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이 발표는 북한 발간 ‘조선철학사’에서 다루어진 삼국 및 고려시기의 유학에 대한 검토를 통해 북 한에서의 연구를 점검하고, 남한학계 연구와의 비교를 통해 이 시대의 한국철학사 편찬을 위한 바람 직한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삼국 및 고려시기의 유학은 우리 역사에서 유교가 수용되어 우리 문화와 융합되고 사회에 적용되 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유교에 대한 철학사의 서술은 학술적인 의미에서 한국인 학 자들이 어떠한 독특한 심화 ․ 발전의 양상을 이루어냈는가 하는 것보다는, 이 시기에 우리의 삶과 사 회에서 유교가 어떠한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다.
북한 발간 ‘조선철학사’에서도 삼국 및 고려시대의 유교에 대한 기술 내용은 관련 세부 주제나 개 별 학자들의 독특한 이론에 대한 발굴 ․ 소개 ․ 평가보다는 우리의 역사상에서 유교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북한 연구의 일반적 관점과 입장을 보여 준다.
특히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해석’과 ‘추론’에 많 이 의존해야 하는 이 시기의 유학에 대한 서술에서 그 관점은 사실상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더욱이 1960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북한의 ‘조선철학사’ 단행본들은 인민대중의 교육이라는 명 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깊은 학술적 논의를 담기보다는 북한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철 학사의 관점을 분명하게 적용하려는 기술방식을 보여 준다.
따라서 ‘조선철학사’에 기술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단행본에 적용된 서술의 관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발표에서는 먼저 북한 발간 ‘조선철학사’의 관점을 살펴 본 뒤, 그 관점에 따라 선정 된 삼국 및 고려시기의 유학 관련 주제들을 고찰한다.
‘조선철학사’에서는 일부 학자들의 철학사상 에 대해 별도의 장 ․ 절을 할애하여 기술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각 학자들의 독특한 학설을 논하기보다는, 유학의 특징들 중 해당 학자와 관련하여 강조되는 점들에 대해 주로 기술하였다.
그 러므로 이 발표문에서는 주제별로 내용을 정리하고 주요 인물들의 철학사상도 그 주제별 내용에 포 함시켜 다룰 것이다.
또한 북한 발간 ‘조선철학사’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여러 종이 발간되었으나, 2010년 발 간된 조선철학전사(전15권)가 이전의 성과를 대부분 반영하여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이 발표는 전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타 ‘조선철학사’들을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2. 서술의 관점
북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여러 종의 ‘조선철학사’가 발간되었다.1)
1) 필자가 확인한 북한 발간 ‘조선철학사’ 단행본들은 아래와 같다. 정진석 ․ 정성철 ․ 김창원, 조선철학사(상), 1961(제2판; 도서출판 광주, 1988) 최봉익, 조선철학사상사연구(고대-근세), 사회과학출판사, 1975 정해섭, 조선철학사(2판),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2 최봉익, 조선철학사개요-주체사상에 의한 조선철학사(1962)의 지양-,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6(한마당, 1989) 정성철, 조선철학사 2, 과학 ․ 백과사전출판사, 1987 최봉익, 조선철학사 3, 평양백과사전출판사, 1991 최봉익, 조선철학사 개요(제2판),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009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집단, 조선철학전사(전15권),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010 김수영 ․ 김명수, 철학지식-조선철학사(제2판), 사회과학출판사, 2014(제1판 2009)
‘서술의 관점’에 초 점을 맞추어 보면 ‘조선철학사’ 단행본들은 발간 연도에 따라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기는 북한의 첫‘조선철학사’인 조선철학사(상)(정진석 ․ 정성철․ 김창원 집필)가 발간된 시 기이다.
그 제1판은 1960년, 제2판은 1961년에 발간되었는데, 제2판에는‘제2판 서문’만 추가되었 고 책의 내용은 제1판에서 별다른 수정을 가하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조선철학사’ 는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투쟁의 역사로서 기술된다.
이러한 철학의 역사를 통해 낡은 사상의 잔 재를 극복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조선철학의 발전을 이해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제 2기는 조선철학사상연구(최봉익집필, 1975)부터 조선철학전사(사회과학원 철학연구집 단 집필, 2010)의 발간 전까지인데, 이 시기는 주체사상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로서 그 영향 속에서 여러 종의‘조선철학사’가 발간되었다.
조선철학사(상)(1961) ‘제2판 서문’에 한 차례 등장했던 김 일성의 ‘교시’는, 조선철학사상연구(1975)부터 그 이후의 모든 ‘조선철학사’에서 서문과 본문 곳 곳에 인용되고, 그 교시를 지침으로 삼아 ‘주체사상’에 의거하여 철학사가 기술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발간된 ‘조선철학사’가 1960(1961)년 집필된 조선철학사(상)와 구별되는 점은 특히 민 족 및 민족문화의 우수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철학사(상)(1960, 1961)에서도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내려는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교육의 목적으로 급히 집필된 것도 1950년대 중반부터 소련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북한이 독자노선을 선택하며 주체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철학사’는 그 집필 동기 자체가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독자성을 구축해 가려 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철학사(상)(1960, 1961)에서는 아직 ‘조선철학사’의 내용 기 술에서 주체사상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선철학사상사연구(고대-근세)(1975)부터는 그 서문의 첫머리부터 주체사상이 조선 철학(사상)사 연구의 지침임을, 그것도 “유일한”지침임을 밝히고 있다.
13쪽에 달하는 상당히 장문의 ‘머리말’에서 주체사상을 사상이론적 및 방법론적 기초로 하여 주체성, 당성 ․ 노동계급성, 역사 주의를 조선철학사 연구의 세 가지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조선철학사를 기술 한다는 것은 조선철학의 역사가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투쟁의 역사일 뿐 아니라, 그것이 조선민족 의 주체적인 자각과 의지에 의한 철학(사상) 발전의 과정임을 기술하는 것이다.
특히 1982년 발간된 조선철학사(2판)에서는 주체사상의 핵심이 ‘자주성 ․ 창조성 ․ 의식성’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강 조되고, 조선철학사의 전개가 바로 ‘자주성 ․ 창조성 ․ 의식성’의 발전 과정이라는 점을 그 내용에서 지나칠 정도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철학적 사유는 “일정한 계급의 리익을 반영하고 계급성을 띠고 있는 것”이라는2) 입장에서 주체성의 원칙과 함께 당성 ․ 노동계습성 및 역 사주의 원칙은 고수된다.
