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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유식불교의 종자설과 융의 원형론의 비교고찰/정현숙.수원대

<요약>

인간의 심층심리를 밝힌 유식불교와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종자설(種子說)과 원형(型)을 비교 고찰하였다. 유식불교의 인식론인 8식()구조와 아뢰야식을 바탕으로 종자설을 정의, 특성, 인과 및 윤회와의 관계, 훈습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융의 집단 무의식을 간략히 정리하고, 원형의 개념과 그 특성 및 기능과 꿈과의 연관성을 고찰하였다.

종자설은 불교의 종교적 무아(無我)와 윤회의 조화, 수행과의 관련에서 특성이 있으며, 원형론은 근대 서구 인간관인 합리적 학문의 바탕위에 무의식이 표출되는 꿈, 예술작품, 종교의식, 전설과 신화등에서 상징성의 이해를 제공한다는 특성이 있다.

이 둘은 심층심리의 핵심이란 점에서 유사하지만 종교적측면과 학문적 측면에서 상호 접근방법과 목표가 다름을 볼 수 있다.

핵심주제어 : 종자설, 유식불교, 이뢰야식, 원형, 분석심리학, 집단무의식.

 

<Abstract>

Comparison of the 'Seed' in Yogacara Buddhism with the 'Archetype' in Jung's Analytic Psychology

Chung Hyun-Sook

(Suwon University)

The 'seed' concept in Yogacara Buddhism, and 'archetype' in Jung's analytic psychology are compared. Based upon the epistemology of the Yogacare Buddhism, namely,the structure of eight conciousness level and the Alaya-vijinana,we considered the seed theory by the definition , properties, relations to the causality, the Karma, and the permeation. Jung's collective conciousness is briefly summarized, and the concepts, properties, functions and relations to dreams of the archetype are reviewed. The seed theory is characreristic in conection with the harmonious union of non-self and Karmic recycle of Buddhism, and religious practices, while the archetype is more concernedwith dream, arts, religious rituals, legendary and mythology for rational understanding of their symbolism. The 'seed' and 'archetype' theories are similar in their concern with the deep conciousness, but their methods and goals are different.

Key Words: Seed theory, Yogacara Buddhism, Alaya vijinana, Archetype, Analytic psychology, Collective unconciousness.

 

I.서 론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융(C.G.Jung)은 동양의 문화와 종교사상에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졌던 서양의 심리학자로 선()과 불교 일반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와 저술을 하였다.1)

분석심리학의 주요 개념중 집단 무의식은 프로이드가 처음 학문적으로 정립한 무의식의 개념을 크게 확장하고 일반화하여, 한 개인의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인류 전체에 통하고,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 차이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심층심리가 있음을 보인 것이다.

융이 발견한 인류보편의 집단 무의식은 유식불교(唯識佛敎)가 오래전에 내세웠던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연상시킨다. 유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인식체계를 감각과 관련된 5식( 안.이.비.설.신)과 이들 정보의 처리 기능과 감정 및 제반 사고 활동에 관련된 제6식(=의식意識)을 표층심리로 보았다. 인간의 심리활동은 이보다 깊은 의식되지 않은 심층심리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중 아상(我相)을 유지하여 '나'라는집착을 갖게하는 식()을 개인 무의식에 대응하는 제7식(=말나식)이라하고, 이보다 더 밑층에 놓여, 깊이 감추고 간직한다는 뜻의 아뢰야식을 제8식으로 상정했다. 아뢰야식은 집단무의식에 대응하는 가장 깊고 근원적인 식인데, 모든 인식과 생명활동의 근본이 된다고 보았다. 집단무의식과 아뢰야식은 가장 깊은 심층심리란 점에선 서로 상응되지만 상세한 점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2)

집단무의식에서 원형(型)은 태초의 인류로부터 현대의 도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에 공통되는 심리적 근본형으로, 신화, 전설, 종교의식, 예술, 대중문화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들의 근원이다. 이들은 개인의 꿈이나 예술작품의 형태로 그 존재가 드러나기도 한다. 아뢰야식에서는 과거로부터 미래에로 사건들의 연속적 일어남을 이어주는 것을 종자(種子)에 비유하여, 아뢰야식을 종자의 흐름이라고보았다. 종자 중에는 개인적 체험이 종자를 생하는 수도 있고, 또는 종자가 현재의 인식경험을 낳는 요인이 되기도 하며, 또는 원형과 같이 인류 보편적인 태초부터의 종자도 아뢰야식의 흐름에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집단무의식의 원형론과 아뢰야식의 종자설을 간략히 정리하고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고찰하였다. 두 가지가 심층심리의 주요 인자라는 점에서 상호 비교고찰을 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까지 융의 심리학과 불교의 비교가 일반적 수준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개별적 개념을 자세히 논의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유식불교와 분석심리학에 관한 일반적 고찰을 한 국내 연구로는 '불교유식학과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정신개념의 일 대비'3), '선불교와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정신의 전체성'4)의 논문이 있으며, 최동훈과 이부영은 불교 유식심리학의 개요를 적절히 요약 소개한 논문5)을 발표하였고,이부영은 아라야식과 자기와의 관계를 논한 '불교와 분석심리학'을 발표한 바 있다6). 이 방면의 박사학위논문에는 김성관교수의 '심성설에 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융사상의 비교고찰을 중심으로'7)와, 김명실의 '유식학의 심성구조에서 본 아동성격심리의 논리적 고찰'8)등이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유식불교와 융사상에 대한 전체적 비교 검토를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본 연구는 핵심 개념을 소주제로 잡아 상세한 검토를 하는 미시적 방법론을 시도하였다. 본 논문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원형론과 종자설을 구체적 예로 잡아 논의하였으며, 상호 차이점을 파악하도록 시도하였다. 이러한 작은 주제에 대한 상세한 비교고찰은 불교일반과 분석심리학을 비교하는 거시적 연구와 상보적인 관계로 서로 도움이 될 것이며, 동양 정신의 전통과 서구 학문의 업적의 융합 통일을 위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II. 유식불교의 인식론.

 

유식불교에서는 인식의 주체적 측면을 심왕(心王)으로, 작용대상 측면을 심소(心所)로 나누어 고찰했는데, 이 논고에서는 주체적 측면만을 고려한다. 인식 주체적 측면은 피상적 표층에서 심층(深層)을 향해서 8가지의 인식층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팔식(八識)설이라고 한다.

