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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초기 유가의 자유 지향적 경향성과 성선설 /손태호.부산대

[한글 요약]

초기 유가의 성선설은 공자 당시로부터 그 사상적 원천을 이어받고 그 일관된 특색도 가지는 사맹학파의 특유한 사상으로 생각되는데, 맹자는 맹자에서 사맹학파의 계승자로 서 충실히 성선설적 신념을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련된 최근의 연구 결 과물들을 보면, 성선설은 사맹학파의 집단적 연구 업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학자들이 상당 히 많으며, 성선설이 맹자의 창작이라기보다는 공맹지간(孔孟之間 :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서 맹자가 살았던 시대까지의 기간)에 서서히 익어간 사상적 성과물이라는 의견이 득세하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추세에 의해, 맹자 이전의 상당 기간에 걸쳐서 성선설 창출 의 점진적인 과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보강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초기 유가의 성선설 창출 과정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켜 보면, 소위 공맹지간의 시대 적 특수성에도 주목하게 된다.

초기 유가들의 자유 지향적 경향을 엿보게 해주는 기존의 문헌은 논어, 맹자, 대학 , 중용 등이 가장 기초적인 문헌들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에 곽점초간(郭店楚簡)과 상 박초간(上博楚簡) 등 출토 유물들이 정리되고, 그것들의 연구 과정에서, 자유 지향성과 결 부된 성선설의 점차적인 창출에 대해서 이론적 보충이 가능한 문헌적 근거들이 추가된 바 있다.

맹자는 이러한 ‘공맹지간’의 성선설의 계승자로 여겨지지만, 맹자의 성선설에 대한 설명 에는 거기서 더 나아간 면도 있다.

즉, 공자의 발언을 인용한 ‘민중 기원설’에 입각하여, 상 당히 근원적인 면모가 추가되어 있는 것과 함께, 성선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하 고 근원적인 성선(性善)의 존재 의의를 탐구한 흔적도 보인다.

특히, 시경의 내용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민중의 성향 속에서 보편적 성선(性善)의 근원성을 탐구한 작업의 흔적으 로 인해서, 결국 “성선설은 백성(民)에서 기원했다”는 관점도 가능하다.

성선설의 의의를 파헤쳐보면 ‘자유 지향성’과 어느 정도 맥락이 닿는다는 생각을 자연스 럽게 도출할 수 있다.

고대 사회라는 한계 속에서도 ‘성선’을 전제하면, 개인과 집단의 자유 가 허여될 수 있었으리라는 상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선설은 초기 유가 들이 당시의 군주들에게, 신하들과 백성들의 자유를 어느 정도는 허여하게 유도하기 위한 사상적 전제 조건으로서의 인간관으로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포 괄성 및 근원성과 그 기초의 견고성으로 인해 초기 유가들과 맹자가 개념정리해 놓은 성선 설은 후대의 유가사상의 중추 개념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성선설은, * 부산대학교 철학과 강사(ancra88@naver.com) 46 손 태 호 유가사상의 의의를 환기시키는 중심 개념으로서 현대는 물론 미래에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주제분야 : 중국철학 주 제 어 : 공자, 공맹지간(孔孟之間), 정감, 맹자, 성선설

Ⅰ. 머리말

유가의 성선설은 일반적으로 맹자에 의해서 창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 나 초기 유가에 있어서 성선설의 비중으로 볼 때, 어느 학자 개인에 의해서 창안 되었기보다는 초기 유가 당시의 일부 학파에 의해 집단적으로 연구되고 제안되었 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인다.

즉, 사맹학파와 성선설 간에는 사상적 정합성이 있으 며, 그 사상적 정합성이 수미일관되게 보다 광범위한 문헌들의 뒷받침을 받는 특 징이 있고, 아울러서 민중 지향성까지 포괄했던 특징도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전체를 일별해 볼 때, 지배계층의 확고한 지지를 받은 학파는 사 실상 유가가 아니라 법가였다. 험난했던 그 시대를 통하여 지속가능했던 학문 유 파로 유가보다는 법가를 들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법가적인 학문 성향은 군주의 편에 서서 백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것이었으므로 필연적으로 어 용 학문적인 성향을 띄었으며, 그것이 군주들에 의해 채택되었을 때 그것을 주창 한 학자에 대한 보상도 매우 컸고, 더구나 그 효용이 입증되었을 경우, 대를 이어 서 그 국가의 군주들에게 지속적으로 채택되어서, 그 생명력을 지속시키기에도 매우 유리했다고 보인다.

실제로 공자보다 150년 이상 전의 사람이었던 관중(管 仲)의 발언 내용이 관자의 일부 법가적인 내용에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을 정 도이며,1) 전국시대의 말기 학자에 속했던 한비자와 이사(李斯)도 대표적인 법가 로 유명했었는데, 관중과 이사(李斯) 간의 시간적 거리가 거의 500년 가까이 되며, 그 사이에도 여러 제후국에서 수 많은 법가들이 고관대작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1) 劉蔚華․苗潤田, 稷下哲學, 곽신환 역, 철학과 현실사, 1995. pp457~467

춘추전국시대의 법가 내에도 제법가(齊法家)와 진법가(晉法家) 등 여러 종류의 파벌이 있었지만 주목되는 것은, 이들 법가들의 공통적인 인간에 대한 관점은 대 체로 성악설이었다는 점이다.

성악설을 전제한 이후의 이론구성 하에서는 백성을 강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교정과 계도라는 미명으로 보다 쉽게 정당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법가들은 전국시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득세한 것으로 보이는 데, 이러한 시대 속에서 전국시대의 여러 학파의 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성 악설이나 성선악 혼재설 등이 대종을 이루었다고 보인다.

더구나 전국시대 말기 에는 도가와 법가가 이론적으로 결합한 황로학이 극성하였다. 이런 시대적 분위 기는 유가에도 영향을 미쳐서, 법가적 혹은 황로학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유가 가 전국 후기에 생겨났는데, 그 대표자가 바로 순자(荀子)와 그 제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이유는, 순자의 개인적 의견이나 성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순자가 몸담았던 직하학파의 법가적, 황로학적 학문 추세에 영향을 받 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이러한 황로학적 경향성은 순자의 제자였던 한비자의 저작인 한비자에서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비자의 ’해로편 ‘과 ’유로편‘은 매우 이른 시기의 노자 해석에 속하는 것이다.

이같이 그 성세(成勢)에 있어서 긴 지속성을 가졌던 법가에 비해 초기 유가의 특징적인 아이디어가 각광받던 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매우 단속적(斷續的)이었 다.

맹자, ‘진심하(盡心下)’의 말미에 그런 정황을 그려 놓은 내용이 있다.

즉, “500년 주기로 유가적 이상(理想) 정치를 행하는 인물 또는 문명이 등장했고, 공 자도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인데, 그런 공자가, 맹자 자신과 시대적으로 100여 년 밖에 차이나지 않을뿐더러 지역적으로 가까운데도, (맹자 주변에) 공자의 도를 아 는 사람이 없다”라고 맹자가 푸념한 내용이 있는데, 이를 두고 보자면, 유가가 공 자 말년을 시작점으로 해서 불과 수십 년의 짧은 기간만 현학(顯學)이었지, 그 이 후에는 현학(顯學)의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점도 있는 것이 다.