나아가 조선철학사개요(1986)는 ‘주체사상에 의한 조선철학사 (1962)의 지양’이라는 것을 부제로 내세워서, 이전에 쓰여진 ‘조선철학사’가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새롭게 기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직접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조선철학사 2(1987), 조선철학사 3(1991)에서는 각각 이조시대와 근대 이후를 다루 고 있는데, 특히 후자에서는 동학, 위정척사, 개화, 반일의병, 애국문화운동 등에 이어 김형직(김일 성의 부친)의 사상을 기술하였다.
이는 조선철학의 역사에서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투쟁 과정이 조선민족의 자주성 ․ 창조성 ․ 의식성의 발전에 따라 진행되어 주체사상의 형성 ․ 발전으로 이어진다 는 입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철학전사(2010)에서 본격적으로 반영되어 기술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3기는 조선철학전사(이하 전사) 의 집필 및 발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발 간사’(「조선철학전사를 내면서」)에 따르면 전사는 5년간의 집필 작업을 거쳐2007년에 완성되고 2010년에 발간되었다.
15권으로 이루어져 우선 그 내용이 대폭 늘어났을 뿐 아니라 그 깊이에서도 이전에 발간된 ‘조선철학사’들과는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제1~8권에서 고대부터 근대 까지의 철학사상을 다룬 뒤, 제9권에서 김형직의 철학사상, 제10~15권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철학사상을 다루어서, 전통 시대의 철학을 바탕으로 주체사상이 만들어지고, 조선철학의 발전이 주 체사상에서 완성된다는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발간사’에서는 ‘조선철학사’ 연구와 집필의 원칙으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는 원칙”을3) 제시하고, 철학의 근본문제가 ‘과거의 물질과 의식 사이의 관계문제’로부터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로 근본적인 발전(8쪽)을 이룬다고 명시함으로써, 형이상학적 관념론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 의 투쟁 다음 단계로 주체사상의 단계가 설정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 정해섭, 조선철학사(2판),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2, 8쪽.
3)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집단, 조선철학전사 1,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010, 6쪽.
3. 시기 구분과 대상 선정
북한 발간 ‘조선철학사’의 시대 구분을 살펴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따른 발 전사관을 토대로 하면서도 목차에서는 대체로 왕조의 변화에 따른 시대 구분 방식을 따른다.
다시 말하자면, 원시 공동체 사회 - 고대 노예제 사회 - 중세 봉건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사회주 의와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을 사회발전의 일반법칙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조선철학사’에 서는 그것을 대체로 왕조의 교체 시기와 맞추어서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적 사유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형성 이후에 시작된다고 보아서, 고조선은 고대 노예제 사회, 삼국부터 조선후기까지는 봉건사회,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사회주 의/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시기로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철학사(상)(1960, 1961)에서부터 일관되게 적용되는데, 그 적용 방식에는 다소 변화가 있다. 조선철학사(상)(제2판, 1961)에서는 목차에서 ‘고조선 - 3국 - 통일신라시기 - 고려시기’로 나누고 조선은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한두 세기별로 나누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 고 그 내용의 기술에서 역사적 유물론을 적용하였다.
조선철학사상사연구(고대-근세)(1975)에서 는 발해를 포함하여 ‘통일신라시기’를 ‘발해, 신라시기’로 규정하였고, 이후에 발간된 ‘조선철학사’ 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따랐다. 그런데, 조선철학사(2판, 1982)과 조선철학사개요(1986)에서는 왕조 기준의 시대 구분 대신 ‘노예사회 - 봉건사회 - 자본주의사회’라는 역사 단계를 목차에 내세워서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까 지를 모두 봉건사회의 시기로, 19세기 후반기~20세기 초의 시기를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기’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 구분 방식은 조선철학사 2(1987)에서 다시 왕조의 단위를 목차 의 시기 구분 기준으로 삼는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결국조선철학전사(2010)에서 채택된 방 식도 역시 왕조를 기준으로 하여 ‘고대 - 세나라시기 -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 - 고려 전반기 -고려 후 반기 - 리조 전반기 - 리조 후반기 - 근대 - …’로 나누는 것이었다.4)
4) 참고로 철학지식-조선철학사(제2판, 2014)는 조선철학사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주제 및 인물들의 사상을 관련 자료들과 함께 시기순으로 나열해 놓은 자료집의 성격이 강하여, 일정한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지 않 았다.
물론 고조선은 고대 노예제 사회, 삼국부터 조선후기까지는 봉건사회,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역사적 유물론의 발전사관은 그 내용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아마도 역사적 유물론을 목차의 시기 구분 기준으로 내세워서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2천여 년의 기간을 하나의 봉건사회의 시기로 설정할 경우, 그 변화 ․ 발전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무리가 있 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 발해 ․ 통일신라(후기신라), 고려, 조선에서 각각 주류를 이루었던 철학사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의 철학사에서 왕조의 변화에 따른 시기 구분이 가지는 설명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한에서도 왕조의 변화를 기준으로 철학사 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대체로 다수 학자들의 합의에 도달할 만한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 구분을 따를 때, 이 연구의 주제인 ‘삼국 및 고려시기 유학’과 관련하여 ‘조 선철학사’에서 주요 기술 대상으로 삼은 주제와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주제로 보면 ‘음양오행 사상’이 유물론적 철학이면서도 종교적 신비주의의 측면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주목되고, 윤리도덕 및 사회정치 사상으로서 ‘효(孝)’, ‘제(悌)’, ‘충(忠, 충군사상)’, ‘신(信)’, ‘인(仁)’, ‘예(禮)’, ‘정명(正 名)’, ‘왕도정치’ 등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천(天)’ 또는 ‘천명(天命)’ 사상이 유교의 핵심 이론으로 거론되고, ‘기(氣)’와 ‘리(理)’가 자연관 및 인식론과 관련하여 기술된다.
또한 유교와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 강조되는 ‘애국사상’, ‘자주의식’, ‘상무(尙武)정신’ 등도 유 교 관련 인물들의 사상에서 언급되곤 한다.5)
5) 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는 삼국시기 철학사상발전의 일반적 특징으로, “세나라의 철학이 고구려의 철학발 전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다고 본다.(전사 2, 18쪽)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철학사’ 기술에서 특히 강조 되는 것이 ‘애국사상’, ‘자주의식’, ‘상무정신’ 등이다.
