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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인도 불교에 아미타정토도는 존재했는가: 극락의 시각성과 중국의 예들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이주형.서울대

국문 초록

인도 불교에서 아미타 신앙이 존재했는가, 어떤 양태로 존재했는가 하는 것은 불교사 연구자들에게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아미타 신앙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 가 매우 희소한 상황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그 증거를 미술자료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펼쳐 왔다. 특히 아미타 관련 경전들이 쓰인 것으로 추측되는 간다라 지역에서 아미타불이나 극락의 도해를 비정하려는 시도가 일찍부터 또 최근까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본 연구는 일부 학자들이 제시한 간다라의 예 들을 과연 극락의 도해라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이 문제 를 본 연구에서는 두 가지 면에서 접근한다. 첫째, 동아시아에서 아미타정토도가 번성했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극락의 시각성이 쉽사리 미술로 옮겨질 만큼 특별했던 것처럼 여기고 있으나, 관련 경전의 서술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결코 그 렇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관련 경전들에 묘사된 극락의 시각성은 고대 인도 불교에서 통용되던 일반적인 낙원의 이미지에 의거한 것으로 낙원의 다른 사례들 과 비교해 볼 때 극락의 시각성은 독자적이지도 않고 특출한 것이라 하기도 어렵 다. 둘째, 간다라에서 아미타정토도로 비정된 예들은 일견 동아시아의 아미타정토도와 상당히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동아시아의 정토도는 중국의 전통에서 6세기 후반 이후에나 독자적으로 확립된 것으로 간다라의 예들과는 의미상 무관하다고 보인다. 이 두 가지 점에 대한 논의를 통해 본 연구는 초기 인도 불교에서 아미타 신앙의 위치와 성격을 가늠해 본다.

 

주제어 : 아미타불, 극락, 인도 불교, 대승, 간다라, 정토교, 대아미타경

 

I. 인도의 아미타 신앙에 대한 의문과 아미타정토도

인도에서 아미타(阿彌陀)1) 신앙이 존재했는가, 혹은 어떤 양태로 존재했는가 하는 것은 연구자들에게 흥미로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아미타불과 관련된 대표적인 경 전인 소위 ‘Larger Sukhāvatīvyūha’(이하 LSV로 약칭함)가 중국에서 알려진 것만도 12회 번역되었고(藤田宏達 2007, 35-39) 동아시아에서 아미타 신앙이 매우 성행했기 때 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그 원류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시해 왔다. 이 경의 산스크리 트본도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원류는 인도에 있을 것으로 추정해 왔으나, 아미타불이 실제로 인도에서 신앙되었음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동안 명문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7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산치(Sāñcī) 출 토 석판의 명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불과했다(판독과 해독은 Majumdar 1940, 394-395, no. 842에 의거함). …… gataṃ yo ’mitābhañ ca dhatte taṃ vande Lokanāthaṃ …… 1) 이 글에서 ‘아미타’는 이에 대해 알려진 두 가지 산스크리트어 명칭 Amitābha와 Amitāyus를 포괄하는 것으로 쓴다. 물론 Amitāyus의 한역어로 알려진 ‘무량수(無量壽)’도 포괄한다. LSV와 SSV의 제본 가운 데 󰡔대아미타경󰡕(T362)에는 ‘아미타’가 쓰이고, 󰡔무량청정평등각경󰡕(T361)에서는 주로 ‘무량청정(無量淸淨)’ 이 쓰인다. 이 두 명칭은 다 원어가 Amitābha였던 것으로 보인다. 산스크리트본과 티베트본에서는 예외 없이 Amitābha 또는 그에 상응하는 명칭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무량수경󰡕(T360)과 󰡔대보적경󰡕의 「무량 수여래회」(T310[5]), 󰡔대승무량수장엄경󰡕(T363)에서는 예외 없이 ‘무량수’가 쓰이고 있다. 이제 언급할 고빈 드나가르 출토 명문에서는 Amitābha가 등장한다. 이 두 명칭이 같은 붓다를 의미했음은 분명하기 때문에 원어에 상관없이 이 글에서는 ‘아미타’로 통일하여 쓰기로 하겠다. 아미타의 명칭에 관한 복잡한 문제는 藤田宏達 1970, 287-335; 藤田宏達 2007, 235-255 참조. 도와 상당히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동아시아의 정토도는 중국의 전통에서 6세기 후반 이후에나 독자적으로 확립된 것으로 간다라의 예들과는 의미상 무관하다고 보인다. 이 두 가지 점에 대한 논의를 통해 본 연구는 초기 인도 불교에서 아미타 신앙의 위치와 성격을 가늠해 본다. 주제어 : 아미타불, 극락, 인도 불교, 대승, 간다라, 정토교, 대아미타경 인도 불교에 아미타정토도는 존재했는가 _11 (…… 아미타를 …… 로카나타를 바치고 경배한다.) 이 구절은 앞뒤에 판독이 모호한 부분들이 있어서 정확한 해석이 쉽지 않으나, 이 구절의 뒤에 나오는 바즈라파니(Vajrapāṇi)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판단할 때 바즈라 파니 상과 함께 로카나타(Lokanātha) 상을 바치며 경배한다는 의미이고, 여기서 ‘아미 타’는 로카나타의 머리에 올려진 것이라는 뜻으로 보인다(Majumdar 1940, 394-395, no. 842; 塚本啓祥 1996-2003, I:893-895, Sāñcī919). 이 명문은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어 상당 히 늦은 시기의 것일 뿐 아니라 일종의 변화관음이라 할 수 있는 로카나타를 언급하 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로카나타와 관련하여 거론된 아미타는 우리가 LSV 등에서 볼 수 있는 초기의 아미타 신앙과는 다른 단계, 다른 성격의 아미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77년에 마투라(Mathurā)의 고빈드나가르(Govindnagar)에서 이보다 훨씬 이 른 시기의 명문이 발견되어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발 아래쪽만 남아 있는 입상의 대좌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판독과 해독은 Schopen 1987, 101-111에 의거함; cf. 塚 本啓祥 1996-2003, I:666, Mathurā79). mah(ā)rajasya huveṣkas[y]a (saṃ) 20 6 va 2 di 20 6 (etaye pu[r]vaye) sax-cakasya sattavahasya p[i]t[-x](ṇ)[-x] balakattasya śreṣṭhasya nāttikena buddha(pi)la(na) putra(ṇ)a nāgarakṣitena bhagavato buddhasya amitābhasya pratimā pratiṣṭh(ā)pi[tā](……) [Sa](rva)buddhapujāye im(e)na k(u)śalam(ū)lena sar(va)(sat)[v]ā anut(t)ara(ṃ) bud(dh)ajñānaṃ prā(pnva)ṃ(tu)(……) (대왕 후비슈카 26년 우기雨期의 제26일, 이 날에 대상隊商[Sax-caka의 아버지]이며, 상 인 Balakatta의 손자[이며 Buddhapila의 아들]인 Nāgarakṣita가 모든 붓다를 위해 세존 아미타불의 상을 세운다. 이 선근善根을 통해 일체 중생이 무상無上의 붓다의 지혜를 얻 기를 바라며.) 후비슈카(Huviṣka) 26년은 카니슈카 기원에 의거한 것으로 서기 152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명문은 LSV가 중국에 한역본으로 처음 소개되던 무렵에 쓰여진 것으로 초 기 아미타 신앙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명문에 대해 그레고리 쇼펜(Greogory Schopen)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12_ 불교학 리뷰 vol.26 밝힌 바 있다. 기원후 2세기에 이 명문이 쓰여진 배경이 된 아미타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제한적이고 영 향력이 별로 없었던 것일 뿐 아니라 전적으로 독립적인 움직임의 부분이라 보기도 어렵 다. 이 명문의 절반에는 오래된 기존의 관용구가 쓰이고 있고 절반에는 아직 확립되지 않 은 새로운 관용구가 쓰이고 있는데, 후자는 뒤에 아미타 신앙 특유의 것이 아니라 전체 대승에서 특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명문은 새로운 존상의 조성을 밝히고 있으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상의 봉헌 목적으로 오래전부터 자주 쓰이던 내용을 명시하 고 있다(Schopen 1987, 123). 쇼펜은 이 명문이 아미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 독자적인 아미타 신 앙의 대두를 반영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쇼펜이 지적한 대로 이 명문에는 이 시 기에 관용적으로 등장하는 구절들이 쓰이고 있으며 아미타 신앙을 특징적으로 반영하 는 내용은 없다. 쇼펜이 지적한 “anuttaraṃ buddhajñānaṃ”이라는 구절은 뒤에 대 승의 명문에서 흔히 쓰인 것으로 이 상이 당시 점진적으로 대두되고 있던 대승의 범 주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이 명문이 아미타 신앙에 의거한 것이라 볼 만 한 증거는 못 되는 것이다.2) 이러한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연구자들, 특히 동아시아에서 아미타 관련 경전과 아 미타 신앙이 크게 성행한 것을 기억하는 연구자들은 인도에서도 아미타 신앙이 존재 했을 것이라 믿으며 그 증거를 미술 자료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펼쳐 왔다. 특히 LSV 등의 경전에서 상세히 묘사된 아미타정토, 즉 극락(Sukhāvatī) 3)의 시각적 특성, 혹은 시각성(visuality) 4)에 기초하여 동아시아에서 풍부하게 미술로 옮겨진 아미타정토도에 주목하고 그 원류를 인도, 특히 아미타 관련 경전들이 쓰여진 곳이라 흔히 여겨지는 인도의 서북부, 즉 간다라 지역(藤田宏達 1970, 222-258)의 미술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일찍이, 또 최근까지도 종종 이루어져 왔다(源豊宗 1926; 樋口隆康 1950; Huntington 1980; 岩松淺夫 1994; Quagliotti 1996; Harrison & Luczanits 2012).

 

       2) 쇼펜은 고빈드나가르 출토 아미타 상 혹은 그 명문을 소위 dhyāni-buddha체계(밀교의 오방불 체계)에 연 결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몇몇 학자들의 의견도 반박한다(Schopen 1987, 111-116). 밀교의 오방불 체계는 인 도 불교에서 훨씬 뒤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쇼펜의 지적은 타당하다. 물론 한역 경전에 전하는 내용을 잘 모르는 인도의 불교 전공자들에게는 고빈드나가르 출토 명문이 발견되기 전까지 밀교 체계만이 인도 불교에서 아미타가 알려진 유일한 맥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 다.

      3) Sukhāvatī에는 한문으로 여러 역어가 있으나 여기서는 ‘극락’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4) ‘시각성’(visuality)은 “the quality or state of being visual”이라는 의미이다(merriam-webster.com, 2018년 10월 22일 검색). 혹은 “the extent of such quality or state”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시각성’은 ‘시각적 특성’이라는 말과 의미상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적 특성이 어떤 양태로, 또 어느 정 도로 표현되고 강조되었는가’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아미타 신앙과 관련된 극락정토도 등은 불교에서 밀교를 제외하면 가장 시각성이 높고 시각성이 특별한 주제로 여겨지곤 하는데, 이 논문에서는 이 점에 대해 우선 의문을 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경전 서술에서, 또 동아시아의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극락의 ‘특별한 혹은 현저한 시각 성’이 당시 인도 불교에서도 그러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즉 경전에 서 술된 극락의 시각성이 동아시아에서처럼 반드시 실제 시각적인(조형적인) 표현으로 이 어졌겠느냐 하는 의문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이 간다라에서 극락의 도해일 가능성이 있는 예들을 찾고자 한 배경에는 그 예들이 동아시아의 아미타정토도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 실상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글에서는

(1) 경전에 서술된 극락의 특별한 시각성에 대한 의문과

(2) 동아시아의 아미타정토도와 간다라의 비슷한 예들의 실제 관계에 대한 의문,

이 두 가지 의문을 탐색함으로써 인도 불교에서 아미타정토도가 존재 했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려 한다.

