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당곡 -노시어에게 화답한 통당곡(和盧侍御通塘曲)
목차
君誇通塘好 그대, 통당(通塘)이 좋다고 으스대기를
通塘勝耶溪1) 통당이 약야(若耶)보다 낫다고 하였지.
通塘在何處 통당은 어디에 있는가
遠在尋陽西2) 저 멀리 심양(尋陽) 서쪽에 있지.
靑蘿裊裊掛烟樹 푸른 덩굴 한들한들, 안개 낀 나무에 걸려있고
白鷴處處聚沙堤3) 백한(白鷴)은 여기저기 모래 언덕에 모여 있네.
石門中斷平湖出 석문산(石門山) 뚫린 데로 평호(平湖)가 보이는데
百丈金潭照雲日 백 길 금빛 소에 구름과 해 비치네.
何處滄浪垂釣翁 창랑(滄浪)의 고기 낚는 어부는 어디에 있나.
鼓棹漁歌趣非一 뱃전 두드리는 어부가(漁父歌)는 흥취도 가지가지.
相逢不相識 서로 만나 알지는 못해도
出沒繞通塘 들며나며 통당을 돌고 또 도네.
浦邊淸水明素足 나루터 곁 맑은 물에 흰 발 환히 빛나는
別有浣紗吳女郎 또 다른 완사(浣紗)의 오(吳) 처자 있다네.
行盡綠潭潭轉幽 발길이 푸른 소에 멈추니, 소 더욱 고요한데
疑是武陵春碧流4) 그 옛날 무릉(武陵) 봄날 푸르던 그 물 아니던가.
秦人雞犬桃花裏 진(秦)나라 사람, 닭과 개가 살던 도화원도
將比通塘渠見羞 통당 도랑에 비한다면 부끄러우리.
通塘不忍別 통당은 차마 떠나기 어려워
十去九遲迴 열에 아홉은 머뭇대며 망설이네.
偶逢佳境心已醉 어쩌다 고운 풍경 만나 마음 벌써 취했는데
忽有一鳥從天來 홀연 새 한 마리 하늘에서 내려오네.
月出靑山送行子 청산에서 달이 나와 나그네를 전송하고
四邊苦竹秋聲起 사방의 고죽(苦竹)에선 가을 소리 이는데
長吟白雪望星河5) 길게 〈백설가(白雪歌)〉 읊조리며 은하수를 바라보니
雙垂兩足揚素波 달 속 신선은 발을 드리우고 흰 물결 일으키네.
梁鴻德耀會稽日6) 양홍(梁鴻)과 덕요(德耀)가 회계(會稽)에서 살려던 때
寧知此中樂事多 통당에 좋은 일 많을 줄 어이 알았으리.
해제
노시어(盧侍御)는 노허주(盧虛舟)를 가리킨다. 字는 유진(幼眞)이고, 지덕(至德; 756~758) 이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냈다고 한다. 이 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그의 〈통당곡(通塘曲)〉에 화답하여 지은 것이다. 〈廬山謠寄盧侍御虛舟〉도 그에게 부친 시이다.
통당(通塘)은 작품 중에 심양(尋陽) 서쪽에 있는 호수라 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해설
명대(明代) 주간(朱諫; 1455~1541)은 《이시변의(李詩辨疑)》에서 이 작품에 대하여, "지나치게 경쾌하다 못해 천속(賤俗)하다. 이백이 이런 작품을 쓸 리 만무하다"라면서 위작(僞作)으로 보았고, 방홍정(方弘靜; 1516~1611)도 "반복되는 '素足'은 상투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그의 좋지 않은 버릇의 연장"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비난들은 민가(民歌)의 특성이나 가치에 대한 낮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작품의 저본(底本)인 〈노시어의 통당곡(盧侍御通塘曲)〉은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제목 세 글자 '통당곡(通塘曲)'에 담긴 -ng와 입성(入聲) 운소(韻素)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고, 초성(初聲)이 같은 쌍성(雙聲; 通塘), 종성(終聲)이 같은 첩운(疊韻; 滄浪, 秦人), 같은 글자를 반복하는 첩자(疊字; 裊裊, 處處),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첩어(疊語; 素足), 글자의 뒤를 바로 잇는 선련구법(蟬聯句法; 相, 潭)등의 기교나, 유사음운(類似音韻; 渠見, 通塘, 金潭, 月出, 出沒, 白雪, 梁鴻), 빈번하게 바뀌는 각운(脚韻)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작품은 소리들로 짜서 엮은 '말재간(pun) 노래'이며, 이는 《시경》에서부터 남조(南朝)의 오성(吳聲)·서곡(西曲)까지 이어져 온 발랄하고 경쾌한 민가(民歌)의 여향(餘響)이라고 생각된다.
각주
- 1)
절강성 소흥(紹興) 남쪽에 있는 약야계(若耶溪)를 말한다. 악부 〈채련곡〉 참조.
- 2)
강서성 구강현(九江縣). 가음 〈횡강사 2〉 참조.
- 3)
강남에서 기르는 꿩 종류의 흰 새. 가음 〈추포가 16〉 참조.
- 4)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중에 진대(秦代)에 피난 온 사람들과 닭과 개 등이 등장한다.
- 5)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고상한 노래인 〈양춘백설(陽春白雪)〉. 여기서는 노시어의 〈통당곡〉을 높여서 부른 것이다.
- 6)
《후한서》에, "······그리하여 양홍이 동쪽으로 관문을 나서 낙양(洛陽)으로 가며 〈오희지가(五噫之歌)〉를 지었다. 숙종(肅宗)이 듣고서 반성하고, 양홍을 부르려 하였으나 그러지를 못하였다. 양홍은 성(姓)을 운기(運期)로, 이름을 요(燿)로, 자를 후광(侯光)으로 바꾸고 처자와 함께 제(齊)와 노(魯) 땅 사이에서 살았다. 얼마 후 오(吳)로 가서 대가(大家) 고백통(皐伯通)에게 의지하여 처마 밑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절구를 찧어 그 품값으로 생계를 꾸렸다. 늘 그가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음식을 대접하는데, 남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밥상을 눈썹에까지 들었다. 백통이 이를 보고, '평범한 사람이 그 처로 하여금 이처럼 존경하게 만들다니, 예사 사람이 아니로구나.'하며 자기 집에서 살게 하였다. 양홍은 숨어서 책을 십여 편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양홍이 간 곳은 소주(蘇州) 지방에 있는데, 회계(會稽)라 한 것은 예전에 오(吳)에 속했지만, 진(秦)나라 때는 회계군(會稽郡)에 속했고, 한(漢)나라 때 답습하여 고치지 않다가, 후한(後漢) 순제(順帝) 영건(永建) 4년에 오군(吳郡)에 나누어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 德燿(덕요) : 양홍의 처 맹광(孟光)의 자(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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