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조선시대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경북지역 내에서
거론한다면, 퇴계 이황과 수운 최제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
면 이 둘은 경북지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
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더라도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퇴계로 인해 이 지역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면,
수운으로 인하여 이 성리학적 지배체계가 마감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이
러한 외적 차이에 불구하고 그 내면을 살펴보면, 이들 사이에는 서로
계승되면서 공유되는 ‘정신’이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논자의 판단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12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으로는 이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철학적 논리에 상당부분 공유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면모를 밝혀 보려
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퇴계 철학의 핵심을 理發說이라고 말한다. 주자는 이
세계의 궁극적 절대자인 太極(理)이 도덕을 함축한 자연적 원리이기
때문에 無爲하다고 했지만, 퇴계는 리에 무위한 측면도 있지만 어떤
형이상학적 힘을 갖는 有爲한 측면도 있다고 하며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을 이끌어냈다. 퇴계 후학들은 이러한 퇴계의 리의 성격을 無爲
와 有爲가 종합된 ‘無爲而爲’라고 하였다. 반면에 수운 최제우 사상
의 핵심은 절대자로 대표되는 한울님은 인격적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리적인 무위
의 측면과 힘을 가지는 유위의 측면이 함께 있다고 보아, 그것을 ‘無
爲而化’로도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無爲而爲’와 ‘無爲而化’에 내적
연관관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생긴다.
‘無爲而爲’와 ‘無爲而化’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점은 조
선 후기에 유입된 천주교 사상과 대비해 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명확
해진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절대자를 그들이 믿는 천주(Deus)와 같
이 영명한 이성과 무한한 선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을 주재하는 것으
로 보았다. 이런 논리에 근거해 절대자를 무위한 원리인 태극으로 상
정한 성리학을 비판하였는데, 그 핵심은 태극에는 실질적인 힘을 의
미하는 유위의 측면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남지역에서 이런 천주교에 대한 비판은 대산 이상정 이후 본격적
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은 천주교가 절대적 인격신을 상정하면서
절대자를 원리적 측면보다 힘을 가진 유위한 존재만 부각시켜 인간을
미혹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절대자가 인격신으로 나
아갈 것을 우려해 퇴계가 말한 ‘리의 유위한 측면’을 제한하려고 하였
다. 반면에 동학의 無爲而化의 체계에서는 분명히 인격신을 말한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13
그 때문에 영남 퇴계학파보다 절대자의 유위를 더 강조하는 체계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천주교와 비교해 보면, 절대자는 여전히
무위한 원리적 측면을 가진다. 즉 절대자가 완전한 힘을 가지고 사후
세계까지 관장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 인간중심의 인문적 정신을
배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천주교의 절대자를 무위의 원리에
근거해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절대자를 무위와 유위의 긴장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태도는
영남 퇴계학파나 동학이 유사하다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이 글에
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동학이 퇴계학파보다 더 유위성을 강조하
였다는 점을 밝혀 보려고 한다.
왜 절대자를 이러한 긴장 관계로 보려고 하는가? 이 점에 대한 설
명은 영남 퇴계학파보다 동학의 논리가 단순명쾌하다. 절대자를 단지
도덕적 원리인 무위로만 보면, 그것을 내적 신념으로 심화시키는 노
력, 즉 敬 공부의 약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절대자의 유위
성만 강조하면 인간은 절대자가 제시한 것에만 의지하면서 신 중심적
세계관으로 빠져들고 만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남 퇴계학
파와 동학의 논리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북(영
남)이라는 지역성을 매개로 내면적으로 흘렀던 그들의 공통된 정신세
계를 철학적 논리에 따라 밝혀 보려는 것이다.
2. 퇴계와 그 후학들의 理의 해석
성리학 체계를 완성시킨 주자는 중국 고대 원시경전에 보이는 것과
같이 상과 벌을 내리는 인격적 상제를 거론하기도 하지만,2) 주로는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14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그러한 상제에서 인격적 요소를 탈각시키고 하나의 원리(理)로 보고
이 세상이 그 원리에 의해 주재된다고 생각하였다.3) 다시 말하면 주
자는 의지를 가지고 죄와 벌을 주는 인격적 신이 아니라, 법칙적 원
리가 인간과 세계를 주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4) 이러한 리의 주재
는 자연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운용되는 과정과 같다. 장자(莊
子)는 하늘이 움직이는 것(天運)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특정
한 무엇이 초월적 실체로 존재하여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
였는데, 주자 역시 주재를 그러한 의미로 보고 있는 것이다.5) 이러한
원리가 바로 일상적 생활의 규범이 되고, 또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
해서 그 리가 구현된다고 본다. 그리고 논리적 연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상제가 이러한 규범을 내려 주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6)
하지만 이러한 상제를 말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
2) 朱熹, ?朱熹集?, 卷14, 「經筵留身面陳四事箚子」. “臣恐不惟上帝震怒災異數
出, 正當恐懼修省之時, 不當興此大役, 以咈譴告警動之意, 亦恐畿甸百姓飢餓
流離, 阽於死亡之際, 忽見朝廷正用, 此時大興土木修造宮室.” 주자는 이렇게
원시 유학 경전이었던 ?시경(詩經)? 이나 ?서경(書經)?에는 천(天)을 의지나
감정을 가진 상제(上帝)로 인정하여 왕을 경계시킬 때도 있다. 이와 같은 天譴
論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3) ?朱子語類?, 1:20. “問, 上帝降衷于民, 天將降大任於人. 天祐民,作之君.
天生物, 因其才而篤. 作善, 降百祥, 作不善, 降百殃. 天將降非常之禍於
此世, 必預出非常之人以擬之. 凡此等類, 是蒼蒼在上者眞有主宰如是邪.
抑天無心, 只是推原其理如此. 曰, 此三段只一意. 這箇也只是理如此.”
4) ?朱子語類?, 1:22. “蒼蒼之謂天. 運轉周流不已, 便是那箇. 而今說天有箇
人在那裏批判罪惡, 固不可; 說道全無主之者, 又不可. 這裏要人見得.”
5) ?朱子語類?, 68:11. “或問, 以主宰謂之帝, 孰爲主宰. 曰, 自有主宰. 蓋天
是箇至剛至陽之物, 自然如此運轉不息. 所以如此, 必有爲之主宰者. 這樣處
要人自見得, 非語言所能盡(僩錄作‘到’)也. 因擧莊子孰綱維是, 孰主張是十
數句, 曰, 他也見得這道理.”