인물로 보면 통일신라(후기신라) 시기에 강수, 설총, 충담, 최치원, 고려시기에는 최충, 최승로, 김 심언, 이규보, 김초 ․ 박초, 이제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다루어진다.
그런데 여말선초에 활동했 던 정도전의 경우는 조선철학사(1961)에서 조선시기에 포함되었으나, 1970~1980년대에는 고려 시기에서 다루어졌고, 2010년 조선철학전사에서는 다시 조선시기에 포함된다.
이번 연구에서는 조선철학전사(2010)의 기준을 따라 정도전을 ‘삼국 및 고려시기 유학’의 논의에서 제외한다.
주제로 보든 인물로 보든 북한 발간 ‘조선철학사’ 중 가장 내용이 풍부한 것은 조선철학전사 이 다.
개별 논문들의 내용도 사실상 이 전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전 15권의 전사 중 삼국부터 고려까지 시기를 다룬 것은 제2권과 제3권이고, 고대시기는 제2권에서 다루어진다. 그러 므로 ‘삼국 및 고려시대 유학’를 주 대상으로 하는 이 발표에서는 전사 제2~3권의 내용을 중심으 로 하여 필요한 경우 다른 ‘조선철학사’ 류의 책들과 관련 논문들을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4. 주제별 기술
조선철학전사 1(2010)의 ‘발간사’에서는 조선철학사 연구를 위한 원칙과 방법론에 대해 밝히 고 있다.
2010년에 정식화하여 제시된 것이지만, 그러한 입장은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1960년 대에 처음‘조선철학사’를 편찬하여 인민들을 교육하려 했던 시기부터 ‘조선철학사’의 탄생과 발전 의 토대가 되어 온 관점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철학사’의 내용과 평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원칙과 방법론을 이해할 필요 가 있다.
‘발간사’에 따르면 ‘철학의 근본문제’는 과거의 물질과 의식 사이의 관계문제로부터 사람 과 세계와의 관계문제로 근본적인 발전을 하였다.6)
6) 전사 1, 8쪽
이는 시기상으로 구분하자면 과거의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로 보고, 근대 이후 주체사상의 형성 시기부터는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는 주체사상과 함께‘탄생’한 것이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도 존재하고 지속되어 온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 한 의미에서 ‘조선철학사’는 근대 이후뿐 아니라 과거의 철학사를 연구 ․ 기술할 때에도 역시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에 주목한다.
그러한 입장은 전사의 ‘발간사’에 제시된 ‘조선철학사’ 연구와 집필에서의 원칙들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먼저,“진보와 반동을 구분하는 원칙”은 ‘조선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 변증법과 형이 상학, 무신론과 유신론의 투쟁 역사로 본다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인민대중의 자주적 요구와 리익” 을 철학사상 평가의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또한 “당성, 로동계급성의 원칙”과 함께“주체 성과 민족성을 고수하는 원칙”이 제시되었는데, 바로 이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는 것은 주체 사상에 입각하여 ‘조선철학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근거가 된다.
특히 ‘조선철학사’ 연구에서 줄곧 강조되는 ‘역사주의 원칙’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유물론에 주체사상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잘 보 여준다.
“주체적 방법론에서의 력사주의 원칙”이라고 명명된 이 원칙은 “과거의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력사로 고찰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사람, 인민대중을 중심에 놓고 당시의 사회력사 적 조건과 사람들의 자주의식 및 창조적 능력의 발전 수준과의 련관 속에서 분석평가”한다는7) 것이 다.
주체사상의 시대는 근대 이후에 오는 것임에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철학사’에서는 고대 부터 근대까지의 철학사를 기술 ․ 평가할 때도 사람들의 자주적 의식과 창조적 능력의 발전이 중요 한 요소가 된다.
삼국 및 고려시기 유학을 다루는 이 발표에서 이러한 ‘원칙과 방법론’에 주목하는 것은, 유교철학 이 단지 중국에서 수입된 외래사상이 아니라 우리 민족 내부에서 자연과 사회를 이해하고 윤리도덕 을 중시하여 온데서 비롯되고 또한 그러한 사유방식에 의해 수용되었다는,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 수”하는 북한 연구의 입장에8) 유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7) 전사 1, 8쪽
8) 정성철은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철학사연구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철학사를 조선의 토양위에서 조선인민이 창조한 조선의 철학사로 체계화한다 는 것을 의미하며 철학사상발전에서 우리 민족이 이룩한 고유하고 우수한 특성을 찾아내어 적극 내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정성철, 「조선철학사 연구의 방법론에 대하여」, 퇴계학과 한국문화35, 2004, 12-13쪽)
4.1 음양오행설
음양오행설은 본래 유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학에서 존재와 윤리 등을 설명 하는 원리로 사용되면서 유교사상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북한의 연구에서 음양오행설은 형이상 학적 관념론에 맞서서 발전해 온 고대와 봉건시대의 대표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평가되고, 그러 한 성격의 사상이 봉건시대에 유교의 일부로 수용되어 발전된 것으로 기술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음양오행적 사유가 중국뿐 아니라 그리스나 인도 등의 고대 철학사상에서 도 발견되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기원을 굳이 중국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
즉,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는, 한자로 정착된 ‘개념’이 아니라, 음양오행적 방식의 ‘사유’에 초점을 맞춰서 그것이 고대에 농업 기반 사회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고대조선(고 조선)에서도 농경생활 속에서 음양오행적 사유가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9)
9) 전사 1, 41쪽.
