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와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으로 읽는 ‘사랑’에 관한 소고/김진환.단국大

【목차】∙

1. ‘에로스의 종말’로부터

2. ‘밤의 찬가’를 통해

3. ‘사랑의 예찬’으로

4. 결론

 

1. ‘에로스의 종말’로부터

‘밤.’ 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밤은 어떤 존재인가. 밤에 관한 이 같은 질문들로 논의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확신에 찬 제목의 저서를 파울 첼란 Paul Celan의 시로 시작하고 있다.

한 번,/ 나는 그를 들었다,/ 그는 세상을 씻고 있었다,/ 남몰래, 밤새도록,/ 실제로.// 하나가 무한히,/ 파괴되었다,/ 괴하기.// 빛이 있었다. 구원. (한병철 2016, 5)

한병철이 이 시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분명 어떤 구원에 대한 이야기 다.

자신의 책을 통해 “빛이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이 어떤 과정을 통해 다가오는 것으로묘사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첼란의 시로 돌아가면, 구원의 담지자로 보이는 듯한 “그”는 “밤새도록” “세상을 씻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순간. “하나가 파괴되었다.” 그것도 “무한히.” 결국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은‘밤’ 이라는 과정적 시간이며 ‘파괴’라는 양식이다.

우리가 구하는 진리, 그것을절대적 지식이라고 칭하든 어떤 믿음의 형식으로 이해하든 또는 이 글에서살필 주제인 사랑과의 연관 속에 이해하든, 그것은 분명 “재앙의 변증법”(한병철 2015, 28)이 선사해주는 선물일 것이다.

바디우 Alain Badioiu의 언어로는그것은 ‘검정의 변증법’과 관련한다. 검정은 “빛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빛과는 다른 빛의 바탕”(바디우 2020, 53)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떤 종류의 재앙도 거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랑’과관련해 표현한다면, 어떤 타자적 경험도 하지 않으려는 사랑의 양상이점점‘진정한 사랑’의 모습처럼 자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이 같은문제의식에서 출발하며, 이에 대해서는 에로스의 종말에서의 한병철의표현에 기대볼 수 있겠다.

최근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한병철 2015, 18f.).

오늘날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사랑의 체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사랑의 체험에서 타자의 공간은 사라지고 있다.

사랑은계속해서 더욱 확장된, 보다 정확하게는 확장될 수 있는 나 자신의 영역, 나의동일성의 확장으로 체험된다.2)

1) 아름다움의 구원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미는 만족의 대상으로, 좋아요의대상으로, 임의적이고 편안한 것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우리는 미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다.”(한병철 2016, 116f.)

2) 이런 점에서 오늘날 사랑의 경험은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의 세상 인식 방법과도 닮아있다. 피히테는 이 세상에는 독단론 Dogmatismus과 관념론 Idealismus 이라는 두 개의 철학 체계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자아’에게 세계 지성의 지위 를 부여한다. 칸트가 ‘물 자체’를 설명하며 인간 의식의 한계를 설정하는 작업을 한다면 피히테는 자아를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절대적 존재’로까지 승격 시키는 것이다(프레히트 2018, 569).

이런 점에서 오늘날 사랑과 관련해 우리가‘경험’하는 것은 사실 자기 동일적 ‘체험’에 불과하다.3)

3) 경험은 타자를 향해있는 데서 주어지는 것인 데 반해 체험은 타자를 자기 속으 로 포섭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체험은 동일화한다.”(한병철 2020, 48)

이러한 사랑 양상과 관련 해 “사랑의 자동차 종합 보험 가입 die Vollkaskoversicherung der Liebe” (Badiou 2011, 16)이라는 바디우의 표현을 환기해볼 수 있다. 계산 불가능한 시 간과 개입 불가능한 타자적 공간을 내 집 안으로 끌어 들여와 계산 가능한 숫 자적 존재로 환원시킨다. 정성적 지표의 정량화가 지니는 폭력성이다.

이때 미 래의 가능성의 시간, 비어 있는 시간, 따라서 그 자신도 불안한 채 우리를 불안 하게 만드는 시간은 단순 숫자의 ‘시간’으로 명시됨으로써 결국 사라지게 된다.

이 글은 사랑이 사랑일 수 있는 근거를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와 알랭 바 디우의 ‘사랑론’을 매개로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두 대상을 비교고찰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현대의 사랑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매개적 담론으로서 두 대상을 취하고자 한다.

우선 다음 장에서는 노발리스 의 시에서 드러나는 밤의 시간이 사랑의 개념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피 고, 3장에서는 2장을 통해 고찰한 사랑의 특성을 바디우의 철학에 기대 보다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 이해를 확장한다.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사랑과 노발리 스에게서 관찰되는 사랑의 모습에는 분명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을 밝 혀내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랑에서의 타자의 재구성에 관한 담론을 주 제화할 것이다.

2. ‘밤의 찬가’를 통해4)

4) 「밤의 찬가」는 노발리스의 대표 작품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이를 집중적으로 다룬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대표적인 선행연구로는 서광열(2016), 안 상원(2009), 정경량(1997)을 제시할 수 있겠는데, 정경량의 연구는 낭만주의의 내 면성 또는 종교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성에 집중하고 있으며, 서광열과 안상원 의 연구는 각각 니체 그리고 횔덜린의 ‘밤’과 비교하며 그것의 의미를 ‘디오니소 스적 생명력의 밤’ 그리고 ‘초월적 우주의 실존을 인식할 수 있는 성스러운 밤’으 로 요약하고 있다. 세 연구는 모두 필자가 목적하는 바처럼 ‘사랑’이라는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현대 사랑 담론과 비판적 대결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내면성-종교성-성스러움-생명력-디오니소스로 이어지는, 큰 틀에서 한 궤를 형성하는 방향에서 밤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자체에는 필자 역시동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이 연구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긍정(빛) 에 대한 부정(밤)을 노래하는 것이 낭만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본문에서 논해지겠지만, 낭만주의는 긍정에 ‘대한’ 부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 자체의긍정을 논하는 입장에 가깝다. 즉 긍/부정이 있기 이전의 긍정성으로서의 부정성을 노래하는 것이 낭만주의인 것이다. ‘카오스’와 관련해 이야기하자면, 질서의부정이 혼돈이 아니라 질서 이전에 존재하는 질서로서의 혼돈이 바로 카오스가된다. 밤이 “사랑과 동경의 시간이자 태초의 시간”(서광열 2016, 62)이라고 하는주장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낭만적 사유가이분법을 횡단하는 사유가 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탄생’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빛의 이미지는 근대계몽주의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외부의 심급에 의존하지않으며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독자적인 삶을 가능하도록 한다는 목적을갖는다. 즉 인간을 신적 질서로부터 해방시켜 ‘인간다운 새로운 삶’을 추구할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다.

독일 화가 다니엘 호도비에키 Daniel Chodowiecki(1726-1801)의 ‘미네르바 그림’에는 지혜와 기술의 여신 미네르바의 뒤편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큰 빛이 그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외부 관찰자와 같은 위치에 설정된 그림 전면부의 인물들은 그 빛에 감화되어 여신을 바라보거나, 그것에 대해 논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지혜는이곳에서 빛을 통해 전달되며 그것은 곧 ‘새로운 탄생’이다.

