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이야기

영국의 경험론/blog.naver.com/czech_love

<토마스 홉스>

1. 철학적 방법론

17세기의 철학자들에게 철학과 학문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서 뉴턴과 아담 스미스는 각각 자신을 자연과학자, 경제학자가 아니라 자연철학자, 윤리학자로 규정했다. 마찬가지로 홉스에 따르면, 철학 또는 학문이란 "그 원인이나 생성에 대해서 인간이 먼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참된 추론을 통해 얻어진 결과 또는 나타난 것에 대한 지식"이다. 철학에 대한 홉스의 이러한 정의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인과적 관계에 관한 지식만이 철학적이라고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바른 추론(계산 가능성)에 의해 얻어진 것만이 참된 철학적 지식이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것만이 철학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정의에 근거해 홉스는 철학을 크게 자연적 물체에 관련된 자연철학과 인공적 물체에 관련된 정치철학으로 구분한다.1 그리고 홉스는 이러한 자신의 철학적 구분에 있어서 인과적 관계를 갖지 못하거나 논리적 추론이 불가능한 것들, 즉 종교와 신학과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암호'로 씌어진 스콜라 학파의 이론들이 철학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렇듯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엄격한 학문적 기준과 방법론적 지향점을 세움으로써 홉스는 앞으로의 철학이 올바르게 개진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렇게 홉스의 철학은 과거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즉 홉스에 따른다면 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다. 또한 홉스는 자신 이전의 철학, 특히 스콜라주의를 필두로한 신학적 철학은 과학을 배제하고 단순히 감정에 대한 기술과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한 비생산적 철학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기하학의 엄밀한 논증방식이 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홉스에 따르면 가장 올바르고 정확한 학문의 방법론은 (홉스 자신의 방법론으로서 가장 잘 알려지기도한) '분해와 결합의 방법'2이다. 이는 모든 존재하는 현상들을 가능한한 가장 작은 부분으로 분해한 다음, 엄밀한 추론의 과정을 거쳐서 다시 결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방법론에 있어서는 논리적 비약이 있을 수 없고, 논증적 설득만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가장 작은 부분으로 분해한다는 말은 더 이상 논증이 요구되지 않는 일차적 원리를 찾아낸다는 것, 즉 개념들을 정확하게 정의3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합한다는 것은 정확한 정의를 전제로 삼아 논리적 추론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기계론적 자연관

홉스 이전까지 자연의 물리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타당하다고 인정된 이론은 모든 운동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동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행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이었다. 그러나 홉스는 이에 반대하여 운동에는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운동이란 단지 기계적으로 행해질 뿐인 장소의 이동이라고 주장했다. 즉 운동에 대한 이질적이고 위계질서적인 시각을 부정하고 단지 동질적인 운동만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홉스 자연관은 근본적으로 갈릴레이를 전범으로 삼고 있다.

 

또한 홉스는 자신의 기계론적인 운동관을 물리학과 자연철학의 범위를 뛰어넘어 심리학과 도덕철학, 그리고 사회철학에 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마음, 욕망, 혐오감, 사랑, 미움, 자비, 희망 등 모든 심리적인 개념들과 인간, 사회 그리고 국가까지도 기계론적 운동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3. 도덕철학

홉스는 인간을 '욕구'와 '혐오'라는 두가지 감정을 가지고 운동하는 존재로서 정의한다. 이 두가지 기본적인 정념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것과, 경험을 통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본능적인 것 몇가지를 제외하면 개별 사물들과 특정 현상에 관한 대다수의 욕구와 혐오의 정념들은 그 사물과 현상들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결과에 따라, 즉 경험적으로 결정된다. 선악개념또한 이러한 정념에 근거하여 규정된다. 개별 인간은 개인으로서 행위의 주체이자 정념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홉스는 욕구 주체의 입장에서 욕구하고 싶은 대상은 '선'으로, 기피하고 혐오하고 싶은 대상은 '악'이라고 부른다. 다시말해 선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욕구되며, 악은 고통을 제공하기 때문에 기피된다.

 

즉 홉스에 따르면 모든 가치는 가치대상에 대한 경험을 통해 주관적으로 내린 평가이다. 다시말해 본성적인 선악, 절대적인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여부의 결정은 개인의 내적 감각 운동이 이끄는 두 방향, 즉 욕구(쾌락·선)와 혐오(고통·악)에 의한 것이다. 모든 정념은 욕구와 혐오 둘 중 하나로 규정될 수 밖에 없지만, 인간은 개별적인 주체이므로 이러한 선악의 판별또한 고정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인간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운동상태에 있기 때문에, 특정 시간 및 장소에서는 선으로 규정되었던 것이 다른 곳, 다른 시간에서는 악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만약 이렇게 인간을 인과관계에 입각해서 본다면, 다른 사물들의 물체운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리도 예측이 가능하다. 이렇듯 홉스는 경험을 초월한, 인간의 의식과 독랩해서 존재하는 불별하는 최고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4, 도덕을 물리적 물체운동과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4. 정치철학

4.1 자연상태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홉스의 독창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상태'란 실제로 역사상 존재했던 상태가 아니라 일종의 허구로서, 홉스가 자신의 정치론을 전개하기 위해 세운 논리적 가정이다. 즉 홉스는 시민 사회가 출현하는 역사적 기원과 발전 과정보다는 논리와 추리의 관점에서 그것이 성립하는 원인과 구조를 밝히고자 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 안에서의 인간은 평등하고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평등과는 다르다. 폽스가 말하는 평등이란 객관적 상태의 평등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평등이란 누구나 자신이 필요한 것을 취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5 즉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각 개인이 자신의 힘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권리는 개인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놓고 대립하여 싸울 수 있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사용하며 즐길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지칭한다. 또한 홉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이 '자기보존'에 있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홉스는 인간의 이기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중 하나이며, 그 자체로 죄라고 부를 수 없고 부도덕한 것도 아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또한 자기이익(쾌락)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홉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이기성은 자기보존욕구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어떤 도전에 대해서도 저항할 권리라는 측면에서 당연한 것이다.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비참하고, 괴롭고, 잔인하며, 짧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보호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힘의 증대를 추구한다. 그러나 홉스는 무한한 힘의 축적은 불안정의 무한한 증가를 초래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홉스적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겪게 되는 딜레마이다. 그러나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인간은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사악한 존재는 결코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상태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 적어도 자기파멸을 피하고 자기보존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은 타자와의 공존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한 자비·동정심·자선 등 선한 본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상대방과 완전히 고립하거나 접촉을 단절한 상태에 놓이기 보다는, 일정한 접촉을 하면서 최대한 평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분명히 가진다. 자연상태에서 죽자사자 경쟁하는 것은 지속적인 공포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 공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가상의 적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평화적인 공존 없이는 자기보존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는 현실을 계산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2 자연법과 사회계약론

홉스에 따르면 생명과 종족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의 이성은 올바른 원칙과 규율을 발견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홉스에 따르면 자기보존을 위한 제1의 자연법은 "모든 사람은 평화를 획득할 희망이 있는 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이다. 즉 홉스에게 있어서 '자기를 보존하라'는 명제와 '평화를 추구하라'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6 또한 홉스는 자기 보존과 평화에 대한 보장 없이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한다. 사회계약을 맺어 시민사회를 이루거나 계약의 유효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제3의 보증자인 통치자를 세우는 일 그리고 자연이 보장하는 권리와 자유의 상당부분을 양도하는 일들이 결국은 자기보존과 평화의 추구라는 동일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자연법의 제2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자기보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자발적으로 자연권(타인을 적대시할 수 있는 권리)을 양도하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도는 일방적인 양도가 아니라 호혜적인 양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홉스는 이러한 권리의 상호양도를 '계약'이라고 정의한다. 이 양도된 권리는 '인공적인 인격체', 즉 만들어진 통치권자로 모아진다. 홉스는 시민과 통치권자의 관계를 장본인과 대리인의 관계로 묘사한다. 대리인의 말과 행위는 장본인에 의해 권위를 갖게 되며, 대리인에게는 계약 파기자를 처벌할 수 있는 '정의의 칼'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계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전쟁의 칼'이 주어진다.

 

4.3 절대군주론

만약 사람들이 사회계약을 체결하여 자신의 지배권과 자연권을 통치자에게 양도하고, 정부가 편의상 부여한 권리만 보유하는 시민으로 거듭날 경우, 시민들은 통치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 통치자에게 저항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 그것은 자신이 양도한 권력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저항한다면 이는 자연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치자의 권력은 질서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절대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분할될 수 없는 특징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통치자는 법보다도 우선한다. 절차상 통치자가 존재한 다음에야 추상적 원리인 법의 질서가 구체화되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통치자가 법을 제정하는 것은 시민이 법을 제정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법은 불공정할 수 없다. 법이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시민들의 합의가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거듭날 수 밖에 없다. 홉스는 이러한 법을 지키는 것을 '정의'라고 규정했다. 즉 홉스에게 있어서 정의는 법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법이 정의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 홉스에 따르면 법이 정의에 선행해야만 정치에 있어서 독단적인 가상의 개념 상정을 배제하고, 법률에 확고한 권위를 부여해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설령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악법이라고 해도 시민은 주권자의 부정행위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통치권 아래의 시민들이 정부를 견제하거나, 거역하거나, 통치자에 대항하는 것, 또는 정부의 위신이 손상되도록 비판하려는 것까지 모두 옳지 못하다. 심지어 오늘날의 정당이나 노동조합같은 단체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또한 모든 지식인과 교사들은 통치자의 대리인으로서 통치자가 유용하다고 생각한 지식만을 가르쳐야 한다.

