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기푸 점령
제 35 연대의 제 1 대대 및제 3 대대가 시호스 지역을 공격하는 동안 어네스트 피터스 중령의 제 2/35 대대는 기푸진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1943 년 1 월 7 일에 교두보를 출발한 제 2/35 대대는 1 월 9 일 저녁까지 기푸진지를 포위하고 있던 제 132 연대와 교대를 마쳤다.
G 중대가 북쪽 31 번 고지에 , F 중대가 동쪽에 , E 중대가 남쪽 27 번 고지에 자리잡았다. 화기중대인 H 중대의 2개 소대가 E 중대와 F 중대를 증강했고 , G 중대에는 제 35 연대의 기병정찰소대가 증강되었다.
또한 각 중대마다 제 25사단 기병정찰중대의 1 개 소대씩 추가로 배속되었다. H 중대의 나머지 병력들과 본부중대 병력들은 모두 라이트 도로 종점에서 일선까지 보급품을 운반하는데 투입되었다. 따라서 , 제 2/35 대대의 예비대는없었다.
( 기푸전투 상황도. 1943 년 1 월 10 일의 상황)
1943 년 1 월 10 일에 제 25사단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자 제 2/35 대대도 기푸진지 내로 강행정찰을 실시했으나 대부분 거의 전진하지 못하고 일본군의 기관총에 쫓겨났다. 이전까지 기푸진지 내의 일본군 전력을 병력 100 여명 , 기관총 10 정 정도로 추정하고 있던 제 2/35 대대는 이날 정찰결과를 통해 병력 400 여명 , 기관총 20 정으로 추정치를 높였다.
실제로 제 2/35 대대가 기푸진지 내에서 노획한 기관총은 40 정에 달했다. 1 월 11 일에도 제 2/35 대대는 거의 전진하지 못했으며 , 12 일 실시된 공격도 역시 실패했다. 13 일의 전과는 F 중대의 정찰대가 일본군의 벙커 3개를 발견하여 81mm 박격포 사격으로 그 중의 하나를 파괴한 것이 전부였다. 14 일이 되자 제 3/25 대대는 말라리아와 전투손실로 25% 의 병력을 상실했다.
제 2/35 대대장 피터스 중령은 벙커를 처리하기 위하여 해병대의 경전차들을 투입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도로가 없었다. 전차가 투입된 것은 1 월 22 일이 되어서였다. 제 1/35 대대와 제 3/35 대대에 대한 공수보급이 시작되면서 보급병력에 약간 여유가 생기자 제 35 연대장 맥클루 대령은 제 35 연대의 대전차중대 병력들을 보급부대에서 빼내어 보병으로서 제 2/25 대대에 증원했다.
피터스 중령은 증원병력에 힘입어 15 일 아침에 60mm 및 81m 박격포로 15분간 공격준비사격을 한 다음 다시 공세를 실시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날 G 중대의 1 개 소대는 전투 중의 혼란 통에 중대 주력과 헤어져서 남쪽의 27 번 고지에 합류했다.
15 일 공격에서는 과달카날에서 최초로 화염방사기가 투입되었으나 별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이후 화염방사기의 효용성에 의문을 품은 제 2/35 대대는 기푸전투가 끝날 때까지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같은 날 해병제 2사단의 전선에 투입된 화염방사기는 성공을 거두었다.
기푸전투의 지지부진한 전황에 화가 난제 35 연대장 맥클루 대령은 16 일 저녁에 제 2/35 대대장 피터스 중령을 스탠리 라슨 중령으로 교체했다. 라슨 중령은 일본군의 방어가 가장 약한 서쪽에서 공격하기로 하고 기푸진지의 남쪽 27 번 고지에 있던 E 중대에게 서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E 중대가 방어하던 방어하던 27 번 고지는 동쪽의 F 중대가 담당했고 , 동쪽 측면은 제 35 연대의 대전차 중대가 이어받았다. 한편 제 35 연대장 맥클루 대령은 제 25사단장 콜린스 소장에게 대대적인 야포사격을 요청했다.
마침 갤로핑호스 전투 및 시호스 전투가 일단락 됨에 따라 많은 야포들이 기푸진지 포격에 동원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래 제 35 연대를 지원하던 105mm 포를 장비한 제 64 야포대대에 더하여 제 89 야포대대 ( 105mm), 제 90 및 221 야포대대( 155mm), 그리고 제 8 야포대대에서 1 문의 105mm 곡사포가 제 2/35 대대의 작전을 지원하게 되었다.
사격통제는 기푸진지에 제일 근접해 있던 제 64 야포대대가 담당했다. 문제는 기푸진지가 너무 좁아서 특히 155mm 포탄에 의하여 아군이 피해를 받을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제 2/35 대대는 현 전선에서 300m 씩 뒤로 물러났으며 그래도 포대 단위로 사격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여 포 1 문마다 따로 좌표를 설정해야 했다.
이 과정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실제로 포격이 실시된 것은 16 일 오후 2시 30 분부터였다.
포격은 맹렬했다. 미군의 105mm 곡사포 25 문과 155mm 곡사포 24 문은 90 분 동안 동서로 500m, 남북으로 400m 남짓한 기푸진지 내에 1,700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오후 4 시에 포격이 끝나자 제 2/35 대대는 4 시 30 분에 원래 진지로 복귀했으나 포연이 너무 자욱했고 곧 날이 저물면 정확한 지리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푸진지 내로 돌입하기는 너무 위험했으므로 공격을 포기했다. 따라서 제 2/35 대대는 포격으로 인한 마비효과를 활용하는데 실패했다.
