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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대륙합리론/blog.naver.com/czech_love

<합리론 Rationalism>

합리론은 철학의 시작점을 주관으로 보고 오로지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만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근대 유럽의 철학적 흐름이다.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모든 지식에 대해 의심해보면 결국 의심하는 존재인 나 자신의 확실성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확실성을 보증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나 자신이 진리로 향하는 참된 인식의 출발점인 것이다. 또다른 특징은 과학적 방법론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논리학·수학 등의 지식은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식이며,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확실한 지식은 인간 외부에 있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생득적인 본유관념이다. 이러한 합리론적 입장의 기원은 플라톤의 이성주의적 철학에 있다. 그에 따르면 이데아는 선험적이며 본유적이다. 본유적인 이데아는 정신적 활동, 즉 사유에 의해서만 의식할 수 있다. 즉 논리적, 수학적인 사유를 통해서만 이데아가 도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사유를 통해 진리를 파악하려고 하며 이를 위해 수학적인 방법을 도입한 플라톤의 이성주의적 철학은 17세기 합리론자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방법론에 있어서 합리론자들은 모든 존재나 현상은 기본 원리가 전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1원리를 정립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지적 체계를 쌓아가는 연역법을 전개한다.

 

근대 이성주의자들이 '합리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경험이 아닌 이성에 근거하여 인식론이든 윤리학이든 형이상학이든 자신 철학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주의자들이 경험주의자들 보다 '합리적'이라서 합리론자라고 불린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경험론자가 더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합리론자는 '이성'의 지위가 경험론자에 비해 높았기에 이성주의 합리론이라 불리는것뿐이다. 하지만 이들 이성주의자들이 경험론자들보다 합리적인 가치를 추구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당대 시대적 상황과 연관이 되어 있다. 이전의 중세철학은 철저히 신학적 입장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철학적 탐구대상의 확실성은 모두 신이 보증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철학의 경우 신과 결별하고 확실한 진리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을 신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나'라는 '주체'로 잡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인식되는 탐구의 대상이 확실한 것인지, 그것이 인식하는 주체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이 된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과를 인식한다고 한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시 사과가 아니라 오렌지는 아닌지 이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어 진리에 이를 수 없다면 데카르트를 필두로한 이성주의적 근대철학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따라서 단순히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주의자들은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제1원리를 사유를 통해 규정하고, 그 제1원리를 시작으로 지적체계를 쌓아가 주체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상의 이론을 제시한다. 즉 이성주의자들에 따르면 참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검증할 수 없지만, 이론상으로는 사유를 통해 참된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이 이론을 지지하며 진리에 대해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러지 않는것보다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주의자들은 그 특성상 합리론을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tes>

흔히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실제로도 그런 명예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서양철학에서 완전히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세우고자 한 인물은 그가 최초였기 때문이다. 이 혁신적인 새로운 철학체계를 건설한 덕분에 데카르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양분되는 서양근대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 인식론

1.1 방법론

데카르트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 즉 '이성'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수학적 형태를 띠어야만 학문의 지식체계가 수립될 수 있으며, 나아가 수학적 지식만큼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데카르트는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다는 독단적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데카르트는 인간이 계시를 통해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인정했으나, 그러한 류의 진리 인식은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므로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배제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회의론이 무의미한 염세주의로 전락하지 않고 방법적 회의라는 방법을 취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보편적인 인식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사상체계의 토대가 되는 방법론을 매우 중시하였다.

 

1.1.1 방법적 회의

사상체계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론적 규칙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 명증하게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말것, 즉 속견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판명한 대상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지 말 것.

둘째 : 대상에 대한 검토를 더 면밀히 하기 위해 각각의 대상들을 가능한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 자신의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처럼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넷째 :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정도로 완벽하게 열거하고 전반적으로 검토할 것.

 

이 규칙들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실질적 탐구활동이다. 즉 이 규칙들은 어떤 탐구활동에서든 지켜야 할 가장 일반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다. 또한 선술했다시피 데카르트는 수학적 지식을 매우 중요시 했는데, 이 방법적 회의또한 기본적으로는 수학적 방법을 토대로 하였다. 즉 4가지의 방법론적 규칙을 통해 다른 명제로부터 증명되지 않고 스스로 명백한 제1 원리를 찾은 후 이 원리로부터 모든 지식을 연역해나가는 방법인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수학은 순수지성, 즉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는 완전히 관념적인 지식이다. 그러한 반면 감각지식이나 상상, 기억상기따위는 이성의 보조수단인 감관기관에 의해 자신의 마음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심상'이므로 객관성을 증명할 수 없다. 예컨대 1+1이 2라는 사실은 완전히 관념적이고 순수한 이성에 의한 지식이므로 확실하다. 반면에 시각정보나 청각정보와 같은 것은 그것이 진짜 확실한지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데카르트에 따르면 순수지성의 지식인 수학외의 다른 영역에서도 수학만큼 확실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즉 감각적인 방법으로 인식하는 자연과학또한 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방법적 회의를 통해 제기한 인식론적 문제, 즉 외부사물의 확실성 여부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흔히 '확실성으로의 단계'라고 불리는 세 단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는 이 해결책을 잘 따르기만 해도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1.2 확실성으로의 단계

1.2.1 제1원리(자아/코기토의 존재)의 발견

그 첫째 단계는 제1원리, 즉 확실성을 위한 근본 원리를 찾는 단계로, 연역법적 방법론을 구사하는 데카르트 철학의 특성상 다른 모든 논리가 기반하는 사상의 기본 구조에 해당한다. 어쨌든 제1원리를 찾기 위해 데카르트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로 결정한다. 이런 데카르트의 회의는 다소 과장성을 보인다. 그 이유는 최소한의 근거로 최대범위의 부정으로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과장성은 그가 제시한 '꿈의 가설', '악마의 가설'을 통해 잘 제시된다.

 

데카르트는 먼저 감각으로부터 또는 감각을 통하여 오는 감각적 지식들을 모조리 의심한다. 감각적 지식이 꽤나 많이 오류판단을 가져오며,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이 확실한지 증명할 수 없다. 예컨대 사과를 인식했다고 한들 그것이 진짜 사과인지 아니면 다른 사물일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이 실내복을 입은 채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라고 한들 그것이 진실된 상황인지 환각상태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감각적 경험이 알려주는 것만을 근거로 삼는 한, 객관적인 진리는 커녕 물질세계의 존재를 근거할 방도도 없다. 이렇듯 데카르트는 신체의 감각적 지각능력 전체를 부정한다. 감각지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일종의 꿈과 같은 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꿈과 같은 가상세계 속에서라도, 인간의 감각이 기만되기 위해서는 어떤 보편적 속성을 전제할 수 밖에 없다. 가령 사물의 일반적 속성인 연장(물질)성, 그 연장성을 통해 표현되는 형태와 크기, 부피, 반감기 등은 꿈과 같은 가상세계에서라도 전제되어야 하는 보편적 개념들이며, 마찬가지로 수학적 진리또한 아무리 꿈속에서라도 여전히 참이다. 이것들은 순수지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데카르트는 악마의 가설을 제시한다. 즉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가 선하지 못하거나, 인간을 어떤 악마가 조종하고 있어서 항상 인간을 기만과 착각 속에 살도록 만들고 있기에, 보편적 성질을 표상하는 인간의 이론적 추론능력인 이성또한 내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결함이 있어 확실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참된 진리의 체계에 이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인간이 언제나 잘못 판단하고 오류를 범하면서도 항상 올바르게 판단하고 참된 것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본성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이성'이 있다는 자신의 전제가 주관적인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방법적 회의는 데카르트 형이상학을 대표할 정도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이유는 이 형이상학적 회의를 통해 중세적 세계관이 치명적으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회의를 모든 형이상학적 탐구의 시작이자 형이상학적 체계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상식과 이론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에 새로운 과학적 진리가 탐구되기 위해서는 감각적 지각에 기초한 기존의 중세적 상식이 반드시 교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회의의 과정이 자세하고 엄밀할수록 형이상학적 증명도 상세하고 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꿈의 가설과 악마의 가설을 전제함으로써 형식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회의를 제기한 데카르트는 가상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비관적인 전제에서 마저도 결코 회의할수 없는 진리, 즉 제1원리에 도달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것은 '자아의 존재'이다.

 

"악마가 온 힘을 다해 나를 기만한다고 하자.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은 세심하게 고찰해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신이 보고 있는 사물이 거짓이며, 자신이 보고 있다고 믿는 것 또한 거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런 착각을 하기 위해서라도 사고하는 나 자체는 명증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데카르트식으로 요약한 것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라는 명제이다. 이 생각하는 존재는 물리세계로부터 독립한 존재이며, 부정불가능한 확고한 실체이며, 본질은 사유를 하는 것 그 자체이다. 자아는 확실히 알 수있는 최초의 존재라는 점에서 이런 통찰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몇번이나 언급했듯이 데카르트 철학은 연역법 체계로서 불가결의 기반인 제1원리를 기반으로 모든 지식 체계를 쌓아 가는데, 자아는 제1원리이다.