노발리스가 태어난1792년은 칸트가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Was ist Aufklärung?’(1784)라는질문에 답을 내놓은 지 8년이 지난 때로, 사회 전반이 ‘빛’의 영향으로 움직여가던 시기다.

하지만 노발리스에게 천지창조와 같이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않은 것이었다.

빛과 어둠은 오히려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새로운 (낭만적) 세상을 갈구하는 것이 노발리스 세계관의 최종적 지향점이었다.5)

5) 이 글에서 노발리스의 전집 인용은 (N 권수, 면수)의 형식으로 기입. 더불어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전집 인용 역시 (KA 권수, 면수)의 동일한 형식으로 기입.

숫자와 도형들이 더 이상/ 모든 피조물의 열쇠가 아니라면,/ 노래하거나 키 스하는 이들이/ 식자들보다 더 많이 안다면,/ 세상이 자유로운 삶 속으로/ 그리고 다시금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리하여 빛과 그림자 하나 되어/ 다시 진정한 투명함이 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동화와 시들에서/ 진실한 세 계사를 인식한다면,/ 그러면 하나의 비밀스런 말 앞에/ 모든 그릇된 존재는 도망갈 텐데.6)

6) “Wenn nicht mehr Zahlen und Figuren/ Sind Schlüssel aller Kreaturen/ Wenn die, so singen oder küssen,/ Mehr als die Tiefgelehrten wissen,/ Wenn sich die Welt ins freye Leben/ Und in die Welt wird zurück begeben,/ Wenn dann sich wieder Licht und Schatten/ Zu ächter Klarheit werden gatten,/ Und man in Mährchen und Gedichten/ Erkennt die wahren Weltgeschichten,/ Dann fliegt vor Einem geheimen Wort/ Das ganze verkehrte Wesen fort.”(N 1, 344)

본래 푸른꽃 Heinrich von Ofterdingen 2부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위의 시에서 계몽주의에 대한 편향적 시각을 경계하는 노발리스의 사고와 함께 그 가 가진 일원론적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세상 만물의 “열쇠”는 이성 중심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숫자”나 “도형들”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 본인처럼 “노래 하거나 키스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빛과 그림자” 는 이분법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진정한 투명함”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빛의 속성과 어둠의 속성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연유에서다.

이분법적인 구분을 통한 가치판단을 거부하는 그에게서는 인간의 궁극적 인 탐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자체도 ‘밤(어둠)’처럼 그 의미가 반전되 어 나타난다.

“삶은 죽음의 시작이다. 삶은 죽음을 위해 존재한다. 죽음은 끝 맺음이자 동시에 시작이다. 분리이자 동시에 더욱 정교한 자기결합이다 Leben ist der Anfang des Todes. Das Leben ist um des Todes willen. Der Tod ist Endigung und Anfang zugleich, Scheidung und nähere Selbstverbindung zugleich.”(Novalis 1978ff., Bd. 2, 230).

그에게 삶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것이다.

죽음이 시작과 끝으로서 삶을 감싸고 있다면, 죽음은 결과적으로 삶의 궁극적 도달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밤의 찬가 Hymnen an die Nacht」(1800) 역시 그만의 일원론적 세계관이 다분히 관찰되는 작품인데, 제목에서부터 읽을 수 있듯 이 작품은 ‘빛’이 아닌 ‘밤’에게 바치는 노래다.

시에서 밤은 곧 죽음과 동일한 의미군을 형성한다. 밤은 죽음의 밤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조피 Sophie von Kühn를 상징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음을 단순히 생명이 다하는 단계가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또한 “더욱정교한 자기결합”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노발리스는이과정을 “낭만화하는 원칙”이라고 표현한다

. “죽음은 우리 삶의 낭만화하는원칙이다. [...] 죽음을 통해 삶이 강화된다. Der Tod ist das romantisierende Prinzip unsres Lebens [...] Durch den Tod wird das Leben verstärkt”(Novalis 1978ff., Bd. 1, 756).

죽음이 제공해주는 ‘낭만화’의과정은 곧 밤의 찬가 전반을 지배하는 주제가 된다.7)

7) 시는 크게 1-4번 찬가의 전반부와 5, 6번 찬가의 후반부로 나누어 이해할 수있다. 밤과 낮의 대비적 모습, 밤과 죽음에 대한 찬양, 사랑의 모습 등의 개인적인이야기가 전반부에 진행된다면, 전반부에 제시되는 죽음과 구원의 상징성이 후반부에 들어서 그 맥락이 확장된다. 개인적인 신비적 체험으로 전반부 이야기가국한되는 반면, 후반부는 범인류적인 기독교적 차원의 맥락으로 확장됨에 따라인류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곳에서는 종교성보다는 삶과 죽음, 사랑과죽음의 관계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하기에 전반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찬가는 낮의 찬미로 시작한다.

그것은 “모두를 기쁘게 하는 빛 das allerfreuliche Licht”이다.

“부단한 성좌들의 거대한 세계 der rastlosen Gestirne Riesenwelt”, “영원한 평온 속 번쩍이는 바위 der funkelnde, ewigruhende Stein”, “신중히 생명을 빨아들이는 식물 die sinnige, saugende Pflanze”, “모습을 계속해서 바꾸는 야생의 거친 짐승 das wilde, brennende, vielgestaltete Thier”(N 1, 131, 1. Hymne)들은 모두 이 빛을 숨 쉬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은빛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또 빛을 발하기도 하는 자연물들이다. 하지만빛과 친화되어 있는 모습의 세상 만물과는 달리 화자는 “말로 다 표현할 수없는 신비스럽고 거룩한 밤에게로 zu der heiligen, unaussprechlichen, geheimnißvollen Nacht” 몸을 돌린다.

화자는 “깊은 비애 tiefe Wehmuth”를느끼며, “이슬방울로 꺼져 들어가 재와 하나 되고 싶구나 In Thautropfen will ich hinuntersinken und mit der Asche mich vermischen”(ebd.)라고고백한다.

세상은 빛을 발하며 생명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모습은 화자에게낯설다.

그것은 화자의 빛, 화자의 생명은 아닌 것이다.

화자는 오히려 죽음을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재”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품는다.

세상의 모습이 “황폐하고 고독하게 wüst und einsam”(ebd.) 보이는 화자에게 밤을 생명의 시간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세계여왕이, 신 성한 세계들의 드높은 공포자가, 축복받은 사랑의 수호자가 너를 내게 보상 으로 보내준다. 여린 사랑, 밤의 사랑스런 태양 [...]. Preis der Weltköniginn, der hohen Verkündigerinn heiliger Welten, der Pflegerinn seliger Liebe – sie sendet mir dich – zarte Geliebte – liebliche Sonne der Nacht [...]”(N 1, 132, 1. Hymne).

지상이 아닌 천상의 존재로 보이는 인물들이 그에게 사랑 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존재는 “밤의 태양”으로 표현된다.

즉 삶 의 공간으로서의 낮을 비추던 태양은 죽음에 이르고 밤의 시간에서 그 모습 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은 객관적 시간의 죽음과 주관적 시간관 념의 시작이 된다.