 

II. 경전에 서술된 아미타정토의 시각성

극락의 모습은 LSV와 소위 ‘Smaller Sukhāvatīvyūha’(이하 SSV라 약칭함)에 상 세히 묘사되어 있다. LSV의 묘사가 SSV의 묘사보다 훨씬 길고 자세하다.

또한 현재 전하는 LSV의 여러 본들이 SSV의 여러 본들보다 시기가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초기 아미타 신앙에서 극락에 관한 생각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LSV가 더 유 용하다고 할 수 있다.

LSV에서는 3분의 1 정도의 지면이 극락의 시각적 특징을 서술 하는 데 할애되어 있어서 그만큼 이 경전에서 극락의 시각성이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 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 신앙과 관련된 경전들을 상세히 연구한 후지타 코타쓰(藤田宏達)는 한역 󰡔무 량수경󰡕을 비롯한 현재 전하는 7개 본의 서술을 비교하여 제본(諸本)에 묘사된 극락의 시각적 특징을 이제 아래에 열거하는 바와 같은 21개 항으로 추출하여 정리한 바 있 다(藤田宏達 1970, 442-457; 藤田宏達 2007, 356-360).

후지타는 LSV의 7개 본을 초기와 후 기 그룹으로 나누고 한역 󰡔무량수경(無量壽經)󰡕은 그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분류하는데(藤田宏達 2007, 87-93; cf. 藤田宏達 1970, 167-194), 5)

극락의 시각적 특징들도 초기와 후기 그룹이 서로 일치되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먼저 후지타가 분류한 LSV의 제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 그룹]

∙한역(漢譯) 󰡔불설제불아미타삼야삼불살루불단불과도인도경(佛說諸佛阿彌陀三耶三佛薩樓 佛檀過度人道經)󰡕,

       지겸(支謙) 혹은 지루가참(支婁迦讖) 역, 3세기 전반 혹은 2세기 말,6) T362(大正藏 수록번호), 이하 󰡔대아미타경󰡕이라 약칭함

∙한역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백연(帛延) 역으로 추정, 3세기 중엽,7) T361 ∙한역 󰡔무량수경(無量壽經)󰡕,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와 보운(寶雲) 공역(共譯)으로 추정, 421년경,8) T360

 

[후기 그룹]

∙한역 󰡔무량수여래회(無量壽如來會)󰡕, 󰡔대보적경(大寶積經)󰡕

       제5회로 수록, 보리류지(菩提 流志) 역, 8세기 초, T310(5)

∙한역 󰡔대승무량수장엄경(大乘無量壽莊嚴經)󰡕,

      법현(法賢) 역, 10세기 말, T363 ∙산스크리트본9)

∙티베트역 ≪’Phags pa ’od dpag med kyi bkod pa źes bya ba theg pa chen po’i mdo≫, Jinamitra, Dānaśīla, Ye śes sde 역, 9세기 전반, To45, P760(5)

 

        5) 후지타의 분류에 대해 폴 해리슨(Paul Harrison)은 “다양한 본들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양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라고 평한다(Harrison 1998, 563-564). 그러나 후지타가 분류한 두 그룹이 각각 내용 상 주목할 만하게 일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6) 󰡔대아미타경󰡕의 역자와 연대에 대해서는 藤田宏達 2007, 39-46; cf. 藤田宏達 1970, 51-62; Harrison 1998. 556-557; Harrison 1999(이 논문은 학술회의 발표 논문으로 아직까지 公刊되지 않았으나 Nattier 2003, 200, n. 29에 인용되어 있고 藤田宏達 2007, 42 및 55, 주15에도 언급되어 있다).

       7) 󰡔무량청정평등각경󰡕의 역자와 연대에 대해서는 藤田宏達 2007, 46-56 (cf. 藤田宏達 1970, 35-51); Harrison 1998. 556-557 및 n. 18. 한역본들의 역자에 대해 루이스 고메즈(Gómez 1996, 130)는 후지타를 정토교에 관 해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자”라 하면서도 한역본의 역자를 “지겸, 지루가참, 강승개(康僧鎧)(양자 사이의 관계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 법현”의 순서로 언급하고 있다. 후지타와 달리 고메즈는 󰡔무량청정평등각경󰡕 을 전통적인 견해대로 지루가참의 번역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보리류지와 강승개를 연결한 것이 착오라고 한다면, 󰡔무량수경󰡕의 역자도 강승개로 보는 듯하다. 보리류지를 강승개의 앞에 놓은 것도 착오이다. 통상 3세기의 역경승으로 보는 강승개의 역사성에 관한 의문에 대해서는 Nattier 2008, 158-159 참조.

       8) 󰡔무량수경󰡕의 역자와 연대에 대해서는 藤田宏達 2007, 76-87 (cf. 藤田宏達 1970, 62-77).

       9) 후지타에 따르면 현재 39종의 산스크리트 필사본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중 가장 오랜 것은 아프가니스탄 에서 나온 것으로 서체로 보아 6-7세기의 것이다. 다음으로 12세기의 사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에 필사된 것이다. 이들 산스크리트 필사본이 현재 남아 있는 한역본들보다 대부분 늦은 것임은 명백하다. 藤田宏達 2007, 19-34.

 

이 본들을 토대로 후지타가 21개 항으로 열거한 극락의 시각적 특징은 아래와 같 다.10)

 

           10) 카가와 타카오도 비슷하게 21개 항을 열거하고 있다(香川孝雄 1993, 192-193). 이를 인용하여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카가와는 한 항에 두세 가지를 열거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은 현존 7개 본 가운데 서로 다 른 전승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인용하면서 각 항마다 A, B, C를 붙여 구별하겠다. (1) 아미타불은 지금도 존재하며 설법을 하고 있다. (2A) 극락은 칠보로 되어 있다. (2B) 극락은 부유하다. (3) 극락에는 춘추하동(春秋夏冬)이 없고 추위도 더위도 없다. (4A) 극락에는 칠보로 된 욕지(浴池)가 있다. (4B) 극락에는 강[河]이 있다. (5) 강의 물이 뜻대로 차가워지고 따뜻해진다. (6A) 못[池]에 향화(香華)가 있 다. (6B) 강(못)은 갖가지 향기로운 연화로 덮여 있다. (6C) 강기슭에 전단수(旃檀樹)가 있어 향기를 뿜는 다. (7) 강의 가운데 섬에 새가 와서 주변을 장엄한다. (8) 물이 흐르며 자연의 미묘한 소리를 발한다. (9) 강경자(講經者)나 송경자(誦經者) 등은 사과(四果)를 얻는다. (10) 극락에는 불선(不善)이나 고통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11A) 칠보의 그릇에 가득 채운 백미(百味)의 음식이 자연히 출현한다. (11B) 극락의 중생 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다. (12) 향과 꽃, 의복 등이 뜻대로 나타난다. (13A) 극락에는 신과 인간의 구별 이 없다. (13B) 모두 자연허무지신(自然虛無之身)과 무극지체(無極之體)를 받는다. (14) 여인 왕생의 성취를 기원하는 글이 있다. (15) 아미타불의 강당과 정사는 칠보로 되어 있다. (16) 극락에는 해, 달, 성신(星辰) 이 없다. (17) 아미타불의 수명은 극도로 길다. (18) 하늘[天]의 향수, 꽃, 보석 등이 내리고 하늘의 악기가 연주된다. (19) 극락에는 거대한 보리수가 있다. (20) 극락의 보살은 모두 일생보처(一生補處)이다. (21) 극 락에는 원림(園林)가 연지(蓮池) 등이 있다.

 

각 항은 󰡔무량수경󰡕에 나오는 표현에 기초한 것이고, 마지막의 E, W, L은 각각 초기 그룹, 󰡔무량수경󰡕, 후기 그룹에 나오는 특징임을 필자가 표시한 것이다.

   (1) 극락은 서방의 십만억 불국토 밖에 있다. (E, W. L)

   (2) 지옥, 아귀, 축생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E, W, L)

   (3) 국토는 자연의 칠보로 되어 있고 광대하며 제6천(타화자재천)의 보배와 같다. (E, W)

   (4) 수미산 등의 산이 없고 크고 작은 바다도 없다. (E, W, L)

   (5) 사계절이 없고 추위도 더위도 없다. (E, W)

   (6) 칠보의 수목으로 장식되어 있다. (E, W, L)

   (7) 보배로 된 나무가 바람에 날려 훌륭한 소리를 낸다. (E, W, L)

   (8) 거대한 보리수가 한 그루 있다. (W, L)

   (9) 보리수가 바람에 날려 훌륭한 가르침의 소리를 낸다. (W, L)

   (10) 시방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이 있다. (E, W)

   (11) 칠보로 만든 강당, 정사(精舍), 궁전, 누각이 있다. (E, W)

   (12) 목욕을 할 수 있는 못[浴池]이 있고 여덟 가지 공덕을 갖춘 물[八功德水]이 가득 차 있다. (E, W)

   (13) 물의 깊고 얕음이 바라는 대로 조절된다. (E, W, L)

   (14) 물의 차고 따뜻함이 바라는 대로 조절된다. (W, L)

   (15) 물결이 갖가지 가르침을 설하는 소리를 낸다. (W, L)

   (16) 일체의 누릴 수 있는 물품이 제6천과 같이 갖추어져 있다. (E, W, L)

   (17) 칠보로 된 그릇에 백 가지 맛의 음식이 자연히 생긴다. (E, W)

   (18) 음식이 있어도 실제로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 (W, L)

   (19) 의복, 음식, 화향(華香), 영락(瓔珞) 등이 바라는 대로 나타난다. (W, L)

   (20) 바람이 불면 지면에 아름다운 꽃이 덮이고 유연하게 된다. (E, W, L)

   (21) 보배로 된 연화에서 두루 빛이 나오고 많은 붓다가 나타나 가르침을 설한다.

(W, L) 이 21개 항이 󰡔무량수경󰡕에 나오나, 이 가운데 (3) (5) (10) (11) (12) (17)항은 후기 그룹에 나오지 않고 (8) (9) (14) (15) (18) (19) (21)항은 초기 그룹에 나오지 않는다.

후지타는 SSV에 대해서도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의 󰡔아미타경󰡕(402년, T366)을 중심 으로 현재 전하는 나머지 세 가지 본 ― 현장 역(T367), 산스크리트본, 티베트본 ― 을 대조 하여 극락의 시각적 특징을 8개 항으로 추출하고 있다. 대부분 LSV에서 추출된 것과 같으나 일곱 겹의 난순(欄楯, 난간)이 있다든지 새들이 법을 설한다는 등 LSV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 포함되어 있다(藤田宏達 1970, 457-462; 藤田宏達 2007, 360-362). 11)

 

         11) 아래의 8개 항은 SSV의 네 가지 본에 공통적으로 나온다. (1) 극락은 여기서 서방으로 십만억 불국토 너 머에 있다(후지타의 LSV 21개 항 가운데 1번). (2) 지옥, 아귀, 축생 등이 없다(LSV 2번). (3) 대지는 황금 으로 되어 있다(LSV 3번). (4) 일곱 겹의 난순, 비단 망[羅網], 늘어선 나무[行樹]가 있다. (5) 칠보로 된 연 못이 있고, 여덟 가지 공덕을 갖춘 물(팔공덕수), 갖가지 큰 연화가 있고, 주위에는 사보(四寶)로 된 계단, 칠보의 나무가 있다(LSV 12번). (6) 하늘의 음악이 있고 하늘의 꽃이 비처럼 내린다(LSV 10번). (7) 새들 이 법음(法音)을 내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삼보를 염(念)한다. (8) 보배로 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기분 좋은 음을 내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삼보를 염한다(LSV 9번). 

