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문】
이 연구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철학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발굴해 내 는 ‘기쁜 수동적 변용’이 들뢰즈 자신의 사상을 담은 ‘기호와의 마주침’과 유사 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둘은 모두 수동적으로 발생하나 우리를 능동 적 자기 초월로 인도하는 감각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에, 여기선 기쁜 수동적 변 용과 기호와의 마주침이 핵심 특성들을 공유한다는 점을 분석할 것이다.
나아가, 이 공통점 내에서 양자의 내적 차이 역시 밝힘으로써 기호와의 마주침이 기쁜 수 동적 변용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 심화임을 확인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좋은 마 주침이 두 철학자에게 어떤 식으로 맥락화 되는지를 조명하는 한편, 들뢰즈가 스 피노자의 계승자이면서도 스피노자와 달리 재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 세우는 철학자로서 실존적 삶에 대한 스피노자의 혁명적 관점을 정교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주제분류】경험론, 서양현대철학
【주요어】변용, 능동 역량, 정서, 기호, 마음 능력의 초월적 실행
스피노자의 윤리학에는 외부 대상과의 접촉에서 기쁨이 산출되고 역량(puissance)이 증가하는 경우가 언급된다. 이 마주침은 외부가 원인 인 수동적 변용임에도, 우리 자신이 원인인 능동적 변용에서처럼 기쁨 및 역량의 증가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1)
1) 스피노자 철학에서 변용(affection)이란 ‘신의 변용’인 양태들 및 ‘양태들의 변 용’으로서, 이 글과 관련된 것은 후자이다. 양태는 역량에 따른 특정한 변용 능 력을 갖는데, 이는 신체가 동시에 여러 가지와 영향을 주고받고 정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를 지각하는 것인 소질(aptitude)에 다름 아니다. 양태는 주어진 변용 능력 혹은 소질에 따라 다른 양태들과 끝없이 관계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변용 되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양태들의 변용은 이 같은 관계 맺음 및 그 결과로서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넓게는 역량의 증감 역시 아우른다. 양태는 지속하므로 변용이라는 하나의 상태는 이전 상태로부터 이어진 것인데, 이 이행 속에선 역량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 변 용에 함축된 이 역량 증가의 측면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정서(affect)로 별도 로 개념화된다.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직접적인 설명으로는 Deleuze (1968),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Éditions de Minuit, 199-201(263-265)(*이하 SPE) 및 Deleuze (1981),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Minuit, 68-72(76-81). (*국역본은 출처를 괄호 안에 병기. 번역문은 필요할 경우 수정하도록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 자와 표현 문제에서 이를 ‘기쁜 수동적 변용’(une affection passive joyeuse)으로 개념화하면서, 이것이 능동적 변용의 필수 계기라고 주장 한다. 그런데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에 나타난 이 기쁜 수동적 변용, 정확히 는 기쁜 수동적 변용으로부터 2종 인식이라는 능동적 변용을 경유하여 궁극의 능동적 변용인 3종 인식으로 도약하는 일련의 과정과 유사한 것이 들뢰즈 자신의 사상이 담긴 차이와 반복에서 ‘기호와의 마주 침’이라는 이름 아래 제시되는 것 같다. 기호와의 마주침은 우발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선 수동적이나, 그것이 유발하는 역량 증가의 양상은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는 그의 박사 논문인 차이와 반복의 부논문에 해당하는 저서로서, 둘의 출간 년도 (1968)가 같다는 사실 역시 기쁜 수동적 변용과 기호와의 마주침의 사 상적 친화성을 추정하게 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단 순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스피노자와 달리 재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철학자로서, 스피노자주의에 담긴 혁명성을 심화하고 첨예하게 만든다.
이에, 이 연구는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서 개념화되는 기쁜 수동 적 변용과 차이와 반복에서 소개되는 기호와의 마주침을 상관적으로 살펴보면서 이것들이 핵심 특성을 공유함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그 공통분모 내에서 드러나는 내적 차이를 표면화하도록 한다. 두 감각 경험을 일대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불가능하거니와 실효성 도 없다.
이 연구는 기쁜 수동적 변용과 기호와의 마주침이 역량을 증 가시키는 특수한 감각 경험으로서 어떤 식으로 맥락화 되는지를 살피 고, 이를 통해 근대철학자 스피노자의 사상이 탈구조주의 철학자 들뢰 즈에게 전유되고 재생산되는 형태를 확인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Ⅰ.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에서 좋은 마주침: 기쁜 수동적 변용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11의 주석에서 수동적 기쁨이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고 수동적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라 말한다.
그에게 완전성이나 실재성의 증감은 그 자체 역량의 증감을 뜻하므로,2) 이 주석은 수동적 변용에서 발생하는 정서인 정념(passion) 중에 기쁨이 있는데다, 이것이 역량의 증가와 관련됨을 시사한다.
2) “내가 어떤 사람이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그 반대에 대해 말할 때, [...]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능동 역량이 개 인의 본성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우리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능동 역량이라는 점이다.”(E4Pref). 그러나 정확히는, 역량이란 완전성이나 실재 성의 동의어가 아니라 그것들의 충분 이유로서의 더 근본적 층위이다(SPE, 83-84(110)).
이 수동적 기쁨은 논쟁적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언가를 겪는 상황에서도 기쁨이 촉발되고 역량이 증가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데, 스피노자 철학에서 기쁨이란 우리가 능동적 변용을 행할때의 역량의 증가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동적 기쁨은 역량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유익한 정서이긴 해도, 수동적 변용에 속 하는 한 능동 역량을 적합하게 실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이 유로, 능동성을 강조하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설 자리가 협소하며, 실제 로 후속 연구들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 문제적 정념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 나타난 들뢰즈의 해석 덕분이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능동적 변용만을 수행하는 신과 달리 인간과 같은 유한자는 오직 기쁨을 낳는 수동적 변용을 통해 능동적 변용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러한 개념화는 들뢰즈의 표현을 따라 ‘기쁜 수동적 변용’이라 불리는 데, 크게 다음 세 쟁점을 갖는다.
1. 감각 경험의 한계
스피노자는 만물을 역량으로 규정하면서 외부와의 마주침에 따른 역 량 증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한 철학자이다.
윤리학에 의하면 양 태는 저마다 특정한 정도의 역량을 본질로서 타고난다. 이는 신의 무 한한 역량을 분유하는 것으로서(E4P4Dem), 양태는 이 환원 불가능한 역량 내에서 제각기 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양태로선 주어진 역량을 잘 실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우리가 수동적 변용에 사로잡힌 채 역량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감각 경험은 주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데다, 우발적이든 의도에 따른 것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신체 를 구성하는 외연적 부분들이 임의적 충돌 속에서 순전히 기계론적 법 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감각 경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기에 그에 수동적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신체와 정신 은 평행하므로,3) 신체의 이 수동적 변용과 맞물려 정신 역시 수동적 변용에 빠져 있다.
3) 스피노자에게 신체와 정신은 하나의 양태를 구성하는 두 요소로서, 신체에 대한 관념이 곧 정신이다. 이때 연장 속성의 양태인 신체와 사유 속성의 양태인 정
신체가 변용될 때 정신은 자신의 사유 역량이자 능 동 역량인 이성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기보다 대상이 신체에 남 긴 물리적 인상을 수용하는데 그친다. 이는 대상의 가변적인 외적 특 징들 중 눈에 띈 것을 그 대상의 본질로 오인하는 부적합한 인식으로 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가장 낮은 인식인 1종 인식에 해당한다. 신체 및 정신의 이 수동 상태는 우리가 자신의 역량으로부터 분리된 채 외 부에 예속된 것과 같다. 때문에 스피노자에게선 역량을 되찾아 능동적 변용을 실행함으로써 자유롭게 되는 일이 당면 과제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는 역량 및 변용을 바라보는 두 관점이 스피 노자 철학에 존재함을 지적하고, 이를 자연학적 관점과 형이상학적 관 점이라 부른다. 먼저, 자연학적 관점은 역량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입장 이다. 양태에 있어 역량의 물리적 총량은 그 양태의 본질에 해당하므 로 자기 보존을 위해 유지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수동 역량과 능동 역량이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흔히 ‘자기 보존 노력’으로 불리는 코나 투스가 이와 직결된다. 이 관점에선 수동 역량에 따른 변용 역시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것으로서, 변용 능력은 언제나 최대한 실현되기에 양 태는 늘 최대한 완전하다. 반면, 형이상학적 관점은 역량의 변화를 강 조하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역량 개념 에 합당한 것은 오직 능동 역 량뿐이며, 고로 능동 역량에 의한 능동적 변용만이 변용 능력을 실현 하고 수동 역량에 따른 수동적 변용은 능동적 변용에의 제한에 불과하 다. 여기서 역량 및 변용 능력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능동 역량이므 로, 능동 역량의 비율을 최대화하고 수동 역량의 비율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관점에선 능동 역량은 역량의 동의어여서 능동 역 량의 증가는 곧 역량 자체의 증가를 가리키는 바, ‘주어진 역량의 최대 치를 실현해야 한다’ 혹은 ‘잠재태에 머무는 역량을 현실화해야 한다’ 와 같은 역량 증가와 관련된 주장들이 도출된다. 이러한 주장들은 질 적으론 능동인 역량을 양적으로 최대한 많이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 신은 서로 소통하거나 인과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작동 하되, 그 질서가 같아 늘 함께 움직인다. 이를 평행론이라 부른다. 74 철학사상 제91호/ 2024년 2월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형이상학적 관점이다.4)
4) SPE, 201-206(267-272) 5) SPE, 225(298)
형이상학적 관점은 자연학적 관점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양립한 다. 한 양태는 그것의 본질에 해당하는 역량의 총량이 유지되어야 보 존되나, 이 물리적 자기 보존 내에서 능동 역량의 증감에 따라 삶의 형이상학적 의미가 달라진다. 능동 역량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수동 역 량이 감소한다면, 양태는 자기 보존과 동시에 자기 초월을 이룰 수 있 다. 들뢰즈는 형이상학적 관점에 내포된 이 자기 초월에 주목하면서, 스피노자주의에선 다음의 두 물음이 시급하게 제기된다고 말한다. ‘어 떻게 능동 역량을 증가시키는 기쁜 정념 을 최대한 경험할 수 있는가?’ 및 ‘어떻게 능동 역량을 온전히 소유함으로써 기쁨뿐인 능동적 변용을 직접 산출하는데 이를 것인가’가 그것이다.5)
두 번째 물음으로 가기 위해 첫 번째 물음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해 능동적 변용의 실현을 위한 유일하고도 필수적인 계기가 기쁜 수동적 변용이라는 것 이 들뢰즈의 독창적인 주장이다.