세상의 시간에서 이탈해 자신만의 시간의 속도와 방향성 을 살게 되는 것은 꿈의 속성이기도 한데, 푸른 꽃에서 하인리히를 홀려 푸 른 꽃을 찾도록 떠나게 만들기도 하는 노발리스에게서 “꿈은 모든 가능한 현 실을 포괄한다 Der Traum umfasst alle mögliche Wirklichkeit.”(Link 1971, 137)

사랑과의 만남으로 화자는 “이제 잠에서 깨어난다 nun wach ich”(N 1, 132, 1. Hymne).

잠의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고 그렇게 밤은 “삶이 zum Leben”(ebd.) 되었다.

생명의 시간으로서의 밤은 화자가 영원히 간직하고픈 “첫날밤 Brautnacht”(ebd.)으로 승화됨으로써, 화자에게는 ‘현실’이 된다.

화자만의 현실이 된 밤의 세계는 2번 찬가에 이르러 신성성을 더해 간다.

지상은 “불행한 분주함 unselige Geschäftigkeit”이 지배하는 낮의 시간이 되 고, 밤은 “성스러운 기운 himmlisch[er] Anflug”을 가진 “신성한 잠 heiliger Schlaf”(N 1, 133, 2. Hymne)의 시간이 된다.

죽음의 원칙에서 삶의 원칙으로 반전된 밤은 “축복받은 이들의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지닌다 den Schlüssel trägst zu den Wohnungen der Seligen”(ebd.).

그리고 그 축복의 내용이 3번 찬가에서 묘사되고 있다.

일찍이 내가 통곡의 눈물을 쏟았을 때, 고통 속에 녹아버린 채 나의 희망이 사라졌을 때, 어둡고 좁은 공간 안에 내 인생의 형상을 품고 있던 메마른 언덕에 홀로 서있을 때, - 어떤 고독한 이도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을 느끼 며,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몰린 채 – 힘없이, 그저 비참한 생각뿐이었 네. 도움을 구해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네. 덧없고 꺼져버린 생명에 끝없는 그리움으로 매달려 있었네. 그때 아득한 저편에서 – 나의 오래된 지복(至福)의 높이로부터 어스름한 비바람 이 와서는, 탄생의 끈을, 빛의 족쇄를 단번에 찢으니. 지상의 위대함은 내 슬픔과 함께 도망가 버렸네. 비애의 감정도 함께 새로운 불가지의 세계로 흘러들어갔네. - 너, 밤에의 열광, 천상의 잠이 나를 덮쳐왔네. 땅은 스리슬 쩍 몸을 들어 올렸네; 해방되어 다시 태어난 나의 정신이 그 위를 떠다녔 네. 언덕은 먼지구름이 되었네. 구름 사이로 내 사랑하는 이의 승화된 모습 을 보았네. 그녀의 두 눈에는 영원성이 깃들어있었네 – 그녀의 두 손을 만 지니, 눈물은 찢을 수 없는 불타는 끈이 되었네. 수천 년의 시간이 아득함 속으로 꺼져갔네, 폭풍우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안겨 새로운 삶을 향한 황홀 의 눈물을 흘렸네. - 그것이 처음의 꿈이자 유일의 꿈이었네 – 그때부터야 비로소 밤하늘과 그 하늘의 빛, 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불변의 영원한 믿음 을 느끼네.8)

8) “Einst da ich bittre Thränen vergoß, da in Schmerz aufgelöst meine Hoffnung zerrann, und ich einsam stand am dürren Hügel, der in engen, dunkeln Raumdie Gestalt meines Lebens barg – einsam, wie noch kein Einsamer war, von unsäglicher Angst getrieben – kraftlos, nur ein Gedanken des Elends noch. – Wie ich da nach Hülfe umherschaute, vorwärts nicht konnte und rückwärts nicht, und am fliehenden, verlöschten Leben mit unendlicher Sehnsucht hing: – da kam aus blauen Fernen – von den Höhen meiner alten Seligkeit ein Dämmerungsschauer – und mit einemmale riß das Band der Geburt – des Lichtes Fessel. Hin floh die irdische Herrlichkeit und meine Trauer mit ihr – zusammen floß die Wehmuth in eine neue, unergründliche Welt – du Nachtbegeisterung, Schlummer des Himmels kamst über mich –die Gegend hob sich sacht empor; über der Gegend schwebte mein entbundner, neugeborner Geist. Zur Staubwolke wurde der Hügel – durch die Wolke sah ich die verklärten Züge der Geliebten. In ihren Augen ruhte die Ewigkeit – ich faßte ihre Hände, und die Thränen wurden ein funkelndes, unzerreißliches Band. Jahrtausende zogen abwärts in die Ferne, wie Ungewitter. An Ihrem Halse weint ich dem neuen Leben entzückende Thränen. – Es war der erste, einzige Traum – und erst seitdem fühl ich ewigen, unwandelbaren Glauben an den Himmel der Nacht und sein Licht, die Geliebte.”(N 1, 134, 3. Hymne)

3번 찬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그것은 1797년 3월 사랑하는 연인 조피의 죽음이다. 조피가 죽고 약 두 달이흐른 5월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는다.

저녁에 조피에게 갔다. 그곳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번쩍하는 섬광과 같은 열광의 순간들. 무덤을 먼지처럼 불어내 버렸다. 수백 년의 시 간이 순간과 같았다. 그녀가 가까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항상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9)

9) “Abends gieng ich zu Sophieen. Dort war ich unbeschreiblich freudig – aufblitzende Enthsiasmus Momente – Das Grab blies ich wie Staub, vor mir hin – Jahrhunderte waren wie omente – ihre Nähe war fühlbar – ich glaubte, sie solle immer vortreten...”(Novalis 1978ff., Bd. 1, 463)

애인을 잊지 못하고 무덤으로 찾아간 노발리스는 현세와 내세의 경계가 없 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수백 년의 세월을 상징하는 “먼지”를 불어내니 그 시간은 마치 순간의 것과도 같이 느껴지고, 문득 조피의 존재를 가까이에서 의식하게 된다.

그렇게 마치 조피가 ‘부활’한 것처럼 느껴진다.

1, 2번 찬가에 서 묘사된 낮과 밤의 반전 그리고 그것으로 대변되는 삶과 죽음의 세계 간 경계의 소멸은 3번 찬가의 내용과 맥락을 공유한다.

3번 찬가에서는 1번 찬가에서 묘사된 장면, 즉 사랑과의 만남을 통해 ‘잠에 서 깨어나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언급된 ‘축복 의 내용’이기도 하다.

이를 바탕으로 3번 찬가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이를 여의고 슬픔에 잠겨있는 화자의 모습이다.

“그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이 엄습해오고, 화자는 더 이상 앞으로 가 야 하는지 뒤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모든 희망과 삶의 방 향성을 잃은 화자의 생명은 “꺼져버린” 상태에 이르게 된다. 애인의 죽음과 함께 화자 자신 역시 죽음을 맞게 된다. 두 번째는, “밤에의 열광”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상징적 죽음의 순간에 갇혀 있는 화자에게 “아득한 저편”으로 부터 불어온 비바람은 “빛의 족쇄”인 “탄생의 끈”을 찢어버리고, 그럼으로써 화자를 죽음과의, 즉 밤과의 만남으로 이끈다.