 

SSV 의 제본은 LSV의 초기 그룹보다 시기가 늦은 것들이다(藤田宏達 2007, 107-128; cf. 藤田 宏達 1970, 97-115). 연구자들은 일찍부터 아미타불과 극락의 기원을 불교 전통 안과 밖에서 탐색해 왔 다. 좀 황당하다 싶은 견해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藤田宏達 1970, 261-286의 요약 참조; cf. 香川孝雄, 1993, 97-115; 藤田宏達 2007, 368-381). 극락에 대한 원초 적인 생각이 인도 종교사에서 매우 오래전부터―예를 들어 불교 출현 이전부터―존재 했던 것이 아니라면 낙원에 대한 상상, 또 그 시각적 특징에 대한 상상은 그보다 이른 전통에서―직접 발원한 것은 아닐지라도―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 다. 먼저 주목할 것은 당시 불교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을 불교 전통 안에서의 낙 원과 같은 곳에 대한 지견이다. 쿠샤바티(Kuśāvatī), 우타라쿠루(Uttarakuru, 北俱盧), 또 천상의 도리천(Trāyastriṃśa)이나 타화자재천(Paranirmitavaśavartina)과 같은 곳들 이 극락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12)

쿠샤바티(팔리어로는 Kusāvatī)는 ≪Dīgha-nikāya≫의 에 속한 (II.17:169-185; Rhys Davids 1899-1921, II:198-217)와 이에 상응하는 한역본들에 언급되어 있다(T1[2].1.21b15-23c1; T5.1.169c18- 171a25, T6.1.185b16-186c10; T7.1.201a2-203a20). 석가모니 붓다는 자신이 열반에 들려고 하는 쿠시나가라가 과거에 마하수다르샤나(Mahāsudarśana, Mashāsudassana)라는 전 륜성왕의 도읍인 쿠샤바티였다고 하며 그곳이 어떤 모습이었고 왕이 그곳을 얼마나 아름답고 평안한 곳으로 만들었는지 설명한다.

 

아난다여, 왕도 쿠샤바티는 일곱 겹의 종려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 아난다여, 그 여러 겹의 종려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달콤하고 유쾌하며 매력적이고 취하게 하는 소 리가 났다. …… (DN II.171; Rhys Davids 1899-1921, II:201-202를 참고하여 옮김)

 

쿠샤바티에 대한 이러한 묘사와 극락의 묘사 사이의 상당한 유사성은 오래전에 이 경을 처음 번역했던 T.W. 리스 데이비즈(Rhys Davids)가 이미 주목한 바 있다.

그는 막스 뮐러(Max Müller)가 산스크리트본에서 번역한 LSV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 용하며 그 유사성을 지적한다.13)

 

      12)극락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 장소에 대해 탐색함에 있어 필자는 처음에 藤田宏達 2007(261-286)에 크게 힘 입었고, 이를 바탕으로 Rhys Davids 1899-1921, 松本文三郞 [1904]2006, 望月信亨 [1932]1977 등을 더 세 밀히 참조하였다.

      13) 리즈 데이비즈의 언급에 착안하여 마쓰모토 분자부로는 LSV/SSV와 제 본의 서술을 비교하면서 쿠샤바티와 극락의 유사성에 대해 상세한 논의를 펼쳤다. 松本文三郞 [1904]2006, 254-297.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의 나라에서 여러 겹의 종려나무와 여러 줄의 종들이 바람에 흔들 리고 울릴 때 달콤하고 매혹적인 소리가 난다(Müller 1880, 170을 참고하여 옮김).

 

<Mahasudassana-suttanta> 에서 쿠샤바티의 묘사는 왕이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꾸몄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왕은 종려나무 사이의 공간에 연못을 만들고 네 개의 계 단과 두 겹의 난순을 설치했다. 모든 계절의 꽃을 연못에 심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목욕을 즐겼다. 정교하게 꾸며진 다르마(Dharma)라 불린 궁전 누각들을 세웠다. 더위 를 피하기 위해 입구에 종려나무 숲을 만들었다. 달콤하고 유쾌한 소리를 내는 두 줄 의 종을 궁전에 달았다. 일곱 가지의 악기들이 달콤하고 유쾌한 소리를 냈다. 쿠샤바 티는 세속에 있는 전륜성왕의 도시였으나, 이곳을 꾸민 다양한 장엄은 극락과 매우 닮 은 모습이었다. 한편 우타라쿠루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사바세계의 북쪽에 있는 커다란 섬이다 (Anālayo 2008). ≪Aitareya Brāhmaṇa≫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은 불교 이전 시 기부터 브라흐만교 전통에서 천국과 같은 곳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이며, 󰡔라마야나 (Rāmāyaṇa)󰡕와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에도 언급되어 있다(Kirfel 1920, 108-109). 󰡔라마야나󰡕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읽을 수 있다. 가장 훌륭한 원숭이들이여, 유명한 우타라쿠루로 가라. 그곳은 자유롭고 번영을 누리고 있으며 언제나 행복하고 쇠함을 모른다. 그곳에는 추위도 더위도 없고, 노쇠함도 병듦도 없고, 슬픔도 두려움도 없고, 비도 해도 없다(Bhattacharya 2000, 194의 영역에서 옮김).14)

 

      14) 바타차리야(Ramkrishna Bhattacharya)는 이 부분을 Muir 1871, 325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부분은 벵갈 리어 고디야(Gauḍiya) 본과 서북지방(North-Western) 본에만 나온다고 한다. Bhattacharya 2000, 194, n. 11.

 

그곳에는 천 개의 강이 있으며, 강의 물은 감색 유리(瑠璃)의 잎으로 장식된 황금빛 연꽃 들로 빛난다. 그곳의 못은 황금으로 이루어지고 막 떠오른 태양과 같이 빛나는 붉은 연꽃 들로 장식되어 있다. 모든 곳이 빛나는 푸른 연꽃들로 덮여 있는데, 그 잎들은 값진 보석 과 같고 황금과 같이 빛난다. 그곳에는 불과 같이 황금빛으로 광채가 나며 온갖 보석들로 가득 차 있고, 온갖 종류의 보석으로 가득 찬 찬란한 산들에서 강으로 흐르고, 강의 모래 톱은 둥근 진주와 값진 보석들과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에는 새들이 가득하고 열 매와 꽃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향기와 맛과 촉감은 천상의 것과 같고 온갖 욕망을 낳는 다. 다른 훌륭한 나무들에는 여성과 남성을 위해 온갖 모습의 옷과 진주와 유리로 빛나는 장식들이 열린다. 다른 나무들에는 밝은 빛깔의 커버가 덮인 값진 황금빛 침상이 열린다. 다른 나무들에는 마음을 기쁘게 하는 꽃다발과 온갖 종류의 값진 음료와 음식이 열린다.  …… 노래와 악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불행하지 않고, 누구도 사랑이 모자라지 않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미 덕들은 나날이 늘어만 간다(Lefeber 2016, 153-154의 영역을 德永宗雄이 교감하여 편찬한 산스크리트본[https://sanskritdocuments.org/mirrors/ramayana/valmiki.htm, 2019년 9월 검색]과 비교하여 옮김). 15)

 

여기에 󰡔라마야나󰡕에서 우타라쿠루의 묘사가 LSV에 나오는 극락의 묘사보다 연 대가 올라간다고는 볼 수 없으나, 우타라쿠루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더 이른 시기부 터 존재해 왔으며 불교에서의 극락에 관한 상상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 인다.16) 우타라쿠루는 ≪Dīgha-nikāya≫의 <Āṭānṭiya-sutta>(III.32: 199-202; Rhys Davids 1899-1921, II:192-194)에서도 사람들의 삶과 생계에 있어서 매우 편안한 곳으로 그려져 있다. 이 경에서는 우타라쿠루의 주민들은 상품이나 여인을 소유하지 않으며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또 우타라쿠루에 있는 여러 도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주로 나무와 새, 연못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역으로만 전하는 장아함(長阿含)의 ‘Lokasthāna-sūtra’(이하 LS라 약칭함)에도 우 타라쿠루에 대한 묘사가 상세히 나온다. LS의 네 가지 한역본 가운데 󰡔대루탄경(大樓 炭經)󰡕(3세기 말 法立·法炬 공역; T23)과 󰡔장아함경󰡕에 실린 「세기경(世記經)」(T1[30])이 이른 것이고 이 글에서의 논의와 관련지어서도 참조하기에 유용하다.17)

 

       15) 필자가 처음 참조했던 바타차리야의 논문(Bhattacharya 2000, 194-195 및 n. 12)에서는 샤스트리의 번역 (Shastri 1976, 284-285)을 인용하며 “이 부분은 모든 본에 대개 공통적으로 나온다”고 한다. 위에서는 르페 이버(R. Lefeber)의 최근 번역을 참조하여 옮겼다.

      16) 여러 문헌에서 묘사된 극락과 우타라쿠루의 유사성은 마쓰모토 분자부로가 처음 주목했고(松本文三郞 [1904]2006, 297-306), 그 뒤에 모치즈키 신코가 더 많은 불교 쪽 자료를 참조하여 상세히 논의했다(望月信亨 [1932]1977, 630-637).

      17) 다른 두 한역본은 󰡔기세경(起世經)󰡕(隋 闍那崛多 역, T24)과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隋 達磨笈多 역, T25) 이다. ≪Dīgha-nikāya≫에는 이에 상응하는 경이 없다.

 

이 두 경에 실린 내용은 대체로 같고 세부에서 좀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차이는 전승 과정에서 양 자가 약간 다른 갈래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대루탄경󰡕에 실린 우타라쿠루의 묘사(T23.1.279c25-281a3)에는 이러한 낙원 장면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인 욕지(浴 池), 즉 목욕하는 못과 원림(園林)이 포함되어 있다.

 

이곳의 중앙에 있는 울난다(鬱難陀)라 불리는 욕지는 네 가지의 보배, 즉 금, 은, 유리, 수정과 다양한 빛깔의 연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연꽃의 뿌리와 줄기는 달콤한 꿀과 같은 맛의 즙과 빛, 향기를 뿜는다.

울난다 못의 네 방향에 위치한 네 개의 원림은 일곱 겹의 난순과 네 가지 보배로 된 다양한 나무들로 꾸며져 있다.

나무들은 갖가지 향기를 뿜고 꽃을 피우며 열매가 열리 고, 온갖 종류의 피륙, 보석, 음악으로 장식되어 있다. 우타라쿠루의 네 면에는 아름답 게 꾸며진 네 개의 아나바탑타(Anavatapta) 못(阿耨達池)이 있다. 「세기경」은 아나바탑 타 못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 물은 맑고 더러움이 없다. 그곳은 칠보로 된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새 들이 서로 조화롭게 구슬피 지저귄다(T1[30].1.117c24-25).

 

극락과 달리 LS에 묘사된 우타라쿠루에는 산도 있고 강도 있다. 이곳에서의 쾌락, 즉 장수하고, 마음대로 먹고, 성욕을 채우며, 변을 보면 변이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 등 은 인간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구와 관련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의 시각적 특징 은 우리가 극락의 묘사에서 익숙하게 읽는 내용과 매우 닮아 있다. 세계의 출현과 쇠망을 설명하면서 LS는 사왕천, 도리천 등 다양한 천인들이 영역 에 대해서도 상세히 묘사한다.

 

사왕천에서 각각의 사천왕이 사는 성은 일곱 겹의 성벽 과 난간, 보석 커튼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T23.1.293b12-294a20; T1[30].130b1-131a2).

건물과 나무는 모든 부분이 칠보로 되어 있다. 원림에는 누각과 욕지가 있다. 온갖 종 류의 나무에서 향기가 뿜어나오고 열매가 열린다. 갖가지 새들이 서로 조화롭게 구슬 피 지저귄다. 도리천에서는 이러한 건물과 정원에 대한 묘사가 반복되면서 더 증광되어 있다(T23.294a28-300a19; T1[30].131a03-137a23).

건물과 나무는 물론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 우타라쿠루나 사왕천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누각과 원림이 있고 새들이 서로 조화롭게 지저귄다.

LS 전체에서 이러한 묘사, 즉 “有園觀浴池樹木 飛鳥相和而鳴”과 같은 구절은 극도로 정형화된 표현으로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건물과 나무에 대한 비슷한 묘사는 LS에서 타화자재천과 범천 사이에 위치한18) 마 라(Māra)의 궁전에 대해서도 등장한다.

