내 친구의 아버지라는 이야기도 끄집어낸
다. 여기서 카메라-나는 해묵은 이 기억의 고통을 풀기 위해서라도 가해자였던 마을의 순경
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야만 해묵은 고통의 역사가
해소된다는 아들-‘나’의 카메라는 피해자의 시선에 서 있으며 분노를 감추고 있다. 이러한
아들의 카메라 앞에서, 어머니는 마을의 순경 역시 고통스러워하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가
해자의 자손인 자신의 친구만 남은 상태임을 말하면서 아들의 카메라에 이렇게 말한다.
“너는 옮고 그름을 가르는 걸 너무 깊이 본다. 너는 옳고 나머지는 그르다는 것
같아. 하지만 사는 건, 인간의 삶은 모순이야.”
엄밀히 말하면 카메라-나는 고통의 당사자들 ‘바깥’에 서 있다. 카메라가 취한 피해자의
시선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고통을 ‘발견’하면서 생겨났다. 피해자의 시선에 선 카
메라-나는 자신이 옳은 기준을 쥐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사과를 받는 장면을
찍으려는 카메라-나는 피사체가 될 가해자(가해자로 여겨진)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의 윤리 문제가 제기되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타인의 고통
을 ‘발견’하면서 감춰진 역사의 순간들을 알게 되었던 ‘카메라-나’가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
을 가진 또 다른 ‘법정으로서의 역사’의 태도를 취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고통을
발견하고 피해자의 시선을 대리하고 있는 이러한 아들의 카메라에 대해, “인간의 삶이 모순
이다”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은 가해자/피해자를 변별하는 ‘법정으로서의 역사(History)’가
아닌 ‘고통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histories)’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외할머니의 고통의 기
억을 둘러싸고 어머니와 아들(카메라-나) 사이에서 생겨난 이 짧은 긴장의 순간은 사실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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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심장하다. 피해자-가해자, 진실-거짓과 같은 이분법은 한쪽에 의해 억압된 기억들을 불러
온다는 긍정성을 가지지만, 과거는 진실을 독점한 특정한 입장에 서서 청산한다고 바로 극
복되지 않는다. 과거의 대면은 과거로 인해 고통에 처한 ‘사람들’ 즉 여러 집단 기억간의 이
야기들이 교통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되새겨져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정으로서의 역사가 아닌 ‘고통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때, 「할매꽃」의 이야기들은
비로소 과거와 대면하는 억압된 고통의 발화로 볼 수 있다. 「할매꽃」의 제목이 ‘밤손님-중학
생이 이해하는 빨치산 교과서’에서 외할머니를 통한 고통의 이야기 ‘할매꽃’으로 바뀌었던
것은 법정으로서의 역사와 고통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고민했던 카메라-나의 시
선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카메라-나’의 시선은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바로 오랫동안 외할머니의 고통을 공감하며 그 고통 속에 있었던 어머니가 피해
자의 시선에 서서 분노하는 아들의 카메라를 향해 인간 삶의 모순과 고통을 말할 때 생겨났
다. 피해-가해, 진실-거짓의 구분에서 떠날 때, 「할매꽃」의 이야기는 고통을 견디는 외할머
니의 삶으로 재구성된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빨치산인 남편을 전향시켰던 할머니는 생존했
지만 신념을 버려야했던 외할아버지로부터 모든 원망을 들으며 평생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딸들은 이런 아버지가 차라리 죽었으면 하면서 견뎌야했다. 또한 외할아버지를 면회
갔다가 좌익 혐의로 고문당해 미쳐버린 작은 외할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을 외할머니는 자신
이 짊어져야 할 고통으로 받아들여 건사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
난 좌익과 우익의 갈등 속에서 친오빠를 잃어야 했지만 자신의 집에 오는 모든 마을 사람들
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배불리 먹이고 싶어 했다.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손자의 카메라는
이러한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을 발견하면서 ‘법정으로서의 역사’와 ‘고통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카메라-나의 이 고민은 가족과 마을사람들
의 인터뷰를 통해 마을과 가족의 기억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카메라-
나가 마지막 할머니의 임종을 찍으며 “고생하셨어요”라는 말을 건낼 때, 거친 숨소리로만 대
답하는 할머니와 말없는 카메라-손자 사이에서 1950년 ‘그때’는 2000년대 손자의 ‘지금’의
시간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카메라-나의 고민의 과정과 피사체들의 발화 속에서 1950년 ‘그
때’는 2000년대 ‘지금’으로 조용히 소환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냉전구조를 고착화시켰던
한국전쟁은 “잃은 것이 가장 많은 자” “코리안 자신들(Stueck, William. 1995)24)”의 여러
집단의 기억들, 그 고통의 이야기들 속에서 다시 발화되어야 하며, 현재성을 지닌 것으로
재구성 되어야 하는 것임을 「할매꽃」은 말하고 있다.