소승불교에서는 안. 이. 비. 설. 신 의(眼 耳 鼻 舌 身 意)의 6식만을 고려했었는데, 이것만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유식불교의 입장이다. 의식할 수 있는 6식뒤에 더 깊은 심층심리인 제7식 (말나식)과 제8식(아뢰야식)이 있으며, 실은 제8식인 아뢰야식이 모든 존재와 인식의 기저라고 보는 것이 8식설이다.

6식중 처음 5식은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하여 눈. 귀. 코. 혀. 몸으로 받아들이는 감각 작용을 의미한다. 제6식은 오성(悟性)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 즉 기억, 분별, 계산, 상상, 감정, 뜻 등을 의미한다.

전5식이 작용하는 기관을 근()이라고 한다. 안식(眼識)이 작용하는 안근(眼根)은 눈과 시각 신경이라고 하겠으나, 엄밀히 말하면 눈을 통한 보는 작용은 뇌 세포의 기능까지 포함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면 두뇌의 기능이라고 보는 제6식과의 명확한 분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른 감각의 식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근()을 물리적 감각기관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고 몸과 마음의 두 면에 지탱되어 있는 감각 기능의 요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5식의 대상을 경()이라 하며, 안식-색경(色境), 이식-성경(聲境), 비식-향경(香), 설식-미경(味境), 신식-촉경(觸境)이라 한다. 불교의 세계관 중에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하는데,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삶의 수준

에 따른 분류로서, 욕계에 사는 중생은 가장 낮은 차원인데 이곳의 생명들은 전오식의 감각에 의존하므로 오욕(五慾)의 욕망에 갇힌 삶을 산다. 색계, 무색계로 올라가면서 욕망이 점점 없어지는 선정(禪定)의 세계이며, 마음이 맑고 안정되는 세계이다.

논리학과 관련하여 전오식에 바탕하여 직관적으로 대상을 알고 판단하는 것을 현량(現) 이라 하고, 추리-사고에 의하여 사물을 인식 판단하는 것을 비량(比量) 이라 한다. 수행과 관련해서 전오식은 완전한 수행의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청정하게 되지 않는 반면 제6식은 오히려 먼저 단계에서 청정하게 변하기 시작하는데, 후자는 관념적인 것이기에 비교적 쉽게 이해되고 바꿀 수 있지만 (이른바 머리나 입으로만 깨침), 전오식의 청정은 실천과 체험의 인격성을 요청하기 때문에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제6식인 의식은 지. 정. 의(知 情 意)로 말하는 일상적 정신활동으로 전5식과의 관계에서 오구의식(五俱意識)과 불구의식(不俱意識)으로 나뉜다. 오구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함께 작용하는 의식으로, 예를 들면 안식이 대상을 보는 시각작용이고, 이 정보자료에서 지각 판단하는 정보처리 과정이다. 불구의식은 전 5식과 직접관련 없이 일어나는 상상적 정신활동으로 연상(聯想), 공상, 환상, 몽상, 꿈, 좌선중의 마경(魔境)등이 이에 속한다. 의식은 심리학의 거의 전 영역에 걸친 광대한 영역이지만 본고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부파불교 에서는 제6식까지만 마음의 세계로 인정했지만 유식불교는 제6식까지의 식은 피상적 세계이고, 이보다 더 깊은 근원적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나()'라는 의식의 뿌리는 피상적인 의식보다 더 깊은 속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라는 자기 중심적 사고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집착이 가장 심한 인자로서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라는 4번뇌를 항상 동반한다. 이를 제7식, 말나식(末那識) 또는 사량식(思量識) 이라 하며 염착된 의식이란 뜻의 염오의(染汚意)라고도 무른다. 제6식이 연속하지 않고 찰나생 찰나멸의 특성이 있는 반면 제7식은 간단없이 연속되는 심층심리로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즉 인간의 모든 심리활동이 무의식중에 자아의식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말하며, 자아가 있다는 아집(我執)이 가장 강한 본능적 집착이란 것이다.

말나식과 제8식인 이뢰야식은 둘다 간단없이 연속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말나식이 자기라고 집착하는 허구의 주체라면, 그 주체의 대상으로서 아뢰야식을 잡는다. 아뢰야식은 '장식(藏識)' 이라고 번역되며 ①능장(能藏) ②소장(所藏) ③집장(執藏) 의 세 가지 뜻으로성유식론에 제시되어 있다. 즉 아뢰야식은 제법을 종자의 형태로 갈무리하는 능동적 기능과, 일체의 종자가 갈무리되는 소의처(所依處) 로서의 기능과 말나식에 의해서 아()로서 집착된다는 뜻이다. 아뢰야식은 이러한 측면에서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이라고 부르며, 다른 측면에서 이숙식(異孰識), 근본식(根本識), 아타나식(阿陀那識) 으로도 불린다. '이숙식'은 전세의 선업과 악업의 성숙된 과보란 의미에서 쓰이는 아뢰야식의 인과적 측면인데,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다. '근본식'은 전오식과 제6식 제7말나식이 의지하는 근본이란 측면이다. '아타나식'은 상속(相續). 집지(執持)의 의미로서 개체의 중심에서 심신의 환경을 유지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생명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큰 강의 흐름에 비유되고, 그 이하의 식은 표면의 파도에 비유된다. 심리학적으로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에 가깝다. 파도는 생멸(生滅)이 있는 현상으로 중단이 있지만 강은 중단 없이 흐르듯, 개인의 생명으로 인식되는 의식은 표면상으로 생멸이 있으나 그 근본에 있어서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이것이 생명 현상의 근본이고, 이를 아뢰야식이라 한다. 즉 아뢰야식은 모든 생명현상의 연속적 근원으로 업()과 윤회(輪廻) 사상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생명의 연속성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상주불변의 아트만(個我)으로 오해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7말나식이 이뢰야식을 아집(我執)의 대상으로 삼는 점이다. 아뢰야식은 말나식이 집착하는 어떤 개체의 영속기반이 아니고, 인과의 종자(種子)가 폭류(瀑流) 처럼 흐르는 일체종자식 으로서의 생명과 현상 일반의 기본을 이룬다는 입장이다.