 

1.2.2 신의 발견

자아 존재의 확실성을 발견한 데카르트는 이어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일치하는지의 문제로 넘어간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외부물체에 대한 지각은 정신의 활동이기 때문에, 지각활동에 따른 나의 존재는 확실하게 도출될지언정 외부물체의 존재는 여전히 확실성이 미비하며, 자신의 자아가 심술궂은 악마에 의해 희롱을 당하고 있어 틀린 지식을 신봉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외부물체에 대한 지각이 정신의 활동이기에, 외부물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각이 아니라 정신을 분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자아 내부의 관념들의 종류를 고찰함으로써 외부세계의 실존을 증명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관념은 세 가지가 있다. 어떤 관념들은 내 마음의 바깥에 있는 존재로 부터 기인한 외래 관념이다. 어떤 관념들은 내 마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생겨난 인위 관념인데, 이에 해당하는 예시로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관념으로는 존재하는 도깨비나 인어, 혹은 어렸을 적에 상상한 가상의 나, 가상의 친구등이 있다. 마지막은 태어나면서 부터 선험적으로 주어진 본유관념이다. 예컨대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개이다.', '정육면체의 면은 여섯개 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은 것은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것으로 판단되므로 인위적이지도 않고 경험적이지도 않으므로 선험적인 본유관념이다.

 

데카르트는 이 관념들이 그 내용적 측면에서 서로 다른 '표상적 실재성'을 가지므로, 관념들이 이 실재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위계질서는 '원인에는 적어도 그 결과에 있는 것 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오랜 공리에 따라 성립된다. 이 위계질서의 정점에서 데카르트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전지전능한 창조자로서의 신의 관념을 발견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이성에게서는 완전한 관념, 즉 본유관념의 산출이 불가능하다. 그에 따르면 이런 초인간적인 관념은 무한실체이자 절대자인 신에게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데카르트는 자아 안에 있는 신의 관념을 장인이 자신의 작품에 남기는 서명에 비교한다. 신의 관념은 창조자 신이 자아를 창조할 때 그 안에 표식으로 남긴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1.2.3 신 존재의 필연성과 인간이성의 능력보증, 자연적 사물의 존재 발견

이미 제1원리와 신의 존재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세번째 단계는 매우 쉽게 진행된다. 신에 대한 관념이 지고하고 완전한 존재자를 표상하므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한 관념을 산출해낼 수 없는데, 특히나며도 신에 대한 관념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관념이므로 이러한 절대적으로 완전한 관념을 산출해낼 절대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신 존재증명은 이미 중새에 안셀무스에 의해 제시된 개념분석적 선험적 추론이다.

 

데카르트에 의해 증명된 신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나, 그중에 제일 주목할만한 역할은 신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성의 명석·판명한 지각이 참된 인식임을 보증하는 궁극적 근거라는 것이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므로 선한 본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은 인간을 기만하는 악령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의 가설이 해결됨으로써 인간 이성에 결함이 없으며 정신의 오류판단은 내적 결함이 아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물론 여전히 악마는 개인들을 통제할 수는 있겠다만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극히 특수한 사례이다.) 또한 신은 우리에게 잘못된 관념에 대한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이성주의자인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명석 판명한 지식은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알아낸 지식이다. 따라서 만약에 어떠한 지식을 포착하는데 이성뿐 아니라 감각적인 협력을 구했다면 충분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고 있지 않는 것이므로 판단을 보류해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습득한 관념이 명석하고 과학적이며 순수하게 지력을 통해 얻어낸 것이라면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점에서 신은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근거이다.

 

1.3 비판

연역법적 방법론의 한계 때문인지, 데카르트의 인식론 이론은 처음에는 아주 혁신적이고 기존 사상체계에 대해 파괴적인 면모를 보이나, 논리를 전개함에 따라 점차 초기의 비판적 태도는 사그라든다. 특히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있어서는 '신은 인간을 기만하지 않으며 본유관념은 무한자에게서 기인한다' 라는 믿음만을 강조할 뿐 기존의 신 증명 논리와 크게 다른 면모를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설사 믿음을 논외로 하고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면 '신의 실존은 이미 나의 참된 관념의 존재로부터 증명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참된 관념은 신에게서 보장받는다. 그러나 신의 실존은 이미 나의 참된 관념의 존재로부터 증명된 것이다. 그러나 ....' 라고 무한 반복되는, 흔히 '데카르트의 순환'이라고 불리는 순환논증의 오류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해당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만다. 물론 이에 관련해서 데카르트가 추가적인 논리를 펼쳤으면 해결이 됬을 수 있으나, 단순히 현재 주어진 텍스트만 놓고보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근거는 참된 관념의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물론 데카르트가 거둔 절반의 성공은 철학사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정할 수 없는 자아를 증명하여 철학의 중심을 인간으로 세우고, 이성적 판단이 경험적인 판단보다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후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이원론

데카르트는 실체를 '다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로서 존재하는 것'라고 정의했고, 유한실체(피조물)와 무한실체(신)으로 나누었으며, 다시 유한실체를 정신적인 실체와 물질적인 실체으로 나누었다. 정신적인 실체의 본성은 사유하는 것이며 물질적인 실체의 본성은 연장된 것였다.

 

먼저 정신은 연장적인 특징,즉 삼차원적 특징이 없고 나눌수 없는 것이므로, 연장을 지니고 있는 물질과는 판명하게 구분된다. 데카르트는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 나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신을 물질과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체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좁게 보면 사유를 하는 순수한 지성을 말하며, 넓게 보면 감각 작용도 포함한다. 감각 작용은 신체에서 온 감각인 내부 감각과 외부사물로부터 비롯된 외부 감각으로 나뉜다. 내부감각은 다시 어디에서 오는지 위치를 알 수 있는 고통, 배고픔, 목마름과 같은 관념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분노, 슬픔과 같은 정념으로 나뉜다. 한편 물질은 연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하학적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무한 분할이 가능하며 수치화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유와 연장은 각각 존재하는 실체이며, 또한 실체이기에 존립하는데 서로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사유와 연장의 조화로 설명될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에 매우 힘들어지는 문제점을 낳게 된다. 이렇듯, 데카르트는 실체를 너무 쪼개어놓은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그 둘을 연결시켜 주는 송과선이 신체에 내장되어있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이는 더 큰 문제점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두 실체가 융화되어 한 곳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불성설인데다가, 또한 그 후에 의학적으로 송과선의 역할이 사유와 연장을 엮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데카르트는 이렇게 스스로 쪼개어놓은 실체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니콜라 말브량슈 Nicolas Malebranche>

말브랑슈는 라 마르슈와 소르본느 대학에서 각각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나 이때 배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1664년 사제로 임명되어 평생을 사제로 살았는데, 말브랑슈가 데카르트주의자가 된 것은 사제로 임명되던 해에 데카르트의 유작 『인간론』을 접하고 나서이다.(데카르트는 1650년에 사망했다.) 이 저작을 익을 때 말브랑슈는 크나큰 감명과 발견의 기쁨으로 심장이 너무 뛰어 숨을 고르기 위해 사이사이 읽기를 멈추어야만 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깊이 감명받은 이후 말브랑슈는 일생동안 데카르트를 철학의 대가로 여겼고, 데카르트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하지만 데카르트 못지않게 말브랑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말브랑슈가 기독교 철학자로서 기독교의 관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경험을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브랑슈를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을 시도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의 과도기적 인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은 공정한 평가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브랑슈는 독창적인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이르는 올바른 방법,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기회원인론의 적용 가능성 등 여러 분야에서 그가 전개한 철학은 그를 독창적인 철학자로서 서게끔 해준다.

 

1. 인식론

말브랑슈에 따르면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감각을 버리고 관념을 택해야 한다. 말브랑슈는 데카르트주의자이므로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이론에 근거한다. 즉 감각과 상상은 인간을 오류에 빠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진리판단의 토대로 삼을 수 없고,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애매하지 않고 완벽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명석·판명한 관념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말브랑슈의 이론에는 연장성을 띠지 않는 영혼(사유)과 연장으로 정의되는 물질을 대립시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배후에 있다. 즉 연장되어 있는 물체와 연장되지 않은 마음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결합하거나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불가결한 간격이 있다. 따라서 물체와 정신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불가능하고, 정신에게 연장된 물체를 즉각적으로 표상해주는 매개적 존재자가 필요하다. 즉 관념은 인간의 정신에 표상되어 외부 물체와 교류를 할 수 있게 매개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앎과 감각에 직접적으로 필요하다. 즉 말브랑슈는 관념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론을 받아들여 인간의 '정신'과 '관념'을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것으로 치부한다. 왜냐하면 관념의 일부가 무한하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의 정신에서는 산출될 수 없고 오직 신에게서만 기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의 앎과 지각은 외부 물체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매개를 통해 외부의 물체를 정신에 직접적으로 표상함으로써 작용한다. 또한 이 관념은 신에게서 산출된 물질세계의 본질이다. 즉 "우리는 신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가 말브랑슈의 입장이다. 이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보이는 신의 조명설과 약간 변형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및 심신철학을 체계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에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에게서 산출된 관념을 통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말브랑슈에 따르면 우선 영원한 진리를 인식한다. 하지만 '2x2=4'와 같은 명제의 진리는 신과 동일시되기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말브랑슈는 진리에 해당하는 관념을 봄으로써 신을 본다고 말한다. 즉 영원한 진리를 볼때 인간은 신을 보나, 이런 진리가 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진리의 관념이 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말브랑슈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이 본질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가 아닌 것, 즉 만약 신 안에서 만들어진 각각 대상에 대응하는 관념이 단일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연장된 사물에서 변화와 운동을 자각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말브랑슈에 따른다면 신안에는 연장의 순수한 관념이 존재하고, 그 원형적 관념에는 물질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사례화 가능한 모든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2. 인과론(기회원인론)