2. 감각 경험의 혁명성: 공통 개념을 발견하는 조건
기쁜 수동적 변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 따르 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각 양태의 본질은 신의 속성에 담긴 채 영원불 변하다.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으로 구성된 우리의 경우 신체의 본질 은 연장 속성에, 정신의 본질은 사유 속성에 들어 있다. 양태는 연장 속성에 거주하는 신체의 본질이 외연적 부분들을 갖출 때 현실에서 실 존하는데, 이 실존 양태를 규정하는 원리가 바로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다. 실존 양태의 신체는 무한히 많은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구성된 합성체로서, 이 물체들 사이에서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성립한다. 중요 한 것은 한 양태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그 양태의 신체적 본질에 대응하여 결정되며, 고로 실존 상에서 본질을 표현한다는 점이다.6)
단, 속성에 거주하는 본질이 영속하는 것과 달리, 실존에 속한 운동과 정 지의 관계는 파괴될 수 있다. 각 양태는 국부적으로 다양한 운동과 정 지의 관계들을 거느리나 전체적으론 그것의 개별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갖는데, 다른 양태들과 마주쳐 국부적 관계들이 변화를 겪는다 해도 전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 실존하고 유지하지 못 하면 죽음을 맞이한다.7)
6) 들뢰즈의 이 설명처럼, 현영종은 스피노자의 자연학 소론을 토대로 그의 철 학에서 실존 양태의 본질이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읽힐 수 있음을 논증한다(현 영종 (2016), 「스피노자의 자기의식과 개체 개념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 사학위 논문, 41-44). 첨언하자면, 이 관점에서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소급되는 외연적 부분들 자체는 실존 양태를 구성하는 것이자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구 현하는 것임에도, 양태의 개별적 본질과 무관하다. 한 양태의 외연적 부분들은 순간적이고 임의적으로 그 양태에 속할 뿐으로서, 다른 양태의 외연적 부분들과 충돌하여 기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얼마든지 상이한 관계 를 가진 별도의 양태를 합성하는 것이 될 수 있다.
7) 본질들 혹은 역량들은 외연량이 없어 서로 외생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대신 정 도차에 따라 내생적으로 구별되며, 속성 속에서 영속한다. 반면, 본질이 외연량 을 얻을 때 성립하는 것인 실존 양태들은 그 외연량에 따라 외생적으로 구별되 며, 외연량을 관할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유지되는지를 기준으로 삶과 죽음 이 결정된다(SPE, 173-182(228-240)). 이 전체적 설명은 스피노자가 명시하는 내용이 아니라 들뢰즈의 해석으로서, 특 히 ‘양태의 본질이 그 양태의 실존과 무관하게 속성에서 실존한다’는 논쟁적 관 점을 내포한다. 물론 들뢰즈가 이렇게 해석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그가 인용 하는 윤리학 2부 정리8과 그 따름정리 및 1부 정리8의 주석2는 ‘시공간에서 실존하는 사물’과 ‘실존하지 않되 속성에 포함되어 있는 사물’이라는 두 층위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양태의 본질 및 실존에 대한 들뢰즈의 설명이 과연 타당한 지는 세부 논의가 필요한 큰 주제이기에, 여기선 그의 기쁜 수동적 변용 개념 을 살펴보려는 우리의 목적에 필요한 정도로만 이를 서술하도록 한다.
기쁜 수동적 변용은 복수의 신체들이 각자 자신의 실존을 규정하는 전체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유지한 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경우, 즉 들뢰즈의 용어로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서로 ‘합성’(composition)되 는 신체들의 마주침을 가리킨다. 우리는 자신이 보존되면서 제 3의 운 동과 정지의 관계 아래 더 포괄적인 힘을 가진 합성체를 구성하게 되 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쁨을 느낀다.
이 기쁨은 기쁨이라는 감정 및 기쁨의 대상을 유지하려는 욕망인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이 사랑으로부 터 다른 긍정적 감정들이 연쇄된다. 들뢰즈는 윤리학을 토대로8) 기 쁨과 여러 후차적 감정들이 사랑에 더해져 사랑의 활동을 활성화시키 며, 이는 곧 우리의 능동 역량이 사랑의 대상이 지닌 역량의 도움을 받아 증가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슬픈 수동적 변용이다.
우리는 우리 신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와 상충하는, 들뢰즈 의 용어로 우리 신체의 관계를 ‘분해’(décomposition)하는 신체와 만날 때, 슬픔을 느끼며 능동 역량이 감소한다. 슬픔은 슬픔이라는 감정 및 슬픔의 대상을 없애려는 욕망인 증오를 유발하며, 이 증오로부터 다양 한 부정적 감정들이 연쇄된다. 이때 슬픔과 여러 후차적 감정들은 증 오의 활동을 방해하는데, 들뢰즈에 따르면 이는 우리의 능동 역량이 증오 대상의 역량에 의해 감해진 것에 다름 아니다. 기쁜 수동적 변 용이 좋고 이로운 마주침이라면, 슬픈 수동적 변용은 나쁘고 해로운 마주침이다.9)
그렇다면 들뢰즈는 왜 기쁜 수동적 변용이 우리를 능동적 변용으로 이끈다고 보는가? 기쁜 수동적 변용은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합치하는 신체들 간의 마주침이기에, 이로부터 합치를 이루는 바로 그 공통의 부분에 대한 관념인 ‘공통 개념’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학 에서 공통 개념은 적합한 관념인 2종 인식이고(E2P40S2) 적합한 관념 이라는 점에서 능동적 변용이다(E3P3). 들뢰즈는 적합한 관념을 질료 원인과 형상 원인으로 독자적으로 나 눠 설명하면서, 공통 개념이 적합한 관념인 바 능동적 변용인 이유를 보다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적합한 관념은 신 관념을 표 현해야 하는 동시에 사유 역량 역시 필요로 하므로, 신 관념을 질료 원인으로 삼는 한편 정신의 사유 역량인 이성을 형상 원인으로 삼는 데,10) 공통 개념은 이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적합한 관념이다.
8) “따라서 기쁨에서 발생하는 욕망은 […] 기쁨이라는 정서 자체에 의해 촉진되거 나 증가한다. […] 그러므로 기쁨에서 나오는 욕망의 힘은 인간의 역량과 외부 원인의 역량 둘 다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면 안된다.”(E4P18Dem).
9) SPE, 219-222(290-294).
10) SPE, 114-126(152-167).
형상적으로, 공통 개념은 대상의 가변적 외관을 지각하는 1종 인식과 달 리 상호 합치에 놓인 신체들의 내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으로서, 이는 이성에 의해 가능하다. 질료적으로, 공통 개념은 정확하게는 ‘복수의 신체들의 부분과 전체에 동등하게 공통적인 부분 ‘(E2P38-39)에 대한 관념인데, 이러한 부분은 각 신체의 임의적 변용과 무관하며 해당 신 체들 모두의 원인이자 그 신체들을 자신의 연장 속성 안에 담지하는 신 자체가 갖는 부분이다.
즉, 이는 신 안에 포함된 채 신을 원인 삼는 부분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신으로부터 분유 받은 이성을 토 대로 형성하는 공통 개념은 신의 자기 이해인 신 관념에 포함되어 있 으면서 신 관념을 원인으로서 표현한다. 정리하자면, 들뢰즈의 스피노 자론에서 공통 개념이란 기쁜 수동적 변용을 매개 삼아 처음 확보되는 것으로서, 질료적으로는 신 관념에, 형상적으로는 이성에 기인한다.11)
따라서 공통 개념은 능동적 변용이다. 이는 우리 정신의 능동 역량 인 이성을 형상 원인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의 이 능 동성은 평행론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에게 있어 신체의 능동성과 함께 간다. 정신이 어떤 대상에 대해 공통 개념을 발견하면서 능동적 변용 으로 이행할 때, 신체 역시 그 대상에 대해 더 잘 대처하는 식으로 능 동적이 되는 것이다.12)
11) SPE, 258-259(342-344).
12) Nadler (2006), 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52(416).
신체적 변용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우리가 능동성에 이르는 방식은, 이처럼 정신이 공통 개념을 형성하여 능동적 변용으로 전환되는 것을 통해 신체 역시 능동적 변용으로 나아가는 형 태이다. 들뢰즈는 정신과 신체 모두의 능동성을 표시하는 바로 이 공통 개념 이 기쁜 수동적 변용을 토대로 형성된다고 보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 다. 즉, 그가 보기에 기쁜 수동적 변용의 혁명성은 능동 역량의 증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 개념을 발견하는 조건이자 발판이라는 점에 있다. 사실 기쁜 수동적 변용은 능동 역량을 증가시키긴 해도, 이는 제한적 의미의 증가이다.
수동적 변용은 우리가 원인이 아니기에, 이때 우리는 능동 역량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며 능동 역량으로부터 분리되 어 있는 것과 같다. 기쁜 수동적 변용이 야기하는 능동 역량의 증가란 능동 역량을 표현하거나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함축하는(envelopper) 상태의 증가일 뿐이다.13)
이와 달리, 공통 개념은 우리의 능동 역량인 이성의 산물로서, 우리가 자신의 능동 역량을 온전히 실행하고 소유하 면서 능동적 변용으로 진입함을 시사한다.14)
13) SPE, 219(290), 220(291), 225(298). 때문에 더피는 우리가 공통 개념을 확보하 여 능동적 변용으로 이행할 때에만 능동 역량이 ‘직접’ 증가하며, 기쁜 수동적 변용은 단지 능동적 변용으로의 이행을 위한 ‘관절’(articulation) 혹은 ‘잠재 력’(potential)이라는 점에서 능동 역량의 증가에 ‘간접적으로’ 관련될 뿐이라 말 한다. 그에 따르면 들뢰즈가 기쁜 수동적 변용이 능동 역량의 증가를 ‘함축한 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Simon Duffy (2011), “The Joyful Passions in Spinoza’s Theory of Relations”, Spinoza Now, ed Dimitris Vardoulak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56; Simon Duffy (2016), The Logic of Expression: Quality, Quantity and Intensity in Spinoza, Hegel and Deleuze, Routledge, 162).