 

III. 종자설

 

1. 종자의 규정과 특성

 

인과와 윤회는 불교의 생명윤리사상의 핵심적인 기반을 이루고 있다. 현세의 생이 과거 전생과 내세 후생과 어떻게 연계되어 가는지를 유식사상에서는 종자설을 통하여 해명한다. 이뢰야식의 삼상(三相)인 자상(自相), 과상(果相), 인상(因相)에서 인상을 일체종자(一切種子)라고 하며 '유식삼십송'에서 "아뢰야식은 이숙이고 일체종자다"(제2송)라고 규정한 것과 같다.9)식물의 씨앗(종자)이 연을 만나면 발아하여 뿌리, 줄기, 꽃, 열매로 성장 발달하는 요인을 갖추어 있듯이, 아뢰야식에는 제법을 발생시키는 요인을 잠재태로 갖고 있으며 이를 종자로 비유한 것이다. 현재 개인의 심층 심리에는 과거 무수 겁의 생으로부터의 모든 경험이 종자처럼 잠재태로 축적되어 지속되거나 변화하여 발현한다고 보는 것이다.

'섭대승론' 과 '성유식론' 의 종자에 관한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10)

① 찰나생 찰나멸하는 무상법(無常法)임

② 종자와 그것에서 생한 과보인 제법은 동시인과의 관계에 있음

③ 끊임없이 항상 하나의 흐름으로이어짐(一流相續)

④ 종자 하나하나는 선.악.무기(無記)중 어떤 것인지 성질이 확정되어 있음

⑤ 많은 연()의 힘으로 발현함

⑥ 각 종자는 각각 자신의 과()를 지속함

이상의 규정에서 ⓛ과 ③은 종자가 식물의 씨앗과 같은 실체적 존재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찰나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에 형광판이나 텔레비젼 화면의 점처럼, 어떤 특성을 담지 하고 그것을 계속 이어주는(상속相續) 힘을 갖고 있으되 그 자체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종자' 라는 개념에서 취하고자 하는 것은 ②, ⑤와 ⑥에서 진술한 인과(因果)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이점을유가사지론'섭결택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자란 무엇인가? 제법을 분석하여 그 이외에 별도로 실물(實物)이 있어서 종자라고 이름하는 것은 아니다. 제법이 현재에 생하여 존재하는 상태를 혹은 종자라고 이름하고 혹은 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11).

그러므로 인과는 하나의 흐름을 종자와 과보라는 두 양태의 개념으로 나누어보는 것이며, 동력학적인 상태의 흐름 자체는 자류상속(自類相續)으로 자기 동일을 보존하여 지속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뢰야식은 강물의 흐름과 같은데, 인()의 측면에서 파악할 때 종자의 흐름으로 볼수 있다. 바수반두의 '유식삼십송'의 제 4송에서 "그리고 그것(아뢰야식)은 폭류처럼 흐르면서 존재한다" 고 한 것은 강의 흐름이 연이어 새로운 물이 흘러가면서 하나의 강으로서 계속 존재하고 있듯이 아뢰야식도 찰나의 생멸을 계속해간다.해심밀경에서도 "아뢰야식은 심심(甚深)하고 미세하다. 일체의 종자는 폭류(瀑流)와 같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종자를 그속에 쌓아두고 있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모든 종자를 가진 것' 즉 '일체종자식' 이라고 규정되었는데, 이를 종자라는 실체적 존재들이 흘러가는 것으로 파악하면 아뢰야식의 본의를 오해하는 것이다. 찰나생 찰나멸의 점멸하는 영상의 흐름에서 동력학적 인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종자의 개념을 원용할 뿐이다.

아뢰야식을 과거와의 관계로서 파악할 때 과거는 원인으로 현재는 결과로 되는 것으로 과상(果相)이라 부르고, 현재와 미래의 관계로 보면 그것은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인상(因相)이라한다. 미래와의 관계에서 볼 때 이를 종자식(種子識)이라 하고, 과거와의 관계에서 보면 이숙식(異熟識)이라 부르게 된다. 간단히 도식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아뢰야식(흐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거 현재 미래

과상(果相)인상(因相)

이숙식(異熟識)종자식(種子識)

여기서 이숙(異熟)은 '다른 종류이며 익다' 라는 뜻인데, 과거의 선, 악의 업에 의한 결과로서 현재의 자기는 그 영향아래 있으나, 현존하는 인간 자신은 무기(無記)로서 생존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뜻이다. '무기'인 인간이 선 또는 악의 행위를 통하여 그 과보를 받으나 인간 자신이 선 악으로 구별되어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종자식의 규정중 제 4항은 바로 이런 선.악.무기와 관련하여 종자의 특성이 정해져 있다고 본다

불교의 가치관은 선. 악 외에 비선비악(非善非惡)의 무기(無記)를 둔다. 이 무기는 다시 유복무기(有覆無記)와 무복무기(無覆無記)로 나누어진다.(정병조 1996:115) '유복무기'는 악은 아니지만 청정한 마음을 덮으며, 악처럼 청정심 자체를 더럽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정심의 발현을 어렵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식()의 구조에 따르면 제7식인 말나식의 작용이 악은 아니지만 아뢰야식의 청정심을 볼 수 없도록하는 '유복무기' 라고 본다.

'무복무기' 는 완전한 비선비악으로 선악을 떠난 것이라 볼 수있으며, 아뢰야식이 바로 무복무기이다. 무복무기를 더 세분하여 네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위의무기(威儀無記) ; 일상생활에서 앉고 눕기처럼 반복적이고 자각이 없는 행위

(2) 공교무기(工巧無記) ; 물건이나 기계를 만드는 것처럼 기술적인 행위

(3) 신통무기(神通無記) ; 신통적으로 변현(現)하여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 화인(化 人)의 행위

(4) 이숙무기(異熟無記) ; 현재 여기에 존재하는 생존 그 자체.

유식불교의 종자설과 융의 원형론의 비교고찰 / 정현숙8

무복무기는 선 과 악 이라는 도덕적 가치관의 판단이따르지 않는 행위이며, 생존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지만, 그의 행위는 선, 악, 무기의 셋으로 구분된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표로 하면 다음과 같다.