이처럼 유가의 세력이 잔멸해 가는 위기적 상황을 절실히 느꼈던 맹자가, 성 선설을 보다 분명하게 주창함으로써 유가의 자유 지향적 사상의 명맥을 잇기를 꾀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맹자는 법가의 계도주의적 군권중심사상에 대비되는, 신권(臣權)과 민권 확장을 위한 사상적 투쟁의 전개를 통해 유가적 자유 확충을 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있어서 성선설을 가장 적극적,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계승한 학파로는 사맹학파가 대표적이었으며, 맹자는 그 최고의 사상적 수혜자이자 계승 자였다고 보인다.

그래서 중국 고대의 성선설 창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켜서 볼 때, 소위 공맹지간(孔孟之間 : 공자와 맹자 시대 사이의 기 간)의 시대적 특성과 함께, 초기 유가들의 활동 무대로서의 지역적 특수성에도 주 목하게 되는 것이다.

Ⅱ. 초기 유가들의 삶과 가치관의 특성

공자 이후 최초로 유가를 능가할만한 대규모 학단을 만든 사람으로 묵자(墨子) 가 꼽히는데, 통상적으로 묵자는 공자의 사망 즈음에 태어난 것으로 중국철학사 가들은 판단하고 있다.2)

2) 馮友蘭의 中國哲學史新編 (上), 侯外廬 등의 中国思想通史Ⅰ, 勞思光의 新编中国哲学史(1 卷), 張岱年의 中國哲學大綱, 任继愈主编 修订本 中国哲学史, 李泽厚의 中国古代思想史论 등에서 묵자의 생존 연대를 찾아보면, 한결같이 묵자를 공자와 그 생존연대가 겹치지 않는, 후대의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의견을 고려한다면, 묵가가 득세하기 전에 유가의 독주가 수십 년은 끌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설혹 사기(史記) ,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기록된 바3)에 착안하여, 묵자의 시대를 최대 한 이른 시기로 보아서 묵자가 공자와 동시대인이라고 본다고 하더라도, 묵자 문 도(門徒)와 공자 문도가 직접 경쟁 관계에 직면해 있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양 자의 학문 근거지는 서로 달랐다고 볼 수 있는 연구 결과가 있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의 연구 중, 왕쯔엉웬(王增文)은 ‘묵자가 송인임을 고찰하여 밝힌다(墨子宋人 考辨)’라는 논문에서 묵자가 송(宋)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했고,4) 뚜안쯔청․시에 쨔오밍(段自成․谢照明)은 ‘묵자가 송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재론함(再论墨子宋国人说之不确)’이라는 논문에서 묵자가 초나라의 노양(鲁阳) 사람이라고 주장했다.5)

이들의 의견을 참조하면, 설령 묵자가 공자와 동시대인이라고 본다고 하더라 도, 적어도 노나라 안에서는 공자 학단 위주의 학문적 분위기가 상당 기간 계속되 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공자보다 백여 년 후의 사람인 맹자도 노 나라와 인접한 추(鄒)나라 출신으로, 사실상 노나라 문화권의 인물이었던 것을 감 안하면, 사맹학파의 생활권역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유가들의 ‘학문 독점’의 시기가 노나라 내에서는 상 당 기간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위 공맹지간(孔孟之間)의 시대에 공문(孔門)으로 천하의 다양한 지역의 제자 들이 많이 모여든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당 시는 고대의 제도가 해체되고 사회적으로 유리된 자유민이 많은 시대였던 것이 다.6)

말이 자유민이지 그들은 실상 생활 근거지를 잃은 유랑민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노나라에서 그런 ‘자유민’들이 학문을 생계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고, 학문의 직업화도 진척되었다고 보인다.7)

3) 史記, ‘孟子荀卿列傳’ : 蓋墨翟,宋之大夫,善守御,為節用。或曰并孔子時,或曰在其後。

4) 王增文, “墨子宋人考辨”, 史学月刊, 一九九六年 第五期, pp113~114

5) 段自成․谢照明, “再论墨子宋国人说之不确”, 平顶山师专学报(社会科学), 第13卷 第1期, 1998年 2月, pp76~82

6) 侯外廬 等, 中國思想通史 第1卷, 人民出版社, 1995, p138

7) 侯外廬 等, 中國思想通史 第1卷, 人民出版社, 1995, p140

그 당시의 상황들을 구체적 으로 재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남겨진 기록들을 더듬어 볼 때, 당시의 유가들 은 예악(禮樂)에 관련된 일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공자의 지휘하에 기본적 교재 가 되었던 육경(六經)이 점차 표준적인 교재로 형성되고, 그것이 전문적인 제작자 들에 의해서 책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상당한 규모의 강학(講學)과 출판 사 업도 창출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유가 학자들 중 출세한 사람들은 경상(卿相)의 지위에까지 올랐다는 기 록이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사실상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은 은둔하거나 밑바닥 생활을 했던 하류 계층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 제자들 중 은 둔자들조차도 기본적으로 최소한 생계는 걱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 점이 있 다.

초야에 묻힌 은둔자들은 물론 농경이나 목축에 종사했겠지만, 시정에 머무르 며 미관말직에 종사하거나 심지어 실업(失業)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도, 필요시에 는 예악(禮樂)에 대한 강학(講學)이나 서적의 출판, 또는 그것들에 관련되는 전문 적인 필사가(筆寫家) 내지는 이에 관련된 직업적 수단을 가진 사람들로 변모하여, 생계를 위한 대책 마련이 가능했으리라고 보인다.

특히 당시의 출판 사업은 죽간 이나 목간 등에 일일이 베껴 써야 했기에 매우 많은 노력과 물자가 들어가고, 서 적 한 권이 그만큼 양적으로도 많고, 그 가치도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8)

그리고 육경(六經)이 전국시대 중기 이전에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곽점초간 의 <육덕(六德)>과 <어총(語叢)>에 언급된 데서 확인되기도 한다.9)

공문(孔門)에서의 본격적인 대규모의 예악(禮樂)에 대한 강학(講學)과 출판 사 업은 공자 말년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경을 내용적으로 겨우 확정 한 데 그쳤을 뿐, 출판 사업 등을 시작하기에는 공자의 천하 철환 후 노나라에서 안정을 찾았던 기간이 너무 짧았다고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제자를 데 리고 그들을 건사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방법을 창출한 것 중에 하나가 출판 사업 등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공자 휘하에 수많은 제자가 모인 이유를 개개인별로 따 져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다수의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급한 문제는 빈곤 탈출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한 설명을 한 논문이 천창펑(陳 長峰)의 “공가학파적경제생활(孔家學派的經濟生活)”이다.

천창펑(陳長峰)은 이 논 문에서 빈곤에서의 탈피야말로 공자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학문을 익힌 제일(第 一)의 직접적 동기였다고 진단한 바도 있다.10)

공자가 유교무류(有敎無類)를 외치고 계층에 개의치 않고 모든 사람을 교육시 킨 결과, 사실상 그 휘하에서 학문을 익힌 제자들 중 평민 이하의 출신들이 많았 을 것이다.11)

8) 이는 최근의 출토문헌, 즉 郭店楚簡, 上博簡, 清華簡、北大簡 등으로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9) 荊州市博物館 편저, 최남규 역주, 郭店楚墓竹簡, 學古房, 2016, 451쪽과 477쪽에 관련 내용이 있음. 10) 陳長峰, 濟寧醫學院圖書館 山東 日照, “孔家學派的經濟生活”, 黑龍江史志, 2009.21(總 第 214 期), pp17~20

11) 徐復觀, 中國人性論史(先秦篇), 上海三聯書店, 2001, pp57~67

현대 중국의 역사가들의 통상적인 시대 평가를 염두에 두고 보면, 노예사회적 습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안정을 찾기 어려웠던12) 춘추(春秋) 말, 전국(戰國) 초의 대혼란 시대에 공자 학단은 정치(精緻)한 인의(仁義)와 예악 (禮樂)의 문화를 창출했을 뿐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서 공자와 그 제자들은 중 국 문명에서 최초로 조직적 연대 수단을 가진 자유민들로서 독특한 정치관을 발 전시켜 나갔다.13)

어느 정도 자유를 구가하기 시작한 그들은 자유의 윤리적 존립 근거임과 동시에 정치적 존립근거로서의 ‘성선설’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을 통 해서도 추가적으로 자유를 조금씩 더 확보해 나갔으리라 여겨진다.