 

          18)󰡔대루탄경󰡕에서는 처음에 범가이천(梵迦夷天, Brahmakāyika; 색계의 初禪天) 위에 마라천(摩羅天)이 있 다고 하나, 긴 설명 뒤에 다시 범가이천이 마라천의 위에 있다고 엇갈린 이야기를 한다(T23.1.277b11-12, 277c7). 앞의 언급은 한역자의 착오인 듯하다. 󰡔세기경󰡕에는 이에 해당하는 문장이 없다.

 

“욕지에는 꽃이 피어 있다. 갖가지 나무, 갖가 지 잎, 갖가지 꽃, 갖가지 열매가 갖가지 향을 낸다. 갖가지 새들이 각각 구슬피 지저 귄다”(T23.1.277b12-288c7, 특히 277c5-7에서 인용; cf. T1[30].1.115a29-115b2).

 

실은 이러한 구절은 천상계나 우타라쿠루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궁전처럼 살기에 매우 편안하다고 여겨진 곳들, 즉 전륜성왕이나 나가(nāga)의 성, 심지어 아수라나 지옥의 야마 왕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등장한다(T23.1.281c17-19, 281c24-25, 286b21-26, 288b9-10, 288b14-28; T1[30].1.120a2-4, 126b10-12, 127b3-5, 129b8-1319)). 이제까지 본 바와 같이 불교 문헌 전통에서 언급된 다양한 이름과 성격의 낙원과 같은 장소에 대한 묘사는 극락의 시각적 특징으로 묘사된 것들(예를 들어 후지타의 21 개 항 가운데 3, 6, 7, 11, 12, 16, 17, 19, 20)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극락의 묘사에 등 장하는 여러 시각적 요소는 실은 고대 인도에서 낙원에 대해 상상할 때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극락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별로 없다. 또한 이것은 초기 인도 대 승불교에서 극락과 함께 주목받았던, ≪Akṣobhyavyūha≫에 언급된 아촉불(阿閦佛 Akṣobhya)의 불국토인 아비라티(Abhirati; 阿比羅提, 妙喜)에 대한 묘사(T313.11.755c9- 756c21)와도 별로 다르지 않다.

 

         19) 특이하게도 󰡔세기경󰡕에서는 해당 부분에 연못에 대한 언급이 한결같이 빠져 있다.

         20) LSV의 현존 7개 본에 실린 극락에 대한 묘사를 비교하기 위해 필자는 LSV의 제본을 단락별로 대조하 여 정리한 카가와의 연구(香川孝雄 1984)를 참조하고 그것을 인용한다. 한편 “지옥도 없고 축생이나 아수 라도 없다”는 말은 아미타불 전생의 법장(法藏) 비구의 서원 가운데 제8원(願)에도 나온다(香川孝雄 1984, 108-109).

         21) “여성이 없다”는 구절은 LSV의 초기 두 한역본에만 나오고 다른 본들에서는 해당 부분에 이 구절이 없 다. 같은 뜻의 말, 즉 “극락에는 여성이 없고 그곳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남성으로 나야 한다”는 말 이 초기 두 한역본에서 법장 비구의 제2원에 나오는데, 역시 이 말도 LSV의 다른 본에서는 해당 부분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량수경󰡕에서는 법장 비구의 제35원에“만일 제가 붓다가 될 때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불국토의 여성들이 제 이름을 듣고 기뻐하며 즐거이 믿고 보리심을 일으 키고 여성의 몸으로 나는 것을 싫어하여 멀리하였는데도 목숨이 다한 뒤에 다시 여성의 모습을 받게 된다면, 저는 차라리 붓다가 되지 않겠나이다”라는 말이 나오고(T360.12.268c21-24), 같은 구절이 후지타가 분류한 후기 그룹의 네 본에 다 등장한다(香川孝雄 1984, 138-139). 아마도 원래에 있던 “여성이 없다”는 구절 이 너무 부정적으로 느껴져서 후대 본들에서 표현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폴 해리슨은 극락에 여성이 없다는 문제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토교(Pure Land Buddhism)가 인기를 얻으면서 초기의 강경한 입장을 완화시키며 ≪Sukhāvatī-vyūha≫를 개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초기본에 이 경을 쓴 남성 수행자들의 단호한 반(反)여성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면, 후대본에는 보다 폭넓고 다양한 청중을 의식하여 보다 모호하면서도 보다 포용적인 정신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까?”(Harrison 1998, 특히 564-565). 샤오웨(肖月)는 초기 두 한역본, 특히 󰡔대아미타경󰡕의 “여성이 없다”는 구절은 한역자에 의해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肖越 2013).

 

그러나 LSV의 경우에 극락을 다른 낙원과 구별하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LSV에서는 극락에 “지옥도 없고 축생이나 아수라도 없다”라 한다 (후지타의 21개 항 가운데 2번; 香川孝雄 1984, 190-191 참조20)). 이것은 낙원을 묘사하는 초기 전통에서 소박한―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 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적인 목 표로서 극락은 다른 낙원들보다 더 나아간 특징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흥 미롭게도 이와 비슷하게 “세 가지 악취(惡趣), 즉 지옥, 축생, 아귀가 없다”는 언급이 ≪Akṣobhyavyūha≫에서 아비라티에 대해서도 나온다(T313.11.755c7-8). 극락에는 “여 성이 없다”는 생각(후지타의 21개 항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香川孝雄 1984, 22521))도 성적 욕망에서 벗어난 극락의 이미지를 뚜렷이 부각시키기 위해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2) “지옥도 없고 축생이나 아수라도 없다”는 언급과 “여성이 없다”는 언급이 매우 흥미 로운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후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아미타정토도에서는 이 두 가 지가 의미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점을 상기하고 이 점이 하나의 참조가 될 수 있 다고 한다면, 이러한 특징은 어쩌면 인도에서도 LSV의 독자에게 극락의 특징으로서 그다지 반향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극락에는 “산이 없고 크고 작은 바다도 없다” 는 언급도(후지타의 21개 항 가운데 4번; 香川孝雄 1984, 200-201) 극락을 지상에서 이상적 인 장소로 제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23)

 

         22) “여성이 없다”는 생각은 앞서 인용한 󰡔라마야나󰡕에서 우타라쿠루에서 누릴 수 있는 성적 쾌락을 예찬하 고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 생략된 구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곳에 는 아름다움과 청신함이 뛰어난 빼어난 여인들이 있다. 그곳에서 간다르바(gandharva), 킨나라(kinnara), 싯다(siddha), 나가(nāga), 비디야다라(vidhādhara)가 이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다. 모든 이들이 선업을 쌓 았고, 모든 이들이 성적 즐거움에 열중해 있고, 모든 이들이 젊은 여성들과 지내며, 쾌락과 부유함을 누린 다”(Lefeber 2016, 154).  

        23) 잰 나티에(Jan Nattier)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이 없는 것은 인도 불교 문헌에서 이상 적인 땅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등장하곤 한다. 아미타의 세계, 󰡔법화경󰡕에서 성불하는 다양한 성문들이 이 루는 미래의 세계, 또 미래에 미륵불이 우리의 염부제에서 이루게 될 세계가 여기에 포함된다.”

나티에는 브루스 링컨(Bruce Lincoln)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산의 부재’라는 모티프는 인도 토착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의 평준화와 평등한 사회에 대한 약속”과 연관되어 있던 이란의 종교 전통에서 빌어 온 것일 가능성을 제시한다(Nattier 2000, 81, n. 23; Lincoln 1983).나티에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고 ‘산의 부재’ 라는 모티프의 외래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도 불교 문헌에 서술된 다른 낙원들, 예를 들어 천상의 곳들에서는 산이나 강이 그 지형의 필수적인 요소를 이루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유사하게 “땅은 평평하다. …… 높거 나 낮은 곳이 없고, 산이나 언덕이나 계곡도 없다”는 서술이 ≪Akṣobhyavyūha≫에 도 나온다(T313.11.755c9-10). LSV의 초기 그룹의 두 한역본은 심지어 극락에는 갠지스 와 같은 강도 없다고 한다(香川孝雄 1984, 201). 그러나 이 언급이 좀 이상했는지 후대 본들에서는 ‘바다는 없으나 강은 있다’는 서술로 바뀐다(香川孝雄 1984, 200-201).

LSV 의 초기 두 한역본과 󰡔무량수경󰡕에 나오는 “사계절이 없다”는 서술(香川孝雄 1984, 201) 은 사계절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한문 번역자들이 삽입했거나 원본과 다르게 수정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더위도 추위도 없다”는 생각(香川孝雄 1984, 201) 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와 유사한 생각은 󰡔세기경󰡕에서 우타라쿠루에 대해서도 서술된 것이며(T1[30].1.118a5, 118c13, 120c26), 아촉불의 아비라티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T313.11.756a27-28).

극락에 왕생할 때 연못에서 화생(化生, upapāduka)한다는 것은 LSV와 SSV에서 강조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香川孝雄 1984, 138-139, 223, 248-253). 그러나 화생은 극락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며 모든 천상계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 는 방식이다.24)

또한 연화 화생은 이미 브라흐만교 전통에 그 선례들이 있다(塚本啓祥 1979).

그러나 화생이 연화 위에 이루어진다고 하여 화생을 더 멋있게 꾸민 것은 불교 전통 내에서는 LSV에서 처음 시작되어 다른 대승 경전들에서도 따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Rhi 1991, 133-134). 전체적으로 LSV와 SSV에서 보이는 극락의 묘사는 그 구조나 세부 서술에 있 어서 그 이전의, 혹은 기존의 낙원에 대한 묘사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LSV 를 지은 이들도 거듭 극락의 여러 요소들이 ‘제6천’과 같다고 하거나 어떻게 그런지 는 언급하지 않으나 제6천보다 뛰어나다고 하면서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예를 들어 T362.12.301b6, 301c12, 303b26, 303c7, 304c28, 305b21 참조). 25)

 

      24) 예를 들어 󰡔증일아함경󰡕에서는 사생(四生)을 정의하며 그 가운데 화생은 모든 천인, 지옥 중생, 아귀, 일부 인간과 동물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T125.2.632a7-19).

      25) LSV의 초기 두 한역본에 나오는 석가모니불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극락을 찬양하기 위해 LSV가 사용한 방식을 잘 예시해 준다. “아미타의 불국토에서 모든 강당과 사택(舍宅)은 제6천의 왕의 거처보다 백천억 만 배 우월하다”(T362.12.308b3-4, cf. T361.12.290a5-6).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 우월함은 모호한 수적 과장에 의해서만 표현되고 있다.

 

극락의 시각적 묘사는 다른 낙원에 대한 묘사를 통해 당시 불교도들에게 익숙한 표현이었을 것이며, 극락의 시각 성이 새롭거나 특별하다고 인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LSV나 SSV에서 읽는 장황한, 그러나 다소 진부한 극락의 묘사가 그것을 시각적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 게 할 만큼 인상적으로 느껴졌을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가정에 불과한 것이지 만, 경전에 나오는 극락의 묘사가 설사 시각적 이미지로 옮긴다 할지라도 극락의 이미 지를 아비라티와 같은 ‘다른’ 낙원을 묘사한 이미지와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LSV에서는 극락에 관한 적극적인 시각적 체험, 즉 관상(觀想)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초기의 두 한역본에서 석가모니 붓다는 아난다(Ānanda, 阿難)에게 서쪽의 해 가 지는 방향을 향하여 엎드려 “namo amitābha samyaksaṃbuddha”(南無阿彌陀 三耶三佛檀)을 낭송하며 아미타 붓다를 경배할 것을 권하고 있다(T362.12.316b25-28, cf. T361.12.298b29-298c2). 그러자 아미타 붓다가 멀리 극락에서 빛을 발하여 석가모니 붓 다의 법회의 회중 모두가 칠보가 된 아미타 붓다의 불국토를 볼 수 있게 한다. 뒤에 석가모니는 아난다와 아지타(Ajita, 阿逸)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극락의] 아미타와 모든 보살과 아라한, 자연의 칠보로 된 불국토에 관해 설한 바 있다. [그대들이 본 것과] 다른 점이 있는가?(T362.12.316c28–317a1; cf. T361.11.299a1–2)26)

 

     26) 이 구절은 󰡔무량수경󰡕을 포함하여 LSV의 다른 본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아난다와 아지타는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 두 본에서 극락의 실제 관상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것마저 매우 간결 히 다루어져 있다. 더욱이 여기서 관상은 불국토를 시각적으로 체험하는 적극적인 종 교 행위로서 제시되어 있다기보다 석가모니가 앞서 설했던 극락에 대한 묘사를 확인 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LSV의 산스크리트본에서는 이 경의 앞부분에 나오는 극락에 관한 긴 묘사를 짧게 축약한 단락을 삽입함으로써 이 부분을 늘리고 있다.

