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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아들의 방/ 정운희

문은 고통 없이 잠겨 있다

가장자리부터 녹슬어가는 숨결을 품고 있는지
언젠가 제 몸이 녹의 일부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악몽을 배설해야 한다

느닷없이 선반 위 유리컵이 떨어지듯이
느닷없이 손목을 긋고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그곳에서 분노와 상처를 해결하고
녹을 꽃처럼 피워내 안전하게 내부로 들어가기를
강 속 같은 몽상의 방에서 피고 지기를 여러 날

얼굴에 난 상처 자국을 보았다
실금 간 유리처럼
아들은 단순하리만치 무표정했다
꽃을 해결하듯 수음을 즐기고
오래도록 잠을 청하기도 했다
잠깐 흐느끼는
음악 소리로 부풀려지기도 하는 방

문은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

내부에서 피고 지는 파편들이
또다시 방의 실명을 증명하듯
제 스스로 염원해 갈망하는 것이다
방문은 고정된 액자처럼 흘러가고
녹을 잠식시킨 풍경들은
제 궤도를 벗어나 조금씩 이동한다


- 시집안녕, 딜레마』(푸른사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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