 

4.4 결론

홉스는 계약을 통한 강력한 통치권의 정당화와 그 결과 주어지는 절대군주론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절대군주의 배후에는 보호와 평화유지를 조건으로 한 시민의 권리 양도가 놓여 있으며, 통치자는 단지 대리인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 홉스는 계약의 당사자인 시민들이 지켜야할 복종의 의무조항과 대리인으로서 군주가 지켜야 할 보호의 의무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말해 홉스는 최대한 보호와 복종을 수평적 관계로 놓음으로써 의무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개념을, 그리고 의사 민주주의를 강조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비록 군주정을 지지했으나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자기보존과 평화유지를 위한 최선의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왕권정치를 지지했다. 이렇듯 홉스의 정치철학적 관심과 목표는 통치권의 확립과 통치자의 권위를 위한 정당한 근거를 제공함을 통해 자기보존과 평화정착을 달성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사회계약론과 절대군주론을 접합시킨 것이었지, 특정 정치체제나 인물을 숭상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술한 절대군주론에서 보았듯이, 홉스의 정치철학은 부당한 봉건주의적 독재를 옹호할 철학으로서 유용하게 쓰일 여지가 충분하다. 그는 단 한번도 국가통치자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이익을 희생하려는 경향에 대해 논한 적이 없으며, 이상적인 통치자만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더 나아가 홉스는 자연철학을 다시 구분해서 도덕철학과 좁은 의미의 자연철학으로 나눈다. 그리고 자연적 물체의 운동을 양과 질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여러 분야의 분과 과학들로 세분했다. 정치철학의 경우 국가·정부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이론과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이론으로 구분했다.
  2. Resolutive-compositive method
  3. 따라서 '정의(definition)'란 "복합적인 개념들을 그것의 가장 보편적인 부분으로 분해하는 것"이다.
  4. 이러한 최고선의 부정은 로크와 흄 등의 경험론자들에게 계승된다. 이 세 철학자는 모두 도덕 이론에 있어서 객관적 이상향을 상정하는 합리주의적 입장을 거부하고, 도덕의 기준을 관습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된 규범 등에 둔다. 또한 홉스의 주장은 공리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는 행위의 결과를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거기에 선과 악의 이름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홉스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쾌락주의 전통을 근대적으로 계승했으며, 후에 공리주의 윤리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5. 이런 점에서 볼때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란 인간의 이성이 마비되었을때 발생하는 생활양식으로서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6. 이외에도 홉스는 18개의 다양한 자연법을 규정했는데 이것들은 제1자연법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를 지닐뿐이다.

     

 

 

<존 로크의 인식론>

인식론·존재론·언어철학 등의 순수철햑 분야에 로크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크는 인간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본 선대 철학자들이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하면서 과연 그러한 지식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철학은 지식 자체의 본질과 인간의 인식가능에 대해 검토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확신한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의 목적을 인간 지식의 원천과 확실성 그리고 범위에 대한 탐구라고 천명하였다.

 

1. 본유주의 비판

로크는 본유관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경험에서 지식이 도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경험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이러한 로크의 관점은 인간의 지식 중 일부가 '본유적'이라고 보는 본유주의자들의 입장과 정면으로 대치한다. 본유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학습할 수 없는 진리를 알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입증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진리들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본유적인 원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상정하는 본유적 원리로는 보통 실천적(또는 윤리적 및 종교적) 원리와 사변적(또는 이론적) 원리가 있다. 전자의 예로는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보호하고 소중히 키워야 한다'라는 계율 등이 있으며, 후자의 예로는 '어떤 것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원리가 있다.

 

그러나 로크는 이 본유적 원리의 부당성을 지적함으로써 본유주의를 비판한다. 첫째, 로크에 따르면 어떤 원리를 설명할 때, 만약 본유관념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그 원리가 설명이 되어질 수 있다면 본유적 원리를 상정하는 가설은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둘째, 로크는 어린아이나 백치들이 동일률과 같은 사변적인 원리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동일률이 본유관념이라면, 이성을 가진 존재는 모두 이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전혀 의식되지 않는 명제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나 백치가 동일률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더욱이 문맹자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노예들은 동일률과 같은 원리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해보지도 않은 채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로크는 본유주의자들의 논변은 정당성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로크는 아예 본유 관념을 전제하고 전개된 이론이나 논의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단지 어떻게 알게 된 원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시도하지 않고, 즉 그 원리들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전혀 따지지 않고 본유적이라고 상정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크는 인간의 지식에는 본유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로크는 경험적인 지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모든 관념은 본유 관념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로크는 본유관념에 반대하여 'Tabula Rasa" 즉 인간의 정신은 백지상태라는 백지론을 주장했다. 지식과 관념의 주체는 본유관념이 아닌 경험과 관찰을 통해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2. 관념

로크는 사유할 때 사유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관념이라고 부르며 이 관념을 바탕으로 지식을 설명한다. 관념이란 추리·감각·지각·기억·상상 등 지성작용의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이 관념들은 본유적으로 생성되는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외없이 경험에서 비롯된다. 즉 경험 이전의 마음은 관념이 전혀 없는, 모든 특성을 결여한 백지와 같으며,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2.1 단순관념

로크에 따르면 관념들이 바로 지식의 재료가 되는데 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단순관념'이다. 단순관념이란 그 자체가 비복합적인, 즉 그 안에서 어떠한 변화나 분할도 지각되지 않는 관념이다. 로크는 단순관념을 몇가지 종류로 나눈다. 첫째는 감각관념으로, 물리적 대상들이 지닌 성질들, 예컨대 색깔·촉감·냄새·맛·소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관념들은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된다. 둘째로 내성관념이 있는데, 이는 마음이 그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작용들을 성찰하는 것으로 얻어진다. 지각·사유·의심·믿음·추리·앎·의도를 비롯한 마음의 여러 작용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인간이 경험으로부터 얻는 관념은 모두 이 감각과 내성(반성)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인간에게 인식되어질 수 있다. 로크에 따르면 마음은 단순관념들을 완전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다시말해 인간은 원하거나 원치 않건 간에 마음은 외부에서 인식하도록 강요받는 단순관념을 거부하거나 변경하지 못한다.

 

2.2 복합관념

감각과 내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관념들 중에는 상당수가 두 가지 이상의 단순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로크는 이러한 관념을 '복합관념'이라 규정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창밖의 나무를 볼 때 갖게 되는 나무의 관념은 그 나무의 색깔, 형태, 크기에 관한 단순관념들로 이루어진 복합관념이다. 이러한 복합관념은 대상의 성질들에 대응하는 단순관념들이 결합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이 과정에서도 수동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단순관념이나 복합관념들을 결합해서 새로운 복합관념으로 능동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공상 속의 괴물이라든지 황금길과 보석집에 대한 관념등이 그 예이다.

 

2.2.1 복합관념의 내적 생성

마음이 새로운 복합관념을 만들어내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여러 관념들을 하나로 묶는 작용인 합성 또는 혼합의 작용이다. 이 작용의 결과로 실체의 관념이나 양태라는 복합관념이 생겨난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감각관념이 그 자체로만 존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 단순관념들을 담고 있는 어떤 기체, 즉 '실체'를 상정한다. 그리하여 그 결과 생기는 관념은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성질들의 미지의 담지자로서 단지 상정되는 것일 뿐이다. 즉 로크는 실체에 대한 관념을 경험으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감각적 성질이라 보지 않고, 인간이 구성해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이 토내 내지 기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알수도 없는 것이다. 반면 양태란 아무리 복합적이라 할지라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없고, 실체의 의존물 내지 부수물, 예컨대 수 혹은 기하학적 도형, 길이의 단위 등의 관념이다. 삼각형이나 킬로미터 등의 기하학적 개념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고, 실체를 설명하는 추상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음은 두 관념들을 하나로 묶지 않고 나란이 놓고 한번에 바라보는 것으로도 관계의 복합관념을 만들어낸다. 즉 마음은 독립적인 한 관념을 생각하는데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넘어서 그것이 다른 관념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셋째, 마음은 추상작용을 함으로써 추상관념을 산출해낸다. 한 관념이 다른 관념과 관계를 맺는 방법은 무수히 많기 때문에, 관계의 관념또한 다양하다. 추상이란 마음이 개별적인 관념들을과 시간, 장소 또는 여타의 부수적 관념들 및 다른 모든 존재들과 분리한 뒤 그 현상 자체로서만 마음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추상작용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이 한 복합관념에서 한 구성요소를 선정하고 나머지 요소들은 배제하여 단순관념을 산출하는 추상작용이다. 이를 통해 산출하는 관념으로는 감각성질에 대한 관념이 있다. 예컨대 어떤 대상에 대한 복합관념에서 출발한 후 그 복합관념에 포함된 다른 요소들을 제거하고 '빨강'과 같은 감각성질의 단순관념을 추출하는 것이 이러한 방법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한 복합관념에서 출발하되 여러가지 요소들을 제거해나가면서 새로운 복합관념을 산출하는 추상작용이다. 이 작용에 의해서는 물리적 실체에 대한 복합관념을 갖게 된다. 즉 개별적인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복합관념으로부터 각 개인의 특징을 제거하여 '사람'이라는 공통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작용으로부터 확보되는 추상관념이 보편자나 본질과 같은 개념들을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게 된다. 예컨대 신에 대한 관념까지도 인간이 가진 최상의 관념들로 이루어진 복합관념으로 규정된다. 굳이 본유관념을 끌어오지 않고서도 경험주의적으로 신을 설명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2.3 실재적 관념과 공상적 관념

로크는 올바른 관념의 특징으로 실재성을 제시한다. 실재적 관념은 자연계 안에서 기반을 다지며, 실재 및 사물의 존재나 원형과 일치하는 관념들이다. 이와 대비되는 관념은 공상적 관념인데, 이 관념은 자연계에 기반을 갖지 않거니와 실재와도 일치하지 않는 관념이다. 즉 적합한 관념은 사물의 원형을 완벽하게 표상하는 관념이다. 반면 그러한 원형들을 단지 부분적이거나 불완전하게 표상하는 관념들은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참과 거짓은 관념의 속성이 아니라 명제나 판단의 속성이지만, 보다 포괄적으로 본다면 관념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관념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판단되거나 추정될 때 그 관념은 참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크는 이 기준에 따라 관념들의 성격을 구별한다. 먼저 단순관념은 실재적이다. 왜냐하면 단순관념은 사물 자체에 실제로 있는 성질들에 바로 상응하기 때문에 각각의 사물을 구별하고 알아보는 표식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즉, 단순관념들은 실재하는 존재의 독특한 구조에 상응하므로 실재적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단순관념은 적합하고 참일 수 밖에 없는가? 로크에 따르면 단순관념은 인간 안에서 그러한 감각을 산출하도록 신이 맞추어 정해놓은, 사물 안에 있는 어떤 힘의 결과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힘에 상응할 수밖에 없고 적합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복합관념은 때로는 실재적이고 때로는 공상적이다. 실체의 관념들 중 일부는 인간 자신이 만들어내는 조합이며 그 구성요소들은 자연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켄타우로스처럼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말로 이루어지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생물체의 관념이 그 예이다. 또한 실체의 복합관념도 신뢰할 수 없다. 인간은 실체 일반에 대한 관념을 가지는게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실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인식한 실체가 진짜 실체와 일치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체의 관념은 일부만 참이고 일부는 거짓이 된다.