 

“아지타여, 이 불국토의 공덕과 장엄이 완전히 갖추어진 모습을 보았는가? 위로는 공중에 아름다운 정원과 아름다운 숲과 아름다운 원림(園林), 아름다운 강과 못,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청연화(utpala), 홍연화(padma), 백수련(kumuda), 백연화(puṇḍarīka)로 가득 차 있고, 아래로는 지면에서 색구경천(色究竟天, Akaniṣṭha)의 주처(住處)에 이르기까지 허공 이 꽃으로 충만하고, 화만(華鬘)으로 장식된 갖가지 기둥들이 두루 차 있고, 여래에 의해 화현된 갖가지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Ashikaga 1965, 72; Gómez 1996, 103의 영역을 참조하여 옮김)

 

이 단락은 초기의 두 한역본뿐 아니라 󰡔무량수경󰡕이나 󰡔대보적경󰡕의 「무량수 여래회」에도 보이지 않고 산스크리트본 외에 10세기 번역인 󰡔대승무량수장엄경󰡕 (T363.12.325b05-12)에만 등장하는 것이어서 명백히 LSV의 문헌사에서 후대에 나타난 변화로 볼 수 있다. 이들 본에서도 극락의 관상은 실행해야 할 종교 행위로서 제시되 어 있지 않다.

이 관상에는 시각적 재현물이 필요했으리라 볼 만한 중요성도 부여되 어 있지 않다. 또한 초기의 두 한역본에서 극락의 묘사 뒤에는 아미타 붓다가 발하는 빛이 다양한 중생들을 고통과 환난에서 구하는 이야기가 이어지는데(T362.12.316c11-28; T361.11.298c14-29), 아마도 이것이 LSV에 이 부분을 넣은 이유인 듯하다. 이것은 빛에 관한 이야기일 뿐 극락의 장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중생 구제에 대한 언급은 후대 본들에서 사라지는데, 아마도 강조하는 바가 변해서인 듯하다.

LSV에서 아미타나 극락의 관상은 삼배(三輩), 즉 세 부류 중생의 왕생에 대한 설명 에서도 등장한다(香川孝雄 1984, 248─253). 초기의 두 한역본에서 석가모니는 상배(上輩) 의 중생은 꿈 속에서 아미타불과 보살, 아라한들을 보고 수명이 다하면 불보살의 마 중을 받아 바로 극락에 화생한다고 한다.

반면 중배(中輩)와 후배(後輩)의 중생은 자신 의 나태함에 대해 참회하고 수행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극락에 바로 가 지 못한다.

그들은 도중에 먼저 칠보로 된 성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연화 가운데에 화 생한다. 그 성은 목욕하는 못과 나무, 음악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다양한 음식 들이 가득 차 있다.

그곳에서는 도리천에 비견될 정도로 최고의 즐거움이 제공되고 있 다. 그러나 수행과 선업의 부족함 때문에 그 성에서 500번의 삶 동안 머무른 뒤에야 극락에 다다를 수 있다. 극락의 묘사는 여기에 이어지지 않는다.

극락이 이 성보다 훌 륭하다는 설명도 없다.

흥미롭게도 이 낙원과 같은 성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마치 방편과도 같은 경유지로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극락의 관상은 여기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이 설명마저 󰡔무량수경󰡕을 필두로 LSV의 후대 본에서 는 사라져 버린다.

아마도 극락을 매우 닮은 과도적인 장소에 대한 언급이 극락의 최상의 지위, 최상의 시각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III. 동아시아의 아미타불/정토의 조형예의 현실

 

  ( * 도1-도12: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아미타와 관련된 초기 경전 전통에서 극락의 시각성이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특별 했는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극락을 상징하는 특별한 시각적 모티프들로 화려한 궁전 누각이나 아름다운 욕지(浴池), 붓다 가 앉은 장엄한 연화좌 등을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관념은 실은 동아 시아 불교에서 극락을 도해하면서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을 부각시켰고 또 아미타정토 도라는 주제가 크게 유행했던 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642년 에 그려진 중국 돈황의 막고굴 제220굴의 벽화에서 위에서 언급한 여러 시각적 요소 들로 가득 찬 극락 정토의 장면을 볼 수 있다(도 1). 아미타불이 두 협시보살인 관음, 대세지와 함께 궁전 누각으로 둘러싸인 화면의 중앙에 앉아 있고, 아래쪽에 극락의 즐 거움을 상징하는 악사들과 무희들, 욕지에는 연화 위에 왕생한 중생들이 보인다.

698 년에 그려진 막고굴 제332굴의 벽화에서는 누각이나 난간과 같은 건축 구조물이 없이 전체 화면이 물이 가득 차 있고, 연못으로 보이는 물 위에 솟은 연화좌 위에 아미타불이 앉아 역시 연화좌 위에 선 두 보살입상, 앉은 많은 인물들에 둘러싸여 있다(도 2).

일본에서 6세기에 만들어진 타치바나 부인 주자(橘夫人廚子)의 아미타 삼존(도 3)이나 7세기 말─8세기 초에 그려진 호류지(法隆寺) 금당 벽화의 아미타 삼존(도 4)과 같이 비교적 간소한 구도의 예들도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 아미타정토도 혹은 아미타삼존에 대한 지견이 연구자들로 하여금 그 원류를 인도아대륙에서 찾게끔 고무시켰다. 특히 그 서북부에 위치한 간다라(Gandhāra)의 일견 비슷한 예들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源豊宗 1926, 樋口隆康 1950). 특히 한때 ‘사위성(舍衛城)의 대신변(大神變)’을 나타낸 것 이라 알려지기도 했던 라호르박물관의 모함메드 나리(Mohammed-Nari) 출토 비상(碑 像)(도 5) 같은 예는 근래에도 일부 학자들이 극락의 도해일 수 있다고 하며 주목하고 있다(Huntington 1980; Quagliotti 1996; Harrison & Luczanits 2012). 27)

 

         27) 존 헌팅턴(John Huntington)은 모함메드 나리 비상을 아미타정토도로 비정하면서 모함메드 나리 비상과 동아시아 아미타정토도의 유사성을 명시적으로 지적하지는 않고, LSV의 경전 서술과의 비교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논의의 문제점은 필자가 이전의 연구에서 거듭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Rhi 1991, 130- 136; Rhi 2003, 171-174). 그러나 헌팅턴이 돈황이나 호류지의 동아시아 아미타상이나 아미타정토도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은 그의 글에서 드러난다(Huntington 1980, 656-657, 663-664). 필자는 동아시아의 예들에 대한 지견이 없이는 어느 연구자도 모함메드 나리 비상을 아미타불에 연결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비상에 조각 된 장면은 막고굴 제332굴 벽화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래에서는 동아 시아의 아미타 및 극락의 도해가 간다라에서 그 원류를 찾고자 하는 시도를 과연 뒷 받침할 수 있는지 그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겠다. 특히 연지(蓮池)와 연화좌에 초점을 맞추어 경전에 드러나는 양상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연지와 연화좌는 보통 극락의 시각적 재현에서 가장 대표적 특징(hallmark)인 것처 럼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연지는 극락에만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특유한 것이 아니며, 고대 인도 종교 전통에서 낙원을 상상할 때 흔히 포함되었던 모 티프이다. 초기 인도 불교미술에서 연지는 서사 장면의 맥락 밖에서는 극히 희소하다. 예외라면 간다라에서 보듯이 연화좌 위에 앉은 붓다가 삼존 형식으로 혹은 보살로 보 이는 회중에 둘러싸인 모습을 새긴 비상이나 부조가 특별하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앞서 말한 모함메드 나리 출토 비상인데(도 5), 여기서 붓다는 물 위에 솟아 있는 거대 한 연화 위에 앉아 있다. 출렁이는 물결 위에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으며, 나가(nāga; 분명히 왕생한 인간은 아니다)가 위쪽의 붓다에게 경배하고 있다. 또 이 물에서 솟아오 른 연꽃들 위에 화면을 가득 메운 인물들이 앉아 있다. 이 물은 연지를 나타낸 것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이 극락의 묘사에 등장하는 연지인지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극락의 연지는 예외 없이 다른 낙원의 묘사에 나오는 바와 같이 목욕을 위한 곳이다. 극락의 도해로 비교적 확실하게 비정(比定)할 수 있는 중국의 예들(6세기 후반 및 그 이후)에서 연지는 난순과 다리를 갖춘 구조로 등장한다. 또한 엄격히 말한다면 극락의 연못에는 LSV에서 명시하듯이 나가나 물고기가 있을 수 없다. 모함메드 나리 출토 비상에 나오는 물은 오히려 불교 문헌 전통의 다른 맥락에 서 거론된 거대한 연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나바탑타 못은 불교 문헌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설법하는 장소로 종종 등장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석가 모니는 아나바탑타 못에 앉아 칠보로 된 줄기 위에 올려진 황금빛 연화 위에 앉아 역 시 연화 위에 앉은 비구들에게 설법한다(T125.2.708c11-709a4).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약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에서는 석가모니가 999명의 비구들과 함께 나가 아나 바탑타의 못으로 가서 천 명이 모두 아나바탑타가 만든 화려한 연화 위에 앉은 뒤 그 들의 전생에 관한 설법한다(T1448.24.76-77a).

극락과 달리 아나바탑타 못은 나가나 물고기가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두 예에서는 승려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모함메드 나리 출토 비상과 달리 석가모니가 비구들에게 설법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헌들을 시각적인 조형 예들에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모함메드 나리 비상에 새겨진 출렁이는 물은 성이나 궁전 안에 있는 건축적으로 조형된 연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것이 연지를 나타낸 것인지조차 의문이 든다.

어쩌면 이 물은 연지보다 훨씬 큰 것, 큰 바다, 붓다가 세계에 출현하는 원초적인(primordial) 기반이 되는 대양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Rhi 2013, 8-10).

극락을 도해한 중국의 예들에서는 통상 눈길을 사로잡는 커다란 연화 위에 아미타 불이 앉아 있다.

그러나 LSV나 SSV에서 아미타불의 대좌로서 연화에 대한 언급은 극히 미미하다.

놀랍게도 LSV의 여러 본 가운데 초기 두 한역본에만 연화좌에 대한 언급이 각각 한 번씩 나올 뿐이며, 다른 본들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SSV에도 연화좌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미타불과 모든 보살, 아라한은 못에서 목욕을 마친 뒤 커다란 연화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자 세찬 바람이 네 방향에서 불어온다(T362.12.305c3─4; cf. T361.12.285b16─18).