오행설은 햇빛이나 물 등을 세계의 시원으로 여겼던 고대 초기의 “원소설적 세계관”에서 발전되 어, 쇠, 나무, 불, 물, 흙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우주의 순환과 만물의 변화 발전을 설명하는 것으로, 고대의 농경사회에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사고방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이 오행설이 고대조선시기에 발생했다는 것이다.10)
음양론적 사고에 대해서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의 출생 과정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양 적인 존재인 하늘과 음적인 존재인 땅의 결합속에서 우주만물이 발생 발전”한다고 본 고대초기 사 람들의 음양론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11)
하늘에서 온 존재인 환웅과 땅의 존재인 웅녀 의 결합, 햇빛 비치는 양지와 햇빛이 차단된 음지(굴 속)의 대비 등을 통해 음양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유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연구에서 이러한 음양오행설은 하늘, 태양, 산, 바다, 비, 바람 등 자연의 사물이나 현상을 신격화 ․ 절대화하는 형이상학이나 관념론과 대비되어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음양설은 자연 과 세계를 밝음과 어둠이라는 대립물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고, 오행설은 자연과 세계의 기원을 물, 불, 나무, 쇠, 흙이라는 다섯 가지 물질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 며, 그러한 의미에서 음양오행사상은 고대에 발생한 ‘소박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물론 음양오행설의 한계도 지적된다. 세계의 모든 현상을 일정한 도식에 맞추어 설명하고 그에 따 라 현실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비과학적이며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오행의 상생상 극(相生相剋) 작용이 순환론적 성격을 가지며, 그러한 이치에 따라 인간의 운명을 설명한다는 점에 서 숙명론적 성격을 가진다고 평가된다.12)
10) 전사 1, 43쪽.
11) 전사 1, 44쪽.
12) 전사 1, 50쪽.
4.2 기유물론
북한의 연구에서 ‘《기》유물론’이라고 지칭되는 ‘기철학’은 바로 음양오행설의 유물변증법적 요 소를 흡수하여 발전된 것으로 설명된다.13)
그러한 의미에서 ‘기유물론’ 역시 그 기원을 중국에서 찾 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철학적 사유의 발전과정 속에서 창조되었다”고14) 기술된다.
기유물론은 햇빛이나 물 등의 자연 현상 ․ 사물에서 세계의 시원을 찾으려 했던 원소설적 세계관, 그리고 농경사회에서 음양과 다섯 가지 물질적 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던 음양오 행설에서 더 발전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평가된다.
기유물론의 기원으로는, 삼국지에서 동명왕 의 탄생을 설명한 「고리국전설」을 예로 들며, 입김이나 콧김과 같은 것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기에 대한 사유의 기원으로 제시된다.
동명왕을 잉태하게 하는 기(닭알같은 기), 마굿간에 버려진 동명을 살려주는 기(입김)에서 기유물론의 기원을 찾는 것이다.15)
13) 전사 1, 49쪽.
14) 전사 1, 51쪽.
15) 전사 1, 52쪽.
북한의 연구에서 ‘기’에 주목하는 것은 우선 ‘기’라는 물질을 세계의 기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라는 것이다.
‘기’ 이전에 닭알과 같은 ‘혼돈’의 개념이 있었지만 그것이 ‘기’ 개념과 결합되면서 세계의 통일적 시원으로서 그 시원성 또는 근원성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냈다는 것 이다.16)
“고대조선사람들은 인간의 호흡작용이나 새알의 부화작용에서 우주만물의 발생발전과 론리적으로 련결 되는 본질적인 측면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물현상 전반에 일반화하여 《기》와 《혼돈》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만들어냈다”17) ‘기’의 유물론적 성격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기’철학의 변증법적 사유이다.
세계의 시원으로서의 ‘기’와 세계의 구체적 사물․ 현상들의 관계가 ‘일(一)’과 ‘다(多)’의 관계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일’ 로서의 ‘기’는 현상으로서의 ‘다’ 속에 내포되어 있고 ‘다’는 ‘일’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변증법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본다.18)
또한 ‘기’의 시원 상태를 의미하는 ‘혼돈’ 개념은 “‘유’와 ‘무’의 변증법적인 통일에 관한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19) 평가된다.
‘기’의 시원 상태인 ‘혼돈’은 닭알과 같은 ‘무형의 존재’이며 ‘기’의 발현 상태인 세계는 온갖 사물이 꽉 들어찬 ‘유형의 존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원으로서의 ‘혼 돈’은 단순한 ‘무’가 아니라 온갖 사물현상(유)를 발생시킬 필연성을 갖춘 ‘무’이고, 사물현상으로 드러나는 ‘유’는 그 필연성을 구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무’와 ‘유’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설명 된다.20)
기유물론은 직관적인 자연적 관찰에 의거하고 신비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제한성을 가 지고 있지만, 고대조선 당시로서는 세계의 존재와 운동을 변증법적으로 설명한 가장 발전된 유물론 으로 평가된다.
삼국시대에도 ‘기’유물론은 당시의 유물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에는 고대유물론 으로서의 ‘기’유물론에서 신비적 요소들이 탈각되고 ‘기’ 개념의 물질적 성격이 더욱 강조되었다고 평가된다.
우선 고대에 시원적 물질로서의 ‘기’가 무형적인 혼돈물질이었다면, 삼국시기에는 ‘기’가 “먼지와 같이 미세한 알갱이(극미)”로 “추측”되었다는 것이다.21)
그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서 ‘백기(白氣)’, ‘적기(赤氣)’, ‘운기(運氣)’, ‘향기(香氣)’, ‘습기(濕氣)’ 등과 같이 ‘기’와 결합된 구체화된 개념들이 일상생활에서 많이 도입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확인된다고 설명된다.
“고대의 ‘기’가 신비적 요소를 다분히 함유하고 있는 ‘기’였다면, 삼국시기의 ‘기’는 보다 구체적인 물질 적 미립자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22)
16) 전사 1, 59쪽.
17) 전사 1, 60쪽.
18) 전사 1, 60-61쪽.
19) 전사 1, 61쪽.
20) 전사 1, 61쪽.
21) 전사 2, 24쪽.
22) 전사 2, 25쪽.
이를 통해 ‘기’에 의한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이 강조되었다고 평가된다.(전서2, 26)
이는 ‘일’과 ‘다’가 상호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호 전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물질들의 다양성 을 ‘기’의 농후희박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기유물론의 발 전에 따라 인간의 운명문제를 신비주의적 숙명론적으로 해석하는 종교신비설이 비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3)
기일원론과 관련하여 고려시대에 주목을 받는 인물이 이규보(1168-1241)이다.
그는 북한 발간 ‘조선유학사’에서 고려시대 학자 중 진보적 사상가로 줄곧 높이 평가된다.
1960년 발간된 조선철 학사(상)에서부터 2010년 발간된 조선철학전사 3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철학적 견해는 고려시 대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남한에서는 영웅서사시 동명왕편 등을 쓴 문필 가로서 인정 받으면서도, 문신으로서 최씨무신정권 집권기와 몽골침입기에 재상의 반열에 올라 전 성기를 누렸던 행적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받는 것과 대조된다.