“천상의 잠”인 밤을 만난 화자 는 지상으로부터 “해방”됨을 느낀다. 유한한 지상의 세계에 억압되어 있던 화 자는 이제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리고 자유의 신분이 된다.

마지막으로 는, “영원성”으로서의 밤의 생명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초반부와 중반부에서는 아직까지 현실성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는 모습이라면, 후반부로 들어서며 화자는 자신이 속한 ‘지상세계’와 완전히 이별하는 것이다.

“수천년의시간이 아득함 속으로 꺼져”간다. 이제 천상의 세계인 밤으로 들어가 새로태어난 화자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의 두눈은“영원성”을 품고 있다.

그는 그간 겪은 감정의 굴곡을 참지 못하고 “황홀의눈물”을 터뜨리며 “밤하늘”, 즉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영원한 믿음”을 느끼게된다.

밤과 낮, 무한과 유한, 잠과 깸의 상태의 대비적 이미지와 어휘들이 관찰되는 이전 찬가들과 달리, 3번 찬가는 어떠한 한 방향으로 모든 존재들이수렴되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바로 화자가 가졌던 “처음의 꿈이자 유일의 꿈”이다.

각각 화자의 세계와 죽은 조피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간의 세계와 신성의세계 사이에서 화자는 더 이상 비탄에 잠겨있지 않다.

“옛 지복(至福)의높이”에서 내려오는 밤의 존재성은 화자에게 구원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죽음의 세계로부터 온 구원의 손길에 저항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자신을내주는 듯한 화자의 모습에서 “죽음에의 공감”(안삼환 2016, 323)이라는낭만성을 관찰할 수 있다.

화자가 지상에서 느꼈던 “무한한 그리움”의 자리는‘죽음에의 이끌림’으로 대체되며, 삶은 죽음 속으로 수렴된다. 혹은 삶과 죽음은죽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화자에게 축복됨을 마련해준다.

노발리스는 “죽음 속에서 사랑은 가장 달콤하다. 사랑하는 이에게 죽음은신혼의 밤, 달콤한 신비들의 비밀이다 Im Tode ist die Liebe, am süßesten. für den Liebenden ist der Tod eine Brautnacht – ein Geheimniß süßer Mysterien”(Novalis 1978ff., Bd. 2, 411)라며 죽음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위한 필수조건처럼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노발리스의 이러한 언급은 실존적인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에서한 말이 아니다.

노발리스는 시와 시인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존재의미를 적는다.

“시문학은 선험적 건강을 구성하는 위대한 기술이다. 시인은말하자면 선험적 의사다 Poesie ist die große Kunst der Konstruktion der transzendentalen Gesundheit. Der Poet ist also der transzendentale Arzt”(Uerlings 2000, 103에서 재인용).

시문학은 인간에게 선험적 토대를구성해준다. 인간은 그 토대에 의지해 자신을 돌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은 인간의 선험적 기반을 치유해주는 의사다.

즉 노발리스가 죽음과 부활을 노래하는 이유를 내세와 부활에 대한 실질적 인 믿음에서 찾는 것은 그가 지닌 종교성에 편향된 시각이다.

그보다는 그가 죽음을 “삶의 낭만화하는 원칙”이라고 적듯, 그리고 “낭만화란 질적 강화에 다름 아니다 Romantisieren ist nichts als eine qualitative Potenzierung”라며 낭만화를 통해서 “그렇게 근원적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So findet man den ursprünglichen Sinn wieder”(N 2, 545)고 적듯, 노발리스는 삶의 영역을, 말 하자면 낮의 시간을 밤의 시간을 매개 삼아 한결 승화된 모습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만 모든 존재는 자신 본래의 존재성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것이 낭만화의 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를 통해 서였다.

그는 시를 적음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고양되는 것 Erhebung des Menschen über sich selbst”(Uerlings 2000, 103에서 재인용) 을 원했다.

애인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워 자신의 죽음을 노래했지만, 죽음 이란 또한 노발리스에게 “더욱 정교한 자기결합”이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죽 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시적 죽음이다.

노발리스의 죽음 에 대한 찬양은 사실 삶에 대한 의지의 노래이며,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고양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과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를 감명시키는 모든 것은, 밤의 색이 지니지 않던가? Trägt nicht alles, was uns begeistert, die Farbe der Nacht?”(N 1, 137, 4. Hymne).

노발리스에게 밤과 죽음이 주는 ‘낭만화의 힘’은 그가 지니는 ‘삶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한병 철 2015, 44)면, 노발리스는 사랑이 주는 상처와 급격한 추락의 양상을 능동 적으로 수용하려 한다

노발리스는 “점점 다가오는 재난을 [...] 연인과의 행복 한 합일처럼 기다리고”(ebd., 22)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에 따르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나오는 반응은 애도와 우울 두 가 지로 구분할 수 있다.10)

10) 우울은 자신의 리비도의 투사 대상을 잊지 못한 채 그 부재의 자리를 자신 안으로 가져오는 양상을 말한다. 이렇게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됨으로써 우울증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대로 애도는 사랑했던 대상으로부터 점차리비도를 분리시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Freud 1946).

그러나 노발리스에게서는 상실된 대상과의 동일시로 인해 우울증에 빠지는 것도,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애도의 과정으로 ‘해소’ 한 뒤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도 아닌, 제3의 길이 관찰된다.

그것은오히려 죽음충동과도 같다. 노발리스는 살기 위해 죽음을 불사르기 때문이다.11)

병든 애인을 위해 새로운 공부를 계속해 나가고, 죽은 뒤에는 무덤가에서–마치 자신이 유령인 것처럼 –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타자에게 이끌린 채새삶을 향해, 어쩌면 죽음일지 모르는 곳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런노발리스의 모습은 타자에 의해 추동된 사랑의 감정을 잊지 않고 간직한 채, 그감정으로 인해 오히려 현실 원칙을 망각하는 밤의 존재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긍정성의 폭정’을 비판하며 한병철은 “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다. [...]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고 요약한다(한병철 2016, 9).

이는 에바일루즈 Eva Illouz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태도”, “경제모델”에 장악된 사랑의 모습이다.

이성애의 낭만적 사랑은 20세기에 일어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문화적 혁 명을 포괄한다.

하나는 생활방식의 철저한 개인주의화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사회관계의 경제화로 자 아와 심지어 그 감정을 꾸미는 일까지 경제모델이 장악했음을 뜻한다.

[...] 이는 자본주의 문화의 문법이 권력을 가지고 이성애라는 낭만적 관계의 영 역으로 침투해 장악한 결과다(일루즈 2014, 25).12)

11) 이런 점에서 노발리스가 애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애도 개념보다데리다 Jacques Derrida의 애도 개념과 더욱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진정한 애도는 끝이 날 수 없다. 애도는 프로이트가 말하는것처럼 사랑의 감정을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한다면 타자의 타자성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오직 일련의 환유적 대상들만이있을 뿐이다. 따라서 상실된 대상의 타자성을 그대로 간직해야 하는 데리다의입장에서 보아 궁극적으로 애도는 언제나 불가능한 애도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자의 존재를 항상 간직한 채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하게는다음 참조: 데리다·스티글레르 2014, 60f., 각주 39.

