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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역광/정복순

정 복 선


역광 속에 그가 앉아 있다
등 너머로 떨어지는 햇살
세상은 언제나 대숲에 던진 칼바람 소리
몇 천 밤을 걷고 걸었던가
다산茶山 기슭엔 정석丁石 자만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영하 밖에서 안쪽으로 퍼져오는 살얼음
안은 밖보다 어둡고
밖 또한 안보다 어둡다

어둠을 씻는 그는
책 한 수레 싣고 어디로
그 긴 유배의 죽음보다 더한
시퍼런 강줄기


어둠 속에 있었으나 못다 편
사랑 들끓으며
마음 속마저 어두웠겠는가
여유당 뜨락은 텅 비어


저물녘 쪽배를 저어간다 강화도에서 석모도쪽
겨울바다는 노을을 받아 찬란한 만큼
깊은 속 더욱 쓰라리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스스로 열지 않고서는
그 밤 안으로 죽을 것만 같은 고독


그곳엔 하루 종일 낙엽이 졌다
어제도 지고 오늘도 내일도 졌다
부끄럽고 부끄럽게 물든 속살
시나브로 시나브로 지고

벌레들이 툭툭 떨어지고
객지에서 객지로

 

아침이면 천지가 녹이 슬어
조금씩 조금씩 바스라져 내리는데
별들도 바스라지고


역광 속에
누군가 앉아 있다
대숲에 떨어진 단도가
썩어
죽순으로 돋아나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