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키위의 활약
야마모토 제독은 과달카날 철수 계획에 따라 1943 년 1 월 2 일에 드럼통 수송을 재개했으나 이날의 수송은 미군 어뢰정의 방해로 사실상 실패했다. 1943 년 1 월 10 일 저녁에 뉴조지아 섬의 해안감시대원이 과달카날을 향해 가는 8척의 일본구축함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칵터스 항공대가 출격하기에는 시간이 이미 늦었으므로 다시 툴라기 기지에서 어뢰정 8척이 출동하여 , 11 일 오전 0시 37 분부터 일본구축함들과 교전했다. 어뢰정들이 발사한 총 22 발의 어뢰 중 1 발이 일본구축함 하츠카제에 명중했으나 하츠카제는 절뚝거리면서 무사히 귀환했고 , 어뢰정들은 일본구축함들의 반격을 받아서 PT-43 정과 PT- 112 정이 격침당했다.
일본 구축함들이 드럼통을 모두 투하하고 떠나자 미군 어뢰정들이 해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미처 회수하지 못한 드럼통 250 개만 파괴할 수 있었다. 보급은 사실상 성공했다. 1 월 14 일 저녁에는 일본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파견한 야노대대와 보급품을 실은 9척의 구축함이 다시 과달카날에 접근했다.
13척의 어뢰정이 요격에 나섰으나 달빛이 없는 캄캄한 밤이라 원시적인 조준장치 밖에 가지지 못한 어뢰정들은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 일본구축함들은 야노대대와 보급품들을 무사히 양륙하고 철수했다.
15 일 아침에 와일드캣의 호위를 받는 돈틀레스 15 대가 철수하는 일본구축함들을 공격했으나 구축함 아라시에 지근탄 1 발을 가하여 키에 손상을 주는데 그쳤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 투입되는 항공기의 중계 기지인 에스피리투산토에 타격을 줄 목적으로 1 월 20 일부터 31 일 사이에 대형수상비행정을 사용하여 5 번 야간공습을 가하였으나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일본해군은 또한 과달카날 철수를 엄호하고 , 미국함대세력을 분산시키기기 위한 양동작전도 실시했다. 중순양함 도네를 중심으로 한 수상함대가 마셜 제도의 잴루잇 환초 부근에서 시위활동을 했고 , 잠수함 I - 8 호는 1 월 23 일과 28 일에 칸톤 섬을 포격했다.
미국의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기 전에 꼭한번 과달카날에 가 보고 싶어했다. 니미츠 제독이 녹스 장관과 동행하여 누메아로 와서 헐지 제독과 함께 과달카날로 시찰을 가기로 했다.
3 명이 탑승한 수상기모함 커티스가 에스피리투산토에 입항하자 하필이면 그날 저녁부터 일본군의 대형수상비행정들이 에스피리투산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그날 8 발의 폭탄이 에스피리투산토에 떨어졌으나 피해는 거의 없었다. 22 일 저녁에 커티스가 과달카날에 도착하자 다시 일본군이 야간공습을 가해왔다.
그러자 태평양함대의 참모 중 일부는 일본군이 미해군 지휘부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었다. 사실은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았으나 태평양 함대의 참모들은 이 일로 인하여 전선 시찰 중인 적의 고위 지휘관을 암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새삼스럽게 눈을 떴다.
이러한 태평양 함대 참모들의 각성은 나중에 야마모토 제독의 격추로 이어지게 된다.
( 마타니카우 강 부근에서 전선 시찰 중인 녹스 해군장관 일행. 사진 왼쪽에 허리에 손을 얹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녹스 장관. 그 뒤가 제 14 군단장 패치 소장 , 가운데 철모를 쓰지 않은 사람이 니미츠 제독 , 이어서 헐지 제독과 제 25사단장 콜린스 소장이다.)
헐지 제독은 과달카날 시찰을 다녀온 직후 아인즈워스 제독의 제 67 기동부대로 하여금 콜롬방가라 섬의 빌라 비행장을 포격하도록 했다. 쿨라 만을 사이에 두고 문다 비행장과 마주보고 있는 빌라 비행장은 1943 년 1 월 22 일 현재 1800m 길이의 활주로가 거의 90% 의 공정을 보이고 있었다.