말브랑슈의 인식론이 인식자로서 인간이 신에게 의존하는 바를 설명하는 이론이라면, 말브랑슈의 인과론은 모든 사물이 전능한 신에게 존재론적으로 의존함을 보여준다. 말브랑슈 인과론, 즉 기회원인론의 요지는 신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일어나거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이론이 중세 이슬람이나 기독교에 기원이 있긴 하지만(Louis Forge) 말브랑슈가 최초로 기회원인론을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구상했다는 데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기회원인론은 자연적 원인과 기회적 원인 사이의 관계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인간은 경험을 통해 자연적 원인(자연적 인과관계)를 인식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기회적 원인이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진정한 원인이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정신이 필연적 연관성이 있어야 하며, 또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결의와 실제 행동 사이에는 필연적 결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말브랑슈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팔을 올리려는 결의와 팔의 움직임 사이에는 엄밀히 말하자면 필연적 결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석하에 말브랑슈는 자신의 의지와 그것의 결과 사이에서 정신이 필연적 연관성을 발견하는 매우 완벽한 존재자는 신 하나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능동인은 신이 유일하다. 따라서 신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개입을 통해 모든 사물간의 인과관계를 성립시킨다. 이렇듯 신의 결의만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신은 의지와 의지의 결과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신이 의지했는데 의지한 그것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브랑슈에게 자연적 인과관계같은 제2원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데카르트적 개념분석에서 출발하여 인과성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과정과, 전지전능한 신과 신이 창조·지탱하고 있는 세계 간의 본질적인 존재론적 관계에 대한 신학적 탐구 혹은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말브랑슈는 기회원인론을 통해 새롭게 발흥한 과학에 새로운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즉 새로운 과학의 주요한 설명요소인 운동은 데카르트가 말한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이 연장이 아니라 어떤 능동적인 힘에 인과적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체는 본질적으로 연장성만 가지기에 운동의 동인을 내포할 수 없다는 것이 말브랑슈의 고민이었다. 따라서 말브랑슈는 운동의 근거를 신의 의지에 놓고, 신이 설정한 법칙에 따라 물체가 움직인다고 보았다.

 

2.1 모순점과 그 이유

사실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은 자기모순이 있다. 분명히 그는 발견가능성을 진정한 원인의 조건으로 상정했는데, 사실 그는 진정한 원인을 인간이 관찰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예컨대 하나의 공이 다른 공과 부딪힐때, 이것은 말브랑슈에 따르면 신의 의지에서 기원한 진정한 원인에 의한 관계이다. 그러나 그 공의 몸체를 움직이게 하는 진정한 원인을 인간은 관찰할 수 없다. 단지 신의 의지로 인해 그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말브랑슈 본인이 비판한 스콜라 철학의 운동설명과 매우 유사하다. 스콜라 철학은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성질을 도입했는데, 정작 말브랑슈또한 초자연적 성질 대신 신을 도입함으로써 유사한 논리를 펼친 것이다. 이러한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말브랑슈는 신학적인 이유에서 기회원인론을 주장한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고대철학은 유한한 사물이 인과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큰 신학적 오류를 낳았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신이 아닌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행복이나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하게 되었으며, 불행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말브랑슈는 행과 불행이 유한한 사물에 달려 있지 않고 무한한 존재자인 신에게서 연유함을 보이고자 했으며, 신이 형체 없는 원인이 되어 일상적인 실재로부터 멀리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언제나 모든 자연현상의 즉각적이고도 유일한 원인이기를 바랬던 것이다.

 

3. 영향

말브랑슈는 인과의 문제에 있어서 흄에게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 모두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강조했고, 또한 이성에 의하든 경험에 의하든 인과의 필연성은 자연의 어떠한 대상간에서도 발견딜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말브랑슈가 이러한 인과의 기원을 신의 의지로 둔 반면 흄은 그러한 주장을 부정하였다.

 

버클리는 직접적으로는 말브랑슈와 자신의 이론이 상반된다고 밝혔지만, 말브랑슈의 흔적이 그의 이론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서 버클리의 관념은 말브랑슈의 관념처럼 유한한 정신의 양태가 아니라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모두 신 안에 있다. 또한 두사람 모두 자연현상의 규칙성이 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인과적 활동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다만 말브랑슈가 신 이외의 어떤 존재자에게도 인과적 능동인을 부여하지 않은 반면, 버클리는 인간의 영혼에 인과적 힘을 부여하였다.

 

라이프니츠는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에 비판적이었지만, 실체간의 상호작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일치된 의견을 보여주었다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

역사상의 수많은 철학자들 대부분이 강건하고 올곧은 삶을 살았음은 의심할 필요도 없다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건했던 삶을 살았던 인물로는 스피노자가 대표적이다. 스피노자는 청년시절 범신론적인 주장으로 기존의 유대교적 가치관을 부정했다. 유대교측에선 주장을 번복할 것을 계속해서 권유했지만, 스피노자는 끝내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결국 유대교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위해 희생을 불사하는 스피노자의 태도는 소크라테스의 그것과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70이 넘은 노인이었던 반면 당시 스피노자는 이제 갓 피어난 청춘이었기에, 그 비장함은 더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물질적인 것을 천대하고 철학을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최고의 길로 여겼으며, 유산을 물려받는 것과 교수직책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그의 삶은 강건함 그 자체인 것 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그의 사상과 연결될 때 비로소 그 강건함의 진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스피노자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사후세계가 없기에 이 생애에서 해놓은 일들은 죽은 후의 자신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적인 만족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거부했으며, 사후에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서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이룬다고 한들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는 확고한 불안감에도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탐구하는데 큰 열정을 쏟았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희대의 명저 '에티카'를 저술하고도 생전에 알리지 못했으며, 사후 오랜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철학적 업적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고독하고도 장엄한 비극을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살았으며 결국 그 결실을 맺은 스피노자는 정말 따라할 수 조차 없는 강건한 내면적 삶의 표본이라 칭할 수 있다.

 

이론적 측면에서 봤을때,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목적은 인간의 수동적 조건과 가상적 인식에서 비롯된 자유의지의 환상 및 목적론적 편견과, 이와 긴밀히 결부된 유태교-기독교의 창조론 신학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식과 존재역량의 원천이나 해방과 지복의 원천인 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1. 형이상학

스피노자 철학의 혁신적인 성격은 기본개념들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스피노자 이전까지 철학에서의 '실체'는 그 정의상 존재론적으로는 자립성을 갖추었지만, 개념적 자립성은 지니지 못해 이해되기 위해서는 어떤 술어나 속성들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었다. 즉 실체는 경험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었다. 예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는 현상계의 사물들을 이성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실체이며, 중세의 기독교 철학자들또한 현상계의 존재들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합리론의 시초로서 여겨지는 데카르트또한 방법적 회의, 즉 거짓된 지식을 소거하고 진실된 지식만을 남겨두는 방식을 자신 철학의 방법론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실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여전히 데카르트또한 실체의 존재론적 독립성은 인정한데 반해 그 실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실체 이외의 술어나 속성의 보조를 받은 것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수학적 방법론으로 실체 개념을 도출해낸다. 즉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제1원리를 정립한 후, 그 공리를 기반으로 삼아 지적체계를 쌓아감으로써 실체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다. 이렇듯 스피노자는 자신의 논증을 전개함에 었어서 곧장 바로 실체로서의 신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 존재론의 최대쟁점은 실체가 어째서 신과 동의어일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유한한 개물들이 어떻게 절대적이며 무한한 신의 일부분일 수 있으며, 왜 필연적으로 세계 그 자체가 곧 신일 수 밖에 없는지 증명해내는 데 있다. 즉 스피노자의 신은 인격적 창조주로서의 전통적 서양신 개념과는 전혀 다른, 철저하게 자연화된 신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신 존재증명은 전통적 의미의 신에 대한 존재부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1.1 실체의 개념

스피노자의 실체개념은 원론적 측면에서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며 이 정의는 스피노자와 같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자신의 정의를 실제 이론으로 체계화 시키는 데 있어서는 그 의미를 '존재하기 위해서 신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것들'으로 약화시켜 실체의 개념을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의에 충실하게 따르지 않았다.

 

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개념을 보다 엄격히 적용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나 이해되기 위해 다른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원인이 되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는 실체를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만약 실체를 인과적 독립성을 가진 것으로 정의할 경우에는, 오직 신 혹은 신적인 존재에 버금가는 자연만이 실체로서 존립할 수 있다. 그외에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존재자에게 인과적으로 얽메이기 때문이다. 즉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오직 신만이 실체이다. 그에 따른다면 신 이외의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조차 없다.