12) 더 나아가 일루즈는 ‘(남성) 문화는 여성의 강한 감정으로부터 힘을 얻으면서도그 대가를 줄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생적이다’라는 파이어스톤의 문장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소년/남자는 사 랑을 받기만 할 뿐 여성이 필요로 하는 감정의 배려를 스스로 베풀거나 화답할 수 없는 ‘감정의 기생충’이다. [...] 결국 관계맺음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강요된 이성애’가 낳은 한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일루즈 2014, 140)

그러나 노발리스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흔히 이야기되는 ‘낭만적 사랑’은 타자로부터 연유하는 어떤 부정성, 자칫하면 크나큰 재난으로 이를 수도 있 는 그 부정성 자체를 긍정함을 말한다.

이런 입장에서 밤은 찬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의 <바닷가의 수도승>이라는 그림을 떠올려 보자.

그림의 전면 일부가 육지이고 그 얼마 안 되는 육지 끝에 수도 승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수도승은 관람객 쪽을 바라보는 대신 관람객을 등지 고 서 있다.

그는 약간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하늘은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약간 어두운 색조의 하늘이다.

이는 블랑쇼 Maurice Blanchot가 묘사하는 “하나의 원초적 장면”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 장면 앞에서 느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야기되는 “현기증”이다.

(하나의 원초적 장면?) 후일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 가까이에서 살아가게 될 당신들, 이러한 가정을 해보라. 그 어린아이는 [...] 서서 커튼을 젖히고 창유리를 통해 바라본다. ... 일상의 하늘을 향해 위로 구름들과 함께 회색빛 을, 원경이 보이지 않는 칙칙한 대낮을 천천히 바라본다. 이어서 일어난 일. 갑자기 열린, 절대적으로 검고 절대적으로 텅 빈 하늘, 그 똑같은 하늘은 (깨진 유리창을 통해) 모든 것이 늘 영원히 사라져갔던 그러한 부재를 드러 내며, 그 부재 가운데 무無가, 무엇보다 먼저 저 너머의 무가 존재하는 그것 이라는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지식이 단적으로 표명되고 흩어져 가기에 이른다(블랑쇼 2012, 133).

공허한, 그렇기에 무한한 하늘을 마주한 그 어린아이는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수도승과 같은 처지에 있다.

그들은 “무”를 마주한 채 어찌할 바 모르는 감정을 느낀다.

“이 장면(그 끝나지 않음)에서 기다리지 않았던 것은 그 아이 를 즉시 잠식해 나가는 행복의 감정”(블랑쇼 2012, 133)이다.

행복이라고 느 꼈던 일련의 감정들은 하늘 앞에 부정되기에 이른다.

“그 아이가 오직 눈물로 만, 끝없이 흐르는 눈물로만 증명할 수 있을 휩쓸고 지나가는 환희 [...].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블랑쇼 2012, 133)

그러나 행복의 부정이 건네는 것은 불행의 삶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으로다가오는 타자성의 경험은 “환희”를 선물해준다. 결론적으로 환희의 경험은타자성의 경험으로부터만, 종래의 삶을 통째로 부정할 위력을 갖기도 하는“눈물”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번쩍이는 고독, 하늘의 빈 곳, 연기된 죽음, 즉 카오스.”(블랑쇼 2012, 24)

블랑쇼가 고독, 빈곳, 죽음 그리고 카오스를 병렬함으로써 동일한 의미망으로 파악하는 것은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환희의 경험은 고독의 경험, 나의 인지능력바깥의 빈 곳, 즉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13)

그리하여 낭만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몽주의의 빛은 반쪽짜리 빛”(김재혁 2017, 69)일 뿐이다.

계몽의 빛은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는 긍정성만을주장하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빛은 모든 것의 긍정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계의 경험에서 빛은 진정한 존재성을 지닌다.

빛이미칠수 없는 곳이 빛의 부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 자체가 그것의 부정으로서 존재한다. 오직 밤이라는 타자를 통해서만 빛은 빛일 수 있다.

빛보다 우선하는 것은 어둠이다.14)

13) 한편 블랑쇼에게 이러한 경험의 공간은 문학의 공간으로도 설명된다. 사랑에있어 타자의 존재가 부정적 긍정 조건이었듯 “블랑쇼의 문학은 긍정이고 동시에부정인 바깥이다. 이 바깥은 또한 문학이고, 문학은 이 공간 속에서 철학의타자이다.”(김상구 2004, 56) 블랑쇼에게 있어 ‘부정은 긍정의 유일한 또 다른형태’이며,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는 점에서 블랑쇼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은‘파편적인 것’이다(Beitchman 1987, 62).

14) 빛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어둠에 대해서는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도읽어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그림자를 팔자마자 사회적 실존을 상실한다(샤미소 2011). 이처럼 그림자가 긍정에대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서의 부정임을 논하는 글로는 김진환(2023) 참조.

「밤의 찬가」는 이러한 타자적 존재로서의 밤을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 경험되는 사랑으로서의 또 다른 ‘밤’의 경험, 나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즉 사랑하는 애인 또는 무한성이 지니는 가닿을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에 대한 자각이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조건으로작동한다.

따라서 이러한 노발리스의 밤의 시간은 바디우가 말하는 ‘검정의변증법’에 대한 적합한 예가 될 것이다.

바디우는 검정의 변증법에서 ‘변증법’이란‘둘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둘로 나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상징으로서 검은색은 조급하고도 살인적인 허무주의와, 조직화의 확신에 기초하는 끈기라는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본질적으로 분열한다.” (바디우 2020, 63)

노발리스의 밤에 대한 찬가는 이런 방식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밤은 확 실히 죽음과 가깝다.

낭만주의에서 밤이 강조되는 이유도 이런 특성에 있다.

하지만 밤이 어떤 의미구조를 갖는가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면, 낭만적 밤은 삶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랑의 대상이 떠남으로써 나의 일부도 죽었다.

그러 나 그 상징적 시간으로서의 밤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길어내려는 시도가 밤에 대한 찬가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들어설 때야 비행을 시작한 다”(Hegel 1972, 14)는 헤겔의 문구는 낭만주의의 사랑 담론을 거쳐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밤이 들어설 때야 비행을 시작한다.’

3. ‘사랑의 예찬’으로

‘사랑.’ 밤을 통해 주어지는 또는 밤으로서 경험되는 사랑.

이렇듯 밤은 사 랑의 시간일 뿐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밤’과의 조우를 선사한다.

사 랑이 선사해주는 빛은 밤을 경유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사랑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말이 있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단순 ‘빛’을 통 한 빛의 경험이 아닌 어떤 경험, 단순 ‘사랑’이 아닌 사랑의 경험은 어떤 진리 의 차원과도 연관된다.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 마지막 장 「아름다움 속 에서의 산출」을 다시 한 번 파울 첼란의 시로 시작한다.

광음. 그것은 인간 사이로, 흩날리는 은유들 한가운데로 들어선 진리다. (한병철 2016, 111)

이때 진리는 “아토포스적인 타자”(한병철 2015, 96)와도 같다.

