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척진장(洗滌塵腸)
내가 다산초당의 달밤을 오래 마음에 품게 된 것은 다산이 친필로 남긴 다음 글을 읽고 나서부터다.
"九月十二之夜(구월십이지야) 9월 12일 밤,
余在茶山東菴(여재다산동암) 나는 다산의 동암(東菴)에 있었다.
仰見玉宇寥廓(앙견옥우요확) 우러러 하늘을 보니 아득히 툭 트였고,
月片孤淸(월편고청) 조각달만 외로이 맑았다.
天星存者(천성존자) 남은 별은
不逾八九(불유팔구) 엳아홉을 넘지 않고,
中庭藻荇漪舞(중정조행의무) 뜨락은 물속에서 물풀이 춤추는 듯하였다.
振衣起行(진의기행) 옷을 입고 일어나
令童子吹簫(령동자취소) 나가 동자에게 퉁소를 불게 하자
響徹雲際(향철운제) 그 소리가 구름 끝까지 울려 퍼졌다.
當此之時(당차지시) 이때에는
塵土腸胃(진토장위) 티끌세상의 찌든 내장이
洗滌得盡(세척득진) 말끔하게 씻겨 나가
非復人世之光景也(비복인세지광경야) 인간 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눈썹달이 떠오른 초당의 어느 날 밤 풍경이다.
맑은 하늘에 조각달만 걸렸다.
별도 몇 뜨지 않은 밤,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가지 사이를 달빛이 통과하면서 만드는 그림자가 마치 물속에서 물풀이 흔들리는 정취를 자아낸다.
다산은 공부하다가 찬 공기를 쐬려고 문을 벌컥 열었던 모양이다.
이때 문득 맞닥뜨린 광경에 저도 몰래 마당에 내려서니,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느낌이다.
동자의 퉁소 소리는 하늘 끝에 사무친다.
세상의 이런저런 근심마저 흔적 없이 사라져 티끌에 찌든 내장을 헹궈낸 듯 깨끗하다.
해남의 천경문(千敬文)에게 준 편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池閣夜深(지각야심) 지각(池閣)에 밤이 깊었는데
山月漸高(산월점고) 산에 달이 점차 오르더니,
空階藻荇翻舞(공계조행번무) 빈 섬돌에 물풀이 흔들리며 춤을 춥니다.
攬衣獨往(람의독왕) 옷을 걸쳐 입고 홀로 서자
馳神犧農之世(치신희농지세) 정신이 복희(伏犧)와 신농(神農)의 세상으로 내 닫는군요.
但恨傍無韻人(단한방무운인) 다만 운치 있는 사람과 함께
與之談論也(여지담론야) 곁에서 담론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다산이 적막한 귀양지의 삶을 형형한 정신으로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이따금 우연히 맞닥뜨린 이런 순간이 준 위로 덕분이었을 게다.
누구에게든 마음속의 다산초당은 있다.
먹고사느라 바빠, 등 떠밀려 허겁지겁 살아온 세월 속에서,
생각만으로도 마음에 위로가 되고 떠올리면 기쁨이 되는 풍경들이 있다.
티끌세상의 욕심에 찌든 내장을 깨끗이 세척해줄 나의 다산초당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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