아인즈워스 제독은 문다 비행장 포격시와 마찬가지로 제 67기동부대를 2 개로 나누었다. 경순양함 2척 ( 내쉬빌 , 헬레나 ), 구축함 4 척 ( 니콜라스 , 드하벤 , 래드포드 , 오배넌 ) 으로 이루어진 포격부대가 포격을 가하는 동안 경순양함 2 척 ( 호놀룰루 , 센트루이스) 과 구축함 3척 ( 드레이튼 , 람슨 , 휴이 ) 으로 이루어진 지원부대는 남쪽에서 일본함대의 출현에 대비했다.
아인즈워스 제독은 포격부대를 지휘하여 1 월 24 일 새벽 2시 부터 2시 29 분까지 29 분 동안 빌라 비행장에 6 인치 포탄 2,000 발과 5 인치 포탄 1,500 발을 쏟아 붓고는 철수했다.
( 빌라 비행장 포격 상황도)
일본군 정찰기가 철수하는 포격부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곧 어뢰를 장비한 1 식 육상공격기들이 달려들었으나 미함정들은 교묘한 조함으로 모두 회피했고 구축함 래드포드가 레이더 조준으로 근접신관을 장비한 5 인치 대공포탄을 발사하여 일본기 1 대를 격추했다.
이때 일본군 정찰기는 물에 뜨는 조명탄을 투하하여 1 식 육상공격기들을 목표지점으로 유도하는 새로운 전술을 선보였다. 24 일 오후에 누메아 부근 해상에 떠 있던 항공모함 새러토가를 발진한 돈틀레스 24 대 , 아벤저 17 대 , 와일드캣 18 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경유하여 빌라 비행장에 23 톤의 폭탄을 쏟아붓고 다시 헨더슨 비행장을 거쳐 새러토가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1 월 25 일에 라바울의 구사카 진이치 제독은 칵터스 항공대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하여 73 대의 제로기와 미끼인 99 식 함상폭격기 13 대로 이루어진 대규모 공격대를 내보냈다.
미군기들이 99식 급강하폭격기를 쫓아오면 후방에 대기하던 제로기 대편대가 달려들어 격추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칵터스 항공대에서는 소수의 전투기만 출격하여 미끼인 99식 급강하 폭격기 4 대를 격추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일본군은 27 일에도 역시 같은 목적으로 공격대를 파견했고 이번에는 계획대로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으나 결과는 일본군의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이날의 공중전에서 칵터스 항공대는 12 대의 제로기를 격추하고 4 대가 격추되었다. 미국잠수함들은 1943 년 1 월에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 가장 많은 전과를 올렸다.
윌리엄 브록맨 소령이 지휘하는 노틸러스는 1 월 9 일에 부갠빌 섬 북방 해상에서 새로 장비한 SJ 레이더로 소형 수송선 1 척을 발견하고 어뢰 2 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클라크링 소령의 가드피시는 1943 년 1 월에 초계정 1 척 , 4000 톤급 수송선 1 척 , 그리고 구축함 하카제를 격침했다.
잠수함 그린링은 비스마르크 해에서 탄약을 운반하던 긴포산 마루에 어뢰를 명중시켜 ,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침몰시켰다. 하워드 길모어 중령의 그라울러는 1 월 16 일에 6,000 톤급 수송선을 격침했다. 스미스 소령의 소드피시는 1 월 19 일 대낮에 구축함의 호위망을 뚫고 들어가 묘호 마루에 2 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격침하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폴리 소령의 가토는 1 월 하반기에 2 번이나 대낮에 구축함의 호위망을 뚫고 들어가서 수송선 2 척을 격침했다. 1943 년 1 월 들어 미군잠수함들이 이렇게 활약하는 동안 일본잠수함들은 과달카날에 대한 물자수송에 매달려 있었다.
일본잠수함들이 물자수송용으로 전용됨에 따라 한때 어뢰집결지로 불렸던 과달카날과 에스피리투산토 사이의 해역도 한결 안전해졌다. 1943 년 1 월 동안 과달카날의 어뢰정들과 항공기들이 몇번 일본잠수함을 격침했다고 보고했으나 확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3 년 1 월 29 일에 뉴질랜드 해군의 소해함 키위와 모아는 명확한 전과를 올렸다.