 

1.2 실체의 본질

스피노자의 실체개념은 '자족성', '무한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1.2.1 자족성

스피노자에 따르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본성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실체는 인과적으로 완전히 자족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은 실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것이 전혀 필요가 없고 실체 그 자체만 가지고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또 원인또한 그 원인이 있다. 이렇게 원인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면 그 끝에 가서 모든 것의 원인이며 그 자체는 아무런 원인도 없는 것에 도달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것의 본질 자체가 존재함인것, 즉 제1원인, 혹은 자기 원인에 도달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에 따르면 실체는 인과적으로 자족함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실체는 제1원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실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족성을 가짐'이 본질이므로 그 자체만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의 본질은 스스로 존재함과 관련이 없다. 또한 일반적인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그것의 존재의 기원에 대한 앎이 없어도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일반적인 사물나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른 존재들과 맺고 있는 관계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의자의 본질은 '앉는 도구'이다. 그런데 이 의자를 스스로 '앉는 도구'일 수 없다.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의자를 앉는 용도로 사용해야만 의자는 앉는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 이 의자를 도구로서 사용하는 존재는 인간이므로, 인간은 의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의자간의 관계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실체를 제외한 모든 존재는 스스로 이해될 수 없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자기원인은 '원인이 없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지만,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기 원인이라는 용어는 단지 원인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기 원인은 자족성의 의미를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실체가 자립성을 가짐으로써 스피노자의 철학체계에서 초월적이고 파악불가능한 실체라는 관념은 배제되고, 인간은 실체와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가능성을 획득한다.

 

1.2.2 무한성

실체를 자기 자신을 통해 이해가능한 존재로 정의하고, 따라서 실체는 다른 것(또는 다른 실체)에 의해 산출될 수 없다면 스피노자는 실체를 무한한 존재로 규정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만약 실체가 무한한 존재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물이 보다 많은 존재를 가질수록 그만큼 많은 속성이 그것에 따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10만톤급 유조선은 50톤급인 새우잡이 어선보다 더 많은 존재를 가진다. 왜냐하면 유조선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인 부품, 관념적인 메커니즘과 적용되는 물리법칙, 심지어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수 등의 '속성'이 새우잡이 어선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무한하므로 신은 무한한 속성을 소유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듯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란 영원함과 무한함을 본질로 삼으며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다. 즉 스피노자는 '무한성'을 통해 실체를 신과 동일하게 여길 수 있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3 존재증명

스피노자는 자신의 쇄신된 기본개념을 기초로하여 자신의 실체개념, 즉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유일한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렇게 자연 전체의 궁극적인 존재원인과 설명근거를 제시하는 이 논증과정은 전통적인 유태교-기독교적 창조주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인 동시에 실체다원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체의 유일성에 대한 논증의 있어서 스피노자의 기본전제는 '존재는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가질수록 자신에 속하는 더 많은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는 실재성의 증대와 속성들의 증대를 결부시킴으로서 논의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따라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즉 절대적으로 무한하며 가장 많은 존재역량을 지닌 존재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이상,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서의 실체가 가장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어서 스피노자는 실체는 그 자체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점에서 다른 존재에 의해 산출될 수 없으므로 자기원인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논증에 따를 경우 실체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유일하다.

 

1.4 신 즉 자연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연이 곧 신, 즉 실체이다. 자연은 시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계 그 자체로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독자이며 자기원인이다. 따라서 자연은 실체 즉 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선술했다시피 만약 신과 자연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며 신 이외의 다른 어떤 실체(자연)가 존재한다면 신은 결코 무한할 수 없다. 역으로 신이 무한하다면 다른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세계는 자연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므로 범신론적 혹은 무신론적이다.

 

1.4.1 실체(신)의 물질성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바라보았고, 신은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이 절대적인 것에 대하여 세계는 조건적인 존재로 불리어졌고, 또한 신은 순수형상이고 세계는 물질적이라고 여겨졌다. 즉 신은 비물질적이며 관념적인 존재인 반면에 세계가 물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은 비물질이고 세계가 물질적이라는 견해에 대해 비판하면서, 신의 개념에 사유뿐 아니라 물질성(연장)도 포함시켰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그의 선행자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신의 비물질성에 대한 비판과 신의 물질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주장의 요지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신이 비물질적이라면 어떻게 물질적인 세계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즉 그에 따른다면 신이 비물질적일 경우 물질세계의 원인으로 군림할 논리적 근거가 없다. 둘째는 "신 안에 모든 것이 있음을 긍정하면서 물질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모순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본질에는 세계의 물질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1.5 신의 속성으로서의 사유와 연장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계승하지만, 이 개념들을 유한실체로 간주하여 정신과 물질의 구별을 통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수립한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인 신의 양태로서 간주하면서 사유와 연장이 독립된 속성이되 다른 무한한 속성과 함께 실체 안에 있다는 일원론적 통일을 주장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속성이란 '그것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성이 실체에 관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즉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여 속성이 아니다. '인간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인식함으로서 실체의 본질인 존재함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속성이다. 즉 속성의 존재근거는 지성의 인식여부다.

 

이경우 실체 즉 신에게는 무한히 많은 속성이라 부를만한 구성요소가 있겠다만 그 중에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어 속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사유'(관념)와 '연장'(물질)뿐이다. 그러므로 실체는 '사유하는 것'(정신적 존재)으로서 그리고 '연장된 것'(물질적 존재)으로서 인간에게 나타난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가정하고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나는 사유와 연장만 가지고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며 그의 철학체계를 형성한다.

 

1.5.1 속성의 평행론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들은 각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동등한 방식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실체를 '표현'한다. 이때 속성들의 독립성은 속성과 속성 사이의 상호작용 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속성의 자율성은 속성들 각각이 무한하다는 것, 따라서 속성들은 실체를 구성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속하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속성들의 동등성은 특정한 속성, 예컨대 사유속성이 연장속성보다 우월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연장속성 역시 사유속성에 대해 우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다른 속성들 역시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속성들이 각기 독립성과 자율성, 동등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다양성이 성립한다. 반대로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론적 통일성이 성립한다.

 

무한한 속성들이 이처럼 각기 동등하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실체를 표현한다는 존재론적 사실로부터 평행론이 전개된다. 즉, 속성들 각자는 서로 인과관계를 맺거나 상호작용하지는 않지만 동일하게 실체를 표현한다. 즉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은 확연히 다르지만 이 둘은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고 있는 한 그 본질에서는 일치한다. 예컨대 도화지에 그려진 반지름이 5cm인 원이나, 반지름이 5cm인 원에 대해 정의하는 수학공식은 표기하는 방법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은 실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접근방법과 과정이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똑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두 측면을 이루는 정신과 신체또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즉 양자는 각기 자율적으로 인간이라는 통일체를 표현한다. 따라서 신체의 능동성과 수동성, 정신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서로 평행적으로 일치한다.

 

1.6 양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하는 실체와 다른 것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뿐이다. 이때 다른 것 안이란 실체(신)이기에, 실체를 제외한 모든 존재는 실체 안에 존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별적인 사물은 실체의 양태이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실체의 속성인 사유와 연장이 여러가지 형태로 변양된 것이다. 이렇듯 신을 제외한 모든 세계의 존재가 실체의 변형인 양태에 불과하기에, 세계의 모든 개물은 실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그 자체가 신의 일부이다. 그러나 단순히 실체의 일부분으로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선술한 바와 같이 변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즉 인간이 겪고 있는 수많은 현상은 '실체=신=자연 그 자체'라기 보단 신의 일부가 변양된 것으로서 신의 표현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또한 실체가 아니라 자연의 무수한 개물, 즉 양태중 하나로서 자연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이라는 국가 속의 '또다른' 국가가 아닌 것이다.

 

1.6.1 양태의 구분

양태는 무한양태와 유한양태로 분류된다. 무한양태는 다시 직접적 무한양태와 간접적 무한양태로 구분된다. 직접적 무한 양태는 신의 절대적 본성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양태로서 사유의 속성에 따르는 지성(절대 무한 지성)과 연장의 속성에 따르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이 있다. 간접적 무한 양태란 유한한 개물의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 우주의 외관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는 특수한 각각의 개별적인 사물들이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으로부터-신의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으로부터-직접적 무한 양태가 따라나오고, 직접적 무한 양태로부터 간접적 무한 양태가 따라나온다. 그리고 이 간접적 무한 양태로부터 유한 양태가 따라 나온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은 엄격히 실체(신)와 신적 본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양태 뿐이다.

 

1.6.2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스피노자는 실체=신=자연과 양태의 관계를 '능산적 자연'(산출하는 자연)과 '소산적 자연'(산출되는 자연)이라는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능산적 자연은 모든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의 원천으로서 항구불변한 자연법칙을 말한다. 즉 그것은 모든 사물을 생기게 하는 신을 의미한다. 소산적 자연은 이러한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현상, 즉 양태를 말한다. 예컨대 바다가 능산적 자연이라면, 파도는 소산적 자연이다. 파도가 바다에 속하는 바다의 일부분임과 동시에, 바다 전체와는 구별되는 것과 같이, 양태, 즉 소산적 자연은 명백히 신=자연, 즉 능산적 자연의 일부분이나 능산적 자연에서 산출된 것이므로 능산적 자연과 완벽히 동일하진 않으며 변양된 상태로 존재한다.

 

1.6.2.1 자연의 인과론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산출된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의한 개물의 생산, 다시 말해 능산적 자연(신)과 소산적 자연(개물)의 인과관계를 논의한다. 스피노자에 따를 경우 신은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외부에서 영향을 주는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은 자기원인의 존재라는 점에서 신의 자기 원인은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 즉 본질이자 실존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존재와 활동 일체에서 항상 신의 내재적 인과활동을 전제한다. 이러한 내재적 인과관계에 근거해 타동적 인과관계가 형성된다. 타동적 인과관계는 유한자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가르킨다. 즉 스피노자에 따르면 유한한 사물들은 다룬 유한한 사물들에 의해 실존하고 작용되도록 규정될 때에만 실존하고 작용할 수 있으며, 후자의 작용하는 사물 역시 다른 유한한 사물들에 의해 이런식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관계는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이처럼 유한한 사물들이 작용하도록 이를 내재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신의 활동이므로, 내재적 인과관계와 타동적 인과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재적 인과관계가 보다 우위에 점해있는, 존재론 비대칭성 관게에 놓여있다.