북한의 연구에서 이규보의 철학사상은 “’원기’설에 기초한 유물론” 또는 “‘원기’일원론적 유물 론”으로 규정된다.
그는 유학자로 분류되기보다는 ‘원기’설을 특징으로 하는 진보적 사상가 또는 변 증법적 유물론자로서 “우리 나라 중세유물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24) 인물로 규정된다.
그의 ‘원기(元氣)’설은 우주 ․ 자연의 형성과정에서 어떤 외부적 요인 없이 ‘원기’ 자체가 시원 물 질로서 그 ‘원기’로부터 만물․ 현상이 형성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유물론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규보 는 ‘원기’설을 내놓기 전에 이미 ‘기’를 ‘일기(一氣)’로 보았고, 또한 ‘기’를 공기와 같은 미세한 알갱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서경덕의 ‘태허 속의 먼지’, 최한기의 ‘바리 속의 기(공기)’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다.
‘무형의 기’(물질적 실체)와 ‘유형의 기’(사물 또는 그 재료)를 나누어 보되 둘 사 이의 관계를 실체와 사물, 본체와 현상간의 관계로 봄으로써 세계를 온전히 ‘기’로 설명하는 유물론 적 이해의 토대 위에서, 이규보는 ‘기’의 시초 형태인 ‘원기’에 의해 우주 ․ 자연의 형성과정을 설명해 냈다는 것이다.25)
이규보의 ‘원기’는 물질적 실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곧 ‘무형의 기’에 해당하는데, 이는 관념론 에서 ‘조물’, ‘조물주’, ‘천’ 등 세계창조에 관한 종교적 신비설의 입장을 유물론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주 ․ 자연의 시원 문제에서 인격적 신이나 추상적 정신적 본체를 내세우는 관념 론적 견해를 유물론적으로 극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규보는 ‘천무위(天無爲)’라 하 여 ‘천’의 무목적 ․ 무의지 ․ 무조작적 성격을 분명히 함으로써26), 우주 ․ 만물의 발생 변화를 신적 존 재에 의한 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적 존재에 의한 원인 혹은 작위를 배제한 ‘자생자화’의 운동 관으로 설명하였다고 인정된다.
나아가 이는 관념론적인 숙명론에 맞서서 ‘자초’설이라는 유물론적 사생관27)을 제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평가된다.
23) 전사 2, 26-28쪽.
24) 전사 3, 114쪽.
25) 전사 3, 119쪽.
26) 전사 3, 121쪽.
27) 전사 3, 134쪽.
4.3 천명사상과 반불교론
유교와 관련하여 북한에서는 특히 ‘천명(天命)’사상에 주목한다.
관념론적인 ‘천명’사상이 유교 의 세계관적 기초를 이룬다는 것이다.28)
물론 남한의 연구에서도 유교의 천명사상은 왕권을 정당화 하는 근거가 될 뿐 아니라 민본주의의 토대가 되고, 나아가 성리학에서 이기심성론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유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북한의 연구에서 ‘천명’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관 념론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북한의 연구에서는 유교의 ‘천명’사상이 고대의 미신적인 ‘천신’ 숭배관념과 연결된다는 점에 주 목한다.
‘인(仁)’, ‘인정(仁政)’, ‘왕도정치’, ‘성선설’ 등의 특징보다 ‘천명’사상을 유교의 세계관적 기초라며 강조하는 것은 유교를 기본적으로 고대의 ‘천신’ 숭배로부터 이어지는 관념론의 계열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교에 대한 평가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저해 하고 계급질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유교에서는 고대의 《천》관념을 관념론적으로 발전시켜 그의 인격적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철학 적 외피를 씌워 본체적인 존재로, 말하자면 관념적인 실체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천》에 《명》을 부여하 여 인간의 운명뿐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쇠, 지어 엄격한 대자연의 운동변화까지도 모두 통제하는 절대적 인 존재로 등장시켰던 것이다.”29)
유교의 ‘천명’사상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하늘신》숭배사상과 결합되어 전파되면서 세 나라 인 민들의 사상정신생활 령역에 반동적인 영향”30)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28) 전사 2, 99-100쪽.
29) 전사 2, 100쪽.
30) 전사 2, 100쪽.
특히 이러한 천명사상은 사 람들의 생사와 부귀빈천뿐 아니라 국가의 흥망까지도 하늘의 ‘명’과 하늘에서 내려준 운수에 달려 있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극단적 숙명론”에 빠지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유교가 계급 투쟁을 방해하고 봉건적 지배질서를 합리화하는 “반동적 궤변”이라고 평가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유교는 불교와 대비되며 일정한 진보적 역할을 한 철학으로 평가된다.
그것 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반동적인 관념론을 대표한 것으로 평가되는 불교에 비해 유교는 세계의 존재를 인정한 관념론으로서, 당시에 지배계급 중 신흥세력을 대변하는 철학이었다고 보기 때문이 다.
그러한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유교의 반불교론이다.
그러나 최승로, 이규보, 이제현, 이색, 정몽 주 등 유교적 지식인들의 반불교론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으로 불교의 사회적 폐단에 대해서는 비판 적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불교가 유교와 함께봉건제도의 유지와 강화에 일정한 도움이 된 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졌다고 비판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남한 학계에서는 별달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고려 후반기의 김초(金貂, 생몰년 미상)와 박초(朴礎, 1367-1454)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하는데, 그러한 평가는 바로 이 두 사람이 1391년 각기 올린「척불소」에서 반불교론을 직접적으로 제기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 이 두 인물 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논의의 수준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는 그 시대에 불교비판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줄곧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사치스럽 고 과도한 불교행사와 같은 숭불의 폐단, 승려들의 부패와 전횡, 사원들의 경제적 비대화 등에 대한 비판들은 있었지만, 이들은 그러한 부분적 비판들에 국한되지 않고 불교의 교리들을 근본적으로 비 판하고 사회에 만연하는 온갖 재난과 부패의 근원을 불교에서 찾아 불교의 단호한 배척을 정치의 최 우선 과제로 적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척불론의 사상적 기초는 ‘유교성리학’이었다고 평가된다.31)
“《제법유심》의 원리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주관적인 심의 산물로 보면서 우주자연의 객관적 존재를 부 인하는 불교세계관에 비해 볼 때 유교성리학은 자연계의 실재성과 객관적인 변화과정을 시인함으로써 상대적긍정성을 가진다.”32)
이 두 사람은 “천지만물의 실재성을 시인하고 그를 토대로 3강5륜의 륜리질서를 합리화”하였고 이를 보편적 법칙으로 여겼으며, 인간의 생사운명에 대해서도 “자연”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사람을 포함한 사물의 형성과 그 운동변화를 모두 ‘기’ 스스로의 운동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는 점에서 “일정하게 유물론적립장”을 견지하며 불교의 신비적 생사윤회설, 인과응보설 등을 비판 한 것으로 평가된다.33)
그럼에도 그들은 궁극적으로 세계의 시원문제에서 정신적실체인 ‘리’를 우주만물의 근원으로 내 세움으로써, 철학의 중심문제에서 관념론적 입장에 있었고 “세계와 사람의 운명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신비주의적관점과 숙명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평가된다.