그들은 법가 들이 전통적으로 지향한 군권(君權) 확충과 국가 역량의 증진이라는 미명 하에서 의 백성의 자유 억압을 당연시하는 어용 학문적인 경향성을 따르기보다는, 국가 적 정의 실현과 서민 보호와 자유 확보를 우선시했다. 공자 학단의 민본주의의 실천 강령은 바로 민중을 존중하고, 민중을 믿으며, 민중에 관대하고, 민중을 부유하게 하고, 민중을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한다.14)

12) 馮友蘭, 中國哲學史新編, 人民出版社, 1998, pp100~102

13) 趙志堅, 李棟柱, “試論孔子及孔門弟子所構成的社會亞文化群”, 管子學刊, 1997年 第4期, pp63~64

14) 唐代興, 唐梵淩, “孔子民本思想的返本開新”, 『哲學研究』, 2017年 第11期, pp63~66

더 구나, 맹자에 구체적으로 표현된, 정전제를 통한 서민 보호를 우선적 국시로 하 자는 수많은 주장들은 맹자의 정치관의 경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한 경 향성은 공자 학단에 속한 학자들의 공통된 특성이기도 했다. 이런 경향성을 뒷받 침하는 기존의 문헌은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이었으나, 공맹지간(孔孟 之間)의 시대적 틈을 메꾸기에는 부족한 점도 있었다.

Ⅲ. 공맹지간(孔孟之間)의 성선설

최근에 곽점초간(郭店楚簡)과 상박초간(上博楚簡) 등 출토 유물이 발굴되고, 그 유물의 연구 과정에서, 성선설의 점차적인 창출에 대해서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 론적 보충이 가능한 문헌적 근거들도 축적된 바 있다.

곽점초간(郭店楚簡)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평가로는 중국학자 팡포우(龐樸)의 논문 “공맹지간(孔孟之間)” 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15)

15) 龐樸, 「孔孟之間-郭店楚簡的思想史地位」, 中國社會科學, 1998年第5期, pp88~95

노나라를 중심으로 존립했던 공자 학단의 많은 제자들은 공자 사후(死後), 당 시의 다양한 제후국들로 흩어져 갔다는 정황을 논어를 비롯한 문헌들에서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초나라 지역은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 않는 남방의 ‘프론티어’ 였다고 생각되는 점이 많다. 당시 초나라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경제 개발의 여유가 많았을 것이며, 학자들이 생계를 이어가기에도 유리한 지역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풍요와 여유가 반영되어 값비싼 죽간을 대량으로 묘지에 부 장품으로 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초간(楚簡)들에 공맹지간(孔孟之 間)의 아이디어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측이 될 것이 다.

팡포우(龐樸)는 “공맹지간(孔孟之間)”에서 곽점초간(郭店楚簡) 중 유가 관련 문 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내가 생각하기에는 곽점초간(郭店楚簡) 중의 유가 경전 들은 동일한 사맹(思孟) 체계에 속하며, 문체상의 상호 간 차이로 보아서 한 사람이 일시에 작성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성서연대(成書年代)는 응당 자사(약 B.C.483~402) 와 맹자(약 B.C.380~300)의 연대에 해당하며, 최소한, 맹자가 작성되기 전에 존재했 던 것으로 보인다.16)

‘공맹지간(孔孟之間)’의 문헌이 많지 않기 때문에, 팡포우(龐樸)의 곽점초간(郭 店楚簡)의 성서연대(成書年代)에 대한 견해를 신뢰할 수 있다면, 곽점초간(郭店楚 簡) 중 유가 관련 문헌들은 맹자 이전의 인성론(人性論)에 대한 매우 귀한 자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곽점초간(郭店楚簡) 등에 대한 해석의 엄밀성을 위한 자구해석에 대한 정밀한 논의는 보다 전문적인 학자들의 소임으로 생각되며, 그 성과에 많은 기대도 걸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필요한 것은 대략적이며 포괄적인 내용이라 생각하였 다.

그래서 포괄적인 내용만 파악할 수 있으면 이 논문의 기본적인 논의의 방향성 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서, ‘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의 문서들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곽점초간(郭店楚簡)의 문헌 중에서 성자명출(性自命出)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공맹지간(孔孟之間)의 인성론(人性論)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기쁨, 노함, 슬픔, 비통함 등의 기색이 성(性)이다.

그 바깥으로 표현함에 의하여 인물(人物)과 동물(動物) 등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性)은 소명(召命)으로부터 생성 된 것이고, 소명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것이다.17)

16) 庞朴, 「孔孟之间-郭店楚简的思想史地位」“”, 中国社会科学, 1998年第5期, pp90.

17)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維基 -> 郭店楚墓竹簡 -> 性自命出, --- 喜怒哀悲之氣,性也。及 其見於外,則物取之也。性自命出,命自天降 ---

위에서의 성(性)에 대한 설명은 맹자가 성선설을 펴면서 말하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즉 오늘날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정(情)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을 성(性)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 사용상의 특징은 곽점초간(郭店楚 簡)의 문헌 중의 하나인 어총(語叢)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性 : 자연스런 인간성)으로부터 정(情)이 생기고, 정(情)으로부터 예(禮)가 생기 고, 예(禮)로부터 엄(嚴)함이 생기고, 엄(嚴)함으로부터 공경함이 생기고, 공경함으로 부터 인망(人望)이 생기고, 인망(人望)으로부터 치욕이 생기고, 치욕으로부터 한(恨)함 이 생기고, 한(恨)함으로부터 염치가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아껴줌이 생기고, 아껴줌으로부터 친함이 생기고, 친함으로부터 충심이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욕망이 생기고, 욕망으로부터 도모(圖謀)함이 생기고, 도모(圖謀)함 으로부터 배반함이 생기고, 배반함으로부터 다툼이 생기고, 다툼으로부터 친속(親屬 : 친속의 의미, 중요성)이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지혜가 생기고, 지혜로부터 왕성함이 생기고, 왕성함으로부터 기 꺼움이 생기고, 기꺼움으로부터 좋아함이 생기고, 좋아함으로부터 좇음이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자애가 생기고, 자애로부터 편안함이 생기며, 편안함으로부터 터 놓고 지냄(방자함)이 생기고, 터놓고 지냄(방자함)으로부터 포용이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싫어함이 생기고, 싫어함으로부터 성냄이 생기고, 성냄으로부터 (억지로) 견딤이 생기고, 견딤으로부터 독기가 생기고, 독기로부터 해침이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기쁨이 생기고, 기쁨으로부터 풍류가 생기고, 풍류로부터 비애가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원망이 생기고, 원망으로부터 우수(憂愁)가 생기고, 우수로부터 슬 픔이 생긴다. 성(性)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으로부터 경계심이 생기며, 경계심으로부 터 망(望)보는 일이 생긴다.18)