선. 악 ------------------------------------ 제6식

무기(無記) ---------- 유복무기 -------------- 제7식(말나식)

무복무기 ------------- 아뢰야식

1 위의(威儀)

2 공교(工巧)

3 신통(神通)

4 이숙(里熟)

아뢰야식이 무복무기라고 하지만 과거의 선악의 행위가 과보를 갖지 않는 중성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선악의 행위가 종자로서 그 과보가 있게됨은 피할 수 없으나, 현재의 존재가 그 과거의 행위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고 구속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재의 존재 자체는 무기이므로 선을 향한 전환 가능성이 있으며, 또는 악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게 된다. 이것은 인과론을 결정론과 구별짓는 요점으로, 인과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수행을 할 필요도 없으며 할 수도 없게 된다. 이숙무기 이기 때문에 과거의 선악에 관계없이 새롭게 향상해 나가거나 전락해 버리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섭대승론'의 종자의 규정처럼 ②항의 동시인과(同時因果)는 아뢰야식 연기와 관련하여 이해해야한다.12)아뢰야식 연기(阿賴耶識 緣起)는 심층심리와 표층심리와의 상호유기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현상적으로 드러내어짐을 설하는 것이다. 전6식(前六識)의 의식활동을 현행(現行)이라고 하는데, 이 현행은 종자를 원인으로 한 결과이며, 이를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이라 한다. 한편 의식활동을 포함한 현행에 의해서 종자가 생기는데 이를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라고 하며, 훈()은 뒤에서 상론할 훈습(熏習)을 말한다. 아뢰야식 속에서 종자가 다음 찰나의 종자를 생하는 것을 '종자 생 종자(種子 生 種子)'라고 한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A ------------------- 현행B -------------------종자C -----------------종자A'

(종자 생 현행)(현행 훈 종자)(종자 생 종자)

이 도식을 보면 시간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그리고 소승의 경량부는 전 찰나의 마음이 후 찰나의 마음에 훈습한다는 훈습의 '인과 이시설(因果異時說)'을 주장했는데, 유식학파는 인과 동시를 주장하여 '종자 생 현행, 현행 훈 종자, 종자 생 종자, 삼법전전인과동시(三法展轉因果同時)'라 하여 동시인과를 말한다. 그러므로 종자와 현행의 관계를 시간에 따르는 생리적 또는 심리적 과정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아뢰야식의 논리구조로 이해하여야 된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전6식의 인식활동에 요청되는 인위적 조작이며,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것이기 때문에 논리구조적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의식적 현상으로 볼때는 종자와 현행이 동시(同時)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종자를 크게 나누어 업종자와 명언종자로 구분한다. 업종자(業種子)는 전6식이 쌓은 선업과 악업에 의해 형성된 '이숙습기(異熟習記)' 로서 선악의 과보를 낳게 한다. 선악의 업에 의해서 발현하고, 인()과는 다른 모습의 과보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이숙(異熟)' 이라 한다. 업종자에 대응해서 개념.관념에 해당하는 '명언종자(名言種字)' 가 있다. 이는 '이숙무기'로서 그 자신이 직접 새로운 과보를 낳지 못하고, 업종자와 함께 새로운 아뢰야식의 형성을 해나가는 종자이다.

2. 종자와 훈습

아뢰야식에 종자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훈습(熏習)이라 한다. 이의 비유적 설명으로 "향을 태우면 의복에 그 향기가 스며들어 간다. 향은 없어져도 스며들어간 향기는 언제까지나 의복에 있다. 훈습이란 마치 그와 같은 것이다"를 들 수 있는데, 훈습은 자각적 학습과는 달리, 의식과 무의식을, 망라하여 삶의 경험이 아뢰야식에 축적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를 '현행 훈 종자(現行 熏 種子)' 라고 한다.

훈습은 능동적으로 훈습을 주는 능훈(能熏) 또는 견분훈(見分熏)의 측면과 이에 대응하여 훈습을 받는 수훈(受熏) 또는 상분훈(相分熏)으로 나누어 진다. 객관세계의 제법은 안. 이. 비. 설.신. 의 의 6식과 제7식(말나식)의 작용을 통하여 아뢰야식에 훈

습을 주는 것으로 이를 능훈(또는 견분훈) 이라 하며, 인식 주관의 활동이라 볼수 있다. 인식의 내용이 되는 객관 세계의 제법은 훈습의 내용이 되기 때문에 이를 수훈(또는 상분훈)이라 한다.

'섭대승론' 과 '성유식론' 은 아뢰야식의 훈습받는 특성으로 다음 4가지를 들고 있다.(所熏四義)13)

㉮ 아뢰야식은 훈습을 받고 종자를 보호, 유지 하는 것으로서 간단없이 일류상속 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 선악 어느 쪽의 훈습도 받아들이고 그것과의 반발이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어떠한 적극적 성질을 갖지 않는 것 즉무복무기(無覆無記)가 아니면 안된다.

㉰ 자주적인 작용이 있는 것(自存) 이면서도 무상(無常)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능훈의 제법과 동시동처에 화합하여 존재하는 것. 결국 아뢰야식과 제법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여기서 훈습이 선악의 분별없이 받아들여지므로 무복무기란 점은 앞에 제시한 종자의 규정 제④항과 관련되는 내용인데, 의식적 활동으로 선악을 구별하여 선택하는 학습과 훈습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항의 의미도 제 ②항과 같이 훈습의 인과 동시라는 취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뢰야식의 인과는 시간적 선후보다는 구조적 관계로 파악해야함을 말해준다. 비유하면 마치 갈대의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이나, 또는 등의 심지와 불꽃에 견줄수 있다.

종자의 형성에 관한 설에는 본유설(本有說) 과 신훈설(新熏說) 그리고 이 두 설의 절충인 신구합생설(新舊生說)이 있다.

본유설은 '찬드라파라(護月)'의 주장으로 종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며, 인간의 소질과 능력은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경험은 단지 본래 있던 것을 발현시킬 뿐이라는 관점이다. 예를들면 한 개인은 그 개인으로써 타고난 성향과 능력이 있으며, 인간이 갖는 5감의 능력의 일반적 한계등은 본유설이 주장하는 바와 일치한다.

신훈설은 '난다(難陀)'가 주장했으며, 인간의 소질과 능력이 훈습의 과정에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주의할 점은 훈습이 한 개인의 출생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부모와 조상의 경험 즉 인류의 모든 경험이 축적된 것이란 점이다. 오늘의 삶은 무시(無始)의 옛날부터 이제까지의 유구한 훈습의 집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성유식론' 의 '다르마팔라(護法)'는 상기 두 설의 절충으로 현실적인 인간관을 생각했다. 한 사람의 인간에는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본유종자(本有種子)와 경험의 집적

인 신훈종자(新熏種子)가 함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신훈종자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포함하는 포괄성이 있는 것이며, 불교에서는 수행과 정진의 의의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인간의 교육이 가능한 것도 신훈종자설을 지지 하는 것이다.

신훈종자외에 본유종자를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무루종자(無漏種子)의 문제 때문이다. 무루종자란 여래와 같은 완전하고 맑고 깨끗한 성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없앤 깨달음의 세계이다. 한 인간이 훈습에 의해 아무리 닦는다 해도 무루종자 즉 불성이 본래 갖춰 있지 않다면 부처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불성은 훈습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수행이 궁극의 목표로 하는 것은 본유종자의 발현이라 하겠다.