24) 윌리엄 스툭, 김형인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2001, 7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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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냉전과 서발턴: 고통을 성찰하는 his/herstories:
양영희의 「디어 평양」, 왕빙(王兵)의 「和鳳鳴」의 경우
4.1 비국민의 경계에서 고통을 성찰하기: 양영희의 「디어 평양」
90년대 청년기를 보냈던 세대는 2000년대 카메라를 들고 작은 개인들의 삶을 찍기 시작
했다. 이들의 피사체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매우 친밀한 사람들의 삶이거나, 혹은 친구 혹은
가족이 되어가며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자신의 삶이다. 따라서 카메라는 삶을 전지적인
시점에서 관찰할 수 없고, 오히려 카메라와 피사체가 상호 영향을 받으며 양자에 변화가 일
어나기도 한다. 1964년 재일조선인들의 메카 오사카에서 태어난 양영희25)가 재일조선인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찍은 사적다큐멘터리 「Dear 평양」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찍는 딸의 카메라라고 하는 이 설정은 일견 평범한 가족들의 홈비디오를 연상시
킨다. 하지만 카메라-나가 재일조선인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를 피사체로 삼아 카메라를
들게 되기까지 고통은 만만치 않다. ‘카메라-나’는 1971년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국’ 북조선
으로 오빠들이 북송선을 타고 간 이후, 어릴 때부터 줄곧 “외동이가 되어버린 딸 영희”란 말
을 듣고 살아야 했다. 조선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양영희’라는 이름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취직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닐 때마다 “너 자체는 괜찮지만 너의 이름이 문제다”라는
이유로 번번이 떨어져야만 했다. 일본 사회로 진입하려고 할수록 확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
은 국민 바깥에 있는 비국민 상태라는 점이며, “하나밖에 남지 않은 딸”이란 조건은 무엇을
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 굴레가 되고 있다. 자신의 삶은 총련 소속 재일조선인 아버지에 의
해, 북송선을 타고 가 평양시민이 되어버린 오빠들에 의해, 이미 정해져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하는 생각들은 가족 안의 갈등을 만들기 시작한다. 카메라-나는 이 미움과 갈
등의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었고 그리고 렌즈를 통해 아버지를 오랫동안 응시하기 시작한다.
25) 1964년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2세 양영희는 도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 극단배
우 등을 거쳐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1995년부터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한 영상작가로
활동하며 중편 「What Is치마저고리?」, 「흔들리는 마음」, 「카메라를 든 고모」 등이 NHK TV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데뷔작인 「디어 평양」이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제22회 선댄스 국제영
화제 등 국제영화제의 상을 받았고 평양의 조카 선화와의 관계에서 다룬 사적다큐 「굿바이, 평
양」(200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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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들 이와 같은 가족의 갈등은 「할매꽃」에도 숨겨져 있다. 외할머니의 동생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좌익 활동을 한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총련에 가입한 뒤 재일조선인으로 남았다. 그리고 「디어 평양」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
밖에 없는 딸을 북송선에 태워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조국’ 북조선으로 보냈다. 여동생을
북송선에 태워 보낸 이 아버지를 아들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아버지 자신이 17살에
일본 안에서 혼자 이산되어 냉대와 차별에서 살았으면서 어떻게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동생을 보내 또 다른 이산의 상황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할매꽃」의 재일조선인 2세는 아버
지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하나 밖에 없는 남겨진 딸 영희”인 카메라-나의 미움과
갈등은 사실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 2세⋅3세들의 감정구조인 것이다.