14) 스피노자 철학의 기쁜 정념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에는 반대자들도 존재한다. 대 표적으로 마슈레를 꼽을 수 있다. 마슈레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 심지어 기쁜 것으로 보이는 경우를 포함하여 모든 정념은 예외 없이 슬픈 것”으로서, 기쁜 수동적 변용은 능동적 변용으로 전환되는 계기일 수 없다. 그는 윤리학에서 언급되는 수동적 기쁨이 3부 정리17에 나오는 ‘마음의 동요’(fluctuatio animi)에 해당한다고 보아, 이를 ‘자신의 신체와 상충하는 신체와 마주치는 것임에도 그 신체가 기쁨을 주는 대상과 닮아 있어 착오적으로 기쁨을 느끼는 경우’의 일종 으로 간주한다. 이 “상상적 기쁨”은 “우리 구성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말 그 대로 실행 불가능한 상태”로서 필연적으로 해당 상태의 분해 속에서 슬픔으로 전도된다(Pierre Macherey (1996), “The Encounter with Spinoza”, Deleuze: A Critical Reader, trans. Martin Joughin, ed. Paul Patton, Blackwell, 153-157). 더피는 수동적 기쁨에 대한 마슈레와 들뢰즈의 대립을 소개하면서, 이 대립이 수동적 변용에 대한 입장 차이에 기인한다고 밝힌다. 마슈레에게 수동적 변용은 변용 능력을 실행 중인데다 유한자인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없앨 수 없다. 반면, 능동적 변용만이 변용 능력을 책임진다고 보는 들뢰즈에게 수동 적 변용은 능동적 변용에의 제한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능동적 변용으로 이행하 면서 이를 최대한 없애야 한다(Duffy (2011), 52-53, 57-60). 말하자면, 마슈레는 자연학적 관점을, 들뢰즈는 형이상학적 관점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가 보기에 마슈레를 비롯한 여타의 비판자들과 들뢰즈의 입장이 상이한 ‘직접적인 이유’는 수동적 변용에 대한 다음의 관점 차이에 있다. 감각 경험에 따른 부적합한 이미지 혹은 기호는 들뢰즈의 비판자들에겐 대상에 대한 무지일 뿐이나, 들뢰즈에겐 대상의 참된 면을 담고 있어 대상을 이해하게 할 가능성을 지닌다. 기쁜 수동적 변용을 둘러싼 논쟁이 우리의 주제는 아니므로, 이 가능성에 대해선 4장 맺음말에서 짧게 언급하도록 한다.
3. 능동적 변용의 최종항: 3종 인식
공통 개념을 형성함으로써 부적합한 관념에서 적합한 관념으로, 수 동적 변용에서 능동적 변용으로 도약하면 기쁨만이 양산된다. 슬픔은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깨질 때 느껴지는 정념으로서 능동 역량의 감소 와 결부되어 있기에, 능동 역량이 증가하는 능동적 변용에선 설 자리 가 없다(E3P59&Dem). 그러나 공통 개념은 여전히 한계를 지니는 극 복의 대상이다. 이는 복수의 신체들이 공유하는 부분에 대한 관념인 바, 각 신체의 개별성을 알려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선 하나의 양태를 바로 그것이게 하는 개별적 본질을 이해하는 3종 인 식이야말로 최고의 인식이자 궁극의 목표이다. 그런데 들뢰즈의 스피 노자론에서 기쁜 수동적 변용이 야기하는 긍정적 변화는 공통 개념의 획득을 넘어 이 3종 인식의 확보에까지 이른다. 3종 인식이란 우리가 신에 대한 이해 속에서 신의 속성에 담긴 우리 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1종 인식과 2종 인식이라는] 이 두 종류의 인식 외에 내가 다음에 보여줄 세 번째 것이 존재하는데, 우리 는 이를 직관지라 부를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신의 어떤 속성 들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진행된다.”(E2P40S2) 따라서 3종 인식은 신 관념을 확보할 때 열린다. 윤리학에 따르면 우리는 3종 인식을 2종 인식으 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데, 2종 인식이 적합한 관념인 바 신 관념을 원 인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E2P45-47).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는 우리 가 어떤 공통 개념으로부터든 그 안에 함축된 신 관념을 발견하여 3종 인식으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15)
15) SPE, 278(369)
그러나 아무 공통 개념에서나 신 관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론적 가능성일 뿐으로서, 이는 그러한 발견이 실제로 일어나는 문제와 는 구분된다.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17장과 18장의 전반적인 맥락을 보건대, 들뢰즈는 실천적으론 최후의 공통 개념으로부터 신 관념 이 발 견되고 3종 인식이 개시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스피노자주의에 서 적합한 관념들이 원인-결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연쇄된다는 사실16) 에 의거하여, 우리가 일단 하나의 공통 개념을 형성하면 이 최초의 공 통 개념으로부터 다른 공통 개념들을 연속적으로 발견해 나가면서 최 후의 공통 개념에 이른다고 설명하는 한편, 최후의 공통 개념으로부터 신 관념을 획득하는 부분 역시 다루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최초의 공통 개념은 ‘직접 합성’되는 두 신체의 공 통 부분에 관한 관념이다. 두 신체가 합성된다는 것은 각자의 전체적 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유지된 채 더 상위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으 로서, 국부적으론 관계들이 분해될 수 있으며 그 분해의 범위와 정도 에 따라 여러 수준들을 가진다. 합성의 이 수준들 중 두 신체의 전체 적 관계는 물론이고 모든 국부적 관계들까지 서로 합성되는 경우를 가 리켜 직접 합성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 신체와 전적으로 합 성되는 신체, 달리 말해 “구조적 동일성”(une identité de structure)17)을 가진 신체와 마주칠 때 다른 어떤 신체와의 접촉에서보다 합성을 깨닫 기 가장 쉽다.
16) E2P40. 적합한 관념은 다른 적합한 관념을 도출할 수 있는데,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이는 그것의 형상 원인이 이성이고 질료 원인이 신 관념이기 때문이다. 관념의 참됨을 보증하는 이 두 조건들은 관념들이 외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오직 자신들의 관계에서 이어지게 하는 힘이다. 하나의 적합한 관념을 발견할 때, 우리는 신 관념이라는 궁극 원인으로부터 모든 적합한 관념들이 연쇄되고 그 관념들이 하나같이 신의 이성적 힘의 소산인 질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지성개선론의 표현을 따라 ‘정신의 자동 기계’라 불리는 관념들의 이 연쇄는 사실 평행론에 함축된 내용이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신체와 정신(신체에 대한 관념)이 독립적이되 질서가 같아 함께 움직인다는 것으로, 이때의 ‘독립성’은 연장 속성의 양태인 신체와 사유 속성의 양태인 정신이 서로 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과 동일한 속성을 지닌 양태들과 인과 관계를 맺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입장은 물리적 대상을 관념의 원인으로 보는 종래의 관념론과 확연히 구분된다.
17) SPE, 254(337).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아리 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처럼 감각적으로 파악되는 것들인 형태나 기능 혹은 용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적 구조이다. 구조란 “한 신체의 부분들 간의 관 계들의 체계”(SPE, 257, (341))로서, 그 신체의 전체적 관계 및 국부적 관계들을 아우른다. 따라서 전체적, 국부적 관계 모두에서 합성이 벌어지는 두 신체는 구 조적 동일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윤리학이 알려주길, 이성은 우리의 본성에 대 립하는 정서인 슬픔이 정신을 압도하지 않을 때에만 실행될 수 있는데 (E5P10&Dem), 직접 합성되는 신체들의 마주침은 수동적 변용들 중 슬픔이 가장 적게 산출되는 경우이다. 이 최초의 공통 개념은 단지 두 신체의 공통 부분에 대한 것이므로, 들뢰즈는 이를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을 형성한 후, 적합한 관념들 의 상호 연쇄에 힘입어 우리 신체와 부분적으로만 합치하는 신체들과 의 관계에서도 공통 개념을 발견해 나가면서 사유 역량이 갈수록 증가 한다. 그 끝에서 확보하는 최후의 공통 개념은 우리 신체와 완전히 상 충하는 듯 보여 슬픔부터 야기하는 신체와의 관계에서 양자가 적어도 연장이라는 보편 속성을 공유함을 깨닫는 것이다.18)
이는 모든 신체에 공통적인 부분에 대한 관념이기에, 들뢰즈는 이를 “가장 보편적인 공 통 개념”이라 부른다.19)
18) 슬픔을 느끼던 신체로부터 공통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압도하는 슬픔 및 수동적 변용을 기쁨 및 능동적 변용으로 바꾸는 것으로서 인간 실존에 매우 중요하다. 스피노자의 의중은 모든 수동적 정념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이는 불가능하다-,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간에 수동적 변용을 기쁜 능동적 변용으 로 점진적으로 전도시킴으로써 ‘수동적 변용의 비율을 최소화하고 능동적 변용 의 비율을 최대화하자’는 것이다(E5P20S).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계승자로서 강 조하는 것 또한 이러한 관점이다(SPE, 136(181), 290(384-385)).
19) 들뢰즈도 언급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은 윤리학에서 가장 보편적인 공통 개념 을 먼저 다룬 후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으로 넘어간다(E2P38-39). 그러나 들뢰즈는 이것이 설명의 논리성을 위한 순서일 뿐으로서, 이성이 슬픔의 방해를 받지 않을 때 실행된다는 윤리학 5부 정리 10 및 그 증명을 보건대 스피노자 역시 공통 개념의 발생 자체는 정반대 순서로 일어난다고 생각했으리라 추정한 다(SPE, 265-266(352-354) ; Deleuze (1981), 127-129(141-143)).
최후의 공통 개념인 연장 속성에의 관념은 왜 3종 인식의 발견을 이 끄는가? 신 관념을 원인으로 함축하기 때문이라는 추상적 설명 보다구체적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가?
일차적 이유는 상충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공통 개념을 발견할 정도로, 다른 어떤 공통 개념에서보다 사유 역량이 증가한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연장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데 있다. 연장 속성은 신 의 본질을 구성하므로, 연장에 대한 단순 이해는 연장이 구성하는 신 의 본질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닌다.
신은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연장 속성으로 양태들을 생산하기에, 연장 속성은 신과 양태 모두의 공통 형상이다.
신은 이 속성을 통해 양태 전체를 복합하며, 양 태들은 속성에 복합된 채 신을 자기 안으로 함축하는 동시에 신을 자 기 밖으로 펼쳐낸다.
