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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73) - 타사파롱가 해전 (1)/blog.naver.com/imkcs0425/60115452587


73. 타사파롱가 해전[Battle of Tassafaronga] (1) - 드럼통 수송

과달카날 해전 이후에 헐지 제독이 남태평양해역군의 함대세력을 재편함에 따라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은 1942 년 11 월 24 일부터 순양함대인 제 67 기동부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 킨케이드 제독이 지휘하던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 16 기동부대는 포레스트 셔먼 소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킨케이드 제독은 최근에 과달카날 근해에서 벌어졌던 해전들에게서 얻은 교훈들을 적극 수용하여 11 월 27 일에 새로운 야간해전 전술을 만들었다.
킨케이드 제독의 전술에 따르면 우선 함대를 분리할 때에는 각 부대마다 반드시 SG 레이더를 갖춘 함정이 1 척이상 포함되도록 한다는 원칙을 정했고 , 함정들 사이의 통신에 사용되는 용어들은 모두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여 오해의 소지를 없앴다.
순양함의 정찰기들은 함대의 전방에 나아가서 정찰을 하고 필요하면 적 함대의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구축함들은 순양함 열의 앞에서 나아가며 일본함대를 먼저 발견하여 통보하고 어뢰공격을 가하고는 순양함들의 사격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회피하게 되어 있었다.
구축함의 조기경보에 힘입어서 순양함들은 적 함대와 11,000m 이상의 먼거리를 유지하면서 포격을 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탐조등의 사용은 엄격하게 금지했고 , 피아식별용 발광신호는 아군에게 오인사격을 받고 있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했다.
킨케이드 제독의 전술은 전반적으로 훌륭했으나 , 킨케이드 제독 자신은 이 전술을 활용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야간해전 전술을 만든 직후 킨케이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부름을 받고 진주만으로 출두했다.
이후 킨케이드 제독은 1943 년 1 월 3 일자로 테오발드 제독의 뒤를 이어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킨케이드 제독이 갑자기 떠남에 따라 남태평양에 새로 도착한 칼튼 라이트 소장이 제 67 기동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Thomas Cassin Kinkaid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685432 )

칼튼 라이트 (Carleton H. Wright)


라이트 소장은 1942 년 7 월에 소장으로 승진한 이후 줄곧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수상함대를 지휘해 왔으나 과달카날 해역은 처음이었다. 당시 과달카날 근해는 태평양을 주름잡는 양대 해군국인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이 첨예하게 맞서는 최전선으로서 양측의 최신 기술과 전술이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 선을 보이고 있었고 , 한번 대규모 해전이 벌어지고 나면 교범을 전부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해전에 대한 최신 기술과 전술의 발달이 눈부시게 진행되는 해역이었다.
따라서 , 일단 과달카날 근해에 들어선 이상 다른 해역에서의 지휘경험이라는 것은 사실상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 한 타자의 동네야구 시절 타율과 마찬가지로 별로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라이트 제독은 28 일에 제 67 기동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하고 다음날인 29 일 저녁 11 시에 벌써 과달카날로 출동해야만 했다.
28 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한 제 67 기동부대는 30 일 오후 5 시에 과달카날에 가까워워지자 30 일 오후 5시에 순양함의 정찰기들을 세곤드 해협과 툴라기 섬으로 날려 보냈다. 이들은 라이트 제독이 출동명령을 내리면 사보 섬 북쪽과 서쪽을 정찰하며 일본함대를 발견하면 그 상공에 조명탄을 떨어뜨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한편 , 일본해군은 과달카날에서의 양륙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드럼통을 사용하는 새로운 보급방법을 고안했다. 칵터스 항공대의 세력이 팽창하고 , 툴라기에 기지를 둔 어뢰정들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물자수송에 고속의 구축함을 사용하더라도 해안에 접안하여 느긋하게 양륙하는 일은 너무 위험했다.
따라서 , 일본군 구축함들은 드럼통에 절반 정도 식량이나 의약품 등의 보급품을 넣고 밀봉한 다음 드럼통 50 개를 연결하여 그물로 싸서 야간에 미리 지정된 해안에 투하하고는 바로 철수했다.  그러면 해안에서 주정을 사용하여 그물에 연결된 줄을 가져가서 육지에서 끌어당겨서 드럼통을 회수하는 방식이 었다.
구축함 1 척이 보통 200 개 정도의 드럼통을 실었는데 이렇게 드럼통을 실은 구축함은 예비어뢰를 실을 수가 없었다.  다나카 제독의 제 2 수뢰전대가 최초로 드럼통을 이용하여 과달카날에 보급할 임무를 맡았다. 기함인 경순양함 진츠가 수리 중이었으므로 다나카 제독은 구축함 나가나미에 사령기를 내걸었다.
기함 나가나미와 다카나미는 드럼통을 싣지 않고 , 호위임무를 맡았다.
제 1 수송대는 사토 도라지로 대좌가 지휘하는 구축함 4 척 ( 마키나미 , 구로시오 , 오야시오 , 가게로 ) 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 제 2 수송대는 나가하라 기치로 대좌가 지휘하는 구축함 2척 ( 가와카제 , 스즈카제 ) 로 이루어져 이 6 척의 구축함이 총 1,200 개의 드럼통들을 수송하고 있었다.