흔한 은유들 의 세계 속, 그곳에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은유들의 규칙을 허무는 어떤 “광음”이다.

광음으로 생산된 진리는 은유들의 세계로 포섭될 수 없다는점에서 부정적 존재, 타자적 존재로 남는다.

한병철이 인용한 첼란의 시의 “광음” 은 바디우의 사랑 예찬에서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이 바로 인생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해준 다.

사랑의 본질은 충실함, 특히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충실함이다.

그 것은 근본적으로 행복이다! 그렇다.

사랑이 주는 행복은 영원을 시간이 품 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Badiou 2011, 45).

은유들의 세계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진리의 광음처럼 사랑은 시간 속에영원을 기입한다.

이렇게 기입된 영원의 시간이 바디우에게서는 다름 아닌사랑의 행복인 것이다.

그곳에는 분명 “보편적인 것의 씨앗”(Badiou 2011, 23) 이 담겨 있다.

따라서 사랑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상의 체험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경험하는 과정과도 같다.15)

15) 우리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이는 ‘너를 항상 사랑한다’는 지속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은 바로 이 ‘항상’을 전제하고 있다는점에서 영원의 선언이기도 하다. 사랑은 순간의 우연을 영원으로 탈바꿈하는제안이자 그 제안의 경험이다(바디우 2010a, 58f.).

하지만 그 ‘행복’과 ‘영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들은 과연 어떤 점에서 앞서살핀「밤의 찬가」의 사랑 또는 밤의 경험과 공통점을 보이는가?

한병철에게 오늘날 에로스가 종말에 이르게 되는 것은 타자의 경험이제거되는 것이었다.

에로스는 근본적으로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타자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에로스의 모습은 바디우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바디우의 사랑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복은 나와타자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거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디우는 사랑을 “둘의 무대”(Badiou 2011, 39)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랑의 무대는나만의 것이 아니다.

사랑에 참여하는 연인들은 그 무대를 옆에 있는 사랑하는 이와 나누어야 한다.

나눈다는 것은 단지 ‘공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그 무대를 ‘나누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이때 무대 위에는 제거할수 없는 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Badiou/Tarby 2012, 56).

연인은 한곳에있지만 다른 곳에 있기도 하고, 다른 곳에 있지만 같은 곳을 향하고 있기도하다.

이는 “둘에 관한 진리”(바디우 2010a, 51. 강조 원문)라고 표현할 수 있 으며 이러한 둘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차이의 진리”(ebd.)다.

이처럼 “일 자의 지배의 분할 속에서 둘이 사유되기 시작하는 지점”(바디우 2010b, 122) 은 사랑의 출발점이자 가능 조건으로 존속한다.16)

그러나 이러한 양상이 사랑하는 이와 타협 불가능한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불가능성, 즉 완전한 합일은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사랑의 구성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17)

16) 이는 바디우의 예술(가)론의 맥락에서도 관찰되는 구조다. 예술에는 세 가지 항 이 있는데, ‘사물’로서의 작품, ‘작품을 만드는 사람’,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세 가지 항(두 주체와 하나의 사물)을 전제하 는 관계는 결국 가능한 가장 훌륭한 ‘사물’이란 예술가가 어둠 속에 잠재하는 무한한 새로운 광채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바디우 2020, 53)이다. 따라서 “예 술가의 윤리는 [...] 검은색 너머에서, 검은색 이상의 초월적인 검은색을 찾고, 이를 계속하라는 명령”(ebd., 55)을 따르는 것이다. 표현 불가능한 것의 표현을 무한히 지속하라는 이런 명령은 낭만주의 예술에서도 발견되는데, 낭만주의에서 예술가 혹은 창작자는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 하나의 온전한 세계로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천재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쓴 글로부터 스스로가 상대화되는 위 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슐레겔 Friedrich Schlegel이 괴테의  빌헬름 마이스터에 대한 평론을 시도하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 관해」를 참조. 그곳에서 슐레겔은 “모든 비평은 그래야 한다. 어떤 종류의 것이 되었든 모든 훌륭한 작품은 그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의] 목적지와 진행 과정이 너무 도 다양한 데서 연유한다”(KA 2, 140)라고 말한다.

17) 토마스 만의 「벨중족의 혈통」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은 모든 것에 익숙해지기를 거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익숙함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습관에 빠진다는 것은 죽음이네. 그건 둔감하게 된다는 것이네. 적응해서 살지 마시게. 아무것도 자네한테 자명한 것이 되도록 하지 마시게. [...] 이것이 청년다움이네……나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이룩했는지 알고 있거든!”(만 2023, 308) 그러나 이 글에서 논하고 있는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익숙함을 의도적으로, 즉 의지적 주체가 자신의 뜻에 따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반대로, 익숙치 않음이라 는 부정적 사태 자체가 우리가 무엇이든 ‘이룩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은 결국 종래의 나 자신 을 부정하는 과정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매 순 간” “다시” 사랑은 선언되어야만 한다.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찾아내야 만 하는 것입니다. 최초에 선언된 바로 그 사랑도, 역시 ‘다시 선언’되어야 할 것입니다(바디우 2010a, 62).

달리 말해 “사랑은 단순히 두 명의 고정된 개인이 아니라 두 개인이끝없이 불확실하지만 집요한 걸음걸이 안에서 구축할 수 있는 것에 관련된다는점에서 실체가 아니라 과정”(박영진 2019, 369)이다.

노발리스에게서 사랑이그것이 주는 뼈아픈 부정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이로 하여금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가는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함이 묘사되는것과 마찬가지로, 바디우에게서 절대적인 부정성의 경험은 플라톤이 말하는“아름다움 것 안에서 생식”(플라톤 2016, 103)하도록 하는 에로스의 경험과도같다.

그렇기에 바디우가 둘의 ‘소거할 수 없는 차이’를 이야기하고 ‘둘의진리’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것을 단순히 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둘의 무대’는 주어진 무대 위에 너와 내가 다름만을 확인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둘이 꾸며내는 무대적 절차”(서용순 2008, 94)로서 계속되는운동의 장과도 같다.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주체는 나의 세계를 (새로이) 구성하며 상대의 세계가 (새로이) 구성될 조건을 구성하고, 상대의 세계가(새로이) 구성됨으로써 나의 것 또한 재차 새롭게 바뀌어 간다.

이러한 과정은다만 각각 개별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무대에 서 있는둘은둘 사이의 절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함께’ 생성해 나간다.

사랑과 에로스를 옹호하는 한병철의 저서 에로스의 종말에 부쳐진서문「사랑의 재발명」에서 바디우는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바디우2015, 6)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쩌면 사랑의 둘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건설한다는 전망, 더 이상 나의 것 도, 타자의 것도 아닌 세계, 유일한 개별자로서의 “우리 둘”을 경유하여 이 루어질 모두를 위한 세계 기획의 전망이 자기 자신의 길을 열어갈지도 모 른다. 아마도 사랑은 잠정적으로만 부정성의 절대적 시련, 즉 타자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이타적 태도일 것이다. [...] 어쩌면 충실한 사랑이란 실제 로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 애써 힘겹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일 것이다.”(바디우 2015, 6ff.)