스피노자주의에서 ‘일자(신) 속 다자(양태들)의 현 존’ 및 ‘다자(양태들) 속 일자(신)의 현존’을 보여주는 이 논리는 표현 (expression)이라 불린다.
따라서 우리가 연장 속성을 단순히 우리 신체 의 구성 요소로서가 아니라 신의 이 표현 논리를 구축하는 요소로서 이해하게 될 때, 신의 본질 안에 복합된 우리 신체의 본질-특정한 정도 의 역량 및 그에 대응하여 양태의 실존을 규정하는 운동과 정지의 특 정한 관계-을 깨닫게 된다.
신과 양태들 간의 표현 논리가 신 관념과 양태들의 관념들 사이에서 재생산되는 것이다.20)
들뢰즈는 2종 인식으로부터 3종 인식이 열릴 때, 즉 연장 속성을 우 리 신체의 구성인자로 아는 수준에서 신의 구성인자로 아는 수준으로 도약할 때, 연장이라는 공통적인 것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2종 인식에서 속성은 만물이 공유하는 것이기에 ‘공통성’을 의미하나, 3종 인식에서 속성은 신의 고유한 본질을 이루는 것이자 모든 양태의 고유 한 본질을 담은 것이므로 ‘개별성’을 뜻한다. 또한 2종 인식에서의 속 성은 ‘일반성’(généralité)이라는 보편을 가리키지만, 3종 인식에서의 속 성은 전혀 다른 종류의 보편을 시사한다.21)
20) 만약 우리가 비교적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에서 불현듯 신 관념을 얻는다 해도, 신에 대한 이 이해는 필연적으로 연장 속성에 대한 공통 개념을 형성한 후 가능 할 것이다. 속성을 신의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속성이 만물에 공통적이라는 일 반적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주어질 수 있는 고차적 수준의 앎이기 때문이다.
21) “신 관념은 모든 일반성을 추방하며, 우리가 신의 본질로부터 독특한 실재적 존재들인 사물들의 본질들로 이행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Deleuze (1981), 117(130)).
2종 인식에서 속성이 구현하는 일반성이 상이한 개체들의 공통 부분을 추려낸 것이어서 각 개체 의 개별성이나 차이를 포섭하지 못하는 보편인 것과 달리, 3종 인식에 서의 속성은 모든 양태들의 본질을 심지어 생산하면서 복합하는 보편 이다. 들뢰즈는 지성이 만들어내는 보편과 대비되는 이러한 직관의 보 편을 ‘일의성’(univocité)이라 표현한다.22)
스피노자에게 이때의 속성은 신과 양태의 공통적인 존재 형상으로서, “존재는 무한한 것이든 유한 한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동일한 의미로 말해진다”23)는 ‘존재의 일의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22) SPE, 278-280(369-372).
23) SPE, 54(67).
따라서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에서 신의 일의적 속성을 토대로 개별적 본질을 아는 것인 3종 인식이란 ‘일의적 보편을 통한 개별성의 이해’에 다름 아니다.
살펴본 바, 기쁜 수동적 변용은 단순히 최초의 공통 개념이 발견되 는 지반을 넘어, 다른 공통 개념들의 잇따른 발견을 거쳐 3종 인식에 이르는 훨씬 심원한 도약 과정의 출발점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 에서 인간의 실존적 목표인 3종 인식을 이룰 단초를 기쁜 수동적 변용 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Ⅱ. 차이와 반복에서 좋은 마주침: 기호와의 마주침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발굴해 내는 기쁜 수동적 변용과 유 사한 것이 들뢰즈 자신의 철학서인 차이와 반복 3장에서 ‘기호와의 마주침’이라는 주제 아래 제시된다.
기호와의 마주침은 기쁜 수동적 변 용의 세 쟁점을 갖기 때문이다.
첫째, 기호와의 마주침은 우리가 평상 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관점, 즉 우리가 수동 상태에 빠져있다는 관점을 전제한다.
둘째, 기호와의 마주침은 수동적 감각 경험이되 우리를 능동적 자기 초월로 인도하는 유일한 계기이다.
셋째, 기호와의 마주침에 따른 초월의 극점은 일의적 보편을 통한 개 별성의 인식이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1. 마음 능력의 경험적 실행: 역량의 제한
들뢰즈는 ‘이미지 있는 사유’를 비판하면서 기호와의 마주침을 ‘이미 지 없는 사유’의 계기로 내세우므로, 기호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 미지 있는 사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에 따르면 사유의 이미지 란 사유 작용에 깔린 암묵적 전제로서, 심지어 철학자들을 포함한 인 간 대다수가 그 타당성을 검증하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선입견을 의미한다. 사유의 이미지는 차이와 반복에서 크게 8가지로 요약되는데, 이중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앞의 4가지는 다음과 같다.24)
24) 차이와 반복 3장에 등장하는 총 8개의 공준들은 모두 재현 체계로 소급되나, 휴즈에 따르면 이중 앞의 네 공준들은 그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이 재현 이하의 체계를 직접적으로 표명한다는 점에서 뒤의 네 공준들과 구분된다(Joe Hughes (2009),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Continuum, 72). 이 연구는 마음 능 력의 역량이 일상에선 제한되어 있음을 밝히면서 재현 이하의 층위에서 소유한 역량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논점을 펼치므로, 이와 직결된 앞의 네 공준만을 살 펴보도록 한다.
첫 번째는 모두가 사유 능력을 타고나며 사유 주체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사유 역시 선 한 본성을 지니므로, 사유는 결국 진리와 친화적이라는 ‘보편적 본성의 사유의 공준’이다.
일례로,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우리가 사유, 자 아, 존재 개념을 가진다는 조건 위에 성립하는데, 이는 그 자체 우리에 게 사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한다.
두 번째는 ‘공통 감각의 공준’으로, 마음 능력들이 한 대상의 동일성 형식(범주) 혹은 그러한 형식에 따른 보편적 대상과 관계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룸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러 저러하게 질화된 대상을 경험하나 모든 질화된 대상에는 동일성 형식 이 내재해 있어 우리의 순수 자아는 이를 포착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 서 마음 능력들이 이 형식을 공유하면서 일치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는 마음 능력들이 대상의 다른 측면이 아니라 바로 이 동일성 형식과 관계함을 뜻하는 ‘재인의 공준’이다. 이 공준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대 상을 늘 같은 것으로 식별할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앞선 세 공준 들을 아우르는 ‘재현의 공준’이다. 재현이란 대상을 동일자로 개념 화하 는 거대 체계를 말한다.
보편적 사유 능력과 자기 동일성을 지닌 순수 사유 주체, 순수 사유 주체 내부의 능력들의 조화, 순수 사유 주체에 상응하는 대상의 동일성 형식 및 그에 따른 보편적 식별과 같은 세 공 준들의 내용은 전통 철학에서 사유의 보편타당성을 보증하는 토대로 중시되어 왔는데, 이러한 가치 체계 전반이 재현이다.
여기서 차이는 동일자 내의 차이, 달리 말해 동일성으로 윤색된 차이로 환원되고 만 다. 이 공준들을 거론하면서 들뢰즈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평소 이것들 의 참됨을 반성하거나 비판하지 않은 채 답습할 뿐이며 따라서 사실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기존의 가치를 반복할 뿐인 사유의 예속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사유 역량을 제대 로 활용하지 못하며, 극단적으로는 그 역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들 뢰즈에게 사유는 인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음 능력 전반의 활동을 포괄하면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사유 역량의 제한은 곧 인식의 제한을 넘어 감성, 상상력, 기억 각각의 제한을 함축한다.
더욱이, 우리가 답습하는 사유의 이미지의 내용 또한 역량이 제한되 게 만든다. 공통 감각의 경우를 보자. 우리의 마음 능력은 공통 감각을 의심하지 않기에 하나같이 대상을 동일성 형식인 범주에 따라 지각하 고 상상하며 기억하고 사유하면서 서로 일치하는데, 이로써 대상의 다 른 측면들을 놓치고 만다. 일례로, 감성 능력은 눈앞의 나무를 ‘나무’ 라는 범주로 파악하는데 치우쳐 그 나무의 질과 양이 시공간적 특수성 에 따라 갖는 뉘앙스를 상실함은 물론이고, 다른 나무와 구분되는 그 나무만의 질과 양의 특수성 역시 파악하지 못한다. 더욱 근본적인 문 제는 해당 나무의 질과 양 자체를 산출하는 초월론적 원리인 강도 (intensité)를 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개체의 독특성을 결정하는 것을 역량 혹은 힘으로 보면서, 이를 강도로 표현한다. 강도가 질과 양이 아니 라 질과 양을 산출하는 원리라는 것은, 하나의 개체를 바로 그것이게 하는 것이 개체적(individuel) 차이가 아닌 개체화하는(individuante) 차 이임을 뜻한다. 들뢰즈에게 개체화란 차이나는 것들이 매개 없이 직접 엮이고 공명하면서 또 하나의 차이가 분화되는 연속된 과정이다.
이는 개체화하는 차이의 다른 이름이 분화소(le différenciant)인 이유이다. 즉, 개체화는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결정론적 과정이 아니라 예측 불 가능한 변화 및 새로운 것의 창조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비결정적 과 정, 한마디로 ‘차이화하는 반복’의 과정이다. 따라서 각 개체는 특정한 형태로 구성된다 해도 그 구성은 본성상 일시적이어서 얼마든지 기존 형태의 와해 속에서 새로운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처럼 개체화하는 차이는 “차이지으면서 나아가는 차이”(la différence allant différant)25) 이자 “자기 자신과 차이나는 차이”(la différence avec soi)26)이므로, ‘차 이 그 자체’ 혹은 ‘(순수한) 즉자적 차이’라 불리기도 한다. 재현 체계 의 차이인 개념적 차이가 동일성(유) 내의 차이(종차)로서 상대적 차이 에 불과한 것과 달리, 즉자적 차이는 어떠한 동일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절대적 차이이다. 들뢰즈에겐 이 절대적 차이야말로 무언가가 특 정 개체로서 유기화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 토대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의 개체로서 다른 개체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재현적 세 계는 절대적 차이가 불러오는 일시적 효과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러한 효과에 매몰된 채 정작 초월론적 토대를 보지 못한다.27)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감성은 개체화하는 차이로서의 강도를 잠재적 수준에서 감각함에도, 의식이 관장하는 현실에선 이 역량을 봉 인한다.
