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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和盧侍御通塘曲

통당곡 -노시어에게 화답한 통당곡()

목차

그대, 통당()이 좋다고 으스대기를
1) 통당이 약야()보다 낫다고 하였지.
통당은 어디에 있는가
西2) 저 멀리 심양() 서쪽에 있지.
푸른 덩굴 한들한들, 안개 낀 나무에 걸려있고
3) 백한()은 여기저기 모래 언덕에 모여 있네.
석문산() 뚫린 데로 평호()가 보이는데
백 길 금빛 소에 구름과 해 비치네.
창랑()의 고기 낚는 어부는 어디에 있나.
뱃전 두드리는 어부가()는 흥취도 가지가지.
서로 만나 알지는 못해도
들며나며 통당을 돌고 또 도네.
나루터 곁 맑은 물에 흰 발 환히 빛나는
또 다른 완사()의 오() 처자 있다네.
발길이 푸른 소에 멈추니, 소 더욱 고요한데
4) 그 옛날 무릉() 봄날 푸르던 그 물 아니던가.
진()나라 사람, 닭과 개가 살던 도화원도
통당 도랑에 비한다면 부끄러우리.
통당은 차마 떠나기 어려워
열에 아홉은 머뭇대며 망설이네.
어쩌다 고운 풍경 만나 마음 벌써 취했는데
홀연 새 한 마리 하늘에서 내려오네.
청산에서 달이 나와 나그네를 전송하고
사방의 고죽()에선 가을 소리 이는데
5) 길게 〈백설가()〉 읊조리며 은하수를 바라보니
달 속 신선은 발을 드리우고 흰 물결 일으키네.
耀6) 양홍()과 덕요(耀)가 회계()에서 살려던 때
통당에 좋은 일 많을 줄 어이 알았으리.

해제

노시어()는 노허주()를 가리킨다. 는 유진()이고, 지덕(; 756~758) 이후에 전중시어사(殿)를 지냈다고 한다. 이 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그의 〈통당곡()〉에 화답하여 지은 것이다. 〈〉도 그에게 부친 시이다.

통당()은 작품 중에 심양() 서쪽에 있는 호수라 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해설

명대() 주간(; 1455~1541)은 《이시변의()》에서 이 작품에 대하여, "지나치게 경쾌하다 못해 천속()하다. 이백이 이런 작품을 쓸 리 만무하다"라면서 위작()으로 보았고, 방홍정(; 1516~1611)도 "반복되는 ''은 상투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그의 좋지 않은 버릇의 연장"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비난들은 민가()의 특성이나 가치에 대한 낮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작품의 저본()인 〈노시어의 통당곡()〉은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제목 세 글자 '통당곡()'에 담긴 -ng와 입성() 운소()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고, 초성()이 같은 쌍성(; ), 종성()이 같은 첩운(; , ), 같은 글자를 반복하는 첩자(; , ),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첩어(; ), 글자의 뒤를 바로 잇는 선련구법(; , )등의 기교나, 유사음운(; , , , , , , ), 빈번하게 바뀌는 각운()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작품은 소리들로 짜서 엮은 '말재간(pun) 노래'이며, 이는 《시경》에서부터 남조()의 오성()·서곡(西)까지 이어져 온 발랄하고 경쾌한 민가()의 여향()이라고 생각된다.

각주

  • 1)

    절강성 소흥(紹興) 남쪽에 있는 약야계(若耶溪)를 말한다. 악부 〈채련곡〉 참조.

  • 2)

    강서성 구강현(九江縣). 가음 〈횡강사 2〉 참조.

  • 3)

    강남에서 기르는 꿩 종류의 흰 새. 가음 〈추포가 16〉 참조.

  • 4)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중에 진대(秦代)에 피난 온 사람들과 닭과 개 등이 등장한다.

  • 5)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고상한 노래인 〈양춘백설(陽春白雪)〉. 여기서는 노시어의 〈통당곡〉을 높여서 부른 것이다.

  • 6)

    《후한서》에, "······그리하여 양홍이 동쪽으로 관문을 나서 낙양(洛陽)으로 가며 〈오희지가(五噫之歌)〉를 지었다. 숙종(肅宗)이 듣고서 반성하고, 양홍을 부르려 하였으나 그러지를 못하였다. 양홍은 성(姓)을 운기(運期)로, 이름을 요(燿)로, 자를 후광(侯光)으로 바꾸고 처자와 함께 제(齊)와 노(魯) 땅 사이에서 살았다. 얼마 후 오(吳)로 가서 대가(大家) 고백통(皐伯通)에게 의지하여 처마 밑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절구를 찧어 그 품값으로 생계를 꾸렸다. 늘 그가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음식을 대접하는데, 남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밥상을 눈썹에까지 들었다. 백통이 이를 보고, '평범한 사람이 그 처로 하여금 이처럼 존경하게 만들다니, 예사 사람이 아니로구나.'하며 자기 집에서 살게 하였다. 양홍은 숨어서 책을 십여 편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양홍이 간 곳은 소주(蘇州) 지방에 있는데, 회계(會稽)라 한 것은 예전에 오(吳)에 속했지만, 진(秦)나라 때는 회계군(會稽郡)에 속했고, 한(漢)나라 때 답습하여 고치지 않다가, 후한(後漢) 순제(順帝) 영건(永建) 4년에 오군(吳郡)에 나누어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 德燿(덕요) : 양홍의 처 맹광(孟光)의 자(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