 

즉 '빨간 사과'가 '빨간색'이라는 단순관념을 가지고 있다는건 확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빨간색'이라는 속성이 존재함은 명확하다. 그것이 존재함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빨간 사과'라서 '나'가 그것을 빨간 사과라고 인식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빨간색'이라는 단순한 속성은, 그것이 외부에 있던 '나'의 상상 혹은 착각이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단순관념은 실재적이다. 반면에 '빨간 사과'라는 물체는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대상들을 '나'가 경험하여 심적인 표상으로서 구성해낸 복합관념이다. 따라서 이것은 '나'의 상상일 가능성도 있으며, 진짜로 실제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는 때로는 실재적이며, 때로는 공상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지식

3.1 지식의 정의

로크는 관념들을 재료로 지식이 생성된다고 보면서, 지식을 "인간이 가진 관념들의 연합과 일치 혹은 불일치와 모순에 대한 지각"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동일하다는 것을 아는데, 그것은 이 동일성에 대한 관념이 삼각형의 세 각에 대한 관념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삼각형의 관한 이 진리를 아는 것은 이 관념들간의 연합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삼각형의 세 각과 두 직각의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일치하고 분리될 수 없음를 지각하는 데에 있다. 반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불일치하다는 지각도 가능한데, 이또한 지식이지만 그릇된 지식이다. 따라서 지식의 범주는 "인간이 가진 관념들의 연합과 일치 혹은 불일치와 모순에 대한 지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로크의 견해이다.

 

3.2 지식의 분류

로크는 지식을 직관적 지식, 논증적 지식, 감각적 지식이라는 세 가지 분류(혹은 등급)로 나눈다. 만약 마음이 관념들간의 연합을 파악할 때, 일치나 불일치만을 직접 지각하고 다른 외적 개입은 발견할 수 없을때, 다시 말해 그 관념들이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일 경우, 로크는 그러한 관념을 직관적 지식이라고 칭한다. '3은 2보다 크다', '1+2=3'등이 직관적 지식의 예이다.

 

반면 관념들의 연합이 간접적이고 다른 관념 혹은 관념드에 의해 매개될 경우, 다시 말해 그 관념들을 간접적으로 파악해야만 할 경우, 로크는 그러한 관념을 논증적 지식이라고 칭한다. 예컨대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같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은 삼각형의 세 각만을 가지고 탐구해서는 안되고, 동일한 다른 각인 두 직각의 합을 찾아냄으로써 증명을 해야한다.

 

이외에 감각적 지식이 있는데, 이는 외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다. 즉 감각적 지식은 두 관념들간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현재 갖고 있는 지식이나 관념들에 대응하는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라는 점에서 나머지 두 종류의 지식과 차이가 있다.

 

3.3 지식과 믿음의 구분

로크에 따르면 삼각형에 대한 지식과 금이나 은 같은 사물에 대한 지식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속성은 감각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간의 연합에 대한 지적인 파악을 근거로 하는 반면, 금이나 은에 관한 지식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감각에 의해서 얻게 되기 때문이다. 로크는 전자처럼 관념들간의 연합에 대한 지각으로 성립하는 경우를 지식이라고 하고, 후자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는 믿음 또는 의견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관념 혹은 관념들의 연합 중에는 그 본성상 너무나도 엄밀하고 명확해서 그것이 가지는 관계나 습성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때에만 인간은 확실하고 보편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옳은 계산법을 사용한다면 언제나 진리를 산출할 수 밖에 없는 수학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리고 만약 과학이 지식체계라면, 수리적 공리를 다루는 기하학과 윤리적 공리를 다루는 윤리학은 과학이다. 반면 일반적으로 과학을 대표하는 학문분과로 여겨지는 자연과학(당신의 자연철학)은 추리가 아니라 감각에 의해 관찰되는 믿음에 근거하므로 과학이 아니다.

 

3.3.1 명목적 본질과 실재적 본질

인간의 인식이 언제나 확실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종종 불확실한 믿음을 갖게되는 이유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에는 명목적 본질과 실재적 본질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선 로크의 정의에 따르면 본질이란 '어떤 대상을 그 것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다. 명목적 본질이란 그 사물의 이름에 붙는 추상관념, 예컨대 인간이 어떤 대상을 '삼각형'이나 '금'이라는 언어로 지칭하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그러한 이름으로 지칭되기 위해 지녀야 하는 특성들의 집합이다. 반면에 실재적 본질은 그 대상으로 하여금 바로 그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즉 명목적 본질은 물론 그 대상의 모든 속성이 의존하는 것이자 그 속성들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금에 대해 인간이 가진 관념들은 대개 "그것은 금속의 한 종류이고, 노란색을 띠며, 왕수에 작 녹고, 다른 금속에 비해 연성과 전성이 매우 크다" 등 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그 사물을 금으로 분류하고 다른 금속이 금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의 역할을 한다. 바로 이렇게 단지 분류와 구분의 기준으로서 제시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성들을 사람들은 '본질'이라는 명칭으로 지시한다는 것이 로크의 입장이다. 다만 이를 '명목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본질이 사물의 실재적 구조에 상응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로크에 의하면 인간은 관념을 통해서만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관념이 반드시 의식 외부로 존재하는 대상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로크는 '실재적 본질'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다시 말해 의식 외부에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부터 의식에게로 전해오는 그 어떤 작용1이 있기 때문에 관념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외부의 사물의 진짜 속성과 마음이 구성한 그 사물의 속성이 동일하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로크는 인간 마음의 외부에는 그 어떤 대상이 있고, 그렇다면 그것을 대상이게끔 만드는 속성, 즉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바로 그러한 본질을, 즉 있음은 분명하지만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어떤 구조'에 의해 성립되는 '진짜 본질'을 '실재적 본질'이라고 지칭한다.

 

로크는 명목적 본질과 실재적 본질의 구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시계를 예로 든다. 장날에 스트라스부르의 거대한 시곗바늘이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 시골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모든 현상들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톱니바퀴의 복잡한 체계에 관해서는 전혀 모를 것이다. 시골사람의 관념은 그 시계가 지닌 관찰 가능한 모습과 특성에 관한 것이다. 반면, 시계를 제작한 시계공의 관념은 그 시계의 실재적 본질에 관한 것이다. 시계공은 그 시계의 복잡한 체계와 메커니즘에 대해, 다시 말해 그 시계의 외관상, 경험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 시계의 관찰 가능한 모습과 특성들을 발생시키는 근원인 초월적인 '진짜 본질'에 대해 알고 있다. 이 비유에서 로크는 각각 실체들의 실재적 본질에 관해서 인간이 세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고 신만이 알 수 있다는 단서를 붙인다. 즉 신과 인간의 관계는 시계공과 시골사람들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로크는 어떤 대상이 실재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그 대상이 가진 특징과 속성들을 발생시키지만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존재를 인정하였다. 로크가 '실재적 본질'을 상정하면서도 그 본질이 그 자체로는 인간이 파악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분명히 통상 '합리론'이라 부르는 철학적 입장에서 인간이 '실재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명백한 비판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를 필두로한 합리론자들은 확고한 인식의 토대의 마련, 다시 말해 인간이 외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증하기 위해 노력했다.그러나 로크가 보기에 이것은 명백한 월권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실체니 속성이니 연장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복합 관념이고, 특히 지성의 추상 작용에 의해 구성된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3.1.2 양태의 명목적 본질과 실재적 본질

삼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양태가 갖는 명목적 본질은 그 개념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다. 아마 어떤 것이 세 변으로 이루어지고 닫힌 도형이라면, 인간은 그것을 삼각형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면 삼각형의 실재적 본질은 무엇인가? 삼각형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형태이자 물체들이 배열되는 방식이므로 삼각형의 실재적 본질이 어떠한 구성이나 배열이라고는 볼 수 없다. 즉 삼각형의 실재적 본질은 '세 변들 사이에 공간을 담고 있는 도형'이고, 이것은 삼각형의 모든 속성들의 근원이자 그것의 본질이다. 이런 점에서 양태의 경우에는 실재적 본질과 명목적 본질이 언제나 일치한다.

 

3.3.2 자연과학 비판

기하학의 도형과 같은 양태에 대해서는 지식이 성립하는 반면, 개별적인 실체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다. 양태에 대한 인간의 관념(명목적 본질)은 그것의 실재적 본질에 관한 것이므로 직관과 논증에 의해 확실하고 보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실체의 경우에는 실재적 본질과 명목적 본질이 매우 다르므로 체계적인 연역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개별적인 실체를 관찰과 실험으로 파악하는 자연철학은 실재적 본질을 다루지 못하므로 경험에서 형성된 믿음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는 과학이 될 수 없다.2

 

그렇다고 해서 로크는 이러한 믿음이 가치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로크는 믿음(또는 의견)이 체계적으로 탐구될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자연철학의 믿음들을 경험적 지식이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실체에 대한 로크의 관점은 불가지론으로 귀결된다.

 

4. 외적 대상의 성질과 인식

로크는 물리적 대상이 인간의 지각과 독립해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상이 인간에게 지각되는 방식과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고 보는 이른바 표상적 실재론의 관점을 표방한다. 그는 사물의 성질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설명한다.

 

먼저 '제1성질'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정황에서도 물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 어떤 변화나 힘이 가해져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성질들, 요컨대 물체 자체의 고유한 불변하는 성질들이다. 제1성질의 예로는 고체성·연장성·모양·운동성··용적·조직 등이 있다. 하지만 버클리가 지적하듯이 과연 이것들이 불변하는 고유한 성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반면에 '제2성질'은 대상 자체는 없지만 인간 안에서 다양한 감각을 일으키는 어떤 힘, 즉 대상과 주솬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성질이다. 즉 이는 주관적인 성질로서, 색깔·소리··냄새·촉감 등이 그 예이다. 즉 이런 구분이 엄밀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2성질은 '대상의 감각할 수 없는 부분들'이 주관에 영향을 미쳐서 관념을 야기시키는 것이므로 완전히 임의적일 수는 없다.

