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해병제 2사단의 진격
제 25보병사단이 교두보 남쪽의 오스텐 산을 소탕하는 동안 크루즈 곶과 65 번 고지 사이를 방어하던 해병제 2사단은 1943 년 1 월 12 일에 공격명령을 받았다. 해안에서는 제 8해병연대가 , 내륙에서는 제 2해병연대의 2개대대가 공세를 실시할 예정이었으며 , 해병제 2사단 포병대에 더하여 아메리칼 사단의 포병대와 칵터스 항공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해안에서는 4 척의 구축함도 화력지원에 가담할 계획이었다. 공격은 임시로 해병제 2사단의 지휘를 맡고 있던 부사단장 알폰스 드 카레 해병준장이 지휘했다. 제 2사단장 존 마스톤 해병소장은 상관인 제 14 군단장 패치 소장보다 선임이었으므로 뉴질랜드에 머물러 있었다.
카레 준장은 제 8 해병연대와 제 2해병연대가 각각 담당구역의 남쪽에서부터 공세를 시작하여 북쪽으로 공격하도록 공격계획을 세웠다. 공격날짜는 1942 년 1 월 13 일이었다.
당시 해병제 2사단 전면을 방어하던 일본군은 제 2 사단이었는데 상당히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미군 방어선과 마주보는 고지에 기관총 진지들을 축조했는데 진지들의 위치 선정이 뛰어나서 최소한의 화력으로도 방어선 전방의 계곡에 진입하는 병력들에게 효율적으로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 해병제 2사단의 공세작전도. 원본은 여기로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Guadalcanal/maps/USA-P-Guadalcanal-XVI.jpg )
제 2해병연대는 오전 5시 30 분부터 66 번 고지에서 북서쪽으로 공세를 실시하여 오전 7시 30 분까지 서쪽으로 700m 정도 전진함으로써 2 시간 만에 이날의 작전목표를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제 2 해병연대는 6 명의 전사자와 61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이날 정오부터 1 월 4 일에 상륙한 제 6해병연대가 제 2해병연대를 교체하기위하여 전선에 투입되었다. 제 6해병연대는 이동과 보급이 편리한 북쪽으로부터 전선에 투입되었고 , 이에 따라 제 8 해병연대는 순차적으로 제 6해병연대에게 전선을 넘기고 남하하여 제 2해병연대의 전선을 인수했다.
제 2해병연대는 1 월 14 일에 전선에서 철수하여 교두보 내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1 월 31 일에 과달카날을 떠나 뉴질랜드로 향했다. 이로써 1942 년 8 월 7 일에 해병제 1 사단과 동시에 과달카날에 상륙했던 제 2해병연대는 뉴질랜드에서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3 일 실시된 제 8해병연대의 공격은 실패했다. 81 번 고지를 출발한 해병대원들은 곧 일본군의 박격포 , 기관총 및 소총사격에 막혀서 진격이 좌절되었다. 전선 재조정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제 8해병연대는 14 일에 다시 공세를 실시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전선 재조정이 완료된 15 일 오전에는 해병대의 경전차 3 대가 투입되었으나 전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 15 일 오후에 과달카날에서는 처음으로 전선에 투입된 화염방사기는 도착한 지 10 분 만에 일본군 벙커 1 개를 불태우면서 그 위력을 과시했다.
화염방사기가 그날 오후 동안 벙커 2개를 추가로 불태우면서 제 8해병연대는 처음으로 의미있는 진격을 할수 있었다. 그동안 해안의 제 6해병연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전진하고 있었다. 이때 제 6해병연대는 화력지원을 해주던 구축함 4 척을 상대로 해병대가 오랫동안 주장해왔던 전술 , 즉 함포를 지상군의 야포처럼 요청에 따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시험했다.
비록 해병제 1 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할 때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았고 이후로도 간혹 해군함정들이 함포로 화력 지원을 해 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리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지역을 타격하는 방식이었고 , 지상군의 급한 요청에 따라 사전계획없이 필요한 지역에 함포로 화력지원을 해 주었던 경우는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해군에게는 함포를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 따라서 그러한 훈련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해병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그런 개념만 가지고 있었을 뿐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함포 유도를 위한 실질적인 이론이나 훈련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태평양전쟁 후반기의 상륙작전에는 당연한 상식인 합동공격신호중대 (( JASCO = Joint Assult Signal Company) 같은 것은 고사하고 , 함포사격을 유도하기 위하여 연대나 대대에 파견된 해군장교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 당시 미해군은 과달카날 근해에서 일본해군의 위협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 이런 자유롭고 안정된 분위기 하에서 해군과 해병대 장교들은 서로에 대한 호의와 새로운 전술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공동으로 해결책을 만들어 갔다.
그리하여 각 야포대대마다 해군장교가 2 명씩 파견되어 전방관측요원들에게 함포사격을 유도하는 요령을 가르쳤고 , 동시에 구축함에는 해병대의 포병장교들이 파견되어 함장 및 포술장들에게 함포의 화력지원시 지상군이 요구하는 사항을 설명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제 6해병연대는 구축함의 효과적인 화력지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었다.
과달카날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합동공격신호중대의 창설을 비롯하여 태평양전쟁 후반기에 상륙작전에서의 함포사격 교리를 확립하는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1 월 17 일 저녁까지 해병제 2사단은 서쪽으로 1,400m 정도 전진한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함으로써 작전목표를 달성했다. 다음날인 1 월 18 일에 제 8 해병연대는 제 6해병연대에게 방어선을 인계하고 교두보 내로 철수함으로써 1942 년 11 월 2 일에 상륙했던 제 8해병연대는 군단 예비대로서 교두보를 방어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1 월 13 일부터 17 일까지 5 일간에 걸친 공세에서 해병제 2 사단은 일본군 643 명을 사살하고 2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75mm 야포 3 문 , 척탄통 41 문 , 중기관총 14 정 , 경기관총 47정 , 그외 소화기 다수 와 약간의 지뢰 및 탄약들을 노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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