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철수 결정
일본제 17 군이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직감한 것은 1942 년 10 월 26 일에 제 3 차 공격이 실패한 이후였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전투에 패배하고 차마 과달카날 철수를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제 17 군을 대신하여 산타크루즈 해전 직후 대본영에 과달카날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육군부는 깨끗이 무시하고 제 38 사단을 추가로 투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11 월 13 일에서 15 일에 걸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해군이 전함 2 척을 상실하는 등 참담한 피해를 입으면서 패배하고 제 38 사단의 병력과 장비 및 엄청난 보급품을 실은 수송선단이 괴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과달카날 해전 이후 일본해군은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깨끗이 단념하였으나 육군은 여전히 과달카날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육군은 제 17 군이 과달카날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뉴기니를 전담하는 제 18 군을 창설하고 , 동시에 제 17 군 과제 18 군을 지휘하는 제 8 방면군을 창설하여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마무라 중장이 12 월 2 일에 라바울에 부임하자 이어서 병력들이 라바울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12 월 중에만 2 개 사단을 포함하여 5 만 여명이 라바울에 집결했다. 이마무라 중장은 1943 년 2 월 1 일까지 2 개 사단을 과달카날에 추가로 파견하겠다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이러한 육군의 계획을 좌절시킨 것은 수송선 문제였다. 일본군은 과달카날 근해에서만 13 척의 수송선을 잃었으며 그 이외에도 남태평양 방면에서 상실한 수송선을 포함 하면 20 척에 달했다.
일본육군 참모본부의 작전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중장은 이제 육군의 주전장은 중국이 아니라 태평양 방면이라고 주장하면서 과달카날 작전의 유지를 위하여 1942 년 11 월 중에 37 만톤의 선박을 추가로 징발해 줄 것을 내각에 요청했다.
해군도 11 월에 25 만톤의 추가 징발을 요청했기 때문에 전체로는 62 만톤에 달했는데 일본으로서는 이미 이 정도 의 수송선을 추가로 징발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1942 년 11 월 21 일의 각의에서 육군의 추가징발은 24 만톤으로 삭감되었으며 14 만 5 천톤은 11 월 중에 , 나머 지 9 만 5 천톤은 12 월 중에 징발하기로 결정했다.
이어서 11 월 24 일과 25 일에는 과달카날에서 돌아온 츠지 중좌가 육군부와 해군부에 각각 과달카날의 정세에 대하여 보고했다. 츠지 중좌는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일본군의 비참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철수만이 전멸을 면할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했으나 끝내 철수라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육군과 해군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상대편이 먼저 철수하자는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 츠지 마사노부 (辻 政信)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41877 )
그러던 중 타사파롱가 해전이 벌어져서 일본해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타사파롱가 해전의 승리를 바라보는 해군 자신의 반응은 냉담했다.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빛나는 전술적 승리보다는 드럼통 수송의 실패에 더 중점을 두어 다나카 라이조 제독을 질책했다. 야마모토 제독의 이러한 태도에는 이미 일본해군은 과달카날에서 패배했으며 이런 상황에서의 전술적 승리란 것이 대국적 견지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반면 육군은 타사파롱가 해전의 승리에 큰 의미를 두었다. 어떻게든 과달카날 전투를 지속하고 싶었던 육군은 타사파롱가 해전의 승리로 일본해군이 다시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빼앗아 올 가능성이 커졌고 , 그러면 수송선을 이용한 보급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했다.
그러나 , 육군의 행복한 착각은 1 주일 만에 일본내각에 의하여 여지없이 깨졌다. 일본내각은 11 월까지 육군에게 주기로 약속한 14 만 5 천톤의 추가 징발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가 징발량을 축소하기 위하여 12 월 6 일에 다시 각의를 열었다.
다나카 작전부장은 마지막 양보안으로 12 월 중에 16 만 5 천톤의 추가징발안을 만들어 사이토 군무국장을 시켜 각의에 제출했다. 그러나 각의가 끝난 후 다나카 중장의 관사로 찾아온 사이토 군무국장의 보고 내용은 뜻밖이었다. 즉 일본내각은 12 월 중에 8 만 5 천톤의 추가징발 만을 승인했으며 , 나머지 8 만톤은 1943 년 1 월부터 3 월에 걸쳐 추가 징발하기로 결정했는데 , 대신 43 년 1 월에서 3 월까지 이미 계획된 손실보충량 18 만톤을 없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1943 년 4 월에는 이미 징발된 선박 중에서 18 만톤을 다시 반환하라고 결정했다.
한마디로 16 만 5 천톤을 징발해 주기는 하되 1943 년 3 월말까지 1 척도 잃지 말고 깨끗하게 사용한 다음 4 월에 이자까지 쳐서 18 만톤을 반납하라는 소리였다. 화가 치민 다나카 중장은 명색이 군인이면서 내각의 그따위 결정을 보고만 있었냐며 사이토 군무국장의 뺨을 올려 붙였고 , 졸지에 뺨을 얻어맞은 사이토 군무국장이 거칠게 대들면서 두 사람은 한바탕 고성이 오가는 말싸움을 벌였다.
분을 이기지 못한 다나카 작전부장은 당장 도조 수상을 찾아가
" 바카야로 !" 라고 소리치며 격렬하게 항의하다가 결국 경질되었다.
이어서 12 월 14 일에는 계속되는 구축함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 해군이 구축함을 동원하여 과달카날에 드럼통을 수송하는 일을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비로소 육군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과달카날의 참상을 보다못한 야마모토 제독이 다시 과달카날 철수를 건의하자 육군부는 얼른 받아들였다. 이후 육군과 해군은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일사천리로 철수안을 만들어 1942 년 12 월 31 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장군과 해군군령부 총장 나가노 제독이 공동으로 제출한 과달카날 철수안이 일왕 히로히토의 재가를 받았다.
1943 년 1 월 4 일에 대본영은 제 8 방면군에게 과달카날 철수명령을 내렸고 , 제 8 방면군은 1 월 17 일에 과달카날의 제 17 군 사령부에 이노우에 구마오 중좌를 파견하여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전쟁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과달카날 전투 (96) - 렌넬 섬 해전 (1) /blog.naver.com/imkcs0425/60117275630 (0) | 2018.10.30 |
|---|---|
| 과달카날 전투 (95) - 키위의 활약 /blog.naver.com/imkcs0425/60117215664 (0) | 2018.10.30 |
| 과달카날 전투 (93) -코컴보나 점령 /blog.naver.com/imkcs0425/60117039474 (0) | 2018.10.30 |
| 과달카날 전투 (92) - 해병제 2사단의 진격 /blog.naver.com/imkcs0425/60116925394 (0) | 2018.10.30 |
| 과달카날 전투 (91) - 기푸점령 /blog.naver.com/imkcs0425/60116864324 (0) | 2018.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