아버지의 삶을 응시하는 과정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에 냉전이 고착화되며 만들
어진 대문자 역사(History)를 응시하는 과정이다. 제주도 출신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이후
귀향하지 못하고 총련 간부가 되는 과정은, 동시아의 냉전구조 속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비국
민으로 내몰리는 가운데 식민 이후의 시간성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재일조선
인들은 남북 정권의 냉전적 정책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좌파가 다수였던 재일조선인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내몰고 있었던 연합국최고사령부(GHQ)와 전후일본의 공모의 산물이기도
하다26). 식민지의 역사가 냉전구조 속에서 뒤틀린 이 문제는 남한 출신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들 모두를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이념의 ‘조국’으로 북송선을 태워 보내는 가운데 여전
히 지속된다. 일본⋅미국⋅소련⋅중국의 기묘한 협조 속에서 일본과 북한, 국제적십자사의
합의 속에서 이루어진 이 북송사업은 식민의 시간성을 살고 있는 ‘기민’이나 다름이 없었던
수많은 서발턴,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배제한 채 냉전질서를 이용했던 국제적 정치게임이기
도 하다.27)
「디어평양」의 ‘카메라-나’는 이러한 냉전의 역사(History)가 되어 버린 아버지를 10여 년
오래 응시한다. “혼자 남은 딸”, 비국민의 경계에서 국적을 고민해야 하는 “양영희”라는 조건
을 가진 카메라-나는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냉전을 구조화하는 대문자 히스토리를 충분히 발
견할 수 있었다. 「할매꽃」의 재일조선인 2세⋅3세들이 아버지란 존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기억하면서, 그 아버지의 삶 때문에 “우리는 남한도 북한도 아무도 자기 사람으
로 생각하지 않는” 일본⋅남한⋅북한의 국민 바깥에 놓인 “그냥 교포, 교포 사람”으로 살 수
26) 김귀옥, <분단과 전쟁의 디아스포라-재일조선인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비평》, 2010 여름호.
27) Tessa Morris Suzuki, Exodus to North Korea: shadows from Japan’s cold war,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7.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61
밖에 없다는 냉전의 역사를 발견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디어평양」의 카메라-나가 응
시한 것은 아버지가 식민 이후의 시간성, 한국전쟁 이후의 시간성을 살아가며 억압했던 작
은 이야기들이다. 카메라-나가 피사체로 삼은 아버지, 그리고 평양의 오빠들은 카메라-나의
삶의 조건을 규정해 버린 대문자 히스토리이다. 하지만 카메라-나는 이 피사체들을 애증을
가지고 오래 응시하는데, 동시에 그 과정은 대문자 히스토리로 재현될 수 있는(혹은 스스로
를 드러낼 수 있는) 아버지와 평양의 오빠들이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나’를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와 아버지는 카메라를 통해 관계가 변하고
있으며, 그것은 카메라-나와 피사체 아버지 양자 사이에 숨겨진 고통들을 성찰하는 과정이
기도 하다.
“(아들들) 보낸 거 후회하지 않아요?”
“벌써 가버린 거 할 수 없지. 안 보냈으면 더 좋았을걸.”
“저 한국에 가보고 싶은데 국적 때문에 불편해요.”
“네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거라. 하지만 난
끝까지 충성할 거야.”
대화는 흰 런닝 속옷 차림의 아버지가 이불 위에 앉아 카메라를 사이에 놓고 ‘나’와 서로
장난치는 상태에서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카메라-나와 아버지가 이러한 관계에 오기까
지, 오랜 시간 카메라-나는 응시하고 질문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 과정은 2001년 만경봉호
에 오른 아버지의 뒷모습을 따라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평양의 오빠들의 삶을 방문하고 촬
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독백을 반복하
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편 대문자 히스토리로 있었던 아버지는 이 과정 속에서 격식의 옷들
을 벗고 일상의 편안한 모습으로 딸의 삶의 조건을 마주해 가고 있다. 2004년 어느 날 이루
어진 이 일상의 대화는 카메라-나가 무거운 아버지의 역사(History)로부터 아버지의 삶 속
의 고통의 작은 이야기(histories)를 끄집어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후회 안하세요” “벌써 가
버린 거” “안 보냈으면 더 좋았을걸.” 오랫동안 고통 속에 있었던 이산의 고통이 일상 속에서
무심하게 발화되는 순간, 카메라-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서로의 삶의 방식’은 조용히 긍정되
고 있다. 개인사 안에서 생겨나는 화해의 순간을 홈비디오처럼 포착했지만, 이러한 장면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으로 식민 이후, 한국 전쟁 이후의 시간성을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의 작은 치유의 순간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순간을 관객들(특히 남한)이 민족주의적 감정
을 투사하며 소프트한 ‘도덕적 감상’에 기댄 휴먼다큐로 소비해 버릴 위험도 있다. 하지만
262 / 中國小說論叢 (第 34 輯)
사적다큐멘터리를 시도한 카메라-나의 이 작업은 카메라-나와 피사체의 양자의 변화를 거
치면서 자신의 삶으로 유전되어 오는 아버지의 고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의
고통을 성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냉전분리선이 약화된 듯한 2000년대, 재일조선
인 2세⋅3세⋅4세들이 ‘탈’ 일본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거쳐야 할 성장통 이기도 하다.