 

예컨대 붉은 사과를 볼 때 그것의 둥근 모양이나 크기, 무게 등은 제1성질에 해당한다. 반면 붉은 색이나 새콤달콤한 맛 등은 제2성질에 해당한다. 이때 붉은 색이나 새콤달콤한 맛은 그 사과에 내재하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며, 그 사과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 그러한 감각경험을 산출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뿐 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하면 지각하는 상황에 따라 감각경험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대개 인간은 흰 종이가 푸른 조명 아래에서 푸르게 보이나고 해서 그 종이가 푸른 색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색깔은 대상에 내재하는 고유한 성질로 본다면, 그 종의가 희면서 푸르다고 말해야 하는 모순된 결과에 도달한다. 그러나 로크식으로 설명하면, 그 종이의 색깔은 제2성질로서 햇빛 아래서 볼 대는 흰색의 감각경험을 산출하고 푸른 조명 아래서는 푸른 색을 경험하게 되며, 그 종이는 이러한 힘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제1성질에 해당하는 크기나 형태 등에 대한 감각경험은 대상이 실제로 갖고 있는 성질을 닮았으며, 또한 이러한 성질들은 측정이 가능하므로 대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크기나 형태는 고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로크는 인간이 지각하는 대상 자체가 지닌 것을 제1성질로, 감각경험을 산출하나 그 성질이 대상에 내재하지는 않는 것을 제2성질로 간주한다.

 

  1. 로크는 이를 주로 '힘' 개념이나 물리적 자극으로 설명한다
  2. 반면 로크는 도덕과 관련된 관념들은 양태이고, 인간은 양태의 실재적 본질을 알 수 있으므로, 도덕은 수학과 마찬가지로 논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로크는 수학의 명제들 못지않게 명증적 명제들의 필연적인 결과에 의해 윤리학에서도 선과 악에 관한 척도를 세울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도덕과학은 최상의 존재이자 전지전능한 최고선의 존재인 신에 대한 관념과, 신에 의해 창조되고 신에 의존하면서 지성과 합리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관한 관념에 근거해서 성립한다. 결국 기하학의 관념 못지않게 도덕관념도 확실한 지식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존로크의 정치철학>

로크는 정치·사상적으로 혼돈과 변혁의 시기였던 근대 초기에 살면서 근대정신의 토대를 정초한 철학자이다. 로크의 사회·정치사상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프랑스혁명정신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민권, 사적소유의 인정, 종교적 관용, 개인주의의 신봉 등 로크의 정치사상은 그저 17,18세기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실 그는 현대인의 앎과 삶의 형태를 규정한 초기 계몽철학자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미 생존해 있을 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들었고, 아직도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로크는 현대 인류사회가 출현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중 한 사람이다.

 

1. 사회계약론

정치철학을 논하기 앞서 로크는 우선 모든 정치권력의 목적이 공공선에 있다고 천명한다. 그후 로크는 정치권력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를 고찰한다. 이는 그가 정치권력의 기원을 논하는 것이 곧 어떤 정치권력이 정당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즉 로크는 정부의 기원을 논한 것을 통해 정치권력의 본질과 존재가치를 규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태초에는 만인이 평등했으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저마다 마음대로 결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속박할지도 모르는 정치공동체를 스스로 결성하게 된다. 그것은 정치공동체가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인 자연상태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연상태에서는 모두가 저마다 옳다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시비가 일어날 경우 이를 공정하게 중재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심판관이 없어 모두가 불안안 상태에서 지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운이나 힘의 논리에 맡기지 않으려면 정치공동체를 결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단 정치공동체를 결성하는데 뜻을 세우게 되면, 제일 먼저 할일은 한데 모여서 살기로 약속하고, 자신이 보유한 권리 중 일부를 위탁하는 것이다. 여기서 '위탁'이란 이양이나 양도와는 달리 미리 정해진 계약조건을 이행하는 경우에 한해 조건적으로 권리를 위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단 권리의 위탁이 이루어지면, 시민들은 두번째로 다수의 의견을 물어 입법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등 정부의 기본체제를 갖추게 된다. 이때 입법부는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군주제·과두제·민주제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리고 끝으로 입법부가 법에 따라 행정기구를 만들면 정부는 행정과 외교 업무를 수행할 권한을 갖게 되고, 정부 설립에 필요한 기초작업이 완료된다.

 

1.1 절대주의적 사회계약론 비판

로크의 말처럼 정부가 본래 자유인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권리위탁'이라는 행위를 통해 세워진 것이라면, 정부의 권력이 절대적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로크가 자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주장을 입증하는 데 집착한 이유는 당시 절대권력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홉스를 비롯한 절대주의자들은 만약 정부가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이유로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파벌을 형성해서 내란이나 외침을 야기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물론 이는 이론적으로도 나름 납득할만한 주장이다. 정부가 시민의 건리를 완전히 이양받지 않으면 중요한 분쟁이 발생해도 이를 중재할 심판관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상태에 머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건적인 권리위탁은 정부의 설립목적 자체와 양립할 수 없다는 자가당착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절대주의자들의 논증에 대해 로크는 역으로 절대권력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대응한다. 로크에 따르면, 절대적인 정부를 세우는 일은 "여우가 무서워 사자에게 도움을 청하는"격이다. 즉 정부란 애초부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소한 편리를 위해 언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갈지 모르는 절대권력을 스스로 용인하는 행위는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로크에 따르면 자연상태는 홉스가 주장하는 '만인의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이 아니다. 만일 홉스의 말대로 자연상태가 고독하고, 비참하고, 괴롭고, 잔인할 뿐이라면, 절대권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로크는 자연상태가 단지 '불편'한 상황임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정치권력의 설립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것과 같다. 홉스는 다분히 비관적인 인간관을 가졌기에 절대권력론을, 로크는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견해를 가졌기에 권력제한론을 각각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회계약론자들에 있어 자연상태에 대한 이해와 바람직한 정치권력의 설정은 곧 인간성에 대한 그들 나름의 이해와 맥을 같이한다.

 

2. 자연권

설사 홉스와 같은 비관주의적 인간관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로크는 결코 절대권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로크는 홉스와는 다르게 인간본성에 대한 막연한 추측을 통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연법 사상에 의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로크는 스스로 원한다고 해도 모든 권리를 남에게 양도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로크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생존하고 번식할 의무를 가진다. 따라서 개인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유와 재산은 설사 그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1 이렇게 보면 절대적인 정부를 세우는 행위는 그 어떤 것보다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의 말씀, 즉 자연법에 반하는 행위이다. 설사 누군가 절대적인 정부를 인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양도하기로 약속했더라도, 그는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남에게 이양하려고 했으므로 그 계약은 무효라고 로크는 주장한다. 이렇게 로크의 정치철학에서 자연법이 수행하는 기능은 단지 제한주의의 옹호에 그치지 않고 정치권력의 한계에 대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즉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에서 정치공동체로 이행하는 과정을 일종의 계약행위로 상정한다. 그런데 계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약속행위 외에도 전제되어야 할 여러 조건들이 있다. 우선 계약자는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가지고 계약할 수 없다. 따라서 홉스의 말처럼 절대권력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도, 자연권의 무조건적 이양이 자연권의 본질적 성격 때문에 개념적으로 모순이라면 절대왕권은 정당화될 수 없다. 로크는 바로 이 점에서 착안해 홉스류의 정치적 절대주의를 비판한다.

 

3 소유권 이론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고기와 음료 및 자연이 인간을 생존하도록 부여한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한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애초에 자신에게 필요한 몫을 확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로크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자신 의외에는 누구도 그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몸을 사용하는 '노동'과 그의 손을 사용하는 '작업' 역시 전적으로 그의 것이다. 그렇다면 로크는 자연이 제공해서 줄곧 자연 속에 존재해온 상태로부터 추출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자기가 소유하는 어떤 것과 결합하면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고 제안한다. 비록 애초의 자연 상태에서는 인류 공동 소유로 존재했지만, 그 사람이 그것을 추출하여 그의 노동을 결합해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면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이 공동 소유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즉 노동은 의문의 여지 없이 노동한 사람의 소유이므로, 일단 그 같은 노동이 결합한 것에 대해서는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이때 '노동을 섞는다'는 의미는 상당히 포괄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가 든 예를 살펴보면, 가축을 풀어 사육한 땅, 하인을 시켜 경작한땅, 자인이 판 광산등이 모두 노동을 통해 구축한 정당한 사유재산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른 '모든 생산물'과 최초의 생산물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땅에서 진흙을 추출하여 조각가에게 판매한 사람들의 경우, 조각가처럼 '창조적'이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자연이 준 물질에 자신들의 생각과 기술적 비법을 섞어서 유용한 제품을 만들었으므로 똑같은 '생산자'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그들 역시 천연자원에 자신의 노동을 섞어서 그 자원을 좀 더 유용한 제품과 서비스로 변환시켰기 때문에 '생산자'로서 그 소유권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4. 자연법적 국가관

4.1 정부의 목적

사람이 하느님의 피조물인 이상 모든 가치와 평가의 궁극적인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 즉 자연법이다. 그리고 자연법에 의해 사람들이 지니는 기본권이 '자연권'이다. 따라서 정치공동체는 그것이 자연법을 준수하고 자연권을 보존하는 한에서만 정당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자연법이고, 어디까지가 자연권인가? 로크는 우선 자연법의 목적은 "인류의 보존"이며 정부의 목적은 공공선의 유지와 보존에 있다고 주장한다.

 

4.2 정부의 역할

인류의 보존과 공공선의 유지·보존은 개인의 '자산', 즉, 생명과 자유(개인의 사유재산권을 포함)의 보호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정부는 개인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의 자산을 넘보거나 침해한 자를 처벌할 형사적 책무를 갖는다. 그러나 정부의 책무가 모두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부는 시민이 곤궁에 처했을 때 살아남도록 도울 책무도 지고 있다. 이는 역으로 시민이 정부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4.2.1 사유재산권의 부분적 제한

로크는 이러한 시민복지를 위한 재화를 마련하는 근거로서, 사유재산권을 일부 제한하고 있다. 로크에 따르면 사유재산권의 취지 자체는 여전히 인류의 공영에 있으므로 자연법의 기본정신과 배치될 수 없다. 즉, 사유재산을 지나치게 많이 보유해서 보유자 자신에게조차 무가치해지거나 남이 가질 것이 남지 않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곤란하다. 이에 로크는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타인에게 충분할 만큼 많은 것이 남아 있는 정도로 제한한다. 만약 누군가 탐욕이 지나쳐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보유함으로써 남에게 '간접적인' 피해를 입힌다면, 그는 남의 몫을 빼앗은 사람과 같기에 정부를 포함한 모든 이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4.3 정부에 대한 민주적 견제

로크는 자연법의 적용범위를 시민간의 분쟁해결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시민의 복지까지 확장함으로써 정부가 시민의 사유재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로크의 의도는 '큰 정부'의 정당화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로크는 정부의 개입을 상당히 인정하면서도 자연법을 통해 정부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는 그가 개인의 사유재산을 정부가 부당한 과세 등의 방법으로 갈취하려는 경우 반드시 국회나 시민대표의 동의를 요한다는 조항을 강조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로크는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권역이 상당함을 인정하면서도 정치권력의 사용을 정당한 민주적 절차에 준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크면서도 정당한 정부 설립을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4.4 시민혁명의 당위성