18)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維基 -> 郭店楚墓竹簡 -> 語叢(二), --- 情生於性,禮生於情,嚴 生於禮,敬生於嚴,望生於敬,恥生於望,悡生於恥,廉生於悡。愛生於性,親生於愛,忠生於 親。欲生於性,慮生於欲,倍生於慮,爭生於倍,黨生於爭。智生於性,卯生於智,悅生於卯, 好生於悅,從生於好。子生於性,易生於子,肆生於易,容生於肆。惡生於性,怒生於惡,勝生 於怒,惎生於勝,賊生於惎。喜生於性,樂生於喜,悲生於樂。慍生於性,憂生於慍,哀生於 憂。懼生於性,監生於懼,望生於監。

여기서도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은, 인간의 갖가지 종류의 감정 상태가 성(性)에 서 비롯된 것이라는 기술(記述)이다. 그리고, 이 중에는 예기 ‘예운편(禮運篇)’에 등장하는 인정(人情)으로서의 칠정(七情), 즉,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또한, 위의 인용문에서는 맹자의 사단 론(四端論)에서 보이는 ‘도덕성 우선주의’가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았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유학자들의 기성관념과는 판이한 새로운 자료의 해석 을 위해서는, 관련 분야 학자의 혜안을 필요로 하는데, 다행히 이런 학자로 팡포 우(庞朴)를 들 수 있는 것이다.

즉, 곽점초간(郭店楚簡)의 연구성과를 이용하고 해 석하여 성(性)과 정(情)의 개념 정리를 시도하고, 그 혼동의 문제를 해결한 탁견을 내놓은 학자가 바로 팡포우(庞朴)라고 생각된다.

그 한 예로써, 그의 논문인 “孔 孟之间(공맹지간)-郭店楚简的思想史地位(곽점초간적사상사지위)” 중에서 곽점초 간(郭店楚簡)의 성자명출(性自命出)의 인용을 포함한, 팡포우(庞朴)의 견해 표 명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겠다.

성자명출(性自命出) 중에 이러한 설명이 있다 : --- 무릇 인정이 가히 기뻐할 만 한 것이 있다. 진실로 인정으로 인한 일이면, 비록 과오가 있어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 인정으로 행한 것이 아니면, 비록 어려운 일을 해내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진실로 그 인정이 있으면, 비록 실행 전이라도 사람들이 신뢰할 것이다. 말하지 않아 도 믿는 것은 아름다운 인정이 있기 때문이다. 가르치지 않아도 백성들이 항상(恒常) 된 것은 그 인간성이 선하기 때문이다.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면되는 것은 복 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형벌을 가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마음 속에 두려워함이 있기 때문이다. 천하지만 백성들이 귀하게 여긴다면, 덕이 있는 자이다. 가난한데도 백성들이 모인다면, 도가 있는 자이다. --- 정(情)의 가치가 이토록 고양되고, 정(情)의 영역이 이토록 광범위하게 도달한 경 우는 정말로 매우 보기 드문 것이다. 특별히, 덕이 있음과 도가 있음은, 이 글 속에서 의 경우에는 유정(有情)으로 모두 끌려오는 것으로 당연히 간주되고 있다. 즉, 유정 (有情)의 어떤 종류의 경지로 당연히 간주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유정주의의 풍미 는 우리들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 이는 즉, 진정성(眞情性)을 드러 내는 것이 바로 유가 정신의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솔성(率性)이라는 것이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라는 표현은 중용 의 시작 부분의 두 번째 구절인데, 대개 이 구절은 응당 초간(楚简)의 사상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비로소 요령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19)

19) 庞朴, 「孔孟之间-郭店楚简的思想史地位」, 中国社会科学, 1998年第5期, pp94,

 

여기서 팡포우가 설명한 내용은 획기적인 부분이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 道)”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상당한 학술적 공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팡포우의 위의 설명, 즉 ‘덕이 있음과 도가 있음’과 ‘어떤 종 류의 유정주의의 풍미’의 관계설정, 그리고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솔성 (率性)’이라는 표현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정제일주의(人情第一主義)’라 볼 수 있으며, 여기서 말한 사람들이 지극히 신뢰하는 인정(人情)을 ‘선량한 인간성 내 지는 착한 마음씨’라고 볼 때, 이는 맹자의 시대 이전의 유가들의 성선설에 대한 상당히 선명한 제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련된 문헌들을 살펴보자면, 사실상 전통적 경학자들의 중용의 첫 머리의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에 대한 설명은 미진한 데가 있다.

예를 들자면, 예기정의(禮記正義)나 사서집주(四書集注) 등의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이 ‘인정제일주의(人情第一主義)’가 결여되어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에 대한 예기정의(禮記正義)에서의 공영달(孔穎達) 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오직 사람의 자연적 정감의 생성에서 강유와 호오가 있어서, 혹자는 인(仁)하고 혹 자는 의(義)하며 혹자는 예(禮)하고 혹자는 지(知)하며 혹자는 신(信)하다. 이는 천성 에 의한 자연으로, 그래서 이를 ‘성(性)이라고 설명한다’라고 일컫는다. ‘솔성지 위도(率性之謂道)’의 솔(率)이란 좇는다는 뜻이다. 도는 물(物)에 통한다는 것의 명 칭이다. 성(性)을 좇는 것에 의거함에 감응하여 행하여, 위월(違越)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니, 이를 도라고 한다. 인(仁)에 감응하면 인을 행하며, 의(義)에 감응하면 의를 행하는 등의 종류로서, 그 평상적인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도리에 합치하여 통달 함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이다.20)

20) 『禮記正義』, ‘卷五十二中庸第三十一’의 疏 : 但人自然感生,有剛柔好惡,或仁、或義、或 禮、或知、或信,是天性自然,故云「謂之性」。率,循也;道者,通物之名。言依循性之所感而 行,不令違越,是之曰「道」。感仁行仁,感義行義之屬,不失其常,合於道理,使得通達,是 「率性之謂道」。

공영달의 이 설명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을 한 사 람의 인격자에 구현된 총체적 인격 요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인(仁人), 의인(義 人), 예인(禮人), 지인(智人), 신인(信人)으로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의 특징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성에 따라 인성을 나누어 본 것은, 의미 가 없는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본래적 성선설을 흐리는 면이 있는 것은 사 실이다.

그리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注)에서의 주희(朱 熹)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성(性)은 바로 리(理)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써 만물을 화생시키고 기(氣)로써 형체를 주고, 리(理)도 역시 품부하였으니 마치 명령한 것 같다. 인간과 동물의 삶이 이에서 연유하여, 각기 품부된 리(理)를 얻었으니, 그래서 건순오상지덕(健順五常之德 : 음양과 인의예지신)을 소위 성이라 하는 것이다. 솔(率)이란 좇는다는 뜻이다. 도 는 길이라는 뜻에 가깝다. 사람과 동물들이 각기 그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좇는다는 것은 바로 그 일용의 일과 물건과의 접촉 속에서 각기 그 당연히 가야 할 길을 좇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이는 즉, 소위 도라고 하는 것이다.21)

주희(朱熹)는 성(性)을 건순오상지덕(健順五常之德 : 음양과 인의예지신)이라고 설명하여 성선설의 개념을 발전적으로 사용하고는 있으나, 아쉬운 점은 성선설 자체를 논리적으로 경직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있고, 이는 후세의 성리학자들의 불요불급한 논쟁들의 원천이 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맹자의 간이직재(簡易直裁) 한 성선설을 상당히 변형시킨 점도 있다.