6) ?朱子語類?, 78:223. “舜禹相傳, 只是說,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只就這心上理會, 也只在日用動靜之間求之, 不是去虛中討一箇物事
來. 惟皇上帝降衷於下民, 天敘有典, 天秩有禮, 天便是這箇道理, 這箇道理便
在日用間. 存養, 是要養這許多道理在中間, 這裏正好著力.”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15
된 도덕적 원리나 다름없는 것으로 원리를 부여하는 상제와 그것을
부여받는 인간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7) 즉 자기 마음에 갖추어진
도덕적 원리가 바로 상제이지, 이것을 초월해 절대적 힘을 행사하는
상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자가 경(敬) 공부의 일환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어 상제를 대한다(潛心以居, 對越上帝)”고 말할 때의 상제
역시 인격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 공부에 전념하게 되면 내 마음에
빛나고 있는 도덕률이 완전해져서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이 완전히 맑고 공평하면 ‘상제를 마주 대할
수 있다’(對越上帝)고 한 것은 상제로 상징되는 리가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차게 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8) 즉 경에 의하여 리가 마음
속에서 구현된다는 뜻이다. 주자는 이 리가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의
적으로 그 힘을 행사하는 인격적 신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는 뭉쳐지고 조작을 하지만, 리는 情意도 없고 計度도
없고 造作도 없다. 단지 이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바로 그 속에
리가 들어 있다.9)
여기에서 정의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감정과 의지를 말하고 계탁은
7) 朱熹, ?朱熹集?, 卷58, 「答宋深之」, 2966쪽. “以理而言, 則上帝之降衷, 人心
之秉彛. 初豈有二理哉.”
8) 朱熹, ?朱熹集?, 卷57. 「答陳安卿」. “主敬之功專, 使胸中光明瑩淨, 超然於氣稟
物欲之上, 而吾本然之體所與天地同大者, 皆有以周徧昭晰, 而無一理之不
明, 本然之用與天地流通者, 皆無所隔絶間斷, 而無一息之不生. 是以方其物
之未感也, 則此心澄然惺惺, 如鑒之虛, 如衡之平, 蓋眞對越乎上帝, 而萬理
皆有定於其中矣.”
9) ?朱子語類?, 1:13. “蓋氣則能凝結造作, 理卻無情意, 無計度, 無造作.
只此氣凝聚處, 理便在其中.”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16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사고하여 판별한다는 의미이고 조작은 상과 벌을 내리는 것과 같은
실질적인 힘을 행사한다는 의미이다. 리가 무정의․무계탁․무조작하
다는 것은 리에 이런 인격적 요소가 없다는 것이고, 더 압축하여 말
하면 무위하다는 것이다. 정의와 계탁 그리고 조작과 같이 유위한 것
은 인간 마음에 해당하는 心氣에 있고, 무위한 리는 이 유위가 나아
갈 표준이나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 철학에서
리와 기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리는 기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퇴계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주자의 논리를 계승하면서도 리
의 유위한 측면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주자는 리에 動靜이 있으므로 기에 動靜이 있다고 하면서,
만약 리에 동정이 없다면 기는 어디로부터 동정이 있을 수 있
는가? 라고 하였다. 이것을 알면 이런 의심을 없앨 수 있다.
이른바 정의가 없다 등을 말한 것은 본연의 體를 말하는 것이
고, 발현하고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은 지극이 오묘한 用을 말
하는 것이다.10)
인용문과 같이 주자는 리에 동정이 있으므로 기에 동정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것이 바로 무정의 무계탁 무조작의 범위를 넘어
선다는 의미로까지는 해석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퇴계는 이를 해석하
는 과정에서 기의 운동(動靜)을 인도하고 제어하기 위해서는 리에
어느 정도 작위적인 운동(動靜)이 있어야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10) 李滉, ?退溪集?, 卷39, 「答李公浩養中」. “朱子嘗曰, 理有動靜, 故氣有動
靜. 若理無動靜, 氣何自而有動靜乎. 知此則無此疑矣. 蓋無情意云云, 本然
之體, 能發能生, 至妙之用也.” 이것은 이양중(이공호)이 “太極動而生陽, 靜而
生陰. 朱子曰, 理無情意無造作. 旣無情意造作, 則恐不能生陰陽. 若曰能生,
則是當初本無氣, 到那太極生出陰陽, 然後其氣方有否. 勉齋曰, 生陽生陰,
亦猶陽生陰生, 亦莫是惡其造作太甚否.”라고 물은 것에 대한 답변이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17
이것을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하여 리를 체와 용으로 나누고, 리의
체는 정의나 조작이 없지만, 리의 용은 정의나 조작이 있을 수 있다
고 한 것이다. 즉 용의 측면으로 한정된다 하더라도, 리에 어떤 미묘
한 힘이 인정되지 않으면 리는 기에 대하여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
하기 때문에 죽은 것과 같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11) 결국 퇴계의 의
도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 리가 어떤 힘을 갖고 기를 주재한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의도는 체는 무위하다고 하여 주자를 따르는
것에 있다기보다, 그 용에 정의나 조작이 있을 수 있다고 한 것에 있
으며, 이것이 그 철학의 독창적인 면이다.
이런 퇴계에 대해 율곡은 리는 무위하고 기만 유위하다고 하였다.
이런 율곡을 계승한 송시열은 리는 퇴계가 말한 것처럼 체와 용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용에 대해 정의나 조작을 인정하는 것
은 리에 인간의 마음과 같은 인격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이해 될 소
지가 있는 것으로 주자학의 본지에 벗어난다고 퇴계를 비판하였
다.12) 이렇게 되면서 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는 크게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퇴계학파 내에서도 리가 체로 무위하고 용이 유위하다는 것
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청대 권상일은 리가 실질적
으로 기를 발생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였다.13) 여기에
11) 李滉, ?退溪集?, 卷18, 「答奇明彦」. “隨吾所窮而無不到乎, 是知無情意
造作者, 此理本然之體也. 其隨寓發見而無不到者, 此理至神之用也. 向也
但有見於本體之無爲, 而不知妙用之能顯行. 殆若認理爲死物, 其去道不亦
遠甚矣乎.” 퇴계가 리를 체용으로 나누기 보기 시작한 것은 고봉과 격물의
대한 해석을 토론 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답이공호?
(인용문)에게 보이듯이 본체론적 설명에도 적용시켰고, 그 후학들은 리의 체
용을 본체론에 적용시킨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
12) 宋時烈, ?宋子大典?, 卷104, 「答李君輔」. 退溪所謂隨遇發見無不到者, 此
理至神之用也. 愚僭以爲此說未安. 旣曰理則無論體用而皆是無情意造作之
物也. 豈有如人心之有知覺而流轉運用自此到彼也.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18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대하여 당시 소퇴계라고 불리던 대산 이상정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대체로 태극은 [주체로서] 타는 것이고, 동정은 [태우는]
기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극이 기틀을 타고 동정이
있게 된다고 하면 옳습니다. 그러나 동정이 바로 태극이라고
하면, 이것은 [태극이] 음양의 영역을 너무 크게 침범해 형이
상과 형이하의 구분이 불분명하게 됩니다.14)
대산의 견해는 리(태극: 형이상자)의 동정에서 리가 실질적으로 동
정하게 된다면 기(음양; 형이하자)가 동정한다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리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하면
서 理發을 주장할 경우 그 리는 기와 같아지고 만다는 것이다. 강력
한 리발론은 그 자체로 기론으로 빠져드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는 것
이 그의 견해이다. 이런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상정은 리를 율곡과
같이 완전히 무위하다고 보지도 않고, 청대 권상일같이 실질적인 유
위함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이 둘을 종합한 형태로 다음과 같
이 말한다.