훈습의 과정을 상세히 논한 것으로 '대승기신론'을 들수 있다.14)훈습을 일으키는 4요소를 '진여(眞如)', '무명(無明)', '망심(妄心)', '망경계(妄境界)' 로 하고, 마음이 진여의 맑음에서 현상계의 오염된 분별로 나가는 과정과, 반대로 생사고락이 있는 분별집착의 얽매인 삶에서 해탈과 진리의 세계로 나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훈습과 교육의 관계에 관하여 이홍우는 '교육이론으로서의 대승기신론'에서 논의한 바 있다.

현상계는 실은 헛된 것으로 모든 분별은 망상에 불과하며 이의 근본원인은 무명이다. 무명에 의해 마음에 움직임이 일어나 업식(業識)이 되고, 이 업식이 주관을 형성하여 개체의 마음이 되면 이를 망령된 마음(妄心)이라 한다. 이 망심이 무명에 근거하여 인식대상(境境界)을 만들고 분별, 집착, 애욕, 번뇌를 일으켜 온갖 괴로움을 겪는다. 이 내려가는 과정을 무명에 기인하는 훈습이라한다.

훈습에는 수행이나 정진에 의해 무루종자인 불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는바 이는 진여훈습(眞如熏習)이다. 모든 인식대상이 망심의 헤아림 때문에 나타나는 허환임을 깨닫고, 생멸이 없는 궁극의 진리로 나가도록 끊임없이 내면에서 끌어주는 진여의 힘이 있는바 이것이 수행이 가능한 이유이다. 우리 중생이 수행을 하여 열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본래에 나의 본성과 진여가 하나이며, 망녕된 분별심을 비우면 곧 이를 얻게된다. 이것은 진여훈습이 있기 때문이다.

 

IV. 융의 무의식과 원형론

 

1. 의식과 무의식

 

원형론()에 들어가기 전에 융(C.G.Jung)의 분석심리학의 주요 개념을 간략히 요약 정리하고자한다. 융은 마음의 구조를 크게 의식(意識 das Bewusstsein) 과 무의식(無意識 das Unbewusste)으로 나눈다.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하면 의식은 작은 섬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은 한 인간의 정신활동의 극히 일부만을 나타내며 어느 순간에 단지 몇 개의 것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식하는 것은 정신의 전체적 상이 아니라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듯 잠간 일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식은 대부분 외부세계에 관한 지각(知覺)의 소산이다. 의식은 첫째로는 자기 신체와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둘째는 일련의 기억에 의해서 형성된다.15)이어서 정신적 기능의 분화와 다양한 개인적 분화 등으로 의식이 풍부해지며, 사고, 감정, 감각, 직관,등 정신의 4가지 기본기능도 의식의 내용이 된다.

의식은 큰바다의 작은 섬에 비유되지만, 의식을 고정된 실체로 보면 안된다. 의식은 항상 변하며,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함으로써 그의 시야를 넓혀간다. 의식은 무의식의 산물이다. 그리고 의식에 접하고 있는 무의식의 내용들이 어떤 때는 의식계 안에 들어오고 어떤 때는 무의식계로 잠행한다.

자아(自我 Ego)는 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콤플렉스로서, 의식의 내용을 이루는 동시에 의식이 의식일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의식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심리 내용이 자아 콤플렉스와 연관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이란 자아에 대한 심리적 내용의 관계를 유지하는 기능이며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자아가 없으면 인간 정신의 성숙이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하려면 자아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의식화 하고자 하면 할수록 무의식은 그의 창조적 암시를 더욱 활발히 내보내게 된다.16)

인간의 마음에 무의식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을 과학적 학문의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한 사람은 프로이드였다.17)프로이드는 무의식의 내용이 현실과 맞지 않는 성적 욕망에 대한 억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사람들이 일으키는 실수, 실어, 망각, 공상 등과 노이로제를 비롯한 정신질환이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보았으며, 꿈의 해석도 무의식에 바탕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융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받아들였지만 그보다 훨씬 넓게 일반화 시켰다. 성적 충동뿐만 아니라 도덕적 갈등과 그 밖의 원시인적 본능과 인류보편의 문화 및 종교 현상이 무의식의 내용이 된다고 보았으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일체의 정신세계가 무의식이라고 보았다. 무의식은 단지 억압된 과거의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무의식은 바다와 같이 광대 무변한 것이며 의식은 그 중에 섬과 같이 제한된 일부라고 보았다.

융은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personliche unbewusste)과 집단적 무의식(kollective unbewusste) 로 나눴다. 개인적 무의식은 한 개인의 삶에서 체험한 내용중 어떤 이유로 의식 밑으로 잠수해버린 것들, 예를 들면, 성적 욕망, 심리적 경향, 희구, 괴로운 감정, 의식하지 못한 약한 지각 등이다.

융이 발견한 중요한 사실중 하나는 무의식에는 한 개인의 삶과는 관계없는 인류 보편의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갖고 나오는 무의식의 심층으로 개인 특유의 것이 아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 해있는 것이기에 집단적 무의식이라 불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지고, 역사와 문화, 인종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유사하게 갖는 원초적 행동유형들은 일종의 근본유형이란 의미에서 원형(型Archetype)이라 한다. 원형은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을 이루며, 신화의 근원이고, 종교적 심성의 원천이 된다.

무의식은 마음의 부정적인 어두운 측면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에너지의 원천이다. 무의식은 생명의 샘이며 창조적 능력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으로 동화함으로써 자기 실현으로 나아가게 된다. 무의식은 의식의 지배하에 있지않고 자율성(autonomy)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적 생명력을 가지고 의식의 제한된 세계를 넘어서도록 해준다.

무의식과 의식은 상호 보완적 또는 대상적 관계에 있다. 의식에 결여된 부분을 보충하며, 의식의 편향성을 보완하여 개체 정신세계의 통합적 완전성을 유지하도록 한다. 그런데 의식과 무의식의 이분법을 고정되고 명확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설명과 이해의 방편상 둘로 나누어 논하는 것 일뿐, 어떤 정신내용이 의식이나 무의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유동적으로 그 경계가 변한다고 보아야 한다.