4.2 작은 역사들과 고통의 치유: 동정(sympath)에서 공감(empathy)으로:
왕빙(王兵)의 「和鳳鳴」
2000년대 소형디지털 카메라를 든 ‘도시의 산책자(벤야민)’들, 예를 들면 지아장커와 같
은 산책자들은 카메라를 통해 도시를 가로지르는 근대의 시간성과 ‘빠르게 변화하며 사라져
가는 삶’을 기록한다. 하지만 ‘도시의 산책자’들은 사라져가는 삶의 기록을 종적인 시간 속에
서 시도하기도 한다. 지아장커와 마찬가지로 도시 속 이주예술가였던 왕빙28)의 경우, 첫
다큐멘터리였던 「티에시취(鐵西區)」처럼 요녕성 심양이란 공업도시의 공간의 기억들과 그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성을 응시하기도 한다. 왕빙의 다큐는 주관적인 나래이
션 없이도 독특한 방식으로 이른바 자신만의 시선을 드러내는 오테르 다큐멘터리(Auteur
Documentary)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두 번째 작품인 「和鳳鳴」(2006)에서도 지속되
고 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다큐멘터리는 한 개인의 삶 속의 기억, 윗세대의 삶과 기억들을
응시하며, 개인의 작은 이야기를 통해 50년대를 억압된 기억으로 품고 살아가야만 하는 삶
을 응시하게 된다.
「和鳳鳴」(2006)은 펑밍(鳳鳴)이라고 하는 할머니의 3시간에 걸친 인터뷰 기록이다. 다큐
의 첫 장면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오랜 시간
28) 왕빙(王兵)은 1967년 시안(西安) 출생으로 14세 이전 섬서 농촌에서 학교를 다녔다. “최소한
최근 10여년 가장 중요한 영화”로 왕빙의 티에시취를 평가하는 린쉬동(林旭東)은 우스개 소리지
만 애정을 담아 “왕빙은 노가다꾼들 틈에 던져 놓으면 골라낼 수 없을 정도”이며 꽤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자젠잉, 이성현 옮김, 《80년대 중국과의 대화》, 그린비, 681-685쪽 참고).