이것은 이들의 “반불사상의 리론적약점과 불철저성을 보여주고 있다”는34) 것이다.
31) 전사 3, 157-158쪽.
32) 전사 3, 159쪽.
33) 전사 3, 159-160쪽.
34) 전사 3, 161쪽.
반불교론을 이론적 수준에서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정도전의 「불씨잡변」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북 한의 연구에서도 인정되지만, 여말선초의 인물인 그를 어느 시기에 위치시킬 것인지 다소 논란이 있 었던 듯하다.
1960(1961)년 발간된 조선철학사(상)에서는 정도전을 이조 초기에서 다뤘고, 1970~80년대 발간된 ‘조선철학사’ 단행본들에서는 고려후반기에 포함시켰지만, 결국 전사 4에 서는 다시 조선 전반기에 위치시켰다.
이는 조선경국전(1394), 불씨잡변(1398) 등 정도전의 주 된 업적이 고려말보다는 조선초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사 4에서 는 ‘제3장 리조 전반기 리일원론적 관념론 철학의 발전’에서 권근, 이언적, 이황에 관해 기술한 뒤 ‘제4장 리조 전반기 성리학내 진보적경향의 발전’에서 정도전을 다룸으로써, 배불론을 포함하여 정 도전의 사상을 조선 전기 성리학 계열의 진보적 사상으로 분류하였다.
4.4 윤리도덕적 견해
북한의 연구에서 유교에 대해서 천명과 함께 특히 주목하는 것이 윤리도덕이다.
유교는 본래 봉건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사회정치적 학설로 출현한 것인데 그 중심 내용이 윤리도덕이라고 보는 입 장이다.
따라서 윤리도덕은 다음절에서 다루게 될 사회정치적 견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기술된다.
그런데 윤리도덕이 봉건제도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윤리도덕 자체를 나쁜 것이라 고 할 수는 없다. 북한의 연구에서도 윤리도덕은 좋은 것이며, 특히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예의도덕 이 바른 민족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윤리도덕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 다는 점에서 윤리도덕의 본래 의미와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북한의 연구에서는 “인민적 륜리도덕사상”과 “유교적 륜리도덕사상”을 구분한 다.
인민적 윤리도덕사상은 “고대 우리 민족의 아름답고 고상한 륜리도덕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진 보적인 륜리도덕사상”35)으로, 그 핵심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다는 ‘충’ 사상과 부모를 존 경하는 ‘효’ 사상이다.
왕권 중심의 봉건질서 옹호를 위해 지배계급이 추구하는 ‘충’과 달리, 인민대 중의 ‘충’은 “우리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실성, 희생정신으로 표현” 된36) 것으로서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왕에 대한 복종과 구별되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이라는 것이다.
‘효’의 경우에도, 봉건지배계급은 봉건사회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종법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효’를 내세워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였지만, 본래 인민들의 ‘효’란 예로부터 부모와 자식간에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로서의 도덕관념이라고 그 차별성이 지적된다.37)
이러한 인 민들의 ‘효’사상은 발해와 후기신라, 고려시기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서 계승되었다고 설명된다.
또한 인민적 윤리사상의 영향으로 발해와 후기신라에서 동성불혼풍습과 일부일처제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38)
그에 반해 오륜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윤리는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약하다’는 음양의 논리를 이용하여 군신, 부자, 부부 등의 관계를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윤리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음양 이 가졌던 본래의 상호작용적인 변증법적 성격이 유교의 윤리도덕에서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이 다.39)
“원래 ‘3강5륜’의 원리적 측면을 이루고 있는 ‘충’, ‘효’, ‘절’, ‘신’ 등의 륜리사상들은 인간 본연의 도덕적 기초를 강조하는 사상으로서 진보적인 것”40)이었지만, 유교에서 이러한 도덕원리들을 ‘3강 5륜’으로 체계화하면서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모두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35) 전사 2, 40쪽.
36) 전사 2, 41쪽.
37) 전사 2, 43쪽.
38) 전사 2, 132-133쪽.
39) 전사 2, 96쪽.
40) 전사 2, 101쪽.
이처럼 북한에서는 유교의 윤리도덕사상 및 사회정치사상은 변증법적 성격이 제거된 음양론을 이용하여 양(君, 父, 夫)에 대한 음(臣, 子, 婦)의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사상이라고 비판한다.
그 런데 그에 비하면 오히려 남한의 연구에서는 그러한 일방적 지배 ․ 복종 관계를 경계하면서 음양의 상호작용성을 토대로 하여 사회구성원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한 유학의 측면에 주목하기도 한다.
양 (君, 父, 夫)이 음(臣, 子, 婦)에 대하여 복종을 기대하려면, 양 자신이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모범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도 유교 윤리의 상호작용을 완전히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전사 3에서 중요하게 기술되는 고려 전반기 김심언(?-1018)의 ‘6정’, ‘6사’는 모두 군왕과 신하의 호상 관계에서 규제되는 도덕적 및 비도덕적 품행을 말하고 그러한 점에 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41)
고려 후반기에 이색(1328-1396)의 경우에도, 군신간의 호상의존적 관계에 대해 주장했다는 점이 긍 정적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색의 이러한 견해는 군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쇠퇴하고 특권적 신하들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던 고려 말기의 사회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지적된다.
특히 이색은 고려후반기에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성리학설과 관련되어 주목된 다.
고려시대 성리학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는 ‘도학’ 의 관점에서 ‘실학’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만물의 시원을 ‘리’에서 찾는다는 의미에서 객관적 관념 론의 한계를 가진 것으로 평가한다.