리는 살아있는 것이다. 비록 기를 타고 동정하게 되지만, 그
운용의 미묘함은 지극히 신묘한 용이다. 그러므로 리는 무위이
위(無爲而爲)한 것이지, 죽은 상태로 무위한 것은 아니다.15)
13) 權相一, ?淸臺先生文集?, 卷8, 「答李景文」. “況太極動而生陽, 是最初源頭,
理生氣, 理先氣後之時, 此處豈合着氣也.”
14) 李象靖, ?大山集?, 卷6, 「答權淸臺」. “蓋所乘者太極, 而動靜爲其機焉, 則謂
太極乘機而有動靜, 則可. 謂動靜便是太極, 則是浸過陰陽界分, 而不明於形而
上下之別矣. 且以動靜爲太極, 而所乘者又爲太極, 則是以理乘理, 安有是哉.”
15) 李象靖, ?大山集?, 卷40, 「讀聖學輯要」. “蓋理是活物, 雖乘氣而爲動靜, 而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19
문장이 갖는 함의는 사단과 같은 도덕적 감정이 발출되기 위해
서는 리가 실질적으로 작용은 하지 않지만 그 신묘한 계기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것은 실질적 힘
을 행사해서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재하지 않으면서 주재하는 것
과 같이 미묘한 방식으로 주재하는 것을 말한다.16) 그는 왜 이렇게
모순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리를 정의하면서 리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대산 이상정의 제자 정종로에서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사람 중에 리와 기가 분리된다는 것을 치우치게 강조
하는 자는 태극이 단지 동정 본연의 신묘함임을 알지 못하고
리가 진짜로 스스로 동정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무위진인이 앉
아있는 것을 속으로 허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17)
이것은 권상일을 염두에 둔 비판이다. 그 비판의 핵심은 리가 실제
로 동정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결국 리에 정의․계탁․조작을 인정하
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리가 인격신으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
는 것이다. 정종로는 이상정이 리를 ‘無爲而爲’라고 한 것에 근거하
여 리의 동정 본연의 신묘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율곡학파처럼
완전히 무위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다시 말하면 리는 인격신과 같
이 직접 힘을 행사하지 않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서 사단과 같은 도덕
其發揮運用之妙, 則乃其至神之用耳. 故無爲而爲, 非泯然無爲也.”
16) 李象靖, ?大山集?, 卷40, 「讀聖學輯要」. “退陶曰, 理發爲四端, 所資而發者
氣耳. 其所以能然, 實理之爲也. 又論太極生陽曰, 無情意無造作, 本然之體,
能發能生, 至妙之用也. 如此乃是至論, 然又須見得所謂能發能動者, 非是用
意造作, 自行自止, 如曰不宰之宰, 無爲之爲耳.”
17) 鄭宗魯, ?立齋集?, 卷24, 「太極動靜說」. “今人或偏主不雜者, 不知所謂太
極只是動靜本然之妙, 而以爲理眞能自動靜, 有若無位眞人坐在裏許者然.”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20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적 작용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퇴계의 주장은 율곡학파에 비해서 종교적 방향으로 나아갈 가
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퇴계 후학들은 퇴계를 계승하면서도 이 점을
염려하여 리의 실질적인 힘을 의미하는 유위성을 제한하여 이해하려
고 한 것이다.
3. 최제우 이전 경주지역의 상제관의 일단면
절대자로 대표되는 상제나 리가 무위한 것일까, 유위한 것일까라는
문제를 철학적 논리로만 접근하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
다. 그런데 문학작품을 통해 보면 그 의미가 실감나게 이해된다. 최제
우 이전 ‘북대산 남활산’이라고 불리면서 경주 지역에서 학문을 주도했
던 활산 남용만(1709~1784)18)은 상제의 무위성과 유위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것을 문학작품을 통해서 표현하였다. 이런 남용만이 쓴
사(詞)를 분석해 보면, 최제우 이전 경주지역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상
제관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처음 이렇게 시작한다.
밝고 밝은 상제가,
아무런 사심없이 이 세상을 환하게 굽어보고 있네.
해와 달 그리고 뭇 별들이 길게 걸쳐 있는 곳에서,
인간의 유구한 삶을 자세히 지켜보네.19)
18) 남용만은 크게 보면 퇴계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좁게 보면 특정한
사승관계 없이 경주지역의 정서를 대변하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한 학자이다.
그의 아들 남희정은 대산 이상정의 제자였고, 최제우 아버지 최옥은 남희정
을 스승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남용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정
황으로 보아 최제우도 이런 남용만의 생각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21
이 표현은 절대자 상제가 인간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제가 인간과 같이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인간세계를
살펴보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상제가 정의를 가지고 인간 세계
를 계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바로 원시
유학에서 나타나는 상제관이고, 주자는 상제를 리로 보면서 이러한
면모를 탈각시키고자 하여 무정의․무계탁을 말한 것이다.
이 글은 남용만 자신과 상제가 대화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삼가 바라옵건대 푸르고 푸른 하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에게 한 가닥의 맑은 빛을 주옵소서.
긴 무지개 같은 모습으로 이 서캐 같은 놈을 이끌어 주소서,
저는 겸산자라고 하옵니다.
상제가 말하기를, 아! 너희 하계에 사는 사람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처음 부여했던 것은 곤궁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리(理)인 천명, 이것이 바로 너희의 본성이었고,
보통 사람 역시 성인과 똑같이 하였다.20)
인용문과 같이 상제에게 묻고 그 상제가 대답하는 것은 앞에서 논의
했던 인격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상제 자신은 인간에게
천명이나 리를 부여했다고 말한다. 천명이나 리가 어떤 필연적 도덕원
리라고 해도 상제가 그것을 부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인격적
신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제와 대화는 최제우가 겪었
던 경신년의 종교체험에서 상제와 대화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19) 南龍萬, ?活山先生文集?, 卷1, 「天對兼山子乞明詞」. “明明上帝, 洞照
無私臨下界. 長懸日月與辰星, 炳朗人間千萬歲.”
20) 南龍萬, ?活山先生文集?, 卷1, 「天對兼山子乞明詞」. “伏乞蒼蒼哀悶
視, 幸假我一縷淸光. 長似虹導此蟣虱, 臣曰兼山子. 帝曰嗚呼爾下土之
臣, 我所賦汝初不貧. 一理命之是謂性, 衆人亦皆同聖人.”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22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그런데 남용만은 점차 이런 인격신적인 측면을 벗어나려고 하면서,
부여된 리(성)가 마음의 한 조각으로 본래의 하늘임을 강조한다.
마음의 한 조각은 본래의 모습이 하늘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은 청량하기가 비 그친 후와 같은
것이다.21)
‘마음이 본래 하늘이다’는 것은 하늘이 마음속에 내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역시 동학에서 말하는 “내 마음(상제의 마음)이 곧 네 마
음(최제우의 마음;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장면이 연상되는 대목
이다. 사실 이 점이 강조되면 인간이 신에게 완전히 귀속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향이 더 발전하면 신은 인간을 위한 수단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신을 모시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
이지 신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을 함축하게 된다. 남용만은
이 점을 이렇게 말한다.