 

자연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러한 인과론은 적어도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내재적 인과론을 통해 스피노자의 철학의 반유출론적, 즉 전통적인 창조설적 세계관에 대한 반대성격이 분명해진다. 둘째, 내재적 인과관계는 중요한 윤리적 함축을 갖는다. 신이 모든 사물에 내재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을 필연의 법칙에 구속시킴으로써 이 사물들의 자유 또는 능동성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이 사물들의 능동성의 근거가 된다. 그 정의한 강제나 구속은 외재적 관게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따라서 일체의 외재성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강제하거나 제약하지 않는다. 신은 오히려 유한한 사물의 '자기' 즉 능동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유한한 사물은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하는 존재자이므로 '절대적' 자기,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존재자일 수는 없으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덕분에 원초적인 능동성을 부여받는다. 이를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윤리적·정치적 노력에 달려있다

 

1.7 결정론

신은 스스로를 근거하여 존재하며, 양태들은 신에게 존재를 근거하여 존재한다. 한마디로 하면 실체는 원인이고 양태는 결과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신은 모든 사물의 존재원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의 작용원인이다.자연에는 우연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다. 더불어 개물은 결과로서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결과로 있으면서 어떤 작용을 하면서 다른 개물에게 영향을 주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데 이또한 역시 신에 의한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흔히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의지 자체가 본질적으로 신의 속성인 사유의 변양된 모습이므로 그것을 변양되게 만든 다른 원인에 의하여 규정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원인또한 다른 원인에 의하여 규정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작용이 무한히 계속되어 종극적으로는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규정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또한 자유로운 원인이라고 일컬어질 수 없으며 일종의 필연적이고 강제된 원인이다. 렇듯 세계의 모든 존재와 작용은 신에서 연유한 것이며 신에서 연유된 만물의 질서는 서로 상하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자연의 체계를 스피노자는 '자연의 질서'라고 칭한다. 따라서 우연적인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자연의 필연성은 마치 삼각형이 그 본성에 있어서 내각의 합이 두 직각이 되는 것처럼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에 근거해서 스피노자는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다고 상정하는 목적론적 세계관과 신 자신또한 모든 것을 어떤 일정한 목적에 따라서 인도하고 있다는 인격신 개념을 큰 오류이자 환상에 불과하다며 부정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필연적이고 오로지 인과적으로만 제약되어 있는 순서 속에서, 수학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기계론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목적론적 세계관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스피노자는 신에게 지성이나 의지 또는 그 밖의 모든 인간적인 특색을 인정하지 않았다.

 

1.8 비판

실체와 양태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신이 무한하고 양태는 유한하다면, 이 양태의 유한성은 어디서 생기는 것인가?" 양태가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생긴다고 하는 스피노자의 체계에 의하면 양태의 유한성은 신에게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에게서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이 무한과 유한의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양태를 무한양태와 유한양태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으로부터(신의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으로부터) 직접적 무한 양태가 따라 나오고,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간접적 무한양태가 따라 나온다. 그리고 이 간접적 무한양태로부터 유한 양태가 따라 나온다.일반적으로 구체적인 개물은 이 유한양태를 뜻한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무한양태의 개념으로 실체와 유한양태를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실체로부터 유한양태가 '직접적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과 유한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직접적으로 산출된 무한양태는 그 원인인 신이 지속하는 한 소멸될 수 없고 무한하지만, 신에게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무한양태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는 유한양태는 소멸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직접적 무한양태와 간접적 무한양태를 거치는 동안 신의 본성(무한성)이 완벽하게 유한 양태에게 작용하지 않음으로써 유한이 나타난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신에게 적용되는 무한과 양태에 적용되는 무한은 그 의미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은 필연적으로 또는 절대적으로 무한하지만, 무한 양태는 '자기자신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무한한 것도 아니고 또한 '절대적으로' 무한한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양태의 개념으로 신과 유한양태를 연결시키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신의 비물질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주장과 연관지어서 '유한과 무한'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을 비판할 수 있다. 첫째는 "신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유한한 세계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이고 둘째는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한성을 신의 속성에서 배제하는 것은 모순이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신과 물질세계의 간격을 없애기 위해서 신에게 '연장'이라는 물질성의 개념을 포함시켰다면 신의 개념에 유한성의 개념도 연결시켜야 했다. 이처럼 '무한과 유한'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2. 인식론

인식론 자체가 인간이 어떻게 외부의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느냐에 따지는 물음인 만큼, 이를 논리적으로 규정하는 것, 즉 정신과 물체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은 형이상학체계의 토대를 쌓는 것과 같다. 만약 이 관계에 대한 확실한 이론을 정립하지 못한다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부실한 이원론으로 인해 혁신적인 인식론이 무너진 데카르트의 사례처럼 사상체계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더불어 스피노자에게서 부자유와 예속은 항상 부적합한 가상적 인식과 결부되고, 역으로 자유와 해방은 항상 적합한 인식과 결부된다. 따라서 철학체계의 탄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인간을 자유로 인도하기 위해서도 인식론 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이원론이 가지는 문제점을 직시하고 있었고, 데카르트가 사고와 연장을 실체로 규정했기에 발생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 둘을 실체(자연)의 속성으로 격하시켰다. 이렇게 실체에는 정신적 속성과 물질적 속성이 공존하게 되므로, 실체(자연)는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이 둘은 동일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 한 그 본질에서는 당연히 일치한다. 예컨대 도화지에 그려진 반지름이 5cm인 원이나, 반지름이 5cm인 원에 대해 정의하는 수학공식은 표기하는 방법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은 실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접근방법과 과정이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똑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만약 이렇게 세계를 이루고 있는 만물이 모두 자연(신)이라는 실체의 변형이라면, 인간이 무엇을 안다는 것은 결국 신 그 자체에 대한 탐구가 된다. 그렇다면 개별 사물과 현상에 대해 더 잘 이해할수록 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이라는 것은 정도의 인식주체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피상적일 수도, 본질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지식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누고, 낮은 차원에서 출발하여 높은 차원의 인식을 설명해 낸다. 첫 번째 단계의 지식은 속견으로서의 지식으로 상상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은 감각을 통해 얻으므로 불완전하며, 플라톤 인식론의 감각적 판단과 유사한 것이다. 단순히 보거나 느끼는 것으로 얻은 지식은 인식대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들은 단순하게 외양적인 정보를 기초로 귀납된 것들이기에 진짜 대상의 본질이나 특수성에 대한 제대로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태양은 지구로부터 약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항성이지만, 태양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시각을 통해서만 태양을 인식한다면, 태양을 그저 하늘에 떠있는 뜨거운 원반 정도로 파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을 통해서만 얻는 지식은 객관성과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두 번째 단계의 지식은 이성을 통하여 얻는 지식으로 객관성과 정확성이 포함된 공통개념을 알아채며, 감각을 배제하고 과학적 탐구를 인식의 방법으로 삼는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인식의 방법으로 얻는 인식대상, 즉 지식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점에서 '공통개념'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공통개념은 면적, 길이, 외형, 운동법칙 등 자연과학적 개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망원경과 추리력을 통해 태양이 원반이 아니라 항성이라는 공통관념을 파악한다. 이 공통개념을 전제로 삼고 인간은 연역법을 통하여 더 많은 지식을 알아낼 수 있다. 바로 이 단계부터 인간은 과학적 체계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탐구방법도 완벽히 정확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부적합한 관념에서 벗어나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 최초의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가장 높은 단계인 마지막 세번째 단계에서의 지식은 스피노자가 '직관적 인식'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자연현상으로부터 출발하는 인식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출발지로 하여 개별현상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즉 이는 모든 우주, 자연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만약 달성한다면 자연 전체에 대한 종합적 지식체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직관지란 목표임에 불과한 것으로, 이상으로 제시된 것이다. 직관지의 파악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목적으로서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성으로 통하여 얻는 지식이 과학적 탐구의 기초라면, 직관지에 대한 갈망은 철학자의 궁극적 목적인 우주의 총체적 진리의 통찰을 위한 기본조건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은 가상과 예속에서부터 참된 인식과 해방으로 나아가는 전진적인 운동을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인식론은 그의 윤리적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3. 윤리학

스피노자에 있어서 세계의 현상과 사물은 자연의 발현이며, 인간또한 자연의 일부로서 능산적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인간 의지의 자유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의 행동은 외부의 작용과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윤리학은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자유의지가 부정되는 세계관에서 윤리학은 인간이 따라야할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작동 전반(정신의 활동, 감정의 활동 등)에 대해 연구를 하려고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 존재론에서 내재적 인과성은 각각 개물들의 본질이자 실존의 근거이며, 유한자가 능동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신의 내재적 활동은 유한자안 에서 코나투스(Conatus)로 표현된다. 즉 자신의 본질을 보존하고 생명활동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뜻하는 자기보존의 욕구인 코나투스는 필연적 인과관계의 체계 속에서 항상 다른 유한한 사물들과 수동적 관계에 따라 실존하는 양태 즉 개물들에게 능동성과 해방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유한한 개물들이 자기 스스로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존재 속에서 스스로의 보존을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규정이 중요한데, 이는 원인과 결과의 필연성을 매우 강조하는 스피노자 인과론의 근본원칙과 연결되어 있다. 먼저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해 논하면서 양태는 본질적으로 '존재함'을 본질로 삼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즉 양태들은 신의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존재할 수 있는 원초적 역량을 부여받음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본질과 존재함의 불일치 때문에 양태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수동적이고 인과적인 관계를 자신의 존재조건으로 삼게된다. 이러한 존재조건들은 개물들이 스스로 완전하게 존재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다른 사물과 갈등하거나 서로를 제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구속적이다. 다시 말해 양태들은 수동성의 조건에 얽메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약과 수동성들은 양태들이 기본적으로 지닌 긍정적 역량의 여지를 협소화하기 때문에, 존재 보존의 추구인 코나투스에 반하는 경향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즉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구속하고 수동화하는 수동적 자기보존의 경향에 맞서 원초적인 존재역량을 확대하고 능동화하는 방향으로 전개하게 만든다.