중국송나라에서 10~11세기경에 완성된 것로서의 성리학은 “정 신적 리를 토대하여 봉건사회를 철학적으로 합리화한 객관적 관념론”으로서 “봉건사회의 중앙집권 제와 계층적 신분질서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하나의 법칙으로 고정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교가 모든 것을 주관적인 심의 산물 ․ 표현으로 간주하여 세계의 객관적 실체성을 부인하 는 데 반해, 성리학은 물질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정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다.42)
성리학의 윤리사상 면에서 이색의 ‘성삼품설’과 ‘본연지성 ․ 기질지성설’이 주목된다.
이색은 인 간 본성에 대해 기본적으로 성선설을 기반으로하면서도 인간 자체의 ‘기질’과 외부자극으로서의 ‘물욕’에 의해 본성을 선 ․ 악 ․ 불악의 세 종류로 구분하는 ‘성삼품설’을 제기하였고,
또한 ‘본연지성 ․ 기질지성’에 대한 논의를 도입하여 인간 본성의 차별성을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봉 건적 신분등급제도를 인성론적으로 합리화하고 도덕적 자아수양의 원리적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근로대중의 반봉건적 지향을 막고 지배계급의 통치질서를 공고화”하려는 것이었다고 비판된 다.43)
41) 전사 3, 76쪽.
42) 전사 3, 228쪽.
43) 전사 3, 234쪽.
그런데 고려시기 윤리도덕사상의 기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를 이조시기의 윤리도덕과 대비하 며 그 ‘민족적 성격’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조시기에는 주자성리학의 지배로 인하여 “교조주의적 인 풍조”가 강했던 데비하여, 고려시기에는 유교 장려 시책에 따라 지배층의 윤리도덕사상이 보급 되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 인민이 일찌기 발휘하여 온 고상한 도덕관념을 일정하게 포섭하면 서 그 민족적 성격을 유지”하고44) 있었다는 것이다.
4.5 사회정치적 견해
북한의 연구에서 유교는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수양》을 통한 복종과 순종을 제창”한 것으로 간 주된다.
“《천》이 제정해준 질서대로 복종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유교의 숙명론적인 사상은 봉 건적통치질서를 유지강화하는 데매우 유리한 사상”이었고, 그로 인해 봉건지배계급이 유교를 받아 들여 전파함으로써 인민대중들의 투쟁 의지를 저해하였다는 것이다.45)
이러한 의미에서 유교는 도 덕윤리사상을 토대로 한 봉건지배계급의 사회정치사상으로 평가된다.
우선 유교의 ‘인(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의미하는 도덕적 범주”46)라고 이해 되지만, 그 내용은 주로 ‘인정(仁政)’사상으로 설명된다.
유교의 ‘인’사상은 지배계급의 정치윤리로 서 널리 선전되어 ‘인정’사상으로 표현되었고, ‘어진 임금에 의한 어진 정치’를 표방하면서 왕을 비 롯한 지배계급이 ‘만백성의 부모’로 위장하여 인민들의 반항의식을 무마하고 봉건사회의 재생산을 보장하려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삼국시대에 전파된 유교사상들은 “어느것이나 다 인민대중의 자주 의식발전을 가로막고 봉건적인 착취와 억압의 관계를 옹호하고 미화해주는 반동적 지배계급의 사 상적도구로 리용되였다”고47) 평가된다.
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는 유교에 대해 늘 “반동적 사상”과 “진보적 사상”이라는 양면적 평가를 하는데, 특히 사회정치사상의 면에서 그러한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본주의와 인정사상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사회정치사상은 본질적으로 인민들을 착취하기 위해 봉건지배층이 발전시킨 사상 이라고 본다.
“민본사상과 인정사상은 본질상 인민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토지에 더욱얽어매놓고 최소한의 생활조건을 보장해주어 봉건적 착취의 안정성을 보장하며 가혹한 폭정으로 하여 생기는 인민들의 반항 을 미리 예방하려는 봉건통치배들의 계급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반동적 사상이었다.”48)
44) 전사 3, 85쪽.
45) 전사 2, 21쪽.
46) 전사 2, 106쪽.
47) 전사 2, 107쪽.
48) 전사 2, 241쪽.
유교에 이러한 부정적 입장은 유교가 유입된 이래로 삼국, 발해-후기신라, 고려 시기에 걸쳐 일관 되게 적용된다. 그러나 역사상에서 철학사상의 역할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교는 노예사회로부터 봉건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에 공자, 맹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인민대중에 대한 지나친 착취와 학대를 제한할 필요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 공자의 사상적 계승자인 맹자…는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인정’을 주장하였다. 그는 만약백성의 지 지를 받지 못하면 임금의 통치지위도 허물어지기 때문에 통치자는 백성을 중시하고 그들을 힘으로써가 아니라 《덕》으로써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49)
그러한 의미에서 역사상에서 그 위치에 따라 유교는 진보적 사상의 기능을 하기도 한 것으로 평가 된다.
그것은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지나친 착취와 학대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협할 경우에 그것 을 경계하는 사상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조선철학사에서 인정과 민본사상이 “신흥봉건 지주계급”의 입장을 반영하여 표출된 것으로 기술된다.50)
생산의 직접적 담당자인 인민대중에 대 한 비인간적 학대와 가혹한 압박이 필연적으로 거센 항거를 야기하고 결국노예사회의 붕괴를 가져 온 역사적 교훈을 알고 있던 신흥지주계급의 사상가들이 농민의 지위를 일정하게 개선하고 지나친 착취를 제한하는 것이 봉건정권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과 ‘민본’사상을 주장 했다는 것이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을 비롯한 고려봉건지배층이 바로 신라 말기에 봉건통치계급의 지나친 착취 와 약탈, 그에 대한 농민폭동과 신라정권의 몰락, 궁예의 형벌정치와 태봉국의 멸망 등을 경험하며 성장한 신흥정치세력이라고 보고, 이들이 기성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통치방법으로 택하게 된 것 이 인정과 민본사상이었다는 것이다.51)
그러나 이들도 근본적으로는 ‘인정’을 봉건통치체제의 유 지 ․ 강화를 위한 지배계급의 사상으로 이용하였고, 왕과 백성의 관계를 부모 ․ 자식간의 혈연적 관계 로 왜곡하여 인민대중의 투쟁의식을 무마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유교의 ‘인정’ ․ ’민본’ 사상은 농민들의 초보적 생존 조건과 요구를 보장하고 그들에 대 한 가혹한 수탈을 금지하며 생산을 증대시키는 등 일련의 합리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지 배계급출신의 혁신적 사상가들이 특권지주계급과 봉건정부를 비판하는 무기로 이용됨으로써 해당 역사적 조건에서 일정한 진보적 성격을 가졌다고 인정한다.52)
또한 고려후기에 13세기말부터 전파보급된 “유교성리학”은 “정신적인 리에 토대하여 봉건사회 의 중앙집권제와 계층적 신분질서를 정당화하고 철학적으로 합리화”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럼에도 당시 유교성리학은 “모든 것을 주관적인 심의 산물로 보면서 객관세계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불교와 달리 물질세계의 객관적 존재를 시인”하였으며, “우주자연의 존재와 운동변화에 관한 견해에서 일 부 유물론적 경향”을53) 나타냈던 것으로 평가된다.