맥클루 대령은 부대를 뒤로 물렸다 복귀시키는 방식이 너무 번거롭다고 생각하여 이후로는 야포사격을 요청하지 않았다. 18 일이 되자 우회기동을 마친 E 중대가 기푸 진지 내에서 방어가 가장 약한 서쪽 방면에서 공격을 실시했다.
동시에 E 중대의 남쪽에서는 15 일 공격때 중대 주력과 헤어져서 27 번 고지에 주둔해 있던 G 중대의 1 개 소대가 북서쪽으로 전진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E 중대의 남쪽에서 역시 기푸진지를 공격했고 , 이들의 서쪽에서는 I/182 중대가 남하하여 E 중대의 후방을 방어했다.
이날 E 중대는 4 개의 벙커를 파괴하고 7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며 , G 중대의 1 개 소대는 2개의 벙커를 확인하고 81mm 박격포의 사격을 유도하여 1 개를 파괴했다.
( 기푸전투. 1 월 18 일과 19 일의 상황)
E 중대는 19 일에도 오후 5시 15분까지 7개의 벙커를 파괴하고 , 불과 3m 거리에서 9개의 벙커와 대치한 상태로 야영에 들어갔다. 이날 미군은 37mm 대전차포와 81mm 박격포로 F 중대의 정찰대가 확인한 벙커 2개를 파괴했다. 20 일은 하루종일 비가 내려서 전투가 곤란했다.
그날 밤에 일본군 11 명이 미군 포위망 밖으로 탈출하려다가 사살되었다. 21 일이 되자 드디어 공병대가 기푸진지까지 전차가 기동가능한 도로를 완성했다. 제 25사단장 콜린스 소장은 즉시 해병대에게서 스튜어트 경전차 3 대를 빌려 거기에 제 25사단의 기병정찰대대원들을 태워서 기푸진지로 파견했다.
3 대의 경전차 중 2 대는 해발 450m 높이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다가 낙오하고 1 대만이 21 일 저녁에 기푸진지의 동쪽에 도달했다. 전차를 맞이한 미군들은 전차의 소음을 은폐하기 위하여 기푸진지에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가하고 밤새 기푸진지에 이르는 접근로의 나무를 제거하여 전차가 기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음날인 1 월 22 일 오전 10시 40 분에 스튜어트 경전차 1 대가 보병 16 명의 보호를 받으면서 기푸진지의 북동쪽 방어선으로 돌진했다. 스튜어트 경전차는 벙커를 만나면 37mm 주포로 파괴하고 , 도망치는 일본군은 37mm 주포로 산탄을 발사하거나 기관총으로 처리했다.
전차는 이날 하루 8개의 벙커를 파괴하면서 기푸진지의 북동쪽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고 , G 중대원들이 전진해서 돌파구를 확보했다.
( 과달카날 섬의 M3 스튜어트 경전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6814514 )
이제 최후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일본군 지휘관 이나가키 소좌는 100 여명의 생존병력 거의 전부를 이끌고 23 일 새벽 2 시 30 분에 F 중대와 대전차 중대 사이의 전선에 최후의 돌격을 실시했다. 일본군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 소총과 기관총을 난사하며 돌격해 왔으나 E 중대와 대전차 중대는 침착하게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화력을 집중하여 일본군을 단번에 쓸어버렸다.
날이 밝은 후 미군은 이나가키 소좌와 다른 소좌 1 명 , 대위 8 명 , 그리고 중위 및 소위 15 명을 포함한 85 명의 일본군 시체를 확인했다. 불행하게도 일본군이 돌격한 지점은 하필이면 미군 방어선 중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이었다.
만일 일본군들이 G 중대의 1 개 소대가 지키던 27 번 고지의 북서쪽으로 돌격했으면 아마 대부분 기푸진지를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당시 이쪽 방면은 병력 부족으로 병사 2 명이 들어간 개인호 1 개가 평균 12m 의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 기푸전투 상황도. 최종 상황)
23 일 아침이 되자 제 2/35 대대는 일제히 기푸진지 내로 진입했다. 전투는 거의 없었으며 , 소수의 일본군 생존자들은 싸우기보다는 숨으려고 했다.
이날 미군의 유일한 피해는 한 일본군 장교가 쏜 권총에 어깨를 맞아 부상당한 병사 1 명 뿐이었다.
다만 일본군 벙커들이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어서 미군들이 모두 찾아내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결국 23 일 저녁이 되어서야 제 2/35 대대장 라슨 중령은 기푸진지 점령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이로써 미군은 오스텐 산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 기푸진지의 일본군 벙커들. 위의 것은 기관총 진지이고 , 아래의 것은 기관총 진지를 보호하기 위한 소총수용 개인호이다.)
제 2/35 대대는 기푸전투에서 64 명의 전사자와 42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대대장 라슨 중령은 같은 기간 동안 일본군 518 명을 사살하고 , 기관총 40정 , 척탄통 및 박격포 12 문 , 소총 200정 , 군도 38자루를 노획했다고 보고했다.
제 35 연대장 맥클루 대령은 시호스 전투와 기푸 전투를 합쳐 1,100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 29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 88정 , 소총 678정 , 권총 79정과 상당량의 탄약을 노획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 제 25보병사단의 보고서에는 당시 제 35 연대가 사살한 일본군의 숫자를 합계 431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제 25사단의 보고서가 보다 사실에 가깝다고 볼수 있다. 한편 , 제 25사단이 오스텐 산을 소탕하는 동안 해병제 2사단은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 기푸전투를 마치고 교두보로 복귀하는 제 35 연대 병사들.
완전히 지쳐버린 모습으로 걷고 있는 두번째 병사의 발걸음에서 힘겨웠던 기푸전투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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