모든 정부가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로크에 다르면 행정부는 입법부의 동의 없이 법을 제정 또는 변경할 수 없다. 입법부가 국가의 최고기관인만큼 행정부가 월권하거나 부패한 경우, 전자는 후자를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입법부가 부패한 경우 이를 해체할 상위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입법부의 부패를 제도권 안에서 법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따라서 로크는 부당한 입법권력의 횡포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혁명을 꼽는다. 이는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킬 권한을 갖고 있고, 이를 인지하고 있으며, 그럴 가능성이 있어야만 정부가 시민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그들을 수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내란과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혁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로크에게 있어서 정부란 주어진 조건하에서 일정한 권리를 위탁받은 한시적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가 부패하여 자연법을 따르지 않는 경우, 모든 계약은 무효화되고 이에 따라 모두가 계약 이전의 상태, 즉 자연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부 설립 이전의 상태와 다른 점은 단지 정부를 세우기 위해 결성되었던 정치공동체가 여전히 존속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러한 정치공동체의 존속은 한편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로크의 혁명은 잘못된 위정자를 뽑았던 정치공동체가 그를 새로운 위정자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2

 

4.4.1 시민혁명에 의한 혼란 우려에 대한 반박

로크가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어떻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인가가 아니라 혁명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혼란이나 이에 대한 우려를 어떻게 불식할 수 있는가였다. 로크는 다시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로크는 사람은 어느정도 이기적이며 편향적이라고 이해했다. 사실 애초에 정부가 필요한 것도 이러한 이기성과 편향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을 다소나마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자연상태에서 이기적이고 편향적인 사람들이 정치공동체를 만든 뒤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설사 정부가 부패해도 사람들이 쉽게 혁명에 가담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직접 해가 돌아오거나 또는 봉기해도 실패할 가능성이 큰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관습에 젖기 쉬워 기존질서의 와해를 두려워하며, 설사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곧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어 무정부적 혼란이 야기될 가능성은 거의없다. 결국 혁명이란 그렇게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것도, 발생한다고 해서 반드시 혼란이 야기되는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에 덧붙여 로크는 설사 혁명이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고 해도 부패한 정권하에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주장한다. 그는 혁명보다 더 나쁜 것이 억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실질적인 혁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 경우에만 이룰 수 있다. 만약 민중에게 주권을 돌려주는 것이 평화를 깨트리고 내란을 일으키는 일이라면, 그때의 평화는 억압과 폭력, 불법과 약탈로 점철될 평화일 뿐이다.

 

5. 정교분리와 종교적 관용

로크는 유신론자이면서도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다. 로크에 따르면 기독교의 본질은 신앙의 자유에 있다. 예수의 실재나 삼위일체와 같이 기독교 교리 중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각자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믿고 숭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견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설득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로크가 인식론적으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한계를 분명히 지각하고 있었으며, 이에 더해 오직 자발적인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을 이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로크는 종교전쟁또한 관용이 아니라 탄압 때문에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즉,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강제로 통합하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불어 로크는 당시 영국 국교회가 겉으로는 평화를 위해 종교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구호는 지배권력을 얻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며,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갈취하고 권력을 키우기 위한 속셈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즉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이교도집단을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뭉치게 하지만, 관용은 이들의 힘을 분산시켜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될 소지를 줄인다. 이렇듯 만약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통합보다는 관용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로크의 생각이다.

 

5.1 무신론 비판

그렇다고 해서 모둔 경우에 관용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관용의 실천 역시 자연법에 준해 이루어져야 하므로 공공선을 위반해서는 곤란하다. 로크는 공공선에 반하는 종교적 행위의 사례로 비합리적인 종교의례와 무신론을 든다. 예컨대 식량이 귀하게 된 경우에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의례는 공공선에 위배된다. 한편 무신론에 의한 신의 부정은 결국 선의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공공선에 위배된다. 신에 대한 공격심과 두려움이 없다면 당위적인 요청, 즉 관용과 공공선 그리고 계약은 효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공공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데, 이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로크에 따르면 도덕률에 있다. 그러나 도덕률 자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아무런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무신론자는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간다고 볼 수 없는 존재이다. 이처럼 무신론자를 야수와 마찬가지로 모든 규칙이 무의미한 존재이며, 따라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 없고 권리를 가져서도 안된다고 해석한 것이 근대인으로서의 로크의 한계중 하나였다. 아무튼 로크는 종교의 목적 역시 여전히 자연법에 명시된 인류의 공존에서 찾았다.

 

6. 비판

공동의 선을 보장해주는 국가를 주장하는 로크의 국가관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의 소유권이론과 자연법이론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 국가는 그 국가에 소속된 시민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전 인류의 권리와 자유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즉 로크의 국가론은 국가이기주의, 식민지 경영을 합리화하는 구 제국주의와 매우 친숙한 이론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에 로크의 국가론을 배제하고 물적소유권이론과 자연법이론만을 인정하며 로크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18세기경 영국의 급진적 휘그파들 보다 합리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국민은 정당하게 혁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견해를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이 기본적으로 공공선을 목표로 한다는 전제를 잡음에 따라) 국가이기주의의 뱡항으로 흘러간 로크에 비해, 이들 급진적 휘그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는 항상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고 이론을 수정함으로써 국민을 외국인보다 우월한 지위에 둔 로크의 국가관 보다 자연법과 잘 어울리는 국가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국가가 반드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면, 시민들은 정부를 언제나 감시와 경계하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제국주의적 확장정책또한 표면적 목적은 국민의 상업권 확대등에 둘지라도, 그것이 실제로는 국민을 침해하는 행위에 불과하므로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즉 국권과 국부 증대를 도모하는 이전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책에서 탈피하여 다른 모든 나라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게 하는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로크의 자연법에서 도출될 수 있는 진정한 국가의 올바른 방향인 것이다.3

 

7. 요약

로크의 사회·정치사상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그것은 민권에 기반을 둔 사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로크의 이론이 규범적 정당성을 찾는 궁극적인 근거는 기독교에 토대를 둔 자연법 사상이고, 그의 논의방식은 사회계약론의 전통을 따른다. 그리고 그가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유나 종교적 관용을 권고한 이유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의 입헌민주주의를 정초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관점이나 맥락에 따라서 로크를 자연법 사상가나 자본주의의 옹호자, 또는 혁명주의자라고 분류할 수 있겠으나, 그러한 다양한 분류를 총망라해서 로크는 시민의 권익보호를 정부의 기능으로 삼고 이를 위해 제한적 입헌민주제를 옹호한 사상가로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죠지 버클리>

1. 사상적 배경

버클리의 철학은 대부분의 근대 철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세계의 운동과 변화, 구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타당한 전제로 받아들인 미립자론 세계관에 대한 반론이다. 미립자론에 의하면 세계는 무한히 넓은 진공 속에서 움직이는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립자들의 집합과 흩어짐, 운동에 의해 세계가 구성되며, 세계 안의 운동이 규정된다. 그러한 미립자는 신에 의해서 창조되어, 신이 정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운동한다. 미립자들은 그 자체로서는 질량, 단단함, 운동성, 파괴불가능 등의 성질만을 가진다. 또한 세계의 모든 것은 미립자들의 형태, 크기 질량, 운동과 미립자간의 상호 충돌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하나의 미립자가 다른 미립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호 충돌뿐이다. 따라서 미립자론 철학은 역학적 설명만을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주했고, 이를 통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립자론에 따른다면, 세계는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가진 사물들이 존재하는 표상적인 세계와, 그것들의 원인이 되면서 그것들 자체로서는 결코 지각될 수 없는 미립자로 구성되는 세계로 이분화된다. 그리고 이 괴리는 결코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인간은 오직 현상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재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이 타당한 것인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현상과 실재의 비교가 가능해야 하는데, 미립자론에 의하면 그러한 비교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버클리가 가장 불합리하다고 여겼던 것은, 위와 같이 오류로 휩싸여 세계를 이분화하는 견해가 철학과 과학의 주된 원리로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버클리는 당시의 과학적·기계론적 세계관, 그리고 이성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수학적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미립자론과 그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인 표상적 실재론이 사실 세계를 장막으로 둘러싸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인간으로 하여금 회의주의, 무신론, 반종교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에서 신은 창조자로서의 역할만 하고 뒤로 물러앉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 세계는 신의 섭리 없이도 기계적 법칙에 의해 운용되므로, 인간은 그것을 파악해서 이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즉 이 세계를 신과 관련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근대적 사고는 결국 세계와 분리된 신을 추방하여 이 세계를 절대화하게 만든다. 버클리는 이러한 근대적 세계관에 의해 무신론·무신앙·반종교의 성향이 팽배해지며, 종교의 쇠퇴는 도덕의 타락을 가져와서 악의 원인이 된다고 우려했다. 버클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항하여 과학과 종교의 갈림길에서 종교를 옹호하고 과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뉴턴과 로크를 표적으로 삼는 한편,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 논리적으로 극단에 밀고나가 표상적 실재론의 모순을 드러내고, 극단적인 경험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2. 물질적 실체의 부정

버클리의 철학은 경험주의를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경험주의의 체계를 완고하게 구상한 버클리 철학의 핵심적인 주장은 물질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의 이런 주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오해를 받았다. 버클리는 자신의 관념론이 과학에 상식 모두에 모순된다는 반론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변했다.

 

2.1 의미론·인식론적 논증

물질적 실체를 부정하는 버클리의 논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버클리는 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은 관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관념을 그것이 생겨나는 종류에 따라 감각에 의한 것과 마음의 작용1에 의한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가지 관념들이 서로 동반되어 나타나게 되면 그것들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보통 하나의 사물이라고 간주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맛과 향, 색, 형태와 단단함 등이 함께 관찰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구분되는 사물로 간주되고 '사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크가 감각에 의한 관념의 원래적인 대상이 인간 외부에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데 비해, 버클리는 감각에 의한 관념들도 오직 마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버클리에 따르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또한 사물은 마음 또는 생각하는 것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버클리는 사물을 '지각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지 지각되지 않는지를 따져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각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사물이 존재한다'이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쓰일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버클리는 지각된다는 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관념일 수 밖에 없고, 관념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령 물질적 실체 개념이 유의미해서 마음과 무관한 물리적 대상들이 논리적으로 있을 수 있다고 상정하고, 그 가능성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이 참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인간은 단지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관념들을 직접 알 수 있으므로 감각에 지각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들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버클리 철학의 대전제가 의미하는 바이다. 즉 인간은 추상적인 실체와 그것의 제1성질들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물질적 실체개념을 상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경험적이며, 공허하다.