또한 감성은 무의식적으론 질료적 강도 역시 감각하지만, 현실 에선 이를 놓친다.28)
25) Deleuze (1968),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79(144). (*이하 DR)
26) DR, 157(269).
27) DR, 56(107-108), 154(263-264).
28) 차이와 반복에서 강도는 한편에선 세 수동적 종합을 거쳐 발생하는 것으로 설 명되나, 다른 한편에선 태초에 주어진 것으로 기술된다. 전자가 각 개체의 독특성에 해당하는 개체화하는 차이 혹은 순수 강도로서 ‘특정한 정도의 힘’을 가리 킨다면, 후자는 일종의 질료적 강도로서 특정한 정도와 무관하며 ‘아직 분화되지 않은 질료들의 관계로부터 계속 생겨나고 사멸하는 순간적인 힘’이다. 휴즈는 이 처럼 들뢰즈의 철학에서 강도가 두 종류임을 강조하면서 질료적 강도를 ‘단순히 주어진 흥분’으로, 순수 강도를 ‘규정된 흥분의 양’으로 표현한다(Joe Hughes (2008), Deleuze and the Genesis of Representation, Continuum, 142-145).
들뢰즈에 따르면 무언가와 접촉하는 것은 유기화 이전부터 존재하는, 미세하고 파편적인 강도들로 충만한 질료의 수준 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상호 침투하는 것과 같다. 신체적 변용에서 실 제로 발생하는 것은 자신의 질료를 강타하는 상대 질료의 강도에 대한 이러한 감각이다.
우리는 유기화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 일종의 미세지각을 억제한 채 이것들을 특정 범주로서 종합하고 일반 화한 결과만을 의식하지만 말이다.
다른 마음 능력들 역시 다르지 않다. 아이가 엄마의 젖가슴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실제와 다르듯, 우리의 상상력은 무의식에선 욕망과 충 동에 따라 현실의 존재를 완전히 다른 대상으로 창조하는 역량을 지녔 으나, 의식에선 순전히 경험적 층위를 전사하는데 그친다.
또한 기억 능력은 무의식적으론 환상이 빚어낸 이러한 대상을 순수 과거29) 속에 보존한 채 상기해 낼 수 있음에도, 의식적으론 이 잠재적 대상이 검열 을 피해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위장되고 전치된 결과만을 얻는다.30)
29) 지면 관계상 간단히 설명하면, 순수 과거란 베르그손의 개념을 들뢰즈가 수용한 것으로서, 삶의 전 순간을 손상 없이 보존하고 있는 기억들의 총체이다.
30)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우리가 망각(l’Oubli) 속에서만, 달리 말해 의식 이하의 사 태인 기억의 수동적 종합이나 비자발적 기억을 통해서만 잠재적 대상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순수 과거 혹은 그 내부의 잠재적 대상을 ‘므네모시네’로, 이 므네모시네를 향한 무의식적 사랑과 탐색을 ‘에로스’로 칭한다(DR, 114-115 (200-201)).
게다가, 의식에서 기억은 범주적 대상들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단순 회상하는 심리적 차원으로 주로 소비된다.
마음 능력이 잠재적 수준에 서 펼치는 작동 및 그와 관련된 대상은 마음 능력의 경험적 실행을 낳 는 초월론적 토대이다. 환상을 직조하는 상상 능력이 있기에 현실에서 의 상상들이 가능하며, 순수 과거가 존재하기에 그로부터 특정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음 능력은 경험적 실행에서 자신의 가능 근거를 억압한다.
사유 능력 역시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지식이 나 이론과 같은 개념적 사유의 초월론적 토대는 유기화되지 않은 최초 의 질료로부터 발생하는 형이상학적 의미인 ‘이념’인데,31) 우리는 이를 사유할 역량을 지님에도 극소수만이 이 역량을 실현하며32) 대다수는 동일성 형식에 따라 개념적 사유를 할 뿐이다.
31) 2장 3절에서 언급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에서 이념은 개념적 사유의 초월론적 토대를 넘어, 재현 체계의 모든 개체를 낳는 초월론적 토대이다. 그러나 여기서 는 ‘사유 능력’이 초점이므로, 이념의 역할을 인식의 영역으로 국한지었다.
32) 들뢰즈는 선재하는 규칙을 따르는 재현의 놀이와 매번 규칙을 만드는 신적인 놀 이를 대조하면서, 이념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미분적 요소들의 관계 및 그 관계 로 인한 독특성들의 생산을 후자로 간주한다. 규칙이 없다는 것은 하나로 수렴 되지 않는 발산 운동 혹은 탈중심화 운동을 수행한다는 의미인데, 들뢰즈는 이 념의 이 운동을 사유했던 선각자들로 니체, 말라르메, 보르헤스 등을 꼽는다(DR, 93-95(165-167), 150-153(258-262), 361-364(590-594); Deleuze (1969), Logique du Sens, Minuit, 81-82(140-142), 201-205(293-297)).
이처럼, 일상에서 마음 능력들은 대상을 범주적으로 수용하면서 서 로 조화를 이루는데 국한되어 있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그 이상 을 파악할 능동 역량이 잠재태로 머무는 수동적 변용에 빠져 있는 것 이다.
2. 수동적 감각 경험에 따른 마음 능력의 초월적 실행
들뢰즈는 기호와 만날 때 능력들이 사유의 이미지에 종속된 경험적 실행을 깨고 초월적 실행에 돌입한다고 말한다. 기호란 무엇인가?
감 성이 잠재적 수준에서 감각하는 강도는 초월론적 원리지만, 이는 위계 적 이원론을 거부하는 들뢰즈에게 있어 이데아처럼 현상계 밖의 초경 험적 층위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현상계 내에 거주하는 것으로 설명된 다.
다만, 이는 질과 양을 산출하는 것임에도 그 자체는 질과 양이 부 재하기에 일반 사물처럼 존재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물리성이 없어 실존하지(exister) 않지만 분명 있는(être) 초월론적 원리의 이 같은 존 재 방식을 내속(insistance)이라 부르거나,33) 헤겔이 존재에 반하는 부재로서 격하하는 ‘비-존재’가 아니라는 뜻에서 ‘(비)-존재’((non)-être)라 표현한다.34)
이처럼 강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모든 사물에 내 재하므로, 우발적 접촉 속에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여 의식적 각성을 불러올 수 있다. 그때 그 강도가 내속되어 있는 사물은 우리에게 기호 가 된다.
여기서 쟁점은 강도, 정확히는 “순수한 즉자적 차이”(pure différence en soi)로서의 강도가 감성의 배타적 대상이라는 사실이다.35)
즉, 강도 는 상상되거나 기억 혹은 사유될 수 없고 오직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 그러나 공통 감각에 사로잡힌 관례적 실행에서는 감각될 수 없기 에 감성으로 하여금 초월적 실행을 하도록 강요하는 대상이다.
때문에 감성은 자신 앞에 드러난 이 미지의 존재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그것을 제대로 감각해 내는 수준으로 그 역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에 자극 받아 상상력 역시 제 고유한 대상인 ‘환상 의 대상’36)을 쫓기 시작하며, 이어 기억 또한 상상력의 영향 아래 자 신 만의 대상인 ‘순수 과거’ 혹은 ‘순수 과거 속의 잠재적 대상’37)을 찾아 나선다.
33) 들뢰즈는 특히 기억의 초월론적 원리인 순수 과거에 대해 내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순수 과거라는 과거의 총체는 우리가 알지 못해도 매 현재에 수축한 채 밀려들어 있는 바, 그로부터 특정 과거를 의식적으로 회상하는 경험적 기억 이 가능한 한편, 현재가 흐를 수 있다. 이처럼 재현 체계에 깃든 채 그것의 토 대로서 작동하는 재현 이하의 존재 방식이 내속이다(DR, 111(194), 또한 역주 14 참조).
34) DR, 88-89(158-160).
35) DR, 187-188(320-321).
36) “환상 안의 불균등성(la disparite)”(DR, 188(321)).
37) 사실 들뢰즈는 기억의 배타적 대상을 플라톤의 상기설에 나타난 초월적 기억의 대상과 대조하면서 “시간의 순수 형식 속의 비유사성(le dissemblable)”(DR, 188(321))이라 짧게 언급하는데 그친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이데아를 신화 적 현재에서 보았으나 망각한 상태로서, 이를 상기하는 것이 곧 진리에 대한 인식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는 상기라는 초월적 기억이 경험한 적 있는 대상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이 경우, 상기를 촉발하는 대상은 바로 그 원 초적 경험과의 유사성을 통해 재인되는 대상, 달리 말해 불변의 원본에 대한 모사 품으로 전락하여 같음의 반복에 놓인다. 더욱이, 이데아는 경험적 현상의 가능 근 거임에도 자신이 근거짓는 것인 현상을 통해 근거로서 특징지어지고 입증되며, 현 상과의 유사 관계 속에서 현상의 시간에 속한 것이 되고 만다. 들뢰즈는 상기설이 경험적 층위를 초월적 층위로 전사하는 이러한 측면을 비판하면서, 초월적 기억의 대상이 경험된 적 없으며 내용과 운동을 가진 현상의 시간을 벗어난 텅 빈 형식 의 시간에 거주한다고 주장한다(DR, 118-119(206-208), 184-185(315-317). 이 연구는 이러한 초월적 기억의 대상이 ‘순수 과거’ 혹은 ‘순수 과거 속의 잠 재적 대상’이라는 입장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2장에서 기억의 수동적 종 합을 순수 과거 및 잠재적 대상과 직결시키는데, 기억의 수동적 종합이란 의식 이하에서 벌어지는 것으로서 그 자체 기억이 자신의 잠재적 역량을 펼치는 초월 적 실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 과거와 잠재적 대상이라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의 층위는 내용을 가지므로, 이것이 어떻게 세 번째 종합의 시간인 텅 빈 형식의 시간에 대응하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텅 빈 형식의 시간은 ‘균열 되어 있어 앞선 것을 반복하지 않는 서수적인 시간’이자 ‘모든 경험적 내용을 비운 시간’으로서, 전적인 새로움이 발생하는 시간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그런데 순수 과거 속의 잠재적 대상은 차이들을 공명시켜 새로운 차이를 산출하면서 스스로로부 터 달라지는 ‘분화소’ 혹은 ‘어두운 전조’(préseceur obscur)(DR, 156-158(268-271)) 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와 같은 절대적 새로움을 구현한다. 순수 과거가 자리 를 옮기면서 내속하는 각 현재에는 잠재적 대상이 언제나 위장된 채 나타나는 데, 이는 곧 잠재적 대상이 자신이 머무는 지점마다 상이한 요소들을 공명시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함을 뜻한다. 잠재적 대상은 애당초 현실의 대상으로부터 욕 망과 충동에 따라 절취해 낸 환상의 대상인데다, 이처럼 현재에 끝없이 달라진 채 등장하기에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에 다름 아니다(DR, 138-140(238-241)). 또한 현행적 현재의 대상과 예전 현재의 대상은 모두 잠재적 대상의 위장들인 바, 잠재적 대상은 두 현재의 대상들을 공명시켜 새로움을 낳는 것이기도 한데, 들뢰즈는 이 공명의 논리가 암시되는 사태로 프로이트의 사후적 지연을 재해석 하면서 “이 지연 자체는 이전과 이후를 공존하게 만드는 시간의 순수 형식이 다”(DR, 163(279))라고 말한다.