뉴질랜드 해군의 버드급 소해함 4 척 ( 키위 , 모아 , 마타이 , 투이 ) 으로 이루어진 제 25소해대는 1943 년 1 월 15 일부터 툴라기를 모항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었다.
1943 년 1 월 29 일밤 9시 5분에 카밈보 해안 부근을 초계하던 키위는 2,700m 거리에서 일본잠수함 I - 1 호를 발견했다. I - 1 호는 부상하여 보급품을 하역하는 중이었다.
키위의 함장 브리슨 소령은 즉시 동료함 모아에게 경보를 발한 다음 전속력으로 I - 1 호를 향하여 돌진했다. 키위를 발견한 I - 1 호가 급히 잠항하자 키위는 한번에 6 발씩 2 번에 걸쳐 12 발의 폭뢰를 투하했다.
잠시 후 폭뢰로 피해를 입은 I - 1 이 부상하여 5 인치 주포로 반격하면서 도망치려 하자 키위는 4 인치 주포와 20mm 기관포를 난사하면서 충각공격을 실시했다.
( 뉴질랜드 해군의 소해함 키위 )
I - 1 호는 비록 잠수함이지만 수상전투에서도 키위나 모아같은 버드급 소해함에게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I - 1 호의 수상배수량은 2,000 톤이 넘어서 600 톤에 불과한 키위의 3 배가 넘었고 , 길이도 96m 로 51m 인 키위의 2 배에 가까웠다.
무장 또한 어뢰를 제외하고도 37kg 짜리 포탄을 발사하는 5 인치 갑판포 1 문과 7.7mm 기관총 2정을 장비하여 14kg 짜리 포탄을 발사하는 4 인치 주포 1 문 , 20mm 기관포 1 문 , 7.7mm 기관총 2정을 보유한 키위에게 결코 떨어지지 않았으며 , 수상속력도 18 노트로 13 노트에 불과한 키위보다 훨씬 빨랐다.
키위가 충각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함장 브리슨 소령의 재빠른 결단 덕분에 부상한 I - 1 호가 충분히 속력을 내기 전에 들이받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키위가 충각공격을 실시했을 때 I - 1 호 너머에서는 바지선 1 척이 보급품을 싣고 해안으로 도주하던 참이었다.
키위는 I - 1 호를 들이받은 상태에서 뱃전 너머로 4 인치 주포로 사격을 가하여 이 바지선를 격침한 후 일단 후진했다가 I - 1 호가 도망치려 하자 다시 속력을 내어 재차 들이받았다 이번에는 키위의 승무원들이 갑판으로 쏟아져 나와 욕설을 퍼부어 대면서 소총과 권총으로 I - 1 호의 승무원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잠시 후 또다시 후진한 키위는 세번째로 I - 1 호를 세차게 들이받았다.
이제 키위의 4 인치 주포는 연속된 발사로 너무 과열되어 포격을 중단해야 했고 , 충각공격을 3 번이나 거듭한 키위의 함수도 휘어버렸다. 함장 브리슨 소령은 동료함 모아에게 뒷처리를 부탁했고 , 모아는 4 인치 포를 쏘면서 I - 1 호를 추격했다.
키위의 충각공격으로 옆구리가 뻥 뚫린 채 중유를 흘리면서 12 노트의 속력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I - 1 호는 전투 시작 2 시간 만인 오후 11 시 20 분에 해안에 좌초했고 , 살아남은 승무원들은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굶주린 일본군에 합류했다. 나중에 I - 1 호의 잔해를 조사한 미군은 귀중한 정보를 담은 일본군 문서를 노획했다.
( 과달카날 해안에 좌초한 I - 1 의 잔해 )
이로써 뉴질랜드 해군의 소해함 키위와 모아는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일본잠수함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I - 1 호에서는 약 50 명이 전사했고 , 키위에서는 1 명이 전사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키위와 모아는 4 인치 포탄 58 발을 발사하여 17 발을 명중시켰고 이외에도 20mm 기관포탄 1,250 발 , 그리고 7.7mm 총탄 3,500 발을 발사했다. 세번의 충각공격을 가한 키위는 함수가 휘어 버려서 오클랜드로 가서 수리를 받았다.
( 충각공격으로 휘어진 키위의 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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