따라서 ‘사랑은 절대적이다’라고 우리가 만약 표현한다면, 그 절대성은 절 대적인 부정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세계는 “더 이상 나의 것도, 타자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 각”들의 세계이며 이 세계는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향하고 있다.

이 과정은 플라스푈러 Svenja Flaßpöhler가 힘 있는 여성에서 제안하는 ‘새로운 현상 학’의 전개 과정과도 유사한데, 그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생물학 적 조건으로 인해 서로 배타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배타성이야말로 서로 “다른 육체를 가짐에도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Flaßpöhler 2018, 36)이라는 과제를 상기시키는 요인이 된다.

바디우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여성 의 입장과 남성의 입장은 서로 환원 불가능할 뿐 아니라 양립이 불가능하다 (서용순 2008, 94).18)

18) 그러나 바디우가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할 때 이는 생물학적인 성구분으로 이해 해서는 안 되며, 남성성과 여성성의 만남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이는 생물 학적 동성 간의 만남에서도 가능하다(서용순 2012, 197).

하지만 이러한 바디우의 양립 불가능한 이분법적 구도 는 사랑 속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해간다. 또는 계속해서 이행해가는 중이다. 사랑은 “둘을 수립함과 동시에 둘을 구성하는 것들을 초과하는 절차”(ebd.)인 것이다. ‘둘’을 구성하는 것을 초과하는 과정은 바디우에게서 ‘여행’이라고 명명될 수도 있다. 여행, 어쩌면 사랑의 여행이라고 표현해야 할 그 여행은 ‘세계를 끝없이 횡단하는’ 과정이고 이때 펼쳐지는 ‘이야기’는 ‘세계의 무한한 펼쳐짐’ 의 이야기다(바디우 2006, 479f.). 절대적 차이와 배타성은 오히려 새로운 열 림의 조건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둘의 무대는 두 개의 분리 된 진리를 생성하지 않는다. 사랑을 통한 만남 속에서 ‘하나의 진리’가 생성되 고 그 ‘하나의 진리’는 모든 입장을 가로지르는 동시에 그 입장에서 벗어난다 (바디우 2006, 344). 자기 동일성과의 부단한 싸움, 타자의 실존과의 마주, 둘 이 함께하는 무대의 구성은 궁극적으로 창조적인 운동이다.

그 과정을 통해 무한하고 수렴 불가능한 “창조적 존재”(Badiou 2011, 52)로서의 다자의 세계가 가능해지게 된다.19)

사건으로서의 사랑이 바디우에게서 ‘진리’와 공명하게되는 이유다.

“진리란 사건에 의해 열리는 과정이다 it [truth] is a process which is opened by an event”(Badiou 2003, 85)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명의‘주체’로서 정립될 가능성을 얻는다.20)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사랑에 관한 테르치네」에서 구름과 두루미는함께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Brecht 1989, 15) 날아간다.

이러한 비행은이전까지의 존재 양식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이들은 바람에의해 “무(無) 안으로 납치되는”(ebd.)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렇듯하나의 ‘사건’과도 같은 바디우의 사랑,21)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병철 2015, 86)하게 됨으로써 바디우가 사랑을 옹호하는 지점과 한병철이 에로스를 옹호하는 지점은 겹치게된다.

사랑의 경험에서 타자의 존재, 무엇보다 나 자신이 접근 불가능한 공간을지니는 부정적 존재로서의 타자의 위치는 본질적이다.22)

19) 기존의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은 비단 사랑을통해서만은 아니다. 바디우에게는 문학 역시 위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문학과사랑은 ‘새로운 삶이라는 예외의 지점을 산출하는 끈덕진 시도들’의 차원에서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서용순 2016, 19ff.)

20) 바디우 전체 철학을 관통하는 물음은 “진리의 빛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정향시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 안에서의 삶, 참된 삶으로서 훌륭한 삶을 산다는것은 과연 무엇인가?” 물음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답은 “무한한절대성의 다양한 흔적들과 형태들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주체가 되라는 것”이다(바디우 2022, 15).

21) 1999년 출간된 까다로운 주체 이후 거의 모든 책에서 바디우의 개념들을가져와 글을 써온 지젝(바디우/지젝 2013, 115)은 사건 개념을 “전적으로 새로운무언가의 출현”(Žižek 2014, 161)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2) 그렇기에 바디우에게 사랑의 진정한 적은 다른 라이벌이 아니라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이기적 자아다. “사랑의 적은 라이벌이 아니라 에고이즘이다. 이렇게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무찔러야 할 가장 위험한 적은 타인이 아니라 나자신, 즉 “자아”다. 차이에 반하여 동일성을 바라고, 차이의 프리즘으로 여과되어새로이 조합되는 세계에 반하여 자신의 세계를 관철하려는 자아 말이다.”(Badiou 2011, 53)

둘 사이의 이러한긴장은 에로스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나의 모습을, 내 삶의 양식을, 어쩌면존재의 본질을 뒤바꿀 힘을 지니는 사랑,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있도록 해주는 사랑.

이는 앞서 살핀 것처럼 분명 ‘낭만적’ 사랑이다.

4. 결론

이 글은 노발리스와 바디우의 사랑 담론을 비판적 참조점 삼아 경유함으로 써, 오늘날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에 관해 논해보고자 했다.

물론 두 인물이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공명하는 지점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을 지적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디우의 사랑이 둘의 완전한 합일을 애초에 불 가능한 것으로 보는 반면, 노발리스의 사랑은 그러한 합일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노발리스의 낭만적 사랑이 사랑하는 이의 부정성을 기반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감정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두 경우의 사랑은 공통적 이다.

또한 낭만주의의 ‘합일’은 합일이 진정으로 완결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이 해되어야 한다기보다 그것을 희구하는 과정적 운동에 더욱 방점이 찍혀야 함 (Frank 1997)을 환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이 사랑 자체를 초과한 다”(박영진 2019, 369)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경우에서 모두 주요한 것은 지속되는 과정 속에 경험되는 환 원 불가능한 거리감 그리고 그 거리감이라는 부정성이 갖는 긍정성이다.

“독아 론적 하나가 세계의 무한한 다수성으로 옮겨가는 것으로서의, 존재의 회색 암 흑이 밤중에 갈라지는 것으로서의 사랑의 둘”(바디우 2006, 479)은 낭만적 사 랑의 경험을 지난다.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분명 ‘낭만적 사랑’이다.

또는 그보다는 ‘낭 만적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의 한 시에서처럼 어떤 ‘번개’를 맞는 것과 같은 경험이 사랑의 경험이다.23)

23) 보들레르는 「지나가는 여인에게 À une passante」(1855)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목격한 순간을 번갯불이 빛나는 순간으로 비유한다. 이 순간은 ‘위압적인 아름 다움’에서 ‘신적인 것이 현현하는’ 순간이다(Ross 1996, 247). 이 글의 논의에 맞 게 풀어본다면, 사랑의 순간은 ‘위압적인 타자가 나를 덮치는 순간’일 것이다.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규칙을 허무는 어떤 존재와의 만남 그리고 그러한 존재와 함께 공 유하는 경험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결코 완전히 공유될 수 없는 어떤 경험의 공유, 그럼에도 일상의 차원에서 초월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곳, 이는 하나이자 둘이며 둘이자 하나인 우리들이 경험하는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낭만적 사랑은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랑은 필연적으로 낭만적이다.