 

3.1 정서론

따라서 코나투스는 특히나 인간의 활동을 판단함에 있어 기준, 즉 인간을 활동하게 만드는 각각의 정서가 인간의 존재역량의 변화, 나아가 수동성 및 능동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판단하여 어떤 것이 인간에게 옳은 것이며 어떤 것은 그른 것인지 판별할을 제공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코나투스를 '욕망'이라고 표현한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본질을 욕망으로 정의한 것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 즉 인간은 다른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인과관계 속에 존재하며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여하튼 만일 어떤 감정이 존재를 보존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그 감정은 자기보존을 위한 개인의 활동능력과 노력을 증가시키게 된다. 반면에 그 반대라면 그 감정은 개인의 활동능력을 줄어들게 한다. 에컨대 기쁨은 인간을 좀더 작은 완전성에서 좀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만드는 감정이며, 슬픔은 인간을 좀더 큰 완전성에서 좀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좋음(덕)'이란 '자기보존과 계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나쁨'이란 그와 반대되는 것을 가리킨다.

 

당연히 인간의 본질이 코나투스의 일종인 욕망에 있는 이상 인간은 자신의 활동역량을 최대한 증대시키는 관념을 가지려고 한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특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수동적인 실존적 상태에 처해 있으며, 외부의 영향을 받기에 자신의 뜻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처한 실존조건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내부적 영향을 늘려 자신의 존재역량을 증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증요하다.

 

3.1.1 가상과 예속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외부 사물과의 우연한 만남에 따라 존재역량의 증대나 감소를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사물을 만나면 존재역량이 증대되지만, 불일치하거나 대립하는 사물과 만나면 존재역량이 감소하거나 심지어 파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가은 자신의 활동역량을 증대시는 것을 가능한한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사물과의 우연한 만남에 의해 존재역량이 증대되면 계속 이와 유사한 것을 상상하려 하고 이를 통해 기쁨을 느끼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일종의 상상적 가상에 기초하는 것이다. 즉 정신은 어떤 사물이 실제로 자신의 존재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욕망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더불어 정서는 모방이 가능하다. 즉 일종의 군중심리와 같은 것인데, 다른 사람이 특정 대상을 미워하거나 좋아하면 자기 자신도 그 영향을 받아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 처럼 그 대상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의 본성을 부적합하게 인식할 경우, 인간의 정서는 존재역량을 증대시킬 기회를 제공하기는커녕 특정대상에 대한 가상과 집착을 조장함으로써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인간을 더욱 수동적인 상태로 만들며 예속적인 상태로 빠트린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그릇된 미신이나 가상의 예시로서 일반적인 선악개념을 예시로 든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선과 악이란 실제로는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인식의 결과에 불과하다. 선악이라는 범주를 이 정서들로부터 독립시켜 거꾸로 존재의 증대와 감소의 원인으로 만들어서 선악을 코나투스의 초월적 목적으로 승격시키려는 행위는 경계해야할 목적론적 가상에 불과하다. 즉 무언가를 선이라고 판단해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기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통념은 현실적인 유용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 통념들은 인간들을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인간이 공통된 목표로 삼을 만한 인간 본성의 본보기가 될만한 모범을 세우는데 있어서 일반적인 선악개념을 이용한다. 즉 인간 본성의 모범에 가까이 다가갈만한 수단임이 확실한 것은 선이고, 그 반대는 악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외부의 영향으로 형성되는 수동적 정서를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고, 선과 악을 재규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가상과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주요전략은 수동성과 가상의 조건 자체 속에서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연적으로 생겨난 존재역량의 증대 기회를 보존·확장하려는 노력과, 비록 가상적이고 부적합한 관념이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의 모범을 설정하고 이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은 능동성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3.1.2 능동성과 해방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서는 그와 대립적이면서 그보다 더 강력한 정서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 따라서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동적 정서와 구별되는 '능동적' 정서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을 인식했거나 내부의 마음작용으로 발생시켰을때, 능동적으로 활동한다. 반대로 부적합한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그러할 때는 인간은 수동적이며 예속된다. 따라서 인간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즉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의 문제와 직결된다.

 

즉 외부의 우연한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이성적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인도에 따라 참된 이성적 인식을 통해 능동적인 정서를 산출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진정한 이익인 자기보존을 잘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스피노자는 유덕함을 존재의 역량과 동일시한다. 유덕한 사람은 자신의 정념들의 노예가 아니라 그것들을 이성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이성적 규제력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역량, 즉 스스로가 자신의 정서적 상태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역량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외부의 수동적 영향을 끊기 위해서 자기자신에만 복종하는 운둔상태를 유지하며 살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공동의 결정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참된 이성적 인식이 가능한 인간의 삶이 운둔상태의 삶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사회적 자유와 자기보존을 모두할 수 있는 반면에, 후자는 그렇지 않으며, 애초에 그러한 폐쇠적 삶에서 제대로된 자기보존이 가능할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3.2 결론

요컨대 스피노자가 '자기보존의 욕구'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인간에게 적용할때, 생물학적이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보존이란 ‘자아의 본질을 지킨다.’는 뜻에 가깝다. 이것은 곧 나의 행동이 나 밖의 것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고 내 스스로의 내적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능동의 주체는 곧 자유인이며, 인간의 사유가 진리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인간은 자유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참된 자유인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길은 바로 참된 인식을 지향하는 철학자의 길과 일치한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자유인은 곧 이성을 계발한 사람이다.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 코나투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왠만한 경우에는 저절로 코나투스로 향하도록 행동하게 되며, 의지는 자기보존을 하기위해 발현되는 감정에 불과하다.

 

즉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란 존재하는데 있어서 스스로의 본성에 의해 근거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필연적' 또는 '강제된다'는 말은 존재하고 작용하는데 있어서 다른 존재에 의하여 결정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성의 의미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원인에 의한 필연성', 즉 다른 존재에 의해 자신이 '강제'되는 것이므로 자유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둘째는 '본성에 의한 필연성'이다. 즉 이는 자기 자신의 본성에 자신의 존재가 근거하는 것이므로 자유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같은 개념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고찰해보건데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유'의 개념은 '법칙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지배', 즉 자기 규정적'임을 의미한다. 즉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자유와 필연은 일치한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자기 본성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는 신 뿐이므로 완벽한 자유는 오직 신만 가지고 있지만, 인간또한 최대한 이성을 계발하여 자유로움에 최대한 가까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치Gottfriet Wilhelm Leibniz>