위의 두 인용문에 보이는 공영달(孔穎達)와 주희(朱熹)의 “솔성지위도(率性之 謂道)”에 대한 설명은 각기 차이는 있지만, 인성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 치중한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인위적인 인성의 구조에 경도되어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공영달(孔穎達)와 주희(朱熹)의 “솔성지위도(率性之 謂道)”에 대한 설명에는, 팡포우(庞朴)가 제시한 성자명출(性自命出)에 보이는 ‘인정상의 기쁨’과 ‘아름다운 인정’과 ‘인간성의 선함’ 등의 요소가 성(性)의 기초 적 요소라는 성선설적 개념이 상당히 흐려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솔성(率性)’이란 판단은 초기 유가와 초기 도가 의 사상적 합치점도 보여주는 원형적인 성론(性論)에 대한 탁견이라 생각된다.

그 리고 여기서 원형적인 성론(性論)에 대해 부연하자면, 이는 사실상 초기 유가와 초기 도가는 구분이 쉽지 않은,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었다는 하나의 단서로도 여 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초기 유가와 초기 도가의 문헌이 함께 교재로 사용된 사 실은 곽점초간(郭店楚簡)에 노자(老子)와 태일생수(太一生水)가 유가 문헌과 함께 섞여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사실도 기실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한, 곽점초간(郭店楚簡) 노자(老子)의 내용은 다른 학파와 대립하는 사상, 특 히 유가(儒家)에 대한 적대의식이 없었으며, 그런 점에서 반유가적(反儒家的) 비 판의식이 나타나 있는 현재 통행본(왕필본) 노자는, 백가쟁명의 전국시대 이후 에 원본 노자를 가필, 첨삭하거나, 혹은 주요 개념어들을 바꾼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는 평가를 내놓은 학자들도 있다.22)

21) 朱熹, 四書章句集注, ‘中庸章句’ : 性,即理也。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氣以成形,而理 亦賦焉,猶命令也。於是人物之生,因各得其所賦之理,以為健順五常之德,所謂性也。率,循 也。道,猶路也。人物各循其性之自然,則其日用事物之間,莫不各有當行之路,是則所謂道 也。

22) 陳鼓應, 「從郭店簡本看《老子》尚仁及守中思想」, 道家文化研究 第17輯 pp69-70.

한편, 황희경은 곽점초간의 유가 문헌을 사맹학파의 저작으로 보는 데는 한계 가 있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폈다.

육덕(六德)편에 보이는 “인내의외(仁內義外)”설과 궁달이시(窮達以時)에 보이는 천인지분(天人之分)의 주장이 인의내재설을 주장한 맹자의 주장과 명백하게 배치되 며, 궁달이시에 보이는 천인지분(天人之分)의 사상과 중용에 나오는 “대덕은 반드시 천명을 받는다”는 주장과 서로 부합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 곽점 초간의 사상 사적 의의는 중대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맹학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송 대 유학이 유가의 본류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것은 아니 다.23)

23) 황희경, ”곽점 출토 유가문헌의 사상사적 의의와 그 한계“, 『시대와 철학』, 2007 제18권 3호 pp219~242.

황희경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사맹학파를 도통론의 주체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의 ‘공맹지간의 정통’이란 맥락이 존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송대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일관된 도통은 없었으며, 그래서 도통론은 허구에 가 깝다고 주장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황희경이 위의 인용문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엄밀한 의미에서 상호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같은 파로 볼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무리한 주장 이다.

실제로 펼쳐진 사상사를 관측할 때, 같은 학파 내의 각 개인 간에도 심각한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각 개인의 개성이나 시대 상황에 따른 의견 차이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달이시’의 천인지분(天人之分) 사상과 맹자의 사상이 크게 다르지 않은 예로서, 맹자의 다음과 같은 천인지분(天人之分)의 사상적 발언을 들 수 있다.

맹자 왈(曰 : 말하기를),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알 것이다. 그 성(性) 을 알면 하늘을 알 것이다. 그 마음을 존속하고 그 성(性)을 기르면, 하늘을 섬기는 바가 되는 것이다. 수명(壽命)에 상관없이 몸을 닦아서 대비하는 것이 입명(立命)하는 것이다.” 맹자 왈, “명(命)이 아닌 것이 없으니, 유순하게 그 바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명(命)을 아는 자는 담벼락 밑(巖牆之下)에 서지 않는다. 그 도(道)를 다하고 죽는 것이 정명(正命)이다. 질곡(桎梏)에 묶여서 죽는 것은 정명(正命)이 아니다.” 맹자 왈,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 것은 바로 구하면 얻는 데 유익한 것이며, 구 하는 것이 나에게 매인 것이다. 구하는 데는 도(道)가 있고, 얻는데 운명이 있는 것(운 명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구하여도 얻는 데 무익하고, 구하는 것이 밖에 있 기 때문이다.”

맹자 왈, “만물이 모두 나에게 구비되어 있다. 스스로 반성하여 성실하면, 즐거움 이 그보다 큰 일이 없을 것이요, 서(恕)를 힘써서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것이 이에 서 더 가까운 것이 없을 것이다.”24)

24) <孟子>, ‘盡心上’ :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 事天也. 殀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孟子曰, “莫非命也, 順受其正, 是故知命者不立 乎巖牆之下. 盡其道而死者, 正命也, 桎梏死者, 非正命也.” 孟子曰, “求則得之, 舍則失之, 是 求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 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 孟子曰, “萬 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

이 인용문의 내용은 ‘군자’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운명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스 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들이라고 보인다.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혹은 운명의 때를 기다리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할 바를 다 해야 한다는 내용 으로, 이는 ‘궁달이시’에 보이는 천인지분(天人之分)의 사상, 즉, “현달(顯達)의 때 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하늘의 몫이다. 인간의 행동으로 달할 수 없다(遇不遇, 天也. 動非為達也)”라는 생각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고대의 사 상가들은 위의 맹자의 발언과 같이 ‘시적 표현’으로 운명과 인간의 불합치, 즉 ‘궁 박한 운명의 군자’를 아름답게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은유와 역설이 많이 담긴 고대의 사상을 다루면서, 같은 학파의 모든 표현이 마치 수학 공식과 같이 논리적으로 합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한 주장일 수 밖에 없다. 곽점초간의 성자명출(性自命出)에 대해서는 사맹학파의 저작으로 인정하는 학자가 상당히 많다.

멍페이위엔(蒙培元)은 성자명출(性自命出)이 자사(子思)의 저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폈다.25)

이런 주장에서 더 나아가서, 치엔통셩(陈 桐生) 같은 이는, 곽점초간의 성자명출(性自命出)과 어총(語叢) 등과, 상해박 물관 초간(楚簡) 중의 공자시론(孔子詩論)이,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시와 음악 의 예술적 본질과 함께 인성론을 깊이있게 검토하던 중에 나온 문헌이라고 발표 하기도 했다.26)

25) 蒙培元, “性自命出的思想特征及其与思孟学派的关系”, 『甘肃社会科学, 哲學』, 2008年第 2期, p43.

26) 陈桐生, “从战国初期儒家人性论思潮看孔子诗论价值”, 湖北大学学报( 哲学社会科学版) 第33卷 第1期, p75.

치엔통셩(陈桐生)의 의견을 따른다면, 성선설은 개인적 경험에 기 초한 의견으로서가 아니라, 장구한 시간을 걸쳐 축적된 ‘인간’에 대한 자료인 시 경(詩經)에 대한 초기 유가들의 정밀한 연구의 결과물로서 창출되었다는 관점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곽점초간에서 발견한 초기 유가의 경향성인 ‘정(精) 중심주의’의 의미를 중시하 는 팡포우의 취지를 따르는 학자는 최근까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중국 학계에 서는 하나의 통념이 되어가고 있는 경향성조차도 보인다.