이런 것들은 정말로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내가 간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밝아지려면 이것을 따라 신중히 해야 한다.
글을 쓸 때는 안과 밖이 하나로 통하도록 하여.
하늘과 땅을 우러르고 굽어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밝음에 무엇이 부족하여 다시 더 보탤 것이 있
겠느냐,
너는 이제 나를 향해 애써 무릎을 꿇고 절하지 말라.22)
21) 南龍萬, ?活山先生文集?, 卷1, 「天對兼山子乞明詞」. “靈臺一片本色天,
懸在中州淸似霽.”
22) 南龍萬, ?活山先生文集?, 卷1, 「天對兼山子乞明詞」. “是固在人不我預,
爾明從此能愼之. 有文成章徹內外, 俯仰乾坤無自愧. 明何不足㪅願添,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23
여기에서 상제가 인간에게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상과 벌을 내릴
수 없다는 뜻과 통한다. 이것이 주자학에서 말하는 무조작의 뜻이고,
현세는 물론 내세에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상제는 의지와 감정(정의)을 가지고
인간세상을 굽어 볼 수 있지만(계탁할 수 있지만), 조작은 할 수 없
다는 것이다. 즉 상제는 도덕률을 부여하고 그것을 살펴보지만, 그
나머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신의 힘
을 무한정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정도 제한한 것이다. 그리
고 상제가 부여한 하늘이 인간에게 온전한 모습으로 내재되었다는 점
이 강조되면, 그것을 초월해 있는 상제에게 경배할(worship) 의무
가 줄어들면서 자기 수양(self cultivation)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자기수양의 의미가 더욱 강화되면, 앞에서 주자가 敬
을 해석하면서 대월상제를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즉 자신에
게 주어진 리를 밝히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고, 따로 초월적 상
제를 공경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런 면모 때문에 주자학을 인간중심
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자기수양의 측면이 강조되면 상제는 바로 도덕적 원리이면서 정
의와 계탁의 의미도 거의 무의미하게 된다. 이 점은 이 글의 마지막
구절에 극적으로 나타난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바삐 일어나 감사하고,
충만된 마음으로 겸산당으로 돌아와 누웠다.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며 더 이상 원망하지 않으니,
중천의 태양 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23)
勿須向我勞跪拜.”
23) 南龍萬, ?活山先生文集?, 卷1, 「天對兼山子乞明詞」. “聞之僕僕起謝忙,
浩然歸臥兼山堂. 顧諟明命不怨尢, 中天白日光煌煌.”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24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남용만은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인간세상을 굽어보는 상제를 설
정하였는데, 마지막에 와서는 그것을 부정하는 뜻으로 태양빛만 밝게
빛난다고 하였다. 즉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상제가 하늘에 따로 존재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상제는 바로 도덕적 원리이면서 범신론적으
로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앞에서
말한 상제는 인간에게 이미 내재해 있는 리를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설명 틀로 볼 수 있다. 상제를 순전히 이런 논리적 설명 관계로만 보
는 것이 바로 ‘性卽理’의 의미이다.
전체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남용만은 처음에 인격적 상제를 설
정했다가 그것을 점차 내재적인 범신론적 도덕원리로 전환시켰다. 즉
유위한 상제가 무위한 원리로 전환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남용
만은 마지막에 무위한 리로 회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용만이 초반에 인격적 상제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을 전적으
로 무의미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실 이상정이나 정종로가 리가
실질적인 힘을 가진다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 것은 바로 남용만의
글 전반부에서 나타나는 것같이 인격적 상제를 리로 보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성리학자라면 자신의 체험을 개입
시키는 형태로 이러한 상제관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남용만
은 문학작품이라는 수단을 활용하여 이것을 거리낌없이 표현한 것인
데, 그 결론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제기와 그 과정도 상당
한 의미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위한 원리라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사물의 존재와 같은
실체적 존재(substantial being)가 아니기 때문에, 그 존재 양상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철학적 개념장치가 요구되고 그만큼 일반
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에 남용만이 인격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상제를 설명한 곳에서는 그 절대자의 존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인격적 상제를 부정하고 “태양빛만 빛나고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25
있었다.”고 한 구절에서도 절대자인 리가 실재(reality)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또 그러한 리는 절을 하거나 하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에 대해 무한한 경외심을 가질 것을 요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남용만의 이 글에는 인격적 상제를 설정하면 절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쉬울 뿐 아니라 거기에 기반한 강력한 신념을 제고시킬 수 있
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제를 그렇게 단순히 볼 수는 없다는 고민이
서려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남용만이 후반부에서 보여준 성리
학적 논리는 고도의 사변적 이해를 요구하지만, 초반에 제기한 상제
관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소박한 일반 민중들에게는 후반
부보다 전반부의 논리가 더 설득력을 지닐 가능성을 가진다. 이 점에
서 인격신을 내세운 동학사상이 순식간에 많은 민중들에게 호응을 얻
을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남용만의 상제관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최제우의 인격적 상제관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서양 천
주교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최제우의 상제관이 천주교의
인격적 신의 논리를 수용했을 때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라, 남용만이 초기에 제기한 상제관 같은 것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영남 퇴계학파의 천주교 상제관 비판
남용만이 제기한 인격신의 개념이 천주교의 영향이라고 하기는 어
렵지만,24) 이때는 벌써 천주교가 조선사상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24) 남용만은 경주부윤으로 부임한 홍양호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경주 부임을 역임한 후 홍양호는 중국에 갔다 온 일이 있고 거기서 천주교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26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하던 때이다. 이 때 성호와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그에 대한 비
판적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안정복이 천주교를 비판했던
내용이 영남 퇴계학파에도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안정복과 연계가 있
었던 이상정의 제자들은 영남에도 천주교가 전파될 것을 우려하면서
사전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천주교의 핵심논리는 절대자인 신을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유위한 존
재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리는 천주와 크게 다르다. 리는 속성의 범주로 자립하지 못
한다. 그런데 어떻게 영각(靈覺)의 능력을 포함하지 않으면서
자립의 범주가 될 수 있는가?… 만약 리가 만물의 영(靈)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만물을 조화하고 생성시킨다면, 이것은 바
로 천주이다. 어찌 그것을 리라고 하고 태극이라고만 부를 수
있겠는가?25)
이 인용문의 첫 번째 뜻은 리가 실체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다. 실체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리는 기 없이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에 의거해야 하기
때문에, 리는 그 자체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자립자, 즉 실체(substance:
自立者)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보기에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는 기에 의거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가 실체 개념
에 가깝고 리는 기라는 실체에서 파생된 속성(accident: 依賴者)
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리에 영각(靈覺)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 지식을 얻고 그것을 비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홍양호의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남용만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25) 利瑪竇, ?天主實義?, 「2篇」. “理也者則大異焉, 是乃依賴之類, 自不能立.