 

2.2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 부정

버클리는 표상적 실재론의 이론적 근거인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을 부정한다. 표상적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제1성질은 물질적 실체에 내재한 본질이지만, 제2성질은 물질적 실체와 인간 마음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관념이다. 제1성질로는 불변의 속성을 가진 연장성·형태·운동성 등이 있으며, 제2성질로는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른 주관적인 속성인 색깔·소리·맛·냄새·촉감이 있다. 여기서 버클리가 비판하는 지점은, 물질이 마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마음의 직접적 지각 대상인 관념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이다. 버클리는 소리나 형태, 크기, 색 등의 관념이 지각되지 않은 채로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즉 색깔과 같은 감각적 성질을 전혀 갖지 않는 연장성 따위를 추상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고 반박한다. 즉 버클리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은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버클리에 따르면 제1성질과 제2성질이 모두 외부에 있거나, 모두 마음속에 있거나 둘 중 하나만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버클리는 제1성질 역시 제2성질처럼 마음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제1성질이든 제2성질이든 모두 지각자의 주관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물체가 한 손에는 차게, 다른 한 손에는 뜨겹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두고 온도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고 여긴다면, 지각자의 위치에 따라 동일한 물체가 크거나 작게 또는 운동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크기나 운동과 같은 제1성질 역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둘을 구별할 절대적인 근거는 찾기 어렵다. 요컨대 로크가 관념들은 마음안에 있지만 그것의 원형인 성질은 대상 안에 있다고 말하는 데 비해, 버클리는 물리적 대상의 모든 성질을 '관념' 곧 경험의 내용으로 설명한다. 성질을 관념적으로 해석하는 그에게는 제1성질과 제2성질 모두 마음에 의존적이기에 구분이 무의미하다.

 

2.3 추상관념(보편자) 부정

추상관념이란 물질적 실체가 감각적 성질을 전혀 갖지 않는다고 상정함으로써 제시되는 개념이다. 즉 이는 서양철학에서 전통적으로 보편자, 혹은 이데아라고 불린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2 이 추상관념, 다시 말해 보편자의 존재와 인식은 서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였으나, 버클리는 이것의 존재를 부정한다.

 

버클리에 따르면 초상관념이 철학적 문제로 대두된 이유는 그저 언어 남용의 결과에 불과하다. 즉 버클리는 언어에 한 사물 이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일반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특정한 사물의 본질을 언어로 추상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부인한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보편자를 언어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빗각 삼각형도 직각 삼각형도 아니고 등변 삼각형도 부등변 삼각형도 아니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이면서 어느 것도 아닌 것'으로 서술된다. 이렇게 추상관념이 포함해야만 하는 특성들은 질적으로 다양한데, 그 요소들을 동일한 관념에, 동일한 언어에 모두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인간은 떤 움직이는 대상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운동'을 생각할 수 없으며, 형태가 없는 '크기'를, 물질이 없는 '색깔'을 생각할 수 없다. 즉 인간은 보편자를 생각할 수 없을 뿐더러, 실체가 결여된 독립적인 본질또한 생각해낼 수 없다.

 

그러나 추상주의자들에 따를 경우, '삼각형의 본질', '운동의 본질', '크기의 본질', '색깔의 본질' 따위를 언어적으로 표현하여 추상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는 모순을 낳을 뿐만 아니라,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추상관념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또한 버클리는 비철학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고과정에서 추상관념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추상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훌륭한 검증된 증거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버클리에 따르면 추상관념은 단지 한 언어로 정확히 한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학자들에게 국한된 허상이다.

 

보편자 개념이 없다면 어떻게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으며, 외부의 사물이 없고 지각적 사물만 존재하면 이 세계는 어떻게 연속성을 같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버클리는 기독교적 신 개념을 이용해 대응한다. 이런 점에서 버클리는 인간이 유신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3. 결론

버클리는 주로 자신에 앞서 전개되었던 철학들, 특히 로크의 핵심적인 개념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켜 나갔다. 버클리는, 물질 등의 개념을 목표로 해서 그것들이 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들로부터 불합리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앞서 설명되었듯이 로크 등의 미립자론과 표상론에 의하면 세계는 지각되지 않는 '진정한' 세계와 지각되는 경험 세계로 이분화된다. 버클리가 물질을 부인하는 기본적인 의도는, 경험되는 세계와 '진정한' 세계 사이의 균열을 다시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각되지만 실제적이지 못한 세계와, 지각되지 않지만 실제적인 세계를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것이 버클리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는 자신이 제시한 원리, 즉 물질의 부인과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원리가 수용된다면 세계는 인간에게 그 모습 그대로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클리에 의하면 경험적 영역 너머에 존재하면서 경험적 영역을 규정하는 물질의 세계는 없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가 바로 실제적인 세계이고 세계의 전체 모습 그대로이다. 인간의 능력은 세계를 그 자체의 모습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물질이라는 개념을 상정한 로크는 세계의 진정한 질서는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물질은 세계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며 불필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버클리가 물질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세계의 질서와 인간 사이에 놓인 '막'을 제거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물질의 부인을 통해서 버클리는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질이 부인되는 순간, 인간의 경험 너머에 존재하면서 경험 세계를 규정하지만 지각되지는 않는 세계는 사라진다. 경험적 세계의 질서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안에 있다. 다시 말해 버클리 철학은 당대에 특수하게 규정되었던 물질 개념을 부인함으로써, 구체성의 추구와 경험적 세계의 실재성을 강조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버클리는 회의주의와 무신론,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던 물질적 실체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인간 앞에 펼쳐지는 감각적 사물세계의 지위를 원상 복구시켰다. 그는 자신의 관념론이 인간에게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세계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책이나 탁자같은 사물들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거나 또는 그 본성이 물질적인 특성이라는 것은 부인한다. 버클리는 책이나 탁자같은 사물들이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언어의 일상적 용법과 어긋나게 사물 대신 관념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물론 그것들은 사물이지만, 사물이라는 단어가 보통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관념뿐 아니라 사유하는 실체까지 다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클리는 감각적 대상이 정신 속에만 존재하며 비사유적·비활동적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관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1. 로크에 따르면 '반성', 기억과 상상에 의한 것을 포함한다.
  2. 예컨대 '나무'(물질적 실체)에서 주관적인 감각적 성질(벌레에 의해 갉아먹힌 잎 등)을 제거한다면, '나무'를 '나무'로서 만들어주는 보편적인 본질만 남을 것이다.

     

<데이비드 흄의 인식론>

흄의 철학을 배제하고 현대철학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가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완전히 부정하고 직관에 대한 호소와 경험을 신뢰하며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철학에 적용하는 등 현대 철학의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근대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영미철학의 시조라고도 불릴 수 있다. 특히나 실체 혹은 신과 같은 개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기존의 경험론자(로크, 버클리)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적 방법론과 경험론을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나뉘어지는 수많은 근대철학의 입장들 중 최고의 경험론자이자 가장 철저한 근대정신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현대 철학에 있어서 논리실증주의, 초기 언어철학, 대다수의 메타 윤리, 공리주의, 의무론, 자유주의, 반-형이상학과 형이상학의 대입 같은 다양한 입장에서 흄의 입장은 어찌 되었건 한번은 반드시 거치는 입장이다. 비록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대인들은 흄 없이 철학을 진행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철학의 과제

흄은 기본적으로 데카르트가 제시한 인식론의 과제, '확실성의 추구'라는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의 철학을 전개한다. 흄 철학의 목적은 인간 마음의 몇몇 뚜렷한 작용들, 즉 사고·지각·믿음·느낌 등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인간의 마음에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흄은 이러한 목적을 둔 자신의 철학을 "인간본성학"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이 인간학은 사고하고, 믿고, 지각하고, 느끼고, 언어를 사용하는 등의 인간 활동을 '물리적 주제들'로 간주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흄은 인간의 행동을 생물학이 아니라 도덕철학로 파악하고자 했다.

 

인간학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채택이다. 이것은 그의 대표작인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의 부제인 《추론의 실험적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려는 시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실험적 방법'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경험과 관찰에 의해 보장·지지되는 결론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연주의적 입장은 데카르트가 채택했던 합리론의 입장과 대조된다. 데카르트는 과학을 제1원리로부터의 증명으로 보았다. 그러나 흄은 과학을 순수 연역적으로 이해하는 합리론적 견해를 거부하고, 과학 및 과학적 지식의 구성에 있어 경험적·실험적 개념을 옹호했다. 즉 흄은 자명한 제1원리에 근거한 궁극적 설명 또는 정당화를 추구하는 합리론적 방법론에 관해 그러한 설명이나 정당화를 애초에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2. 인식론

경험론자로서 흄은 인간의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로크가 이러한 경험을 뭉퉁그려 '관념'이라고 칭한데 반해, 흄은 경험의 내용, 다시말해 인간이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등의 정신활동들을 '지각'라고 불렀으며,1 다시 이러한 지각 개념을 인상과 관념으로 구분하였다. 흄에 따르면 사실적인 지식은 감각경험, 즉 '인상'에 근거해야 한다. 관념들의 인상을 추적하는 일이 바로 흄의 인간학의 출발점이다

 

2.1 인상

인상이란 인간이 무엇을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구하고 혐오하고 등등 의지할 때 갖게 되는 경험이다. 흄은 이런 경험을 '생생하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즉 인상은 인간이 경험하거나 상상할때 그 대상이 되는 것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가 어떤 모임에 참석중일 때, 이때 '나'의 감관에 느껴지는 여러가지 감각들이 바로 흄이 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모임에서의 발표자와 청중들의 표정, 귀를 자극하는 스피커의 소리, 앞사람에게서 풍기는 특정한 냄새, 음료수의 맛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2.2 관념