그 예를 더 들자면, 인 정(人情)을 중시하면서 그 본질을 보여주는 논어, 맹자 등을 비롯한 여러 문헌의 기록들을 거론하면서, 동시에 곽점초간의 ‘정(情)’ 중심의 내용을 옹위하고, 공자 의 '인학(仁學)'은 사람의 마음 속에 내재된 진성정이 드러나는 그런 ‘질박함(質)’ 을 숭상하는 심오한 사유의 확장에 치중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탄쫑츠엉(譚忠 誠)과 같은 학자도 있다.27)

27) 譚忠誠, “郭店儒簡的重‘情’論”, 『北京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第48卷 第5期(2011年9 月), pp20-23.

곽점초간(郭店楚簡)에 보이는 정(情)의 본래적 의미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관찰된다.

곽점초간(郭店楚簡)에 보이는 정(情)의 본 래적 의미는 학자들의 논쟁 속에서보다도 오히려 우리 일상생활 속에 쓰이는 말 (한국어) 속에도 그대로 녹아들어 남아 있다고 보이는 점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정스럽다.’, ‘정없다’. ‘정많다’, ‘정겹다’, ‘다정하다’, ‘무정하다’, ‘몰 인정’, ‘인정상 ~할 수 없다’ 등의 쓰임새 등, 많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Ⅳ. 맹자 성선설의 원천인 ‘백성의 선(善)에 대한 애호’

맹자는 자사(子思)를 비롯한 사맹학파의 선배 격에 속하는 학자들로부터 공자 학단의 정통적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한 사람이다.

맹자가 국인(國人)들 간의 정감을 논하던 선배 유가들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서 보편적인 인류애까지 언급하 기에 이르른 것이 맹자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관점과 관심의 보편성은 아마도 다른 학자나 학파, 특히 묵가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상대 학파와 반대되 는 학설을 주장하면서도 상대학파의 입장이나 이론을 이용하는 것은 전국시대에 이미 일반화된 학문과 논쟁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맹자의 내용으로 볼 때, 맹자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급진 적인 정치성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맹자의 사상적 특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위민주의자(爲民主義者)’로서의 의지가 부각되며, 정전제(井田制)와 군주의 무한 책임론 등 정치성이 매우 강한 내용도 있다는 것 을 예로 들 수 있다.

맹자에 등장하는 요순시대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한비자의 평가처럼 시대에 맞지 않는 우무지학(愚誣之學)으로만 여긴다면 그 요점을 놓칠 수 있다.

맹자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정치의 이상을 말한 것이다.

즉, 요(堯), 순(舜), 우(禹)에 의해 서 추진된, 원래 저습지와 밀림이었던 황하유역을 농경지로 변화시킨 치수와 농 경지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시대 당시에도 실현 가능한 위민정치의 모범이라 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맹자가 위민주의(爲民主義)를 관철시키기 위해 제 선왕(齊 宣王) 등 군주들을 설득시키는데 있어서, 성선설을 설득의 수단으로 동원한 정황도 맹자 속에 더러 보인다.

맹자의 성선설 주장 중 다음과 같은 강론이 있다.

“측은지심은 사람마다 다 갖고 있고,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도 사람이면 모두 다 갖고 있다. 측은지심은 인(仁)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이고, 공경지 심은 예(禮)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외부로부터 나에게 침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나에게 원래부터 있던 것이나, 그 심정을 떠올리 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구하면 얻을 것이고, 내버려 두면 잃어버 린다’라 했다. 혹자 간에는 (인의예지의 정도가) 배나 다섯 배 정도에 그칠 것이나, (실제로 나타냄이 비정상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는 자는 그 타고난 것을 다하지 못 하는 것일 뿐이다. 시(詩)에 말하기를 ‘하늘이 만민을 내시니 인물이 있으면 그 이치도 있나니, 백성의 통상적인 성향은 아름다운 도덕을 좋아하는 것이다’라 했다. 공자가 이에 대해, “이 시를 지은이는 도를 아는 사람이다. 인물이 있으면 반드시 그 이치도 있다. 백성의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이면 비슷하게 갖고 있는 선량한) 마 음가짐이 있으니, 그러므로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 것이라 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 겼다.”28)

위의 인용문은 맹자의 성선설의 유래에 대한 대표적인 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강론에서 인용한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증민(蒸民)’에서의 내용은 하늘 이 내려준 자연스런 천성(어진 마음)을 본보기로 삼는 것을 말하며,29) 맹자가 인 용한 공자의 해석도 이와 유사한 의미로 생각된다.

28) 孟子, ‘告子上’ : 惻隱之心,人皆有之;羞惡之心,人皆有之;恭敬之心,人皆有之;是非 之心,人皆有之。惻隱之心,仁也;羞惡之心,義也;恭敬之心,禮也;是非之心,智也。仁義 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故曰:『求則得之,舍則失之。』或相倍蓰而無算 者,不能盡其才者也。《詩》曰:『天生蒸民,有物有則。民之秉夷,好是懿德。』孔子曰:『為此 詩者,其知道乎!故有物必有則,民之秉夷也,故好是懿德。』

29) 韓詩外傳, ‘大雅’ 曰:「天生蒸民,有物有則。民之秉彝,好是懿德。」言民之秉德以則天 也。不知所以則天,又焉得為君子乎!

 

특히 주의할 만한 것은, 여기 서 맹자 속에 등장한 공자가 특별히 “백성이 좋아하는 바에 연고한 것이 미덕 이다”라고 하여, 백성의 ‘선량함’에 대한 선호도(選好度)로서 윤리적인 미덕의 기 초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타오 리홍(陶麗紅)은 맹자가 성선론을 이용하여 군주들이 위민정치를 하도록 고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30)

30) 陶麗紅, “孟子的貴民思想”, 『黑龍江教育學院學報』, 2012年 8月, 第31卷第8期, pp109~110.

이는 군주의 마음 속에 있는 측은지심 등 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이용하여 위민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맹자 속의 ‘양혜왕상편(梁惠王上篇)에 있는 제선왕과의 대화 내용 등을 염두에 둔 주장일 것 이다.

타오 리홍(陶麗紅)은 그래서 이같은 맹자의 위민사상의 체현으로서의 위민 정치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군주가 민생을 중시하고, 불의한 전쟁을 피하게 만들 며, 백성의 의견을 존중케 하며,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실현케 하는 것 등을 들고 있다

. 그러나 맹자를 전체적으로 볼 때, 특히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백성의 ‘선량함’에 대한 선호도(選好度)에 대한 관심 환기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맹자 가 성선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성선(性善)의 존재의의 를 탐구한 흔적이 보인다.

즉, 성선의 개념으로 군주를 설득하여 위민정치를 실현 시키기 위한 정치수사적인 수단으로만 쓰였다고 볼 수 없는, 보편적 성선(性善)의 근원성을 탐구한 점도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의 성선설은 그 자체만 으로서의 사상적 가치를 갖는 것이며, 더구나 ’민중 기원설‘에 입각하여, 보다 근 원적인 면모도 갖추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상적 보편성이 확보된 때문에, 맹자의 성선설은 맹자 시대에는 물론이고, 그 후의 유가사상의 중심이 되어 왔고, 현대와 미래에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유가사상의 가치와 의의를 높이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맹자는 노(魯)나라에 인접한 조그만 소국이었던 추(鄒)나라의 서민 출신이었으 며, 유가의 학문을 연마하여 제 선왕 등의 당대의 군주들에게 유세한 바가 있고, 일시적으로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은 적도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누리지는 못 하고 결국 서민층을 상대하는 교육의 장으로 퇴진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서민층 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관점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맹자에게는 ’민중 기원설‘의 성선설적 주장이 자연스러웠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맹자는 자유를 중시한 경향도 있었다.