 

2. 원형(型)

 

원형은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단순한 지적(知的)개념이 아니라 미증유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콤플렉스이다. 원형은 그 자신의 의도와 그 자신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한 개인이 부딪힌 상황에서 그의 의식과는 전혀 동떨어진방향으로 개입하거나 방해하거나 일을 틀어버려서 당황스런 상황을 연출해낼 수도 있다. 원형과 개인적 콤플렉스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데, 유사점은 방금 언급한 바처럼 콤플렉스 자체의 에너지와 의도를 가지고 자율적 행태를 보이는 점이다. 차이점은 개인적 콤플렉스가 그 개인의 과거 행적과 기억 등에 관련된 것인데 반하여 원형은 개인을 초월하여 범인류적인 신화적, 종교적, 철학적 특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개인적 콤플렉스는 그 개인의 일방적이거나 잘못된 의식을 보상하려는 기능을 하는데 비하여, 종교적 내용의 신화등은 인류보편의 고통인 질병, 전쟁, 굶주림, 노화, 사망 등에 대한 구원의 해석이 가능하다.18)

원형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이를 하나의 정적(靜的)인 상(image)으로 보는 것이다. 원형은 결코 고정된 형상이나 관념, 신비스런 모상(模像)이 아니다. 이런 고정된 개념과 형상은 의식에 속하는 것이며, 이런 것들이 무의식에서 선조로부터 이어 받아오는 것일 수 없다. 원형은 이러한 것을 형성하는 어떤 기본 경향이라 할 수 있으며, 본능적 경향이라 하겠다.19)

원형의 정동적(情動的)측면은 인간의 정신전체를 사로잡는 원초적 힘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창조적 방향으로 또는 파괴적 방향으로 자아를 구속하게 된다. 위대한 인간애로 자기를 희생하거나 뛰어난 창조적 영감으로 불후의 예술작품을 창조하거나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집단 살인 등 파괴적 악마로 될 수도 있다. 보통 초인적이라 하는 힘을 발휘하는 누미노즘(numinosum)적 충격이나 감동을 수반한다. 이런 측면에서 원형은 인간 의식의 세계가 아닌 영적 신의 세계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원형은 합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의식의 세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보다는 비합리적인 모습을 띄는 문화 유산인 신화, 민간 신앙, 전설, 종교, 예술작품 등에서 많은 원형상을 만날 수 있다. 무당의 굿과 같이 샤머니즘에서 춤과 노래와 기도를 통하여 무아지경에 들어 신과 통하려는 것이나, 방언(方言)과 박수와 노래로 심령부흥을 시도하는 신흥종교들의 무속적 집단 활동 등은 집단적 무의식층에 도달하려는 의식이라 볼 수 있으며, 고등 종교의 세련된 제례의식의 밑바탕에도 원형이 작용한다. 단군 신화, 그리스의 신화, 영웅전 등에 담겨있는 원형은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007, 타아잔, 6백만불의 사나이, 슈퍼우먼 등 대중매체의 영웅으로 새롭게 각색되어 어린이와 대중들의 무의식에 작용한다. '영웅상'은 인류초기부터 있어온 대표적 원형이다. 봉산탈춤, 꼭두각시놀이 같은 마당극은 시대의식을 초월하고, 지구촌 어느 지역에서나 보편적인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체험을 표현한다. 융은 쉐익스피어나 괴테등 대 문호의 작품에서 인간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원형이 체험될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귀신이야기, 민담, 마당극, 초현실주의적 그림 등은 사람의 마음에 무엇인지 모르는 가운데 커다란 충격과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데, 이는 원형상이 사람들 모두에게 깊이 보편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원형이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현상은 꿈이다. 꿈 내용 중에는 그 꿈을 꾸는 개인의 체험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요소들이 있음을 처음 지적한 사람은 프로이드였으며, 이를 그는 '고시대적 유산(archaic remnants)'이라 불렀다. 이 꿈의 영상들은 그 개인의 역사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며, 원시적이며 인간 마음의 원초적 유전이라 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꿈은 매우 충격적이거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혀 상상 밖의 흉몽이나 악몽 또는 감동적이고 황홀한 꿈의 체험, 본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 괴물과의 대화 등은 꿈을 꾸는 사람의 깊은 무의식층에 서있는 원형의 작용이다.

꿈속에서 사람들은 논리와 시공간을 초월하는 비합리적인 경험을 하게된다. 때로는 예언적 내용의 꿈을 꾸게된다. 어떤 꿈은 앞뒤와 전혀 연관 없이 어떤 상징적 영상을 제시하는데,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그 메시지를 해독 못하고 있을 뿐, 무의식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닥쳐올 사건이나 위험을 꿈속에서 상징으로써 보여주며 경고나 충고를 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꿈의 메시지를 논리적 분석이나 시공간적 인과의 연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이성과 지식의 세계가 아니고 본능과 직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원형과 본능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능은 생리적인 욕구로서 감각으로 지각(知覺)되는 것이다. 성본능을 비롯하여 인간의 생존과 관련된 충동적 행위의 근원이 본능인데, 원형은 이 본능과 뿌리를 같이한다. 본능이 인간 특유의 생명유지를 영위케 하는 것이라면 원형은 인간 고유의 성품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본능과 원형은 관념상으로는 구별되나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현상으로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원형은 본능의 '자기모상(自己模像 selbst abbildung des instinktes)'이다.20)인간의 신체가 진화론적으로 볼 때 모든 생명체의 발달단계의 역사를 다 포함하고 있듯이, 인간의 마음도 의식의 모든 발달 단계를 안에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엔 언어와 문자가 나오기 이전의 유인원으로서의 심성까지 무의식에 함장해 오며 발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구한 고생대적 심성이 인간의 무의식의 토대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생물로서의 인간의 본능과 정신을 가진 인간의 무의식의 원형은 함께 발달해 왔고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심리현상을 이루고 있다.

자율신경이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작용하듯이 원형은 제멋대로 오고, 의식적 활동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나름의 목적에 의해서 일들을 꾸미고 미래의 지향점을 향해 정리해 나간다. 피상적으로 볼 때는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원형이 무의식 속에서 오랜 동안 작업을 해왔고, 상황들을 매우 교묘하게 조정하여 극적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원형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일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원형은 한 개인의 인생의 전환기나 정신적 위기에 나타나 방향전환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생의 전기를 이루는 큰 꿈은 사춘기 전후, 중년기, 노년기 등 전환기에 나타나는 수가 많은데 이들은 원형의 작용이다.

꿈의 중요한 기능은 심리적 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인데, 이를 융은 꿈의 대상적 기능(compensatory)이라고 불렀다21)비현실적 몽상에 빠진 사람이나 지나치게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 실제 능력에 벗어난 거대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 등은 흔히 나르는 꿈이나 추락하는 꿈을 꾸는데, 이것은 그들의 성격상 결함을 대상하는 역할을 보여주는 꿈이며, 또는 그들이 부딪칠 위험을 미리 경고하는 것이다.