이 전체 맥락에서 보건대, 들리즈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이 시간의 세 번째 종 합과 그 핵심이 상통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초월적 기억의 대 상에 대해 “시간의 순수 형식 속의 비유사성”이라는,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을 연 상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차이와 반복에서 시간의 두 번 째 종합은 경험한 적 있는 대상으로 오인되어 상기설의 한계를 갖는다는 이유 에서 시간의 세 번째 종합으로 이행할 필요성에 놓이나(DR, 145(248-249)), 이 한계는 말 그대로 ‘오인’에 의한 것일 뿐 시간의 두 번째 종합 자체의 한계가 아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사유가 사유 밖에 될 수 없는 대상인 ‘이념’을 사유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이런 식으로 기호와 만날 때 능력 들은 공통 감각으로부터 탈구된 채, 자신의 배타적 대상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감각하고 상상하며 기억하고 사유하면서 연쇄적으로 확장 된다. 이것이 곧 초월적 실행이다.
감각되어야하는 것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의 폭력이 전개된다. 각각의 능력은 자신의 경첩에서 풀려 났다. 그런데 이 경첩이란 모든 능력들을 회전시키고 수렴했던 공통 감 각의 형식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자신의 편에서 그리고 자신의 질 서에서, 각 능력은 독사의 경험적 요소 안에서 그것을 유지시켰던 공통 감각의 형식을 깨트리고 자신의 n승의 역량에 도달한다. 이는 초월적 실 행 속에서 역설적 요소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모든 능력들이 한데 모이 면서 하나의 대상을 재인하려는 공통의 노력을 하는 것 대신, 이제 우리 는 어떤 발산적인 노력을 목격하는데, 여기서 각 능력은 자신과 본질적 으로 관련된 제 ‘고유한’ 측면과 마주하게 된다.38)
들뢰즈의 이러한 설명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마음 능력의 배타적 대상이란 그 능력이 잠재적 수준에서 포착하는 대상이며, 따라서 마음 능력이 현재에서 제 배타적 대상과 관계하는 초월적 실행을 한다는 것 은 그러한 대상을 포착할 수 있는 자신의 잠재적 역량을 현실화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앞서 확인했듯, 각 능력이 잠재적 수준에서 만나는 대상은 그 능력의 경험적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 토대이므로, 결국 초월적 실행이란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라는 잘못된 초월론적 층 위를 내세워 능력을 제한해 온 현재의 경험적 실행을 뒤엎고 진정한 초월론적 층위를 되찾아 이를 적법하게 따르는 새로운 경험적 실행을 조직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점에서 들뢰즈는 초월적(transcendant) 실 행이 초월론적(transcendantale) 형식과 직결된다고 말한다. “능력의 초 월론적 형식은 그것의 탈구적 실행, 즉 우월한 실행이나 초월적 실행 과 구별되지 않는다.
초월적이라는 것은 능력이 세계 밖의 사물들과 관계함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능력이 자신과 배타적으로 관련되 고 자신을 세계에 산출하는 것을 세계 속에서 파악함을 의미한다.”39)
38) DR, 184(314). 단, 들뢰즈가 공통 감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공통 감각이 경험의 핵심 요소임을 인정한다. 그가 말하는 바는 공 통 감각이 경험적 층위일 뿐임에도 사유의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조건, 즉 권리 상의 층위로 오인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공통 감각의 와해는 전통 철학의 주장처럼 사유의 불가능을 가리키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 능력들이 지고한 역량을 펼치는 해방의 순간이다. 공통 감각의 와해로 인해 불가능해지는 사유가 있다면, 그것은 범주에 국한된 경험적 사유일 뿐이다.
39) DR, 186(318). 이와 관련하여, 휴즈는 기호와의 마주침을 통한 초월적 실행을 마음 능력들이 잠재적 수준에서 제 배타적 대상을 포착하는 사태로 보면서, 이 를 시간의 세 수동적 종합에 대응시킨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옳다. 의식 이하 의 층위인 시간의 세 수동적 종합이 각기 특정한 마음 능력의 초월적 실행에 해당한다는 주장 자체는 타당해 보인다. 즉, 유기화 이전의 질료 상에서 파편적 강도들을 감각하는 감성의 초월적 실행을 필두로, 그 차이나는 강도들을 응축하 는 상상력의 초월적 실행이 현재 일반을 낳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이고, 순수 과거를 보존하는 기억의 초월적 실행은 과거 일반을 구성하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이며, 강도적 질료로부터 형이상학적 이념이 조직되어 나가는 시간의 세 번 째 종합은 그러한 이념을 사유하는 사유의 초월적 실행과 함께 간다(Hughes (2009), 78, 103). 하지만 들뢰즈가 기호와의 마주침이라는 표현으로 기술하는 것은, ‘현실’에서 감성이 제 배타적 대상을 우연히 감지함으로써 재현 체계에 복속된 경험적 실행을 극복하는 사태이다. 다시 말해, 기호와의 마주침에 따른 초월적 실행이란 단순히 잠재적 수준의 역량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량의 현실화를 뜻한다.
기호와의 마주침에 따른 능력들의 연쇄적인 초월적 실행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감성에 가해지는 강도의 폭력 속에서 일어나는 수동 적 자기 초월이나, 그럼에도 이 수동성 안에선 능동성이 펼쳐지고 있 다. 이는 능력들이 더 이상 공통 감각이라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저 마다 자신의 배타적 대상을 독자적으로 궁구하면서 재현에 종속된 현 재를 뒤바꾸는 창조적 행위로서, 잠재태에 머물던 역량을 무한대로 현 실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와의 마주침은 기쁜 수동적 변용과 마 찬가지로 그 시작은 수동적이나 능동성으로 귀결되는 감각 경험인 것 이다.
3. 능력들의 연쇄 확장의 최종항: 우발점을 통한 사유
기호와 마주칠 때 감성, 상상력, 기억의 초월적 실행에 자양분을 제 공하는 것이자, 그 모든 초월적 실행 이후 비로소 도달되는 것은 이념 이다.
따라서 능력들의 역설적 사용, 무엇보다 기호 내부의 감성의 역설적 사 용은 이념에 의존한다. 이념은 모든 능력들을 관통하면서 차례로 일깨 운다.
반대로, 이념은 각 능력의 역설적 사용에 의존하고, 그 자체 언어 에 의미를 제공한다.
이념을 탐험하는 것과 각각의 능력들을 초월적 실 행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같은 일이다.40)
즉, 기호와의 마주침에 따른 초월의 최종항은 사유가 제 배타적 대 상인 이념을 탐험하는 사유의 확장이다. 이는 기쁜 수동적 변용에 의 한 능동적 변용의 극점이 3종 인식인 것과 공통적이다. 일단 기쁜 수 동적 변용의 경우에서처럼, 기호와 마주치는 사태에서도 참된 사유는 오직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 이르는 길에서 진실로 모든 것은 감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강도적인 것 에서 사유에 이르기까지, 사유는 언제나 어떤 강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다.”41)
그리고 기호에의 감각 경험이 촉발하는 참된 사유의 양상 역 시 3종 인식과 상통한다. 들뢰즈는 사유의 배타적 대상을 사실 이념 외에도 ‘본질’(l’Essence) 및 ‘우발점’(point aléatoire)이라 표현한다.42)
이념은 왜 본질인가? 들뢰 즈에 따르면 이념이란 유기화 이전의 질료로부터 발생하는 형이상학적 의미로서, 일종의 규정을 가하는 힘이다. 최초에 존재하는 것은 파편적 이고 미분화 상태의 질료적 자극들인데, 이 자극들이 묶여 규정 가능 성을 지닌 미분적 요소를 이루고, 그러한 미분적 요소들이 서로 수렴 되고 상호 관계하면서, 그 관계로부터 이념 적 독특성들이 저마다 완결 된 규정으로서 생산된다. 이렇게 생산된 이념적 독특성들은 각자 자신 이 태어난 터인 무형식의 질료에 형식과 틀을 가해 특정한 개체로서 조직되고 규정되도록 만든다. 이를 가리켜 들뢰즈는 이념적 독특성들 이 제각기 질료에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질료가 특정한 질과 양을 그 문제에 대한 ‘답’으로서 내놓는 것이라 말한다. 이런 의 미에서 이념이라는 초월론적 원리는 하나의 개체를 바로 그것으로 결 정짓는 개별적 본질이다.43)
40) DR, 213(362).
41) DR, 188(322).
42) DR, 183(314), 188(321).
43) 들뢰즈는 본질이라는 고전적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전통 철학에서의 것과 전혀 다르다. 전통 철학에서 본질은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각 개체의 자기동 일성을 보증하나, 들뢰즈에게 본질은 차이화하는 반복을 통해 각 개체가 고정된 정체성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게 만든다. 계속 갱신되는 이러한 삶의 모습은 ‘존 재자의 다의성’이라 불린다.
그렇다면 이념은 우발점과 무슨 관계인가? 미분적 요소들의 관계 맺 기 속에서 이념적 독특성들이 끝없이 생산되는 장소가 바로 우발점이 다.44)
우발점은 차이와 반복 보다는 의미의 논리에서 더 잘 설명 되는데, 이 책에서 들뢰즈는 포우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 속의 편지 가 상이한 인물들의 집합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을 우발점 에 빗댄다.45)
44) DR, 256(429), 258(433).
45) Deleuze (1969), 52-56(101-105).