14세 시안 건축설계원 소속이던 부친이 가스중독으로 갑작스럽게 죽자, 아버지를 대신해서 집
안의 생계를 도모해야 했었다. 95년 魯迅美術學院 촬영과를 졸업하고, 이후 北京電影學院에 진
학했다. 1999-2001년 2년간 심양 티에시취에서 디지털 비디오로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공업지대
티에시취를 찍은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작품으로는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로 몰린
한 여인의 개인사를 다룬 和鳳鳴」(2006), 광부들의 삶을 다룬 「煤炭, 錢」(2009), 반우파투쟁
당시 감숙성 지아비엔고우에서의 삶의 군상을 다룬 극영화 「夾邊溝」(2010) 등이 있다.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63
묵묵히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전작 「티에시취」가 티에시취라는 장소의 삶들을
묘사하기 위해 10여분 넘게 티에시취 공장지대로 진입하는 철길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 제국의 공업기지에서 20세기 말 쇠락하는 도시로 전락한 티에시취라는
공간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10분이 넘게 철서구의 철도를 응시하는 이 장치는 카메라와 관
객이 쇠락한 도시 공간을 자신의 현재로 소환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29) 이러한 카메라
의 응시태도는 펑밍의 뒷모습을 아무 말 없이 5분 넘게 따라가는 데에서도 이어진다. 펑밍
의 무거운 발걸음, 스치는 옷깃 소리, 숨소리를 응시하는 시간은 카메라-나와 관객이 한 개
인의 삶 앞에 마주앉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3시간 내내 카메라-나는 두어
번의 바스트샷을 제외하고 할머니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마치 인
류학이나 역사학의 구술채록촬영이나 혹은 심리치료를 위한 의료기록촬영처럼, 카메라-나
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으며 “저 어두운데 불 켜도 될까요”라는 목소리를 제외하고 카메라-
나의 목소리를 검은색 무지로 처리하며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무미건조한 듯 보이는 이 인터뷰 영상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방법을
통해 오히려 피사체 앞에 기다리며 앉아있는 카메라-나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왕빙의 ‘작
가(Auteur)’의 시선은 피사체 앞에서 오래 기다리는 말 없는 카메라를 통해 드러난다. 마치
인류학 영상과 같은 이러한 카메라의 태도를 ‘베리테(verite)’를 추구하는 최근 중국의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성30)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할매꽃」이나 「디어평양」에서 주목
했었던 문제, 즉 카메라-나가 응시하는 냉전과 서발턴의 기억들이란 문제에서 보면, 왕빙의
이러한 카메라의 방식은 중국에서 억압된 개인들의 역사기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도 있다.
펑밍은 1957년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로 몰렸다. 당시 감숙일보의 기자였던 남편의 글이
문제가 되었고 같은 기자였던 펑밍은 그의 남편과 함께 노동개조 현장으로 떠나야했다. 3시
간 동안 계속되는 펑밍의 구술은 1957년 반우파투쟁 때 우파로 몰린 개인(지식인)이 현재
의 시간까지 살아남은 삶의 고통에 대한 구술이다. 80년대 터져 나온 ‘상흔문학’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펑밍의 구술인터뷰는 굳이 이것을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으로 다루어야 하는가라
는 문제 제기도 받았다. 사실 펑밍의 구술은 <나의 1957년(我的1957)>이라는 르포문학형태
의 회고록으로 나왔으며, 그랬기 때문에 다큐 「허펑밍」의 구술인터뷰 과정은 억압된 개인의
29) 왕빙의 「티에시취」에 대해서는 천진, <중국의 경험을 성찰하는 카메라의 눈-왕빙의 《티에시취》
읽기>, 《중국어문논역총간》, 2011. 呂新雨(2008), 《書寫與遮蔽-影像, 傳媒與文化論集》, 廣西師
範大學出版社 참조.
30) http://www.reelchina.net/chinese.htm
264 / 中國小說論叢 (第 34 輯)
역사기억을 토로하는 작업도 아니며 공식역사가 배제했던 역사의 사실을 드러내는 작업도
아닌, 이미 재현된 자기 서사를 반복한다는 비판도 받는다.31) 유행했던 상흔서사와 비교하
면 「허펑밍」의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다. 반우파 시기를 ‘트라우마’로 드러내는 수많은 개
인들의 이야기는 2000년대 각종 회고록, 소설, 역사자료집 등32)의 형태로 출간되면서, ‘개
인’의 트라우마의 재현은 중국의 맥락에서 의외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즉 수많은 ‘개인’의
억압된 기억들을 ‘폭로’하는 형태로 흩어져 나오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빙이 자신만의 다큐의 양식으로 과거를 응시하는 것은 과거를 대면하고 공감하는 문제는
이미 유행하는 상흔서사의 재현(혹은 폭로)의 방식과 다르게 수행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왕빙의 카메라는 자신의 피사체를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의 삶의 시간이
카메라-나와 관객의 현재로 소환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타인의 삶과 기억을 카메라-나의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하기 위해 오래 기다리는 태도는 타인의 기억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잘못하면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나르시즘적으로 동일화
하거나 혹은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흔’을 지속적으
로 슬퍼하는 ‘애도(mouring)’의 태도이자 타자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공감(empathy)’의 태
도와 관련이 있다.