자의 자유 지향성의 한 예로서, 다음 의 인용문을 들 수 있는데, 이 인용문에서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의리에 의해서 엮어지는 것이라는 맹자의 의견이 강하게 피력되어 있다.

즉, 군주가 신하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군주는 신하에게 일방적 충성심을 요구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설명한 맹자의 신랄한 논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맹자가 제선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마치 수족(手足)처 럼 하면, 신하는 군주를 보기를 마치 복심(腹心)처럼 하며,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마 치 견마(犬馬)처럼 하면, 신하는 군주를 보기를 마치 이웃 사람처럼 하고, 군주가 신 하를 보기를 마치 토개(土芥)처럼 하면, 신하는 군주 보기를 마치 원수처럼 합니다.” 왕이 말하기를, “예(禮)에, 죽은 군주를 위해서 복(服 : 喪服)을 입는다고 하는데, 어 떻게 하여야 가히 복을 입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 대답하길, “간(諫)하면 그것 을 행하고, 말하면 그것을 들어서, 그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신 하가) 연고가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면, 군주가 사람을 시켜서 인도하여 국경을 나가 게 하고, 그 가는 곳을 먼저 주선해 줍니다. 떠나고 나서 삼 년을 돌아오지 않은 후에 야 그 토지와 거소를 거두어 들입니다. 이것을 말해서 세 가지의 예(禮)가 있다고 하 는 것입니다. 이같이 해야, 복을 입는 것입니다. 오늘날 (군주들은) 신하를 대우하기 를, 간하면 행하지 않고, 말해도 듣지 않고, 혜택이 백성에게 내려가지도 않습니다. 연고가 있어서 나라를 떠나려고 하면, 군주가 잡아서 억류시키고, 그 신하가 가려고 하는 나라에, (공작하여) 훼방을 놓습니다. 그리고 그 떠나는 날로 그 토지와 거소를 거두어 들입니다. 이는 바로 원수라고 할만도 한데, 원수에게 무슨 복이 있겠습니 까?”31)

31) <孟子>, ‘이루 하’, 孟子告齊宣王曰:「君之視臣如手足,則臣視君如腹心;君之視臣如犬 馬,則臣視君如國人;君之視臣如土芥,則臣視君如寇讎。」 王曰:「禮,為舊君有服,何如斯 可為服矣?」 曰:「諫行言聽,膏澤下於民;有故而去,則君使人導之出疆,又先於其所往;去 三年不反,然後收其田里。此之謂三有禮焉。如此,則為之服矣。今也為臣。諫則不行,言則不 聽;膏澤不下於民;有故而去,則君搏執之,又極之於其所往;去之日,遂收其田里。此之謂寇 讎。寇讎何服之有?」

이 인용문에서는 군주의 신하에 대한 대우에 상응해서, 신하의 군주에 대한 대 우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상당한 정도의 자유 지향적 신권(臣權)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인 특성상으로도 맹자의 시대는 작은 제후국들도 생존을 지속하면서 자 기 주장을 거침없이 펴던 시대였다. 다시 말해서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수많은 제 후국이 분립하며 존립 자체를 위협받지는 않던 전국시대 중기로, 전국 후기와 비 교하면 상대적으로 평화기였다고 보인다.

맹자는 노(魯)나라 주변의 작은 소국에 불과했던 추(鄒)나라 출신이었으며, 추(鄒)나라가 맹자 생전에, 상대적으로 큰 나 라였던 노(魯)나라와 소규모 전쟁을 벌인 일이 <맹자>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설적으로 당시의 평화적 정세를 짐작하 게 해 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추나라와 노나라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추나라의 목공이 묻기를 “내가 거느리는 유사 중 죽은 자가 33인이나 되는데, 백성 중에서는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벌하려니 너무 많은 숫자이고, 벌하지 않으려니 그 장상(長上)이 죽는 데 구하지 않은 것이 너무 괘씸하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맹자가 대답하기를, “흉년의 기아가 있던 시절에 군주의(추나라의) 백성이, 늙고 약한 자는 구덩이에 쓰러지고, 장년층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자가 천 명 가까이나 되었는데도, 군주의 창고는 식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유사(長上) 중에 이런 상황을 보고한 자가 없었는데, 이는 윗사 람(군주)에게 태만하고, 아랫사람(백성)에게 잔학(殘虐)한 것이었습니다. 증자가 말하 기를, ‘경계할지어다.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로 돌아오리라!’라 했습니다. 백성 들이 오늘날에 와서야 그들의(유사들의) 잔학함의 댓가를 돌려줄 기회를 얻었을 뿐입 니다. 군주는 근심하시지 마십시요. 군주께서 인정(仁政)을 행하시면 백성이 그 윗사 람과 친할 것이고, 그 윗사람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라 했다.32)

이 기록에서도 맹자의 위민주의적 정치관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맹자의 주장 에서 나타나는 것은 민중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이며, 더 나아가 잘못된 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항의할 수 있는 민중의 행동 차원의 수단을 인정해야 한다는, 민중의 편에 선 생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적 ‘자유주 의’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맹자가 ‘자유 지향적 민중주의자’로 일컬어질 만큼의 일관된 사상을 펼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 갇힌 점도 역시 발 견된다.

‘민중에 기원한 성선설’이란 원초적인 이념은 맹자 본인에게 있어서도 일 관되지 못한 것이 다음의 발언에서와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맹자 왈, “행하면서도 잘 드러나지 않고, 습관이 되었으면서도 살피지 못하는 것 으로, 종신(終身)토록 그에 연유하면서도 그 도(道)를 모르는 자들은 민중(民衆)들이 다.”33)

32) 孟子, ‘梁惠王 下’ : 鄒與魯鬨。穆公問曰:「吾有司死者三十三人,而民莫之死也。誅之, 則不可勝誅;不誅,則疾視其長上之死而不救,如之何則可也?」 孟子對曰:「凶年饑歲,君之 民老弱轉乎溝壑,壯者散而之四方者,幾千人矣;而君之倉廩實,府庫充,有司莫以告,是上慢 而殘下也。曾子曰:『戒之戒之!出乎爾者,反乎爾者也。』 夫民今而後得反之也。君無尤焉。 君行仁政,斯民親其上、死其長矣。」

33) <孟子>, ‘盡心上’ : 孟子曰, “行之而不著焉, 習矣而不察焉, 終身由之而不知其道者, 衆也.”

맹자가 보는 민중은 그 성선(性善)의 이유와 근원 즉, 도(道)를 모르면서도 그 것을 실천하는 보통 사람들이며, 민중과 대조되는, 그 마음을 다하는 군자는 성 (性)과 명(命)을 잘 살펴서 그 도(道)를 깨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맹자가 민중 중심의 이론가라기보다는 민중을 어리석다고 보고, 성인 군자를 존중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의 사상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막연하게 민중에 선(善)의 근거를 두는 것은 관념적 이상론일 경우 도 많으며,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시각에서 볼 때는, 맹자속에서 불완전하게 언급된 민중 중심의 이념도 어디까지나 이념 상의 설정이나 정치적 수사일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맹자가 민중의 일반적 성향 에서 성선설을 도출했다는 것을 확정할 만큼 그가 민중 중심의 사상을 가졌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가 민중의 ‘선량한 마음’을 공자의 말을 인용하 는 형식을 통해 언급했다는 점에서와, 나아가 성선(性善)의 민중 기원설을 비교적 정연하게 논리화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유 지향성과 성선설을 결부시킬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사적 중요성은 크다.