만약 '나'가 집에 돌아가서 모임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할 경우, 이 때 기억의 대상들이 흄이 말하는 관념이 된다. 이 관념들은 '나'가 모임에서 실제로 가졌던 인상들과 대체로 유사하겠지만, 그 인상들만큼 생생하지는, 즉 분명하거나 자세하지는 않는다. 즉 인상이 관념보다 더 분명하고 자세하다. 이런 의미에서 흄은 관념을 인상의 복사물이라고 말했다. 흄에 따르면 인간의 관념은 모두 인상의 복사물이기에 본유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주장이 인간이 인상으로서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의 관념을 가질수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황금산에 대한 인상을 가져본 적이 없어도 황금산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흄은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구분한다. 단순관념은 색깔이나 모양과 같은 것에 대한 관념, 즉 더이상 부분들로 나뉠 수 없는 관념으로, 인상없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복합관념은 단순관념들의 결합물이다. 따라서 이는 인상없이 가질 수 있다. 예컨대 황금산에 대한 관념은 '황금'과 '산'이라는 단순관념(물론 복합관념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으로 이루어진 복합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즉 흄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관념을 생각 속에서 여러 구성요소들로 나눌 수 있으며, 이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인상들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관념은 그에 앞선 인상에서 나온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은 색깔에 대한 시각인상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빨강이라는 색의 관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런 설명을 뒷받침한다.2

 

2.3 사고의 흐름

흄은 유사성, 근접성, 인과성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관념연합을 제시함으로써 어떻게 인간이 하나의 사고에서 다른 사고로 옮겨가는가를 설명한다. 만일 두 사물이 서로 유사하다면, 한 사물에 대한 인간의 사고는 자연스럽게 인간을 다른 한 사물에 대한 사고로 이끈다. 예컨대 '나'가 피카소의 그림을 볼 때, 나의 사고는 자연스럽게 피카소에게로 이끌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 사물이 시공간적으로 근접한 경우, 즉 서로 가까이 있는 경우에도 하나의 관념은 다른 하나의 관념으로 옮겨간다. 예컨대 '나'가 집의 부엌을 생각할 경우, 나의 사고는 쉽게 그 옆에 있는 거실로 옮겨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 사물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됨으로써 서로 관련된다면, 원인에 관한 사고는 인간을 그 결과에 대한 사고로 이끌 것이다. 예를 들어 '나'가 내 발등에 망치가 떨어지는 관념을 떠올린다면, 이 관념은 아픔에 원인이기에 나의 사고는 곧바로 아픔의 관념으로 옮겨갈 것이다. 관념과 인상의 구분, 그리고 세 가지 관념연합의 원리로 근거로 흄은 자신이 인간 마음의 모든 의식작용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3. 인과론

'인과성'은 추리나 신념 등 합리적 이성의 근간을 이루는 아주 기본적인 주체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철학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흄의 철학에서 인과론의 문제는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많이 논의될 만큼 흄 철학의 독창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제이기도 하다.

 

3.1 인과성의 정의

보통 인간은 사물이나 사건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음을 굳게 믿고 있다. 가령 당구공으로 다른 당구공을 맞히면 그 맞은 당구공은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흄은 이런 믿음의 실체에 대해 탐구한다. 먼저 흄은 인과성을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가 보여주는 성질"로 정의한다. 당구공 하나가 다른 당구공에 부딪히면 다른 하나가 움직이게 된다. 여기서 두 당구공 사이에 인과적 성질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두 개의 사물이나 사건이 이런 성질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그 두가지에 대해 인과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신념이 아주 강할 때 인간은 인과성에 대한 믿음, 신념을 갖게되는 것이다. 즉 인과적 신념은 추론의 결과로 얻어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원인이 되는 한 사건의 관찰로부터 '결과'라고 불리는 다른 사건으로 또는 그 반대방향으로 추론하여 얻은 신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신념은 추론에 기초하므로 성격상 추론적이라 할 수 있다. 즉 흄에 따르면 사실문제에 관한 인과성들은 사실 인간의 감각경험의 범위 너머에 있는 미래, 과거 또는 현재의 사건들에 관한 것이므로, 일종의 신념이다. '내일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살해당했다' 등의 신념이 그 예이다.

 

요컨대 흄에 따르면 한 대상의 존재 또는 운동이 다른하나의 존재 또는 운동에 의해 발생했다는 연결을 낳는 것은 오직 인과성 뿐이다. 즉 사실 문제에 관한 인간의 판단은 모두 인과적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인과성을 사실상 귀납에 대한 인간의 믿음(귀납적 신념)이다. 이는 현재를 넘어선 사실문제에 관한 추론이기 때문이다. 즉 인과성이란 인간이 직접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대상들의 존재들을 인간이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믿음이다.

 

3.2 인과성 분석

3.2.1 근접성·우선성·필연적 결합

흄은 인과성의 관념을 분석함으로써 인과적 성질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검토한다. 인과추론이 가진 성질은 이것이 현재의 지각을 넘어선 인과추론의 유일한 경험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인과적 관계의 최초의 두 성질은 근접성(시공간적 접근성)3과 우선성(결과에 대한 원인의 시간적 우선성)이다. 가장 기초적인 원인과 결과는 시공간적으로 근접해 있으며, 원인은 결과에 시간적으로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성질은 너무나도 기초적이기 때문에 이 두 성'결과에 대한 원인의 시간적 우선성질만으로는 인과성을 분석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어서 흄은 인과성에 관한 인간의 관념에서 더욱 중요한 성질인 '필연적 결합'을 발견한다. 이 관계는 앞서 언급한 다른 두 성질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 대상을 지각하고 이것과 필연적 결합의 관계에 있는 다른 대상을 알아야만 지각된 원인에서 지각되지 않은 결과로 사고를 이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당구공이 '저' 당구공에 맞으면 '저' 당구공이 '반드시' 움직이리라 믿기 위해서는, '이' 당구공과 '저' 당구공이 가지는 필연적 결합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즉 흄에 따르면 '반드시'가 인과관념의 핵심이다.

 

그런데 흄에 따르면 이 필연적 결합의 관념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이 관념에 대응하는 인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공이 실제로 부딪치기까지는 둘 사이의 필연적 결합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당구공을 다른 당구공을 향해 치면서 이 당구공이 저 당구공을 반드시 움직이게 하리라고 예상은 하지만, 예상하는 그 순간에 두 공의 충돌을 직접 관찰하는 것, 다시 말해 두 공의 충돌의 '관념'에 대한 '인상'을 곧 바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흄은 이것을 찾지 못함으로써 첫번째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3.2.2 항시적 동반

흄에 따르면 필연적 결합이 인과성의 필수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당화할 근거가 없다는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근접성과 우선성의 경우 단일한 사례의 인과관계만을 직접 조사함으로써 도출할 수 있는 성질이지만, 필연성의 경우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필연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개별적 사례에서 집단적 사례로 관심대상을 전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과거에 겪었던 경험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모든 사례들이 늘 이전의 사례를 수반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근접과 연속이라는 규칙적 질서 안에서 발생해온 것을 기억한다. 이렇게 인간이 기억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흄은 '항시적 동반'이라는 매우 중요한 인과적 성질이 있음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과거의 두 사건들 사이에서 인과적 관계를 경험했을 경우, 그리고 지금 그 중 하나의 사건을 관찰할 경우, 인간은 자동적으로 다른 하나도 발생하리라도 믿게 된다는 것이다. 흄의 용어로 말하면, 인간의 마음은 하나를 관찰하는 것에서 아직 관찰되지 않은 다른 하나의 신념으로 이전한다.

 

3 자연의 일양성(물리적 외부대상의 존재에 관한 검토)

흄에 따르면 인과성의 속성들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자연의 일양성(Uniformity)'4이라는 원리를 근본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인과성은 과거의 규칙성을 미래로 투사하는 것, 즉 물음의 대상이 관찰을 넘어선 존재들의 발생과 운동에 대한 추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적 외부대상들이 당연히 존재하고, 그것들이 일관성있을 경우에만 인과성을 타당한 성질로 인정받을 수 있다. 예컨대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과 충돌할 때, 이 충돌이 다른 공의 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은 자신이 관찰하지 못한 사건들이 과거에 관찰했던 사건들과 유사하다는 신념에,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자연의 일양성'에 대한 나의 신념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흄에 따르면 만약 자연의 과정은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칠 경우, 인간은 인과성에 대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이어서 흄은 철두철미한 경험주의적 인식론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자연의 일양성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원리인지, 아니면 인간이 추종하는 신념에 불과한지 묻는다. 흄에 따르면 자연의 일양성을 정당화하는데 있어서는 '증명에 의한 논증'과 '관찰 및 경험에 기초한 논증'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흄에 따르면 우선 증명에 의한 논증, 즉 이성에 기초하는 자연의 일양성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연의 과정에서 변화가 존재함을 이성에 기초해 근거지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러한 증명은 거짓이어도 아무런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연적인 참이 아니다. 자연을 일관성이 없는 카오스로 규정하거나, 제논처럼 변화나 운동을 부정하는 논증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일양성은 경험을 넘어선 사실추론의 영역이다. 따라서 관찰과 경험에 따른 개연적 고찰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경험되지 않은 것이 경험된 것과 유사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개관적 근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흄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인간이 경험했던 대상들과 인간의 발견 영역 너머에 있는 대상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가정할 뿐이지 결코 입증할 수는 없다. 즉 개연성이란 인간이 경험한 대상들과 경험하지 않은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의 가정에 기초하는 성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은 경험 너머에 있는 사건들에 관한 그 어떤 신념에 대해서도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모든 관념들은 서로 상이하고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관념도 궁극적으로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립된 것들이다. 따라서 인과성은 경험적으로 확신하지 못하고, 명증적으로도 확실하지 못하다. 이렇듯 흄은 외부대상의 실재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결론에 이른다.

 

3.1 인격의 동일성 문제

모든 관념이 궁극적으로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흄은 단순불변하며 항상 동일하다고 생각된 마음의 존재도 부인한다. 흄에 따르면 인간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관계에 의해 결합된, 즉 막연하게 완전한 단순성 또는 동일성으로 추정딜 뿐인 상이한 지각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흄은 이 지각들이 연관된 집단이 하나의 사고하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발이론을 제시한다.5

 

3.4 인간의 자연적 성향

흄은 인과추론이 이성에 기초한다는 견해를 부정한다. 그러나 흄의 탐구는 단순히 파괴적인 회의론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해 흄이 주목한 것은 인과성이라는 개념이 객관적 원리가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인상을 갖지않는 정체불명의 관념 혹은 신념에 불과할지라도, 사람들은 어쨌든 인과성의 관념을 확고하게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결합을 확고하게 믿는다. 예를 들어 '내일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터무니 없는 소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처럼 지속적인 통일체로서의 자아의 관념 역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확고한 관념은 어디서 왔는가? 흄은 인과성이 궁극적으로 상상력 또는 마음의 어떤 자연적·본능적 경향성에 기초한다고 흄은 결론 짓는다. 이 자연적 경향성이란 '상상력'이나 '본능'과 바꿔 쓸 수 있는 개념으로서, 인간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근본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물이 인과적으로 움직인다는 신념, 그리고 자기동일성을 지닌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들도 결국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 경향성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이 근대 인식론이 주요주제들에 대한 흄의 최종 결론이다. 이 자연적 경향성 이야 말로 흄이 자신의 인간학을 통해 최종적으로 찾아낸 인간의 신념을 설명하는 궁극적 원리이자 근거이다. 즉 흄에 따르면 인과추리 또는 귀납은 마음의 지적 작용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이 주어질 때의 인간 마음의 특정한 자연적 또는 본능적 반응의 산물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이성에 뿌리박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은 합리적 논증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인간 마음의 본능적인 흐름이다. 따라서 오직 상상력이라는 말로만 이를 기술할 수 있다.