何能包含靈覺, 爲自立之類乎… 如爾曰, 理含萬物之靈, 化生萬物. 此乃
天主也, 何獨謂之理, 謂之太極乎.”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27
여기에서 말하는 영각은 인간에게 지성과 의지가 있듯이 천주는 신적
지성(divine intellect)과 신적 의지(divine will)를 가지고 있
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신은 인간이 가진 불완전한 지성에 비
해 모든 것을 아는 완전한 지성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가진 유한한
의지에 비해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무한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성과 의지가 바로 성리학에서 말하는 계
탁과 정의에 대응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조화하고 생성시킨다는
것은 이 세계를 그러한 능력으로 창조했다는 것이고, 이런 무한한 능
력에 근거해 신은 사후 세계까지 관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
에서 말하는 조작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절대자가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인격신의 의미이다.
마테오 리치의 이 비판은 성리학에서 절대자를 리로 보면서도 정
의․계탁․조작을 배제시킨 것에 대한 것이다. 만약 리에도 계탁․
정의와 같은 영각이 부여되어 있고, 그것에 근거해 주재와 창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말하는 천주와 같다는 뜻이
다. 이런 마테오 리치의 이런 성리학 비판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리의 힘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는 퇴계 철학이 율
곡 철학보다 더 종교적 경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천주교와 유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 원시유학을 분석한 마테오 리치
는 원시유학에 나타난 상제는 태극과 다르게 영각을 가지고 주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천주교의 천주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천주는 중국의 원시유학 경전에서 말하는 상제입니다.
?중용?에서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교사(郊社)의 예는 상제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6)
26) 利瑪竇, ?天主實義?, 「2篇」. “吾天主, 乃古經書所稱上帝也. 中庸引孔
子曰郊社之禮, 以事上帝也.”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28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이 인용문에서와 같이 천주교의 천주(Deus)는 중국의 상제와 같
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원시유학의 상제관에 의
한 주자학적 태극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즉 중국의 원시 유교사
회에서는 황제가 만백성을 이끌고 교사에서 궁극적 절대자인 상제를
경배하는 행위를 통하여 공동체 의식과 그에 기반한 도덕률을 제고시
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자학에서 그러한 상제를 태극으로 대치시키
고 그 태극을 무릎 꿇고 절하는 제사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다. 이렇게 되면서 상제를 경배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종교적 경건
성이 약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가 생각하
기로 성리학은 원시유교를 계승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불교에
습합되어 범신론으로 빠져 인격적 상제를 부정하면서 원시유교가 가
졌던 종교적 경건성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유학에서
빗나간 성리학을 비판하지만 궁극적으로 유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 원래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보충한다고 하는 것이
그가 말한 보유론의 내용이다.
천주교의 논리에 의하면 만물의 시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는 그 자
체로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인간은 그 경배를 통하여 도덕적
행위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그 자신에
게 생명을 부여한 절대자를 두려워하며 경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그
절대자가 부여한 도덕률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 있게 된다는 것이
다. 그런데 성리학에서와 같이 절대자가 인간에게 완전한 형태로 내
재되었다고 하면, 그 자체로 인간이 절대자와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단지 지켜야 할 원리만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이
원칙을 준수한 자와 어긴 자에 대한 감시와 처벌하는 절대자는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종교적 외경심에 기반한 도덕적 행
위를 이끌어 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이들 비판의 핵심이다.27)
이러한 천주교에 대하여 영남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비판을 제기했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29
던 인물이 이상정의 제자 남한조이다. 남한조는 성리학의 리는 무정
의․무계탁․무조작하다는 것에 근거해 마테오 리치가 절대자 신이
정의․계탁․조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을 비판한다.
상제가 만물을 주재하는 것은 리의 무성무취(無聲無臭)함
으로 세상 만물의 근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
이 정의가 있고 조작이 있는 영신(靈神)이라면, 형이하의 한
물건과 같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의 변화를 주재할 수
있겠는가?28)
천주교에서는 유위한 상제와 무위한 태극을 구분하여 상제만 인정
하고 태극을 배척하는데, 사실은 상제를 바로 태극이나 理로 이해해
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제는 리를 의미하는 자연적 원리이기 때문에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인격적 요소, 즉 정의․계탁․
조작이 없다는 것이다.29) 정의․계탁․조작은 형이상의 리가 적용되
는 대상인 형이하의 氣의 세계에만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
면 천주교에서 절대자 신에게 정의나 조작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절
대자를 형이상의 리가 아닌 형이하의 기로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성리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민간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는
27)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논리에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정약용이다. 정약
용이 성리학의 리를 비판하는 맥락은 이러한 것이고, 또 정약용이 상제를
영명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것에 근거한 면이 크다.
28) 南漢朝, ?損齋先生文集?, 卷12, 「安順庵天學或問辨疑」. “固若有無理
之物, 而及其理之依於物也, 亦不過依附贅剩之一理矣. 此其果成說乎.
且上帝之主宰乎萬物者, 以理之無聲無臭, 而能爲品彙之根柢. 若是有
情意造作之靈神, 則下同於一物, 而安能爲萬化之主宰乎.”
29) 南漢朝, ?損齋先生文集?, 卷12, 「安順庵天學或問辨疑」. “彼之主上帝而斥
太極, 蓋以上帝爲靈神, 而有情意有造作, 故惡理之自然能如此, 而必欲絶
去之也.”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30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정의․계탁․조작을 절대자에 투영하고 거기에 대해 자신의 복을 위
해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경향이 있는데, 천주교의 신은 바로 그런
영신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영신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기적과 같이 절대자가 특정인
에게 특정한 행위를 부여하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본다는 것
이다.30) 이렇게 개별적 사안에 자의적 힘을 행사하는 절대자는 결국
필연적 원리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한
조는 성리학과 천주교의 차이를 ‘세상은 필연적 법칙에 의하여 운용되
는가?’, 아니면 ‘우연적 힘에 의하여 운용되는가?’ 하는 방식으로 구
분해 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필연적 법칙이 아니라 우연적 힘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고 보면, 세상은 그 자체로 혼동과 무질서로 빠지
고 만다는 것이 그의 천주교 비판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
의 논리에 따라 우연적 힘이 아니라 필연적 법칙이 형이상의 절대자
가 되어, 그것이 개별 사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
다.
이러한 절대자가 유위한 힘을 가졌다는 천주교를 비판하기 위하여
남한조는 리에는 정의 계탁 조작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위한 필연적 법칙인 리와 힘은 있지만
방향성이 없는 유위한 기를 구분하면서, 기는 리의 법칙에 지배를 받
아야 한다는 것에서 주재의 참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영신은 리의 하위에 있으면서 리의 지배를 받아
야 하는 것이다.
천주교를 비판한 또 다른 영남의 학자 중에 조술도가 있다. 조술도
는 역시 안정복을 통하여 서울의 성호학파의 일부가 “상제가 너의 머리
위에 계신다(上帝臨汝).”, 혹은 “상제가 나날이 이곳을 굽어 보시네.