원형의 대상적 기능은 꿈속에서 개인에게 경고를 말할 뿐아니라, 한 시대의 위기를 경고하며 그릇된 시대의식의 시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 국가의 멸망시기에 나타났다는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들은 원형의 예언적 기능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백제 멸망기에 "흰여우가 좌평(佐平)의 책상 위에 올라앉으며, 궁중의 큰 나무가 사람같이 울었다" 는 등의 전설은 전형적인 원형상의 작용이다.22)

원형의 기능은 심리적 균형을 회복시키는 대상적 기능, 인생의 전환기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 목적성취를 위하여 미리 알고 어떤 일을 시키는 역할 등외에도, 인류보편의 위대한 이념이나 발견 및 창조의 상상력과 에너지도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V. 종자설과 원형론의 비교

 

유식불교와 융의 분석심리학은 피상적인 의식계(意識界)의 밑에 그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한 심층심리계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상호 유사성이 깊다 하겠다. 유식불교에서는 제6식을 넘어서 제7 말나식과 제8 아뢰야식을 도입했으며, 융은 의식의 섬을 둘러싼 무의식의 세계를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말나식은 개인의 아집(我執)을 일으키는 식으로 개인적 경험이 의식세계에서 사라져간 개인 무의식과 대응한다. 그러나 말나식은 개체로서의 주재자라는 집착을 일으키는 점에서 분석 심리학에서의 '자아 콤플렉스' 에 가깝다 하겠으며,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집착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사이엔 상호 연결의 고리가 따로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말나식과 개인 무의식을 상응시키기는 어렵다. 말나식과 개인 무의식이 피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르듯이 아뢰야식과 집단무의식, 종자와 원형도 역시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뚜렷하다고 하겠다.

아뢰야식은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윤회설(輪廻說)의 상호 모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상주불멸의 개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면서도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성을 전제하는 윤회를 아뢰야식을 통하여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어떤 불변의 존재인 자아가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강물의 흐름과 같은 종자의 흐름 때문에 삼세에 응하는 인과 보응이 있게되므로, 아뢰야식이란 흐름속에 거품처럼 생멸하는 의식적 존재는 윤회를 인식할 수 있게된다. 다시 말해 윤회는 개체의 현상이 아니라 전체흐름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즉 아뢰야식은 모든 중생들이 물거품처럼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존재의 기반이며, 이 아뢰야식의 흐름에는 윤회와 인과보응이 동태적(動態的) 법칙으로 성립한다. 윤회에 관한 가장 단순한 오해는 '자아' 라는 개체의 영속성에 바탕한 개체의 윤회로 잘못생각하는 것이다. 불교는 영속적인 개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무아설이 정설이므로, 윤회를 이해하려면 아뢰야식을 알아야만 한다.

불교의 무아설에 대비하여 융의 분석심리학은 '자기(self)'를 매우 중요하게 본다. 의식 수준에서 파악되는 편협한 자아(ego) 와는 달리 '자기' 는 의식과 무의식 양면에 걸친 콤플렉스로서 심리적 활동의 중심체이다. 분석심리학에서 병적인 심리상태를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것을 말하는데, 예로 한 개인의

의식에서 남성적 측면만을 강조되고 여성적 측면은 무시 또는 억압할 경우 무의식과 원형은 이런 불균형을 시정 회복하도록 하는 대상(代償)기능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가는데, 이는 무의식의 의식화 작업을 통한 자기 확충이라고 본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자기의 부정(不定) 보다는 자기실현을 강조하며, 무의식과 원형은 힘과 에너지로서, 높은 창조성이나 강한 파괴력으로, 종교적 상징성 등으로 자기를 풍부하게 한다고 본다.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은 심층심리의 역할에 대한 해석을 유사하면서도 상이하게 하는 관건이다. 둘다 심층심리를 존재의 기반으로 본 점과, 의식계(意識界)보다 깊고 광범하게 본점은 유사하다. 융은 무의식의 바다에 섬과 같은 의식이 있고 이 섬의 중심으로 자아를 상정하며, 자기(selbst)는 의식적인 자아와 이에 연결된 무의식적인 면을 총괄하는 전체적 주체를 말하며, 자기실현을 인격적 성장의 이상으로 본다. 유식불교는 자아든 자기든 상주하는 개체적 존재를 부정한다. 이 개체적 관점은 제7말나식이 만드는 환상에 불과하며, 이것들은 영속적 존재가 아닌 생멸하는 물거품이며, 오직 아뢰야식만이 모든 생명체의 기반으로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기실현보다는 자아의 본성이 없음()을 투철하게 관조하는 것이 강조된다.

심층심리가 표층의 의식에 나타나는 방식에서도 유식불교와 분석심리학은 전혀 다르다. 유식불교에서는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 의 인과적 관계로 파악한다. 아뢰야식의 종자가 원인이 되어 전육식(前六識)의 현행(現行)이 결과로 일어나고(종자 생 현행), 의식활동인 현행이 아뢰야식에 종자를 낳는다(현행 훈 종자). 들어 난 것(현행)과 숨은 것(종자)이 서로 생성시키는 인과의 연쇄로 보는데 반하여 분석심리학 에서는 무의식의 원형과 의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즉 원형은 꿈속에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의 형태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그 의미를 알기 어렵다. 예술작품이나 종교적 의식(儀式) 등에서는 상징적이면서 인류보편의 창조성과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에, 불교적 인과관계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유식불교에서는 꿈이나 현실적 분별심이나 모두 허환(虛)으로 절대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는데 반하여, 융은 현실적 분별의식을 부정하지 않고, 꿈도 현실에 대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상(代償)기능, 인생 전환기의 방향전환제시, 예지적 능력 등이다.

아뢰야식에 종자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인 훈습(薰習)에 관해서대승기신론에서는 현실 세계를 망심(妄心)이 무명(無明) 때문에 오염되어 헛된 분별세계를 만들어가는 유전문(流轉門)과 그 반대의 과정인 모든 분별을 끊고 생멸이 없는 본성을 회복하는 환멸문(還滅門)이 있다. 이에 대조적으로 분석심리학에서는 의식세계의 현실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무의식과 원형이 제시하는 메시지를 파악하여 의식세계를 확충하고 균형을 회복하는 자기실현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유식불교의 수행의 방향과 분석심리학의 자기실현의 방향도 서로 다르다.