 

이렇게 인과성을 가진 외부세계의 근원을 찾는 흄의 경험론적 탐구는 인간 마음의 특정한 자연적 경향성을 확인하고 이 지점에서 인간본성에 관한 사실을 기술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4. 요약

기본적으로 흄은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설명 가능하다.'는 단순한 전제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인상'의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로크나 버클리와 같은 기존의 경험론자들이 관념으로 뭉뚱그려 설명했던 것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인상은 뚜렷하고 생생하며, 인식자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원초적인 지각으로서 감각(외부지각)과 반성(내부지각)에 의해 생기는 표상이고, 관념은 인상이 사라지고 난 후에 회상 또는 상상을 통해 생성하는 지각이다. 즉 '인상'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직접 받아들일 때에 얻게 되는 그 무언가이고, 관념은 그것을 간접적으로 받아들일 때에 얻게 되는 그 무언가이다. 이를테면 '나'가 보고 있는 이 컴퓨터 화면은 컴퓨터 화면의 인상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나서 이 화면을 떠올리게 될 때에 얻게 되는 그 무언가는 관념이다.

 

이처럼 관념은 인상의 복사물이라는 점에서부터 그는 경험적 세계에서는 반드시 적용되는6 '복사 원리'라는 하나의 입장을 이끌어낸다. 즉 인간이 가지는 모든 관념은 '경험 가능한' 개별적인 인상들에 기인하며, 이러한 인상이 없으면 관념도 있을 수 없다는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합리론쪽 철학자들이 내세웠던 수많은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죄다 거부한다. 즉 실체, 힘, 자아동일성, 충족 이유율과 같이 기존의 합리론자들이 선호했던 개념들은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인상도 가질 수 없으니 다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칸트 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이후의 철학자들이 상당 부분 공유하는 입장이며 이는 그가 근대 후반기를 열어젖힌 인물인 이유와 현대와 근대의 철학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회의주의에 도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흄은 자연과학의 근본이 되는 '필연적 인과'개념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인과성이나 사물들의 객관적 존재라는 관념에 정확히 상응하는 감각인상을 찾을 수 없기 대문에 이에 대한 지식은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기 대문이다. 즉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쳐서 밀어낼 때에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두 구체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이며, 두 당구공이 충돌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혹은 유사한 다른 사건을 여러 번 관찰함으로써 마치 어떤 법칙이 '있는 것 처럼'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적 법칙을 진리로 선언하는 것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다만 수 많은 사건으로부터 인과적 법칙을 추론해 내는 현상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따라서 과학 자체는 여전히 쓸모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러한 흄의 입장은 이후 자연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1. 흄 철학에서의 '지각'은 보통의 '지각'개념 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의 정신활동을 포함한다.
  2. 이와 마찬가지로(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관대함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없다.
  3. 여기서 공간적으로 두 대상이 근접되어 있다는 말은 두 대상 사이에 아무런 공간적 틈이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 두 대상 간에 공간적 틈이 없다는 말은 또한 무슨 뜻일까? 불행히도 흄은 '공간적 틈이 없다'는 말의 뜻을 더 이상 밝히고 있지 않으며, 이 대문에 근접성의 조건도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4. 귀납법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 새로운 경험의 출현에 의해 뒤집혀지고 불확실한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연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균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요청하는 것.
  5. 그러나 다발 이론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마음의 일관된 동일성이 전제되지 않고 마음을 단지 지각들의 집합이라고 보면, 동일한 경험은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습관이 형성될 수 없다. 또한 그는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이론에서 어떻게 기억이 가능하게 되는가도 의문시된다.
  6. 수학, 논리학, 대수와 같은 연역적 영역은 적용되지 않는다.

     

<데이비드 흄의 도덕철학>

. 상대주의

흄에 따르면 이성은 인간에게 목적에 대한 수단을 가르쳐줄 수 있다. 가령 폭넓은 인간관계가 미래의 인생항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이런 유용성을 발견할 때 도와준다. 또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참과 거짓을 구별해낼 수 있다. 예컨대 1+1은 2이며, 1+2가 4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은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흄은 선이 무엇인가, 즉 무엇이 그 자체에 있어서 옳고 그른지에 대해 따지는 문제에 있어서 이성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성을 통해 정당화할 수 있는 영역은 변동가능성이 있고 관찰가능한 것에 대해서만 국한되며, 필연적·절대적인 영역에는 접근할 수 없다. 그 예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인과성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원불변적인 도덕법칙이 설사 있더라고 쳐도 그것을 이성이 파악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이처럼 이성이 사실의 내용에 관해서 어떤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2. 도덕에 대한 탐구와 정당화

2.1 주정주의

이성은 흄에 의하면 이성은 전적으로 비활동적이며 가치중립적인 능력으로서, 어떤 행동도 유발할 수 없고, 어떤 의욕도 일으킬 수가 없다. 예컨대 매우 지적으로 박식한 사람이 도덕적, 양심적 측면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범인보다 뒤떨어지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듯 원칙적으로 흄에게 지식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즉 일반적 인식과 다르게 이성이 인간을 도덕으로 이끄는 마부 노릇을 한다는 주장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흄에게 있어서 도덕의 바탕은 이성적 도덕법칙이 아니라 도덕적 정서다. 즉 실천생활에 있어서는 인간의 정서적 성질이 이성에 대해서 우위를 갖는다. 심지어 흄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오로지 노예여야 하며, 정념에 종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직분도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하기 까지 한다. 물론 대상과 정념의 인과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지만, 근본적으로 행위의 충동은 쾌락과 고통에 대한 감정적 기대에서 나오기 때문에 절대적인 우열관계가 나뉘어지는 것이다.

 

2.2 도덕감

모든 정념 내지 정서가 항상 옳은 행위의 안내자는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정서는 이런 정념들 가운데 하나이며, 도덕적 정서는 고통이나 사랑과 마찬가지로 원본적 정서 중의 하나이고, 이성이 아니라 심정의 한 작용이다. 즉 흄은 덕이라고 하는 것을 보는 사람에게 기꺼이 시인하는 느낌을 주는 심적 활동이나 성질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사회일반에 대한 사랑 혹은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도덕적 감정이 일반적으로 가장 폭넓은 도덕적 시인을 받는 것이므로 가장 덕스러운 것이다. 즉 흄에게 있어서 인간의 도덕성이란 객관적이고 냉철한 것, 즉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느껴지는 감각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흄은 선이란 유쾌, 악이란 불편의 느낌을 준다고 정의한다. 도덕에는 두가지 구분이 있는데, 전자는 자연적 본능인 도덕감에 의해 발동되는 도덕1이며, 후자는 도덕감없이 사회적 의무감등에 의한 도덕2이다.3

 

다만 흄은 도덕적 정서를 선으로, 인간성을 이기성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흄은 누구나 남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즉 남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동정심의 범위를 넓혀갈수록,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이 심정의 작용은 인간구조의 보편적 원리이며 이 원리에 있어 모든 인류는 일치하고 공감을 갖는다. 왜냐하면, 어떤 한 사람이 갖는 인간성은 곧 모든 사람의 인간성이며 또 동일한 대상이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범위까지 동정심을 가지느냐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컨대 흄에 따르면 자신의 주관에 매몰된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시행착오를 통해 반성적으로 인위적 규약을 정하게 되는데, 그 반성하는 감정·정서가 도덕감이다. 도덕감은 자신의 유용성과 이해에 근거하여 쾌 불쾌를 느끼는 원초적 감정에서 후천적으로 발전된 것으로서 자신의 이해뿐만 아니라 공감에 기초하여 타인의 이해에도 설 수 있는 동정심·인간애가 있기에 객관성을 띤다고 보았다. 이렇듯 흄은 인간이 인간의 지적 능력의 빈약함과 사욕에 머물기 쉬운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동정심에 기초하여 스스로 규약 및 규제를 설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흄은 윤리의 영역까지 경험을 통하여 관련된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그는 어떠한 선천적 도덕규칙에 따르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라 하면서 질서의 근원을 절대선으로 환원시킨 전통적인 윤리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윤리학에서 흄의 역사적 의의는, 기존 사상에 의해 천대받던 정념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윤리적 주체로 만들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윤리의 주체는 이성이며, 이에 해를 끼치는 것이 정념이므로 이성적 사고를 강화하여 정념을 물리치고 완전한 윤리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철학의 대세적인 입장이었는데, 흄의 윤리학은 매우 반이성주의적으로, 이런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3 동정심

만약 흄이 말하는 도덕감이 보편적 도덕의 원리가 될 수 있으려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유발되는 도덕감이 사람이나 때에 따라 달라서는 안된다. 즉 타인의 유쾌와 불편을 '나'가 조금이라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으로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흄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과 쾌락의 감각 속에서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보편적 고통과 쾌락의 감수성을 가지게 만들어주는 동정심이라는 근원적 능력이 있다. 즉 흄은 타인이 느끼는 고통의 정념을 인간이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흄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의 원인이나 결과, 즉 고통의 외적 표현이나 그것을 유발하는 사물 혹은 현상들을 지각할 수 있음에 주목한다. 흄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개인들이 인간이라는 같은 종족의 보편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인간의 사고가 주관적일지라도 최소한의 동일성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타인의 외적 표현을 지각함으로써 타인의 심정을 똑같이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의 심정을 상상하고 짐작할 수는 있다. 이런 점에서 흄은 이러한 동정심이야 말로 도덕성의 참된 근거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도덕이란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물론 흄이 제시하는 동정심 개념이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성을 만족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객관적인 도덕 판단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 판단의 규범적 성격을 정당화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1. 가족애, 은인에 대한 감사 등
  2. 정의, 소유권 존중, 성실, 약속의 이행 등
  3. 흄과 칸트는 많은 부분에서 대립하는데, 이 부분또한 흄과 칸트의 대립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