즉, 우발점은 이러한 편지처럼 계속 자리를 옮기면서 임 시적으로 머무는 매 자리마다 이질적인 항들을 소통시키고 종합하여 그로부터 차이를 양산하는 창조적 빈칸이다. 의미의 논리에선 언어 의 문제를 주로 다루다 보니 우발점에서 생산되는 것을 ‘의미’로 지칭 하고 이것이 명제에 내속하는 선험적 원리라 말하지만, 이는 차이와 반복에서 이념이 물리적 개체에 내속하는 선험적 원리로 서술되는 것 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의미와 이념은 의식 혹은 재현의 층위를 산출 하는 초월론적 원리라는 점에서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발점은 개별적 본질이자 초월론적 원리인 의미들 혹은 이 념들이 생산되고 또한 함축되는 보편적 심급이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 의 보편, 즉 개별성을 말소하는 지성의 일반성에 반하는 보편을 3종 인식에서 확인하면서, 들뢰즈가 이를 일의성으로 지칭함을 살펴보았다.
3종 인식이 개별적 본질을 독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일의적 속성에 대한 이해 속에서 아는 것이듯, 기호와의 마주침에 따른 초월 적 사유 역시 우발점이라는 일의적인 것을 사유함으로써 그 안에서 잉 태되는 이념적 독특성들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초월적 사유는 3종 인식과 마찬가지로 일의적 보편을 통한 개별성의 이해로 요약될 수 있다.
Ⅲ. 기쁜 수동적 변용의 심화로서의 기호와의 마주침
기호와의 마주침은 기쁜 수동적 변용과 핵심 특성들을 공유한다. 하 지만 단순 반복이 아니며, 그 핵심 특성들을 둘러싼 제반 사항들에 있 어 차이를 지닌다. 이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달리 재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철학자로서, 기호와의 마주침을 재현에 대한 극복과 직결시키기 때문이다. 크게 다섯 차이 속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차이는 우발성에 대한 입장이 상이하다는 점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발성은 현상에 대한 진술로서, 수동적 변용이 주로 의식이 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데다 본질적으로 신체를 구성하는 외연적 부분들의 임의적 충돌의 산물임을 지시할 뿐이다. 반면, 들뢰즈에게 우 발성은 재현 체계에 의한 능력들의 일상적 실행을 끊을 수 있는 열쇠 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이나 의지는 재현 체계에 복속되어 있 기에 결코 이 체계를 극복하는 것일 수 없다. 재현을 넘어서려는 노력 역시 재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재현을 전복하는 초월적 실행은 재현 의 방식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존재와 비자발적으로 마주쳐 그 존재를 읽어내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46)
46) DR, 181-182(310-311).
이 첫 번째 차이로부터 두 번째 차이가 도출되는데, 문제의 감각 경 험에 따른 초월이 스피노자의 철학에선 이성의 지난한 노력의 결과로 설명되는 반면 들뢰즈의 철학에선 이성의 노력과 무관하게 단번에 일 어나는 것으로 설정된다는 사실이다.
스피노자에게 우발성은 장점이기 보단 단점이다 보니,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 노력은 슬픈 수동적 변용으로부터 기쁜 수동적 변용으로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기쁜 수동적 변용은 아직 이성을 소유하지 못한 단계이므로, 이 변용을 조직하려는 노력은 이성 자체의 노력은 아니다. 하지만 기 쁜 수동적 변용이 공통 개념을 발견하는 이성적 활동의 토대란 점에 서, 이 노력은 이성의 예비 단계에 속한다. 들뢰즈는 이를 가리켜 기쁜 수동적 변용이 이성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이어, 기쁜 수동적 변용으 로부터 우리가 원인인 능동적 변용으로, 다시 능동적 변용 내에서 더 상위의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 역시 우리의 노력을 요청하는데, 이것이 이성의 노력임은 물론이다. 이런 식으로 기쁜 수동적 변용의 형성에서 부터 공통 개념을 확보하여 3종 인식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은 이성 의 도야와 함께 간다. 이와 달리, 들뢰즈에게 기호와의 마주침은 이성 이 무화되는 사태로서 이성적 노력과 무관하다.
재현 체계에 복속된 이성적 사고는 그 체계를 초과하는 기호 앞에서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기호와의 마주침은 사유의 초월을 야기하지만, 이 초월은 사유의 자발적 결과가 아닌 강요와 폭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유의 수동적 자기 초월은 감성, 상상력, 기억이 자신의 배타적 대상을 읽어 내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을 딛고 일어나는데, 이 전 과정은 이성이 결 점을 순차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과 달리 단숨에 벌어진다.
세 번째 차이는 스피노자가 마음 능력들을 세분화하지 않는 것과 반 대로, 들뢰즈는 능력들의 본성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를 초월적 실행 과 직결시킨다는 점이다.
일례로,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1종 인식은 인 식의 일종이되 사유가 아니라 상상력의 소관이며, 그럼에도 이는 상상 력이라는 단어가 보통 환기시키는 의미와 달리 대상에 대한 부적합한 표상을 만드는 지각 작용을 지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들뢰즈의 철학 에서 능력들은 저마다 환원 불가능한 역할을 지니며, 이 환원 불가능 성은 각자의 배타적 대상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배타적 대상은 관례적 실행에선 경험 불가능한 것이기에 능력이 무력해지는 지점을 나타내는 데, 각 능력은 이처럼 실패의 국면이 다르다는 점에서 절대적 차이를 지닌다.
또한 배타적 대상은 능력의 한계 지점이라는 이 사실로 인해 능력이 관례적 실행을 깨고 초월적 실행을 하도록 강요하는 바, 능력 들의 절대적 차이가 각자의 역량의 증가 속에서 더욱 분명해지게 만든 다.
재현 체계의 병폐 중 하나는 공통 감각을 내세워 능력들의 이 권 리상의 이질성을 말소한다는 데 있다.47)
47) 능력들의 이질성에 대한 들뢰즈의 관점은 비미학에 나타난 바디우의 입장과 통하는 데가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진리의 상이한 형식들인 시와 수학은 서로 명명불가능자(l’innomable)가 달라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한 형식의 명명불가능 자란 그 형식이 표현하는 진리의 토대를 말한다. 각 형식은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하지만 그러한 진리의 토대 자체는 표현하지 못한다. 수학은 연역 적 추론이 가능한 정합적 논리 체계로서 ‘무모순성’에 기초하는데, 정작 하나의 공리가 무모순적임을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이 알려주기를, 어떤 공리든 ‘참이지 만 참임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적어도 한 개는 가지기 때문이다. 시는 덧없 이 사라지는 감각적 현전을 관념적인 형태로 영속시키는 영역으로서 ‘언어의 무한한 역량’에 기초하는데, 이 역량 자체를 시화할 수는 없다. 무모순성과 언 어의 무한한 역량 사이엔 아무런 접점이 없기에, 시와 수학은 자신이 무력해지 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저마다 독특성을 확보하여 절대적 차이에 놓인다. 그러나 들뢰즈와 바디우 사이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들뢰즈는 마음 능력이 제 한계를 넘어 초월적 실행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나, 바디우는 진리 형식이 명 명불가능자를 명명하려는 지속된 노력으로부터 그 역량을 확보한다고 보아, 명 명할 수 없는 신비 혹은 수수께끼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수수께 끼의 위치를 표시하는 일은 참의 역량을 완전히 무력한 실재로 만든다.”(Badiou (1998), Petit Manuel d’inesthétique, Seuil, 39(46), 41-47(49-57)).
네 번째 차이는 스피노자에게서와 달리 들뢰즈에게 사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며, 선한 본성이 아니라 오히려 악한 본성 을 지닌다는 점이다. 재현적 사유는 잘못된 초월론적 토대를 전제하는 것으로서, 비판과 반성이 부재하기에 사실상 사유가 아니다. 반면, 초 월적 사유는 그러한 전제들을 비운 후, 이념 혹은 우발점이라는 사유 의 진정한 초월론적 토대를 발견하여 이 토대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이다. 주어진 전제 없이 사유의 초월론적 토대 자체를 사유해내며 그 토대를 통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사유야말로 사유라는 단어에 걸맞은 사유이다.
이는 곧 사유가 이 같은 조건에서만 분만되는 것이 자, 확립된 가치들을 깨는 악한 것임을 시사한다. 다섯 번째 차이는 기쁜 수동적 변용을 통한 3종 인식으로의 이행이 반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달리, 기호와의 마주침을 통한 초월은 영원히 반복되어야 하는 과제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주의에서 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 및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3종 인식 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으로, 최고의 행복인 지복을 부여한다. 이는 신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신이 느끼는 대로 느끼는 경지이므 로, 더 이룰 것이 없다. 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에서 기호와의 마주침에 따른 초월, 즉 자신의 현재를 구성하는 습성과 규정을 모두 지워 새로 운 내용으로 채우는 전면적인 자기 창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으며 되풀이되는 사태이다.
새로 작성된 현재는 이전의 현재처럼 하나의 관 례로 고착화되어 무비판적으로 반복될 소지가 있기에 이에 안주할 수 없다.
들뢰즈에게 있어 주어진 역량의 최대치는 한 번에 실현되지 않 으며, 매번 갱신되는 한계 지점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갈수록 그 실현의 정도가 높아진다. 그는 이 거듭된 자기 초월 혹은 끝없는 변신 의 사태를 니체의 개념을 빌어 ‘영원회귀’라 부른다. 영원회귀는 근본적으로 재현 체계 안에서 토대로 간주되어 온 것인 근거(fondement)를 깨트리는 근거와해(effondement)이다.48)
“더욱이, 영 원회귀의 반복은 그 작동방식을 방해하는 모든 형상들을 파괴하며, 같 은 것, 일자, 동일한 것 및 유사한 것을 전제 삼아 구현되는 재현의 범 주들을 파괴한다.”49)
이 영구 혁명이 기호와의 마주침, 달리 말해 한 대 상의 개체화하는 차이를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재현 이하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차이의 감각적-운동성(sensorimotricité)을 배움으로써 우리 내부의 개체화하는 차이의 동일한 운동성 에 눈 뜨게 됨을 시사한다. 영원회귀란 기호의 개체화하는 차이와 만 나, 그와 공명하는 우리 내부의 개체화하는 차이의 운동에 자신을 내 맡기는 사태인 것이다. 재현 체계의 관념적-운동성(idéo-motricité)이 보 편적 규범을 내세워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과 반대로, 감각적-운동성은 차이화 속에서 다른 것을 반복한다. 개체화하는 차이는 바로 이 감각 적-운동성을 취하기에 차이나는 것들의 공명 속에서 새로운 차이가 계 속 분절되는 분화소이자, 어떤 동일성도 거부한 채 끝없이 변화하는 절대적 차이이다. 따라서 모방에 불과한 “추상적인 것의 거짓 운동”을 끝내고 개체화하는 차이가 벌이는 이 창조로서의 “실재적 운동”을 수 행하는 삶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늘 달라지는 원본 없는 허상일 수밖에 없다.50)
48) DR, 92(164).