1. 인식론

라이프니츠는 인식의 근거와 방법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합리주의적 관점을 취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일정한 원리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원리는 경험을 통해 습득된 것이 아니라 이성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일종의 '본유관념' 또는 '선험적 원리' 이다. 이처럼 라이프니츠가 본유관념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그가 로크를 중심으로 근대 인식론의 한 주류로서 형성되기 시작한 경험론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 즉 경험론자들이 인간의 정신을 원래 아무런 정보도 갖지 않은 백지상태로 설정하고, 인간의 감관을 통한 경험과 추상 등의 심리적 과정을 통해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 것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인간 정신이 일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원리가 바로 감각적 경험들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으로 만든다고 주장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선험적 원리의 존재와 자신의 합리론적 관점을 동물과 인간의 의식의 차이를 들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동물은 단지 경험과 기억 그리고 단순한 추상행위를 하는 정도의 의식을 갖는다. 그런데 로크를 필두로한 경험론자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인식이 단순히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경험내용을 추상·일반화하는 등의 심리적 과정에 의한 것이라면, 동물과 인간의 지식은 별 차이가 없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도 인간 수준의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켰어야 한다. 그러나 동물은 그렇지 못한데, 이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동물과 인간의 의식수준과 그에 따른 경험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며 경험론자들을 비판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의식활동에는 크게 명석과 판명이 있는데, 명석은 어떤 대상의 외연적 모습에 근거하여 다른 대상과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의 의식상태를, 판명은 대상이 그것이게 하는 원리적 근거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명석은 경험을 단순히 수용함으로써 주어지는 인식을, 판명은 인과적 근거지움을 비롯한 논증적 행위에 의해 주어지는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개념에 근거하여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설명한다. 동물의 인식은 기억의 재현이나 초보적인 일반화 수준에 머물기 때문에 논증적인 과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면에 인간은 판명한 의식활동이 가능하기에 논증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따라서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라이프니츠는 과학과 같은 보편타당한 인식은 경험론자들의 주장처럼 경험적 방식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 없으며, 선험적 원리에 따라 논증적으로 경험을 구성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의 의식, 즉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라이프니츠는 경험적 원리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선행해서 그 경험을 논증적으로 구성하여 이성적인 사고를 해주는 존재인 선험적 원리를 곡해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2. 존재론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실체'에 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데카르트처럼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한다면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데 큰 곤란을 겪게될 것이며, 스피노자처럼 단일한 실체인 '신'을 제외하고 물질과 정신을 '신의 속성'이라고 말함으로써 해결할 경우에는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구분이 모호해지게 되는데, 이 경우 어떻게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한한 사물들이 생겨나는지 설명할 방도가 딱히 없으며, 인간의 정신을 단순한 양태로 간주하고 그 활동이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볼 경우, 주체로서의 의식과 자유와 같은 것은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리므로 도덕적 책임 같은 것도 성립될 여지가 전혀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처럼 실체가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주장은 스피노자와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스피노자가 자연 전체라는 거시적인 측면에 집중한 것에 반해 라이프니츠는 아주 미시적인 측면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2.1 모나드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일종의 유심론, 즉 오직 정신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실체는 반드시 불가분성(나눌 수 없음)의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나눌 수 있는 존재자인 연장(물질)은 실체의 참된 성질이 될수가 없다. 그에 따른다면 모든 연장은 실체의 복합적인 집합이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원소가 바로 실체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실체를 단자, 혹은 모나드(Monad)라고 칭한다. 이 모나드론은 단순하게 보자면 실체를 무한히 작은 물리적 원소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원자론적 입장과 유사해보이나, 사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전통적인 원자론적 입장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나드는 실체이므로 단순함과 분할 불가능함을 기본 특성으로 삼는다. 그리고 모나드가 단순하고 분할 불가능하며,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의식활동1의 기본이 되는 정신적 실재2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나드는 물체를 구성하는 원소적 물리요소가 아니라 역동적인 정신적 존재자이고, 물질은 이 정신적인 존재자들의 무한 집합이다.

 

이러한 모나드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데, 이 무수히 많은 모나드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나드는 무한한 우주의 모든 것을 그 안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존재이다. 어떤 것이 독립적이고 자족적이라는 것은 존재의 근거를 스스로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나드는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어떤 영향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상호 인과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이런 이유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가 외부로 향하는 통로가 없다고 말한다. 즉 '모나드는 창이 없다'는 것이다.

 

2.2 예정조화론

그러나 무한히 많은 모나드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 관계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할 경우, 이는 대개 모든 존재자들의 필수적인 존재방식으로서 이해되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질서나 원칙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인과관계는 사실 '예정된 조화'에 불과하다는 '예정조화론'을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이는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이미 그렇게 진행되도록 예정된 수순이 정해져 있고, 이를 따라 이루어지며, 현상세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인과적 관계는 사실상 예정된 조화의 겉보기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정조화론에 따른다면, 정신성과 자족성과 더불어 모나드의 또다른 중요한 특성은 지향성 또는 합목적성이다. 즉 모든 모나드들이 서로 독립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움직임에 아무런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고, 모나드는 전체(무한성)와 완전성을 지향하므로 서로 조화를 이룬다. 더불어 완전성 개념은 시·공간적인 무한성 개념과 더불어 인식적·도덕적·가치적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모나드는 최고의 가치를 지향하여 변화·발전하는 존재자이다. 요컨대 모나드들은 각기 다른 존재목적을 가지나 그 서로 다른 목적들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이 세계의 목적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조화와 변화는 단순히 물질적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도 해당한다. 즉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은 목적론적이다.

 

2.3 모나드의 위계질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의 정신적 활동의 수준차에 근거하여 존재자들의 위상을 구분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각각의 모나드가 행하는 지각은 그것이 얼마나 명료하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즉 지각의 명료성을 수적 크기로 분류하여 100을 명료성이 완전한 단계로, 0을 명료성이 전무한 단계로 본다면, 각각의 모나드들이 가지는 값은 0에서 100 사이에 있을 것이다. 모든 모나드들은 지각활동에서 완전성(절대명료성)을 추구하지만, 라이프니츠는 각각의 모나드에는 선천적으로 부여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각활동은 그 한계에서만 이루어지고, 그들이 도달하는 명료성또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각 모나드별로 다른 명료성의 정도에 따라 세계 전체에서 각 모나드가 가지는 존재목적이 구별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모든 모나드는 의식이 명료한 수준만큼 현상으로서의 물질, 즉 신체를 수반한다. 라이프니츠는 자연의 존재자들을 물리적 존재자들로부터 식물, 동물 등 하급생물을 거쳐 고등한 생물인 인간, 나아가 절대적으로 순수한 정신인 신의 단계까지 등급을 매기고 분류하는데, 이러한 분류는 각 존재자들이 수행하는 의식활동의 수준에 기반을 둔 것이다. 동·식물들은 인간의 의식인 이성보다 낮은 단계의 의식을 가진 존재자로서 그에 준하는 동·식물적 신체와 활동방식에 따라 생존하며, 물리적 자연은 의식활동이 전무한 수준인 존재자들의 집합이므로 거의 전적으로 수학·물리학적 원칙에 종속된다. 절대명료한 의식을 가진 최고의 실체인 신만이 신체적 제약을 받지 않는 순수정신으로서 존재한다. 생물일반과 순수정신의 중간 즈음에 있다고 볼만한 인간은 논리적·인과적 사고를 통해 과학을 창출하며, 반성을 통해 자기자신과 최고 존재자들에 대한 사유에까지 나아가는 높은 수준의 의식활동을 보여준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인간의 의식을 특별히 이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도 완전하지는 못하고, 그런만큼 인간또한 많은 경우 동물적인 속성을 갖는 신체에 종속된다.

 

모나드를 연속적인 크기에서 판단하여 위계질서를 만들고 이를 통해 만물을 설명하고자 하는 라이프니츠의 시도는 그의 존재론적 논의에 있어서도 특히나 주목할만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들은 의식이라는 정신적 활동을 존재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존재자이든 존재하는 한,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무의식적이라고 할 수없다. 의식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존재자들도 의식활동이 미미한 또는 0으로 수렴하는 상태의 존재자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식물과 동물을 비롯한 유기체와 인간의 차이는 실체적인 차이가 아니라 (의식) 정도의 차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유도한다. 이러한 생각은 중세까지 통용되던 인간과 생물의 차이를 영혼의 존재여부로 구분하는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 중세적 존재관의 붕괴는 생물학에서 진화의 법칙을 주창한 찰스 다윈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철학에서는 이미 그보다 200년이나 앞서 라이프니츠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시도된 것이었다. 더불어 데카르트류의 이원론과는 다르게 신체를 정신의 현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상호분리될 수 없는 동시적인 수반현상으로 본다는 것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영혼 없는 육신이 존재할 수 없는 것 처럼 (신을 제외하면) 육신 없는 영혼도 존재할 수 없다.

 

2.4 모나드의 개체성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이 이전의 다른 사상가들의 그것과 구분되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모나드가 개체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개체란 역사적이며 일회적으로 구체적인 존재자의 특성이다.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개체성을 '관점'의 개념에 근거하여 밝히는데, 관점이란 모나드들이 세계를 의식하고 세계와 관계하는 지적 조망점이다. 각각의 모나드는 그들이 취하는 관점과 지향점에 따라 세계를 달리 인식하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관계맺으며 자신을 개별적인 존재자로 정립한다. 개개의 모나드는 고유한 관점을 가지므로 다른 어떤 모나드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개체로서 존재한다. 말하자면 '나'라는 개인은 나의 관점과 지향점에 따라 세계를 경험하고 반응하면서 나를 나 자신으로 만들어나간다. 나의 경험과 체험의 내용 그리고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는 다른 개인들의 그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일회적인 어떤 것이다. 이렇듯 라이프니츠는 논리학적·수학적 대상을 제외하면 세상의 어떤 개체도 다른 개체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나, 소크라테스, 플라톤, 카이사르와 같은 사람은 물론 특정한 길고양이나 야생맷돼지등과 같은 모든 역사적·실존적 존재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나드인 것이다.

 

요컨대 세계의 토대가 되는 실체, 즉 모나드는 자신의 내적 가능성을 근거로 하여 자신을 실질적인 존재자로 정립하고,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완성과 전체를 지향하여 발전해나가는 세계 내의 존재자들이다. 또한 세계란 이러한 논리적 원자인 모나드들과 그 모나드들이 가진 기계적˙논리적 관계의 복잡다단한 총합이라고 볼 수 있다.

 

2.5 심신평행론

라이프니츠는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예정조화설을 이용한다. 모든 모나드들의 변화과정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으며, 어떤 모나드의 지각이 다른 모나드들의 지각보다 명석하면 이 모나드가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좀더 혼미한 지각을 가진 모나드는 수동적으로 작용되는 방식으로 모든 모나드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관계는 공동체를 이루는 하나의 우월한 모나드와 하위 모나드들의 결합체인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어떤 모나드가 특히나 명석하면 그것은 영혼이 되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다른 비교적 덜 명석한 모나드들은 육체가 되어 영혼인 모나드의 지각 변화에 순응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반면에 영혼인 모나드가 상대적으로 혼미한 편이고, 육체인 모나드가 상대적으로 명석한 편이면 반대로 영혼인 모나드가 육체인 모나드의 지각 변화에 순응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물론 이러한 조화는 태초부터 예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혼인 모나드와 육체인 하위 단계의 모나드들의 집합은 실은 독립적으로 작용하지만, 현상적으로 볼 때는 마치 두 개의 완성도 높은 시게처럼 매순간 정확히 조응하는 것 처럼 보이기에 상호작용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심신팽행론은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가 된다. 의지작용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모나드가 무차별적인 상호조화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지성또한 다른 존재와 완벽히 동등합 입장에 있는 것이므로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와 자유로운 행위의 성립은 불가능해진다. 예컨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동등한 조화관계에 있다면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같은 것이 되는데, 이러한 관점은 유물론적 기계결정론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 없다.