30) 南漢朝, ?損齋先生文集?, 卷12, 「李星湖天主實義跋辨疑」. “彼所以天
主爲氣之靈神而言也, 有情意有造作, 而糚出許多技倆也.”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31
(日監在玆)”라고 한 원시유교에 근거해 천주교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31) 그리고 그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
다.
옛날 유교 경전에서 경천(敬天)에 대해 말한 모든 부분에서
는 반드시 하늘의 도를 공경하여 나의 몸을 닦는다고 하였
다… ‘상제가 너의 머리 위에 계신다.(上帝臨汝)’거나 ‘상제가
나날이 이곳을 굽어보시네.(日監在玆)’라고 한 것은 상제의
일이 실제로 나의 몸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지
금 서학의 말과 같다면 사람 이하는 모두 쓸데없는 불필요한
물건이며, 성인이 말한 공부의 오묘한 쓰임은 폐지하여 버려야
할 일이 되고 말 것이다.32)
원시유교에서 말한 경천은 도덕적 수양의 근거가 되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도덕률에 대한 경건성을 제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몸을 벗어난 것, 즉 인간을 초월해 있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천주교와 같이 초월적 신을
설정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면, 모든 것을 신으로 귀결시키
는 신 중심의 세계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 중심
의 세계관은 결국 인간의 중심의 인문정신(humanism)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에 근거해 보면 신을 설정
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도덕 행위를 이끌어내는 수단적 의미를 갖
31) 趙述道, ?晩谷集?, 卷8, 「雲橋問答」. “其曰上帝臨汝. 曰日監在玆云
者, 亦於天之中, 以上帝爲主, 西學之所云天主者, 實上帝之異其名耳.”
32) 趙述道, ?晩谷集?, 卷8, 「雲橋問答」. “凡經中諸言敬天者, 必曰敬天之
道, 而修之於吾身也. … 曰上帝臨女, 曰日監在玆云者, 言上帝之事,
實不外於吾身. … 今若西學之言, 則自人以下, 皆無用之長物. 聖人所
云功夫妙用者, 皆可廢可棄之事也.”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32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인간에게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
하면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을 추종하여 원시유교의 상제관을 회복하
려고 하거나 천주교 자체에 경도된 성호학파의 일부 학자들의 논리는
주자학적 인문정신을 파괴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비
판이다.
사실 원시유학에서 성리학으로 발전한 것에서는 바로 이러한 인간
중심의 인문정신의 고양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문
정신을 뒷받침하는 것이 리의 무위한 법칙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
리는 일정정도 종교적 경건성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위한 리와 종교적 경건성은 서로 반비례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남지역에서 이렇게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높아
지면서 그에 비례해 리의 무위성이 강조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
다. 그리고 이것은 대산학파에서 퇴계가 말한 리의 유위성도 제한적
으로 이해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5. 퇴계 철학과 관련해 본 東學의 상제관
최제우가 말한 동학사상의 기본 방향을 살펴보기 위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 성리학은 원시유학
의 인격적 상제를 필연적 법칙으로 전환시키면서 원시유학이 갖는 종
교성보다 철학적 인문정신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 과정에서 리의 무
정의․무계탁․무조작을 강조하였다. 둘째, 퇴계가 리의 체는 무위하
지만 용에는 정의․계탁․조작이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부정한 율곡학
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33
었다. 셋째, 천주교는 절대자에게 강력하게 정의․계탁․조작이라는
힘을 부여하면서 종교적 경외심을 추동하는 체계이다. 넷째, 영남 퇴
계학파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맥락에서는 리의 무위성을 강조하면서
리의 유위성을 경계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영남지역의 사상
적 지형도에서 최제우는 어떤 방향을 모색한 것일까? 최제우가 이러
한 영남 퇴계학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속
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분명 성리학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 천주교
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보면 이들의 핵
심과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또 자신의 방향도 분명했다는 느
낌이 든다.
아동방 현인달사 도덕군자 이름하나 무지한 세상사람 아는
바 천지라도 경외지심 없었으니, 아는 것이 무엇이며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
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33)
이 인용문의 전반부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고 후반부는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다. 먼저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종교적 경외심이
없다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도덕법칙의 근간이 되는 천지의 이치에
대해 아는 것은 있지만, 상제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경외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천주교 신자
들은 절대자의 유위한 힘만 믿으면서 천지의 법칙성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사후의 천당을 기원하는 것과 같은 허무맹랑한 미
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최제우의 의도는 한편으로
는 종교적 경건성을 제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천도의 법칙성에 대
한 이해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절대자는 무위한 법칙성과
33) 최제우, ?용담유사?, 「도덕가」.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34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유위한 힘의 측면이 동시에 종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같은 의미는 절대자의 유위성의 최대로 강조한 그의 경신년 신
비 체험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
뜻밖에도 경신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하여 몸이 떨려왔다.
깜짝 놀라 일어나 물으니,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
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하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
냐?”라는 대답이 있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나 또한 공이 없
었으므로 너를 세상에 나게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
르치게 하려고 한다. 부디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 이유를 살펴본 즉 정성을 드리고 또 정성을 드리어 지극
히 한울님을 위하는 사람은 매번 들어맞고 도덕을 순종치 않
는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으니, 이것은 받는 사람의 정성
과 공경이 아니겠는가.34)
여기에서 최제우가 상제와 대화하는 모습은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인격적인 신을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신은 천주교와 같은 전지전
능한 신은 아니다. 상제는 한계가 있고 인간세계에 깊이 관여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제가 가지는 이러한 한계
때문에 결국 인간의 노력이 강조된다. 다시 말하면 도와 덕의 성립은
인간의 정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35) 이것은 모든 것을 신 중심으
로 회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정도 인간 중심의 인문정신을 배제하
지 않으려고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조술도가 강조한 인문정신과
통하는 면이 있고, 특히 상제관은 천주교보다 남용만의 초반에 제기
하였던 인격적 상제관과 유사하다. 즉 상제는 도덕률을 부여하지만
34) 최제우, ?東經大全?, 「布德門」.
35) 최제우, ?東經大典?, 「論學文」. “雖然, 道成德立, 在誠在人.”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35
인간 세계에 관여할 수 없고, 결국 인간이 그 도덕률을 완성해야 한
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다.
왜 최제우는 이같이 상제의 능력을 제한하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미신적 허무맹랑한 세계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특히 사후세계
를 부정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남녀노소 아동주졸 성군취당 극성중에 허송세월 한단말을
보는듯이 들어오니 무단히 한울님께 주소간 비는말이 삼십삼천
옥경대에 나죽거든 가게하소 우습다 저사람은 저의부모 죽은후
에 신도없다 이름하고 제사조차 안지내며 오륜에 벗어나서 유
원속사 무삼일고.36)
이 내용은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에서 말하
는 것과 같은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다. 천주교는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느님에 의하여 인간 영혼이 창조된 그 순간부터 불멸하다고 한다.