49) 전사 2, 240쪽.
50) 전사 3, 88쪽.
51) 전사 3, 89쪽.
52) 전사 3, 91쪽.
53) 전사 3, 112-113쪽.
고려 후반기 성리학을 대표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색을 통해서 성리학의 사회정치적 견해에 대한 북한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색이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성리학의 학문적 과제를 수용한 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천리인욕’설이 봉건통치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의무를 윤리도덕적으 로 규범화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인간의 기본적 욕망은 인정한다는 점에서 극단적 금욕주의와 는 구분되는 기성 이론과 구별되는 합리적 측면이 있다는 측면을 인정한다.
이색의 경우에도 ‘충효 일치’를 주장하며 가부장제와 중앙집권체제를 이론적으로 합리화했다는 점이 지적되지만, 사회에 는 충과 효과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54)
54) 전사 3, 236-237쪽
5. 맺음말
이 발표문에서 본래 다루려 했던 주제는 북한에서의 한국 전통철학 연구 중 삼국시대부터 고려시 대까지의 유교철학이다.
그런데 실제론는 고대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대상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 고대 부분에서는 ‘유교’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유교철 학의 실제 내용이 되는 음양오행설, 기유물론, 조상신숭배, 하늘신숭배, 윤리도덕사상 등을 다루고 있고, 그것이 삼국․ 고려시대의 유교와 내용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삼국․ 고려시대에 다루는 유교철학이 한국학자들의 독창적인 이론적 논의보다는 대체로 유교철학의 일반적인 내용이 삼국 ․ 고려 사회에서 적용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유교철학의 이해와 수용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는 개별 학설들의 독특성보다는 북한에서 유교철학을 어 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지 그 관점 혹은 입장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유교를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의 이 시기 유교철학 연구에서 확인한 몇 가지 특징과 과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음양설, 오행설, 충․ 효 사상 등의 유교의 주요 내용이 되는 철학사상의 ‘기원’을 농업경제 기 반 사회로서의 고대조선 내부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한자로 정착된 개념과 이론으로 서의 기원이 아니라 그러한 ‘사유방식’의 기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조선철학’의 기원을 우리의 역사 내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주체사상에 기반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는 원칙’에 따 라 이루어진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철학사’에서 개념과 논리체계로 정착된 철학사상 이전에 사유방식으로서의 철학사상의 기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더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둘째, ‘천(天)’ 또는 ‘천명(天命)’을 유교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초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는 음양 오행설에서 기일원론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계열과 천신숭배사상에서 천(명)을 거쳐 태 극-리(理)로 이어지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계열의 투쟁사로 철학사를 설명하면서 유교를 관념론 계열에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천(명)’사상은 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본래 유교는 인간 관계, 가족윤리, 그리고 제의(祭儀)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국가 ․ 사회로 확대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사상은 그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방편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천(명)사상을 유교철학의 기초로 보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전통적 윤리도덕사상을 ‘인민들의 윤리도덕사상’과 ‘유교적 윤리도덕사상’으로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는 유교적 윤리도덕사상이 봉건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방적 지배와 복종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비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충, 효, 부부윤리, 애국애족, 상무(尙武) 정신 등 사회의 안정적 질서 유지를 위한 사회 ․ 국가윤리로서의 측면을 매우 강조한다.
이러한 윤리도덕은 북한이라는 현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것 이다.
고려말 정몽주에 대한 서술에서 그가 충군사상의 모범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 로 보여준다.
‘조선철학사’의 편찬이 애초부터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기성체제의 안 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특히 조선철학전사는 이른바‘완성된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 수 있다.
‘인민들의 윤리도덕사상’과 ‘유교적 윤리도덕사상’의 구분은 국가와 민족을 위 한 ‘충’과 기성의 정치체제를 위한 ‘충’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러한 논리는 현재의 체제 에도 유효해야 할 것이다.
철학사에서의 비판적 관점은 현 체제에 대해서도 작동할 수 있어야 철학 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 유교는 불교에 대해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불교는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인 데 비해 유교는 객관적 관념론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삼국 및 고려 시대 에 유교는 지배계급 내 신흥계급의 철학사상이었다는 점에서 유교철학이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봉건지배계급의 관념론과 피지배계급의 유물론, 그리고 그 사이에 지배 계급 내 신흥계급의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객관적 관념론 또는 기일원론적 유물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철학사’에서 전통철학의 발전은 이러한 3층의 사회적 구성 중 주로 ‘지배계급 내 신흥 계급’의 상대적인 진보적 철학사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신흥계급에 대한 좀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김초, 이규보 등 지배계급의 지식인 관료로서의 행적이 비판을 받는 인물 에 대해 적절한 해명도 없이, 단지 배불론이나 기일원론 등의 이론을 제기했다는 것만으로 ‘진보적’ 이라고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의 철학 연구에서 철학이론의 생성 ․ 발전과 현실의 관계, 그리고 역사 현실에서 철학의 역할 에 대한 집요한 문제의식은 배울 점이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만큼 철학이론 자체와 관련 철학자 의 행적에 관한 분석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관점에 의한 사실의 도식적 재단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다.
특히 그들이 ‘신흥계급’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유교(성리학)을 택한 것인지, 공 부한 유교(성리학)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격 때문에 진보적인 사회정치적 입장을 갖게 된 것인 지, 사회정치적 위치와 철학이론적 입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깊은 성찰과 논의가 더 필요하다.
2024년도 한국철학회 학술대회자료집(2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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