중일전쟁에서 한국전쟁의 기간까지,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동아시아의 서로 얽힌 역사에
휩쓸려 가장 오랜 기간 전쟁을 겪는다. 그리고 이 오래된 전쟁 그 이후, 전쟁에 동원된⋅관련
된 수많은 사람들은 동아시아 냉전질서가 고착화되고 냉전이 매카시즘의 광풍처럼 정치적으
로 이용될 때,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존을 확인해야하는 상태에 몰린다. “그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그게 우파로 몰리게 될 줄 몰랐다”고 하는 말은 펑밍의 구술 속에서 마
치 주문처럼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좌/우의 신념이 있었던 것이 아
니라, 우파로 몰렸거나 몰리지 않으려 했던 ‘생존’ 자체에 대한 투쟁의 기억이 선명하다.
왕빙의 카메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배제하지만, 그러나 50년대의 시간을 안고 현재를 사
는 펑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드러내는 가운데, 펑밍으로부터 좌/우, 가해/피
해의 어느 한 쪽에 서 있는 기억이 아니라 고통에 관한 그녀의 이야기(herstories)를 끌어내
고 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카메라가 어느 순간 바스트샷의 밝은
조명으로 펑밍을 잡는 순간은 펑밍의 구술 가운데 고통에 관한 그녀의 재기억의 장면을 포
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펑밍의 기억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남편의 죽음)
31) http://fanhall.com/group/thread/4414.html
32) 乌有之乡 http://www.wyzxsx.com
사적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통해 본 동아시아 냉전의 기억들 / 265
을 대면하고 애도하는(mourning) 반복되는 제의의 순간이기도 하다. 대기근이 겹친 ‘지아
비엔고우(夾邊溝) Jiabiangou Labor Camp’를 찾아가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과, 시
간이 흘러 거대한 우파들의 무덤이 된 그곳에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제의를 시작하는 두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 속에서 펑밍은 피해자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견디고
치유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고생 끝에 찾아간 노동개조현장에서 남편의 죽음을
통보받는 그 순간 남편이 죽었음을 알려주는 간부를 비롯하여 아무도 자신에게 위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곧 슬픔을 다스리는 방식이었음을 이후 알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어
설픈 위로와 친절은 없다. 다만 펑밍이 목 놓아 우는 것을 기다린 뒤, 대기근으로 인해 굶주
린 지아비엔고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줄 뿐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남편을
위해 고생 끝에 가져온 꽃빵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뿐이다.
바스트샷의 이 장면은 반우파투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의 드러냄이라기보다는, 과거의 고
통을 대면하면서 고통의 치유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
다. 왕빙의 카메라는 반우파 투쟁 당시 실제 어떠했는가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펑밍의
이야기로부터 과거의 고통을 대면하고 치유하려는 소수자의 기억의 의지를 소환하고 있다.
상흔을 끊임없이 애도(mourning)하는 이 기억의 의지는 과거청산이나 과거폭로의 형태로
기억을 발화하는 것과 다르다. 왕빙은 펑밍과 같은 이러한 개인의 기억의 의지가 ‘개인’만의
것이 아님을 또한 응시한다. 마치 숨어서 보는 것처럼 ‘카메라-나’가 조용히 문 뒤에서 펑밍
의 일상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다큐의 마지막 장면은 다큐의 첫 장면에서 펑밍의 뒷모습을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라가던 것처럼 묵묵히 응시한다. 하지만 다큐의 첫 장면의 펑밍이
한 개인의 뒷모습이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의 펑밍은 같은 경험자들과 서로 안부를 묻고
‘전화’를 주고받으며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집단 기억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장면은 50년대
이후 중국 역사의 ‘상흔’ 문제가 끊임없이 과거를 대면하고 치유해나가는 기억의 의지들이
서로 교통하는 가운데 드러나야 함을 응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흩어진 수많은 ‘개인’의 이야
기가 폭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과거의 고통을 대면하며 교통하는 여러 집단 기억들 간의
끈질긴 대면의 과정 속에서 생겨날 공감의 가능성을 응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5. 나오며
탈냉전을 말하지만 현실 속에서 냉전의 출구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사적다큐멘터리의
266 / 中國小說論叢 (第 34 輯)
카메라들이 윗세대의 삶 속에서 냉전구조로 휩쓸려 들어간 역사와 그 시간을 통과하는 개인
들의 기억들, 그 작은 이야기(histories)를 포착할 때 더욱 그렇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
은 서발턴의 삶에서 기억을 응시하는 과정은 냉전질서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침전되어 신체
화 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개인들의 작은 이야기 속에서 냉전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으며 웅성거리고 있다.