'다르마팔라'가 주장한 절충설에서 신훈종자(新熏種子)는 훈습의 과정에서 획득된 인간의 소질과 능력인데, 한 개인의 출생시부터의 체험뿐만 아니라 부모와 조상의 경험 즉 인류의 유구한 훈습이 집적된 것으로 본다. 이것은 분석심리의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모두 포함한다. 특히 인류보편의 원형도 신훈종자에 속한다. 원형은 개인을 초월하여 범인류적인 신화 종교 문화 현상에 상징성으로 나타난다. 종자설은 인류의 모든 경험을 아뢰야식에 신훈종자로 갖고 있다고 보았으나, 원형(型)설이 탐구한 제반 특성에 대한 고찰은 하지 않았다. 원형은 그 상징성, 창조성, 자율성, 파괴력, 에너지, 비합리적 모습 등의 특성이 있으며 신화, 전설, 민담, 샤머니즘, 종교, 예술작품 등에 나타난다. 그리고 개인의 의식적 활동에는 직접 들어 나지 않고, 꿈에 상징적 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해석에 어려움이 따른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기인 사춘기, 중년기, 노년기 등에방향전환을 제시하는 꿈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절충설은 인류보편적 원형까지도 훈습된 신훈종자에 속한다고 보았다. 본유종자는 원형보다도 더 근원적인 무루종자(無漏種子)를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분별을 넘어선 완전하고 깨끗한 성품을 의미한다. 분석심리학에서 가장 깊이 천착했다는 원형도 역시 분별의 세계에 속하므로 유식불교에서 지향하는 깨달음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다. 원형을 포함한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자기실현을 인격성숙의 과정과 목표로 잡는 분석심리학에 대해서 유식불교는 분별의 세계를 아무리 확충한다해도 참된 자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무루종자인 불성(佛性)을 보아야만, 그래서 모든 분별과 망념을 초월해야만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본다.

 

VI. 논의

 

불교의 심리학이라 할 수 있는 유식이론에서 아뢰야식의 종자설을 정리해보고 , 융의 분석심리학의 집단무의식중 원형(型)이론을 대비하여 고찰해 보았다. 유식불교와 분석심리학이 의식(意識)의 한계성을 밝히고, 잠재되어 있는 심층심리의 존재를 들어냈으며, 이 심층심리가 넓은 바다라면 의식은 작은 섬에 불과하다는 것과, 심층심리의 심연으로 들어갈수록 개아(個我)는 점점 사라지고 인류보편성으로 확대된다는 점, 의식적 개체로서의 자아(ego)는 심층심리에로의 확대를 통하여 인격적 성숙이 이루어 진다는 점 등을 밝힌 점에서 유사성이 깊다.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상세한 내용을 고찰하면 적지않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유식이론은 불교의 종교적 이상을 전제로하고 있으나 분석심리학은 분석적 방법론을 전제로하는 근대서구 학문적 접근을 하는데서 차이가 생긴다. 불교의 무아설과 윤회설은 피상적으로는 서로 모순되어보이는데 이를 해소하는 것이 아뢰야식과 종자설이다. 상주불멸의 존재인 '아()가 없으므로 윤회의 주체는 있을 수 없으며, 강물과 같은 종자의 흐름인 아뢰야식에만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의 연쇄가 있게되며, 아()는 강물의 거품같이 생멸하는 환영과 같다. 근본적으로 무아이기 때문에 아()가 있다고 잘못 집착하는 것을 벗어나서 해탈함이 목표가 된다. 그러므로 심층심리에 속하는 모든 경험적 종자들, 인류와 생명에 보편적인 종자들 까지도 일종의 환영(幻影)으로 분별의 세계에 속한다. 궁극적 목표는 이런 분별의 세계를 초탈하여, 모든 분별이 없어진 공적(空寂)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나누어, 인류보편의 집단무의식을 원형이라 한다. 자아는 의식세계에 국한된 편협한 주체관이고, 의식과 무의식에 긍하여 있는 자기(self)를 인식하고, 무의식의 세계로 확충해 나가는 자기실현을 통하여 인격적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유식불교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오래고 넓은 인류보편적 상징이라 할지라도 이는 여전히 분별의 세계에 속하며 신훈종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무리 무의식적 세계로 자기를 확충한다해도 깨달음의 세계와는 다르다. 망상과 분별지를 완전히 떠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며, 자아를 확충하는 것이 아니라 무아임을 관하는 것이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심리학의 범위는 비록 집단무의식처럼 전 인류를 포괄한다해도 여전히 무루종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은 집단무의식과 원형의 특성을 문화, 종교, 예술과 꿈등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 학문적틀과 분석적 방법론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아뢰야식 이론과는 다른 측면에서 심심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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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현숙, 대승기신론의 아랴야식과 융의 무의식 비교고찰,종교교육학연구8, (서울 : 한국종교교육학회, 1999)

3) 이죽내, 불교유식학과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정신'개념의 일대비, 경북의대잡지 23(2), 1982.

4) 이죽내, 선불교와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정신의 전체성, 신경정신의학회지, 22(2), 1983.

5) 이부영·최동훈, 불교의 유식사상과 분석정신치료이론의 비교시론,신경정신의학25, 1986.

6)이부영,불교와 분석심리학:자기실현을 중심으로,불교와 제과학, 동국대학교 개교80주년기념논문집, 1987.

7) 김성관, 심성설에 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융사상의 비교고찰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1987.

8) 김명실, 유식학의 심성구조에서 본 아동성격심리의 논리적 고찰,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2.

9) 三枝充悳, 송인숙 역,세친의 삶과 사상, (서울 : 불교시대사, 1993), 153쪽.

10) 三枝充悳, 김진무 역, 불교학 세미나 제3권(인간론:심리학), (서울 : 불교시대사, 1996), 240쪽.

11) 위의 글, 240쪽.

12) 일지,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서울 : 세계사, 1992), 268쪽.

13) 김진무 역, 앞의 글, 242쪽.

14) 이홍우, 대승기신론, (서울 : 경서원, 1991), 333쪽.

15) C.G.Jung, Analytical Psychology - Theory and Practice,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8, p.10.

16) C.G.Jung, 위의 글, 1968, pp.8-9.

17) 이부영,분석심리학, (서울 : 일조각, 1995), 50쪽.

18) C.Jung, 1968, 앞의 글, 68쪽.

19) 위의 글, 58쪽.

20) C.G.Jung, Instinkt und Unbewusstes in Ueber psychische Energetik und das Wesen der Traume, (Zurich : Rascher, 1948), p.274.

21) C.Jung, 1968, 앞의 글, 34쪽.

22) 이병도 역주,삼국유사, (서울 : 동국문화사, 1956),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