그리고 이에 연유한 맹 자의 성선설의 이념적 가치는 물론 실용적 가치도 크다.

실제로, 민중이 선량하다는 성선설은 증명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 효용은 참 으로 큰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성선설은 인간의 악한 행동을 ‘인간의 본성상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악한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를 찾고, 그 근원적 해결 책을 찾도록 노력하는 사회 분위기를 창출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또한 더 나 아가 계층이나 출신 국가나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 상대방의 선의를 전제 한 신뢰에 기초한 만남을 시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면도 있다.

이런 점에 서 성선설은 실로 보편적 자유주의가 존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성선설에 기초한 ‘신뢰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인간 일 반에게 선의가 악의에 앞서느냐, 악의가 선의에 우선하느냐의 문제는 실제 생활 속에서 오히려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마 음이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에서의, 성선설적 선량함에 대한 신뢰가 없는 가운데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것만큼 서글픈 상황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무신뢰(無信 賴) 사회에서의 상호 인간 관계의 부담과 비용은 (신뢰 사회에 비해서)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면에서 봐도, 성선론자 인가 성악론자인가에 따라서 각 개인이 세계인을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다를 것 이다.

성악론자에 비해서 성선론자는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할 때도, 보다 자유롭고 열린 마음에서 인간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 가 성선론자와 성악론자의 입장이 각각 반영될 경우, 실제상 현실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큰 것으로 보인다. 즉, 성선론자가 득세하면 자유주의적 체제가 구축될 가 능성이 크며, 성악론자가 득세하면 전제주의적 체제가 구축될 가능성이 큰 것으 로 보이는 것이다.

Ⅴ. 결론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 중에서, 성선설을 기탄없이 주장하면서 인 성(人性)의 본질적인 면에 대하여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대표적인 사상가로 맹자를 들 수 있다.

북송의 학자 정이(程頤)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극찬한 바 있다.

곧, 맹자가 사상사적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그것은 바로 성선설이며, 성선 설과 양기론(養氣論)은 맹자의 독창적인 이론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34)

34) 朱熹, 四書集注, ‘孟子序說’, 程子曰:“孟子有大功於世,以其言性善也.”, 又曰:“孟子性 善、養氣之論,皆前聖所未發.”

그러 나 오늘날 출토 유물의 뒷받침을 받는 현대 중국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성선설 이 맹자의 창작이라기보다는 공맹지간에 서서히 익어간 사상적 성과물이라는 의견이 많다.

어쨌든, 성선설은 전통적으로 유가사상의 중심 축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현대 인에게도 나름의 실용적 가치가 있다. 자유주의적 경향의 유가사상을 뒷받침하는 성선설의 현대적 효용이 발견되는 바, 정감이 고갈되어 간다고 진단되는 현대의 세계인들에게 정감의 회복이라는 지향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사 상계를 풍미하는 논리적인 학문체계에만 의존하는 논리실증주의자나 혹은 그 대 척점에 있는 실존주의자 등에 의한 냉철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보다도, 오히 려 원형적으로 더욱 호소력이 있는 것은 간이직재(簡易直裁)한 성선설일 수도 있 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서, 정감에 근원한 인간에 대한 신뢰감의 기초가 될 수 있 는 성선설의 호소력은 현대인에게도 엄연히 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대적 의미 의 자유주의에도 그 존립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인간, 특히 타인의 선량함의 문제, 곧 도덕성의 문제는 생존 및 지속가능성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런 도덕성 중시의 경향성은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첨예하기 마련이지만, 집단과 개 인, 또는 집단과 집단의 관계에서도 그 의미가 매우 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치나 국제관계의 영역에서도 도덕성의 문제가 첨예한 대립의 중심 쟁 점으로 부각되기 일쑤인 것이다.

이같이 도덕성의 문제는 실로 인류의 생존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본질적 문 제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 문물이 보편화된 오늘날의 세계 속에서, 본래적 유가 정신으로서의 성선설이 체현된 흔적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는 한국인의 존재 의의는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인들이 한국의 효 문화를 듣고는 감 동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그 흔적이 남아있는 유교적 문화는 미래 세대에게 있어서 부담이 아니라 든든한 자산이 될 수도 있다.

대중적 통념과는 반대로 유교 문화가 전제주의보다는 자유주의와 더 가까운 것을 인식하면 미래 세대의 유교 문화에의 접근도 한결 쉬워질 것이다.

유교문명의 적자(嫡子)들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친화력만 좀 더 기르면, 선량하고 남을 해치지 않으며 속정이 깊은 유교적인 속성을 보유한 한국인에 대 한 직관적인(다르게 말한다면 인간화된 본능이라는 의미에서 본능적인), 세계인 들의 큰 기대가 한국인들에게 잠재적인 자산이 될 수도 있다.

즉, ‘성선설’이 구현 된 자유로운 국가로서의 한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높은 평가 내지는 인식은, 앞으 로도 한국인들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황을 국가적 전략으로 이용할 필요도 있으며, 이런 전략 하에서의 교육이나 문화정책도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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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Relationship between Liberal Tendency of Early Confucianism and Theory of Goodness of Men Son, Tae-Ho (Pusan Univ.)

A considerable number of modern Chinese scholars believe that ‘the theory of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is not the creation of Mencius, but rather an ideological achievement that was slowly ripened in the middle of Confucius and Mencius's era. It seems that the early Confucianism came up with ‘the theory of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to allow the monarchs of the time some freedom of the subjects and the people. It is possible that ‘the theory of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was presented as an ideological prerequisite for securing freedom. For human society, the issue of humanity, especially the issue of morality, is inevitably a very important issue because it is directly connected to survival. This tendency to value morality is bound to be sharp in relations between individuals, but it can also be very significant in relations between groups and individuals, or between groups and groups. For this reason, even in the realm of realistic politics and international relations, the issue of morality often emerges as a central issue of sharp confrontation. ‘Theory of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have been traditionally formed the central axis of Confucianism, and it has its own practical value for modern people. That is to say the modern utility of liberal Confucianism is found. It seems that ‘theory of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is more appealing to modern world people who are diagnosed to have exhausted their sense of affection, in the way of thinking that relies on a logical positivism or the cold-headed perception of humans and the world by existentialism. The appeal of the humanism-based way of thinking, which is the basis of trust in humans, is thought to work for modern people, and is regarded as a theory that can provide the basis for its existence in liberalism in the modern sense. In this sense, Mencius's theory that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which refers to the good will of the people, is not without ideological value as well as practical value. In fact, it may not be easy to prove that the people are good, but its utility seems to be great. Even today, ‘the theory that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can be a driving force to create a social atmosphere that does not take human evil behavior as "natural in human nature", and take to find fundamental motivations for finding solutions. Furthermore, it also makes possible for anyone, regardless of class, country of origin, or race, to start a trust-based meetings.

Key Words : Confucius, human goodness, Mencius, Warring States Period, Confucianism

투고일 : 2024년 3월 15일 심사일 : 2024년 4월 15일 게재결정일 : 2024년 4월 25일

새한철학회 철학논총 제116집ㆍ2024ㆍ제2권