 

이 짧은 언급은 연못에서 목욕할 때 원하는 대로 물의 깊이가 조절된다는 언급 뒤 에 나오고 그 뒤에 바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언급은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나오며, 여기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미타 관련 경전 전통에서 연화좌가 매우 특별하게 다루어진 것처럼 선입견을 갖고 있 으나, 놀랍게도 연화좌는 LSV의 초기 두 한역본에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 미하게 다루어져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이 언급마저도 LSV의 후대 본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아미타의 대좌로서 연화라는 것이 LSV의 전통에서 원래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무량수경󰡕과 다른 후대 본들에는 위와 같은 부분이 나오지 않는 대신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또한 많은 보배 연화가 세계를 가득 채운다. 하나하나의 보배 연화에는 백천억의 잎이 있 고, 그 잎에서 나오는 빛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깔로 이루어져 있다. 푸른 연꽃에서는 푸른 빛이, 흰 연꽃에서는 흰 빛이 나오며, 검은 연꽃, 노란 연꽃, 붉은 연꽃, 자색의 연꽃 도 역시 그러하다. 그 휘황찬란하고 밝게 빛남이 해나 달과 같다. 하나하나의 꽃에서 삼 십육백천억의 빛이 나오고, 하나하나의 빛에서 삼십육백천억의 붓다가 나온다. 몸의 색 은 각각의 꽃에서 삼천육백만억의 빛줄기가 나온다. 또 각각의 빛에서 삼천육백만억의 붓다가 나온다. 붓다의 몸은 정제된 황금의 빛을 띠고 있고, 상호(삼십이상과 팔십종호)는 빼어나고 특별하다. 하나하나의 붓다도 백천의 빛을 발하고 두루 시방[의 중생]을 위해 미묘한 법을 설한다. 이와 같이 모든 붓다는 각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이 붓다의 참 된 길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한다(T360.12.272a22-272b2; 香川孝雄 1984, 198-199). 28) 명백히 이것은 아미타불이 앉는 연화를 특정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는 대승과 비(非)대승의 많은 문헌에 나오는,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붓다가 빛 줄기 위에 신비롭게 화현하는 신변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29)

 

 

       28) 이 부분은 10세기 번역인 󰡔대승무량수장엄경󰡕을 제외한 모든 후대 본들에도 나온다.

       29) 이 유형의 신변은 붓다나 보살이 발하는 빛줄기에, 혹은 붓다나 보살이 신통력으로 화현시킨 연화좌 위에 수많은 붓다가 출현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 신변은 종종 붓다가(주로 석가모니불이) 행하는데, 붓다의 경우 보다는 적으나 문수나 보현과 같은 보살이 행하기도 한다. 대승 경전에 자주 언급되나 가장 이른 시기의 대승 경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대략 4세기경부터 문헌 전통에서 뚜렷하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화엄 경󰡕이나 현장(玄奘) 역의 󰡔반야경󰡕(T220) 같은 경에서이다(예를 들어 T278.9.407b14-407c5; T220.5.2a29-b9 참 조). 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형태의 신변이 비(非)대승 문헌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나 ≪Dīvyavadāna≫에서 석가모니불이 사위성에서 외도를 물리치기 위해 행했다는 신변 이야기에 등장한다. 이 신변은 인도 밖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현우경(賢愚經)󰡕(T202)이나 󰡔불본행경(佛本行經)󰡕(T190)에 실린 사위 성 신변 이야기에서도 보인다(Rhi 1991, 249, 268, 282-283, 303-305).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흥미로운 텍스 트는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T643)이다. 여기에서는 붓다의 몸의 여러 부분에서 발산하는 빛줄기마 인도 불교에 아미타정토도는 존재했는가 _29 극락에 관한 초기 문헌 전통에서 연지도, 아미타가 앉는 연화좌도 별다른 중요성 을 부여받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설사 극락을 시각적 이미지로 옮기려는 욕망이나 필 요성이 존재했다 할지라도─물론 이것은 필자가 계속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가정에 불 과하지만─연지나 연화좌는 시각적 재현에서 중요한 요소로 여겨질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고 보인다. 이것은 중국 초기 불교미술에서 등장하는 아미타불의 조형 예에서 도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중국에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아미타불상은 병령 사(炳靈寺) 제169굴에 있는 상이다. 이 상은 관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만들어진 아미타삼존의 주존으로 묵서명에 의해 세 상의 이름이 다 확인된다(도 6; ZSYB, 204, no. 21). 30)

 

        30) 해당 묵서명은 “无量壽佛(무량수불)”,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得大勢志菩薩(득대세지보살)”이라 되어 있다(ZSYB, 255, 제169굴, 6번). 이 불삼존의 동쪽에 그려진 불좌상에도 “无量壽佛”이라는 묵서명이 쓰여 있다. 이 불좌상은 좌우측의 두 그룹의 인물들 사이에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 그룹에 “維摩詰(유마힐)”이 라는 묵서명이 있어서 이 불좌상은 󰡔유마경󰡕에 의거한 장면의 한 부분이라 보이고, 따라서 “无量壽佛”이 라는 묵서명은 착오인 듯하다(ZSYB, 도판 36, 37; 205, no. 37; 257, 제169굴, no. 11).

 

 

인접한 암벽에 쓰여져 있는 묵서와 같은 연대라면 이 삼존은 서진(西秦) 시 대(385-431), 42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ZSYB, 205, no. 28, 255). 아미타불 은 삼존의 중앙에서 연화좌 위에 선정 자세로 앉아 있다. 연화좌는 활짝 열린 모양이 아니라 초기 중국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아래로 잎사귀가 늘어진 소위 복련좌(覆蓮 座) 형식이다. 이 시기에, 또 그 뒤에도 이러한 형식의 연화좌는 불상이나 보살상에서 존명에 무관하게 쓰였다. 따라서 이 상도 묵서명이 없었다면 아미타로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초기의 다른 두 예는 464년에 만들어진 작은 금동불상(松原三郞 1995, 도판 32)과 476년에 만들어진 석조불상이다(松原三郞 1995, 도판 51, 52). 석조상은 대좌가 파손되어 볼 수 없고, 금동상은 횡으로 중첩된 몇 개의 판이 위에서 아래로 크 기가 줄어들다 다시 늘어나는 모양의 소위 수미좌(須彌座) 형식을 하고 있다. 이 두 상 도 다른 존명을 가진 불상들(대부분 석가모니불이다)과 도상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불가 능하다. 또 하나의 아미타불상은 사천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483년 작이다. 법의가 대 좌 부분을 가리고 있으나 연화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도 7; 松原三郞 1995 [本文編], 250- 251, 도판 6의 설명).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내리 고 있다. 다 수많은 붓다가 출현하는 이야기가 여러 부분에서 나온다(예를 들어 T643.15.663-693). 흥미로운 점은 이 들 텍스트 가운데 상당수, 특히 󰡔화엄경󰡕 60권본이나 󰡔관불삼매해경󰡕이 󰡔무량수경󰡕을 번역한 불타발타라 역이라는 사실이다. 󰡔무량수경󰡕에 나오는 이 부분을 번역자가 자의적으로 삽입한 것이 아니라면, 불타발 타라의 시기에 이러한 신변 이야기가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신변이 LSV의 문 헌사적 전개에서 후대에 등장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돈황 막고굴 제285굴 벽화에서는 묵서명에 의해 세 구의 아미타불상을 확인할 수 있다(도 8; ZSDM 1: 215‒217 및 도판 122-124, 139). 이 세 아미타상은 모두 방형 대좌 위 에 앉아 있으며 오른손으로 소위 설법인(vitarka-mudrā)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 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있다. 세 아미타상 가운데 두 상은 이 굴의 서쪽 벽에 그려 진 여덟 구의 불상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이 여덟 구의 불상 중에 연화좌 위에 앉은 불상이 두 구가 있는데, 이들은 아미타불이 아니다. 그중 하나는 묵서명에 과거칠불 가운데 하나인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도 9)라 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묵서명이 없으 나 다른 상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와 다보불의 이불(二佛)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법화경(法華經)󰡕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의거한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중국의 초기 불교미술에서 연화좌가 아미타불에 특유한 요소 로 쓰이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아미타 불이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은 모습을 보게 된다. 즉 워싱턴D.C.의 프리어 갤러리(Freer Gallery)에 소장되어 있는 남향당산(南響堂山) 출토 석조 부조에서 비교적 큰 화면의 극락정토 장면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도 11). 이 시기까지도 중국 불교미술에 서는 도상적으로 불상의 존명을 구별하려는 관행이 없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아미타 를 포함하는 서로 다른 존명의 붓다들이 동일한 도상 형식을 공유했던 것이다(이주형 2011). 중국에서 극락의 도해로서 가장 오래된 예로 알려진 것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의 만불사지(萬佛寺址)에서 발견된 비상편(片)이다(劉志遠·劉廷壁 1958, 도판 31). 이 비 상은 탁본으로만 남아 있는데, 19세기 말 기록인 「천양각필기(天壤閣筆記)」(劉志遠·劉 廷壁 1958, 3에 인용)에 의하면 원래 송 원가(元嘉) 연간(424-452)의 명문이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이 연대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으며, 이 비상은 이보다 한 세기 뒤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Wong 1998/1999, 57-60). 현재 볼 수 있는 비상 탁본의 위쪽에 극락이라 볼 수 있는 장면의 작은 부분만이 남아 있다. 이 장면과 아래 쪽의 장면 사이에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 장면은 본생담이거나 인연비 유담(avadāna), 혹은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거한 것이라 보는 여러 의견 이 제시되었다(김혜원 2003, 8-10). 이 비상의 장면은 극락을 나타낸 것인지 확단하기 어 렵지만, 비슷한 장면이 역시 만복사지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비상 뒷면에 등장한다(도 10; Wong 1998/1999, fig. 2A). 이 비상의 앞면에는 두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이 비 상에는 연대가 새겨진 명문이 없으나 6세기 2/4분기 혹은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 정된다(Wong 1998/1999, 57; 김혜원 2003, 6, 주9). 이 장면에서는 하단의 좌우에서 두 개 인도 불교에 아미타정토도는 존재했는가 _31 의 사선이 대칭적으로 위쪽으로 올라가 상단 중앙에서 만난다. 그곳에 붓다인 듯한 인 물이 앉아 있다. 붓다는 연화에 앉아 있지 않고 연못에도 앉아 있지 않다. 사선을 따 라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아래에 인물들이 앉아 있다. 이 구역을 연못이 둘러싸 고 있는데, 연못에 작은 인물들이 보인다. 극락에 왕생했거나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인물들인 듯하다.31) 천수(天水) 맥적산(麥積山)의 제127굴 벽화에도 비슷한 장면이 그려 져 있다. 서위(西魏) 시대(535-556)의 이 벽화에는 연못은 없다(ZSTM, 239, 도판 161). 모 두 6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이 예들에서 우리는 중국에서 극락정토를 도해하려는 시도를 처음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장면들에서 연지가 중국 불교미술에서 처음으로 주목할 만한 모티프로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들은 모함메드 나리 비 상과 같은 간다라에서 극락의 도해라고 주장된 예들과 전혀 닮지 않았다. 중국에서 아미타정토도가 보다 정교하고 분명히 구별이 가능한 형태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남향당산 출토 부조(도 11)에서 보듯이 6세기 후반이다.32)

 

        31) 도로시 웡(Dorothy Wong)은 이 두 비상의 위쪽 장면을 극락의 묘사라 본다(Wong 1998/1999). 그러나 요 시무라 레이는 이 장면들이 아래 장면과 함께 󰡔법화경󰡕에 의거한 정화된 불국토를 나타낸다는 의견을 제 시한다(吉村怜 1985, 23-24).

        32) 수대(隋代, 581-618)에 조성된 막고굴 제393굴에도 몇몇 학자들이 극락의 도해라 보는 벽화들이 있다(李其 琼 1984, 165-166, 삽도 8; 勝木言一郎 1992, 69).