이런 논리에 근거해 그 영혼이 내세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
이다. 이러한 논리의 이면에는 하느님의 힘은 전지전능한 것으로 그
힘을 행사하는 데 아무런 한계가 없다는 뜻이 들어 있다. 절대자는
개별적 인간의 삶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창조주는 이 세상을 그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창조했지만, 그것이 피조물에게는 필연적 원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필연적 법칙은 하느님의 자유에 종속
되는 것이고, 또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다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의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후세계와 같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 있는 것이고, 이것은 믿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천주교의 논리를 뒤집어 생각하면, 신비
36) 최제우, ?용담유사?, 「도덕가」.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36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필연적 법칙이 강조되어야 하
고 절대자의 자유로운 의지가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는 최제우가 천주교를 비판하는 데서 나타난다.
우리 도는 무위이화이다.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
게 하고 그 성품을 따르고 그 가르침을 받으니, 화는 스스로
그러한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
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다.37)
이 비판의 핵심은 천주교에는 너무 신비스러운 요소가 많다는 것이
다. 특히 자신이 내세를 가기 위해 비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
은 남한조가 천주교를 비판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남한조
는 천주교가 신의 정의․계탁․조작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리
를 해친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절대자유를 상정한 천주교의 신에
신비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
면 천주교 신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최제우가 말한 ‘無爲而化’는
‘천도는 일정하다’38)는 리의 필연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37) 최제우, ?東經大典?, 「論學文」. “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
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西人. 言無次第, 書無皂白, 而頓無爲
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
38) ?동경대전?, 「포덕문」에 나오는 “盖自上古以來, 春秋迭代四時盛衰, 不
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 自五帝之後, 聖人以
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一盛
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而順天理者也”라는 구절과 「논학문」에 나
오는 “夫天道者, 如無形而有迹, 地理者如廣大而有方者也. 故 天有九
星, 以應九州, 地有八方 ,以應八卦而, 有盈虛迭代之數, 無動靜變易
之理.”라는 것은 「수덕문」에는 나오는 “元亨利貞, 天道之常” 라고 한 것
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들은 천도의 일정함 다시 말
하면 리의 무위성을 말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37
특히 최시형의 해석과 같이 ‘無爲而化’ 전체 내용은 필연적 리에 의
하여 만물이 생겨나는 것(化)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9)
이렇게 큰 줄기에서 볼 때, 퇴계학파에서 리를 ‘무위이위’로 표현하
여 리의 필연성을 담보하려 한 것은 동학이 ‘無爲而化’를 말하면서
천도의 일정함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
기에서 爲와 化의 차이를 고려해 볼 수 있다. 爲나 化는 천주교와
같이 절대자의 전지전능한 힘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절대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유위성을 의미
하는 爲는 퇴계의 理의 用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계탁․조작이 있
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강조되면 바로 인격적 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대산학파에서는 이 의미를 제한하려고 하
였다. 그런데 동학에서 이미 인격신을 인정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化에는 爲보다는 더 인격적 요소가 부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논자의 판단으로는 이런 化가 강조되면 그 자체로 기론(氣論)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대산학파에서는 리가 지닌 정의․ 계
탁․ 조작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인정하면 바로 영신(靈神)과 같은
기론에 빠진다고 하였는데, 동학의 주문에는 바로 이러한 靈神의 의
미가 들어 있다.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
39) 이돈화, ?천주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소화 8년, 26쪽. 대신사(大神
師)의 주문(呪文) 삼칠자(三七字)는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을 말한
것이오. 수심정기사자(守心正氣四字)는 천지운절(天地隕絶)의 기(氣)를 보
(補)한 것이며 무위이화(無爲而化)는 만물성도(萬物成道)의 리(理)를 가
르침이니 그럼으로 도는 고원난행처(高遠難行處)에 있는 것이 아니오. 삼칠
자(三七字)로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을 알고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성도(成道)의 리(理)를 깨닫고 수심정기(守心正氣)로 천지태화(天地太和)
의 원기(元氣)에 접(接)하면 도(道)가 가(可)히 서기(庶幾)라할지라.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38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40)
먼저 전반부에서 상제를 지기(至氣)로 표현하면서 그것이 강림하
기를 바란다는 내용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至氣는 일종의 靈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의 천주조
화 자체도 완전히 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앞에
서 지적했듯이 천주조화는 ‘無爲而化’를 의미하고, 최시형이 말했듯
이 이것을 리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이렇게 되
면 주문에 나타난 한울님의 논리적 구조는 천도의 원리적 리와 인격
적인 영신의 요소를 동시에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理而氣’, 혹
은 ‘氣而理’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최제우는 천도의 원리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고 무위를 인정하
기 때문에 천주교와 같이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신을 배격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최제우는 다른 한편으로 성리학보다 상제의 유위성을 강
조하였다. 그럼으로 해서 그는 도덕 원리에 대한 종교적 경건성을 확
보하려고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퇴계의 문제의식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퇴계는 주
자학이 가지는 리의 무위적 성격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동
시에 유위성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또 도덕적 원리에 대한 무한
한 외경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면서 敬의 태도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
러나 퇴계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리의 유위성의 의
미가 바로 종교적 경건성과 직접 연결된다고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못
하였다. 다시 말하면 퇴계는 도덕원리에 대해 종교적 형태의 敬을 유
40) 주문은 일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해
석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지극한 기이시여! 지금 여기에 크
게 강림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한울님을 모시면서 그 분의 조화를 영원토록
잊지 않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39
지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이 둘을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연결시키는 못
하였던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성리학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려
고 한 것과 관련될 것이다. 특히 퇴계의 후학들은 리가 인격적 상제
개념으로 나아갈 것을 우려해 리의 유위성을 더욱 제한하려고 하였
다. 이 점은 결국 퇴계 사상을 성리학적 체계 내에서 이해하려고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제우는 그러한 굴레를 벗어던
지고 과감하게 인격적 상제를 분명히 제시하면서 그것을 종교적 외경
심을 담보하는 敬과 연결시켰다고 볼 수 있다.
6. 결 론
지금까지 논자는 힘을 가진 절대자와 필연적인 원리로서의 절대자를
대비시키면서 동학의 상제관을 나름으로 규명해 보았다. 그런데 절대
자가 어느 정도의 필연성과 어느 정도의 인격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
는 서로 상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에 전파된 천주교 논리의 근간이 되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는 그 이전에 종교적 믿음을 강조하던 체계에서 철학적 이성를
결부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종교적 믿음에 필연적 법칙성을 포용하려
고 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들어온 천주교는 주자학이 원시유교의
상제관을 완전히 결별했다고 비판하였지만, 주자학이 원시유교의 상
제관을 완전히 탈각했다고 보기 어려운 요소들도 있다. 그리고 조선
성리학 내에서 본다면 리의 무위성을 주장한 율곡학파도 리의 주재를
여전히 인정하기 때문에 퇴계학파의 비판처럼 리가 완전히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
에는 강조하는 측면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측면이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40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있다.
따라서 무위성과 유위성의 상대적 비교 우위를 이 글의 내에서 이
해 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도표를 그려 볼 수 있다.