핵심어: 노발리스, 밤의 찬가,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타자

참고문헌

김재혁(2017): 서정시의 미학: 독일 서정시의 창작과 번역. 세창출판사. 김진환(2023): 샤미소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 읽기: ‘객체지향존재론’의 틀을 통해. 독일언어문학 102, 51-73. 데리다, 자크/스티글레르, 베르나르(2014): 에코그라피(김재희/진태원역). 민음사. 바디우, 알랭(2006): 조건들(이종영 역). 새물결. (2010a): 사랑예찬(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 (2010b): 철학을 위한 선언(서용순 역). 도서출판 길. (2020): 검은색(박성훈 역). 민음사. (2022): 가끔씩, 우리는 영원을 경험한다(박영기 역). 논밭출판사. 바디우, 알랭/지젝, 슬라보예(2013):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민승기 역). 길. 박영진(2019): 라캉, 사랑, 바디우. 에디투스. 블랑쇼, 모리스(2012): 카오스의 글쓰기(박준상 역). 그린비. 샤미소, 아델베르트 폰(2011):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박광자 역). 부북스. 서광열(2016): 독일 낭만주의 문학과 사상에서 나타난 ‘밤’의 상징적 의미–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와 니체의 「밤의 노래」를 중심으로. 대동철학 77, 53-84. 서용순(2008): 비-관계로서의 사랑: 라깡과 바디우. 현대정신분석 10(1), 87-104. (2012): 우리 시대의 사랑, 결혼, 가족. 철학논총 67, 165-187. (2016): 사랑의 구축과 그 정치성에 대하여. 계간 시작 15(2), 10-21. 안상원(2009): 성스러운 밤의 표상 : 횔덜린과 노발리스를 중심으로. 인간연구 17, 181-214. 일루즈, 에바(2014):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의 사회학(김희상 역). 돌베개. 정경량(1997):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와 「성가」에 나타난 종교성. 독일언어문학 7, 166-189. 플라톤(2016): 향연(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와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으로 읽는 ‘사랑’에 관한 소고 209 프레히트, 리하르트 다비드(2017): 너 자신을 알라: 르네상스에서 독일 관념 론까지(박종대 역). 열린책들. 한병철(2015): 에로스의 종말(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6): 아름다움의 구원(이재영 역). 문학과지성사. (2020): 폭력의 위상학(김태환 역). 김영사. Badiou, Alain(2003): Infinite Thought. Truth and the Return to Philosophy. Trans. and ed. by Oliver Feltham/Justin Clemens. London/New York. (2011): Lob der Liebe. Aus dem Franz. v. Richard Steurer. Wien. Badiou, Alain/Tarby, Fabien(2012): Die Philosophie und das Ereignis. Mit einer kurzen 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 Alain Badious. Wien. Beitchman, Philip(1987): The Fragmentary Word. Substance 39, 58-74. Brecht, Bertolt(1989): Gesammelte Werke. Bd. 14. Frankfurt a.M. Flasspöhler, Svenja(2018): Die potente Frau: Für eine Neue Weiblichkeit. 5. Aufl. Berlin. Frank, Manfred(1997): »Unendliche Annäherung.« Die Anfänge der philosophischen Frühromantik. Frankfurt a.M. Freud, Sigmund(1946): Trauer und Melancholie. In: Ders.(1946): Gesammelte Werke. Bd. 10. Hrsg. v. Anna Freud. London/Bradford. Hegel, Georg Friedrich(1972):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Frankfurt a.M. Illouz, Eva(2007): Der Konsum der Romantik: Liebe und die kulturellen Widersprüche des Kapitalismus. Aus dem Amerik. v. Andreas Wirthensohn. Frankfurt a.M. Link, Hannelore(1971): Abstraktion und Poesie im Werk des Novalis. Stuttgart. Novalis(1977ff.): Schriften. Die Werke Friedrich von Hardenbergs, in 4 Bänden. Hrsg. v. Paul Kluckhohn u. Richard Samuel. 3. erg., erw u. verb. Aufl. Stuttgart. Novalis(1978ff.): Werke, Tagebücher und Briefe, Bd. 1, 2. Hrsg. v. Hans-Joachim Mähl und Richard Samuel. München. Ross, Werner(1996): Ach Sagt Alles. In: Reich-Ranicki, Marcel(Hg.)(1996): 1000 deutsche Gedichte und ihre Interpretationen, Frankfurt a. M., 246-248. Schlegel, Friedrich(1958ff.): Kritische Friedrich-Schlegel Ausgabe. Hrsg. v. Ernst Behler unter Mitwirkung von Jean Jacques Anstett und Hans Eichner. München/Paderborn/Wien. Uerlings, Herbert(Hg.)(2000): Theorie der Romantik. Stuttgart. Žižek, Slavoj(2014): Event: a Philosophical Journey through a Concept. Brooklyn: Melville House.

■Zusammenfassung

Ein Versuch über die Liebe: Am Beispiel von Novalis’ Hymnen an die Nacht und Alain Badious Lob der Liebe

Kim, Jinhwan (Dankook Univ.)

Die Behauptung, dass Liebe heute verschwimmt, deutet darauf hin, dass sich in der Art und Weise, wie Liebe erlebt wird, ein grundlegender Wandel vollzieht. Heutzutage verschwindet der Raum des Anderen in der Erfahrung der Liebe. Sie wird einfach als Erweiterung der Selbstidentität erlebt. Dies in Betracht gezogen, versucht dieser Artikel, anhand von Novalis’ H ymne an die Nacht und Alain Badious Lob der Liebe der Frage nachzugehen, wie Liebe aussehen sollte. Bei Novalis, der dichotomische Werturteile ablehnt, wird „Leben“ selbst in intimer Verbindung mit „Nacht“ (Dunkelheit) verstanden. Die Liebe ist keine „reine“ Liebe, sondern wird durch den Tod erhöht. Es ist nicht die Negativität (Tod), die der Positivität (Liebe) entgegensteht, sondern die Negativität selbst hat eine positive Bedeutung. Negativität als Erfahrung des Anderen spielt in der Liebe eine wichtige Rolle. Dieses Verständnis von Liebe kann durch Badious Liebestheorie erweitert werden. Die Teilnahme an Liebe ist ein Prozess, in dem man etwas erlebt, das über einfache Alltagserfahrungen hinausgeht. Badious Liebe setzt letztendlich eine unüberwindbare Distanz zwischen sich selbst und dem Anderen voraus. Das ist die „Wahrheit der Zwei“, von der Badiou spricht. In beiden Fällen werden die irreduzible Distanz und die Positivität der Negativität dieser Distanz zum Schlüssel. Was heute für Liebe benötigt wird, ist die Positivität der Negativität selbst.

Stichwörter: Novalis, Hymnen an die Nacht, Alain Badiou, Lob der Liebe, das Andere

논문투고일: 2024.04.12. 논문심사일: 2024.04.17. 게재확정일: 2024.05.16.

독어교육 제89집

 

8. 김진환 선생님 (187-211).pdf
0.6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