( 다나카 라이조田中賴三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758 )

만일 1,200 개의 드럼통이 모두 회수되면 약 2 - 3 일 정도 식량보급이 가능했다. 따라서 , 이정도 규모의 도쿄 급행을 1 주일에 2 - 3 번 정도 내보내면 적어도 식량은 확실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 탄약은 드럼통으로 수송하기 어려웠고 , 식량 또한 그때그때 수요만 맞출 뿐 공세를 위하여 비축할 수는 없었다.
더큰 문제는 드럼통들이 모두 일본군 손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칵터스 항공대의 항공기들과 툴라기의 어뢰정들이 기를 쓰고 과달카날 북해안의 해면을 수색하면서 미처 회수하지 못한 드럼통들을 찾아내어 모두 파괴했다. 실제로 일본해군은 약 20,000 개의 드럼통을 투하했지만 실제로 회수에 성공한 것은 약 6,000 개 정도로서 회수율은 약 30% 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해군은 보급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과달카날 해전 이후인 1942 년 11 월 16 일부터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1943 년 2 월 9 일 사이에 도쿄급행을 실시한 일본해군의 구축함 중 10 척이 격침되고 , 19 척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미태평양함대의 통신감청반은 일본해군의 과달카날 보급계획을 눈치채고 헐지 제독에게 경고를 보냈다.  헐지 제독은 즉시 정찰강화를 지시하는 한편 제 67 기동부대에게 과달카날로 나아가 도쿄급행을 저지하라고 명령 했다.  과달카날로 접근하던 제 67 기동부대는 수송함 3 척과 구축함 5 척으로 이루어진 수송함대를 만나게 되었는데 헐지 제독은 호위하던 구축함 5 척 중에 람슨과 라드너를 제 67 기동부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제 67 기동부대는 중순양함 4 척 ( 미네아폴리스 , 뉴올리언스 , 펜사콜라 , 노댐턴 ), 경순양함 1 척 ( 호놀룰루 ), 구축함 6척 ( 플레처 , 드레이튼 , 마우리 , 퍼킨스 , 람슨 , 라드너 ) 으로 이루어져서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지고 그중의 6 척이 수송임무를 수행하는 일본제 2 수뢰전대보다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제 2 수뢰전대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인 1941 년 8 월부터 다나카 제독의 지휘 하에서 같이 작전하여 견고한 팀웍을 가지고 있었으나 , 제 67 기동부대는 급조한 부대로서 탄탄한 팀웍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과달카날을 향하던 다나카 제독의 제 2 수뢰전대는 30 일 오전 10 시경에 미군 정찰기에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정찰기는 제 2 수뢰전대 발견사실을 보고하지 않아서 칵터스 항공대는 절호의 공습기회를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