 

여기서 다시 7 세기에 이르러 돈황 벽화에서 아미타정토도는 더욱 발전한 단계에 이른다. 아마도 그 중에 가장 이른 예는 642년에 그려진 돈황 막고굴 제220굴의 벽화이다(도 1). 이 벽화 에서는 아미타불이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화려하게 장식된 연지, 장엄한 누각 과 아름답게 장식된 나무 등 다양한 모티프들이 등장한다. 극락의 도해에 이렇게 다양 하고 정교한 모티프들이 포함된 것은 LSV와 SSV, 또 󰡔관무량수경󰡕의 경전 서술을 자세히 읽고 반영한 결과인 듯하다(鄧健吾 1980, 14-21; 岡田健 2000, 184-185; 勝木言一郞 1992). 중앙의 붓다는 인도 사르나트(Sārnāth)에서 출토된 유명한 초전법륜 불상(Huntington 1985, fig. 10.20)과 비슷한 자세로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고 있다. 이 유형 의 전법륜인은 이 이전까지 중국에서 아미타불로 알려진 불상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막고굴 제220굴을 필두로 우리는 돈황에서 이러한 전형적인 구 도로 그려진 많은 아미타정토도를 보게 된다(막고굴의 예들에 대해서는 勝木言一郞 1992, 73에 실린 목록 참조). 7세기 후반부터 아미타정토도는 󰡔관무량수경󰡕에 기초한 십육관 (十六觀)의 장면 등 부수적인 장면들이 화면의 양옆이나 아래쪽에 추가되면서 더욱 정 교한 형식으로 발전하고 소위 ‘관경변상(觀經變相)’이라는 형식이 확립되었다(河原由雄  1968; 예를 들어 ZSDM 3: 도판 103, 136 참조). 33)

 

         33)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의 소남해(小南海) 석굴(550년경)에는 󰡔관무량수경󰡕에 의거한 구품왕생도(九品往 生圖)가 명문과 함께 부조로 새겨져 있다(勝木言一郞 1996). 이 석굴의 주존은 불삼존인데, 이 세 상은 모 두 좌상이 아니라 입상이다. 따라서 위쪽의 구품왕생도 부조는 아미타불이 중앙의 연화 위에 앉는 통상적 인 극락 도해의 일부로 새겨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부조는 이 시기에 이미 󰡔관무량수경󰡕 이 시각적 이미지에 활용되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698년경에 그려진 막고굴 제332굴의 벽화는 앞서 돈황의 예들과 상당히 다 르다(도 2). 여기에는 궁전 같은 전각이나 누각도 없고 건축적으로 꾸며진 연지도 없 다. 전법륜인을 취한 붓다가 화개(華蓋) 아래에, 활짝 핀 커다란 연화 위에 앉아 있고, 그 옆에 두 보살이 서 있으며 그 주위에 많은 인물들이 앉아 있다. 보살과 주위의 인 물들도 모두 연화 위에 있다. 흥미롭게도 상단의 양쪽에는 산록이 보인다.34) 이 장면 은 통상적인 극락의 도해가 아니고, ‘아미타불오십보살도’라 불리는 주제로 알려져 있 다(ZSDM 3: 231, no. 94; 勝木言一郞 1994; 岡田健 1990, 162). 35)

 

        34) 아미타정토도로 보이는 장면에 산이 그려진 것은 ‘산이 없다’고 하는 극락의 경전 서술에 어긋나는 것이 다. 이 점에 대해 히다 로미는 이 주제가 아미타불과 그 권속이 사바세계로 내려온 모습을 나타낸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肥田路美 1997, cf. 岡田健 2000, 200, n. 24).

        35) 막고굴 제332굴의 벽화를 󰡔집신주삼보감통록󰡕에 의거한 ‘아미타불오십보살도’라고 처음 비정한 것은 나 이토 토이치로(内藤藤一郎, 1931, 121-132)라 알려져 있다(肥田路美 1997, 98).

 

‘아미타불오십보살도’는 중국 불교에서 서상(瑞像)으로 분류되는 주제이다. 서상은 조각이나 그림에서 신비로 운 유래가 있거나 인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상들을 일컫는 말이다. ‘아미타불오십 보살도’의 경우에는 중국의 두 문헌, 즉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664년; T2106.52.421a17-421b03)과 󰡔법원주림(法苑珠林)󰡕(668년; T2122.53.401a17-401b4)에 그 유래 가 기록되어 있다. 다섯 가지 신통력을 가진 한 보살[五通菩薩]이 불상이 없던 시대에 인도 마가다국의 계두마사(雞頭摩寺)에서 사바세계에 아미타불이 와 줄 것을 간청했 다. 그 결과 아미타불 자신이 보낸 아미타와 오십 명의 보살의 상을 얻게 되었고, 그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유통시켰다. 한나라의 명제 때(57-75)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그 그림이 중국에 전해졌으나 곧 잊혀졌다. 그러나 수나라의 문제 때(581-604) 이 주제 의 그림을 명헌(明憲)이라는 승려가 발견하여 그것을 베껴 그리게 하여 전국에 유포했 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천성 재동현(梓潼縣)의 와룡산(臥龍山) 석굴에 조각된 불감 (634)의 명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불감의 부조는 막고굴 제332굴의 벽화와 구도가 동일하여 후자도 같은 주제임을 확인시켜 준다(勝木言一郞 1994; 岡田健 2000, 166-173). 이 주제는 특히 사천 지방에서 인기가 있어 많은 예가 이 지역에 남아 있으며, 중국의 다른 지역과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도 유포되었다(岡田健 2000; 崔善娥 2004).

일본에서는 호류지 금당 벽화의 유명한 아미타정토도(6호 벽화)가 ‘아미타불오십보살도’로 알 려져 있다(도 4). 타치바나 부인 주자(도 3)의 아미타삼존상도 중국에서 전래된 같은 주 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두 중국 문헌에 기록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 믿 을 수는 없다. 명헌이 수나라 때(581-618)의 승려라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아마도 이 이야기는 6세기 말-7세기 초에 새로 고안된 도상형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 기일 가능성이 높다(cf. 岡田健 2000, 12). 그러나 이 새로운 도상형식은 인도에서 유래 한 여러 모티프를 조합하여 만든 듯하다. 예를 들어 전법륜인을 취한 붓다라든지, 연 화, 물, 연화 위에 앉은 많은 인물이 그러한 모티프들이다. 이 도상형식이 고안된 시기 와 간다라에서 모함메드 나리 비상과 같은 예들이 만들어지던 시기─필자의 추정으로 는 3-4세기경─사이에 이백 년 이상의 간격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도상형식에 쓰인 모티프들은 간다라보다는 이 같은 모티프들을 활용한 불교미술이 번성하고 있던 데칸 고원 서부나 갠지스 강 중류에서 전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연화좌는 사르 나트의 불상이나 데칸 고원 서부의 오랑가바드(Aurangabad) 석굴(도 12), 칸헤리(Kānheri) 석굴 등지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36) 데칸 고원의 석굴에서 종종 붓다는 전법 륜인을 취하고 연화좌 위에 앉아 천신 같은 복장을 한 많은 인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상 중국의 아미타불과 극락의 도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 결과 우리는 인도의 상 황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중국에서 아미타불의 상이 5세기부터 그림이나 조상으로 소수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이들은 주 로 단독상이나 삼존상의 형식을 취했으며 극락을 배경으로 한 형식은 전혀 없었다.

현 재 우리가 아는 구체적인 증거로 볼 때 극락의 시각성에 대한 관심은 6세기가 되어서 야 비로소 나타나고 그 후반에 들어서서 본격화되었다. 중국 불교에서 아미타불에 대 해 신앙적인 관심을 최초로 보였다고 여겨지는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334-416)은 극락 의 시각성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의거하여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염불삼매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다.

혜원이 입적하고 조금 뒤에야 후대에 동아시아에서 아미타불 신앙의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두 개의 경이 번역되었다. 즉 421년경에 불타발타라와 보운이 번역한 󰡔무량수경󰡕과 424-442 년경에 강양야사(畺良耶舍)가 번역했다고 하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다.37)

 

       36) 히다 로미는 막고굴 제332굴 벽화가 사르나트의 ‘사위성 신변’ 비상과 유사함을 지적한다(肥田路美 1997, 99 및 도 10; 사르나트의 사위성신변 부조에 대해서는 Williams 1975, fig. 8 참조).

      37) 후지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혜원은 나집(구마라집)에게 친교(親交)를 구하여 편지로 질의응답을 거듭나눈 것으로 보아 [나집이 번역한] 󰡔아미타경󰡕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경전에 의거했다는 흔적 은 보이지 않는다. 󰡔아미타경󰡕이 나오고 20년 정도 흘러 현행 「무량수경󰡕이 역출되고 이어서 󰡔관경󰡕(관무 량수경)이 출현하지만, 어느 것이나 혜원이 입적한 뒤이다. 따라서 혜원의 염불삼매는 정토삼부경과는 아 무런 관계 없이 설해진 것이다.” 후지타는 이어서 혜원은 10세기에 중국 정토교의 시조로 받들어지기 전 까지는 정토교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藤田宏達 2007, 565-566).  

 

인도가아닌 중앙아시아에서 찬술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관무량수경󰡕의 출현은 아미타불 과 극락의 시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을 반영한다. 이 경은 아미타 삼 존과 극락의 시각적 특징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관상 수행의 방법도 명 시하고 있다. 중국 불교에서 󰡔관무량수경󰡕이 등장하면서 극락의 시각성에 대한 관심 이 점차 고조되고 6세기에 후반에 비로소 그러한 관심이 미술에서 구체적인 도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듯하다. 둘째, 아미타불의 초기 조상사에서 5-6세기에는 고정된 도상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 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다른 붓다의 상과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시기까지의 아미타불은 명문이 없다면 구별하여 알아보기 어려운 형 상이다. 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극락을 도해하는 특정한 도상형식이 모색되고 고안되 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7세기 초에 이르러서 확립된 형식을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전개는 중국 불교도들이 이 시기에 󰡔관무량수경󰡕과 같은 극락에 관한 경전들 을 열심히 읽고 세심하게 탐구한 결과라고 보인다. 중국 불교도들에게 인도에서 온 불 교 경전들은 성스러운 존재의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 알려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소스 (source)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기원후 수 세기 동안 다양한 텍스트들이 거의 경쟁하듯 찬술되었던 인도의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38)

 

       38) 인도와의 불교 교류에 있어서 중국에서는 번역된 경전 외에 구전(口傳)도 특히 초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리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아미타불과 극락의 도상이 형성된 6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는 번역된 경전을 통해 확립된 문헌상의 서술이 그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였으리라 생각한다. 구전의 문제를 상기시켜 준 다니엘 부셰(Daniel Boucher)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러한 과정과 더불어, 인 도에서 전해진 새로운 도상형식이 때로는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고, ‘아미타불오십보살 도’에서 보듯이 당시 불교도들의 필요에 맞추어 새로운 전설이 꾸며지면서 인도의 형 식에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중국의 예들과 일부 학자들이 인도, 특히 간다라에서 아미타나 극락의 도해 라고 주장하는 예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 명확하다. 우리가 살펴본 중 국의 예들은 극락의 도해로서 중국에서 창출된 것이고 인도에서 만들어진 형식을 고 정된 이름과 함께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중국의 예들은 그에 앞서 인 도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아미타불이나 극락의 조형이 있었을 것이라는 갈망을 결코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증거에서 볼 때 극락의 해는 인도 불교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아미타정토도의 도상이 확립된 것은 중국 불교의 독자적인 활동이라 보는 것이다.