 

3. 도덕철학

기본적으로 라이프니츠는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모든 원인들의 연쇄 바깥에 스스로 존재하는 신을 전제한다. 이러한 신론 하에 라이프니츠의 도덕철학은 두 가지 문제를 다룬다. 하나는 전능한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인간의 모든 미래행위를 예정했다면, 인간은 선한 행위에 대한 칭찬과 포상 그리고 악한 행위에 대한 비난과 벌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신에 의해 미래의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저지하려 해도 소용이 없고,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실현하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하는, 이른바 '게으른 이성의 궤변'에 대한 문제이다. 전자는 귀책 가능성의 문제이고, 후자는 도덕법칙의 성립 가능성 문제이다.

 

3.1 자유로운 인간

만약 선행이나 죄악에 대한 귀책과 도덕법칙이 성립하려면,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책임질만한 자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즉 인간의 미래행동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아서 스스로의 행위나 의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이러한 자기의식은 항상 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의 포상과 징벌이 합리화될 수 있으며, 보편적인 도덕법칙도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사후세계에서의 책임 가능성, 즉 최후의 심판에 다른 책임 가능성을 논하기 위해 영혼의 불멸설을 전제조건으로 추가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 즉 정신은 실체이기 때문에 파괴 또는 소멸되지 않으며, 자기동일성도 유지된다.

 

라이프니츠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나드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에 따르면 신에 의한 예정조화에도 불구하고, 사실 모나드의 미래는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지는 않다. 태초에 신은 모든 모나드들의 미래행위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예정하였다. 그러나 신이 예정했기 때문에 특정한 모나드가 특정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나드가 스스로 특정한 행위를 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신이 전지한 능력으로 이를 예견할 수 있고, 또 다른 모나드들의 행위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예정이 모나드의 내적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변화하는 모나드들의 내적 상태를 신이 예견함으로써 서로 조화를 이루는 모나드들의 집합으로서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신의 섭리는 모나드의 내적 상태의 변화까지 결정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는 보장된다.

 

즉 인간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모나드의 미래는 에정이 되어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이고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그것이 실현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끊임없는 사유와 성찰을 통하여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발전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참된 관념을 얻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실현시켜 나가는 일인 것이다. 결국 라이프니츠에게 자유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기능성을 펼쳐내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라이프니츠에게 자유란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이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세계를 보는 관점과도 맞아 떨어진다. 세계가 신에 의해 최선의 것으로 창조되었다면 인간은 자유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계속 사유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펼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라는 처음부터 주어진 본질에 근거하여 외부의 어떤 요인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모나드의 목적을 통해서만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사상은 무척이나 결정론적이지만 적어도 그것은 상당히 낙관적인 결정론이다. 모나드로 대표되는 인간 정신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3.2 변신론

변신론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 그 창조자인 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이 반론은 악의 종류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라이프니츠는 악을 형이상학적 악, 도덕적 악, 그리고 물리적 악으로 나눈다. 형이상학적 악이란 존재의 결핍을 의미한다. 즉 완전하지 않은 것은 존재의 결핍이며,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형이상학적인 악을 내포한다. 도덕적 악이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죄라고도 불린다. 물리적 악은 이성적 존재자가 겪는 고통이다. 첫번째 악에 관한 변신론의 논제는 신이 우주를 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능하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두번째는 신이 인간의 창조자이고 그의 미래행위를 예견했으므로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책임도 결국 신에게 있다는 비난에 대한 옹호이다. 세번째는 고통이 존재하도록 세상을 창조한 신은 선한 신일 수 없다는 비난에 대한 변호이다.

 

이 세가지 형태의 변신론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그 변론의 요지는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들 중에 최선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여러개의 가능 세계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며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근거는 제기되는 문제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변신론의 첫번째 요점은, 신은 피조물에게 부분적 완전성만을 부여했을 뿐이며, 존재의 결핍은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 자체에 고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은 그의 피조물에게 모든 완전성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피조물이 완전한 존재자, 곧 신일 것이기 때문다.

 

두번째 요점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악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그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은 인간이 죄를 범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다만 범죄의 가능성을 허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전지한 능력으로 인간의 죄악을 미리 알면서도 이를 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훌륭한 건물이라고 항상 좋은 자재만 쓰이는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덜 좋은(혹은 나쁜) 자재를 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는 것 처럼, 의지의 자유를 가진 존재자로 이루어진 세계는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죄악을 범할 수 없는 존재자들로만 이루어진 순수기계적인 세계보다 훨씬 더 완전한 세계이기에, 즉 신은 최선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따르는 인간의 죄악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요점은 세계에 존재하는 고통은 도덕적 악, 즉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악이 존재하는한 물리적 악인 고통도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세계에는 고통보다 행복이 훨씬 더 많다. 여기서 그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즉 중간상태도 행복한 상태로 본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도덕적으로 선함에도 불구하고 악한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라이프니츠는 이에 대해 신이 미래세계에서의 더 큰 행복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영혼은 불멸이고 신은 정의롭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은 내세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누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4. 논리학

라이프니츠는 논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몇가지 원리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두 가지는 그 자체로서도 유명하지만,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과 연결되는 점으로도 중요하다. 그 두가지의 원리란 '모순율'과 '충족이유율'이다. 이 두가지 원리가 라이프니츠의 완전히 독창인 것은 아니지만 이 원리들이 명확한 의미를 얻게된 것은 명백하게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거친 후 부터이다.

 

모순율은, '모순된 명제는 거짓이며, 거짓된 명제에 모순대립하는 명제는 참이다' 라는 것이다. 충족이유율은, '어떠한 사물도 이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명제도 근거 없이는 참이 될수 없다'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과학적 인식은 모순율과 충족이유율을 통해 성립한다. 우선, 모순율을 근거로 한 공리적 구성을 통해 논리학과 수학 등 순수과학이 성립된다. 왜냐하면 순수과학은 보편적인 원리를 따르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과학은 단순히 관념적 구성에 근거한 가능성의 과학일 뿐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물리적 존재자인 자연을 인식하는데 있어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리적 실재인 자연이나 인간의 삶에 관계되는 사실은 논리적 가능성을 넘어 존재자의 사실적 근거가 되는 충족이유율에 따라 인식되어야 한다. 충족이유율은 주어진 현상을 그것의 근거가 되는 실질적 원인에 따라 설명할 것을 요구하는, 자연과학의 인과율에 해당한다. 인과적 설명여부에서 사실과학인 경험과학과 순수과학인 논리학과 수학은 서로 구별된다.

 

4.1 진리의 종류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진리에는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가 있다. 형이상학적 명제와 논리학·수학 등의 명제는 이성의 진리에 해당한다. 형이상학적 명제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는 충족이유율을 비롯한 존재 일반에 관한 원리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명제들이다. 논리학과 수학의 명제들은 모순율과 공리적 구성을 통해 성립하는 명제들이다. 즉 이성의 진리는 모순율을 활용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사실의 진리는 경험적·역사적으로 얻어지는으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됐다'라든지 '지구의 공전주기는 365일이다'라는 명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명제들은 형이상학적 전제나 논리적 명제와는 달리 그것의 반대 또는 다른 가정이 가능한 명제등이다. 즉 '카이사르가 브루투스가 아닌 다른 정적에 의해 살해됬다' 나 '카이사르는 자연사 했다'라고 주장하는 것, '지구의 공전주기는 365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가능한 가정이다. 이처럼 사실에 관한 명제는 반대가정이 가능하므로 필연성이 없다는 의미에서 '우연적 명제'라 칭한다. 즉 사실의 진리는 충족이유율을 활용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어떤 사실 A는 참이며 동시에 거짓이 될 수없다', '어떤 삼각형의 두 내각의 합이 직각이라면 다른 한 내각의 크기는 직각이다' 등의 논리적·수학적 명제는 논리적 근거에서 반드시 참이되는 명제들이다. 이는 반대가정이 불가능하므로 '필연적 진리'라고 칭한다.3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실의 진리가 궁극적으로는 필연적인 이성의 진리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충족이유율에 따라 모든 현실적 사실이 사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 예를 들어 카이사르의 피살사건도 만약 충분한 시간과 자료를 가지고 면밀히 검토한다면 그 사건이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를 테면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기치 않은 우연적 사건 또는 설명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적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라이프니츠는 근본적으로 우연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실은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의 철저한 합리주의적 태도를 드러내준다. 인간은 선천적인 지적 한계로 인해 논증적이며 경험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단편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밖에 없지만. 세계의 모든 존재자와 사건은 합리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이다.

 

  1. '지각'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의식적인 정신활동뿐만 아니라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고 부르는 수준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의식활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2. 마치 영혼과도 같아 연장의 특성을 가지지 않는
  3. 진리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분류는 오늘날의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에 해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