개인의 삶에 침전된 냉전의 구조들을 2000년대의 카메라-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끌어낸
다. 그것은 공식 역사가 전쟁의 부수적인 피해 정도로 처리하며 주변적인 과거로 만들어버
린 개인의 억압된 기억들, 고통에 관한 이야기들이 되고 있다. 이 때 카메라-나는 개인의
삶에 침전된 냉전의 고통의 경계에 서서 피사체들을 대면하는데, 그 과정은 피사체를 어떻
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고민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카메라-나의 현재를 뒤집어 보며 성
찰하는 계기이자 자기의 현재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개인의 카메라가
타인의 삶 속에 침전되어 억압된 역사를 응시하며 피사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카메라-나와 피사체 양자 사이에는 고통의 공감과 더불어 고통의 역사를 성찰하는 과정이
생겨나는데, 이 과정에서 역사는 심판자의 자세가 아니라 때로는 대변할 수 없는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반성적인 기억 주체의 부단한 의지에 의해 말해지면서 기존 공식역사와는 다른
태도를 요구하게 된다. 카메라-나는 하나의 시선이나 입장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성찰을 해 나가는 수행주체가 되어 간다. 카메라-나는 고통조차도
스펙터클화 하는 21세기의 문화 공간에 서 있지만, 카메라-나는 그러한 고통들을 동정하고
스펙터클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대면하고 ‘공감(empathy)’하는 관계에 대해 고민
하고 있다. 냉전의 역사가 침전된 개인을 응시하는 카메라-나의 고민과 그/그녀들의 이야기
들의 문제는, 기억의 그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과거와 대면하려는 성찰하는 기억주
체들의 기억의 의지와 그들의 감정구조의 소통 가능성, 즉 단순한 개인적 기억을 넘어 기억
의 사회적 차원을 구성하며 역사를 재구성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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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2000年代初出现的个人纪录片(personal documentary)中的‘照相机-我’(camera-I)在
凝视个人隐私中把多重记忆和感情结构作为问题的中心。 它们把小型数码相机当做自己的‘眼睛’
和‘笔’, 凝视某个家庭或无名个人的过去, 进而凝视着个人生活中沉淀的历史。 90年代前后度过青
年期的‘照相机-我’在凝视上一代个人记忆的过程特别有趣。 90年代以后, 全球范围内的资本主义
收敛和裂痕引起东亚各地区文化生产空间的变化, ‘照相机-我’在度过这样的90年代中, 把文化生
产选择为自身劳动的新的文化主体。 它们把小型数码相机作为自身的表现媒体, 以自身劳动的方
式选择了站立在别人生活境界的纪录片。 并且, 像爸爸(杨英姬的‘亲爱的平壤’(Dear Pyongyang)
2006), 外婆(文正贤, ‘外婆花’, 2007), 无名的老奶奶(王兵的 「和鳳鳴」2006)一样, 在凝视上一代
的过去中, 也凝视着50年代冷战体制深入个人日常生活的时间问题。 把1950年的‘那时候’重构成
2000年的‘现在’的工程虽然出发于一些小的个人记忆, 但凝视着这些个人生活和记忆的过程被排
除于官方历史的一边, 处理沉默的历史记忆和感情结构的问题。 本文注视90年代度过青年期的人
们以‘照相机-我’的态度来凝视上一代个人记忆的过程, 并且在此过程中刻画的‘我’和被摄物体之间
痛苦的会见和凸显的自我反省的问题。 虽然在变化的文化生产空间和文化实践中, 历史记忆消费
于电影大片产业中, 但一方面像个人纪录片一样, 通过会见个人生活深处里沉默的痛苦, 东亚交织
的历史在一种治愈的过程中暴露出负面的影响。 那就是在90年代以后, 后期资本主义体制和消费
大众文化正在进行的东亚各地区文化化过程中, 让我们记起正在进行着的政治文化化和文化政治
化的脉络的一种作业。
关键词: 个人纪录片, 冷战体制, 记忆, 照相机-我, 文化漂泊人, 伤痕, 共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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