 

IV. 인도 불교와 아미타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인도 초기 불교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의 성 격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마투라의 고빈드나가르에서 출토된 명문이 서력기원 초의 인도 불교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유일한’ 모호하지 않 은 구체적 증거이다. 그 밖에는 명문이건 조각이나 그림이건 산치의 명문이 나오는 7 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아미타와 관음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하는 간다라의 작은 삼존상의 명문(Brough 1982)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이 명문에 대해서는 여기에 정말 아미타와 관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가, 혹은 그중 하나만(관음)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견이 제시되어 왔다(Salomon & Schopen 2002). 39)

 

     39) 현재 미국 플로리다의 사라소타(Sarasota)의 존 앤 메이블 링링 박물관(John and Mable Ringling Museum)에 소장된 이 삼존 비상의 명문을 존 브라프는 “budhamitrasa olo’iśpare danamukhe budhamitrasa amridaha ……”라 읽고 “붓다미트라(Buddhamitra)의 관음, 성스러운 기진(寄進), 붓다미트라의 아 미타(Amṛtābha) ……”라 해석했고, 리처드 살로몬(Richard Salomon)과 그레고리 쇼펜은 “dhamitrasa oloiśpare danamukhe budhamitrasa amridae”라 읽고 브라프와는 다르게 “다미트라의 기진 …… 붓다 미트라의 영생을 위하여 ……”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살로몬은 필자와의 개인적인 대화에서 그가 쇼펜과 함께 발표한 명문의 해석은 쇼펜의 견해가 크게 반영된 것이며 자신은 이 명문에 “관음”의 이름이 포함 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혔다. 최근에는 카라시마 세이시(辛嶋靜志)가 살로몬과 쇼펜의 판독에 동의하면서도 브라프와 비슷하게 해석하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Karashima 2017). 3

 

설령 이 명문에 아미타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이 름은 당시 ‘어떤’ 붓다에 대해서도 공통적으로 쓰이던 형식에 다소 자의적으로 붙여졌 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앞서 중국의 아미타불상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뿐 아니라 인도에서도 초기 불교미술에서는 그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고 보기 때문이 다(이주형 2011). 이 두 명문 외에는 파키스탄 북부의 칠라스─탈판(Chilas-Thalpan) 지역에 암각으 로 새겨진 많은 명문들 가운데 아미타를 언급한 것이 다섯 예 있다. 이들은 모두 브 라흐미(Brāhmī)어로 쓰여져 있고, 5세기 또는 그 이후의 것이다(塚本啓祥 1996-2003, III: Chilas 129, 135, Thalpan 43, 44, 53). 이곳은 간다라에서 멀지 않은 곳이나 시간상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 앞선 시기 간다라 불교나 불교미술과는 경향을 달리하고 느슨하 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40)

 

       40) 필자는 5세기 이후에 간다라와 인접 지역, 특히 스와트와 길기트 등 북쪽 지역은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 로나, 또 미술 양식에 있어서도 서양 고전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했던 그 이전과 사뭇 다른 시기로 접 어들었다고 본다.

이 명문들은 모두 아미타불에게 경배한다는 뜻의 “namo Amitābha (혹은 Amitāyus)”라는 짧은 구절로 되어 있다. 이 중 두 개는 아미타불만 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세 개는 아미타를 다른 붓다들과 함께 부르고 있다. Chilas 135번 명문에서는 Amitābha와 더불어 Ratnaśikhin(寶髻), Śākyamuni(釋迦 牟尼), and Akṣobhya(阿閦)를 경배한다. 이 네 붓다는 󰡔금광명경(金光明經)󰡕(Suvarṇaprabhāsa-sūtra)에서 네 방위의 붓다로서 공양하는 네 붓다와 유사할 뿐 아니라 “namo …”라는 경배 형식도 동일하다. 즉 이 경에서는 동쪽에 Akṣobhya, 남쪽에 Ratnaketu (寶幢 혹은 寶相), 서쪽에 Amitāyus/Amitābha, 북쪽에 Dundubhisvara(天鼓音)을 언 급하고 있다(Bagchi 1967, 4, 63; T665.16.404c15-17, 423c7-9, 439b26-28; cf. 塚本啓祥 1996- 2003, III:142). 남쪽이 Ratnaśikhin이 아니고 Ratnaketu이나 비슷한 이름이고, 북쪽 이 Śākyamuni가 아니고 Dundubhisvara이다. Chilas 135의 Amitābha는 󰡔금광명 경󰡕의 사불(四佛)과 비슷한 맥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두 개의 명문에서 아미 타불은 각각 두 명의 다른 붓다와 함께 언급되어 있다. 즉 Thalpan 43번 명문에서는 Śikhin과 (Śa)tapatmanayanacūḍāpratihatavelāṃburaśmirāja이고, Thalpan 53번 명문에서는 Saṃpuṣpitasālarāja와 Samantaraśmivyudgataśrīkṛpana이다. 이들 명 문에서 아미타는 개별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고 함께 경배되어야 할 많은 붓다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음이 명확하다. 칠라스─탈판 지역에서는 이러 한 형식으로 모두 22개 명문에서 15명의 붓다를 언급하고 있다(塚本啓祥 1996-2003, III: Chilas 121, 130-132, 134, Thalpan 35, 45-51, 54, 56-58). 아미타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맥락에서 아미타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인 서력기원 초의 시기로 돌아온다. 여기서 우리는 고빈드나가르에서 출토된 명문의 ‘아미타’도 과연 신앙의 대상이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명 문이 지칭하는 상의 아미타도 극락에 왕생하는 이들을 맞는 아미타가 아니라 단순히 현재에 경배되는 많은 붓다 가운데 하나로서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 해 볼 수 있다. 이 아미타가 LSV나 SSV 같은 아미타에 관한 주요 경전에서 근거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만하다. 이 아미타는 아미타를 신앙 대상으로 언급하 지는 않는 다른 경전들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화경󰡕에서도 성불하여 방위마다 불국토를 이룬 모두 16명의 붓다를 꼽고 있는데, 서방의 두 붓 다 가운데 무량수/아미타가 등장한다(T263.9.92a29, 126c.8; T262.9.25c1). 혹은 아예 그런 경전적인 근거가 없었을 수도 있다. 아미타에 대한 언급은 서력기원 초 이래 수 세기 동안 쓰여진 많은 경전들에서 보인다. 불타발타라가 󰡔무량수경󰡕을 번역할 때쯤인 5세 기 초에는 60개 이상의 한역 경전에서 아미타가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어 있었다(藤 田宏達 1970, 141-144). 이 기간에 아미타의 불국토가 불교도들이 상상한 수많은 불국토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 미타가 이 시기 인도 불교에서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인가? 흥미롭게도 만 일 그랬다고 할지라도 구체적인 확증은 남아 있지 않다. 혹은 아미타정토에의 왕생 은 쇼펜이 지적했듯이 “일반화된 종교적 목표”(generalized religious goal)에 불과했는 가?(Schopen 197741)) 즉 전체적인 대승불교 운동 속에서 아미타 관련 경전과는 계열을 달리하는 교설에서도 즐겨 거론했던 종교적인 목표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아미타의 극락은 󰡔법화경󰡕의 품(축법호 역에서는 往古品, 구마라집 역에서는 化城喩 品)에서 이야기하듯이 보배를 찾아가는 상인들의 안내자(nāyaka, 導師)가 험난한 여정 에서 지친 상인들에게 휴식을 주어 궁극적인 목적지로 이끌어 가기 위해 화현시킨 성 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T263.9.92b16-92c26, 94a2-94b19)? 42)

 

       41) 쇼펜은 그의 초창기 논문에서 극락이 인도 불교에서 한때 일반화된 종교적 목표였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Schopen 1977). 다양한 대승 경전에서 아미타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맥락에서 극락 왕생을 언 급하는 사례들을 검토한 뒤 쇼펜은 2세기쯤 이미 “극락왕생이 대승의 공동체 전체에서 공유된 일반화된 목표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며, LSV의 출현과 이러한 ‘일반화’ 과정의 시작 사이에 시간 간격이 크지 않았으리라는 견해를 밝힌다(Schopen 1977, 204). 그는 LSV에 의거한 아미타와 극락왕생에 대한 신앙이 ‘일반화’에 앞서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화’에 선행한 시기에도 아미타불과 극락에 대한 생 각은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바와 같이 신앙의 형태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와 정확히 같은 소위 ‘일반화’현상을 5-6세기 중국의 조상 명문에서 볼 수 있다(久野美樹 1989). 6세기 말이 되어서야 아미타에 대한 독립적인 신앙이 일어나고 경전에 대한 해석과 시각적 조형을 통해 아미타 신앙이 확립됨 을 보게 된다. 이것을 중국의 불교도들이 당시 인도에서 행해지던 대로 소위 ‘일반화’된 목표로서 아미타 불과 극락을 받아들였다가 한 세기쯤 뒤에 그것을 독자적으로 신앙으로서 발전시켰다고 보아도 되는가? 필자는 오히려 인도 불교에서도 아미타나 극락은 결코 신앙 대상으로서 ‘확립’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가정을 조심스레 해 본다. 후지타는 소위 정토삼부경의 전래와 수용에 대해 논의하면서 쇼펜의 ‘일 반화’에 대한 견해를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확실히 그와 같은 면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많은 한역 경론에 언급되어 있는 다양한 기술(記述)을 참조하지 않고 산스크리트본이나 티베 트역에만 근거하여 인도에서의 정토 사상의 다양한 전개를 일의적(一義的)으로 논단하는 것은 문헌학적으 로 문제가 있다”(藤田宏達 2007, 506). 그러나 후지타는 이 현상에 대해 나름의 설명은 제시하지 않는다.

        42) 이 경전의 게송 부분에서 상인들을 인도하는 사람은 마법으로 화현된 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 이 제 신통력을 발휘하여 광대한 성곽을 화현하여 세워 짓는다. 다양하게 장엄하며 억천의 사람들을 위해 방 실을 세우고 미묘하고 아름답게 꾸민다. 또 마땅히 큰 강을 화현시켜 흐르게 하고, 정원과 원림, 욕지(浴池)를 만들며, 꽃과 열매가 무성하게 하고, 대관(臺館)과 전각, 담장을 비단으로 장식한다.”(T263.9.94a14- 94a18). 

 

 

󰡔법화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LSV의 초기 두 한역본에 나오나 후대 본에서는 사라지는, 근기가 낮은 중생들 을 궁극적으로 극락에 이끌어 가면서 과도적인 장소로 설정한 성의 이야기와 흡사하 다는 점은 과연 우연일까?(위의 17쪽 참조). LSV와 SSV의 제본을 세심하게 읽으면서 필자는 이 경들, 특히 초기 본들에 제시된 이야기가 정말 아미타불이나 극락왕생의 신 앙에 관한 것인지 더욱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아미타와 극락에 대한 우리의 인 식은 동아시아에서 아미타 신앙이 크게 성행했다는 사실에서 피할 수 없이 막대한 영 향을 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근대 불교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오 늘날 일본에서 아미타 신앙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제도적으로 또 개인적인 신앙으로 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후대 동아시아 불교에서의 전개를 통해 얻게 된 지 견을 고대로 투사하기보다 거기서 벗어난 관점에서 초기 인도 불교에서 아미타와 극 락에 대한 생각의 실체가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약호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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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Juhyung Rhi (Professor, Department of Archeology and Art History,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question of whether the Amitābha cult ever existed in Indian Buddhism, or in what form it did so, has long remained a mystery for the specialists of Indian Buddhism. Due to the extreme dearth of explicit or tangible evidence, a number of specialists have made efforts to find depictions of Amitābha or Sukhāvatī in visual images. From early on they sought to specifically identify such examples in the region of Gandhāra, which has long been considered to be the origin of major texts of the Amitābha cult. This study attempts to explore whether the so-called Gandhāran examples can be identified as such, by examining the following two problems. First, the fact that depictions of Sukhāvatīgreatly flourished in East Asia prompted many scholars to believe that the visuality of Sukhāvatī presented in the Sukhāvatīvyūha texts was special enough to easily generate its visual depictions. However, a careful examination of textual accounts reveals that this was not necessarily the case. Most of the visual features of Sukhāvatī are also commonly found in descriptions of other paradisiacal places in Indian religious tradition, and there is nothing original or specific in the descriptions of Sukhāvatī. Second, though Did Depictions of Sukhāvatī Exist in Indian Buddhism?: An Examination in Light of the Visuality of Sukhāvatī and Chinese Examples 52_ 불교학 리뷰 vol.26 remarkable affinities may be observed between East Asian depictions of Sukhāvatī and the so-called Gandhāran parallels, the former seems more likely to have been the original creation as an iconographic type by Chinese Buddhists rather than the adoption of the earlier Gandhāran type along with its associated Indian identity. Therefore, the affinities of the so-called Gandhāran examples do not support allegations that they are also the depictions of Sukhāvatī. By focusing on these two problems, this study attempts to assess the extent and nature of the existence of the Amitābha cult in early Indian Buddhism.

 

Key words : Amitābha Buddha, Sukhāvatī, Indian Buddhism, Mahāyāna, Gandhāra, Pure Land Buddhism, Larger Sukhāvativyūha

 

2019년 9월 18일 투고 2019년 10월 6일 심사완료 2019년 10월 8일 게재확정

불교학 리뷰 vol.26 

연구논문1_이주형_인도 불교에 아미타정토도는 존재했는가_극락의 시각성과 중국의 예들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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