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를 씻다가 오이의 돌기를 만지는 여자와
오이를 먹다가 오이의 껍질을 내뱉는 남자가
오이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할 이유는 없지만
오이가 하필이면 오이라는 이름을 달고
오랫동안 숨겨 왔던 덩굴손의 내밀한 버릇과
오이만이 간직한 연둣빛 향의 비밀에 대해
주절주절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오이는 오이로서 오해가 없기 때문이다.
오이는 세상에 순(筍)을 내미는 그 순간부터
오로지 무엇인가를 더듬고
무엇인가를 올라타고
무엇인가를 움켜쥐지만
단지 오이라는 이유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오이꽃을 피우고
오이 열매를 주저리주저리 매달고
오이 향을 피우며 상큼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이의 돌기가 오백이십 개였으면 좋겠다는 여자와
오이의 돌기는 오십이 개라도 쓸모없다고 우기는 남자가
오이를 사이에 두고 때 아닌 말다툼을 벌이지만
오이는 오이로서 갖춰야 할 예의와 품위와 겸양이 필요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 두 뺨에 오이를 저미어 붙이는 여자와
저녁을 대신하여 오이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남자는
오로지 오이의 껍질을 벗기는 날카로운 칼 외에는
서로 공유할 아무런 도구가 없다.
그럼에도 오이는 제 이름이 왜 오이인지,
날마다 제 살을 깎는 칼의 이름은 왜
오이 칼이 아닌 감자 칼인지,
도무지 아무런 연유도 모른 채
오이와 오해 사이에서 오롯이 시들어 가는 것이다.
⸺계간 《문예바다》 2018년 여름호
'시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재 ‘오래된 기도’ (0) | 2018.08.11 |
---|---|
박두진 ‘8월’ (0) | 2018.08.10 |
송수권 ‘혼자 먹는 밥’ (0) | 2018.08.09 |
8월 - 이외수 (0) | 2018.08.09 |
허수경 ‘공터의 사랑’ (0) | 2018.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