무위성
유위성
천주교 정약용 동학 남용만 퇴계 대산학파 주자 율곡학파
천도의 무위성을 강조하여 리의 무위성을 강조한 율곡학파는 무위
성를 담보하는 것은 많지만 유위성은 적다는 의미에서 왼쪽, 절대자
의 무위성을 배격하려고 하면서 힘을 강조하려고 했던 천주교는 유위
성을 담보하는 논리는 많지만 무위성이 적다는 의미에서 오른 쪽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 글 내에서만 본다면 대산학파는 무위와 유위의
반반 정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가운데를 위치시켰다.
퇴계는 대산학파보다 더 유위성을 강조하였고, 동학은 퇴계보다도 더
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에 근거한
정약용 사상은 동학보다 더 유위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도표의 내용은 절대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 글에서 거론한 학
자들을 비교 상대해 보았을 때 가지는 의미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논리로 본다면 한 인간의 생활에서 철학적 사변성
과 종교적 경건성이 어느 정도의 비율로 유지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
제와 연관된다. 아무리 철학적 사변성이 정밀하게 발전한다 하더라도
어떤 집단이 갖는 신념 체계는 사변적 논리로만 환원해 설명할 수 없
다. 그리고 그 신념 체계에 대한 믿음의 강도에 의하여, 실천도 그
만큼의 과단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념 체계에 대한
믿음으로 보는 종교성은 쉽게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정 시대에 특정한 신념 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41
과정을 단순히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한정시켜 설명하기 어렵다. 다
시 말하면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시간적으로 발전해 온 내면적인
정신도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시대가 어렵고 혼란스러울수록
자신들의 신념 체계에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고, 그로 인하여 혼란스
러운 현실을 이겨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퇴계
에서 수운으로 이어지는 내면 정신사에는 경북이라는 지역성을 매개
로 시간적으로 발전해 온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성의 제
고에 의해 신념 체계를 강화시키면서 그것에 의해 강력한 실천력을
이끌어 내려고 했던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논자의 결론이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42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참고문헌>
南景羲, ?癡庵先生文集?, 경인문화사, 1999.
南龍萬, ?活山先生文集?, 경인문화사. 1999.
南漢朝, ?損齋先生文集?, 경인문화사, 1987.
柳健休, ?異學集辨?, 한국국학진흥원, 2004.
安鼎福, ?順庵全集?, 여강출판사, 1984.
李 滉, ?退溪集?, 민족문화추진회(문집총간), 1991.
李 瀷, ?星湖全書?, 여강출판사, 1987.
李象靖, ?大山集?, 민족문화추진회(문집총간), 2000.
鄭宗魯, ?立齋集?, 민족문화추진회(문집총간), 2000.
趙術道, ?晩谷集?,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퇴계학자료총서 73), 2004.
朱 熹, ?朱熹集?, 四川敎育出版社, 中國成都, 1996.
黎靖德 編, ?朱子語類?, 中華書局, 1981(주자어류 컴퓨터 파일도 참고
하였음).
崔濟愚, ?東經大全?, 아세아문화사(동학사상자료집), 1979.
崔濟愚, ?용담유사?, 아세아문화사(동학사상자료집), 1979.
利瑪竇, ?天主實義?, 利氏學社, 臺北, 1985.
송영배 등 옮김, 마테오리치 저 ?천주실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소화 8년.
최동희 번역, 최옥 저, ?근암집?,, 창컴뮤니케이션, 2004.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43
<국문초록>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
상
- 퇴계에서 수운까지 사상적 변천을 중심으로 -
안영상
이 글은 경북(영남)지역의 사상적 흐름을 매개로 하여, 퇴계의 성
리학과 수운의 동학사상에 관철되어 있는 철학적 논리의 내적 연관
관계를 규명해 보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주자는 이 세계의 궁극적 절대자인 太極
(理)이 도덕적 원리이기 때문에 無爲하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퇴
계는 리에는 무위한 측면도 있지만 어떤 형이상학적 힘을 갖는 有爲
한 측면도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을 이끌어 냈다. 그
의 후학들은 이러한 퇴계의 리의 성격을 無爲와 有爲가 종합된 ‘無
爲而爲’라고 하였다. 반면에 최제우의 사상은 핵심은 절대자로 대표
되는 한울님은 인격적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 측면
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리적인 무위한 측면과 힘을 가지는
유위한 측면을 포괄하는 ‘無爲而化’로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無爲
而爲’와 ‘無爲而化’는 어떤 내적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 논자는 절대자의 유위한 측면을 강조하는
천주교의 논리와 그것을 비판하는 영남 퇴계학파의 천주교 비판 논
리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연관관계 속에서 이 동학의 논리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44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주제어: 퇴계학, 동학, 천주교, 무위이위(無爲而爲), 무위이화(無爲而化)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경북지역의 사상적 풍토에서 본 東學의 위상 245
<Abstract>
Donghak Viewed from the Intellectual
History of Gyeongsangbuk do
Ahn, Young-Sang
The present study purposed to explain the internal connection
between Toigye’s Neo-Confucianism(性理學) and the philosophical
logic underlying Suwoon’s Donghak(東學) philosophy through the
medium of the Intellectual history of Gyeongsangbuk‐do.
As known well, Zhuxi maintained that the Great Absolute (太極;
li, 理) is inactive because it is just a constant principle of Nature
including morality but Toigye led his unique doctrine, insisting
that li has the aspect of inactivity as body(體) but it has also an
aspect of activity as function(用). His followers defined the nature
of Toigye’s li as Muwi-yiㅡWi (無爲而爲; inactive activity) integrating
inactivity and activity. on the contrary, the core of Choi Je woo’s
philosophy is that Hanulnim(the Heaven) has not only personality
but also constant principle. In other words, his philosophy can be
explained as an Muwi-yi Wha (無爲而化: inactive change)
comprehending the inactive aspect of principle and the active
aspect of power. In this sense, Muwi-yiㅡWi has an internal
connection with Muwi-yi Wha.
To clarify this, I examined theory of Catholicism emphasizing
the active aspect of the Absolute God and the logic that Yeongnam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Tuesday, April 9, 2019 9:08 AM
www.earticle.net
246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Toigye’s school used to criticize Catholicism. Through such a
investigation, I attempted to explain the Donghak logic of
Muwi-yi Wha.
Key Words: Toigye(退溪), Donghak(東學), Catholicism, Muwi-yiㅡWi
(無爲而爲; inactive activity), Muwi-yi Wha (無爲而化:
inactive change)
'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해월 최시형 사상에 나타난 정치사회적실천론의 인식론적토대와의의/김정호.인하대 (0) | 2019.04.09 |
|---|---|
| 동학과 주자학 - 주자학의 이(理)와 동학의 천(天) 개념 분석을 중심으로 -/이호영.서강대 (0) | 2019.04.09 |
| 東學의 修養觀/이정희.KISTI (0) | 2019.04.09 |
| 東學 相均論과 均衡理論/이찬구.수운교 (0) | 2019.04.09 |
| 손병희의 ‘무체법경’과 조지 허버트 미드의‘정신, 자아 그리고 사회’*/김용해.서강대 (0) | 2019.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