49) DR, 165(282).
50) DR, 35-36(71-73).
이 다섯 측면은 기호와의 마주침이 재현에 대한 비판 정신으로 인해 기쁜 수동적 변용과 구분되는 지점들이다.
그러나 이는 핵심 특성들을 공유하는 한에서의 차이이므로, 기호와의 마주침을 둘러싼 담론은 기 쁜 수동적 변용에 대한 담론의 ‘전복’이기보다는 ‘심화’에 가깝다.
이러 한 심화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계승자이자 니체의 계승자로서, 스피 노자가 극복하지 못한 부분을 니체를 통해 극복하면서 실존적 삶에 대 한 스피노자의 혁명적 관점을 정교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스피노자 는 인간의 지복을 논하는 한편 이성의 가치를 믿은 근대 합리주의 철 학자지만, 들뢰즈는 이성과 같은 소위 인간주의적 가치를 폐기하고 인 간과 다른 종의 경계를 허무는 비인간성을 추구한 탈구조주의 철학자 이다.
그러나 이 심원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로부터 들뢰즈로 의 이행이 있으며, 그 이행의 중간에 니체가 위치하는 것이다. 세 철학자의 연속성이 실존적 삶에 대한 두 관점인 ‘존재의 일의성’ 및 ‘윤리적 가르침’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스피 노자는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가 위계 없이 일의적임을 직접 표명하진 않지만 분명 암시한다. 그의 철학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두 유형으로 설정되는 신과 양태는 동일하게 속성을 자신의 존재 형상으로 삼기 때 문이다.
다른 한편, 그는 보편적 격률로 여겨지던 성서의 도덕적 가르 침을 비판하고, 각자가 단지 자신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대상을 추구하 고 자신의 역량을 감소시키는 대상을 피해야 한다는 윤리적 가르침을 천명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으로부터 존재의 일의성을 주도적으로 발굴 해내어, 이를 니체의 영원회귀와 종합한다.
니체는 모든 존재자가 제 힘의 의지에 따라 영원회귀를 수행한다는 사실에서 존재의 의미가 같 음을 보는데, 들뢰즈는 계속 변신하면서 돌아오는 이 영원회귀로부터 개체화하는 차이라는 진정한 차이를 발견하여 만물이 하나같이 자신 의 개체화하는 차이에 따라 차이화하는 반복을 수행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 일의적이라 주장한다.
들뢰즈가 언급하듯, 존재의 일의성은 스피노자론에선 실체의 속성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기 에 여전히 실체 혹은 동일자 중심주의라는 한계를 지니나, 니체를 거 쳐 그에게로 오면서 모두가 차이화하는 반복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 방식을 가진다는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되므로 양태 혹은 차이 중심 으로 선회한다.51)
51) DR, 58-61(111-114).
니체와 들뢰즈의 철학에서 재정립된 이 일의적 존재 방식은 각 개체 가 자신의 역량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것으로서, 그 자체 스피노자 철 학의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이들의 재해석과 맞물린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그와 니체는 형이상학적 관점에 방점을 두는 철학자들로서, 잠 재태에 머무는 능동 역량을 점진적으로 현실화하여 주어진 역량 전체 를 온전히 능동 역량으로 채우는 것이 스피노자의 윤리적 가르침이라 고 읽어내는 것이다.
이 연구는 스피노자로부터 니체를 거쳐 들뢰즈에 게로 가면서 첨예해지는 이러한 연속성, 특히 윤리적 테제와 직결된 연속성이 기쁜 수동적 변용 및 기호와의 마주침을 둘러싼 담론에서 잘 드러난다고 보는 점에 그 특이성이 있다.
Ⅳ. 맺음말
이 연구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발굴해 낸 기쁜 수동적 변 용과 들뢰즈 철학의 기호와의 마주침을 상호적으로 살펴보면서, 후자 가 전자의 심화라는 논증을 전개하였다.
사실 기쁜 수동적 변용과 기 호와의 마주침은 친연성이 확연해 보임에도 이 둘을 직접 관련짓는 연 구를 찾기는 힘든데, 첫 번째 이유는 기호와의 마주침이 기쁜 수동적 변용과 달리 슬픔부터 야기하는 변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기쁜 수 동적 변용과 기호와의 마주침은 둘 다 능동적 기쁨으로 이어지는 수동 적 변용이나, 전자가 우리 신체와 외부 신체의 합치에서 오는 기쁨 속 에서 사유가 활성화되는 사태인 것과 반대로, 후자는 우리 신체와 기호의 충돌로 인한 슬픔 속에서 사유가 사유하도록 강요당하는 사태이 다.
기호는 기존 체계에선 읽히지 않기에 우리의 국부적 관계들을 파 괴하면서 슬픔과 고통부터 촉발하지만, 이 부정적 감정은 우리가 기호 를 읽어내는 수준으로 도약하면서 이를테면 기호와 훨씬 더 큰 변용 능 력을 지닌 합성체를 구성할 때 능동적 기쁨으로 바뀐다. 이처럼 기호와 의 마주침은 슬픔이 기쁨으로 전도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따라서 이 연구가 기호와의 마주침을 기쁜 수동적 변용을 통한 초월 에 대응시키는 것은, 정확히는 기쁜 수동적 변용에서 출발하여 공통 개념을 연속적으로 확보해 나가는 과정 중 ‘상충하는 신체와의 변용으 로부터 공통 개념을 형성함으로써 슬픔이 기쁨으로 전환되는 경우’에 대응시킨다는 의미이다. 기쁜 수동적 변용에서 시작된 일련의 과정에 있는 슬픈 수동적 변용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슬픈 수동적 변용 자체 는 독립적으론 능동성으로의 초월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들뢰 즈의 스피노자론에서 기호와의 마주침에 대응하는 슬픈 수동적 변용이 란 기쁜 수동적 변용으로부터 이어지는 흐름을 전제하며, 기쁜 수동적 변용이 가진 힘을 통해 능동적 초월로 도약하는 변용인 것이다.
이는 이 연구가 기호와의 마주침을 넓은 의미에서 기쁜 수동적 변용을 둘러 싼 사태에 대응시키는 이유이다. 기쁜 수동적 변용과 기호와의 마주침을 직접 관련짓는 연구가 드문 두 번째 이유는, 기호가 들뢰즈에겐 마음 능력의 초월적 실행을 야기 하는 긍정적인 것인 반면, 스피노자에겐 대상에 대한 부적합한 이미지 라는 부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스피노자에게 수동적 변용은 기 쁜 것이건 슬픈 것이건 간에 모두 기호로서, 기쁨을 양산하는 경우조 차 수동적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스피 노자 철학에서 기호는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진리 를 소유한다. 감각 경험의 산물인 기호는 우리 신체가 대상 자체에 의 해 변용된 결과이므로 대상의 본질을 (설명하거나 표현하진 못해도) 함축한다는 것이다(E2P35S).
들뢰즈는 바로 이를 토대로 기호가 적합 한 관념을 낳을 가능성을 지닌다고 해석하면서 기쁜 수동적 변용을 통한 능동적 변용으로의 이행을 주장한다.52)
52) SPE, 135(179-181). 서동욱은 들뢰즈가 후기 저서인 비평과 진단(Critique et Clinique)에 가서야 기호의 긍정적 측면 역시 분명히 함으로써 자신의 기호 개 념과 스피노자의 기호 개념 간의 대립을 해소한다고 말하는데(서동욱, 「들뢰즈의 마지막 스피노자주의 - 들뢰즈 철학의 변모와 종착점」(2002), 철학연구 57호, 239-243), 그렇지 않다. 들뢰즈는 이미 전기 저작인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서 부터 에티카에 나타난 기호의 긍정적 면모를 명시한다. 이 긍정성은 들뢰즈 의 기쁜 수동적 변용 개념의 핵심이다.
이러한 사실은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을 낳는 좋은 마주침이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우리의 발견-서로 합 성되는 공통 부분에 대한 발견-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 이 연구가 차이와 반복에 나타난 기호와의 마주침에 대응시키는 스피노자론의 기호는 기호 일반이나 기쁜 수동적 변용에 해당하는 기호 전체가 아 닌, 기호들 중에서도 우리의 발견으로 인해 능동성으로의 이행 가능성 이 ‘실현’될 때의 기호이다.
기호와의 마주침과 기쁜 수동적 변용을 상 관적으로 살펴보면서 지금까지 확인한 좋은 마주침이란 단순히 역량을 증가시키는 마주침이 아니라, 역량을 온전히 소유하고 활용하는 수준 으로 적법하게 증가시키는 마주침, 달리 말해 능동성으로의 초월을 낳 는 마주침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참고문헌
국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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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Good Encounter Prompting Action - Based on ‘a Joyful Passive Affection’ in Spinozism and ‘an Encounter with a Sign’ in Deleuze’s Philosophy -
Kim, Zoeun
This study starts from the viewpoint that ‘a joyful passive affection’ Deleuze independently conceptualizes from Spinoza’s philosophy is similar to ‘an encounter with a sign’ presented in Deleuze’s own philosophy. This is because both are sensory experiences which happen passively but guide us to active self-transcendence. Accordingly, I confirm that a joyful passive affection and an encounter with a sign share main characteristics. Also, by examining their internal differences within these similarities, I verify that an encounter with a sign is not a mere repetition of a joyful passive affection but deepening of it. Hereby, this study sheds light on how a good encounter is contextualized in the two philosophers’ thought. Furthermore, this study shows the fact that Deleuze, a Spinoza’s successor but also a philosopher who brings to the fore the criticism of the representational system unlike Spinoza, elaborates Spinoza’s revolutionary perspective on existence.
Subject Class: Empiricism, Western Contemporary Philosophy
Keywords: Affection, Power of Action, Affect, Sign, Superior Exercise of Faculties
서울대 철학사상 제91호 2024년 2월
투 고 일: 2024. 01. 17 심사완료일: 2024. 02. 21 게재확정일: 2024.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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